1.
베란다에 올려놓은 애호박을 슬쩍 보니 빛깔이 많이도 눅눅해졌기에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늙은이 뱃가죽처럼 힘알이가 없고, 조금은 늘어져서 물렁거렸다. 아무래도 호박과실파리 애벌레가 들어 있을 성싶어서 부엌칼로 배를 갈랐다. 호박씨앗이 있는 부위가 썩고 있었다. 역시나다. 애벌레가 득실벅실거렸다. 호박을 따 온 지가 불과 일주일이 살짝 지났는데도 어느새 애벌레가 이렇게 빨리 자라서 호박속을 파 먹을 줄이야 예상도 못했다. 그저께나 어제에 손을 봤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든다. 무척이나 빠르게 애벌레가 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니 이런 것도 큰 배움인가 싶다.
애 써 키운 애호박 속에 벌레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벌레 먹은 부위를 썩썩 썰었다.
능정거리는 호박씨앗 부근에서 노리끼리한 애벌레 여러 마리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살아 있다. 기운이 왕성하다. 꼬무락거리는 애벌레를 들여다보면서, 속을 발라내면서 징그럽다는 느낌을 애써 외면해야 했다. 농약을 전혀 치지 않았기에 이런 상태로 호박농사를 지은 게 내 책임이기에 더욱 그랬다.
능정거리고 물렁거리는 설익은 씨앗 부위를 도려낸 뒤에 음식쓰레기 비닐봉투에 쏟아부었다. 봉투가 작다고 해도 한 개 반이나 된다.
덜 상한 부위는 과도로 다듬고, 수돗가에 씻은 뒤 물이 빠지도록 채반에 건져 놓았다. 물이 빠지면 냉동고에 넣어서 보관했다가 때때로 꺼내서 호박국으로 끓여 먹으면 시골냄새를 또 느낄 게다.
고층 아파트 벽 틈새로 햇볕이 잠깐만 드는 아파트 베란다 위에는 애호박 수준을 살짝 넘고, 덜 익은 애호박이 이십 통 쯤이 있다. 검푸른 겉을 손가락으로 눌렀더니 제법 딱딱딱하고 튼실하다. 시곹 텃밭에서 꼭지를 잘라서 서울 가져온 지가 일주일이 넘었으니 수분이 말랐다는 듯이 겉이 약간 물렁거려도 제법 딱딱하니 아직은 벌레 먹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진짜는 모르겠다. 속에서 애벌레가 크고 있는지는 날마다 며칠간 더 살펴보아야 할 게다.
올해 나는 호박농사를 실패했다.
이른 봄철, 서울에서 오래 머물렀기에 늦봄에서야 시골로 내려갔다. 호박씨를 늦게서야 흙에 묻었기에 모종도 늦봄에서야 옮겨 심었다. 심은 뒤에서 또 서울에서 오랫 동안 머물렀더니만 텃밭은 키가 웃자라는 바랭이, 강아지풀 등 잡초가 무성해서 키 작은 호박모종을 덮어버려 햇볕을 차단했다. 햇볕싸움, 물싸움, 바람싸움, 흙싸움, 양분싸움 등 여러 싸움에서 모조리 진 호박 모종은 거의 사라지고, 살아 있다고 해도 비실거렸다. 특히나 올 초여름의 오랜 가뭄 탓으로 그 잘난 모종은 제대로 크지도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호박넝쿨은 무척이나 약하게 자랐는데다가 호박벌의 활동도 드물었는지 애호박이 별로 열리지 않았다. 여기에다가 호박과실파리벌레까지 설쳤으니 농사는 애시당초부터 다 글렀다.
왜 파리는 극성했을까? 똥구녁에 있는 침으로 애호박 겉을 찔러서 알을 까는 쇠파리의 세상이었을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오래 비워둔 텃밭, 농약을 전혀 치지 않고, 농사 짓는 요령도 모르는 엉터리 농사꾼을 얏보았을 게다. 벌레도 깔보는 농사꾼이 된 내가 무척이나 그렇다.
나는 2012년에는 지방농업기술센터에서 단기교육을 받았고, 2013년에는 1년짜리 귀농귀촌 농업교육을 받은 터라서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한다. 비료도 없고, 농약(제초제, 살균살충제), 촉성제나 착색제 등도 치지 않는다. 그냥 내 경험대로, 팔다리 근력만 보태서 짓는 농사이기에 작황은 늘 못생기고, 작고, 벌레 파 먹은 흔적이 역역하고, 수확량도 보잘 것없다.
친환경농법, 자연농법이 과연 합당한가를 따지면 나조차도 고개를 사뭇 흔든다. 단 돈 100원어치도 팔지 않고, 남한테도 별로 나눠주지 않는 소량생산자한테나 가능한 것이나 대량생산하거나 남한테 선물하는 경우라면 현실적으로이런 농법은 불가능하다. 나처럼 혼자, 가족끼리 먹을 때에나 가능한 농법이다.
그런데도 시중에는 친환경 운운하면서 파는 농산물이 대부분이다. 100% 자연농법으로 농사 짓는 나는 그냥 웃을 뿐이다. 속는 사람이 멍청한 것이지, 그런 걸 다 믿냐? 내 느낌에는 1%도 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친환경으로 농사 짓자는 논리는 아니다. 벌레의 극성, 잡초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이나 주장할 일이다. 만약 그렇게 하면 폐농에 가까운 결과로 사 먹는 사람들은 굶어죽기 십상이다. 어느 정도껏은 농약도 쳐야 수확이 가능한 게 농작물이다.
하나의 예다. 농약을 안 치는 나는 땅에 떨어진 모과 열댓 개를 텃밭에서 주웠다. 아쉽게도 모조리 벌레 먹었기에 상품가치는 0%. 며칠간만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그런대로 봐주겠지만 식용하는 기준으로서는 100% 실패이다. 모과꽃이 피었을 때 꽃에 농약을 살짝 뿌렸어야 이치가 맞다.
또 하나의 예.
시골 텃밭에서 모조리 따 온 애호박. 거둬들인 지가 여드레나 아흐레에 지나지도 않는데도 애벌레 투성이고, 성한 것은 몇 개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일전, 아내는 이웃한테 나눠주면서 '속에서 애벌레가 나올 수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라는 말을 먼저 했을 게다. 그만큼 벌레 먹은 애호박이었다.
오늘로서 서울 온 지 이레째.
내가 아무리 건달농사꾼, 엉터리농사꾼이라고 해도 마음은 시골에 내려가 있다. 가을 김장채소인 무, 쪽파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하다. 무(무우, 무수)라고 해야 조금뿐이다. 김장채소는 8월 중순에 씨 뿌리고, 9월 초순에 모종해야 하는데도 나는 서울에서 오래 머물렀기에 배추는 모종 한 포기도 심지 못한 채 시기를 놓쳤다.
올 11월 중순 말에 시향(시제) 지내려고 시골 내려가서는 무, 쪽파, 감자, 돼지감자, 석잠풀(초석잠) 등을 조금이나마 거둬야겠다. 그 무렵이면 무, 감자는 땅속에서도 냉해를 입을런지도 모르겠다. 살짝 얼어도 소량이기에 먹을 수 있다.
나는 못난 사람이라서 그럴까? 늘 지기만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기에 멧돼지, 고라니가 내려와서 밭고랑을 뒤엎고, 작물을 뜯어 먹고, 농약을 전혀 안 치니 잡초도 많이 번지고, 애벌레도 득실거려서 작물은 늘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속상한 일이 어디 한두가지이랴 싶다.
시골에 있다면 지금쯤 이 시간대에는 정신없이 텃밭에서 일할 게다. 서걱거리는 억새도 베어내고, 밭 세 자리에 밀식된 과일나무의 곁가지를 전정하고, 밑둥에 곁가지가 제법 많이 번질 파라칸사, 명자나무, 탱자나무, 헛개나무, 삼색버드나무, 무화과, 이팝나무, 연산홍, 회화나무, 쥐똥나무, 산초나무 등도 캐서 포기 나누거나 이식하고 있을 게다. 화초와 부추밭 두둑도 호미질을 할 게다. 일은 엄청나게 몰려 있을 게다.
몇 년 방치한 결과로 억새밭이 되어버린 야랫밭에서 뿌리를 캐내고는 그 자리에 심을 밤나무 묘목 구덩이도 파서 내년을 준비해 둘 게다. 야랫집 뒤 시누대 담장에서 대뿌리가 번지지 않도록 또 예초기로 대나무를 잘라내고, 괭이로 댓뿌리를 캐고 있을 게다.
야랫집 중늙은이는 예순일곱 살인데도 죽었다 . 어린 시절 대전으로 떠났다가 퇴직한 뒤에 혼자서 귀향했기에 아직은 더 살만한데도 올 여름철에 대전 가서 자기네 집에서 죽었단다. 심한 알코홀 중독자인데도 막걸리를 즐겨 마시더니만...
그가 죽었으니그가 개보수한 집은 또다시 빈 집이다. 빈 집 뒤켠에 있는 시누대 울타리를 누가 관리할까? 이웃인 내 텃으로 뿌리가 더욱 많이 번지기에 내 일거리만 늘어나게 생겼다. 나도 거의 다 서울에서 머무는데...
내가 텃밭농사에 실패해도 아내는 걱정없이 11월 하순에 아랫녘에서 택배되는 배추로 김장할 예정이다.
돈 주고 사 먹는 재미가 솔솔하겠지만 무직자인 나, 가장인 나로서는 그렇다. 그게 다 돈이고, 농사도 지지리 못짓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꼬라지이기에 더욱 그렇다.
내가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데에는 핑계가 많다.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면 아내는 무슨 핑계가 많은지 금세 서울로 도로 올라가려고 했으며, 올 가을에도 배추모종을 사다가 심을 시기를 놓쳤다. 내가 농사 잘 짓지 못하는 원인과 핑계로 늙은 아내를 들먹거리는 게 무척이나 안됐다.
몇 해 전, 지방농업기술센터에서 1년짜리 귀농귀촌 농업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귀농이 아닌 귀촌이거나 귀향하는 사람들은 농사를 실패해도 된다. 모두가 농사를 잘 짓는다면 정작 농사를 지어서 농작물을 팔아야 하는 농민(어민, 산촌인 등)은 굶어죽기 십상이다. 도시에서 내려온 농사꾼은 돈 버는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돈 쓰는 재미로 농사 지어야 한다. 묘목과 모종도 사야 하니까...'
아마도 맞는 말이다. 농사에 관심 갖는 사람 모두가 농사를 제대로, 정말로 잘 지으면 진짜 농사꾼은 팔아야 할 작물을 제때에 팔지 못해서 그득하게 쌓았다가 결국에는 다 썩히는 꼬라지가 될 것이다. 귀촌하거나 귀향하는 사람은 농사짓는 체를 해야 한다. 실패를 통해서 '농사가 이런 거였어? 농사 짓는 게 이렇게 힘 드는 거여?' 하면서 또다른 사실을 배우는 수업료로 만족했으면 싶다. 작물 가꾸는 취미와 재미는 별도의 수확이 될 것이다.
나도 그렇다. 비록 시골 농촌태생이라고 하나 대전 서울에서 수십 년 넘게 살았으니 내가 아는 농사란 그냥 건성이다. 입(주둥이)으로 농사 짓는 건달농사꾼이고, 엉터리농사꾼이고, 사이비농사꾼이다. 나한테는 농사가 생업이 아니고 취미와 재미이기에 조금은 실패해도 괜찮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늘 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더러는 성공하는 경우도 이따금 있게 마련이다.
하나의 예다. 아파트 비좁은 베란다 위에는 외국 다육식물인 '알로에 베라' 화분이 열 개도 넘는다.
일전 시골 앞마당에서 키우던 여덟 개를 차에 실고 서울로 올라왔기에 베란다가 온통 다육식물로 그득 찼다. 알로에는 다육식물이라서 화분이 크고, 적당히 물만 주면 저절로 큰다. 새끼도 쳐서 증식시키에도 아주 적합하다. 게으른 농사꾼처럼 관심을 두지 않으면 오히려 성공할 수 있는 작물이다. 왜냐하면 식물은 관심을 지나치게 가지면 죽이게 마련이다. 물을 많이 뿌려주면 뿌리가 숨이 막혀서 질식사한다는 뜻이다. 겨울철 얼어죽지 않도록만 해 주면 너끈히 재배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건달농사꾼, 농사에 실패하는 엉터리라도 이 알로에만큼은 자신있게 성공한다고 말한다.
이런 작물이 더러 더러 있기에 농사는 취미, 재미로 짓게 마련이다.
2.
농업, 산림, 산야초에 관한 책들은 거의 다 시골집에 있다.
서울 내 책꽂이에는 귀농귀촌 관련 책이 적다.
별 수 없다. 황대권 씨의 '야생초 편지' 산문집을 꺼내서 보아야겠다. 야생초 편지는 교도소 안에서 손바닥만한 텃밭농사를 눈치껏 짓는다는 내용이다. 여러 차례나 읽는데도 늘 신선하다. 글맛이 좋다는 뜻이다. 제목이 좋기에 산꽃 들풀에 관한 산문 두어 개를 읽으면서 도시생활에 지쳐가는 나를 달래야겠다.
해가 또 발끈댄다.
오후라서 그럴까? 잠실 석촌호수로 나가서 잠깐이나마 가을햇볕을 쐬야겠다.
차가운 벤취 위에 걸터 앉아서 바둑, 장기 두는 노인네들 틈에서 잠깐이라도 구경꾼이 되어야겠다.
도시에서 살자면 별 수 없이 도시건달이 되어야 할 터. 할 일이 없어서 벌건 대낮인데도 잡기나 두는 꼬라지이라...
시골 같으면 그 나이, 이 시간 대에는 정신없이 일할 게다.
하지만 여기는 특별시이다. 그것도 서울특별시이기에 농사꾼인 나한테는 일할 게 별로 없다.
2017. 11. 6. 월요일.
첫댓글 호박에도 벌레가 생기는 군요
저는 농사를 몰라서요
호박에는 애벌레가 엄청나게 많이 생기지요.
식물에 벌레가 없다? 그거 농약을 숱하게 쳤다는 뜻이지요.
친환경유기농 어쩌구 저쩌구 하는 농산품들은요? 진짜로 친환경은 1%도 안 될 겁니다.
농약 안 치고는 상품가치가 거의 없게 되지요. 뿌리 채소라면 그런대로 굼벵이, 땅강아지들이 덜 파먹지만 땅 위에 나온 잎(잎사귀), 열매는 그냥 벌레한테 내놓은 상태이지요. 벌레 안 먹는 채소가 무엇이 있을까요?
제 시골집에서 홍시를 따다가 지하수로 닦아서 서울 가져왔더니만 물에서 균이 묻어서 홍시가 온통 시큼 털털하네요. 발효되고 있다는 뜻. 쉽게 말하면 썩고 있다는 증거... 농약치면 까딱없는데... 감에다가 착색제나 살균제 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