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는 대로’라는 말이 있다. 일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순리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전북 김제의 마을기업 지평선농부들을 이끄는 허지혜 대표를 보면 이 말이 딱 들어맞는다. 부모님 영향으로 전통 한과 ‘전과’에 관심을 두게 됐고, 혼자서 상품을 만들다 보니 공방을 열 만큼 솜씨가 늘었다.
마침 남편 하상재 공동대표가 생강 농사를 짓고 있어 생강을 자주 접했고, 이것이 지평선농부들의 주력 제품이자 수출 상품인 생강진액 개발로 이어졌다.
직접 재배한 생강으로만 만든 독창적인 레시피로 세계시장을 공략 중인 허지혜 대표를 만났다.
● 집에서 배운 전과의 세계로 첫걸음
전주 집에서 전과 공방을 5년가량 운영했다. 부모님께 배운 전과 만드는 법을 취미로 발전시켜 온라인에 올렸더니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인 것이 계기였다.
허 대표는 “집이 넓어 수업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전과 만드는 솜씨는 남달랐다. 수강생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생강을 활용한 편강 같은 전과를 많이 만들었다.
남편의 영향이 컸다. 허 대표는 “집에서 생강 농사를 지으니 수시로 생강을 집에 가져왔다”며 “생강이 넘쳐나다 보니 다양한 레시피를 편하게 시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평선농부들의 주력 상품은 ‘생강진액’이다. 시작 과정이 흥미롭다. 집에 생강이 많아 착즙기를 사서 직접 짜서 주변에 나눠줬는데, 의외의 반응이 왔다. 매번 공짜로 받는 게 미안하다며 “팔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때까진 허 대표도 웃으며 진액을 나눠주기만 했다.
그러던 중 남편 하상재 대표가 생강 농사를 짓던 김제시로부터 농가 교육 제안을 받았다. 생강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생강청’과 ‘편강’ 만드는 법을 전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허 대표의 주특기였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강의를 마친 뒤 김제시 측에서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교육만 할 게 아니라 직접 제조해보는 건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자체 창업지원 프로그램도 연결해줬다. 그때가 2019년 연말, 코로나 팬데믹 직전이었다. 지원금 5,000만 원으로 창업을 결심한 해이기도 하다.
● 지자체 지원금으로 제조업 도전
허 대표는 상품 개발에는 자신 있었다. 집에서 수없이 생강청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만만치 않았다. 대량생산을 위해 모래 제거를 위한 탈피기 그리고 공장용 착즙기·가열기 등을 구매하니 지원금이 순식간에 소진됐다.
나머지는 허 대표 몫이었다. 끓인 진액을 병에 담아야 했다. 이른바 ‘충진’ 작업이다.
당시만 해도 충진기를 살 여유가 없었다. 허 대표는 집중해야 했다. 생강진액 특유의 맛과 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뜨거운 상태에서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병 하나하나에 비커로 직접 담고 뚜껑도 손수 닫았다. 스티커 붙이는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허 대표는 “스티커를 계속 붙이다 보니 속도가 붙었다. 하루 700병 정도는 거뜬히 했다”며 “삐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가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시음용으로 따로 빼놓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 첫 전시회서 1천 병 완판
시장 반응은 어땠을까. 허 대표는 “수요가 공급을 앞질렀다. 한 병 산 고객이 이후 추가로 10병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며 “운 좋게 기업·기관에서 선물용 대량 주문이 쏟아졌다”고 전했다. 판매 첫 주에만 1,500병가량이 나갔다고 덧붙였다.
홍보에도 공을 들였다. 지평선농부들의 핵심 경쟁력은 직접 재배한 생강으로 진액을 만든다는 점. 이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인터넷 블로그를 활용했다.
허 대표는 “블로그에 30명이 들어오면 20명 정도는 제품을 구매했다”고 전했다.
전시회도 활용했다. 처음 참가한 전시회에서 들고 간 1,000병을 모두 팔았다. 놀라운 판매량이었다.
허 대표는 “잘 나가는 업체가 1,000병 준비하라고 해서 그렇게 들고 갔는데, 실제로 다 팔렸다”며 “4일 내내 정신없이 팔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만 유독 잘 팔렸다”고 회상했다. 당시 휴가를 낸 동생과 둘이서 뛰었다.
| ▲지평선농부들은 지난해 수출향 브랜드로 생강(Ginger)과 쥬스를 결합한 ‘진쥬(ginju)’ 브랜드를 개발하고 글로벌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한다. 사진은 지난해 8월 베트남 호치민에서 열린 전시회 회사 부스 모습. [사진=지평선농부들] |
● 지인 한마디에 열린 수출 문
수출 과정도 흥미롭다. 흑삼을 생산해 수출하는 지인이 허 대표의 전과 만드는 노하우를 듣고 흑삼전과 제작을 부탁했다. 도와주다 보니 지인이 “생강즙을 만들면 수출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것.
허 대표는 지인으로부터 “언제까지 사무실에서 택배만 싸 보낼 것이냐”며 수출만의 매력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인과 함께 베트남 전시회에 나가 수출 잠재력을 확인했고 동시에 수출을 위해서는 현지 인증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지평선농부들은 수출기업으로 절차를 하나씩 밟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수출 기회는 2024년 10월 찾아왔다. 전주에서 열린 한상비즈니스 대회에 어렵게 참가했는데 이곳에서 미국 바이어를 만난 것.
미국 인증이 마무리되지 않아 샘플만 제공했는데, 이듬해 수입 주문이 바로 들어왔다. 허 대표는 “2월에 한 팔레트 2000만 원 가까이 주문이 왔고, 다음 달에 ‘현지에서 반응이 좋다’는 말과 함께 약 1억6000만 원어치 추가 주문이 접수됐다”고 말했다.
바이어 측에서는 “기존에 판매되는 생강청에 비해 원료 함량이 높고 향이 짙어 신선한 맛을 준다”는 평가를 전해왔다. 10년 가까이 독창적인 레시피를 연구한 결과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허 대표는 “어디에 수출했다는 플래카드를 달아놓고 싶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이후 일본 시장도 개척했다. 일본에서는 화장품 유통 바이어였는데 일본 전시회에서 시음 후 바로 주문을 넣으며 거래를 텄다.
● ‘ginju’ 브랜드로 세계를 겨냥
지평선농부들은 올해 해외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한다. 미국·일본·중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국가 수출을 위한 인증 절차를 착실히 밟는 중이다.
허 대표는 “우리 제품은 액상이라 마시는 차뿐 아니라 조미료, 하이볼 등 다양하게 활용된다”며 “해외시장이 오히려 기회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이에 맞춰 수출 전용 브랜드 ‘진쥬(ginju)’를 개발했다. 생강의 영문 진저(Ginger)와 쥬스(Juice)의 합성어다. 허 대표는 “생강 음료 하면 ‘진쥬’를 떠올리게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추가 상품 개발도 이어간다. 김제 지역 특산품 생강을 기반으로 한다. 착즙 후 남는 생강 찌꺼기를 활용한 고양이 배변 모래부터 생강 성분을 살린 샴푸·스크럽, 스포츠 크림까지 다양한 신제품을 구상 중이다.
사명 ‘지평선농부들’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 지역 특성을 살렸다. ‘농부들’은 마을기업임을 강조하기 위해 넣었다.
허 대표는 “제가 수출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주변에서 우려가 많았다”며 “이제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 우리 김제 농가들이 생강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일조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준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