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방랑시인 김삿갓
[ * 회귀본능 回歸本能이란?]
후대에 갑자기 나타난 유전인자의 돌연변이를 원래의 순수한 유전인자로 다시 순화 純化시키려는
자정 自淨능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돌연변이는 대부분 열성 劣性 유전인자다.
돌연변이가 진화 進化 과정상 우성 優性으로 정착 定着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자연도태 自然 淘汰되는 경우가 압도적 壓倒的으로 더 많다.
먼저, 외형 外形부터 회귀 回歸한다.
그러니 황인종과 백인종이 교류하면 그 후손은 8할 이상이 백인의 피부색과 체형 體型을 갖춘 외모를 갖고
태어나고, 황인종과 흑인의 2세는 95% 이상 흑인의 외모를 갖는다.
백인과 흑인 사이의 자녀는 90% 이상 흑인의 겉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니 튀르크인들의 집단에 유럽의 현지 現地 백인 몇 명만 무리에 섞여 있다면,
그 무리는 몇 세대 지나지 않아 겉모습은 대부분이 백인화되어 버린다.
만약, 흑인이 그 무리에 합류한다면 그 집단의 외모를 흑인화 시키는 기간은 그 반으로 단축된다.
인류의 종 種으로 따져보면, 흑인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순수하고도 우월한
고유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모는 얼른 보기에는 백인화되었으나, 터키인 아기들 상당수는 엉덩이에
푸른 몽골 반점을 갖고 태어난다.
진하게 흐르는 붉은 핏줄의 흐름을 우리 손으로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다.
한인 漢人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史記를 읽으며, ‘십팔사략’ 十八史略을 펼쳐보면서,
그 화려한 미사여구 美辭麗句와 진실과 허위를 뒤바꾼, 왜곡된 교묘한 서술형 문장에 현혹 眩惑되어,
한족 漢族 장수들의 무용담을 토로하며 존경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흉노를 욕하고 돌궐을 우습게 여겼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그동안 나의 조상님을 조롱하고, 우리의 선배를 하찮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학계 文學界, 비운 悲運의 천재 시인 詩人이 떠오른다.
[ * 김삿갓]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 炳淵’이요,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흔히 ‘김삿갓’
또는 ‘김립 金笠’이라고 부른다. 그의 조상은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의 권력을 휘어잡은 안동 김씨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 益淳이요, 그의 아버지는 안근 安根이다. 그는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부러울 것 없었다. 벼슬이 높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평안도 선천 부사로 있었다. 그런데 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의 난 亂이 일어났다.
이때 농민군들은 위세 사납게 가산 · 박천 · 선천을 차례로 함락시켰는데, 가산 군수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가 칼을 맞아 죽었고, 선천 부사 김익순은 위세 등등한 농민군에 투항 投降하였다.
이로 인하여 난리가 평정된 후, 정시는 만고 萬古의 충신이 되었고, 김익순은 모반대역죄 謀反大逆罪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비열한 인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집안은 폐가 廢家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적 逆賊의 자손이니 그 자식과 손자들은 법에 따라 죽음을
당하거나 종이 될 운명에 놓여있었으나, 죄는 당사자 김익순에게만 묻고 아들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했는데, 여기에는 안동 김씨들의 비호 庇護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익순의 며느리는 아들을 보호하는 데 남다른 고심을 해야 했다. 나이 든 큰아들 병하 炳河와 둘째 병연은
종을 딸려 황해도 곡산으로 가서 숨어 살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강원도 산골 영월로 옮겨
가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고향은 충청도 홍성군 결성면이었지만, 집안이 반역도로 몰려 패가망신 敗家亡身
한 처지에서 창피해서 친정으로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칫하다가 역도의 그 불티가 친정까지 틜 수도 있으니, 삼갈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 형제는 세상이 좀 잠잠해지자, 어머니 곁으로 와 살았던 것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고 살면서 남달리 영민 英敏한 둘째 아들 병연을 서당 書堂에 다니게 했다. 이를 미루어 보면 김삿갓의
모친은 몰락한 집안이지만, 의기 意氣가 사라진 남편을 대신하여 가장 家長의 역할을 담당하는
여장부 女丈夫로서 현모양처 賢母良妻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특한 어린 병연은 열심히 공부했고, 스무 살이 되자 과거를 보아 출세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고을에서 보는 초시(初試: 향시 鄕試)에 나갔는데, 시제 試題는 다음과 같았다.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 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
시제가 묘한 운명의 장난처럼 제시되었으나,
집안 내력을 모르는 김삿갓은 가슴을 펴고, 시제에 걸맞게 정시의 순국 殉國 정신을 높이 기리고,
김익순의 변절 變節을 매섭게 질타 叱咤하는 내용의 답안지를 써 내려갔다.
그중 마지막 한 구절만 보면 이렇다.
임금을 잃은 이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김삿갓은 마음껏 붓을 놀렸다. 그는 장원급제했고, 시제와 자신이 작성한 그 내용을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그러니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옛일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손자가 감히, 할아버지 볼기짝을 때리다니...,
어머니로부터 비로소 집안 내력을 듣게 된 김삿갓은 아연실색 啞然失色한다. 친조부 親 祖父를 조롱하고
욕보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몇 달간 연민 憐憫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 自處하고,
“조상님과 하늘을 볼 면목이 없다”라며 사죄 謝罪의 뜻으로 삿갓을 쓰고, 무일푼으로 정처 없는 방랑길에 나선다.
그는 아무도 몰래 가족과 이별하였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해학을 토해내면서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고향을 물어도 모르는 체했다.
그러니 '김삿갓'으로 통했던 것이다. 그의 호는 '난고 蘭皐'였는데, ‘바위 틈에 자라는 난초’라는 뜻으로
고고함을 드러내려는 호였다. 자신의 이름을 꼭 대야 할 자리에서는 '란 蘭' 이라 했고, 자를 댈 적에는 '이명 而鳴',
호를 댈 적에는 '정상 正裳'이라 했다.
‘방울처럼 텅 빈 속으로 홀로 울고, 스스로 치마를 입었다’라고
자기 비하 自己卑下를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역 곳곳에서 유세 有勢 부리는 식자 識字 층과 허세 虛勢 떠는 유생 儒生들을 상대하여,
짧고 재치 넘치는 시 詩 한수로 조롱 嘲弄하며, 빈 호주머니로 조선팔도를 유랑한 방랑시인
‘김삿갓’을 그동안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史實을 알고 보니 내 자신이 김립 金笠 ‘김병연’ 시인의 전철 轉轍을 밟고 있었다.
우리 고대사 古代史가 제대로 정립 定立되지 아니하고,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왜곡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역사관 歷史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종족 種族의 왜곡된 기록에 속아서, 철저하게 사대주의에 물들어진 상태로
자아 自我를 상실하고 감히 내 조상을,
나의 선배를 멸시 蔑視하고 조롱 嘲弄하는 못난 짓거리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자행해 온 것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엎드려 사죄 謝罪 드립니다.
“무식한 후손을, 어리석은 후배를 용서하시옵소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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