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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묵상글 들(연중 제17주간 금요일-선입견과 편견의 벽을 넘어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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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선입견과 편견의 벽을 넘어라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내세우는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뿌리 깊은 선입견은 대상을 왜곡되게 보게 하는 색안경이 되어 진실을 가립니다”(함께야).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뿐 아니라 편견의 시선도 바로잡아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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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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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축제와 전례, 회개와 초월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들은 특별한 날만에 올려지는 행사였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전례 안에서 기념되었습니다. 축제와 전례 안에 담긴 뜻은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도 언제나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의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요, 마치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로 넘어온 것처럼 세속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진리와 자비와 정의의 실천에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축제는 파스카 축제였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그날 밤 안으로 이집트를 빠져나와야 했던 히브리인들이 누룩 없는 빵과 날 채소만으로 요기해야 했던 그 상황을 재현하는 무교절이 이 축제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고달프고 지루했던 시나이 광야 사십 년이 지난 후에 겨우 들어간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 거둔 첫 수확의 맏물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광야 사십 년 동안 우상을 숭배하고 불평불만을 일삼았던 죄를 뉘우치는 속제일과, 그렇게 해서 안정된 땅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하느님 백성의 거처는 오직 하느님 나라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초막절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축제와 전례의 지향들이 일상적인 안식일 예배에서 기념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그분의 지혜와 기적에는 감탄하면서도 그분의 배후에 계신 하느님은 보지 못하는 배척 반응이 고향 사람들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동안 성대하게 지낸 축제들과 꼬박꼬박 지켜온 전례들이 유다인들의 의식 속에는 들어가지 못한 겉치레였음을 드러내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보아왔다는 선입견이 오히려 회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는데, 정작 그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는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가 예수님 눈 앞에서 벌어진 겁니다.
세상의 시간은 유일무이합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은 되풀이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실 때마다 한처음이요, 종말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선이 시작되고 악이 종식됩니다. 우리의 전례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이 현존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풍요로운 마침을 선사하십니다. 고향과 집안에서조차도 배척받으신 주님께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전례와 일상 안에서는 환영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례의 묵상은 영적인 탈출이요 초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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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새 후배의 숫자가 많이 늘었고 그러다 보니 이름을 잘 모르는 후배 신부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부의 주름과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십이 넘는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논어 위정편에 보면, 나이 오십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으로 비유하지요.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면, 겸손보다는 교만의 모습이 더 많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은 분명히 ‘지천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지금도 변함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동창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한 친구가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그렇게 경박하게 굴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체통 좀 지켜라.”
이 말에 별일 아니란 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게다가 남들의 웃음거리를 면한다고 해서 내가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입니다.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낫다면서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대접받고 인정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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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자신이 그 일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습관이다(대니얼 카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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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준비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 질문은 실제 미국의 한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부동산, 주식 투자 등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물질적인 희망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응답이 대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도전해보고 싶어요.
안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물질적 희망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닌, 하늘 나라에서의 희망을 채워줄 것에 중심을 맞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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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기록하고, 기억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자식들의 생일을 기억하셨습니다. 음력이라서 양력으로 다시 계산하셨습니다. 특히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기일에는 시골에서 친척들도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음식도 장만하였고, 잠자리도 새롭게 준비하였습니다. 꼭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부활과 성탄은 가족들에게는 큰 축일이었습니다. 사순시기와 대림시기에는 판공성사를 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 생활의 중심은 신앙이었습니다. 성무일도를 빠짐없이 하였고, 늘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대녀들과 연락하였고, 대녀들 모임에는 항상 갔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도 대녀가 아프면 기도를 부탁하였고, 대녀의 자식들의 혼배성사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재물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기러기 엄마와 아빠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는 기꺼이 부부가 떨어져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학교공부만으로는 불안하기에 좋은 학원을 찾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한 가지 악기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일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생일 축하를 해 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님들도 함께 노력하고 준비합니다. ‘4당5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4시간 자고 공부하면 합격하고, 5시간 자고 공부하면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유하게 사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좋은 책을 읽고 그 속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축제와 축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축제와 축일을 지키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신자들도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첨례표를 따라서 축일을 지킬 수 있었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첨례표의 기준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입니다. 성탄 앞에는 대림시기가 있고, 부활 앞에는 사순시기가 있습니다. 주일 미사가 있고, 의무 대축일이 있습니다. 첨례표는 바로 전례력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례력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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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전례와 삶
- 무지에 대한 답은 전례 은총뿐이다 -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전례입니다. 교회의 영성은 전례 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제 교회공동체의 특징에 대해 밝힌 바와 같이 전례 영성에 전례 공동체입니다. 아마 기존의 종교중 가장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종교가 가톨릭 교회일 것입니다. 전례를 통해 그대로 살아있는 전통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힘은 그대로 전례의 힘이 됩니다.
참 좋은 전례는 단순하고 깊고 아름답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례를 사랑합니다. 그리하여 전례학을 공부한 분들 중에서 주교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적으로 깊고 고요하고 순수한 것도 전례은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 불암산을 보며 써놓은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참으로 신자들이 주님을 닮아 영적으로 크고 깊고 고요하게 만드는 전례은총입니다. 사람과 일반 동물과의 차이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도 전례입니다. 사람만이 전례를 거행합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전례이며 전례를 통해 참 사람이 되어갑니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 전례 축제 은총입니다.
그러니 전례와 삶은 하나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감히 ‘전례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전례는 맹목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례를 통해 삶의 꼴도 잡혀 갑니다. ‘삶의 전례화’요 ‘전례의 삶화’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미사 전례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꿉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미사전례를 목말라 하는지요! 좀 더 자세히 전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나눕니다.
“전례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이 세상에서 표징들이 암시하는 전례를 거행하는 사람들은 이미 천상전례에 참석하고 있다. 그곳의 전례는 충만한 친교와 축제의 거행이다.”(가톨릭 교리서1136)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와 같은 참여는 바로 전례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이며, 또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2,9)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힘으로 그 참여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전례헌장14항)
“말씀전례는 성사거행의 필수부분이다. 신자들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의 책, 말씀에 대한 존경(행렬, 향, 촛불),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독서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봉독, 말씀선포의 연장인 사제의 강론, 회중의 응답(환호송, 화답송, 연도, 신앙고백) 등 하느님 말씀의 표징들이 부각되어야 한다.”(가톨릭 교회서 1154항)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는 기도중에 두드러지는 단어 하나는 바로 ”오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성령의 초대를 그대로 반향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오늘“에 들어오도록 초대하시며, 이는 바로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파스카의 ‘시간’이다.”(가톨릭 교리서 1165항).
교회의 전례에 대한 주옥같은 가르침을 일부 공부하는 마음으로 나눴습니다. 왜 이렇게 전례로 강론을 시작했을까요? 바로 오늘부터 시작된 제1독서 레위기가 이스라엘의 전례 축일들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일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만남’을 뜻하며,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축제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전례 축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축일들의 종교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식일, 파스카와 무교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 주간절, 칠월 초하루, 속죄일, 초막절’등입니다. 얼마나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시도한 모세요 이스라엘 백성이었는지 절절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반복되는 세 말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오로지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만 집중하여 온 정성을 다해 축일 전례를 거행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참으로 우리의 전례 참여 자세를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기에 무수한 폐인에 괴물들이요 무수한 정신질환자들입니다.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마지막 결론 말씀은 거룩한 모임인 미사전례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과연 우리는 미사전례때 주님에게 무슨 제물을 봉헌하는 지 묻게 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구체적 만남 시간이 바로 미사 전례시간이요, 주님의 현존안에서 영원한 오늘을 살게 하는 미사 전례은총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미사 전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에 대한 답이 독서의 전례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에 대한 소개이고 복음은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무시, 배척당하는 사실을 전합니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 질투심의 무지로 눈이 가린 불신의 고향 사람들이요, 바로 무지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이자 보편적 모습입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끝없는 질문을 제기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믿음과 겸손으로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온 지혜와 기적임을 담박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말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전례 축일들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체험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한 오늘 강론 제목이 “전례와 삶-무지에 대한 답은 전례뿐이다-”입니다.
“에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깊은 좌절감을 엿볼수 있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가까이 있는 형제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 극히 인색한, 편견과 선입견, 질투의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개방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아예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합니다. 아마 거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개방이 전제되지 않는 한 주님의 일방적 기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참 좋은 믿음을 선사하시며 우리 모두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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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축제를 대하는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레위 23,7.8.35.36)
제1독서인 레위기의 대목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이 나열됩니다. 대부분의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를 선사하시고 약속의 땅에 자리잡도록 이끄신 구체적 역사를 기억하고 경축하며 계승하려는 기능이 있습니다.
축제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일상성을 잠시 멈추고 역사적 의미를 지금 여기, 현재로 끌어와서 그 안에 들어가 즐기는 시간이지요. 평소에는 일상의 생활과 의무 등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했다면, 축제의 시간에는 나름의 의미와 기억, 몰입과 참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일탈과 예외성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축제의 시간에 들어서면 평범히 살아오던 시간과 공간 에서 분리되어 "거룩한 모임" 즉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는 일상성이 정지되고 의미 위주의 특수성이 지배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누누히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평소에는 장려되는 노동이지만, 일정 시간 일손을 놓고 축제에 참여하면서 기억의 정화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구성원들 간의 결속과 소통이 강화되고 축제의 주인이신 하느님과도 더욱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축제는 기쁨의 시간이고 기쁨의 공간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방문기를 들려 줍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마태 13,55)
고향에 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께 못마땅한 눈초리들이 꽂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과거를 너무 잘 알아서 그분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일상성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생부터 부모, 형제자매, 직업과 생활 형편, 학력과 자격, 가문과 신분 등 모든 걸 섭렵하고 있습니다. 기저귀 차던 시절, 코흘리개 시절, 성장기와 청년기 등 그들 눈에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누군가의 일상적 정보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 사람은 편견의 늪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모든 존재 안에는 일상성과 예외성(특수성)이 함께 혼재하기 때문에 본질을 놓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신원은 고향 사람들의 육적인 눈에 드러나지 않았지요. 그분은 죄악에 묶인 이들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실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모든 축제의 주인이시지만, 놀라운 예언과 기적의 능력조차 고향 사람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일상성과 배치되면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편협하고 선입견에 지배를 받는 이들은 예외성과 특수성에 경탄하며 축제를 즐길 개방성이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미태 13,58)
기적은 일상성을 초월하는 대표적 표징입니다. 믿음 역시 논리와 계산으로 점철된 일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모험이며 투신이고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이 있기 어렵겠지요. 역으로, 예수님도 누차 말씀하셨듯이, 기적과 믿음은 서로 호응합니다.
우리에게는 주일과 축일, 대축일이라는 교회의 공적 축제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각자의 생일과 영명 축일, 세례와 견진, 서원이나 서품, 혼인 등의 각종 기념일 또한 주어졌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영육으로 풍요로운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일상의 평범하고 단순한 순례길 구비마다 기쁨과 활력이 되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어 있고 우리는 그때마다 각자의 파스카 구원 여정을 되새기며 주님과 한층 더 친밀하고 뜨거운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축제를 즐기고 그 열매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다가오신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내가 다 아는데~, 원래~, 그럴 리 없지~" 하는 편협한 자의식을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요. 열린 마음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일상과 축제의 리듬 안에서 열린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축제의 주인이신 주님을 더욱 신명나게 해드릴 것이고, 주님께서도 그 안에서 당신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 가득한 축제들을 마음껏 기뻐하며 즐기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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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언자'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해 드린대로, 미래의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탁, 곧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언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엘리야에서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물의 예언자로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예언자로 오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그러고 보니,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삶,
하느님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
예언자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럴까?
예언자는 항상 역설이신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언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야하는 '사제직'과 예수님처럼 너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하는 '왕직'과 함께, 너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미사나 드리시고, 기도방에서 기도나 하시지 왜, 세상일에 걱정하시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십니까?"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예언직의 사명을 망각한 말입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예언직의 소명에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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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는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미리 예: 豫)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맡길 예: 預)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임을 주위에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려고 기도하고 성사 생활을 하며, 이를 추억하고 점차 깊은 관계를 맺어 갑니다. 성경과 교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언 직무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문제들을 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함과 불공정, 인권 침해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오만함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역할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해야 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고, 그 징표를 하느님의 뜻과 가치로 해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며 유다인들입니다. 때로는 고향 사람들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예.”가 아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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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 말은 예수님을 헐뜯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우리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하고 몰아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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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목수의 아들이
부활할 것이다.
인신공격을
멈추고
삶의 존엄함을
되찾을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듯
편견의 문을
여신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우리
이웃의 삶을
평가하며
살아왔다.
평가하는
이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실체를 다시금
보게된다.
편견의 중심에는
우리의 이기적인
무지(無知)가 있다.
편견을 부수면
세상과 사람이
달리 보인다.
복음은
다름아닌
편견을
부수는
인격의 참된
기쁨이다.
인관관계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존중이
필요한
나와 너의
관계이다.
우리모두는
같은
사람들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선입견에
많은 상처를
받는 우리들이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존중과 배려
대화와 인정이
필요한 곳이다.
공동체는
편견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선물이다.
낮아지신
하느님의
삶이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존중과 감사로
바꾸어놓는다.
저마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복음은
존중의
실천이다.
목수의 아들이
복음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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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고향 마을에 계실 때에는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마르코복음에 “저 사람은 목수로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6,3).
당시 상황을 나자렛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인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세례를 받겠다면서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랍비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거느리고 고향에 나타났다.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이 랍비 행세를 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예수가 다른 랍비들보다 더 ‘권위 있는’ 설교를 하는 것도,
또 기적의 힘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도 못마땅했다.>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은 그 전부터(예수님의 어린 시절 때부터)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무시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목수라는 직업 때문에, 또 가난했기 때문에 무시했을 텐데,
요셉이 세상을 떠난 뒤에 젊은 과부 마리아와 그의 외아들만 남은 상황에서는
더욱 무시했을 것입니다.
2) 나자렛의 상황을 조선시대의 상황으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만 하던 가난한 목수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했다면, 고향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을 텐데, 예수는 과거 시험을
본 적도 없으면서, 또 유명한 대학자 밑에서 공부한 적도 없으면서,
갑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무시하고 비웃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람들 중에는 그를 미쳤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코복음 3장 21절에,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말이 나옵니다.)>
춘향전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거지 모습으로 남원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거지로 대했습니다.
만일에 이몽룡이 처음부터 암행어사의 신분을 드러내고 포졸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면, 변사또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은 자기들의 부정부패를 모두 감추고
이몽룡을 열렬히 환영하고 섬겼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몽룡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당신의 신원을 감추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낮춤’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일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지셨습니다.
(무시당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아지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무시한 나자렛 사람들은, 평소에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한 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만 무시한 것은 아니고,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늘 무시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그런 교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면,
즉 ‘작은 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최후의 심판 때에 ‘영원한 벌’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25,41-46).
4)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을 사도들도 당했습니다.
유대 최고의회 의원들은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를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사도 4,13).
그들은 바로 그 생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2코린 10,10).”
바오로 사도의 외모는 별로 볼품이 없었던 것 같고,
직접 말로 하는 설교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가운에는 바오로 사도의 외모와 말주변만 보고
바오로 사도를 무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메시아(구세주)로 믿지는 않고 그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고 죽은 불쌍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보아야 할 진리를 못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리석은 일이고,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5)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대부분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어서 병자 치유를 청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청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음을 나타냅니다(마르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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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친숙함과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걸림돌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이 사는 고향에 가시어 “그들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들의 회당”이라는 표현을 통해 유다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며 거부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을 끝으로 더 이상 회당에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듣고 보고, 알고 겪어온 나자렛 예수와는 너무나 다른 예수님의 언행을 접하며 놀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그의 가르침에는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고, 그의 치유행위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깔려 있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예수가 아니었기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놀람이 분노로 이어져 결국 그것은 불신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의 기원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13,54-56 참조).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13,57)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잘것없는 신분에 대한 자신들의 익숙함과 굳어진 시각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놀랐지만, 불쾌하게 여겨 분노하고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근본 원인은 친숙함과 익숙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험과 지식, 감각적 체험에 익숙해지면 안정감을 느끼게 되지요. 안정감을 느끼면 변화보다는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안주하려 합니다.
이런 익숙함과 안주가 생각에도 영향을 미쳐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신념고착 등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이런 것들은 새롭게 보고 생각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익숙하고 친숙하게 길들여진 것들을 추구하는 한 창조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삶의 중심이 하느님과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친숙함과 익숙함의 걸림돌은 결국 불신을 낳게 됩니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선입견과 분노의 장벽에 걸려 넘어져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믿지 않는 고향에서는 더 이상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13,58).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순간 창조의 새로움을 자신에게 허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며 친숙함과 익숙함의 방주에서 안주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들과 세상을 과거의 틀과 선입견, 굳어진 사고의 틀로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은총의 시간이지요. 따라서 매순간 과거의 틀을 버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새롭게 보는 창조의 시간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익숙함과 친숙함,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하느님을 알아 뵙고 그 뜻을 실행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겠습니다.
오늘도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며, 생각을 바꾸어 선입견과 편견, 과거의 감정과 익숙함의 잠에서 깨어나 평범한 일상사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바의 이방인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실행했던 성모 마리아, 놀라운 겸손을 보인 백인대장과 전 재산을 바친 가난한 과부를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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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위기 저자는 유월절과 무교절 축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달인 니산 달 열 나흩 날 저녁 어스름 한 때부터 양을 잡아 식구들이 다 함께 식사로 시작하는 파스카를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틑 날인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야 합니다. 이 축일의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 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레 동안 화제물을 바쳐야 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도 다시 거룩한 모임을 가져야 하고 첫째 날처럼 생업으로 하는 일은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그 땅으로 들어가는 날, 첫 수확을 거둘 때 수확의 만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레 동안 매일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레위 23,16)고 이르십니다.
레위기 저자는 무교절 축일을 이렇게 지내라고 전합니다.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레위 23,37)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쉽고 권위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감탄하면서도 서로 수근 거립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5-56)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구전과 성문화된 자료들에 따라 넓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을 사촌이나 그 이상의 식구들을 ‘형제들’로 보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형제의 자매를 놓고 다른 종교에서는 ‘봐라. 예수님의 형제자매의 이름들이 다 있지 않은가’라며 글자 그대로 이들이 예수님의 친 형제자매들로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논란에는 끝이 없는 것이 전해지는 자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오는 이런 점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처럼 고향을 찾아 회장에서 가르쳤는데 고향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7)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당신을 믿지 않는 고향사람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통을 중시합니다. 한편 그것은 형식적이고 고루한 문화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과 성 요셉과 예수님께서도 파스카와 무교절 축절은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지내러 오셨던 것을 비추어 보면 유대인들의 성실하고 철저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외면 당하거나 심한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가까운 이들이 나의 적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겪으시고 그래도 마음을 열어 놓으 것처럼 우리도 환영하지 않고 등을 돌리는 사람들에게도 덤덤하게 지낼 수 있는 신앙인의 여유로움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나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따라 주리라.’라고 믿는 교만함에서 우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속 끓지 말고 고향에서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그러려니’하며 널널하고 여유로움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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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특별한 기적을 청하지 않으시고, 매일 인내와 기도 속에 살아가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오늘 복음 구절을 즐겨 애용하곤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후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감동적인 설교 말씀을 펼치시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외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오 복음 13장 55~56절)
논리인즉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출산하신 후 4명의 형제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낳으셨고, 적어도 누이들 2명해서 총 7명을 출산하셨다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들은 뭔가 착각해도 크게 착각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형제’란 용어는 무척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친형제뿐만 아니라 사촌, 육촌, 팔촌까지 형제라는 용어 안에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저희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저희는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바라본다면 충분이 이해가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신심, 특별히 성모님 발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성모신심은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 단지, 혹은 날카로운 양날의 검 같아서 신중 또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더군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모 신심은 철저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성모 신심이어야 마땅합니다. 혹시라도 과도한 성모 신심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 신심의 원천이자 기초이신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누가 된다면, 그 신심은 100퍼센트 그릇된 신심입니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신심은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과도하게 남용될 때, 대혼란이 야기되었고, 수많은 여린 신앙인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모 신심과 관련해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많은 신앙인들의 이단으로 빠지고 단죄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교도권은 성모님 관련 사적 계시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비로운 현상 앞에서 절대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기도 안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는 비록 공식적으로 공인된 성모 성지, 예를 들면 루르드나 파티마 성지라 할지라도 꼭 거기 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가도 좋지만 굳이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순례하지 않아도 절대 야단치지 않습니다.
유명 성모 성지 순례를 가서 큰 은총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도 좋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주신 위대한 신앙, 한결같은 겸손과 순명, 불굴의 인내와 극진한 이웃 사랑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찰라의 기적보다는 일상의 기적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 교구 주교님들께서 참여 즉시 자동 파문이라며, 그리도 강하게 당부하고 계시건만, 아직도 어떤 신자들은 보란 듯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드나들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애꿎은 주변 사람들, 특히 성직자·수도자들에까지 접근해서 미끼를 던지고 있습니다. 대체 거기 가셔서 무엇을 보고자 하십니까?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황금향유’입니까? 입에 담기도 민망스러운‘성모님의 참젖’입니까? 유치찬란의 끝판왕인 ‘율신액’입니까? 끝도 없이 계속되는 치유와 기적입니까?
이런 어색한 신심은 성모님께서 가장 꺼려하시는 요소입니다. 이런 그릇된 신심을 추종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크게 진노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하늘의 여왕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 따뜻하고 편안하신 자상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겪으셔야 했던 그 숱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특별한 기적을 청하지 않으시고, 매일 인내와 기도 속에 살아가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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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 대신 챙기는 자존심, 그 가치는 얼마일까?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복음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것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기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일단 믿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나 해 보라는 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믿어보려는 열린 마음, 이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믿음’ 대신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존심’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는데 소문대로 예수님께서 사기꾼으로 드러나게 되면 사기꾼을 메시아로 여긴 자신들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까지 감행하며 지키는 것일까요?
어떤 무신론자인 기자가 봉쇄 수도원에 와서 원장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쇄 수도원에서 밖에도 못 나가고 고생만 하는 것 같은 수도자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원장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하는 고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억지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밖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아서 여기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하느님이 없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랄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무신론자 기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영화 ‘친구’에서 보면 자신이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건달이 건달다워야 한다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아무리 계산해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임을 밝혀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사는데도 별 지장이 없지만, 만약 믿는 분이 계실 때는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이고 믿은 사람은 천국이 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차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하도 차가 쌩쌩 다녀서 무단횡단을 하다가는 사고 날 확률이 50%나 됩니다. 그러나 무단횡단을 하면 10초면 끝나지만, 육교로 건너면 10분은 걸립니다. 여러분은 무단횡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육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실 확률은 50%입니다. 그러나 지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목숨까지 내걸며 지키려는 자존심의 값은 얼마일까요?
항우라는 사나이는 초나라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군을 몰고 오는 한나라의 유방에겐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강에 도착합니다. 배를 준비하고 있던 부하가 말합니다.
“어서 강을 건너십시오. 강동 땅이 비록 좁다지만, 땅이 사방 천 리나 되며 백성은 수십만입니다. 그곳도 왕 노릇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항우는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강동의 8천여 장정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설령 강동의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항우의 이런 콧대 높은 자존심은 일생에 단 한 번의 패배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70전 1패의 1패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고, 유방은 맨날 패하다 이 1승으로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항우의 오른팔이 ‘한신’이란 장수였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천민 출신이라 지방 불량배 가랑이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물론 실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살인을 저지르면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의 조롱은 대단했습니다. 한때 귀족 출신인 항우에게 갔지만, 천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바람에 유방에게 갔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셨던 전쟁의 신과 같은 사람이 자결하게 만드는 장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항우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일단 한 번 믿어서 속으면 어떻습니까? 왜 자존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까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까지 걸고 지키려는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가치는 누가 그것을 알아주고 사줘야 정해지는 것입니다. 금도 너무 흔해서 사주지 않는다면 그냥 돌에 불과합니다.
나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아무도 안 사줍니다. 자존심을 지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자존심은 각자의 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자아를 귀하게 여겨 사주겠습니까? 혼자만 귀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가진 거지에게 100만 원 수표를 주려고 하는데 그 빵을 놓지 못해서 그 수표를 못 받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가 자존심이 귀한 것으로 믿게 하여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늦게 나가는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힘든데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 오래 있으려 하는 것은, 주님께 무릎을 꿇느니 지옥을 선택하려는 자세와 같습니다.
자존심을 쓰레기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결국 믿지도 못하게 만들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존심이 쓰레기가 될수록 자존감은 더 높아집니다. 그래도 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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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인 성전은
그들에게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전이 파괴되고 재건되는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있던 이들의 중심은 회당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듯 회당은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히는 장소이며
신앙과 관련된 모든 활동과 연관된 곳입니다.
회당의 본질적 역할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자격이 있다면
그 앞에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깨달은 바를 선포하고
말씀을 들으며 서로 성장하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찾아옵니다.
선포된 말이 아닌 선포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유혹입니다.
말하는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뀝니다.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되는 순간,
사람마다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바라보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상대주의의 위험에 빠지는 것이죠.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빠진 유혹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지혜와 기적의 힘에 놀라워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기적은
그들에게 많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이가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동시에 예언자를 식별하고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결실로 해야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며 유혹을 경계할 때
우리에게 더 많은 은총이 결실 맺음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과 함께 그분의 섭리에 동참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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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서울교구에 계신 어떤 신부님의 신앙칼럼을 진지하게 여러 번 읽어봤습니다. 에릭 신부님이십니다.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번역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칼럼과 어제 부산교구 소속 신부님이신 장재명 파트리치오 신부님의 강의도 몇 편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사실 목요일 복음묵상을 했습니다만 하고도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을 그대로 올리게 되면 약간 현학적인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올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목요일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르타의 믿음에서 부활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복음입니다. 에릭 신부님의 칼럼은 복음묵상을 한 후에 인터넷에서 본 것입니다. 저녁에 두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두 시간 동안 목요일 복음을 다시 한 번 더 묵상해봤습니다.
전체 카테고리는 네 영역이 어우러진 묵상 같기도 합니다. 제일 큰 주제는 신앙은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답은 있다 없다 하나로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문현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답은 있다가 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없다면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없다고 하는 결론이 있다고 한다고 해도 그 결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져가면서까지 애써 논리를 설명한다면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시지 않을 거라는 전제를 한다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에릭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오랜 세월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신부님의 학식을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지속적인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러 가지 답이 있을 겁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목요일 복음을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시간으로 보면 이제 10분만 지나면 금요일이 됩니다. 아는 것과 믿음은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 됩니다. 아는 것과 믿음이 동일할 수 있을 때도 있고 동일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가 왜 마르타의 입을 통해서 이런 말을 복음에 언급했을까를 고민해봤습니다. 만약에 숨은 뜻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만약 숨은 뜻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를 오늘 고민해본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저의 묵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믿음은 아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를 통해서 알려주려는 의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추론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요일 복음 22절과 23절 사이에는 복음에는 없지만 그 사이엔 많은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마르타는 22절에서 예수님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을까를 고민했고 또 그 요한복음사가의 의도도 한번 상상해봤습니다. 마르타의 의도는 예수님께 희망을 가지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려고만 하시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예수님이시라면 오빠를 살려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마르타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왜 마르타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인지 마르타의 마음을 이미 간파하신 것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오빠를 살려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예수님께 간청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께서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마르타는 마지막에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물론 자기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마르타는 마지막 때가 아니고 그 시점이 지금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희망사항을 품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자기의 믿음이 '지금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걸 보면 마르타의 절박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마르타의 믿음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어도 부활신앙을 아는 것에 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말씀에서 아느냐라고 하시지 않고 믿느냐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면 부활신앙을 알고 있다는 것과 믿는다는 사실과는 간극이 있다는 걸 이 말씀에 그런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건 제가 성경에 대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에릭 신부님의 칼럼을 바탕으로 생각한 게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 없다고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렇게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아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지만 믿음은 이런 것을 초월한 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이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믿음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 중 하나가 지식을 연마하는 것도 해당하겠지만 그런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하나의 길이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이제 시간상으로보면 새벽 12시 35분이 되었습니다.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금요일 복음에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는 말을 한번 생각해보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목수의 아들이고해서 배운 것이라면 목수의 일이 고작 전부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들의 생각을 뛰어넘은 지식을 가지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니 우리는 이 속에서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결론입니다. 신앙에서 믿음은 우리의 인식과 인지의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에 있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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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신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
강만연 [fisherpeter] 2021-07-30 ㅣNo.148668
물리법칙에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뉴튼의 운동 제3법칙입니다. 어떤 물체에 힘을 가하면 가한 그 힘의 크기만큼 반대방향으로 가해진다는 법칙입니다. 이때 반대방향으로 가해진다는 것은 반응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앙이나 삶의 진리에서 보면 인과응보나 사필귀정과도 같은 이치가 됩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전형적인 작용반작용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이 비슷하다는 게 오늘 복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지혜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원래 예수님의 환경이 옛날 조선시대처럼 율법을 알고 연구하는 선비와 같은 학자의 환경이었다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참 사람의 심리가 이상합니다. 원래 저명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환경임에도 예수님의 지혜와 학식이 뛰어나다보니 그들의 머리로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이 복음 말씀에도 이런 심리가 밑바탕에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신앙에 한번 접목을 해봤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잘못된 편견이 작용한 것입니다.
목수는 대패질만 하고 못만 박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인식입니다. 목수는 예수님처럼 많이 알면 되지 않는다고 하는 법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이 지금 우리가 하는 신앙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많이 일어나는 게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이어지는 복음 말씀에 한번 주목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 말씀에 물리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적은 믿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긴 났지만 많이는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전혀 일으키시지 않았다고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기적은 정비례라고는 할 수는 없어도 비례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본다면 잘못된 고정관념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런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서 예수님을 바라봤다면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했을까 하는 것을 묵상해봅니다. 물론 기적에 초점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법칙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우리가 사는 자연계에서는 절대적인 법칙이지만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닐 것입니다. 약간 융통성이 적용될 것입니다.
설령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융통성을 적용하신다고 하시더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이 법칙이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좀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자비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문을 그래야 전폭적으로 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때 일어난 기적을 거창한 기적이라고 말하고는 싶지 않습니다. 기적은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게 기적인 것인지 모르고 지나친 기적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에겐 이런 기적이 분명 많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 박완서 작가님의 일상의 기적이라는 글을 한번 감상해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언제 한번 경남 고성에 계시는 아빠스님이 말씀하신 게 생각납니다. 신앙 이야기하다가 ‘투신’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의 신앙을 전력 투신하지 않으면 냉정하게 말했을 때 우리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며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양다리 걸치기 신앙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굳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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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ㅣ조인혁 타대오 신부 집전
2021. 7. 30.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매일미사
조인혁 타대오 신부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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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30.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제1독서 (레위23,1.4-11.15-16.27.34ㄴ-37)
"첫째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5-6)
'첫째 달 열나흗날'에 해당하는 '빠호데쉬 하리숀 뻬아르빠아 아사르 라호데쉬'(bahodesh harishon bearbaah asar lahodesh; on the fourteenth day of the first month)에서 '~한 때'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 '뻬'(be)는 시기를 알리는 명사 즉 년, 월, 일 앞에 관용적으로 붙는다.
여기서도 '월'을 가리키는 '호데쉬'(hodesh)와 '일'을 가리키는 '아르빠아'(arbaah) 앞에 '뻬'(be)가 붙어 있다.
'호데쉬'(hodesh)는 '회복하다', '갱신하다'라는 뜻을 지닌 '하다쉬'(hadash)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새 달'(new moon)을 뜻하지만, 본문에서는 '달', '월'(month)로 번역했다.
이것을 볼 때 고대 히브리인들은 태양력이 아니라 태음력, 즉 월력(月曆)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첫째'에 해당하는 '하리숀'(harishon)은 정관사 '하'(ha)와 '라숀'(rashon)이 합하여진 말인데, 여기서 '리숀'(rishon)은 '머리'라는 뜻의 '로쉬'(rosh)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시작하는', '최초의'란 뜻을 가지는데, 따라서 '빠호데쉬 하리숀'은 한 해를 시작하는 달 (the first month) 즉 정월을 말한다.
한편 '저녁 어스름에'에 해당하는 '뻰 하아르빠임'(ben haarbaim)은 직역하면 '그 저녁들 사이에', '두 저녁사이에' 이다.
대부분은 해가 지는 때와 어두워지는 때 사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통 유다인들은 두 저녁이 해지는 때와 완전히 어두워지는 때라고 한다면, 출애굽 당시의 유다인들이 파스카(유월절; 해방절; 과월절) 양들을 모두 잡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므로(탈출12,6) 정오 이후, 즉 해가 기울기 시작한 때부터 해가 지는 시기까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하루는 저녁 여섯 시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의 시각은 정월 십사일이 아니라 정월 십삼일이 된다.
따라서 '두 저녁 사이에'라는 말은 정월 십사 일이 시작하는 저녁 여섯시부터 십사일이 끝나는 그 다음 날 저녁 여섯 시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통례적으로 파스카절은 정월 십사일이 시작하는 저녁 시간만을 가리킨다.
'주님의 파스카'에 해당하는 '페싸흐 라이흐와'(pesah laihwah)에서 '파스카이다'라고 번역된 고유 명사 '페싸흐'(pesah)는 '넘어가다', '뛰어넘다'라는 뜻의 동사 '파싸흐'(pasah)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나오는 '~에 속한'이란 뜻의 소유 전치사 '레'(le)가 '예흐와'(yehwah)란 말과 함께 쓰인 '라이흐와'는 '주님께 속한'이란 의미를 가진다.
즉 파스카절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스카절이 히브리인들의 달력이 시작되는 정월의 첫 절기라는 것과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 파스카절은 (탈출12장, 13장) 인간의 힘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다.
'뛰어넘는 것'이란 뜻을 가진 '페싸흐' 즉 파스카절은 문설주와 문상인방에 파스카 희생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는 맏아들을 죽이는 재앙이 미치지 않고, 그대로 뛰어넘어 간 주님의 전적인 구원의 행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페싸흐 라이흐와'라는 말은 구원하는 일이 전적으로 주님께 속하였다'라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리고 파스카(유월절) 절기가 속한 달이 본래는 히브리인들의 민간 달력으로 제7월이었으나,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제1월로 삼았다(탈출12,2).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하느님의 구원 행동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무교절'
'주님의 무교절'에 해당하는 '하그 함맛초트 라이흐와'(hag hammatsoth laihwah)에서, '절'(節), '축제일'로 번역된 '하그'(hag)는 '춤추다', '혹은 '긴 여행을 하다', '순례 길을 떠나다'라는 뜻의 동사 '하가그'(hagag)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절기는 '무교절', '초막절'(탈출24,34), '주간절'(추수절,오순절) (탈출34,22; 신명16,16)뿐이다.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이 절기들의 축제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절기들은 모두 기쁨의 축제였으며 더불어 순례의 축제였다.
후대에 이 절기들은 언제나 예루살렘에 있는 중앙 성소에서 지켜져야 했으며 따라서 그 절기에 참여해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지방에 있든 외국에 있든 언제나 순례 길을 떠나야 했다.
한편 '무교'라고 번역된 '맛초트'(matsoth)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라는 뜻의 '맛차'(matsa)의 복수형이다.
이처럼 복수형이 쓰인 것은 이 절기가 하루로 끝나지 않고 칠일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교절에 대해서도 파스카절과 마찬가지로 '주님께 속한'이라는 뜻의 '라이흐와'(laihwah)가 붙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출애굽때에 주님의 구원을 바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행동 중에 하나였던 누룩없는 빵을 먹는 일을 재현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일어난 주님의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탈출12,15.18.20).
하느님께서는 무교절이 당신께 속하였다고 말해 주심으로써 그들이 단지 누룩없는 빵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 누룩없는 빵이 상징하는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고 더욱이 그 일이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하며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
후대에는 파스카절(유월절)이 무교절과 동일한 기간으로 묘사되었으며(에제45,21), 파스카절과 무교절이 동일하게 무교절로 불리기도 했다(2역대30,13.21).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지키던 많은 절기 가운데서 두 절기에만 '주님께 속한'이란 말이 붙어 있으며,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이 두 절기가 동일하게 주님의 전적인 구원역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누룩없는 빵'으로 번역된 '맛초트'(matsoth; unleavend bread; bread made without yeast)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란 뜻의 '맛차'(matsa)의 복수형이며, '완전히 물기를 뺀'이란 뜻의 '마차츠'(matsats)에서 파생되었다.
이처럼 빵을 변질시킬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빵을 먹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받은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능력의 역사요,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케 하려는 뜻도 있다.
즉 무교절에 먹을 빵에서 '누룩'이 제거되어야 헀던 것은 그들과 주님 사이에 어떠한 불순한 것도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수한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 대전에 순수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누룩이 들어가지 않아 딱딱한 빵인 누룩없는 빵은 '고난의 빵'(신명16,3) 으로도 불리워지는 것으로서, 이 빵을 먹을 때마다 이집트에서 겪었던 온갖 고난을 기억하며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게 하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한 '고난의 빵', 누룩없는 빵은 파스카절(과월절) 어린 양과 더불어 장차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리스도와 성체성사를 예표한다(요한6,30-59; 1코린11,23-24).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흘리신 피로써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백성들이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 고난의 빵인 누룩없는 빵을 먹고, 파스카절 어린 양의 고기를 취함으로써 맏아들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사건으로 예표되었던 것이다.
이 절기의 기간은 이레(칠 일)로서 제15일부터 제21일까지 계속되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칠'이라는 숫자가 절차상의 '완전'을 의미했으므로, 축제 기간이 7일로 정해진 것에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온전하게 기억케 한다는 의미가 있고, 동시에 그 구원을 기억하는 자들의 모습 또한 온전해야 함을 상징한다.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마태13,54-58)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7)
'그분을'에 해당하는 '엔 아우토'(en auto; in him)에서 '엔'(en)은 '~안에'(in)이라는 영역의 내부를 가리키지만, 아주 드물게 '~로 말미암아'라는 원인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로 말미암아'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걸림돌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여겼다'에 해당하는 '에스칸달리존토'(eskandalizonto; they were offended; they took offence)의 원형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길 가운데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 '걸림돌이 되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여기서는 3인칭 복수 수동태로 사용되어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져 배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말과 행위로 인해 신앙이 불타올라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하여 닫혀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범죄에 빠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로마9,33; 1베드2,8).
여기서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3인칭 복수 수동태 뿐만 아니라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생활 3년간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점점 완고하고 사악해져 갔음을 암시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 예언자가 고향과 집안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수용하셨다.
특히 여기서 '존경받지 못한다'로 번역된 '아티모스'(atimos; without honor)는 '비천한'이라는 의미도 가지는 형용사이므로(1코린4,10), 나자렛 사람들이 다만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천히 여기기까지 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예언자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요한6,14).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염두에 둔 예언자는 예레미야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고향 아나톳 사람들로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리 손으로 죽이겠다'(예레11,21)는 말까지 들으면서 심하게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 사람들의 죄상을 공격하며 회개를 촉구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을 뿐 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우상숭배를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장차 동족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까지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복음 (마태13,54-58)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셨던 것이다. 말씀을 인간의 뜻을 위한, 인간의 지혜로만 들었던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하다.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그 놀라운 지혜를 전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왜? 말씀이 그들의 속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력하게 하신다. 인간의 모든 것은 어둠, 악, 없음이며 하느님만이 빛, 선, 의, 진리이심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 명예(의, 선)는 죽음의 열매, 곧 구원이 없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 인간들의 뜻, 생각, 지혜를 부수시러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루가12,51)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1코린2,6-7)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거룩)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미리 정하신 하느님의 지혜는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그 죄인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에페1,4) 그러니까 인간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사람의 욕망, 의, 명예를 위한 말을 하면 존경했을 것이다.(요한15,18참조) 그러나 그 반대의 말씀을 전하기에 싫어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사람의 욕망, 의, 명예를 위한 그 세상의 말로는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곧 죄인들의 용서, 생명, 구원을 신비롭고 감추어져있는 그 하느님의 지혜를 줄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요한2,22참조) 그러면 놀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놀라셨다(다우마죠)는 칭찬하다. 찬양하다는 뜻이다. 더욱 이상하다.
그러니 그 말은 피조물인 흙의 티끌인 그 어둠의 인간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기적과 같은 지혜의 말씀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 지혜,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 흙, 어둠들로 들어가시어(신의 죽음) 그 어둠들의 빛, 생명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창조이전 계획하신 구원의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는 지혜인 것으로 그 모든 것을 예수님 당신(십자가)을 통해 이루실 그 하느님을 찬양하셨다는 것이다.
병행복음(마르6,6-7)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시다. 제자들은 앞5장의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믿으면, 말하면) 사람들의 칭찬과 대우를 받을 줄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파견(다음절)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들의 칭찬, 대우가 아닌, 무시와 박해를 각오하고 사람의 듯을 위한 사람의 길, 방법으로 전하지 말라고,~
(마르6,8-9)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 지팡이, 신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다.
(에페6,14-17) 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사제께서 혹은 구역. 반모임에서 세상이야기, 사람 이야기를 하면 좋아한다. 그러나 올바른 하느님 말씀을 말하면 듣기 싫어한다. 왜? 사람들이 하늘의 대속, 그 진리, 지혜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힘(돈, 명예)의 원리인 그 세상의 말(지혜)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 영원한 죽음에 갇힐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이세상에 속죄 제물로 구원의 새 계약으로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요한8,15)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선악)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 예수님의 대속(십자가)으로, 곧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겨 없어졌기 때문이다.
(2코린5,16-19)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선,악)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새계약)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새계약)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구원의 새 계약, 그 십자가의 복음 말씀으로 사람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신 그 하느님의 은총(은혜)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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