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을 취하고 746.6m봉으로 향한다.(10:30)
【계명봉(601.7m)--1.5km(실거리 1.8km / 3,062보)--746.6m봉】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진다.
내리막길에서 오팀장에게 전화를 하니 28일 초과근무에 대한 결재를 올리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안부에 내려오니 746.6m 봉을 오르는 길이 두갈래로 갈라진다.
두 길사이에는 수로처럼 패여있고 좌측은 범어사로 내려가는 길로 판단하고 수로를 기준으로 우측의 길을 따라 오른다.(10:40)
넓은 임도와 만나고 이 길은 조금 전 수로의 좌측길이 범어사에서 올라오는 주 등로와 합쳐져 이곳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10:46)
50m가량 임도를 따라 오르니 우측 숲길에 표지기가 걸려있고 임도는 계속 산비탈을 따라 비스듬히 이어진다.
곧 바로 임도와 다시 만나고 임도를 가로지러 산마루를 향해 직진으로 오른다,
다시 또 오르막은 가팔라지지만 계명봉 오르막만큼의 기울기는 아니다.
746.6m 봉의 억새밭 능선이 펼쳐지고 고당봉이 손에 잡힐 긋 가깝게 보이기 시작하지만 흉물스런 고압철탑과 고압선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한다.
▽746.6m봉을 향한 억새지대
억새능선의 왼쪽으로 우회하는 길이 보이지만 처음부터 장군봉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터라 곧장 올라가니 허름한 돌탑 1기네 나무 한 그루 심어져있지 않는 746.6m봉으로 조금은 황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11:06. 3,062보)
조망은 아주 좋다.
▽746.6m 봉 정상의 돌탑 뒤로 영취산구간과 천성산 구간의 산들이 보인다.
▽백운산~거문산으로 이어지는 기장군 정관면의 500m급 산줄기
▽계명봉(좌)과 산
▽금정산(고당봉)
▽08
▽14
▽14
안부 하나사이로 장군봉이 우뚝하고 장군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도 아주 뚜렷하며 금정산 고당봉은 물론 멀리 영취산과 천성산, 대운산 그리고 더 멀게는 가지산과 고헌산까지 막힘없이 펼쳐진다.
전화로 초가근무를 29일로 바꾸고 장군봉으로 향한다.(11:15. 정맥은 746.6m봉에서 좌측의 고당봉을 바라보며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이다.)
【746.6m봉--0.3km(실거리 0.34km / 560보)--장군봉(734.5m)】
장군봉(734.5m)에 도착한다.(20분 560보)
▽장군봉 표지석 뒤로 시원스레 펼쳐지는 고속도로와 양산읍 그리고 영취산과 천성산
▽746.6m봉
▽지나온 정맥마루금 뒤로 멀리 대운산이....23
▽금정산 고당봉23
▽낙동강도 이제 하류로 변했고 멀리 보이는 저 마루금은...?23
▽물금방향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25
장군봉 출발(11:25)
【장군봉--2.4km(실거리 2.6km / 4,290보)--금정산 고당봉(801.5m)】
안부로 내려와 조금 전에 지나왔던 746.6m봉을 우측으로 우회하는 길이 나오고 곧 이정표<장군봉. 다방리]. [낙동정맥 계명봉]. [금정산. 고당봉>를 지나게 된다.(11:29)
샘터를 지나는데 수량은 아주 미미하다.(11:33)
▽34
임도처럼 넓은 길을 따라가면 89번 송전탑을 지나고 이후로는 전형적인 일반등산로로 바뀐다.(11:38)
범어사기를 지나는데 용도가 무언지....? (11:40)
▽등로변에 누워있는 범어사기
Y자형 갈림길이 나온다.(11:42) 왼쪽의 마루금으로 진행한다.
곧 우측 마루금 방향으로 오르는 히미한 길과 그 안쪽에 빛바랜 표지기 한 장이 보인다.
지금까지 처럼 좌측의 넓은 길을 따라가자 곧 계류를 건너게 되는데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잘못된 길이라는 께름찍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진행하는데 우측으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
결국 저 바위봉우리을 우회하는 이 길은 작은 계류를 두세번 건너게 된다.
정점에 오르자 제법 넓은 공터에 듬성듬성 바위가 박혀있고 주변을 살필 만한 바위가 보여 올라가보니 갈림길에서 한 장의 표지기가 보였던 길이 정확한 마루금임을 알 수 있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1~2장의 표지기와 함께 조금 희미한 길이 있다.
마루금을 실체를 찾아 역으로 내려가기로 한다.(11:49)
희미한 길을 찾아내려가는 등로에는 이따금 표지기가 길을 안내하고 바위지대를 우회하기도 하며 본래의 갈림길에 도착한다. 분명 물기를 피해가는 정맥마루금이기에 들머리에 자신있게 표지기를 붙인다.(11:55)
잡목을 헤치며 희미한 길을 자세히 살피면 족적을 발견할 수 있고 가끔은 표지기도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뒤, 바위지대를 거쳐 안부처럼 평평한 곳으로 내려오니 다시 또 길 흔적이 아주 애매해지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바위지대에 올라 바라보면 골짜기 형태가 뚜렷하다.1201
▽바위에서 바라본 장군봉(중앙)과 우측의 746.6m봉01
마루금 신봉자들이 이 분지형태의 안부에 생긴 가느다란 골의 물줄기를 피하기 위해 헤멘 모습으로 추정된다.
우측으로 좀 뚜렷한 길이 보여 조금 진행하니 좌측 바위와의 사이로 실 계류의 골자기를 이루는 지형이다.
좌측의 바위지대 쪽과 우측의 좀 높은 지형을 기준하여 마른 물줄기를 피해 능선마루에 오르니 주 등산로와 만나면서 소나무 숲길이 시작된다.(12:15. 실 산행시간은 약 10분정도면 충분할 것 같음)
곧 우측으로 산죽밭이 나타나면서 큼지막한 바위가 보이는데 조망이 괜찮을 것 같은 바위가 보이고 길도 아주 뚜렷해 올라가보지만 더 이상 길을 이어가기가 곤란해 다시 내려와 조금 더 길을 이어가니 바위지대의능선을 따라가는 길이 나타난다.
바위 능선에 올라서면 멋진 조망을 즐기며 갈 수 있다.
▽장군봉 줄기21
▽영취산과 우측은 천성산 구간22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바위봉22
▽22
▽이어갈 암릉 뒤로 고당봉이 보인다. 22
▽똑 같은 바위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듯이 사람도....
▽24
▽25
잠시 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12:26)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까지 70m

시간도 넉넉하니 마애여래입상을 보기 위해 우측길로 내려가자 곧 계단길이 시작되고 길의 양 옆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자리잡고 있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가산리
▽기묘한 형상의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주변의 바위
▽마애불 맞은 편의 바위봉
▽황지에서 발원해 굽이굽이 흘러온 낙동강이 어느덧...
마애여래입상에 도착하니 수직 바위면에 음각한 입상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도가 심하고 아주머니 2분이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고 있으며 그 옆에 안내문이 있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49호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이 불상은 금정산의 북쪽 화강암 절벽 위에 있다. 마애불은 높이 12m, 폭 2.5m나되는 거대한 여래입상이다. 마애불의 주변에 축대가 남아있고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에 새겨진 불상은 오랜 세월의비바람으로 심하게 마멸된 데다 바위에 균열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각 부분별로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쓴 듯한 흔적이 남아있다.
눈초리를 치켜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과 큰 코, 꽉 다문 입, 어깨까지 내려온 귀 등은 다정하고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이라기 보다 오히려 수호신[神將]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손모양이나 옷자락의 형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남아있는 옷자락의 주름 모양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일정한 양식을 따르지 않고 이리저리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있으며 두 개의 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주변 바위들의 모습-1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주변 바위들의 모습-2
바로 아래의 콘테이너 쪽으로 내려가니 보살님이 부른다.
"날이 추운데 커피 한잔하고 가세요"
사양하였더니 자꾸만 방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시계를 보니 점심 때가 되어 추운 곳에서 먹느니 이곳에서 먹는 것도큰 행운이다.
콘테이너는 암자라기 보다는 기도터에 가까웠다.
식사를 마치고 마애여래입상에서 잠시 기도를 올린 후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정맥을 이어간다.(13:40)
곧 바로 암릉을 거치는 길과 우회하는 길로 갈라지지만 당연히 암릉길을 택한다.
암릉길을 택하면 마애여래입상 맞은 편의 멋진 바위봉우리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주변 모습도 가히 일품이다.
▽마애불 맞은 편의 바위봉
▽지나온 장군봉과 746.6m봉
▽마애여래입상이 계신 곳(파란색으로 보이는 곳이 입상 앞의 기도처)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낙동강과 물금읍 방향
▽지능선의 바위
▽551번 도로와 남양산IC의 모습
▽고당봉 그러나 이곳에도 ?탑이....
조망이 좋은 바위지대 여기저기를 거치면서 송전탑을 지나 안부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나오니 정면으로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망망대해에 으젓하게 버티고 선 한 척의 군함을 연상케 만든다.(13:49)
▽고당봉 전경
안부의 이정표<금정산 정상 / 범어사 2.5km / 장군봉2.3km)>를 바라보고 금정산을 향해 소나무 숲 사이로 가파른 오르막이 잠시 나타나더니 곧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입석바위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곳이라 그리 위험한 곳은 없고 정상 바로 아래에 턱이 좀 높은 곳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그리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올라선다.(13:57. 4,290. 정맥외 산행포함 6,260보)
▽고당봉 표지석
평일임에도 10여명도 넘는 사람들이 정상에 있다.
많은 바위로 된 고당봉에서의 조망은 거칠 것이 없다.
▽낙동강과 양산(우) 물금 그리고 지나온 능선
▽장군봉과 746.6m봉. 계명봉 그 뒤에 원효산과 운상읍이 보인다
▽정맥과 나란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 하구
▽이어갈 정맥 마루금을 자세히 살피면 야간의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백양산과 엄광산
▽551번 도로와 남양산IC의 모습
금정산 출발(14:05)
【고당봉(801.5m)--2.3km(실거리 2.6km / 4,338보)--의상봉(640m)】
정상에서 내려와 정상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는 빨간 지붕의 당집이 있는 데 이곳이 금정산 고모당 신당이고 화주보살의 유언이 적힌 글이 문 앞에 걸려있다.
▽고모당 신당08
화주보살의 유언(姑母堂)
고모당은 육중한 돌담을두르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지만 당집의 규모가 워낙 작은데다 그 내부도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좁다란 두 개의 나무판자에 각각 "고모영신(姑母靈神)" 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 적어놓은 것만 벽에 기대어 놓았을 뿐이다. 당집 내부가 너무 비좁다보니 당제를 올릴 때도 제물만 방안에 차려놓고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좁은 돌담 내부에 천막을 쳐놓고 며칠씩이나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 고모당의 연유가 "궤범어사기궤유전"(1902년) 산 축령에 기록이 되어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에 밀양박쑈ㅣ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들끼리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어느날 이 보살은 큰 스님께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 제(姑塘祭)를 지내주면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돕고 지어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큰 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 차례(정월 보름날과 단오날)에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ㅏ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 박씨 할미의 높은 덕행을 기리기 위해 인격신이 되어 금정산을 담당한 진호신(鎭護神)으로 모셔 백성의 한재, 수재, 병재등이 발생되지 않도록 지금도 고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무속에서 인간을 돕고 수호하는 역할로 산신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기도를 밤낮으로 올리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한 때 범어사의 젊은 스님들이 고모 당에서 당제를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 범어사에서 잇따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다시 고모당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으나 고모당을 신성시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고모당과 금정산 고당봉
▽진짜 마루금일것이라 생각가하고 진행한 능선 상의 바위들14:13
▽바위에서 바라본 고당봉15
안내판과 있고 세심정 옆에는 이정표<이정표에는 범어사 1.6km / 구천주교 목장 1.5km / 동문 4km / 3망루 1.1km >라 적혀 있다.
▽고당봉(姑堂峰 : 높이 801.5m)
정상 부분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봉우리는 하늘에서 천신인 고모(姑母)할머니가 내려와 산신(山神)이 되었다(異說도 있다)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 바, 이는 고대의 신선사상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도 정상 부근에는 고모당(姑母堂)이라는 기도처가 있다. 금정산(金井山) 10여봉 중 최고봉이며 그 가슴께에 용머리 형상의 용두암(龍頭岩)이 있고 남쪽 산허리 쯤에는 고당샘이 있다. 동쪽 능선 허리에는 범천(梵泉)의 금어(金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살았다는 금샘(金井)이 있어서 금정산(金井山)과 범어사(梵魚寺)라는 이름의 연원이 되었다.
▽28
금샘과 범어사의 설화
금샘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로부터 신령스런 영산임을 알려준는 것과 "금정산"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발전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난다. 그 일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대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척(尺)이며 깊이는 7촌(寸)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나는 우물 곧 금정(金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梵魚)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사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있는데 신라 의상대사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해에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대왕이 근심에 쌓여 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 "금샘"에 가서 칠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대왕이 의상스님과 함게 친히 금샘으 ㄹ찾아 기도를 하니 땅이 크게 진동하며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현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을 격파했다. 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상스님을 예공대사로 봉하고 금샘 아래 호국사찰을 세웠으니 곧 '범어사'이다"
미륵사(彌勒寺)의 전설
왜적 5만 병선이 동해바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첩자를 뭍으로 올려 보냈다. 미륵암의 원효대사는 사미승에게 호히병 5개를 구해오게 혀 탑 앞에 나란히 세운 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그 장군기를 보고 2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왔다.
대사는 호리병으로 신술을 부려 첩자의 목을 졸랐다. 첩자들이 살려달라고 하자 호리병 3개를 대장에게 전해주라며 돌려 보냈다. 화가난 왜적 대장은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친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왜적들이 모두 놀라 그대로 달아났다. 대사가 신라의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에는 독성각 옆에 움푹 패인 자국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독성각으로 오르는 좁다란 돌계단길의 중간부분에는 석간수가 솟아나오는 작은 샘이 있다. 그곳 바위구멍에서 쌀이 나와 스님의 끼니를 잇게 했다고 한다.
▽세심정과 뒤로 고당봉이 보인다.30
▽북문31
▽금정산성(金井山城) 사적 21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장정동. 구서동. 북구 금곡동. 화명동. 만덕동 일원
이 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29)에 국방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7km, 높이는 1.5~3m이고 면적은 약 8.2제곱km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성이다. 처음에 산성을 쌓은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고대에 남해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8년)에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느 ㄴ여러 차례 있었으나 1701년(숙종28)에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하여 이듬해에 성을 준공하였다. 그 후 1807년(순조7)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이듬해는 서,남,북문의 문루를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금성산성부설비가 장전동에 전해온다. 이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까지 동,서, 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 북문을 복원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中軍)과 승병장의 직책을 가진 중간 간부와 군병등의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다. 그러나 유사시는 동래, 양산, 기장의 3개읍 소속의 군인과 사찰의 승려가 차출되어 지켰다. 금성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대비하기 용이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북문과 금정산 고당봉33
▽이어지는 길37
▽성벽길을 따라오르며 뒤돌아보는 고당봉39
▽잠시 성벽을 벗어나는 마루금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