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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9) 피에트로 아니고니의 ‘성 베네딕토의 영광’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 베네딕토 찬란한 천상에서 성인들과 함께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는 그즈음 480년경,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주(州)의 노르챠 지방에서 혼돈의 서방 교회를 밝힐 성인 한 분이 태어났다. 바로 베네딕토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2월 10일)와 함께.
움브리아 주는 이탈리아 장화 반도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접하고 있지 않은 주다. 외부와의 접촉이 항상 뒤늦게 있었고, 그 덕에 가장 이탈리아적인 문화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지방이 되었다. 이 지방 출신의 성인이 많은데, 소위 ‘이탈리아적’인 성인들이다. 베네딕토를 포함하여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성 클라라, 카시아의 리타 성녀 등이다. 모두 순교자가 아닐뿐더러, 영성의 대가들로 불린다.
수도 생활 공동 규범 세운 성인
베네딕토는 이른 나이에 사제가 되려는 꿈을 안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에 그가 바라본 제국의 수도는 전혀 이상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아 은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니에네(Aniene) 강이 흐르는 수비아코의 ‘거룩한 동굴(Sacro Speco)’로 들어갔다.
그는 3년간의 은수 생활을 통해 각종 유혹에 맞서는 법을 터득했고, 자기를 극복함으로써 수도자의 자질을 연마했다. 근처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형제들의 요청으로 그들이 만든 공동체의 원장이 되어 경험한 것은 수도 생활에서 규범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엄격한 베네딕토 원장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나오자,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일생 함께할 몇몇 형제들과 수도 생활의 양식을 결정하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새로운 곳, 카시노(Cassino) 지방으로 갔다. 로마에서 100㎞ 정도 떨어진 곳이다. 서기 529년경이었다.
카시노 지방은 여전히 에투르리아 민족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산 정상에는 아폴로 신전도 있었다. 베네딕토는 그곳을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바꾸고 대수도원을 지었다.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몬테(monte)’가 ‘산’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카시노의 산에 세워진 대수도원’이라는 말이다. 대수도원이 지어지던 530년경부터 지금까지, 그곳은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발생지가 되었다. 베네딕토와 형제들은 인근 주민들을 개종시키고 그곳을 성역화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저 유명한 수도 생활의 공동 규범을 마련했고, 서방 교회 최초의 ‘수도생활 규칙서’가 되었다. 단일한 수도공동체 안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토대로 공동의 기도, 학습, 노동 등 공동체 생활의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신앙을 중심으로 정주의 생활, 장상에 대한 순명, 노동의 성화 등은 서양 수도 생활의 근간이 되었고, 이후 설립되는 모든 수도회의 모델이 되었다. 공동생활 규범으로 탁월한 수도 생활 규칙서는 훗날 공산주의 이론가들에게도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 공동생활을 통한 공동 자산, 공동 노동, 공동 생산의 모델이 된 것이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수도 생활의 모토는 당시 노동을 노예들만 하는 천한 것으로 여기던 사회사상을 개혁하는 복음 운동이었다. 시간경에 따라 정해진 전례 생활 안에서 공동 기도와 노동으로 하느님을 찾으려는 수도 생활의 전형도 이 시기에 만들어져 자리를 잡았다. 이점 역시 뒤이어 탄생하는 여러 성인과 수도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베네딕토는 안으로는 순명, 침묵, 겸손으로 수도자들을 지도했고, 교회와 사회에는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관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동고트족의 왕 토틸라(Totila)를 개종시키는 등 민족들의 복음화에도 기여했다. 547년경,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에서 선 채로 선종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성가집」 펴낸 대교황
베네딕토 성인에 관한 이야기는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쓴 4권으로 된 「대화(Dialog)」에서 소개하고 있다. 교황은 이 책을 통해 노르챠의 성 베네딕토를 처음 세상에 알렸고, 그를 ‘서구 수도 생활의 시조’로 언급했다.
교황의 이런 소개는 그만큼 성인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민족들의 유입으로, 오늘날의 유럽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왕국들이 멸망한 제국의 땅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지형도가 바뀐 것이다. 그레고리오 교황으로서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종교 자유가 시작된 지 거의 2세기 만에 선교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베네딕토 수도회의 협력은 교황에게 큰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유럽 각지의 이민족 왕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할 수 있었고, 교황의 사목 방향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업적은 새 판이 짜여지는 유럽에서 교회의 입지를 굳히고, 교황으로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며, 통솔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사목과 정치, 사회-경제 활동에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레고리우스 성사집」을 발표하고, 그때까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내놓았다. 성가는 곧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불렸고, 전례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골 지방의 마르티노(316?~397), 독일 지방의 보니파시오(675~754), 영국 지방의 아우구스티노(604), 서부 슬라브 지방의 치릴로(826~869)와 메토디오(815~885) 등이 파견된 것은 이런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초상화 작가
이 작품은 피에트로 아니고니(Pietro Annigoni, 1910~1988)의 프레스코화다.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의 대성당 정면 바로 안쪽에 그려진 벽화다. 주제는 ‘성 베네딕토의 영광’(1979)이다. 아니고니는 우리 시대의 작가이고,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것으로 40㎡에 그렸다.
피에트로 아니고니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을 다니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회화를 공부했다. 다빈치의 디자인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15세에 부모를 따라 피렌체로 이사하여 벨레아르테 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탈리아 ‘현대 사실주의 화가들’이라는 그룹에 소속되어 추상 미술에 반대했고, 20세기 중후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도 대조되는 작업을 했다. 사실주의를 고수한 것이다.
초상화 작가로도 유명한 그는 현대작가 중 가장 많은 프레스코화를 남기기도 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중앙 제대의 벽화도 그가 그렸다. 그의 종교화는 바티칸과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미국, 영국 등의 미술관에 고루 소장되어 있고, 초상화는 세계적인 인물들을 두루 그려 특정 국가에서는 우표와 지폐에 새겨지기도 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그의 남편 에든버러 공작 필립, 동생 마거릿 왕녀, J.F. 케네디, 이란의 마지막 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덴마크의 현 여왕 마르그레테 2세와 이탈리아 정치인 알치데 데 가스페리, 독일의 경제학자 에르하르트 수상 등 많은 국제적인 인물들을 두루 그렸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작품 속으로
작품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것 같다. 성 베네딕토가 빛으로 가득한 천상에서 많은 성인에 둘러싸여 영광을 받고 있는 장면이다. Coelestis urbs Jerusalem beata pacis visio! 즉, ‘천상 도시 예루살렘의 복된 평화에 대한 직관이다!
작품을 통해 많은 과거의 스승들, 마사쵸, 라파엘로, 렘브란트와 고야를 연상시킨다. 인물들은 원근법적인 구도 속에 있고, 소실점은 베네딕토 성인의 뒤에서 빛으로 처리되어 신비주의 색채를 유지하는 동시에 그 너머에 있을 하느님의 현존을 예측하게 한다.
작품의 가장 위쪽, 저 멀리 양쪽에는 아브라함과 모세가 있고, 성 베네딕토는 가운데 찬란한 빛 속에서 많은 성인에 둘러싸여 있다. 그림의 앞에는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복자 빅토리오 3세 교황과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을 재건하여 1964년에 축성했고, 베네딕토 성인을 유럽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인물들의 자세는 뭔가를 경청하는 것 같고, 성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바탕의 금색과 청색의 어울림이 품위를 더해주는 가운데, 아니고니는 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그림 속 인물들과 같은 시선으로, 그림 밖 관객도 초대하고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10) 세바스티아노 리치의 ‘성모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그레고리오 교황’
전염병의 창궐… “주님, 저희를 돌보소서”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선포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2020년 3월 27일, 그날 하루 이탈리아의 사망자 수는 969명에 이르렀다. 최악의 날, 인류의 짐을 노쇠한 어깨에 짊어지고 혼자 ‘십자가의 길’을 바친 후, 힘겹게 계단을 오르신 다음 텅 빈 광장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시던 프란치스코 교황을 우리는 기억한다. 너무도 처연했던 그 장면은 역사에 그대로 새겨졌다
‘격리’를 영어로는 쿼런틴(quanrantine), 이탈리아어로는 ‘과란테나(quarantena)’라고 한다. ‘40일간’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딱 들으면, 척하고 알아듣는 말이다. 이 말은 교회 전통에서 나왔다. 중세, 근거를 알 수 없고 종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면 교회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40일간 기도와 참회를 권했다. 당시로선 전염병이 돌면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던 수도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코로나 앞에서 교회가 겪었던 최초의 페스트 팬데믹에 대해 다뤄 본다.
페스트 팬데믹과 기도 행렬
약 1430년 전인 589년 펠라지오 2세 교황 시대, 한 척의 배가 이집트에서 오스티아 항구로 들어온 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징벌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페스트’, 흑사병의 시작이었음을 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이민족이 대이동하는 가운데 터져 나온 일이었다. 그 결과 겨우 붙어있던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명줄은 완전히 끊어지고 제국으로서의 로마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망자는 1000만 명이 넘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희생이다. 희생자 중에는 교황도 있었다.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준 탓이다.
이듬해인 590년, 후임으로 선출된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3일간 기도와 단식과 참회의 행렬을 생각했다. 성직자 수도자는 물론 로마 시민 모두를 초대했고, 시민들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행렬에 참여했다. 그 유명한 ‘페스트 극복을 위한 성체 행렬’이었다. 이후 역사 속에서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성체는 감실을 나와 백성들 사이에서 행렬했고, 교회 전통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 모셔진 성 루카의 성모 성화를 로마인들은 ‘로마인들을 구하는 어머니(Salus populi Romani)’로 부르고 공경해왔다. 성화(聖畵)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7개 그룹으로 나뉘어 임무가 주어졌고, 백성은 한마음으로 로마시를 횡단했다. 라테란의 요한 대성전을 출발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했다. 성직자 수도자는 물론 귀족과 백성 그룹이 밤낮으로 기도하며 행렬을 이어갔다.
로마 시내 동과 서를 가르는 테베레 강에 이르렀다. 엘료(Elio) 다리(당시에는 ‘하드리아누스 다리’라고 부름)에 왔을 때, 교황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꼭대기에서 미카엘 대천사가 칼을 칼집에 꽂는 환시를 보았다. 행렬에 참여한 백성들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것을 감지했고, 팬데믹이 곧 물러갈 거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후, 교황의 명에 따라 천사가 나타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꼭대기에는 대천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치열하고 극적인 삶을 산 화가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행렬을 앞두고 ‘성모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이다. 후기 바로크 시대, 베네치아 학파에 속해 있던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 1659~1734)가 그린 것으로, 파도바에 있는 성녀 유스티나 대성당 내 그레고리오 경당의 제단화다.
베네치아 근처 벨루노 마을에서 태어난 세바스티아노 리치는 12살 무렵인 1671년부터 베네치아로 가서 페데리코 체르벨리와 세바스티아노 마쪼니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을 배웠다. 1678년 리알토에 있던 한 공방에서 일할 때, 두 명의 소녀를 임신시킨 일이 있었다. 한꺼번에 두 명이라, 그중 나이가 어린 안토니아 베난치오를 죽이기로 하고 독약을 준비했다. 다행히 미리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죄는 면할 수 있었으나, 감옥행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름난 피사니 가문 식구로 추정되는 ‘어떤 귀족’의 도움으로 풀려나 볼로냐로 갔다. 볼로냐의 중앙시장 근처 성 미카엘 성당에 있으면서 ‘피렌체 성 요한 형제단’의 요청으로 그들의 기도소에 ‘요한 세례자의 탄생과 죽음’을 그렸다. 이 작품은 분실되었지만, 그로 인해 리치가 루카 조르다노의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에 남긴 작품들과 비교하여, 그로부터 배웠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후 볼로냐, 파르마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던 중, 과거 자기가 죽이려 했던 안토니아 베난치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동안 안토니아는 딸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딸과 아내를 버리고, 화가 페루찌니의 딸 막달레나와 토리노로 도망쳤다. 즉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파르마의 공작 라누쵸 파르네세가 개입하여 무사히 풀려났다. 그리고 로마, 밀라노를 다니며 작품을 남겼다. 몬자대성당 내 테오돌린다 제단화(1697년)와 파도바의 성녀 유스티나 대성당 내 그림(1700년), 다시 로마와 비엔나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1734년 베네치아로 돌아와 안토니아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고 죽었다. 치열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최초의 대규모 자선사업을 벌인 대교황
제단화 ‘성모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은 1699년 제단이 만들어지자마자 그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8월 24일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같은 대성당 내 ‘거룩한 성체의 소성당’ 천장에도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천사들의 영광을 받으시는 성부 하느님, 사도들에게 현시되는 성체, 믿음-희망-사랑의 세 가지 덕목’이 주제다.
작품의 내용과 관련한 교회사적인 측면은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 중 하나기도 하다. 그는 ‘대(大)’ 교황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앞서 베네딕토 성인의 생애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수도생활을 경험한 최초의 교황이었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집대성했으며, 이민족들의 이동으로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세워진 새로운 왕국들에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학자며 사목자로서 최초의 「성사집」과 「사목 규범」 등 엄청난 양의 신학서, 사목서 등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성의 입장에서 가장 큰 업적은 롬바르드족의 장화반도 침입으로 북쪽에서 로마까지 밀려 내려온 피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초의 대규모 자선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의 자선사업의 배경에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모든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고, 교회는 단지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사회교리에서 이야기하는 이 가르침은 부자들의 양심을 건드렸다. 부자들을 향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상의 재화는 모든 사람과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것이기에 혼자만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교했다. 로마의 부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교황에게 재산을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했다.
백성의 신임과 지지를 크게 받은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롬바르드족을 개종시키고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내는 한편,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장화반도에서 교황의 영지를 확보하고, 그때까지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던 관행을 바꾸어 잊힐 뻔했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되찾아 왔다. 서유럽에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굳힌 최초의 교황이라고 하겠다.
작품 속으로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아기를 안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완전한 의탁을 의미하듯 팔을 벌려 간절히 청하고 있다. 표정과 눈빛이 절박하다. 한 손은 위를 향하고 다른 한 손은 희생당하는 자녀들을 보라는 듯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아기를 안은 마리아를 향하고, 발밑에는 온몸이 염증으로 뒤덮인 병자가 널브러져 있다. 병자 옆에는 마리아의 모성을 자극하는 듯 어린아이들이 죽은 어미 위에서 울고 있다.
왼쪽 저 멀리 배경에는 로마의 판테온이 보이고, 그 옆으로 행렬하는 사제단이 있다. 교황이 전례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전례를 거행한 후 백성의 중개자로서 즉각적인 조치를 호소하는 것 같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11) 생 질의 마이스터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는 생 레미’
유럽의 권력자 클로비스 왕, 그리스도교 수호자로 나서다
이민족의 침입, 유럽을 흔들다
5~8세기에 있었던 이민족들의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자리에 여러 이민족이 왕국을 세우는 기회가 되었다. 멸망한 로마 제국의 국경은 공화정에서 제국 시대로 바뀌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후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기점으로 하고 있었다. 국경 밖에는 로마 제국과 마주하던 게르만족이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고, 그 너머에는 동-서고트족, 반달족, 비스고트족, 프랑크족, 앵글족, 색슨족 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제국의 주력 부대는 이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수비군단으로 그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다른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기 이전까지 이런 관계는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되었고, 오히려 제국의 국경과 근접해서 살고 있던 게르만 공동체는 로마 문명과 친해졌다. 4세기 초에는 로마의 큰 주에서 게르만인들을 노동자로, 용병으로 쓰는 사례가 많아졌다. 5세기에 이르러 제국의 차원에서 이민족들의 제국 내 침략에 대한 방어의 많은 부분을 게르만인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로마인들에게 그들은 몇 가지 점에서 ‘야만’에 해당되었다. 첫째, 공동체를 법률에 기반하여 운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냥, 수렵을 하던 민족이었고, 일부일처제의 가족 제도와 수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후에 그리스도교의 교계제도와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둘째, 그리스도교와 같은 고등종교가 없었다.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같은 자연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셋째, 라틴어와 같은 언어체계가 없어 문학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게르만을 비롯한 이민족들은 ‘야만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마 제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내부의 혼란과 모순이 심화하고, 각 체계가 약화하면서 점차 멸망의 조짐을 보였다.
여기에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역에서 발흥한 유목 기마 민족이었던 훈족의 서진은 로마 제국 국경에 있던 여러 이민족의 등을 제국의 영토 안으로 밀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2세기에 들어서면서 훈족의 서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75년, 훈족은 동고트족을 압박하여 그들의 땅 대부분을 빼앗았고, 여기에 놀란 서고트족은 이듬해(376년)에 살던 곳을 떠나 일부는 서쪽으로, 일부는 동로마 발렌티우스 황제의 허가로 다뉴브강을 건너 트라키아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것이 민족 대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약 100년간에 걸쳐 이민족들은 서로마 제국의 영내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425년부터 반달족이 스페인을 짓밟고 이탈리아의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이 시기, 히포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망했다(430년).
훈족은 동고트족을 정복한 후에도 서진을 계속했고, 급기야 452년에는 로마까지 밀고 들어왔다. 놀란 레오 대교황이 나가서 담판을 짓고 물러가게 했다.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의 방 중 엘리오도로의 방에 그려진 ‘레오 대교황과 아틸라의 만남’은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다. 훈족이 쇠퇴한 후에도 동고트족은 결국 로마를 쓰러트렸고, 랑고바르드족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를 접수했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반달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멀리 북아프리카를, 프랑크족은 북부 갈리아(파리, 노르망디, 루아르, 샹파뉴)를 포함한 지금의 프랑스 땅 대부분을, 부르군드족은 남부 갈리아를, 앵글족과 색슨족은 멀리 영국을 접수하고 각기 왕국을 세웠다.왕국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계속되는 혼란 속에 ‘유럽’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한 번 세워진 후 망하지 않고 빨리 안정적인 국가의 면모를 갖춘 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한 왕국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크 왕국이다. 오히려 점차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그 이유가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내용이다.
클로비스 왕, 로마 문화를 전파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Clovis)는 원래 프랑크족의 족장이었다. 그는 흩어져 살던 프랑크족들을 모아 486년에 오늘날의 프랑스 땅에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메로빙거 왕조를 설립했다. 그가 왕국을 세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는 말도 있고, 알라마니족을 정복할 때 신의 도움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여기에서 그는 ‘제2의 콘스탄티누스’라고 불리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도입하고, 로마 제국의 많은 제도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미래 왕국의 발전에 중요한 포석을 놓았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주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고, 동로마 황제로부터는 ‘명예 집정관’의 칭호까지 받았다.
클로비스 왕은 유럽 내 여러 이민족 왕국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6세 후반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아냈고, 주변 국가들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새판이 짜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공동의 정신과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클로비스 왕의 세례는 프랑크 왕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지속적인 번영과 유럽의 권력자로 부상하는 시발점이 되는 한편 바티칸의 장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파리에서 활동한 익명의 화가
이 한 장의 작품은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생 질의 마이스터 작,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는 생 레미’다. 작가인 ‘생 질의 마이스터(Matre de Saint Gilles)’는 익명의 화가다. 15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프랑크-플레밍고 사람으로 추정된다. 휘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가 있던 플랑드르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일찌감치 파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많은 작품 속 배경이 파리와 파리 주변의 기념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혹적이면서도 평온한 이미지와 주인공들의 얼굴은 프랑스인과 프랑스 문화를 모델로 하고 있다.
‘생 질의 마이스터’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파리시에 있는 생 루와 생 질 성당(glise Saint-Leu-Saint-Gilles)을 위해 그린 일련의 그림들 때문이다.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두 점은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고, 또 다른 두 점은 워싱턴 국립미술관 내에 있다. 모두 150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생 질의 미사’와 ‘생 질과 암사슴’은 런던에, 도상학적으로 같은 계획안에 포함되어 같은 장소에 두기 위해 제작한 ‘생 레미에 의한 어떤 아리안의 개종’, ‘생 레미의 클로비스 세례’는 워싱턴에 있다.
이 작품들 외에 몇 개의 다른 작품들을 빼고는 작가에 대한 정보가 매우 빈약하다. 그가 파리에서 활동한 시기도 길게 잡지는 않는다. 1468년 플랑드르에서 태어나, 1490~1500년에 파리에서 활동했고, 1530년경 파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본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 랭스대교구에 있는 노트르담 드 랭스 주교좌성당이다. 496년 클로비스 왕이 30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랭스대성당에서 생 레미(성 레미지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원래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 목욕장이 있던 장소였다. 후에 클로비스 왕의 세례를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이 세워지고, 역대 프랑스 군주들이 대관식을 치르는 장소가 되었다.
작품 속에서 클로비스 왕은 왕관을 쓴 채 고대 로마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목욕탕 안에 들어가 침례를 받고 있다. 생 레미 주교와 그 뒤에는 사제단이 있다. 입고 있는 제의와 전체적인 옷 색상을 통해 템페라에 기름을 사용하여 디테일하고 화려함을 더했음을 알 수 있다.
왕 뒤에는 왕비로 보이는 여성과 그 외 인물들의 진지한 표정과 오르간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고 있는 구경꾼들을 통해 현실성이 가미되고, 왼쪽 배경에 병사들을 축소시켜 그린 것 같은 전형적인 플랑드르 학파의 특징들이 모두 드러난다. 또 플랑드르의 초상화 문법에서 보는 4분의 3을 차지하는 인물 묘사의 특징이 클로비스와 주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작가는 주교가 마치 아들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목욕탕에 들어간 아들은 다소 왜소하면서도 다부져 보이고, 물을 부어 세례를 주는 아버지는 듬직하게 보인다. 바티칸의 장자를 보는 것 같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2) 지롤라모 시촐란테 다 세르모네타의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
프랑스 군주, 군사력과 새 영토를 교황에게 바치다
교황령의 확장
클로비스 왕의 개종으로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지지 속에 유럽에서 점차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754년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와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차지한 롬바르디아를 물리치고 영토를 모두 평정했다. 라벤나 지방을 비롯한 이탈리아 중부지역 일대였는데, 피핀은 그 땅들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기증했다.
역사는 이것을 ‘Promissio Carisiaca’, ‘Donatio Carisiaca’, ‘Quierzy 조약’ 혹은 ‘Quierzy 기증’이라는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는데, 한마디로 ‘피핀의 기증’을 말한다. 이것은 과거 콘스탄티누스가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기증한 교황의 영토가 로마 밖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고, 당시의 국제 관계 속에서 ‘교황령’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재차 언급된다. 교황령이 탄생하는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단순하며 서정적 화풍의 작가
오늘 감상할 작품은 지롤라모 시촐란테(Girolamo Siciolante)의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이다. 시촐란테는 1521년 세르모네타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피스토이아(Pistoia)와 페린 델 바가(Perin del Vaga) 밑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바사리(G. Vasari)가 ‘탁월한 제자’라고 평한 걸로 봐서 바사리 밑에서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라파엘로가 기획했던 ‘판테온의 유덕한 사람들 모임’을 1543년에 공동으로 창설했다.
매너리즘이 꽃을 피우던 시절에 대부분의 화가가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추종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라파엘로를 추종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이다. 그는 이후 점차 절충주의 매너리즘으로 이동하면서 프레스코화와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미켈란젤로의 추종자들이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조각 효과를 보여준 반면에, 시촐란테는 조용하고 단순하며 서정적인 화풍을 유지했다.
시촐란테가 로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세르모네타의 군주는 카밀로 카에타니였고, 그의 외사촌 알레산드로 파르네제가 바오로 3세 교황(재임 1534-1549)이었다. 카에타니 가문과 파르네세 가문이 사돈지간이라 시촐란테는 양가에서 후원을 받으며 바티칸 궁과 파르네세 궁에 작품을 남겼다.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한 기증’ 작품은 바티칸 사도궁 남쪽 날개 부분, 과거 교황이 각국의 왕들과 제후들을 맞이하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가톨릭 쇄신 운동을 주도했던 바오로 3세 교황은 1534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를 재정비하도록 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과 바티칸의 궁들도 다시금 손을 보았다.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1545~1563년 트렌토(트리엔트)에서는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사도궁의 이 방은 과거 왕들과 제후들이 공식적으로 교황을 알현하던 곳으로 교황에 대한 순명 서약을 하던 장소이다. 이곳에 가톨릭 쇄신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과거 피핀 3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이탈리아의 영토를 기증하는 이야기를 벽화로 그렸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를 담았다고 하겠다.
한편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는 예술가들에게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했고, 예술적 표현에서 전통적인 장식을 준수하고 모호한 방종은 배제하도록 했다. 이것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작품을 통해 정통 교회의 수호자라는 강요와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위기는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촐란테의 보수적인 스타일은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에 도움 요청
작품에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은 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테파노 2세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자 대립각을 세웠다. 동로마의 황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고, 교황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동로마 황제는 라벤나에 총독부를 두고 로마를 좌지우지했다. 그런 때에 롬바르드족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인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고 로마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에 스테파노 2세 교황은 동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프랑크 왕국의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할 목적으로 754년 1월 6일, 직접 프랑크 왕국의 궁정을 찾았다. 프랑크 궁정은 교황을 크게 환대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에게 기름 부음 예식을 거행하고, 장엄 축복을 했다. 피핀은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수호하겠다는 성대한 서약을 했다. 이 예식은 점차 대관식으로 발전했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앙시앵 레짐’(‘구체제’, ‘낡은 체제’)이 종식될 때까지 역대 프랑스 군주들의 전통이 되었다.
프랑크의 귀족들은 퀴에르지에서 롬바르드족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에 동의했고, 피핀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라벤나에서부터 로마까지 영토를 모두 점령했다. 그리고 그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로써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영토, 곧 교황령을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피핀의 기증’ 문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8세기 후반, 이 문서를 출처로 밝힌 인용 문구들이 전해오고 있다.
작품 속으로
가운데 고대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를 연상케 하는 옷을 입고 머리에 프랑크 왕국의 권위를 상징하듯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피핀 3세다. 왕은 근엄하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계단을 오르려고 하고, 바로 뒤에서 동행하는 사제들은 르네상스 시기에 입던 성직자의 평상복을 입고 있다.
피핀의 뒤쪽 배경에는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가 로마 시대 건물이고,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프랑크 왕국의 군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군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메디치 문장이 있는데, 작품을 의뢰한 비오 4세 교황의 문장이다. 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먼 친척인 밀라노 메디치 가문 소속이다.
피핀 일행은 확인되지 않은 어떤 건물로 오르고 있다. 피핀 앞에서 계단 하나를 이제 막 오른 사람은 맨발에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 손이 뒤로 묶인 것으로 봐서 전쟁 포로로 붙잡힌 롬바르드의 왕 아스톨포로 짐작된다. 포로 옆에 있는 사람이 손에 든 작은 동상은 라벤나 관구를 상징한다. 그 땅을 로마 교회에 돌려주기 위해 들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 장면을 더 잘 보겠다고 뒤쪽 기둥 위로 오르는 젊은이도 있다.
이 벽화는 역사적인 사건을 함축하여 재구성했다. 일종의 광고용으로 보인다. ‘피핀의 기증’은 교회사는 물론 그리스도교 서양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교황의 신적, 인간적 권위를 황제로부터 되찾아 왔다는 것뿐 아니라, ‘영토 지배’라는 세속적인 권력이 공식적으로 발의되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교황의 요청에 따라 왕이 군대를 움직였다는, 실질적인 권리집행자라는 더 큰 뜻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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