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
미국 록밴드 캔자스(Kansas)는 1977년 ‘Dust in the wind (바람 속 먼지)’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밴드의 한 멤버가 미국 원주민들의 시를 모은 시집에서 ‘우리는 그저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란 문장과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는 구약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쓴 가사라 한다. 캔자스는 이 노래에서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 / Dust in the wind (바람 속에 흩날리는 먼지) /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서정적인 멜로디로 표현했다. 이 곡은 1978년 빌보드 인기 순위 6위까지 올라갔으며 전 MBC 라디오 DJ였던 김기덕씨가 네티즌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하고 펴낸 책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곡」(2002년)에도 포함되어 있다.
먼지란 사전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가벼운 고체 입자’로 바람에 의해 운반되고 중력에 의해 지표면에 퇴적된다. 먼지란 단어 자체는 굉장히 하찮은 뉘앙스를 주지만 인류의 시작은 캔자스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먼지였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는 질량을 기준으로 산소(65%)·탄소(18.5%)·수소(9.5%)·질소(3.3%)가 96% 이상을 차지하는데, 질량비가 아닌 개수로 가장 많은 것은 수소이며 몸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수소는 우주를 구성하는 비율이 75%나 될 정도로 우주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별의 주요 구성 원소가 수소이기 때문이다. 빅뱅과 우주의 진화 과정 이론에 의하면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수소는 우주에서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이 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star dust)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인류는 우주와 연결된 존재이므로 별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동시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했다.
구약 성경도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하였듯이 인간의 시작과 끝은 먼지다. 그 옛날 권력과 부를 누리던 왕후장상(王侯將相)과 평범한 민초(民草)들도 결국 생을 마감할 때는 먼지로 돌아갔다.
11월 2일 주일은 교회가 정한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다. 나 역시 언젠가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과거의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은 그의 시 「햇살에게」에서 ‘이른 아침에 /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제는 내가 /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처럼 나도 먼지이리라. 먼지로 시작하여 결국 먼지로 돌아갈 나의 삶이여! 캔자스의 노래처럼 속세의 풍파(風波)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인 나는 어떤 존재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가? 세상을 흐리게 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황사나 미세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기를, 겸손하고 별처럼 빛나는 별의 먼지이기를 간구한다.
[과학과 신앙] (51) 네 가지 힘
해가 진 후 가을의 서쪽 밤하늘에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 여름철 별자리들이 지평선 밑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밤하늘 무대에서 퇴장하는 주인공 중에는 헤라클레스 별자리가 있다. 그리스 신화 속 힘 센 영웅 헤라클레스는 모든 힘 센 남성들의 워너비이자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슈퍼 히어로들의 원조다. 헤라클레스처럼 강한 존재는 힘이 약한 존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연의 생명체들에게는 강한 힘을 소유하느냐 아니냐가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렇다면 힘이란 무엇일까?
물리학은 힘(force)을 물체의 운동 상태나 형태를 변화시키는 원인으로 정의한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힘이 존재하지만 우주의 시작인 빅뱅 이후 우주를 지배하는 힘은 크기순으로 강력·전자기력·약력·중력 네 가지로 구분한다.
강력(强力)은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강하게 결합하게 하는 힘으로 우주에서 가장 강한 힘이다. 강력이 없다면 원자가 생성될 수 없으므로 우리 몸을 비롯해 우주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전자기력(電子氣力)은 두 전하(전기적 성질) 사이에서 나타나는 힘으로 서로 다른 전하를 띠는 입자는 잡아당기고, 같은 전하를 띠는 입자는 밀어낸다. 전기 없는 현대 문명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가 주변에서 경험하며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힘은 전자기력이다.
약력(弱力)은 방사성 붕괴를 일으키는 약한 핵력으로 대륙이동을 일으키는 지구 내부 열에너지의 원인이다. 뉴턴에 의해 유명해진 중력(重力)은 질량을 갖는 두 물체가 서로 잡아당기는 힘으로 컵에 물을 따를 때처럼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힘이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이러한 기본적인 네 가지 힘이 상호작용하여 존재한다.
시야를 좁혀 우주가 아닌 인간 사회로 포커스를 맞춰보자. 현대의 헤라클레스가 되고픈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타나는 또 다른 네 가지 힘이 있다. 권력·재력·폭력, 그리고 무력이다. 권력(權力)은 남을 지배하거나 복종시킬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공인된 힘이다. 재력(財力)은 재산과 재물에 의해 행사할 수 있는 힘으로 권력과 재력은 종종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상호작용하는 경우를 목격한다. 권력과 재력은 어떤 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자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폭력(暴力)은 남을 제압할 때 사용하는 거칠고 사나운 물리적인 힘 또는 수단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대상으로 하며 인종과 민족 간 폭력, 학교 폭력,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등 그 모습은 다양하다. 무력(武力)은 병력과 무기를 바탕으로 하는 군사적 힘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을 통해 그 모습을 알 수 있으며, 인류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과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무력의 공포와 결과의 허무를 경험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힘은 우주의 본성과 신성에 부합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지만 인간에 의해 나타나는 힘은 인간의 야만성과 욕망에만 부합하며 파괴와 소멸만을 가져온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의 헤라클레스들이여! ‘세상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곳에서 진보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깊이 새겨 들으라.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5) 마음의 상처
“자기 자신 외에 상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는 영혼에 항상 그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가능한 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평상시 영혼의 근력을 키우는 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철학상담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문제 해결에 있지만, 평상시 영혼의 근력을 키움으로써 쉽게 상처받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러면 상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os, 55~135)는 “자기 자신 외에 상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annes Chrisostomus, 349~407)는 “자기 자신을 상처 내는 경우를 제외하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자는 타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외부로부터 영향받음의 상태에 놓여 있다. 감각·지각에서 출발하는 인간의 인식 자체가 일종의 영향받음이자 감염이다. 좋지 않은 경험, 고통스러운 경험은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며 우리를 감염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설사 우리가 받은 상처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내게 상처가 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스토아 철학자들은 ‘마음의 평정심’(아파테이아)을 얻기 위해 평소 철학적 훈련을 하였다.
상처는 그에 상응한 외부의 대상도, 그 깊이의 절대적 기준도 없다. 상처는 상처를 받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 삶과 고통 그리고 자기 상처를 창조적이고 성숙한 방식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륀(Anselm Grün, 1945~) 신부는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고통과 상처의 씨앗은 외부의 것에 의존하거나 흔들림으로써 ‘내적 자유’를 잃고 결국 스스로 자기를 가해하는 행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사실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만들어내는 우리의 ‘표상’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표상 때문이다.
즉 고통에 대한 잘못된 표상이 바로 우리를 괴롭히고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우선 올바른 표상을 갖는 것이 우리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길이다. 물론 이는 철학적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실과 실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 없이 결코 한계를 넘어 ‘보다 더 큰 실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상처의 치유를 위한 올바른 표상 갖기는 매사 진정성 있는 신중함에서 시작된다. 건전한 상식과 어디에도 치우침 없는 불편심, 그리고 사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을 끊음으로써 외부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 세계에 대한 올바른 표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올바른 표상을 갖기 위해 또한 우리에게 존재의 신비 앞에서 세계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경건함이 필요하다. 경건함 없이 결코 삶의 전체 의미를 직관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없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7) 실존론적 양심
양심의 목소리, 실존적 결단 이끄는 결정적 계기
양심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는 어원적으로 ‘함께’라는 뜻의 ‘쉰(συν)’과 ‘안다’라는 뜻의 ‘오이다(οἶδα)’가 결합된 단어로, 라틴어 ‘꼰쉬엔찌아(conscientia)’가 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직역하면 양심은 ‘함께 안다’라는 뜻으로 결국 ‘확실하고 견고한 내적 인식의 근거’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견고한 지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것’, 즉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이라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사형까지 당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양심을 이성적 자기 인식에 기반한 도덕적 확신과 자각된 지혜로 이해한다. 도덕적 판단과 행위의 기반이 되는 스토아 철학의 양심 개념은 이후 그리스도교에 수용되고 발전한다. 양심은 본성적으로 선을 지향하는 영혼의 경향성으로 인간적인 자기 행위의 도덕적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런 양심의 근거는 이성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선한 하느님이다. 양심이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는 한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반면, 신에 근거할 때 신비로운 모습을 띠기도 하며, 어느 때는 경직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계몽 시대의 양심은 철저하게 신으로부터 분리되며, 오로지 개개인의 이성에 기반한 자율적 판단 능력으로 이해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양심을 철저하게 외면적이고 타율적인 심급에서 내면적이고 자율적인 심급으로 전환한다. 양심은 이성이 자기 입법을 근거로 하는 ‘내면의 법정’과 같다. 종교는 더는 도덕적 판단을 위한 객관적인 인식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이성에 따라서 판단할 뿐이다. 물론 칸트는 도덕 실천을 위한 삶의 규제 원리로서 종교를 요청한다.
나치에 끝까지 저항했던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게 양심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단순한 ‘현존’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실존하도록 요구하는 내면의 부름’이다. 이때 양심의 부름은 심판자의 목소리도, 신의 목소리도, 어떤 객관적인 도덕법칙을 대변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오히려 양심은 단순한 현존으로부터 자신의 본래적 실존이 될 것을 요구하는 ‘절대 의식’이다.
이런 실존을 붙드는 절대 의식은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실존적 현기증과 위기의 순간에 양심의 목소리로 나에게 개시된다. 절체절명의 실존적 위기의 순간에 이 양심의 목소리는 나의 실존적 결단을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결단은 존재 전체를 걸고 이루어지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근원적 선택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이런 자기 결단 역시 불확실할 뿐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마저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이다. 이런 인정이 바로 우리의 진정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양심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착각과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심 앞에서 부단히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검증하는 일은 진정한 용기이자 실존이 되는 길이다. 이런 야스퍼스의 양심은 그릇된 권력과 법 앞에서 무뎌진 양심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치유를 위한 경종의 목소리가 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9) 진리
진리, 본래의 자기 드러냄인 ‘탈은폐’의 사건
“진리가 무엇이오?” 예수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순간에 빌라도가 예수께 던진 이 물음은 참된 앎을 추구하는 인간 모두에게 던져진 삶의 근본 물음이기도 하다. ‘지식(앎)’과 ‘원의(열망)’는 인간의 정신적 실행의 두 근본 요소로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다. 이 지식은 항상 ‘참된 것’, 즉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께 던진 물음에서 짐작하듯 진리 이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식의 근거와 방법을 탐구하는 철학의 인식론의 주요 주제였다. 일찍이 플라톤(BC 428/7~348/7)은 참된 지식은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에 있지 않으며, 그보다는 불변하고 영원한 것, 즉 ‘선’의 이데아 세계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진리는 항구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그럴 수 없으며, 항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모든 지식이 원천적으로 진리를 함축하고 있어야 하지만, 인식의 제약으로 인해 진리는 철학적 의미에서 항상 참인 지식으로서의 절대적 진리, 즉 진리 자체와 제한된 지식으로서의 상대적 진리로 구분된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은 모두 그것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라 할 수 있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인식 대상의 표준(본질·성질·속성)과 언어적 진술 형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를 의미하며, 이는 판단을 통해 참과 거짓으로 밝혀진다. 즉 진리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사태요, 동시에 언어적-논리적 사태다. 진리는 형이상학적으로 참된 실재와 관련된 것이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철학자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에 상응한 다양한 진리 이론이 있다. 대표적 이론으로서 사물과 지성의 일치에 기반한 진리 ‘대응 이론’, 진술의 정합성에 기반한 진리 ‘정합 이론’, 삶의 실용성에 기반한 진리 ‘실용주의 이론’, 의사소통과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진리 ‘합의 이론’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볼 현대 이론으로서 ‘해석학적 진리’가 있다. 이 이론의 중심에 하이데거(1889~1976)가 있다. 그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에 맞서 진리의 본질은 로고스의 기능인 ‘보게 해줌’에 있다고 강조한다. 무슨 뜻인가? ‘로고스’, 즉 ‘말’은 본래 존재 진술에 관여하면서 존재를 ‘은폐되어 있음’에서 끄집어내어 ‘비은폐된 것’으로 보이게끔 해주는 본질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존재의 ‘비은폐성’이 소위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말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자기를 덮고 있던 망각과 은폐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기를 드러내는 ‘탈은폐’의 존재 사건이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로서 존재 진리의 물음 앞에 놓인 유일한 존재자다. 문제는 세계가 앞서간 사람들에 의해서 미리 이해된 세계라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역사-문화’와 ‘철학-이념’의 형태를 띤 미리 이해된 ‘선이해’는 현재 우리의 이해 기반이 되지만, 새로운 진리 인식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얽매일 때 진리에서 멀어지며, 자유롭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 상담] (64) 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은총의 문이 열리는 때
우리는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며 바쁜 삶을 보낸다. 때로는 흘러간 과거에 얽매여 고통을 겪기도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은 뉴턴(1642~1727)이 정의한, 절대적이며 균일하게 흐르는 물리적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오래전부터 철학의 핵심 주제였으며, 그것이 주관 밖의 객관적 실재인지, 아니면 순수한 주관적 실재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고전적인 시간 개념으로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가 있다. 크로노스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연속적 시간, 곧 양적이고 측정이 가능한 시간을 가리킨다면, 카이로스는 기회와 결단이 바로 ‘지금-여기’에서 사건으로 도래하는 결정적 순간, 곧 질적이고 비연속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뉴턴적 시간 개념이 크로노스의 시간에 해당한다면, 시간을 기억(memoria)·현전의 직관(contuitus)·기대(expectatio)라는 세 차원의 현재로 재구성한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시간 이해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접점을 지닌다.
칸트(1724~1804)가 시간을 주관의 선험적 형식으로 규정한 이후, 현대의 여러 철학자는 시간을 의식·존재·실존의 구조로 파악한다. 후설(1859~1938)은 시간을 의식에 내재하며 의식의 흐름을 구성하는 요소로 보며, 하이데거 (1889~1976)는 그것을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조로 이해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세계에 ‘이미-던져져-있음’(과거)을 지닌 존재로서, ‘지금-여기’(현재)에서 ‘도래로서의 자기 가능성’(미래)를 향해 기투하는 존재이다. 이때 시간은 단순한 연속적 흐름이 아니라, 현존재가 세계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고 획득하는 실존적 계기가 된다. 한편, 야스퍼스(1883~1969)는 인간 실존이 자기 초월의 과정에서 창출하는 고유한 시간 경험으로서 ‘실존적 시간성’을 제시한다. 이는 비대상적이고 포착 불가능한 실존의 성격상 객관적이고 측정이 가능한 ‘세계시간(Weltzeit)’과는 달리, 한계상황과 결단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열리는 시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간은 실존에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개시하는 내적 사건의 순간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이 시간적 존재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에 내맡겨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의 주체’라는 뜻이다. 시간은 인간 세계를 구성하는 고유한 요소이다. 인간은 자신의 체험을 시간적 실재의 지평 안에서 형성한다. 이는 인간이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존을 기획하는 주체이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삶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기억은 오래전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었듯이,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나 집착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된다. 특히 그 과거가 상처투성이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부정적 경험에 사로잡혀 멈춰 선 시간에 머문다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다. 세네카(기원전 4~65)는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만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 비로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자책하기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 상담] (65) 감정
괴로운 마음, 감정 탓 말고 관계를 성찰하라
치유는 관계 재구성에서 시작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 감정의 통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사유되어 온 주제다. 이와 관련하여 에피쿠로스학파가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절제하고 공포를 제거함으로써 ‘아타락시아’, 즉 ‘영혼의 평정’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스토아학파는 표상에 대한 통제를 통해 ‘정념’을 극복함으로써 ‘아파테이아’, 즉 ‘무정념(無情念)’의 상태를 지향했다. 물론 이들이 다스리고자 했던 것은 슬픔·고통·공포·욕망·부적절한 쾌락 등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정념들이다.
감정은 어원적으로 ‘정념’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 ‘파토스(πάθος)’와 라틴어 ‘파시오(passio)’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동적으로 겪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영어 ‘emotion’은 라틴어 ‘movere(움직이다)’에 ‘e-’(밖으로)가 결합된 ‘emotio(움직여 나감)’에서 유래하여, ‘밖으로 움직여 드러나는 정서적 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감정은 ‘수동적으로 겪는 상태’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정서적 운동’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감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수용 능력인 ‘감성(sensibility)’이 전제되어야 하며, 감각적 지각이 선행될 때 비로소 ‘느낌’이라는 감정 상태가 형성된다.
서구의 전통적인 이성 중심주의는 이성을 가장 우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여 감정을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폄훼해 왔다. 그러나 일상적 삶에서 인간은 이성적 사유 못지않게, 혹은 그에 앞서 감정에 크게 의존하며,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성적 판단에 앞서 근원적인 감정에 따라 타자와 동화되거나 타자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감정을 단순히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으로 환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고대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잘못된 표상과 가치판단에서 비롯된 ‘정신의 오류’로 간주하고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았으나, 근대의 흄은 감정을 도덕 판단의 근거로 삼아 도덕 감정에 기반한 ‘공감 윤리학’을 제안했다. 셸러 또한 감정을 이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가치를 직관하는 능력으로 보았으며, 공감이나 사랑과 같은 감정은 이러한 가치 직관의 구체적 양태로 이해될 수 있다.
짐멜은 감정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동력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한편으로는 직접적이며 비매개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결속과 대립을 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형식의 매개를 통해 지속성과 객관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감정은 사회적 관계의 결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직접성과 매개성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형식들을 산출하는 생성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질투는 제3자의 개입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배타적 삼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긴장의 정서적 표현이며, 시기는 비교와 차이를 전제한 상호작용의 형식 속에서 형성되는 긴장의 정서적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정은 맹목적인 내적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형식이 작동할 때 그 형식의 내적 진실이 정서적 형태로 표출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때 감정의 치유는 특정 감정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감정을 산출하는 상호작용의 형식을 성찰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관계 속의 긴장을 완화하고 새로운 거리와 균형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