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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교회의 은총
12: 13-15
○ 용의 핍박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계12:3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출19:4, 신32:11, 계12:6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영감의 사람 사도 요한은 반드시 속히 되고 말 종말의 계시를 받아 이것을 온 세상 앞에 공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 때문에 밧모섬에 정배를 당하게 섭리하시고, 그곳에서 종말계시의 비밀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계 1:1, 9).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과 예수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제1차 전쟁은 사탄(용)이 화육강세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려 했습니다(계 12:1-4).
그러나 예수는 여인의 몸에서 탄생했고, 사시고 죽으심으로 속죄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사탄(용)은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계 12:5-6).
제2차 전쟁은 사탄(용)이 예수의 부활, 승천을 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였던 미가엘과 그 사자들에게 용은 참패했고, 예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오르심으로 승귀의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계 12:7-8).
제3차 전쟁이 또 보입니다.
그것은 용(사탄)이 아이(예수)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큰 독수리가 두 날개를 가지고 나타나서 용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그 여자를 등에 업고 광야 자기 곳으로 피하여, 거기서 그 뱀(용)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았다고 하였습니다(계 12:6, 14). 그때 그 여자의 뒤에서 뱀(용=사탄)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그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땅이 그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킴으로 그 여자가 살아남게 된다고 하였습니다(계 12:15-16).
또 남은 전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참패한 용이 분노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다고 하였습니다(계 12:17). 말하자면 남은 전쟁이 아직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준 큰 진리는 여자로 묘사된 교회와 용(사탄)과의 싸움입니다. 그 여자는 광야에서 용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광야는 사실상 지상전투 교회의 현장(현주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Ⅰ. 광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피난처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6절에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12장 14절에도 「…광야 자기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광야가 일정하게 정해진 지정학적인 장소라고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사실상 여기 광야는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양육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곳입니다. 우리 본문에도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양육’이란 말은 ‘시련’, ‘연단’, ‘훈련’, ‘단련’, ‘연마’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사실상 가나안 땅 정착을 위한 연단의 장소로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 백성을 낮추시며, 높이시며, 시험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목마르게도 하시고, 굶주리게도 하시고, 적의 침략을 받게도 하셨습니다(신 8:2-3). 예수님도 그의 성역 초기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훈련하셨습니다(눅 4:1-13). 예수님은 이 세상을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장소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예수님은 우리를 이 환난의 세상에 남겨두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너희를 핍박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광야는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이 쏟아지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에는 용이 남자(아이)를 낳은 여자를 핍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 여자는 용의 핍박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 순간 갑자기 큰 독수리가 나타나 그 육중한 두 날개로 여자를 업어 광야 자기 곳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는다고 하였습니다(계 12:14).
여기 독수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기적의 장면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기적과 광야 40년의 기적적 구원을 말할 때, 하나님의 자기 구원의 능력을 독수리에다가 비유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에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구원의 기적을 가리켜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신명기 32장 11-12절에도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이 세상 광야에서 기적적인 양육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광야가 사막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 바로 왕의 궁일 수도 있습니다. 양치던 미디안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 십 황무지나 엔게디나 여러 피난지 등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강과 바다와 감옥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 바로 종말계시의 영감이 임하던 밧모섬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빈들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 호렙산일 수도 있습니다. 요나의 경우 고기 뱃속일 수도 있습니다.
2000년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바로 하나님의 택자 구원을 위한 양육의 장소가 광야, 곧 이 세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모두 주님의 등에 업혀 보내어진 곳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로마 10대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카타콤(지하동굴)은 거대한 기독신자들의 광야교회가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피난 장소인 광야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자연적인 동굴이나 한적한 곳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유력한 숨은 성도들의 저택이나 농장이나 별장일 수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어떤 곳이든지 주님이 자기 등에 업고 데리고 가는 곳은, 기적이 쏟아지는 은총의 광야였습니다. 저 이스라엘의 광야는 바로 기적의 은총이 쏟아지는 축복의 교회였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가 입을 벌려 토하는 기적의 생수 등이 광야 교회의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다시 우리 본문은 독수리 등에 업혀 지정된 광야로 피난 왔던 여인(교회)에게 용은 다시 물을 강같이 토했다고 하였습니다(계 12:15). 여기에 용이 여인을 향해 토한 ‘강 같은 물’은 많은 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큰 환난, 큰 핍박의 내용과 양(量)을 말합니다. 예컨대 무신론 사상, 유물론 사상, 우상숭배, 불신앙의 반역, 세속적 유혹, 권력의 박해, 인간이성의 과학주의, 이단, 황금숭배주의 … 등 무서운 악의 홍수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하였습니다(계 12:16).
이것도 기적의 은총입니다.
예컨대 광야에서 고라당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때 순식간에 땅이 입을 벌려 그 악인들을 삼켜 버린 일입니다(민 16:31).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열중할 때 갑자기 하나님이 블레셋 군대의 침략을 받게 함으로 다윗을 좇던 일을 중지시켜 버린 일입니다.
다메섹에 기독신자를 잡으러 가던 사울에게 갑자기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의 빛과 음성으로 나타나신 예수로 말미암아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이 위기를 면케 된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 박해자 헤롯에게 하나님은 갑자기 충(벌레)을 보내어 그를 씹게 하심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교회가 구원을 받은 일입니다.
한국 교회도 1945년 8월 15일에 받은 해방 때문에 멸절의 위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인즉 그보다 2, 3일 후인 1945년 8월 17일 밤과 18일 새벽을 기하여, 일본은 전 한국 땅의 기독교 지도자와 중요 지도급 교회 인사들을 진멸하기로 계획하고 그 비밀 지령을 조선 총독부에 하달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이 비밀지령 수행작전에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을 때,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택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환난의 날들을 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자탄으로 일본을 심판하고, 한국과 한국 교회에 8.15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용이 강같이 그 입에서 물을 토하였으나, 땅이 토한 물을 삼킴으로 그 여자를 도와 준 실례들입니다.
Ⅲ. 광야 은총의 기간은 1260일, 곧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6절에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12장 14절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라고 하였습니다.
11장 3절에도 두 증인(교회)이 권세를 받아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1장 2절 중에는 「마흔 두 달」이라고 하였습니다. 11장 9절에는 「사흘 반」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1:11).
1260일=마흔 두 달=한 때(1년) 두 때(2년) 반 때(6개월)=3년 6개월은 모두 상징적인 수입니다. 이것은 지상 교회(두 증인=여자=남은 자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유한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고 계획하신 시간입니다. 사탄(짐승=용)과 교회(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가 영전을 치르는 전투기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은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유한의 어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99년 12월 26일입니다.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천 년이라고 하는 긴 역사의 시간이 종결을 짓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실로 이상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역사의 한 시점입니다.
1999년이라고 하는 시간의 표현은 바로 역사의 연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계산된 시간의 표식이요, 그것이 곧 세계사의 연호가 된 것입니다.
24시간이라고 하는 한 날이 끝이 나고, 또 1시간씩 24시간이 계산되어 하루가 되고,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쌓여서 1년이 되고, 1년이 쌓여서 10년, 100년, 1000년, 2000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밝은 낮을 끝내게 하시고 어두운 밤을 끝내게 하심으로 새 시간, 새 날, 새 달, 새 해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코 사람들이 이 시간을 단축시키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그 시간 속에서 숨쉬고 살뿐입니다. 하나님이 하루의 끝이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하루의 시작이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달, 1년, 10년, 100년, 1000년의 시작이 있게 하고 끝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계산하며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 유한의 인간 역사 종말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일할 수 있는 어간을 낮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할 수 없는 어간을 밤이라고 하였습니다. 낮은 빛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어간이라고 하였습니다. 밤은 어둠 때문에 실족하는 어간이라고 하였습니다(요 9:4, 11:9-11). 때를 맞추어 있는 영광이 있고, 때늦은 비극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생존의 어간은 1260일, 마흔 두 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사흘 반에 속하는 어간입니다. 이른바 낮에 속한 어간입니다. 일할 수 있는 때입니다. 1900년대와 2000년대를 이어 사는 우리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고후 6;2). 두 세기를 걸쳐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확실히 광야입니다. 이 광야는 광야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광야는 하나님의 택자 구원 운동이 전개되는 구속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에서, 광야의 본질적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 곧 교회 때문에 광야의 낮과 밤, 광야의 하루, 광야의 한 달, 광야의 1년, 광야의 10년, 광야의 100년, 광야의 1000년, 광야의 2000년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광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마 1:21) 예수 운동의 현장(現場)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복음 선교의 무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자연이 아닌 초자연, 통상이 아닌 비상, 일반이 아닌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특별 은총의 위대한 표적이 교회, 곧 광야교회입니다. 하나님은 1999년 동안이나 이 세상과 시간을 확실하고 분명한 목적에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다시 사용할 수 없는 1999년은,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1260일, 마흔 두 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속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하나님이 쓰신 이 세상과 시간은 결코 무의미나 우연일 수가 없는 의미요, 내용이요, 필연이 아닌가? 그래서 영감의 기록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신 11:12).
저 유명한 죠지 엘리오트(G. Elio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질 무렵에 앉아서 /
하루 일(일과)을 헤아려 보라 /
그리고 행동을 살펴서 자신을 자제한 일이나 /
한 마디의 말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거나 /
친절을 베푼 듯한 한 가지라도 있었으면 /
마치 햇빛과도 같이 가는 곳마다 효과를 발했으면 /
그 날은 잘 지낸 것이라고 생각하라 / 고 하였습니다.
죠지 쿠퍼(G. Cooper)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여기에 고이 간직해야 할 적적한 심령이 있네 /
날이 지나고 있는 동안에 /
또 거기에는 가득찬 영혼들이 멸망하고 있네 /
또 날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에 /
거기에 조그마한 미소라도 띄워 준다면 /
건져낼 수 있는 새 생명들이 있네 /
우리가 여행하고 두루 다니면서 /
그들을 찾아야 하네 /
또 날이 흐르고 있는 동안에 /
아 - 우리가 할 좋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
경향이여, 별들의 전사들이여!
1999년의 전투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역사의 이름 20세기를 하나님이 회수해 가십니다. 이 시간부터 불과 닷새, 120여 시간이 남았습니다. 우리 함께 끝까지 남은 시간의 전투에 승리의 전과를 남깁시다. 우리 모두가 함께 받은 경향교회! 실로 이 광야 시대의 은총의 표적이었습니다. 실로 주의 등에 업힌 독수리의 날개였습니다. 은총의 폭포지대였습니다. 실로 무지개의 아름다움, 별들의 반짝임, 은총의 불기둥, 솟는 분천, 안전한 피난처, 노래하는 시은소였습니다.
우리 모두 감사의 잔을 높이 듭시다. 그리고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 교회 만세를 불러 봅시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