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고난에 대한 태도 (누가복음 23:26-43)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100점짜리로 만들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어떤 장관이 간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외국 사람이 소개한 이야기를 했는데 방법은 영어 알파벳에 숫자를 붙여(A1, B2, C3...Z 26)을 매기고 그런 다음 어떤 단어 알파벳에 붙여진 숫자를 더해서 100이 되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방법을 소개한 뒤 장관이 물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hard work)는 98점, 일만 열심히 한다고 100점은 아니라고 하네요. 그렇다면 지식이 많으면?(knowledge) 날리지, 지식 96점입니다. 사랑을 하면? love 54점입니다. 행운은? good luck 98점, 돈이 많으면? money 72점dlqsl다. 지도력, leadership 89점입니다. 그러면 100점짜리 인생은 무엇일까요? 답은 마음먹기, 태도라는 단어 attitude 입니다. 마음가짐입니다. 사람은 마음 먹기에 따라 100점짜리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당하신 주님에게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100점짜리 믿음이 될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에는 주님의 고난을 대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영혼의 거울과 같은 성경을 통하여 내 자신의 마음을 보고, 십자가와 주님의 고난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고난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3:35절)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구경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주님을 구경합니다. 이 구경꾼들은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날 때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사람들은 구경하기를 좋아합니다. 영화 구경 연극관람, 시장구경, 관광, 해외여행이 모두 구경입니다. 구경 중에 제일은 불구경, 싸움 구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검투사들이 있어서 전쟁포로나 노예들이 검투사를 했는데 사람끼리 싸워서 죽고 죽이는 게임을 구경했습니다. 교회 오는 분 중에는 예배구경 오는 사람도 있고 성가대 찬양 구경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무관심한 방관자들입니다. 누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여름에 한강 언덕에서 어떤 아가씨가 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물에 뛰어들어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갑자기 뛰어내렸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아가씨를 구했습니다. 마침 기자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한 일을 하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어떤 놈이 내 등을 떠밀었어.”했습니다.
구경하는 것 무관심한 것 방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마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내 마음에 모신다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비난하고 비웃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3:35-36,39절)
관리들이 비웃고(35) 군인들이 희롱하고(36) 강도 하나는 비난했습니다.(39)
고통을 겪고 있는 주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왜일까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지난 주일에 어떤 목사님이 사모님에게 부부 싸움을 한 후에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한다고 했습니다. 나도 아내에게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알았어요. 하더라고요.
주님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이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저분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인 것을 알았다면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해 보았거나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막연히 다른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 군중 심리로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거나 비웃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 주변에 다른 사람을 오해하거나 비난 할 수는 있습니다. 서울에 큰 교회 목사님이 중국 선교를 위해 선교지 답사를 갔습니다. 현지 가이드 등과 식사를 하면서 건배를 했습니다. 러브샷을 했다고 합니다. 그 잔에는 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사실 목사님이 든 잔에는 환타 같은 음료수였지만 사람들은 아무개 목사가 술을 마셨다고 비난했습니다. 술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성도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10년 이상을 성도들이 싸웠습니다. 법원에서 10년간 재판을 했습니다. 한때 2만 명이나 되는 성도들은 뿔뿔이 교회를 떠나갔고 지금은 몇몇 사람만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 교회문제가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지만 교회는 거의 무너졌습니다.
주님을 비난하고 모욕한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후회하며 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슥 12:10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23:42절)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는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인 것을 알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예수님이 그에게 “오늘 그대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가장 행운 케이스로 천국에 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했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는 네게 알게 한 자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까?
이것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넷째,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23:26절)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옆에서 따라가다가 군인들이 그를 잡아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가 원해서 지고 간 것은 아닙니다. 군인들이 그에게 억지로, 우격다짐으로 거의 반 강제로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소가 멍에를 멜 때, 자원해서 메지는 않습니다. 소 주인이 거의 강제로 합니다. 시몬도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입니다.
왜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을까요?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을 맞으시고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십자가의 형틀을 지고 가시다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12번이나 넘어졌습니다. 지치고 탈진한 주님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고 쓰러질 때 주님 가까이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따라가던 사람이 바로 시몬이었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 합니다.
시몬은 주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의 거친 숨소리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들으며 따라갔습니다. 그는 결국 로마 군병의 손에 잡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5:21에 보면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 했습니다. 로마서 16:13에 루포의 어머니가 나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바울이 그를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시몬의 아들이 루포인데 초대교회에서 그는 목회자였습니다. 시몬의 아내는 초대교회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자기 어머니라고, 신앙의 어머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몬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받은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다섯째, 가슴을 치며 슬프게 울며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23:27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아파할 때, 마음아파하며 울면서 따라가는 여인들입니다. 주님의 고통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며 우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한 마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머리가 둘인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아이가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유대인 랍비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보아라. 둘 다 울면 한 사람이고 한쪽이 울 때 한쪽은 히죽거리면 두 사람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건 한 몸이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통을 보며 울며 가슴을 치는 여인들, 이들은 주님과 한 몸과 같이 주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꼈던 사람입니다. 신앙의 최고 경지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달리시는 골고다까지 갔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장례식까지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넣으려고 준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왜 십자가에서 참혹한 고통을 당했습니까? 왜 채찍을 맞았습니까? 왜 못 박혔습니까? 왜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모욕, 내가 받을 수치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맞을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내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