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신석기 및 동기 시대
인도 대륙에 인간이 살기 시작했던 시기는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에서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북부 인도에서 남인도에 이르기 까지 전역에 걸쳐 고루 나타난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사는 준 흑색인종 니그리토인이었다. 신석기시대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처럼 동굴에서 거주했다. 일부는 갈대를 이용해 움막을 짓기도하고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모헨조다로의 거대한 목욕탕 |
인더스 문명 지금의 파키스탄의 영토에 속하는 신드 주의 라르카나 지역의 모헨조다로의 유적을 통하여 인도 문화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죽음의 도시를 뜻하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유적간의 거리는 불과 480 km 정도로서, 인더스 강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이 때문에 두 문명을 합쳐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나 앗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문명과 거의 동시대이며, 유물에는 철로 된 것이 없어서 동기 시대에 속한다. 철기시대갸 아리안인의 인도 침입부터 시작되었으며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인더스 문명은 동기 문화를 가지고 나름대로 잘 정비된 도시체계를 갖춘 상당히 발전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도시에는 벽돌로 지은 각약 각색의 집들이 잘 짜여진 도시계획에 따라 바둑판 식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사방으로 곧게 뻗은 도로가 있었고,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각 개인집마다 연결된 배수시설로서 강까지 연결되어 있다. 집집마다 정원과 목욕시설이 있었고, 곡식 저장창고, 금, 은, 상아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하였고, 인류 최초로 면화를 재배하였고, 가축을 길렀으며, 양털과 면화로 짠 옷을 입은 농업과 상업에 근거를 둔 고도로 발달된 형태의 도시문명이었다. 또한 육로와 바다를 통하여 중앙아시아, 메소포타미아 등과 교역을 하였다. 이들은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저울을 이용하였으며, 십진법을 사용하였다(놀라운 인도 참고). 인더스 문명에서는 현재와 같은 카스트 제도의 뿌리를 찾을 수 없고, 신분구별은 있었던 것 같지만 경제적인 지위에 의한 것으며, 신분차별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신조각 |
인더스 문명 당시의 사람들은 물, 불, 나무, 동물 등과 같은 자연이 대상을 신격화 하기도 하였으며, 농경사회로서 물과 불을 중요시 하였다. 남성 신으로는 오늘날 슈바 신의 원형이라고 간주되는 요가 자세를 하고 있는 형상이 인장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형상은 후에 슈바신의 형상과 거의 일치한다. 윤회 사상도 인더스 문명에서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
인더스 문명은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 표면에 약간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인장에서는 약 400 여 가지의 독특한 기호가 있으며, 아직까지도 그 문자(표음문자 형식)는 정확히 해독할 수 없음으로 인해 인더스 문명의 정체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드라비다인에 의해 이루어진 이 문화는 그후 기원전 2000년(혹은 1500년)경부터 이주하기 시작한 철기 문명을 가진 강력한 아리아인들의 침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
인 장 |
베 다 시 대
아리아인의 기원
베다 시대는 대략적으로 기원전 2000년부터 600년까지의 기간이다. 원래 아리아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살다가 대략 세 갈래로 민족의 이동을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유럽 아리아인(그리스, 켈트족, 게르만족의 조상, 아나톨리아지역의 히타이트 왕국), 일부는 페르시아 지방으로 들어가 페르시아 아리아인(바빌론을 정복한 카시트족과 시리아를 정복했던 미타니 족)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인도로 들어와 인도 아리아인이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오늘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인도의 신들 가운데 어원이 같은 종류가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베다 문화는 아리아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서북인도지역에 들어와 선주민의 인더스 문명위에 건설한 것이다. 이 시기는 전기 후기로 나뉘어지는데, 전기 베다(B.C. 2000~B.C. 1000년)는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이주를 시작한 시기이며, 후기 베다(B.C. 1000 ~ B.C. 600 년)는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 하면서 선주민의 사상 및 교육과 융화되는 시기이다. |
전기베다
유목 생활을 하였던 아리아인들은 신드와 펀잡을 중심으로 서북 인도에 제일 먼저 정착한 뒤 철기를 가지고 동북인도 지역의 밀림을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농경생활을 시작하며, 점차 정착민족으로 변해갔다. 리그베다 속에 나오는 불의 신 아그니, 바람으 신 미트라, 전쟁의 신이며 신들의 왕인 인드라, 정의의 신 바루타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페르시아의 경전인 아베스타에서도 나타나는 사실로 보아 두 민족이 원래 하나임을 입증한다.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 당시 살고 있었던 동기 문화의 민족인 드라비다인들은 강력한 철기 문화를 앞세운 그들에게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 사이를 구별짓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리그베다'이다. 리그베다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한 이후 성립된 최초의 문헌이다. 철기를 사용한 아리아인의 침입을 계기로 인도는 곧바로 철기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며 이 철기를 가지고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문화와 문명을 건설해 갔다. 이 과정에서 선주민들뿐 아니라 아리아인들 사이에서도 영토의 확장을 위한 전쟁이 자주 벌어진다.
서북 인도 지방의 드라비다인을 물리치고, 인도 땅에 첫발을 디딘 아리아이들은 점차 동쪽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선주민인 드라비다인들을 북쪽과 남쪽 지방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남부 지방과 동북부의 산악 지방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바로 이들의 선주민인 드다비다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전기 베다 문화
베다(Veda) 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은 베다 문헌이다. 일종의 신의 계시서로서 크게 리그(Rg)베다, 사마(Sama)베다, 야주르(yajur)베다, 아타르바(Atharva)베다의 네 종류가 있으며, 각각의 베다는 상히타(Samhita), 브라흐마나스(Brahmanas), 아라냐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ad)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고대 베다 문서 |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한 후 제일 먼저 만든 것은 '리그베다'의 상히타 부분이다. 이것은 약 B.C. 2000~1500년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된 리그베다에는 1028 가지의 찬사가 들어있으며, 그 내용을 통하여 전기 베다 시대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리그베다 시대에 아리아인들이 살던 왕국은 라슈트라고 불렀다. 이 말은 원래 '종족의 왕국'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의 사회가 주로 부족, 종족국가의 형태를 띠었음을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확립
가족은 가부장제가 중심이다. 당시 여성의 사회적 권한은 미약했으며, 한 예로 여자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만 그 지위가 보장된다. 이같은 남호 선호 사상의 풍습은 "마하바라타"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같고, 부인과 아들은 남편의 시체이며, 하녀들은 그림자가 된다. 하지만 딸은 가장 커다란 슬픔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늘날 나타나는 조혼의 풍습이 없었고, 다우리(dowry)라고 하는 여성의 결혼지참금 제도도 없었다. 아리아족은 비아리아족과의 결혼을 금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점차 혼혈이 심해졌다. 남편과 죽으면 부인이 함께 따라 죽는 사티(sati) 제도도 관습화되지 않고, 왕족의 극히 일부부에서 행해졌을 뿐이다.
카스트 제도의 발생 전통적으로 인도는 카스트 제도가 지배하는 계급사회이다. 제사의식을 담당하는 브라흐만 사제계급, 무사,왕족의 크샤트리야, 상인계급 바이샤, 그리고 노예계급 수드라의 네 가지 계급의 수직적 계급사회를 이룬다. 아리아인이 처음 인도에 들어올 때는 그들 사이에 사제와 전사, 그리고 일반인아라는 세 가지 계급만이 존재했다. 당시에 이들 계급 사이에 결혼이나, 식사 등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인도에 들어와 정착하고, 선주민이었던 비아리아인을 뚜렷하게 구별하면서 각 계급간에 금기 사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아리아인들은 자신들과 비아리아인 사이의 구별을 단순하게 단지 두 번 태어난 존재(아리아인)와 그렇지 않은 존재(선주민)라는 두 가지 집단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일종의 정복민과 피정복민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주로 피부색에 기초했기 때문에 원래는 카스트라는 말 대신 '바르나' 라고 불렀다. 하지만 초기의 단순한 구별은 후기베다 사회로 갈수록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네가지 형태의 카스트 제도로 정착되었다(카스트 제도 참고). 이들 계급은 신이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 절대 바꿀 수 없으며, 이러한 계급의 결정은 전생에 자신이 지은 카르마(업) 때문이라 한다.
반농 반목 생활과 소 농경생활의 시작으로 유목생활의 말 대신 소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인도 신화에 의하면 소(암소)는 우유의 바다를 휘젖는 창조의 과정 속에서 세계를 멸망시키는 무서운 독약 바로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다(암리따 참고). 다시 말해서 소는 창조의 바다를 휘저을 때, 선한 것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온 선물이다. 이처럼 소가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면서 자연히 고파라고 불리는 목동이 자주 거론되었고, 특히 야무나 계곡이 소의 방목장으로 유명해졌다. 후에 인도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 가운데 하나인 크리슈나 신이 바로 목동들과 연관되어 있다.
베다의 종교
리그베다에는 신들의 이름이 33가지나 열거되어 있다. 주로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베다의 종교는 다신교에서 교체신교, 그리고 일신교를 거쳐 범신론, 철학적인 일원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형태의 신앙이 모두 들어 있는 종교의 보고이다.
그중에서도 초기 리그베다에 나타나는 종교형태는 자연신적 다신교와 교체신교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 다신교적 상황속에서의 신들은 거주하는 장소에 따라서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대지의 여신 프리티비(Prithivi) 같은지상에 거주하는 신들과, 주로 바람과 연관되는 인드라(Indra) 같은 공중의 신, 그리고 태양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르야(Surya) 같은 천상에 거주하는 신들이다. 이밖에도 추상적으로 존재로서의 신들로 우주의 설계자인 다트리(Dhatri) 같은 신들이 있다.
고대의 인도인들은 우주를 비롯한 자연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며, 신들조차도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간주했다. 신들은 그 같은 법칙(Rata)의 창조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법칙속에서만 존재해야하는 일종의 법칙의 유지자였다. 이 법칙은 넓게는 우주 창조의 법칙이며, 좁게는 인간들의 삶에 필요한 도덕의 법칙이었다. 신들 가운데 바루나는 이 법칙을 유지하는 임무를 지닌 정의의 신으로 간주 되었고, 또한 이같은 법칙은 후에 카르마(Karma)와 다르마(Dharma)라는 도덕법칙, 혹은 존재원리로 확립되었다.
후기베다(B.C. 1000~B.C. 600년)
후기 베다는 인도에서의 영역 확장을 통한 아리아인의 본격적인 정착 시기이다. 가족과 종족 중심의 초기 사회는 보다 넓은 범위의 통일된 국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또한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주된 내용이 나타난 때이기도 하다. 라마야나의 내용은 아리아인이 인도 남부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카스트 제도와 사회생활
카스트 제도는 리그베다 시대의 정복민과 피정복민이라는 단순한 신분구별의 형태를 벗어나 점차 복잡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빈번해졌으며, 이 때문에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사제 계급인 브라흐만과 무사 혹은 왕족 계급의 크샤트리야가 사회지도층을 형성하였다. 전쟁을 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바이샤라는 신흥상인 계급이 있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왕국의 백성들과 아리아인 외의 민족들은 최하층 노동 계급인 수드라로서 카스트 제도가 굳건하게 정립되었다. 이후 카스트 제도는 신의 창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종교적 신념과 카르마라는 독특한 철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숙명론으로 변화하면서 인도 신분제도의 토대를 이루었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이미 결정된 신분이기 때문에 카스트 제도 속에서는 신분의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기본적으로 막혀있다.
결혼도 같은 카스트 안에서만 가능하였으며, 이것은 아리아인과 비아리아인간의 혼혈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후에 갈수록 혼혈 현상이 심화되면서, 카스트 제도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직업에 의한 세습 및 신분제도로 변질되었다.
인생의 시기를 크게 4개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에 인단들이 행해야 할 의무를 결정하였다. 아슈라마(Asrama)라고 불리우는 시기의 구분은 대략 인생의 수명을 100으로 간주하여 각각 25년씩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25년은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기이고, 두 번째 25년은 가장을 꾸려 나가는 가정생활기로 들어간다. 세 번째 단계는 자식들을 독립시키고 사회적 의무도 어느 정도 완수하고 나면 운둔기로서 무소속의 자유를 누리면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그 상태대로 자신의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성스러운 어머니 강 갠지스로 가서 이 생애에서의 여정을 마무리 하고, 갠지스 강으로 가서 다음 생을 위한 긴 휴식에 들어간다.
아슈라마의 4단계에 적합한 의무를 정해 놓았다. 4 단계에서 두 단계는 세속적인 요소를, 나머지 2 단계는 탈세속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갖는다. 여기서 인도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인 새의 4가지 덕목이 형성된다. 각각의 덕목은 물질적인 재물(식욕과 소유욕)을 의미하는 아르타(Artha;), 성적 욕망을 포함한 사랑을 뜻하는 카마(Kama), 도덕, 윤리적 법칙과 규칙을 의미하는 다르마(Dharma), 최상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또는 해탈을 의미하는 모크샤(Moksa)로 이루어진다(해탈의 길-삶의 과정 참고).
종교 철학
리그베다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바루나, 아그니 같은 초기의 신들이 세력을 잃는 대신 그들의 자리를 루드라(쉬바의 원형), 비슈누, 나라야나, 브라흐마 등이 차지했다. 재식은 더욱 복잡 다단해져 브라흐만 사제계급과 왕족 등에 대한 권한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모든 제식은 오직 브라흐만 사제계급에 의해서만 치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제들의 권한이 확고해지면서 그들의 타락도 깊어만 갔으며, 이에 대한 폐단은 후에 슈라만(Sraman) 이라고 불리는 사문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의 흥기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슈라만들은 브라흐만 사제계급의 제식주의를 반대했다. 이들은 주로 육체적인 금욕과 고행 및 신과 자아에 대한 내적 성찰을 강조하는 타파스의 사상은 후에 열반, 혹은 해탈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이때 인도는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통일된 왕조를 형성하기 시작한 일종의 격동기로스 크샤트리아는 무사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진 왕족으로 신분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기존의 최상급인 브라흐마 사제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크샤트리아 계급이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물자나 장비같은 경제적인 도움을 바이샤로 받았으므로 바야사도 지우가 높아갔다. 크샤트리아는 브라흐만 사제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샤 계급들과 협력해야 했으므로 정지적 지배권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을 찾게되었다. 그래야만 브라흐만 사제들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반 민중들은 끝없는 전쟁 속에서 자신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과 좌절감 등이 브라흐만의 종교를 통해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신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고행과 명상을 통해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슈라만의 사상은 왕족뿐반 아니라 바이샤를 비롯한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매력적인 사상으로 비출 수밖에 없었다. 비아리아적 근원을 갖고 있는 이 사상은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우파니샤드"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인도는 후기 베다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
한편 농경지의 개간으로 산업이 발전하면서 무역이 성행하고 화폐가 생겨났으며, 상인계급이 성장하였고 잦은 전쟁으로 무사계급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되면서 점차 복잡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다른 한편 원래 유목문화를 가지고 있던 아리아인들이 농경을 통해 정착하면서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한 선주민들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후기 베다시대에 이르면 사회적으로는 가족, 종족 중심의 국가에서 왕권을 형성하며 다양한 도시국가들이 형성되고, 사상적으로는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넘어 '우파니사드'와 같은 정통사상과 슈라마니즘(사제계급의 제식주의에 반대하고 육체적인 금욕과 고행 및 신과 자아에 대한 내적 성찰을 강조)이라고 하는 비정통사상이 함께 나타나면서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사상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 시기는 또한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주된 내용이 나타난 때이기도 하다. 그외 후기베다시대 특이한 점들은 철 농기구사용으로 대규모 농사와 이모작을 하기 시작하였다 것, 머리에 터번을 쓰는 풍습이 이때부터 나타났다는 것, 남녀간의 의복의 구별이 생긴 것 등을 들 수 있다.
비베다 시대(기원전 6세기 전후)
비베다 시대는 B.C. 1000~B.C. 600년의 후기 베다에 속한다. 그럼에도 굳이 비베다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이 시기에 정통의 브라흐마니즘적 사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슈라마니즘이 활발히 일어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의 중요한 철학, 종교적 운동이 나나탄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색이, 페르시아에서는 조르아스터교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유가의시조인 공자와 도가 사상의 노자가 등장했다. 이같은 사건은 인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인도는 통일국가를 향한 크고 작은 전쟁들이 빈발하는 혼란스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크샤트리야 계급과 바이샤 계급이 각기 정치적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면서 브라흐만 사제 계급과 대립하던 시기였다. 한편 기원전 6세기초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펀잡과 신드 지방을 차지한다. 이처럼 내외적으로 어지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생존의 절박함을 느껴야만 했던 일반 민중들은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 안정된 세상이 오거나 아니면 종교를 통한 내적 평화 가운데 하나를 바라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 세상의 괴로움을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은 슈라마니즘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북동 인도 지역에서 당시의 브라흐만 사제들을 제외한 나머지 계급의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원전 6세기경 북동 인도 지역은 강력한 코살라와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십여 개의 국가들로 나뉘어 인도의 패권을 위한 세력다툼을 벌이면서 점차 마가다 왕국으로의 통일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슈라마니즘은 이같은 사회 상황 속에서 베다를 중심으로 한 브라흐만 사제의 도움 없이는 어떠한 의식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브라흐만의 권위를 확고하게 만들고, 막대한 비용을 대야하는 제식주의와 동물의 생명을 잔인하게 빼았는 희생제 의식, 그리고 엄격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반대하면서 카르마(업)와 윤회를 토대로 철저한 자기 노력이 해탈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불교와 자이나교가 바로 슈라마니즘의 대표적인 종교형태이다. 이 가운데 불교는 특히나 아쇼카 왕의 불교귀의를 통해 인도 전역으로 전파될 뿐만 아니라 세계종교로까지 발전한다.
이 시기에 외적으로는 기존의 모든 사회적 제도에 대하여, 내적으로는 카스트라는 신분제도에 대한 총체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자신을 사회, 혹은 국가라는 전체에 속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하고 독립적인 개별적, 주체적 존재, 혹은 정신적 존재로 자각하기 시작하는 반브라흐마니즘의 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아지비카 학파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다른 형태로 반브라흐마니즘을 주장했다. 이 힉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행위는 인간 스스로 혹은 절대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미 결정된 모든 존재의 본성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변화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에 철저하게 복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상인 차라바카 학파는 인간의 정신, 혹은 자아와 같은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올서 철저하게 유물론을 주장했다. 이 학파는 모든 존재가 오직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며, 그 이외에 정신과 같은 어떠한 다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치론적인 면에서는 모든 존재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ㅗ 미래란 불가능하며,오직 현재, 지금 이 숙간만 사실로 존재할 뿐이기 땜누에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현실의 감각적 쾌락만이 인간 삶의 최고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학파의 특징은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현실부정적, 혹은 염세적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비록 차르바카 학파가 감각적 쾌락주의를 주장했지만, 그 근거가 철저하게 현재 중심이며, 미래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이 역시 염세적 형태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시대가 안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는 한편으로는 염세적인 사상과 극단적인 형태의 현실적 쾌락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부정한 채 내세의 메시아를 추구하는 종교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북동부 지역으로 전파된 철기문화는 비옥한 농경지로 개간토록 하고, 농작물이 풍성해지고, 상공업의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점차 도시문화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는 바이샤 계급은 부의 축적으로 사회적인 지위가 계속 상승되기를 바랬으나, 출생에 의해서 신분이 결정되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카스트 제도를 대치할 수 있는 다른 사상체계를 필요로 하였다.
당시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쟁에서 무사인 크샤트리아 계급은 무기나 식량 등의 물자 부족으로 바이샤 계급과 손을 잡아야 했고, 두 계급은 상호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두 계급은 브라흐만에 대한 대항에서도 서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브라흐만이 최사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원은 베다라고 하는 종교, 혹은 사상의 독점이었기 때문에, 크샤트리야와 바이샤 계급이 브라흐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종교, 혹은 사상의 대체였다. 이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 불교와 자이나교로 대표되는 비베다, 혹은 반브라흐마니즘적인 사상들이다. 따라서 이들 신흥 사상은 두 계급의 적극적인 호응아래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새로운 사상이 생겨 날 수 있었던 것은 철기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농업경제의 발달에 있다. 우타르 프라데쉬 주의 동부 지역와 비하르 주의 북쪽과 남쪽 지역은 강우량이 많아 울창한 숲으로 덮인 밀림지대였다. 철제 연장으로 농토로 개간하여 B.C. 6세기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처름 넓은 농토를 개간하고 경작하기 위해서는 소나 말과 같은 동물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브라흐만니즘의 제식주의로 많은 동물의 희생되었으므로, 점차 소를 비롯한 가축의 살생을 금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농업의 발달로 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동전이 유통되었으며, 경제적인 발달로 바이샤 계급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바이샤 계급은 자신드에게 필요한 사상을 그 당시에 생겨난 자이나교와 불교에서 찾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불교와 자이나교는 처음부터 계급, 또는 신분제도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두 사상 모두 사람의 고귀함은 적극적인 자기노력에 의한 깨달음의 여하에 있지 절대로 신분의 고하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이들 사상은 모든 인간이 지켜야할 기본적이 윤리적 덕목으로 제일 먼저 불상생, 또는 불상해를 강조한 점이다. 셋째로 브라흐마니즘의 법률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며, 이것을 어겼을 경우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샤 계급에서 이러한 법률조항은 상당히 불합리한 것이었다.
불교 및 자이나교와 힌두교의 상호작용
자이나교는 철저한 불상생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전쟁을 부정하고, 흙속의 벌레를 해칠까봐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업에 종사하는 바이샤 계급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을 인정하고, 신분의 차이를 어느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브라흐마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이나교는 비록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왕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전래의 브라흐마니즘 속에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이나교는 오늘날의 인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이나교와 유사하면서도 브라흐마니즘에 더욱 철저하게 반대했던 불교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인도를 비롯한 전세계로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소멸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맞이했다.
순수한 형태의 자이나교도는 현재 약 200만명 정도에 불과하고 주로 봄베이와 구자라트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정직성과 도덕성에 대한 신용으로 뛰어난 상인이 되었는데, 자이나교는 고행과 자발적 가난을 중시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은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이 되었다.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그후 기원후 12세기가 되면 인도 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만다(불교의 쇠토의 원인 참고). 이같은 이유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급격한 확장으로 힌두교의 브라흐만 사제들이 폐단을 직시하고는 문제점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베다에 근거를 두고 희생제를 없애고, 왕의 신격화에 의한 왕권강화에 기여하고, 이에 대한 왕들의 지원을 받았다. 불교가 일부지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는 할지라도 힌두이점에 대한 신앙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으로널리 선포된 것이었다(힌두이점의 발전과 카스트 제도, 힌두이즘의 정착 참고). 이처럼 국가의 강력한 보호 아래 힌두이즘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불교는 자연히 예전의 영광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힌주이즘은 내적으로는 이론의 재무장을, 그리고 외적으로는 지배권력의힣보를 등에 업고, 학적으로도 불교 이론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힌두교는 붓다도 비슈누의 8번째 화신으로 힌두교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굽타 시대에 크게 번창하였으면서도 발전에 따른 승려의 자질 문제, 일반인을 위한 대중적 노력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이슬람교의 침입에 따른 사원파괴 승려의 학살등으로 점차 줄어들어 인도에서 불교는 대부분 지방에서 사라졌다(불교의 쇠퇴 참고). |
마우리야 왕조시대
|
마우리야 왕조의 출현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로 강력한 힘을 가진 몇 개의국가들이 탄생하였고, 국가는 더욱 융성해지고, 이를 계기로 왕들은 군대를 이끌고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이웃 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여러 도시 국가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가운데 국가에 대한 개념도 지금까지 혈족 중심에서 한걸음 더 나가아 영토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속해 있는 부족, 또는 종족이 아니라 새로운 영토 개념을 가진 국가에 대해 강한 복종심을 나타냈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왕들은 국가간의 통합을 통해서 하나의 거대한 통일 국가를 이루려는 야망을 보였고, 일반 민중들도 전쟁이 끝나 삶의 안정을 이루고 싶었다. 당시의 상황은 붓다의 탄생설화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상적인 전륜성왕에 대한 바람으로 나타났다. 전기와 후비 베다 시대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전륜성왕이라는 개념이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많은 도시 국가가 명멸하면서 마침내 아반티, 바차, 코살라, 마가다의 4개의 왕국간의 세력다툼으로 변했다.
최후의 패권 투쟁에서 마가다국이 승리하여 통일국가가 실현되어 나갔다. 마가다국은 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세습제를 시행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본격적으로 왕국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의 기틀을 마련한 왕은 빔비사라와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이다. 이들은 주변의 소왕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나 불교의 붓다가 설법을 한 때도 이 무럽이었고, 이들을 보호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다. 4세기경 마우리야 왕조에서는 영토가 전 인도로 확장되면서 인도는 거대한 통일국가가 탄생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인도는 두 차례에 걸쳐 인더스 강 유역에 외적이 침입했다. 첫 번째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기원전 518년경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군대가 펀잡의 일부와 신드 전체 지역을 정복하였다. 비록 북서부 지방에 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페르시아의 지배는 약 1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 페프시아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인도 지역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27년 인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 지방까지 침입하여 계속 동진하였으나, 안팎으로 난관에 부딪치자기원전 326년 회군을 시작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야
얼렉산더가 기원전 325년 바빌론에서 서거하자마자 그이 대제국은 순식간에 붕괴하고말았다. 이에 마가다 왕국의 왕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야(Chandra Gupta Mauriya; B.C. 322~298)가 펀잡 지방을 침입하여 알렉산더가 회군하면서 남겨둔 그리스 군대를 격파하여 북쪽의 경계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는 명재상 차니캬[Chanakya, 카우틸야(Kautilya)라고도 함]의 도움으로 내정을 튼튼히 하는 한편, 밖으로는 남인도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을 정복함으로써 실질적인 통일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찬드라 굽타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인 총독을 통해 모든 변방을 직접 통지했다.
아쇼카 대왕 초상 |
이후 아쇼카(Ashoka; B.C. 273~232)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는 매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젋은 시절에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였었다. 그러던 중 부왕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달려와 99명의 형제들을 살해한 뒤 왕이 되었다고 한다. 아쇼카 왕은 아직까지 마우리야 왕조에 복종하지 않은 타밀지역과 칼링가 왕국을 굴복시키려고 결심했다. |
그는 기원전 261년 무적 대군을 이끌고 칼링가 왕국을 무자비하게 침략했다. 칼링가 왕국의 저항이 세면 셀수록 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지금까지의 수모를 한꺼번에 다 갚으려는 듯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살육하였고,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들이 흘린 피로 거대한 강물을 이루었다. 이때의 처절한 상황을 그는 비문에서 무려 십만명의 사람이 살해되었고, 십오만명을 체포했다고 썼다. 전투가 끝난 후 통일국가를 이룩한 아쇼카는 병사들의 환호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확인하기 위하여 늠름하게 앞으로 나섰다. 수 많은 적들의 시체를 보면서 그는 두려움과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참혹함과 위정자들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에 큰 충격과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아쇼카 석주 |
그는 칼링가 전투를 계기로 지금까지 자신이 취해 왔던 힘에 의한 지배를 포기하고, 법과 진리에 의한 정치를 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불고에 귀의하고,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스리랑카에 보내는 한편, 많은 포교사들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심지어 유럽까지 파견했다. 아쇼카는 불교의 경전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륜성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그리스 본토까지 사절을 보내 평화조약을 맺었고, 안으로는 백성과 동물에게도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상정치를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앟고, 그들과 함께 인정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쿠샨왕조
마우리야 왕조는 아쇼카의 죽음 이후 급속히 무너지면서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왕국들이 생겨나고 외부적으로는 서북 인도 지역에 이민족들이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기원전 185년경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가 슝가 왕조의 창시자인 푸샤미트라에게 살해되면서 마우리야 왕조는 인도 역사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슝가 왕조는 기원전 28년경 데칸 지역에 있던 사타바하나 왕국에게 멸망하였다. 하지만 북인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차지하는 것은 이민족인 스키타이계의 쿠샨족이다.
중국의 서북 감숙성의 서쪽 끝에에서 돈황성에 살고 있던 월지족이 흉노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자, 스키타이계의 샤카족이 남쪽으로 밀려나서 간다라를 비롯한 캐시미르 지방으로 흩어졌다. 또 다시 흉노족에 쫓긴 오손족이 월지족의 영토를 침범하면서 그들은 서쪽을 이동하여 박트리아의 왕국을 정복하였다. 당시 박트리아의 5개 토후 가운데 하나인 쿠샨족은 네 토후를 물리치고 쿠샨왕이라 하였다. 쿠샨족은 카불 계곡으로 이동하여,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간다라 지방을 정복하였다. 계속하여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도 정복하여 인도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하나로 융화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128년경, 카니슈카 왕은 비록 반초의 중국군과 전쟁을 벌여 패하기는 했지만 중국과 화친을 맺고 안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쿠샨왕조 가운데 가장 번성한 시기를 이룩했다. 카니슈가 왕은 독실한 불교 신도였기에 제 4차 불경결집을 행하였다. 가장 큰 특징은 대승불교의 성립과 포교활동의 시작, 힌두교의 대중화 이다. 예술적으로는건축, 그림, 조각이 발전하여 수많은 사원과 석탑 등이 건립되었고, 엘로라 동굴 사원과 함께 유명한 아잔타 동굴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간다라 양식의 조각이 성립하여 발전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불교에 붓다의 형상이 나타났으며, 인간으로서 개들은 자를 의미하던 붓다를 점차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 하면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불교의 종교화를 재촉하였다. 불교의 신성화 작업은 힌두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개인의 지적 노력에 의한 깨달음과 더불어 신에 대한 헌신과 복종을 중요시 하는 박티 종교의 출현을 재촉하였다.
마우리야 왕조이래 왕의 호칭이 라자(왕)이었던 것으로 로마식의 황제, 중국싱의 천자, 또는 신의 아들, 전세계의 주재신과 같은 호칭을 사용토록 하였다. 또한 왕을 신의 후계자, 혹은 신으로부터 지상의 전권을 위임받은자(신의 아들), 또는 동격의 존재로 지위를 격상시켰다. 쿠샨왕조는 비록 인도에서 북부 지역의 지배에 그쳤지만 인도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쿠샨왕조는 카니슈가 왕이 죽은 이후, 제국은 점차 분열되면서 인도는 기원후 4세기 경의 굽타 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깊은 혼란에 빠진다.
굽타왕조 시대
|
쿠샨왕조가 쇠락한 이후, 서부 인도 지역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뉘어 저마다의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었다. 슝가 왕조 시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던 마가다 왕국의 가냘픈 명맥은 기원후 4세기경 굽타 왕조에 계승되어 아쇼카 이후 다시 한 번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한다. 320년경 북인도 지역에서 마가다 왕국의 명맥을 잇고 있던 작은 굽타 왕조의 3번째 왕인 찬드라굽타 1세(320~355년)가 등장하여 북인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굽타 왕조가 시작된다. 그후 사무드라굽타를 거쳐 기원후 5세기초 찬드라굽타 2세에 이르러 최상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찬드라 굽타는 비록 짧은 치세기간이었지만 '왕중의 왕'(마하라자드히라자)이라고 불릴 정도로 굽타 왕조가 번영할 수 있는 기초를 확고히 닦았다. 찬드라 굽타 1세는 장자가 아니라 가장 유능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장남이 아니었던 사무드라 굽타(340~380년)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물리치고,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연승하며 거대한 영토를 이루었다. 포로로 잡은 왕들이 충성을 맹세하면 영토를 병합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의 강력한 힘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가 많은 왕국이 자진해서 전쟁을 포기한채 그 앞에 무릎믈 꿇었다. 이처럼 인도 전역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직접적이 통치는 주로 갠지스강 유역과 힌두스탄 평야에 한정하였다(지질 참고). 그 이유는 아직 왕조의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여 거대한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쇼카 왕의 시대에 왕국들이 지배를 받았지만 자신들의 고유 문명에 대한 자각과 그에 대한 긍지가 있엇으므로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므로 아쇼카가 죽자마자 각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굽타왕조는 정복된 지역의 지배자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은 뒤 그들의 지배를 사실항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드라 굽타는 시와 음악을 사랑한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하였고, 학문보호에 힘썼다. 그는 부라흐만교였지만 불교의 보호에도 힘썼다. 찬드라 굽타 2세(380~413년)도 영토 확장과 평화조약으로 안정화 시켰으며, 종교, 문학, 예술의 발전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중국의 불교 승려 법현이 인도를 방문했다. 이후 쿠마라 굽타(415~455년), 스칸다 굽타(455~467년) 등을 거쳐 비교적 안정되게 나라를 다스렸지만 계속되는 훈족과의 전쟁과 왕위계승의 내분으로 분열되었고, 6세기 중엽에는 실질적으로 인도 역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굽타 시대의 의의 굽타 시대는 마우리야 왕조 시대보다 영토가 작았지만 이 시기의 문화적 발전으로 인도 역사상 황금시대라 불리운다. 이 시기의 특성으로는 정치적으로는 엄격한 왕정제도가 확립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조직도 유기적으로 체계화 되었으며,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문학, 예술, 종교, 건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다.
힌두교의 발전과 카스트 제도의 정착
왕들을 신격화 하는데는 브라흐마니즘이 커다란 도움을 제공했다. 브라흐마니즘의 사제들은 우주의 유지자이며 보호자인 비슈누 신과 왕들을 동격화 하는데 동조함으러써 왕들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으며, 이 시기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불교가 흥행하던 아쇼카 왕 시대에서는 불가능하였던 왕권 절대화, 왕의 신격화는 거의 불가능했었다. 브라흐마니즘이 자기비판을 거쳐 힌두이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인도의 중심 종교와 사상으로 등장한 것 이다. 결국 굽타 왕조는 이를 위하여 신을 인정하는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정 속에서 불교가 점점 쇠퇴하게 된 것 또한 필연적인 일이었다.
굽타 왕조에서는 종래의 베다 중심의 브라흐마니즘을 보다 세속적인 종교의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오늘날의 힌두이즘이라고 하는 인도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힌두이즘에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브라흐마, 우주의 유지자인 비슈누, 그리고 파괴자인 쉬바의 세 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신들은 하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세 가지 표현이라는 삼신일체 신앙을 갖는다. 그 가운데 비슈누는 시대와 상황,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지상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아바타라(화신)라고 한다. 비슈누의 대표적인 화신으로 10개가 있다. 이같이 시이 다양한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나는 이유는 그를 행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도 각각 다르게 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신을 향한 기도가 진실한 사람은 그가 악이이든, 선인이든, 동물이든, 어떠한 존재이든 관계없이 신이 나타나 반드시 그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 인도인의 믿음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만일 인간의 기도가 진실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신의 은총이 없다면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기도가 진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힌두이즘의 비슈누 신은 바로 지사에 존재하는 왕 자신의 신격화 절대화에 매우 합당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굽타 왕조의 왕들이 힌두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매우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브라흐만 사제들의 지위는 당연히 향상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카스트라는 계급제도 역시 인도 사회내에서 자연스럽게 정착되어 나갔다.
크샤트리야, 바이샤 계급도 지위가 상승했으며, 가장 낮은 급인 수드라도 장사나 농사나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수드라와 노예, 또는 찬달라(불가촉천민) 사이의 구별이 만들어졌다. 수드라는 엄격한 의미에서 노예와는 다르며, 육체 노동자에 가깝다.
굽타 시대의 카스트 제도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종래의 신분에 의한 구별(바르나) 대신 점차적으로 직업에 의한 구별이라는 개념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고, 그 계급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어느정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직업이 세습제로 굳어진 후대의 카스트 제도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운 것이었다. 이같이 직업 선택이 자유로울 수가 있었더 주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다양한 이민족이 유입되어 정착하면서 점차 힌두 사회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포로나 빚을 갚지 못한 자들은 노예가 찬달라가 되었으며, 수드라를 제외한 다른 상위의 세 계급간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서로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다. 계급간의 결혼도 가능하였으며, 여성들의 결혼은 주로 조혼이 성행했으며, 남편이 죽은 뒤 남편과 같이 화장을 당하는 사티 제도는 상위계급에서만 드물 게 행해졌다. 굽타 시대의 사람들은 크샤트리아와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육류와 술을 금기시했다. 그들은 주로 채소와 과일, 우유와 우유로 만든 가공품을 섭취했다.
힌두 이즘의 정착
제식과 희생제 중심으로 진행되던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은 제식절차의 복잡함과 과다한 비용 때무에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기에는 다소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제식절차의 실행만이 신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며, 한, 한글자의 잘못만 생겨도 무시무시한 재앙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브라흐만 사제들의 권위를 신성화 하려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일반인들이 브라흐마니즘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브라흐만 사제들의 제식에 대한 독점은 부의 축적과 부패의 원인이되어 불교와 자이나교 등 신흥 종교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흐마니즘은 자신들의 제식주의와 희생제 의식을 수정하여 신에의 헌신을 통한 구원이라는 박티 마르가(헌신의 길)와 불교와 같은 신흥종교의 방법과 같은 지혜를 통한 해탈을 뜻하는 즈냐나 마르가(지혜의 길) 두가지 방법을 모두 자신들의 종교에 구원의 교리로 채택하였다. 또한 이 두가지 방법의 힌두이즘은 이론적 근거를 베다 속에서 찾아냄으로써 자신들의 전통을 존속시킬 수 있는 길도 함께 마련했다. 여기에서는 신분(계급)에 따른 절대적인 의무(그 의무에 대하여 왜라는 생각을 해서도 안되는)를 다 하여야 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행위를 하여야 하며, 행위를 하면 결과를 야기한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행위의 결과이므로, 현재으 삶에서 전생의 카르마를 해소하여야 하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행위에 따른 윤회를 거듭하면 괴로움으로 가득찬 삶에서 벗어 날 수 없지만, 행위속에 행위하는 자의 욕망이 있기 때문인 것이므로, 결과를 예상해서도 안되고 무욕의 상태에서 행위(의무의 참모습)를 하고, 신이 결과를 결정하므로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의무 참고). 이같은 사상은 신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을 강조하는 박티가 보편적인 믿음으로 정착하면서 널리 대중화 되었다. 이같은 신분에 따른 의무의 충실한 실행이 해탈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 할 수 있다는 힌두이즘의 발전은 인도 사회 내에서 신분계급 제도가 확고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하여, 초기의 신분제도(바르나)가 보다 발전하여 직업적 세습에 의한 카스트 제도로 정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붓다 역시 비슈누 신의 화신 가운데 한명으로 인정되고(비쉬누 화신 참고), 라마야나의 영웅 라마 역시 또 다른 화신으로 간주되면서 그에 대한 신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슈누와 쉬바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브라흐마 외에 인드라(신들의 왕, 전쟁의 신), 수르야(태양의 신), 바루나(정의의 신), 야마(죽음의 신)와 같은 종래의 신들도 여전히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두르가(쉬바 신의 부인), 락슈미(비슈누 신의 부인), 사라스와티 등과 같은 여신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뱀, 야크샤, 간다르바, 압사라스 등과 같은 요정이나, 동물, 식물, 강, 산 등에 대한 다양한 신앙이 발전하고, 바라나시와 프라야그와 같은 성스러운 도시들은 순례장소가 되었다.
한편 마우리야 왕조 이후 통일 제국의 붕괴로 인한 내부적 혼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굽타 왕조는 강력한 왕권을 세워야 함을 절감하였고, 불교적 이념으로는 그같은 요구가 충족될 수 없었다. 이같은 굽타 왕조의 의중을 파고들은 힌두교는 종래의 종교관에 약간의 수정을 함으로써 왕권 강화에 필요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지배자 입장에서는 왕권강화를 하고, 브라흐만 종교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종교적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브라히마니즘은 왕들을 신자로 만들고, 왕들은 깃발에 자신과 신을 같이 넣어 자신들이 비슈누의 화신임을 은연중에 알렸다. 또한 힌두이즘은 베다라는 기본 토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불교와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이방의 종교적 요소까지 흡사하면서 그들 모두를 하나로 조화시킨 인도 특유의 종교형태이다.
불교의 쇠퇴
굽타 시대에는 불교도가 널리 신봉되고 있었으며, 대승불교의 위대한 학승들이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아잔타와 엘로라의 불교 석굴사원과 수많은 불탑과 사원들도 건립되었으며, 부처의 상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굽타 왕조 시기에는 인도의 불교 승려와 경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인도의 문화와 예술들이 비단길을 따라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가 일부지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는 할지라도 힌두이점에 대한 신앙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으로널리 선포되었다. 이처럼 국가의 강력한 보호 아래 힌두이즘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불교는 자연히 예전의 영광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힌주이즘은 내적으로는 이론의 재무장을, 그리고 외적으로는 지배권력의힣보를 등에 업고, 학적으로도 불교 이론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굽타 왕조의 왕들은 비록 자신들은 힌두이즘을 믿었어도 불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고,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공존하였다. 그러나 굽타 왕조 시대에 들어오면 불교가 점차 쇠퇴기로 접어들아 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잔타 동굴은 총 29개의 동굴 사원으로 당시의 건축술과 조각술을 볼 수 있으며, 16번과 17번이 가장 뛰어나므로 다른 동굴 사원을 보고 난 후에 16번과 17번 동굴을 맨 마지막에 보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것은 두 동굴 사원의 조각과 그림이 뛰어나서 다른 사원을 보면 시시하게 생각되어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자기리와 사르나트에 있는 불탑과 불상도 이 시대의 건축과 조각술이 얼마나 뛰어났는 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 시대의 신상은 몸에 밀착된 얇은 옷을 통해 신체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굽타 시대의조각은 대부분 마투라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신상은 그리스풍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 양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도적인 형태로 충분히 소화되었다. 또한 금속 세공 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는데, 델리 근방의 구뚭미나르에 있는 철기둥이 당시의 기술 수준을 잘 알려주고 있다(이 철탑은 현재도 녹 한 점 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 야금술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굽타 왕조 시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감상할 수 있는 예술작품들은 예상 외로 적은 편이다. |
|
과학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아라아바타는 대수학과 기하학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했으며, 특히 원주율 파이 값을 3.146으로 계산하여, 이른 바탕으로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계산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구가 중심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최초의 인도인이기도 하다. 그는 태양과 달을 비롯한 행성의 운행을 정확하게 기술 했을 뿐만아니라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했다. 천문학자 바스카라 차리아는 지구가 각 물체를 그 무게에 따라 끌어당긴다고 하는인력의 법칙을 처음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이미 베다시대부터 일반적인 숫자보다는 훨씬 큰 수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무한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발전시켰며, 작은 수의 개념도 발전시켰다. 흔히 불교에서 쓰는 찰라(극미)는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로 간주된다.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많한 사실은 인도인들이 십진법을 사용하면서 최초로 '0' 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불교에서 공(空)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0의 개념은 아라비아로 넘어간 후에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유럽에 전해져 수학의 발전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했다. 인도인들이 이처럼 무한과 찰라는 수의 개념을 발전시킨 데는 그만큼 그들이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서도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0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놀라운 인도 참고). |
인도 역사상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굽타왕조 시대는 내부적 분란과 더불어 5세기경부터 훈족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점차 국력이 쇠해져 하르샤 왕조로 이어진다. 하지만 굽타왕조 때의 통일제국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러던 중 7세기경 아랍의 이슬람 세력이 일어나 전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8세기초 간헐적으로 인도를 침입하기 시작하더니, 그후 11세기경 북인도 지역이 여러 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틈을 타서 본격적인 침입이 시작되고 인도는 이슬람의 제국으로 변한다.
굽타시대벽화 |
굽타시대의 유적, 산치 대탑 |
남인도 역사
인도는 크게 데칸 지역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로 구별된다. 데칸은 산스크리트어로 '남쪽 나라'를 뜻하는 다크쉬나파타가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남쪽이라는 방법보다 북인도의 아리아인이 자신들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비하여 남인도 드라비다인의 이질적인 문화를 후진적이라고 낮추어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남인도는 다시 데칸 중심의 지역과 그 이남의 타밀 지역으로 나뉜다. 남인도 지역은 마우리야와 굽타왕조시대에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독립된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마우리야 왕조의 인도통일로 북인도의 문화가 어느 정도 유입은 되었을지라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나름대로 고도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경향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편이다.
드라비다인의 문화라고 지칭되는 남인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 이미 바다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팔레스틴 지역 등과 교역을 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의 석주에 나타난 비문을 통해 남인도 지역이 처음으로 북쪽의 아리아인 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로마제국과도 독자적으로 해상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풍요로운 상태였다.
남인도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아리아인이 아닌 드라비다(타밀)인이었다. 그들은 주로 토템적인 씨족체제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토템의 상징을 숭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문화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일제국 이후 점차 아리아인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고유 종교는 힌두이즘보다 아쇼카 왕의 불교전파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 타밀 중심의 남인도 지역이 인도 역사상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로마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 왕국이 형성되었는데, 이 세 왕조는 끊임없이 서로간의 세력다툼을 벌였고,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자연의 산물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농업으로 벼와 사탕수수 등을 경작했으며, 과일, 후추 등도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세 왕국의 군대는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며 특이한 것은 코끼리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말은 바다를 통해 수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인 타밀어를 사용했다.
|
남인도의 미낙시 사원(마두라이) |
이 세 왕조는 후에 팔라바 왕조로 대체되면서 9세기까지 지속된다. 팔라바 왕조는 남인도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6세기 후반 싱하 비슈누 왕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팔라바의 모든 왕들은 철저한 힌두교도였다. 그들은 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남인도 지역에 힌두사상이 전파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 타밀 지역에서의 힌두교는 주로 신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박티 종교의 형태로 위대한 힌두교 성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테라코타 인형들 |
탄자부르 양식의 그림 |
한편, 이에 비해 데칸 지역에는 카라벨라 왕국을 물리치고 사타바하나 왕국이 등장하여 중앙 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남북인도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다. 남인도에 최초의 제국을 이룩했던 사타바하나 왕국은 특히 쿠샨왕조의 남인도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페르시아만의 해상권과 자바와 수마트라 등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아시아의 해상무역을 독차지하기도 하였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했으며 사람들의 직업은 주로 농업, 상업, 수공업 등이었으며, 조세제도도 매우 관대하였다. 국가의 재정은 주로 토지세와 소금 무역의 독점권, 각지역의 조공으로 꾸려나갔으며 대부분 군대유지와 도시행정에 사용되었다. 대중적인 종교는 힌두이즘과 불교였으며, 타종교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였다. 이 시기 문학과 예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아리아인의 문화를 받아들여 산스크리트어가 속어화한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했으며 남북 인도의 교류를 재개하여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사타바하나 왕조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사타바하나 왕조는 바카타카 왕국을 거쳐 6세기경 나타나 브라흐마 또는 마누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찰루캬 왕조로 대체된다. 찰루캬왕조는 팔라바 왕국과 물고 물리는 전쟁을 계속하다 10세기경 촐라 왕조에 흡수된다. 촐라왕조는 고대 타밀 세 왕조 중 하나로 자그마한 속국으로 전락했다가, 9세기 중반 무렵 주위의 왕국들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했다. 촐라왕조는 특히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활발히 펼쳤다. 촐라 왕조의 사회상 중 특이한 점은 신분상의 계급제도가 존재했지만 계급간의 통혼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들이 형성되었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아 힌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사회적 종교적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하고, 상속권이 보장되어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촐라 왕조는 근 200년 동안 남인도의 문화와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정치 역사상 특징적인 요소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자치정부의 실현과 강력한 해군력의 보유, 그리고 타밀문학과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슬람 정권 시대
7세기경 아랍인이 중심이 된 이슬람 세력은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대략 8세기부터 인도에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의 본격적인 침입이 시작된 것은 이슬람 문화사상 가장 번영기라고 할 수 있는 10세기 말경이다. 중앙아시아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터키계의 노예출신 알프티긴이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에 독립된 왕국을 세움으로써 인도 침입이 시작된다. 아이러니하게 977년 노예출신인 알프티긴은 그의 노예 사부크티긴에게 권력이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가즈니 왕조를 이룩하였다. 그후 사부크티긴의 아들 마흐무드는 수십 차례에 걸쳐 인도에 침입하면서 펀잡 지역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애당초 그들의 관심은 중앙아시아 지역(중국과 유럽을 잇는 육상 무역로, 실크로드)에 있었기 때문에 인도침입의 주목적은 이를 위한 노예와 물자의 조달을 위한 획득이었다. 가즈니 왕조의 침입을 통해 북인도 전역에 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한편 12세기가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구르 지역에서 같은 터키계의 구르왕조가 일어나 마흐무드 사후 쇠약해진 가즈니의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 내륙으로 진출한다. 당시 북인도는 차우한 왕국이 자리잡고 이슬람세력에 대항 하였으나 불과 15년이라는 짧은 기간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당시의 북인도 지역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세력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후 구르 왕조의 아이바크에 의해 델리를 중심으로 인도에 최초의 독자적인 이슬람 왕국이 건립된다. 하지만 터키계가 세운 델리 왕조는 비터키계의 차별정책과 술탄의 계승을 둘러싼 끊임없는 내분으로 할지 왕조, 트글라크 왕조 등으로 바뀌어 간다. 이렇게 이어져 내려온 델리 술탄시대는 점차 붕괴되면서 몇 개의 독립국가 형태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술탄 시대의 행정조직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였으며 무굴제국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델리 술탄 시대에는 델리, 라호르와 물탄, 카라와 라크나우티, 안힐와라 캄바 등 중요도시를 거점으로 인도 전 지역에서 활발한 교역이 일어나 지방경제가 크게 활성화 되었다. 이시기 일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도 있지만 전체 인도 사회는 여전히 브라흐만을 정점으로 한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이슬람의 영향으로 상위계급의 여인들은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풍습이 널리 유행했다. 이는 고대 이란에서 유행한 것으로 아랍인들과 터키인들이 여성을 격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채택하여 북인도 지방에 널리 퍼트렸다. 이슬람인들을 힌두 상위계급에서 그들의 카스트 제도상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와 동일하게 간주하였다. 이슬람의 인도 침입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전(지하드)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침공 후 제일 먼저 했던 일은 힌두사원을 파괴시키는 일이었으며, 힌두 사원을 모스크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술탄시대 종교정책은 힌두교든 자이나교든 철저하게 배척되었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치장된 아랍과 페르시아 문화를 인도에 심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 항해술, 문학 등 고도로 발달한 아랍 페르시아 문화와 예술, 건축, 문학에서 뛰어난 힌두문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서로 동화하면서 인도에서는 독특하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그후 델리 술탄시대는 1398년 티무르의 몽고군 침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물탄과 펀잡을 중심으로 사이드왕조를 거쳐 로디 왕조가 나타남으로써 터키계에서 아프가니스탄계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다가 15세기에 등장한 몽고인의 후손 바부르에 의해 무굴제국으로 대체된다. 인도에서의 이슬람 정권의 태동은 종교 문화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전까지의 이민족들은 인도에 들어와 대부분 힌두화 되면서 인도인과 동화되었지만 이슬람 세력은 거꾸로 자신들의 종교를 인도에 전파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 가운데 특히나 수피즘은 힌두이즘의 박티종교와 많은 연관을 맺으면서 인도 종교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풍의 문화가 상당히 많이 유입되면서 후기 인도 문화와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굴제국 시대
바부루 초상 |
무굴제국은 몽고의 후손들이 세운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한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그는 차선책으로 유명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해 버린 델리의 로디왕조를 물리치고 무굴제국을 세운다.
|
바부르의 인도 진출은 인도 역사상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훌륭한 군인이며 정치인이고 동시에 예술애호가로서 시인이기도 했던 바부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인 동시에 인도 역사에서 무굴제국이라는 새 장을 탄생시킨 인물인 것이다. 바부르는 한편 인도에 새로운 전쟁의 기법을 소개했다. 대포와 같은 화기를 이용한 전술적 효과를 확연하게 입증(실지로 파니파트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상대를 불과 3시간만에 초토화시킴) 시킴으로써 코끼리를 주로 이용했던 인도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설득력과 통솔력의 소유자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터키어 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가 직접 저술한 자신의 회고록은 오늘날 세계고전 문학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샤자한 초상 |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선왕때 거듭된 전쟁으로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을 갖추지 못한 제국을 계승 받았다. 또한 강력한 저항세력인 아프가니스탄계를 물리치고 영토의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간다. 후마윤을 중심으로 한 무굴인들은 비록 영토는 바부르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지만 수적으로는 여전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생들마저 호시탐탐 형의 지위를 노리는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심을 보였던 후마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가 도망간 사이 델리에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칸이 스스로 '쉐르(호랑이) 샤'(아프가니스탄계의 지배자라는 뜻)라고 부르면서 델리에 수르 왕조를 건립한다.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무굴제국의 전반적인 국가조직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관료조직을 정비하고, 화폐개혁을 통해 물가안정을 취하고,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세 징수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면서 국가경제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는 북인도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건설하고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8킬로미 터마다 숙소를 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은 후예 무굴제국의 악바르에게 계승되어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만을 유지한 뒤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악바르대제 초상 |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의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야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룬다. 그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분야에서도 무굴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힌두교도에게도 평등하게기회를 주었다. 악바르는 델리 술탄 시대의 문제가 왕권의 약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슬람교를 활용했다. |
종교적으로도 이전의 이슬람 왕조와는 달리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는 융화책을 취하였다. 구체적으로 차이타냐, 카비르, 나낙 등과 같은 성자를 통해 수피즘과 박티 신앙 사이에 상호소통의 길을 열어 적극적인 양자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의 종교적 융화책은 제항기르와 타지마할로 유명한 샤자한으로 이어지지만 아우랑제브가 다시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은 심화된다. 악바르는 사회와 교육분야에도 개혁의 손길을 미쳤다. 우선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뒤따라 목숨을 버리는 인도인의 전통적 관습인 사티 제도를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과부의 재혼을 합법화시켰으며, 출산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시키고, 조혼풍습을 개선하였으며, 술의 판매를 금지하기도 했다. 이 모든 법이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제항기르 초상화 |
악바르의 뒤를 이어 제항기르가 제위를 이어갔으며, 그는 부친 악바르의 유업을 계승하여 무굴제국의 기반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계승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의 생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누르 자한과의 결혼으로 더 알려져 있다.
제항기르 이후 샤자한이 형제간의 분쟁을 통해 승리하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샤 자한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인도 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 전반에서 왕위를 놓고 잦은 세력 다툼이 발생했던 이유는 제도적으로 왕위 계승에 관해 정해진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
자미 마스지드 이슬람사원 |
샤 자한은 즉위하자마자 무굴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있던 데칸 지역 등 여러나라를 정복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악바르 시대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샤 자한은 정통적인 이슬람교도로서 건축과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 분야에서 페르시아풍을 강조하였다. 낭만적인 성격이 강했던 그는 특히나 건축광이라 불릴 정도로 건축에 관심을 많이 쏟아 타지 마할, 델리 성, 자미 마스지드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아그라 성을 재건축하기도 하였다. |
이 건축물들은 모두 후세에 무굴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타지 마할은 특히나 그의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결부되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관광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샤 자한의 뒤를 이어, 형제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심지어 아버지마저 유폐시킨 뒤 왕위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처음부터 무굴제국을 철저하게 이슬람 세계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궁정 안의 힌두교적 요소를 없애고, 사원을 파괴·폐쇄하고, 힌두교도에 대한 인두세를 차별 부과하는 등 편협된 타종교 억압정책을 썼다. 이는 결국 많은 힌두교도의 반항과 반란을 야기시키고 결과적으로 무굴제국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시작되면서 네덜란드프랑스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델리술탄 시대와는 달리 무굴제국에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소유할 수 있는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실제로 무굴인 뿐만 아니라 많은 이민족의 귀족화가 이루어졌다. 무굴제국에서 귀족계급의 급성장은 한편으로는 왕권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서민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간의 갈등을 촉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에 많은 산업들이 발전했지만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유럽 상인들의 인도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곳의 무역항을 통해 곡물과 직물류를 수출했으며, 금과 은을 수입해 들였다.
무굴제국의 문화는 굽타 시대 이래 북인도 문화의 제 2의 정통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 형성된 건축, 문학, 음악 등은 힌두 문화와 터키-페르시아계 문화의 융합으로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의 힌두 문화와 터키-이란계 문화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건축분야의 두드러진 발전을 가져왔으며, 미술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공헌을 했다. 주로 페르시아 양식을 종래의 힌두 양식과 접목하는 가운데 무굴제국의 미술은 제항기르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음악 역시 힌두와 이슬람 양식의 결합이 주를 이루었다.
영국 식민통치 시대
르네상스기의 근대 유럽인들은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새로운 항로를 찾아 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상 무역권을 확보하고 동방의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인도를 비롯한 동방무역의 최초의 주도권은 포르투갈이 쥐었다. 포르투갈은 뛰어난 성능의 무기들을 앞세워 무굴제국의 황제를 위협하면서 많은 이득을 갈취하였다. 약 1세기 동안 동방무역을 독점하였던 것이 1602년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를설립하면서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네덜란드로 주도권이 넘어갔으며, 1600년 동인도 회사를 건립한 이래 본격적으로 인도로 진출하기 시작한 영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1757년 유명한 플랏시 전투를 통해 뒤늦게 인도에 진출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인도 전역을 차지하였다. 원래 상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동인도 회사가 실질적인 인도통치를 겸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남북 전역에서 반영항쟁이 일어난다. 하지만 당시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의 최강국임을 자부하던 영국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인도를 침략한 영국병사들 |
그러던 중 1857년 화약포에 발라진 소와 돼지기름 때문에 발발한 세포이 저항운동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거국적인 반영항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반영항쟁의 3대 거점인 델리, 칸푸르, 럭나우가 차례로 함락되면서 반영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이로 인해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 역시 영국 본국의 직접통치로 바뀐다. |
이후 영국 정부는 인도인들의 응집을 막기 위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힌두교와 이슬람교간의 상호대립을 통한 균형정책을 취한다. 이에 인도인들은 나름대로 한편으로는 브라흐마, 사마지나, 아리아, 사마지 등의 종교개혁을 통해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인도의 종교 및 사회적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그 결과 1885년 최초로 인도 국민회의가 개최되면서 민족의 단합을 통해 독립을 위해 노력하지만 영국은 뱅갈을 분할하고 로울라트법을 제정하는 등 인도인들의 독립의식을 꺾으려 애쓴다. 그러던 중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공원의 학살사건을 계기로 전 인도인의 분노는 폭발하고 여기에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 기세를 더한다. 인도의 끈질긴 저항은 제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1947년 8월 15일 드디어 독립을 이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결코 종교적으로 융화할 수 없었던 힌두교와 이슬람은 간디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는다.
간디와 네루 |
실을 잣는 간디 |
그후 인도는 네루와 인디란 간디 그리고 라지브 간디를 거쳐 오늘날에는 바라티야 자나타당을 중심으로 연립정부가 구성되어 있다. |
첫댓글 야~호!
감사합니다.
흐름을 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겠습니다.
이루 거사님,
감사합니다.
두 손 모음.
마조법시님 의 공부 에대한 열의 존경스럽습니다.
@이루 ~ㅋ 법사는 아니고요, ㅋ
제가 거짓말로 법사로 쓰는 경우,
여호와 증인들 자주 옵니다.
전도하려고 하겠지요.
이때, 무게 잡고 사실, 저는 불교에서 법사입니다 하면,
인사하고 그냥 감. ㅋ
기독교에서는 법사가 뭐냐고 물어보면, 무게 잡고, 음 기독교의 전도사입니다 하면 그냥 감.ㅋ
ㅋㅋㅋㅎㅎ 양대법사님들이 계시는 우리 창은 역시 참불교의 창입니다 ㅎㅎㅎ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