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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서은철목사)
주님 따라 가는 길 행21:17-20
주신 말씀 행21:17-20을 중심으로[ 주님 따라 가는자의 참 행복한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신약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성취하고 또는 새로이 확장하여 주신 것이므로 복음을 따르면 구약의 율법을 더 잘 지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구속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과도기여서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관계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정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인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어 모세의 율법대로 지키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고 진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할례의 무용성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지만, 율법자체나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오해가 유포되어 급기야 바울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유대인의 전통적인 결례를 행함으로 오해를 풀려고 한 것은 의식법을 폐기를 주장한 그의 교훈과 상충(롬7:6등)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의식법을 지킴은 아직도 연연해하는 유대인 성도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덕을 세우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써 성도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울이 이렇게 먼거리를 달려와 선교보고를 하고 더욱이 구제헌금까지 내놓아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의 진리를 배웠고(갈1:12),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았기에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할 의무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선교보고를 왜 했을까요?
조직의 질서와 규율을 잘 지키며 순종하는 본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초신자 때보다 중직 자들이 더 교회의 질서와 리더쉽에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지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고 교회의 질서를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에 대한 지식이면 지식, 영적 카리스마면 카리스마, 선교업적이면 선교업적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이거나 자기만 옳다고 나를 따르라 하지 않고 언제나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울처럼 주님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길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일은 성도의 봉사를 통해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간다.
1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봉사로 인해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6년여가 걸렸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 나타난 그 동안의 일들을 세세히 보고함으로써 이방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증거하여 하나님게만 영광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 보고를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였다’ 거나 ‘내가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이렇게 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렇게 일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신이 행한 선교의 진정한 주체로 인정하고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일꾼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란 말은 [διά τής διακονίας αύτού 디아 태스 디아코니아 아우투]에서 봉사라는 διακονίας의 원형 διακονία 는 심부름을 가다는 말로써 자기의 판단과 주관하에 일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심부름꾼으로 순종만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한 가지 유혹이 따르는데 그것은 ‘내가 했다’라고 말하라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하였습니다.’ 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이렇게 하였으니 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는 다만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의 봉사를 통해 일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이십니다. 일의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비록 내가 그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나서도 겸손한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겸손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고 겸손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체면을 구기면서 명예를 내려놓고 겸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취하실 영광을 내가 가로 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고 백부장을 극구 말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절하며 섬기려고 한 것을 극구 사양하며 옷을 찢고 말린 것은 스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고 복음이 손상되는 것입니다.
종은 아무리 훌륭하게 일을 하였을지라도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종 중의 한 사람이 훌륭하고 탁월한 일을 했을지라도 그 공과 상급은 주인의 것입니다.
공은 주인에게 돌리고 자기는주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면 그만입니다.
사냥개가 멧돼지를 잡았을지라도 그 고기를 먹으면 그 순간 그 개는 사살 되는 것입니다.
멧돼지는 주인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주인이 주는 맛잇는 먹이를 기다려야 훈련된 사냥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과 도구로써의 신분을 한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눅17:10“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분이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분이신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다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줄로 알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으로 봉사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자녀된 성도를 통해 더 큰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도 우리를 높여 영화롭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울처럼 주님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길일까요?
둘째로 자신을 낮출수록 더욱 높아지는 법을 알자.(19-20)
19절 20절은 바울이 선교 보고를 하자 예루살렘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보고를 받은 후 반응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일을 모두 자신의 봉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 보고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잃을 번한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도 따르지 못할 놀라운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구제헌금까지 가지고 온 바울 사도의 이러한 겸손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받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선교와 확장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바울은 자신의 공로나 업적을 주장하지 않고 복음 전파와 교회설립, 그리고 사역 가운데 나타난 모든 능력과 이적 역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요 도구였을 뿐 그 모든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야 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사명자들이 가져야 할 합당한 제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높아지고 영광 얻는 지름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능력이 나타낼때마다 자신을 드러내며 이방 지역의 모든 교회 역시 자기가 세웠다고 말끝마다 강조하고 다녔다면 과연 오늘날 까지 바울을 존경하고 칭송 할까요? 천만의 만만의 말씀입니다.
존경과 칭송은 커녕 비아냥 거리고 아마 이단의 교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락방 유광수목사가 구원론에 대해 강조하고 강조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은 안되고 오직 자신이 강조한 설교와 설교집을 통해서만 하나되어야 하겠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이단 시비에 휘말린 것 아니겠어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들입니다.
요15: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말끝마다 자기를 스스로 내세우며 자랑하는 자를 결코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가 선줄 알고 제사를 드린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29:3“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중요한 사역을 잘 감당하여 더욱 높아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시기 원하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더욱 겸손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축원 합니다.
자석처럼 하나님앞에 딱 붙어 있어야 합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많은 일이든 적은 일이든 높고 낮음이나 많고 적음의 양의 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일임을 깨닫고 기억하며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풍성한 능력과 축복을 베푸시며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자일수록 감추시고 자신을 감추는 자일수록 더욱 드러내며 높여 주시는 분인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울처럼 주님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길일까요?
셋째로 열심은 참 지식을 먹고 자라 참 열매를 맺습니다. (20)
20절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자라” 합니다.
여기에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의 뛰어난 영적 지도력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비록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있는 진정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하신 일과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사실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바울의 이방 사역을 전적으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당시 바울에 대해 수만 명의 일반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서 당면한 문제의 첫 단추를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 의해 3천명 5천명이 회개하는 사건이 있었고 놀라운 신유의 능력과 이적과 표적으로 인해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수만 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변 각국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수 많은 성도들도 모여 들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다 율법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 가 무엇을 말하나요?
여기서 [열심]이란 말은 젤로오(ζηλόω)는 열정으로 타오르다, 끓어오르다는 말로써 [어떤 일에 대단한 열심을 가진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라는 말은 ‘율법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정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선교보고가 끝난 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모세의 의식적 율법을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이러한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율법준수를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교에 속한 자가 아니라 유대인 중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이라는 사실 입니다. 즉 메시아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성도로써 당연히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열심을 내야 하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에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복음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다.
바울이 통탄하고 피눈물을 흘려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 영심을 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으니 됐어! 정말입니까?
5-60년대 전후 도저히 희망이 없던 시절에 백성들은 대부분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노름이나 술등으로 소일하며 빈둥 빈둥 노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 하며 게으름을 탈피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계몽을 했습니다.
열심을 내되 옳은 일 바른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인지 검증하지 않고 유신 긴급조치 인권유린 장기집권이란 길로 나아가 결국 파국을 맞은 것입니다.
자기 배만을 위해 위해 열심을 내면서도 열심 자체가 옳은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유대교에 있으면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 열심히 없어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에까지 쫓아갔나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이 특심이어서 복음을 방해하는 책임자였습니다.
다른 동료들보다 더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죄인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때와 반대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성도가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영향력이란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 바울에게 율법을 인정하라고 위협하는 수준에서 악의 도구로 쓰이는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의 열심을 재 보아야 합니다. 달아보아야 합니다. 방향을 체크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을 내며 가는 길은 정말 바른 길인가요?
주님의 일을 한다며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한 적은 없는지요?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지도자에게 협력하지 않고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으로 방관하거나 걸림돌이 되거나 훼방거리가 된 일은 없으신지요?
내 생각 내 판단 내 욕심 내 욕망대로 내 방법대로 내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 주님을 위한 열심 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이를 위해 회개의 기도를 통해 주님 앞에서 담대하고 즐겁고 기쁘고 평안함을 누리며 바른 길 옳은 길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달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바른 열심은 회개를 통한 온전한 지식과 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울처럼 주님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길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일은 성도의 봉사를 통해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간다.
둘째로 자신을 낮출수록 더욱 높아지는 법을 알자.(19-20)
셋째로 열심은 참 지식을 먹고 자라 참 열매를 맺습니다. (20)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란 확실한 믿음의 기초위에 주님을 닮은 인격과 품성으로 자신을 낮추고 낮추는 겸손과 올바른 열심 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