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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일본적 미의식의 형성
사비, 와비, 유현(1339년 ~ 1489년)
그때 세계는
1479년 : 에스파냐 왕국 성립
1485년 : 영국, 튜더왕조 시작
은각사.
사실적인 것보다 심적이고 상징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다.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인 가마쿠라 시대에는 아직 교토의 조정 권력이 여전히 지속되던 만큼 문화에 대한 귀족의 지배력은 강력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점차 군사적으로 귀족 계급을 압도했지만, 세련된 귀족 문화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조정 권력은 괴멸되어 가고, 각 지방의 사무라이 세력이 거대하게 성장하면서 막부도 강력한 중앙
정권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막부는 강력한 지방 사무라이 세력의 연합 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잠깐이었다.
바로 하극상의 풍조가 극에 달하는 쟁란의 시대, 곧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무로마치 시대는 혼란되고 불안정한 시기였지만, 민중들이 현저히 대두하는 시기였다.
그만큼 일본 문화사상 가장 풍요하고 창조적인 시기의 하나였다.
무로마치 시대는 오늘날까지 일본인에게 가장 찬미 받고 있는 심미적 가치를 형성한 시대이다.
우리는 일본 음식 스시(壽司)를 먹으면서, 대나무 장식에 나뭇잎과 어울려 나오는 깔끔한 일본 음식을 보면서, 왠지 우리의 비빔밥과는 다른 독특한 미를 느낀다.
바로 오늘날 자연스럽게 일본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는, 일본 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로마치 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선종은 무로마치 문화를 이루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로마치 시대를 통틀어 선불교 문화 시대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인도의 지극히 이성적이고 철학적이며 복잡한 불교 교리를, 도가적으로 간결하게 풀어 중국화한 불교가 선종이다.
불성은 오직 마음에 있기 때문에 모든 형식과 지식을 부정했다.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좌선을 통한 깊은 명상을 강조했다.
선종은 가마쿠라 시대 일본에 처음으로 전해져서 막부의 후원을 얻어 발전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 와서도 막부의 두터운 후원 아래 마치 막부의 공식기관처럼 되었다.
선종은 중국과 교류하기 위한 통로로서, 막부는 선승들을 보호하고 후원했다.
불교적 각성을 얻기 위해 엄격한 수행을 강조한 점은 행동하는 강한 인간상을 추구하던 사무라이에게 매력을 주었다.
일본에서 선종은 하나의 종교로 말하기 어렵다.
선종은 윤리 강령으로서, 그리고 상급 사무라이의 지위를 위한 문화로서 일본사회에 수용되었다.
선사의 선승들은 당대의 주요한 학자, 작가, 미술가로 활약했으며 쇼군의 취향을 주도했다.
선종에서 강조되는 철학이 그대로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에 녹아 들어갔다.
무로마치 문화에 끼친 선종의 영향을 말로써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모든 형식과 지식을 부정하고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직관을 강조하던 선종이었던 만큼 직관적인 간접성을 나타낸
다는 점은 분명하다.
큰 것보다는 작은 것, 사실적인 것보다는 심적이고 상징적인 것, 복잡한 것보다는 단조로운 것, 그리고 새롭고 완전한 것
보다는 낡고 이지러진 것을 더 좋아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미의식을 유현(幽玄, 깊고 그윽함의 극치), 와비(侘び, 간소하고 차분한 아취), 사비(寂, 한적한 정서)라고 한다.
무로마치 문화는 선종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다.
정원, 다도, 노(가면극)에서 보이듯이 무로마치 문화에는 고도의 형식과 조형미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의 고대로부터 지녀온 고유한 미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고금와카집》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고대 이래 일본이 발달시켜 온 미적 감수성, 곧 고도의 형식과 유형미가 그대로
무로마치 문화 속에도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40. 정원, 다도, 노, 꽃꽂이
무로마치 문화(1339년 ~ 1489년)
그때 세계는
1498년 : 마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발견
1500년 : 티무르 제국 멸망
이 시대 일본의 대표적 문화재는 금각사, 은각사, 그리고 각종 정원일 것이다.
금각사는 말 그대로 누각이 금박으로 덮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각사는 원래 남북조 쟁란을 종식시킨, 무로마치 시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였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가 1397년에 은퇴 후 별장용으로 지은 것이다.
요시미쓰는 성공적인 통치자답게 교토의 기타야마(北山)에 금각을 짓고, 아시아 곳곳으로부터 미술품을 수집하며,
무용과 연극 공연으로 활기차고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었다.
14세기 말 요시미쓰에 의해 주도된 이 문화를 기타야마 문화라 부를 정도로, 무로마치 문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금각사.
사치스러운 귀족문화에 대한 사무라이의 동경이 농후하게 나타난다.
용안사(龍安寺)는 규모가 작고 돌과 흰 모래로만 이루어져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놓인 15개의 돌은 2개, 3개씩 무리
지어 얕게 패인 흰 모래 위에 있는데, 돌은 섬을 뜻하고 모래는 바다를 뜻한다.
15개의 돌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한꺼번에 보이지 않고 위치에 따라 바위의 개수나 모습이 제각각 달라 보이도록 배치
되어 있다.
광대한 자연을 좁은 공간에 상징적으로 압축해 놓았다는 점에서는 자연과의 합일을 주창하는 선종의 정신과 합치된다.
어쩌면 치밀하게 계산된 돌의 위치처럼, 조형과 형식을 중요시한 듯한 노력은 일본의 전통에 바짝 더 닿아있음을 느낀다.
금각사가 성공적인 통치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기의 것이라면, 은각사(1482)는 전국시대에 들어서 막부의 쇠퇴기를 살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것이다.
금각사를 의식해 건물에 은을 입히려 했으나 은이 없어서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쇼군 요시마사는 자신의 권력이 전국 다이묘에 의해 잠식당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았고, 그 자신도 심신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요시마사는 자신의 권력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시대의 절망을 보상받으려는 듯 승려와 미술가를 주위에
불러 모아 고도로 세련된 미술을 발전시켰다. 은각사는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은각사는 무로마치 시대의 모든 예술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신비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다도는 차를 음미하는 자체를 즐기고 차 마시는 예법이 만들어지면서 간소하고 차분한 멋, '와비 차'로 발전되었다.
값비싸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버려지고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것, 무언가 부족한 데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여긴 것이다.
다기는 처음 중국제를 쓰다가 나중에 일본제를 쓰게 되었지만, 서늘한 아름다움이 서린 고려다기를 최고로 여겼다.
당시 다인은 한적한 곳에 소박하고 자그마한 초가지붕의 다실을 짓고, 차 끓는 소리를 들으며 와비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꽃꽂이는 원래 꽃병에 꽃을 꽂아 부처를 공양하는 의례였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사무라이나 귀족의 집안을 장식하는 데에 애용되면서 예술적으로 발전했다. 꽃꽂이는 정교하게 배치하고 가공하여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 역시 꽃에 어떤 종류의 형식을 주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能)는 가면 음악극으로 이 당시의 독창적인 문화 산물이다. 노는 신사에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공양물로 바치던,
소박한 형식의 가극에 연원을 두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에 와서 간아미와 그 아들 제아미에 의해 예술로 완성되었다.
이들 부자는 나라에 본거지를 두고 절이나 신사에서 공연하던 유랑집단을 이끌었는데, 요시미쓰 장군의 강력한 후원으로
노를 크게 발전시켰다.
가면을 쓰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악사들이 와카(和歌) 등의 곡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노이다.
아주 느린 음악에 맞추어 상징적인 춤을 추는데, 유현(幽玄, 깊고 그윽함)하게 연기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그려내는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과 신 · 영혼의 세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이상을 유장한 노래와 춤으로 전개한다.
노의 지루함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교겐(狂言)이라는 것을 삽입했다.
'미친 사람의 말'이라는 의미의 교겐이 중간에 들어가 삶의 일상사를 풍자하며 웃음을 선사한다.
노의 공연.
관객은 노 연기가 주는 압축적인 표현을 스스로 해독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노와 교겐은 줄거리보다는 양식미를 음미하는 데에 초점이 놓인다.
예를 들어 교겐의 경우, '운다'는 장면의 경우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는 모습의 공통점을 찾아
내어 그 핵심을 하나의 패턴으로 만들고 이를 고정시킨다.
즉 실제로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에헤 에헤 에헤에헤'라고 발음하며, 손을 눈 근처에 대고 머리를 약간 숙이며 어깨를
내리는 연기를 한다.
우는 장면뿐 아니라 각 장면에서 양식화된 연기가 있다. 노는 연기의 양식성이 주는 압축적인 표현을 스스로 해독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배우는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표현을 얼마만큼 고도로 숙련하여 체득했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41. 기독교와 조총의 전래
Ⅲ 근세사회로의 이동
유럽의 일본 진출(1543년 ~ 1620년)
그때 세계는
1517년 : 루터의 종교개혁
1543년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발표
남만인이 일본에 온 광경을 그린 그림.
15~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서양문화가 유입되는데, 이를 '남만문화'라 한다. 특히 선교사들과 남만무역에 의해
천문학 · 의학 · 항해술 · 지리학 등 실용적인 지식이 유입되었다.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는 유럽인에 의한 지리상 발견의 시대였다.
스페인 · 포르투갈은 일찍부터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하여 중상주의 정책하에서 식민지 획득을 위해 해외로 진출하였다.
스페인은 15세기 말에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에 힘을 쏟았고, 포르투갈은 인도항로를 개척하였으며 나아가 중국의 마카오를 점령하고 아시아지역과 밀무역을 시작하였다.
그 때 동아시아의 해역에서는 왜구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포르투갈은 이 왜구와 무역하면서 교역의 범위를 북으로 뻗어 나갔다.
1543년 포르투갈인을 태운 배 한 척이 명나라 닝보(寧波)로 가던 도중 폭풍우 때문에 규슈의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
(種子島)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 때 영주인 다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堯)는 포르투갈 인이 소지하고 있던 서양식 철포, 즉 조총의 위력에 놀라,
그 제조법을 가신에게 배우게 하였다.
그 후 조총은 전국 다이묘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사카이(堺)와 오미(近江)지방이 조총의 생산지로 번영하게
된다.
전국 다이묘는 일본 열도에서 무력을 다투고 패자가 되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들은 앞다투어 신병기를
갖추게 되었다.
종래의 기마중심 전법에 변화가 왔고, 방어가 주된 목적이었던 성의 구조도 철포전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포르투갈선은 규슈의 히라토(平戶) · 나가사키(長崎) 등지에 내항하여 다이묘와 무역을 행하였다.
1584년에는 스페인 사람이 히라토에 내항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포르투갈 · 스페인 사람을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들과의 무역을 남만무역이라 하였다.
남만무역에는 교토 · 사카이 · 하카타의 상인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포르투갈은 명나라의 생사와 견직물을 일본으로 들여오고, 그 대가로 일본의 은을 손에 넣어 막대한 이윤을 얻는 등 중계
무역도 했다.
일본은 은 이외에도 도검, 해산물, 칠기 등을 수출하였고, 포르투갈은 철포 · 화약, 남방산의 피혁 · 향료 등을 팔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교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가톨릭은 신교의 비판에 자극받아 가톨릭의 개혁단체로서 예수회가 결성되어 아시아의 포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549년 일본 포교를 목적으로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가고시마(鹿兒島)에 와서 처음으로 기독교(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자비에르는 포교 허가를 위해 일본의 중심인 교토에 들어갔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쥬고쿠
(中國) · 규슈(九州) 각지에 다이묘인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 ·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鎭) 등의 보호를 받아 포교를
시작했다.
1549년 일본 포교를 위해 선교사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그 후 많은 선교사가 도래하였다. 그들은 포교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도 힘을 쏟아 인심을 얻었다.
《일본사》의 저자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루이스 프로이스도 이 때 선교사로 온 인물이다.
기독교는 다이묘들의 무역을 통한 이익을 고려하여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신자가 증가하였고 다이묘 중에는
신자가 되는 자도 나왔다. 그중에서도 규슈의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鎭) · 오무라 스미타나(大村純忠) · 아리마 하루노부
(有馬晴信)는 예수회 선교사 바리냐니의 권유로 1582년에 4명의 소년사절을 로마교황에게 파견하기도 했다.
이들 사절단은 리스본을 거쳐 로마에 도착하였고, 교황 그레고리 13세를 만난 후 1590년에 리스본으로 귀국하였다.
기독교는 처음에 규슈에서 퍼졌지만 이윽고 기내(畿內)의 교토에도 들어왔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불교와의 대항관계와 남만문화(유럽에서 전래된 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1582년경에는 신자수가 규슈에서만 12만 명이 넘었고, 기내지방에는 2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각지에 교회당과 학교, 병원 등이 세워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 근세사회 초기에는 이국정서의 문화가 개화하였다.
1591년 선교사이며 《일본사》의 저자이기도 한 루이스 프로이스는 "교토에는 포르투갈풍의 의복과 물건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많은 다이묘들이 서양식 외투, 서양식 모자, 셔츠, 바지 등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계란과 소고기를 먹고, 포르투갈풍 복장을 즐겨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히데요시는 이후 기독교 포교 금지령을 내린 장본인이지만, 처음에는 서양문화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학연구, 교육, 출판 등을 통해 기독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봉건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후에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된다.
42.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전국통일의 가닥(1559년 ~ 1582년)
그때 세계는
1559년 : 조선, 황해도의 민란(임꺽정의 난)
1562년 : 프랑스, 위그노 전쟁(~1598년)
1581년 : 네덜란드, 독립 선언
전국시대 100여 년의 혼란을 종식시킨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세 사람이다. 일본사에서는 드문 영웅으로 각각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세 사람을 상징적으로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새를 울게 하라고 한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새에게 울라고 명령을 한 다음 그래도 울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베어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갖 방법을 써서 울도록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처럼 오다 노부나가는 불같은 성격으로 난마처럼 뒤엉킨 전국시대에서 통일의 가닥을 잡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로 가는 핵심지인, 교토에 입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오와리(尾張)의 슈고다이(守護代)의 일족이었는데, 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대두하여 1560년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향하고 있던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격파하고, 미카와(三河)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세력을 뻗어 나갔다. 이어 오와리를 통일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 씨(齊藤氏)를 멸망
시키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앞세우면서 교토로 들어가 그를 장군으로 옹립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15대 장군이 된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권세를 시기하여 반대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 측에 가담한 오미(近江)의 아자이(淺井),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 양씨의 군대를 격파
하였다. 또 많은 승병을 동원하여 저항한 엔랴쿠지(延曆寺)를 불태워 마침내 1573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하였다.
1575년에는 철포대를 이용하여 미카와(三河)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아들 가쓰요리(武田勝賴)를 격파하여 이제까지의 전술을 변화시켰다.
나가시노 전투는 밀집 대형을 이룬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의 보병대가 다케다군의 기마대를 괴멸시킨 전투로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오다군은 뎃포(鐵砲)라 하는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장애물을 설치하고 약 3천여 명의 뎃포 부대를 배치하여 다케다군의 기마대를 조준 사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뎃포 부대로 대승리한 이후, 당시 다이묘의 병제와 전술이 획기적으로 전환된다.
나가시노 전투.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이 조총부대를 편성하고 교대로 사격하여 가케다의 기마군단을 격파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대사원, 신사세력이나 다이묘들의 경우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갖고 신중하게 준비하여 단숨에 결전
하여 적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넓은 지역에 걸쳐서 남녀민중이 단결한 농민봉기세력 잇코잇키(一向一揆)는 평정하기 어려웠다.
본원사(本願寺)의 문주 겐뇨가 1570년 전국의 문도들에게 노부나가에게 대항할 것을 명한 이후, 노부나가와 잇코잇키의
지루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드디어 1574년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잇키를, 1575년에 에치젠의 잇코잇키를 평정하고 1580년 이시야마 본원사를 굴복시
켰다.
1574년 잇코잇키의 경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몇 만 명을 칼로 베거나 불에 태워 무참히 살해하고 거짓으로 강화한
뒤에 토벌하는 방법으로 겨우 이를 평정했다. 이로써 1세기에 걸쳐 존속한 가장 강력한 적, 잇코잇키 세력이 와해되었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창출하고자 했다.
무사와 상공인의 도시 집주를 추진하여 근세적 도시를 창출했고(병농분리와 조카마치 건설), 영주에게는 토지의 생산량을 신고하도록 하여 토지의 지배자, 경작자, 경작 면적, 생산량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했다.
1576년부터는 교통의 요지 오미(近江) 지역에 거대한 아즈치성(安土城)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많은 노동력과 기술자를 동원하여 웅장한 천수각을 중심으로 하는 성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일 사업의
거점으로 삼았다.
1582년 노부나가는 일본의 중앙부를 거의 제압하고 전국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때 쥬고쿠(中國) 지방의 강적 모리 테루토모(毛利輝元)를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는데, 그 도중 교토의 본능사(本能寺)에서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통일사업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하였다.
4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아즈치 · 모모야마시대(1582년 ~ 1598년)
그때 세계는
1588년 : 영국, 에스파냐 무적함대 격파
1598년 : 프랑스, 낭트 칙령 발표
1600년 : 인도, 영국이 동인도회사 설립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의 최대공적은 전국적인 검지를 강행하여 농민지배와 수취체제를 수립하여 전국지배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진 후, 천하의 실권을 장악한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오와리(尾張)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 하급무사로서 노부나가를 섬기다가 전공을 세워 오미(近江) 나가하마
(長浜)의 성주가 되었으며, 이윽고 모리 씨(毛利氏)를 공격하는 총대장이 되고 하리마(播磨) 등 수 개국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빗추(備中)의 다카마츠성(高松城)에서 모리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즉시 강화를 맺은 후,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여 교토의 서쪽 야마자키(山崎) 싸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유업을 계승하여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 1583년에는 노부나가의 중신인 시바타 카츠이에(紫田勝家)를 멸망시키고,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信孝)를 자살케
하였다.
그 해 오사카 이시야마(石山)에 웅장한 오사카성(大阪城)을 구축하여 전국제패의 본거지로 삼았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信雄), 그 동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고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에서 싸웠으나, 이들과 화의하고 마침내 굴복시켰다. 1585년에는 관백(關白)이 되고 이듬해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어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이어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의 성을 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되었다.
오사카성.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上町臺地)에 천하 쟁탈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오사카성을
축성했다.
전국 통일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영주들이 저항, 귀순, 협력하는 정도에 따라서 정벌하기도 하고 영지의 일부를 삭감하거나 또는 옛 영지를 그대로 영유하도록 했다.
히데요시는 몰수한 영지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았지만, 대부분 협력자나 공을 세운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심복 다이묘나 혈연들을 전국 요지에 배치하여 새로 복속한 다이묘를 견제토록 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이묘의 영지를 바꾸어 경계해야 할 다이묘는 되도록 먼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영지의 교체는 다이묘들에게 히데요시의 권력을 깨닫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직할지를 확대하여 기내지방 및 대도시, 지방의 요지를 보유했다.
히데요시는 봉건영주의 왕과 다름없었다. 직할지는 쌀 생산고(石高, 석고)가 약 200만 석으로 이키, 쓰시마를 뺀 당시 전
일본의 생산고 1,850만석의 1/10 이상을 독점했다.
그 직할지는 기내지방 등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가장 좋은 금은 광산을 독점하고 교토, 오사카와 같은 가장 중요한 상업과 무역의 중심도시도 직할했다.
이 정도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다른 다이묘를 압도할 만큼의 직속군대를 가질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전국지배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추진한 기본 정책이 경작지 조사(檢地, 검지)와 무기몰수였다.
철저한 경작지 조사에 의해 전국 토지에 등급을 매기고, 그것에 기초하여 생산고를 산출하고 그 생산고에 따라 연공을
결정하였다.
각급 경지의 연공부과 기준이 되는 수확량을 모두 쌀로 환산하여 석고를 제정하고 석고를 계산하는 도구도 전국적으로
일정하게 하였다.
연공은 일률적으로 전체수확량의 2/3를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논의 연공은 금납(金納)을 인정했다.
연공부담자를 검지장에 등록하여 촌락마다 작성하였다.
검지에 의해 촌락의 생산고가 확정되면, 촌락의 크기는 쌀의 생산량인 석고로 표시되고, 다이묘령도 생산량의 단위인
석고로 표시되었다.
석고는 농민에게 연공 부담의 기준이 되며, 다이묘에게는 군역 부담의 기준이 되었다.
검지의 결과, 종래 하나의 토지에 몇 사람이 중복하여 경작권과 수확권을 갖고 있던 복잡한 관계가 정리되어 하나의
경작지에 한 명의 경작인이 있는 원칙이 정해졌다.
도요토미는 장원제적인 지배관계의 흔적을 최종적으로 불식하고 전국적인 검지를 강행함에 따라 통일적인 농민지배와
공조수취체제를 수립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민중의 무장도 금지하고 무기를 몰수하였다. 무기몰수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어 백성, 조닌(町人)에게서
칼, 창, 화살, 조총 등 모든 무기류를 몰수했다.
그리고 무사는 하층 무사라 해도 농민이나 상공업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이들을 촌락으로부터 분리하여 성 아래의 도시(城下町, 조카마치)에 거주하도록 했다.
이렇게 사 · 농 · 공 · 상의 신분, 직업, 주소의 구별이 정해져 고정되었고, 또한 병농분리의 원칙도 확립되었다.
병농분리를 완성하고 무사를 도시(城下町, 조카마치)에 집주시켜 신분질서를 확립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통일 권력의 사회 체제를 정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토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전국평정의 대업이 진행됨에 따라 유구, 대만, 필리핀까지 정복하고
조선과 명나라까지 복속시키려고 꿈꾸었다.
남방원정은 공상으로 끝났지만 명왕조 정복계획은 전국통일 직후부터 구체화되었다.
히데요시는 우선 명으로의 통로인 조선의 복속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기 때문에 1592년 4월 조선원정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연전연승하여 선봉이 부산에 상륙한 뒤에 한 달도 안 되어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뒤이어 평양도 공략하였다.
너무도 쉽게 한성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조선 전체는 물론 명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중국대륙을 점령한 후, 중국을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지역과 인도 지역까지 지배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해군이 전멸당하고 제해권을 빼앗기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군은 식량의 현지약탈도 불가능해지고 병사자가 속출해 1593년 강화교섭이 시작되면서 사실상의 정전이 이루어졌다.
협정에 따라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597년 히데요시는 재출병하였다.
1차 때와 달리 고전하였고, 이듬해 히데요시가 병사함에 따라 일본군은 철수하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실패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나고, 천하는 끈질기게 기다려온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44. 에도 막부의 성립
도쿠가와 이에야스(1598년 ~ 1616년)
그때 세계는
1613년 : 조선, 광해군, 영창대군을 강화에 보냄(계유옥사)
1616년 : 후금(청) 건국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게다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정무를 장악한 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다. 이에야스는 미카와(三河)의 호족이었는데,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해서 도카이(東海)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1590년에는 히데요시를 도와 오다와(小田原)의 호조 씨(北條氏)를 멸망시킨 후 간토(관동)의 6개국을 하사받았다.
이에야스는 도카이에서 간토로 이주하여 약 250만 석의 다이묘로서 에도에 본거지를 두고 이윽고 도요토미 정권의 5다이로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는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력은 온존하였으며 히데요시 이후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대두에 대항하여 5봉행(奉行)의 한사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이에야스의 지배권 확대에 불만을 품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더불어 이에야스를 타도하려고 하였다(서군).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동맹하였다(동군). 1600년 양자는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격돌하였으나, 이에야스 측이 승리하여 패권을 장악하
였다.
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의 영지 440만 석을 몰수하고, 모리 테루모토를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감봉했다.
이렇게 하여 얻은 토지를 동군의 다이묘들에게 증봉하거나 자신의 가신들에게 주어 후다이 다이묘(普代大名, 세키가하라
전투 전부터 충성한 다이묘) 28명을 새로 세웠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도카이도와 나카센도 등 전국의 주요 도로를 정비 · 장악하고 교토, 후시미, 사카이, 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항구를 직할지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오모리, 이쿠노, 도사, 이즈 등의 주요 금은광을 장악,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여 전국적인 경제기반을 확보했다.
이에야스는 1603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후 260여 년간에 걸친 에도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어서 1614~15년에는 도요토미 씨(豊臣氏) 세력의 보루인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도요토미를 멸망시키고, 도쿠가와 씨에 의한 전국지배를 확립하였다.
오사카 전투 직후 1616년 이에야스는 다이묘가 거주하는 본성을 제외한 모든 성을 파괴하라는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을
내렸다. 이 명령은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다이묘들의 군사적 거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각지의 성을 거점으로
다이묘에게 저항하려는 무사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있어 다이묘의 권력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다.
1603년 수도가 본격적으로 건설되었다. 이에야스는 에도(江戶) 시가를 크게 확장하여 300개의 도시(町, 마치)를 새로 만들고, 1606~1607년에는 5층의 천수각(天守閣)을 가진 장대한 에도성을 쌓았다. 이 대토목공사에는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원되었다.
에도성.
에도는 지금의 도쿄로, 본래 파도가 몰아치고 김을 채취하는 개펄에 불과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계획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도쿄는 천황이 기거하는 교토에 비하면 17세기 도쿠가와 시대에 등장한 신흥도시라 할 수 있다.
에도시대의 수도는 장군이 살고 있는 도쿄(에도)가 아니라 천황이 살고 있는 교토였다.
모든 방면에서 막부의 기초를 굳힌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豊臣家)를 멸하고 다이묘, 천황, 사원 통제의 큰 윤곽을 잡은
다음 해(1616) 병으로 죽었다. 그의 유지에 따라 천황은 죽은 이에야스에게 '도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라는 신호(神號)를 내렸다. 사람이 죽은 뒤에 곧바로 이를 신으로 여기는 일은 히데요시가 처음이었으나,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멸하고 즉시 조정으로 하여금 그의 신호를 취소케 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뒤에는 신이 되어 250년에 걸쳐 막부의 권위를 뒷받침하였다.
45. 쇼군과 다이묘
막번체제(1619년 ~ 1714년)
그때 세계는
1618년 : 독일, 30년 전쟁(~1648년)
1623년 : 조선, 인조반정
막부의 장군과 지방의 번주(藩主)인 다이묘(大名)가 주종관계를 맺어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幕藩)체제라고 한다. 막번체제는 조세를 부담하는 농민을 기초로 하고, 사농공상 등의 엄격한 신분제에 의해 질서화되었다.
장군은 형식적으로는 천황으로부터 임명되지만, 실제는 일본의 지배자였다.
장군의 권력은 역대 막부의 장군과 비교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강력하였고 토지, 인민에 대한 전제적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막부의 조직은 막부정치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점차 갖추어져 3대 장군인 이에미쓰 시대까지는 거의 정비되었다.
막부기구 중에서 최고직은 다이로(大老)였는데, 그것은 임시직이었고, 통상은 로쥬(老中)가 정무의 중심이었다.
와카도시요리(若年寄)는 로쥬의 보좌역이고, 오메쓰케(大目付)는 다이묘의 감독과 에도성의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메쓰케(目付)는 장군의 직속가신의 감독을 관장하였다.
그 밖에 사사봉행(寺社奉行) · 마치봉행(町奉行) · 감정봉행(勘定奉行) 3봉행이 있어 일반정무를 분담하였다.
막부 군사력의 중심은 장군직속의 가신인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이었다. 영지는 모두 1만 석 미만이지만, 장군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자를 하타모토, 그렇지 못한 자를 고케닌이라고 한다. 막부는 직속의 무력으로서 그들 가신을 포함하여 5, 6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였다. 전시에는 다이묘들에게 석고(石高)에 따라 군역이 부과되었으며, 일정수의 병마도
공출시켰다.
장군으로부터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받은 자를 '다이묘'라 하고, 다이묘가 지배하는 영역과 지배 기구를 '번(藩, 한)'이라
한다. 다이묘에는 도쿠가와 씨(德川氏) 일족인 신판(親藩), 처음부터 도쿠가와 씨의 가신이 된 후다이(普代),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에 가신이 된 도자마(外樣)의 3종류가 있다.
막부는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그 배치에 신중을 기하여 신판, 후다이 다이묘를 관동(關東)과 전국의 요지에 두고, 유력한 도자마 다이묘는 에도로부터 먼 지역에 배치하였다. 막부의 요직에는 후다이 다이묘를 임명하고 도자마 다이묘는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다이묘의 행렬
막부는 1615년에 1국에는 1성만 보유하라는 영을 내려 다이묘의 거성 이외의 모든 성을 파괴시켜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또 이해 다이묘 통제의 기본법인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공포하여 다이묘들이 지켜야 할 법을 제시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때에 강화된 참근교대제는 유효한 다이묘 통제책이었다.
이에 따라 다이묘는 1년 교대로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 거주하게 되고 처자는 인질로서 에도에 상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중생활과 왕복 경비는 다이묘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막부는 조정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도 주력하였다. 1615년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천황, 공가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고 천황에게는 학문을 제일로 하도록 했다.
한편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를 설치하여 조정, 공가를 감찰시켜 다이묘가 조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시켰다.
황실영지는 약 3만 석으로 상황, 공가 등의 영지를 더해도 12~13만 석에 불과했다.
사원에 대해서도 사원을 통제하고 막부의 일원적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게다가 기독교를 금지시키기 위해 누구나 사원의 신도가 되도록 강제했다. 이에 따라 사원은 막부의 보호를 받아 민중지배를 위한 행정의 말단기관으로 조직되었다.
에도 시대를 막번(幕藩)체제라 부르는데, 막번이란 쇼군의 통치 기구인 막부와 다이묘의 영지인 번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번은 17세기 말에 240개에 달했다. 막부는 자신의 직할지만을 통치하고, 번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고 다이묘의 자치에 맡겼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역대 사무라이 정권 가운데서 군사력과 경제력이 가장 강력했으며 물샐틈없이 다이묘를 통제했다. 전국 쌀 생산량의 1/4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고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등 중요 상공업 도시와 광산을 직할했으며, 군사력 또한 막강하여 30가(家) 정도의 다이묘 연합군이라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다이묘는 처자를 에도에 살게 하고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오가며 생활해야 하는 참근교대제도를 비롯하여 다이묘를 통제하는 법령을 완전히 정비했다. 천황가에는 영지를 주는 한편 천황과 궁정 귀족의 행동을 세세한 규정으로 통제했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에서 나오는 가공할 만한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완벽한 제도의 정비로 인하여 막부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당시 어디에도 없었다. 걸핏하면 다이묘들끼리 군사를 이끌고 싸우는 일도 없어졌다.
500년 만에 일본 열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에도 막부는 서양의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1868년 메이지유신이 들어서기
까지 265년을 지속했다.
46. 신분제도와 농민지배
에도막부의 사회(1582년 ~ 1867년)
그때 세계는
1628년 : 영국, 권리청원 제출
1633년 : 조선, '척화의 소' 내림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 무사들. 왼쪽 끝이 이토 히로부미다.
도쿠가와 시대의 사회는 사농공상이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제도가 기반이 되었다.
무사는 지배계층인 최상위층으로, 전 인구의 1할을 차지하고 있고 갖가지 특권을 누렸다.
에도시대 일반 서민은 원칙적으로 성(姓)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름만 불리었는데, 무사는 지배계급으로서 성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또 무사가 농민이나 상공인의 무례함에 의해 명예가 손상되었을 때, 그들을 살상할 수 있는 권리인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의 특권을 갖고 있었다.
또 무사들은 두 개의 도검을 패용할 수 있는 대도(帶刀)의 특권도 있었다.
기리스테고멘의 특권은 서민에게 무사는 공경의 대상이며, 무사에게는 매사 공순해야 한다는 것을 법률적으로 의무지운
강력한 법이었다. 무사의 특권은 서민에 비하여 우월한 무사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 제도였다.
무사는 원칙적으로 쇼군 · 다이묘 · 하타모토를 정점으로 하는 가신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상급무사와 하급무사로 구분
되어 상급무사와 하급무사와의 신분 구별은 매우 엄격하였다.
무사는 영주로부터 지행지(知行地) · 봉록을 받고, 이를 세습했지만, 주군에 대해서는 강한 충성이 요구되었다.
농민은 연공 부담자로서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무사에 다음가는 신분이었으나 통제는 엄격하고 세부담이 과중하여 생활은 궁핍하였다. 농민의 인구는 에도시대 2,600만 내지 2,700만 명으로, 전 인구의 80%에 달했다.
도시에 사는 상인 · 직인은 조닌(町人)이라 부르고, 전 인구의 약 7%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닌은 신분으로서는 농민 아래에 있었지만, 통제는 오히려 농민보다 덜하였다. 잡세로서 부과된 운죠킨(運上金, 영업세), 묘가킨(冥加金, 영업활동에 대해
공인 · 보호받는 대신에 막부에 바치는 헌금, 개인이나 동업조합이 납부)도 농민의 부담에 비해 가벼웠다.
사농공상의 밑에는 에타(穢多) · 히닌(非人)이라는 천민이 있었다. 에타는 주로 피혁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었고, 히닌은 주로 시체를 처리하거나 걸식하는 사람들이었다. 천민은 일반 민가와 동떨어진 장소에 거주하였는데, 그 지역을 부락이라 했다. 이처럼 에도시대는 엄격한 신분제가 시행되었다.
근세의 촌락(村)은 도요토미 정권 이후 도쿠가와 정권에 계승된 병농분리 정책과 토지조사에 의해 형성되었다.
무라는 백성의 가옥이 모여 있는 집락을 포함하는 넓은 영역으로 구성되며 몇 개의 자연 집락을 합친 50~60호 정도 규모
였다. 무라는 농업 생산의 단위이면서 행정 단위였다.
촌락에는 전답, 택지를 소유하고 토지대장에 기재되어 연공을 납입하는 본백성과 본백성에게서 전지를 빌려 소작하는
소작인(水呑百姓, 미즈노미뱌큐쇼) 등이 있었다.
촌락공동체는 본백성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본백성은 연공과 부역 업무를 원활히 하기 위해 대표자를 선발했다.
이들을 무라카다 3역(村方三役)이라 한다. 본백성의 지도자, 무라카다 3역은 나누시(名主), 구미가시라(組頭), 햐쿠쇼다이(百姓代)로 이루어져 있었다.
촌민은 5인조(고닌구미)라는 조직에 편성되었다. 나누시(名主)와 예속 농민을 제외한 모든 농민은 5~6집을 한 조로 묶어
5인조를 결성하고, 구미가시라의 명령에 의해 각 조별로 책임을 분담하였다.
영주 권력은 연공이 체납된다든지 범죄자가 발생하였을 경우에 5인조에게 연대 책임을 지웠다.
백성이 부담하는 세금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매겨져, 쌀로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보통 전답에 대한 세액은 수확량의 40~50%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다양한 명목으로 과세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농민의 생활은 궁핍했다.
막부와 각 번은 농민으로부터 확실히 조세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제한을 가했다. 토지를 기초로 한 봉건 경제였기 때문에 토지의 처분이 가장 엄중하였다. 1643년에는 경작지를 영구히 매매할 수 없도록 하는 영구매매금지령(田畑永代賣買禁止令)을 공포하였다. 1649년에는 농민의 경작관계로부터 의식주, 부부관계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으로 규정하여 제한하였다.
1673년에는 분할상속에 의해 전답이 나누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법령도 공포했다.
막부가 경작지가 분할되지 않도록 한 이 제도는 본백성이 영세농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모두 본백성에게서 연공을 확실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엄격히 제한을 받음에 따라 촌민은 상호 협력하여 촌락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공동체조직을 만들어 모내기, 추수 등 공동작업을 했다. 촌락이 공동체로서 결속한 결과 구속력이 강해지고 촌락의 결정
사항을 위반한 자는 무라하치부(村八分)라 하여 화재나 장례를 제외하고는 협력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하였다.
47. 쇄국과 시마바라의 기독교도 반란
기독교 금압과 쇄국(1587년 ~ 1641년)
그때 세계는
1642년 : 영국, 청교도 혁명
1644년 : 명 멸망,; 청, 중국통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이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지만, 무역은 보호 · 장려했기 때문에 그 포교를 묵인해 왔다. 그 결과 1549년부터 1644년까지 일본인 75만 명이 개종하였다.
신 앞에 만인의 평등, 독립된 인격, 인권의식, 자아의식과 같은 주장은 일본에서는 아주 새로운 신념이었고, 이 같은 주장이 일본의 기독교인에게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종자들은 일신교라는 신개념을 토대로 신앙생활을 했고, 새로운 인간관을 희미하게나마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신 앞에서 평등을 설파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일본의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일신교적인 성격은 기성종교와 대립하였고 일부다처제의 금지, 할복의 금지 등은 봉건도덕과 모순되었다.
기독교 신도가 증가하면서 보인 단결력은 막부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또 새롭게 내항한 신교국 영국인, 네덜란드인은 구교 가톨릭국인 스페인, 포르투갈이 포교한 후 일본을 정복한 의도가
있다고 밀고했다.
게다가 막부는 개종한 규슈의 다이묘들이 무역의 이익으로 경제적 · 군사적으로 강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측근에도 기독교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자신의 직할령에 기독교를 금지시켰다. 이듬해에는 전국적으로 교회당의 파괴, 선교사의 추방, 신도에의 개종을 강요하고 개종하지 않은 신도는 해외로 추방하였다.
막부는 1616년 유럽인의 거주 · 무역의 기항지를 히라도(平戶), 나가사키(長崎)의 두 항으로 제한하였다.
이어서 1624년에는 선교사의 활동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던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1633년에는 막부의 허락을
받은 선박 이외의 일본선의 해외도항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재외 일본인의 귀국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또 이제까지 제한하지 않았던 중국선의 내항도 나가사키의 한 곳으로 제한하고 이듬해에는 포르투갈인을 나가사키항내에 축조한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로 이주시켰다.
히라도(平戶).
1550년에서 1641년까지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 등과의 무역항으로서 해외문화와 접촉한 곳이다.
예수회 소속의 자비에르 신부가 기독교 포교를 시작한 곳이다.
이러한 막부의 쇄국정책 과정에서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島原) · 아마쿠사(天草) 지방에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반란(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다.
시마바라, 아마쿠사 두 지방의 영주가 기독교도를 심하게 탄압하고 중세를 부과하는 등 압정을 행했고 견딜 수 없게 된
시마바라의 민중이 무장봉기했다.
뒤이어 아마쿠사 인민도 일어났다. 민중이 아마쿠사와 시마바라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막부에서 토벌을 위한 대군을 파견
하자 두 지역의 3만 7천여 명이 시마바라의 남단에서 바다를 등지고 있는 폐성인 하라성에 진을 치고 저항하였다.
성안의 높은 곳에는 나무십자가가 세워지고 성벽에는 십자가나 성상을 그린 깃발이 내걸렸다.
봉기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불교도도 많이 있었다.
1639년 2월 28일 반란 지도자 모두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 난에 의해 막부의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강해져 1639년에는 포르투갈선의 내항을 전면 금지하였고, 대일무역의
주력이었던 포르투갈이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1641년에는 유럽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네덜란드 인을 히라도 상관에서 나가사키와 데지마(出島)로 옮기고 일본인과의 교류를 금지하였으며 나가사키 봉행(長崎奉行)의 엄격한 감시를 받게 하였다. 이로써 쇄국은 완성되었다.
후미에.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예수가 그려진 성화상을 밟게 했다.
국내적으로는 기독교도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마리아, 예수 등이 새겨져 있거나 그려져 있는 성화상을 짓밟아
보게 하는 후미에(繪踏)를 실시하고, 기독교 관련 서적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선과 중국선만이 내항하게 되고, 해외의 사정은 네덜란드의 선박이 입항할 즈음에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이 막부에 제출하는 풍설서와 중국선이 가져다주는 정보에 의해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나가사키 외에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무역, 사쓰마번을 통한 류큐무역, 홋카이도의 마쓰마에번을 통해 아이누와 무역이 존재하게 되었다. 나가사키를 포함한 이들 4개 지역이 근세 일본의 대외 관계에서 창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쇄국정책에 의해 국내의 상품유통은 제한받고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경제가 유지되어 막번체제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국내적으로 평화의 시대가 계속되고 산업이 발달하여 국민문화의 형성도 보였다.
그러나 쇄국으로 인해 일본은 세계의 정세로부터 고립하고 정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쇼군이나 천황을 초월하는 높은 가치, 인간평등 관념은 봉건체제와 쇄국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히라도 섬 북서쪽에 위치한 이키쓰키 섬의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쌩 쥬앙의 노래'가 도쿠가와 시대 250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참배하세 참배하세
천국의 전당에 참배하세
천국의 전당은 말하네
넓은 전당은 말하네
넓고 좁은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48. 막부정치의 문치화
쓰나요시 · 이에노부 장군시대(1680년 ~ 1716년)
그때 세계는
1688년 : 영국, 명예혁명
1689년 : 조선, 김만중, 〈구운몽〉, 〈사씨남정기〉 지음
1689년 : 청 · 러간 네르친스크 조약
도쿠가와 쓰나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이르는 3대는 막부의 창업기이고, 그 정치경향은 무력을 제일로 하는
무단주의였다. 3대 장군 이에미쓰까지는 전쟁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이용하여 모든 다이묘를 무력으로 지배한 것이다.
무단주의는 100년에 걸친 전국난세를 돌파하여 강력한 통치권을 구축하는 창업기에 필요했다.
그러나 4대 장군 이에쓰나(家綱)의 시대가 되면, 문치주의가 정치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창업이 아니라 수성(守城)의 평화로운 시대에는 무단정치만으로 통치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막번체제가 정비되어 무력에 의한 막부 전복의 위험은 없어졌다.
또한 막부 창업기에 행한 개혁, 감봉 등에 의해 많은 주군을 잃은 무사, 낭인(浪人)이 발생했다. 이들로 인해 심각한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게다가 상품경제의 발달에 의한 무사의 경제적 빈곤과 농민의 반항에 직면하여 막부는 무단주의적 정치를 바꾸어 법률,
제도를 정비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막부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다.
1663년에 성인이 된 장군 이에쓰나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발령하며 순사(殉死)의 금지를 명하였다.
순사는 주군의 뒤를 따라 할복하는 것이다.
이에쓰나는 순사를 불의하고 무익한 것으로 부정하고, 주군의 뒤를 따라 할복하는 자가 있다면 주군의 훈계가 부족한 것
으로 해당 군주는 물론 그 자식도 도리와 법에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하면서 금지를 지시했다.
이전 센다이(仙台)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사망했을 때는 측근 20명이 순사했으며, 구마모토번(熊本藩)의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의 사망 때에는 19명의 가신이 순사했다.
1680년 5대 장군 쓰나요시(綱吉)는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를 대로(大老)로 임명하여 정치에 참여시키고 막부정치의
일신을 꾀하였다. 또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등의 유학자를 기용하고, 하야시 노부아쓰(林信篤)를 대학두(大學頭)에 임명하여 교육을 진흥시키는 등 학문의 장려에도 힘을 기울였다. 장군의 학문과 문화에 대한 정신은
여러 다이묘에게 영향을 미쳐 학문을 좋아하고 장려하는 다이묘들이 이 시대에 배출되었다.
한편 쓰나요시는 실정도 있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쓰나요시는 대사원을 조영하는 데에 거액의 비용을 지출했고, 효자로 이름난 쓰나요시는 자신의 어머니가 존경하고 신뢰한 승려들을 위하여 사원을 건립하기도 하여 막부의 재정은 어려워져
갔다. 그래서 막부는 금은 화폐를 순도가 낮게 다시 주조하여 그 차입금으로 막부의 재정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다.
그 결과 막부는 많은 이익을 얻었지만, 그 때문에 경제가 혼란해졌고, 물가의 급등을 초래하여 일반무사와 서민의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극단적인 동물애호령을 강요하여 무사, 서민층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유교와 불교를 정치 이념으로 했던 쓰나요시는 살아있는 짐승, 특히 개와 조수류에 대한 보호를 명하였고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엄격히 처벌하였다.
개의 호적을 작성하고 개가 죽었을 경우에는 사망 신고를 하도록 했다. 개를 죽였을 경우에는 엄벌에 처해졌다.
에도에 개가 늘어나게 되자 에도의 여러 곳에 40여만 평의 개 수용소를 건설하고 5만 마리에 가까운 개를 수용하였다.
농민들에게는 쌀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지도하였지만, 개에게는 쌀이 배급되었고, 개의 먹이를 조달하기 위해 특별세를
부과했다. 심지어 개들의 싸움에는 물을 뿌려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하라는 법령이 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싸우고
있는 개들을 떨어뜨리려다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하치조지마(八丈島)는 유배당한 사례는 유명하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문치정치를 정착시키고 막부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대사원을 건립하고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는 데 지출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막부의 재정은 이 시대에 거의 고갈되었다.
1709년 쓰나요시 사망 이후 6대 장군 이에노부(家宣)와 7대 장군 이에쓰구(家繼) 시대에 정치를 담당했던 인물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였다. 주자학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인 그는 이에노부의 장군 취임과 동시에 등용되어
정치고문이 되었다. 그는 전대의 폐단을 고치고 유교의 덕치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문치정치를 실행하였다.
문치주의는 아라이 하쿠세키에 의하여 현실적인 정치이념으로 정착하였다.
또 이에노부 시대는 이전시대(元祿, 겐로쿠)의 화폐를 재주조하여 금의 함유율을 높여서 고품질로 되돌렸다.
이를 위해 금은의 해외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1715년 나가사키 무역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화폐와 이전 화폐의 교환 비율을 무리하게 결정함으로,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졌고 경제도 혼란스러워져
화폐 개주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또 막부의 의식, 전례를 정돈하여 장군의 권위를 높이고 조정과 막부 간의
융화를 꾀했으며, 경비의 절약을 위해 조선통신사의 대우를 간소화하였다.
이와 같이 하쿠세키의 유교적 문치정치는 어느 면에서 막부의 정치를 쇄신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이상주의에 치우쳐 사회실정에 맞지 않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의 정책은 막부정치의 동요를 근본적으로 고치지는 못한 채 1716년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에 의해 퇴출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