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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가을에 만나니 기쁩니다.
참 여름이 길고 무더웠습니다. 밤에 쌀쌀한 공기를 이렇게 맞으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제가 최근에 다시 이제 독서 삼매경에 좀 빠졌어요. 진짜 감사한 일이죠. 원래 책을 좋아하는데 좀 게을렀어요. 그래서 책을 안 읽고 있다가 최근에 저는 또 막 몰아서 막 이렇게 하는 성향이 있어서 거의 매주일 이제 한두 권씩 이렇게 책을 읽고 또 관련된 강연을 이렇게 들으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제목이 부흥하는 교회 쇠퇴하는 교회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정말 제목과 똑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인지 어떤 교회가 쇠퇴하는 교회인지를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물어서 데이터를 정리한 거예요. 그러니까 리서치가 이 책의 주된 내용인 거죠. 그러니까 틀리기가 되게 어려운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쓰기 되게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책 안에는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과 쇠퇴하는 교회의 특징이 나열되어 있어요. 이 책을 읽으면 목회자들은 일종의 자기 반성서와 같아요. 엄청나게 반성이 됩니다. 실제로 제 동료는 이 책을 읽고 거의 시험에 들었대요. 왜냐하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의 목회가 보이는 것 같아서 정말 힘들었다라고 고백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책을 읽으면 당연히 나의 목회와 그리고 이제 이 부흥하는 교회와 또 세트하는 교회가 자동적으로 비교가 돼요. 굳이 비교하면서 읽을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비교할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읽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비교가 됩니다.
여러분 자기 반성은 생각보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비교하면 그냥 자기 반성이 돼요. 자기 반성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직장인으로 부모로 성도로서 자기 모습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그냥 주변의 사람과 비교하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고 자기 반성이 됩니다. 비교해 보면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금방 알 수 있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잘하고 있는지도 금방 알게 됩니다.
저도 저의 목회와 그리고 목장 교회에서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이 책을 읽었어요.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냥 자동적으로 비교가 돼요. 여러분 이쯤이면 질문이 하나 우리가 주어지죠.
그럼 목장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일까요 아니면 쇠퇴하는 교회일까요?
제 동료는 이 책을 읽고 본인 교회가 100% 쇠퇴하는 교회라고 느껴졌대요. 그래서 너무 괴로웠답니다. 저도 그분만큼은 아니지만 좀 고통스러웠어요. 왜냐하면 나의 목회가 적나라하게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순수히 순전히 제 개인적인 평가예요. 그러니까 누가 우리 교회를 보고 그 책과 비교해서 저한테 말한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읽으면서 이제 스스로 평가한 평가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성은 좀 떨어지지만 어떻든 저 개인적인 어떤 기준을 가지고 비교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확하게 보면 이렇더라고요. 긍정적으로 보면 부응하는 교회와 쇠퇴하는 교회의 경계선에 서 있고요. 이런 거죠. 어떻게 보면 부흥하는 교회 같고 어떻게 보면 좀 쇠퇴하는 교회 같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올여름의 사역을 정말 순전히 성도들의 섬김으로 모든 사역이 다 진행이 됐잖아요. 일반적인 재정을 투입하지 않고 이것도 책정해서 예산을 돈을 분배한 게 아니라 자발적인 물론 저의 권면도 들어갔지만 어떤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는 기도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새벽 기도의 적은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정말 많은 성도가 와서 집에 돌아가실 때까지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계속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또 찬양팀도 열심히 준비하고 또 은혜롭게 사냥이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저에게는 밥이 맛있잖아요. 밥도 맛있고 주일 학교도 최근 조금조금씩 이렇게 아이들이 숫자가 늘어나고 이렇게 부흥하고 있어요.
이렇게 보면 우리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로 보이고 또 반면에 또 좀 나쁘게 보면 쇠퇴하는 교회로 보이기도 합니다. 최악으로 보면 쇠퇴하는 교회 증상이 뚜렷하고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면 부응하는 교회로 보이는 것이 우리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이 책을 읽지 않았으니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정을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정말 제 자신이 발가 벗겨지는 듯했어요.
첫 번째 감정은 부끄럽고 두 번째 감정은 좀 답답했고 세 번째 감정은 좀 괴로웠고 네 번째 감정은 마음이 심히 불편했습니다. 여러분 비교는 유쾌한 감정이 아니에요. 나이가 들어서 그러니까 비교를 당하는 것 이게 유쾌한 게 아니더라고요. 저도 당연히 목회자니까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이렇게 비교 대상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여러분 제 설교를 듣는 동시에 옆에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어볼 수 있지만 당연히 비교가 되겠죠. 제 모습과 옆에 있는 교회 목사님들의 모습이 비교되잖아요. 저는 늘 비교 대상인데 정말 이렇게 책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비교를 당하고 나니까 좀 많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좀 열등감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업이 좀 고통스러웠습니다.
여러분 부응하는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뭘까요?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과 쇠퇴하는 교회의 특징에 있어서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잘 증명해 주는데 오늘 본문은 부흥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이야기잖아요.
7절 말씀 같이 한번 우리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이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의 복종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뚜렷한 특징 중에 하나가 말씀의 역사였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예배와 설교인 거예요. 앞에서 말한 책에서 교회 사역에서 가장 근원이 되는 출발점을 예배와 설교라고 지적하더라고요. 성도의 삶의 출발점도 예배와 설교고 교회 사역의 출발점도 예배와 설교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의 변화의 중심에도 예배와 설교가 있고 성도의 삶의 변화의 중심에도 예배와 설교가 있다는 것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의 예배 우리의 설교는 어떨까요? 감사하게도 어제 저녁에 예배팀 모임이 시작이 됐습니다. 정말 제가 오래 하려고 했던 모임인데 어떻든 저도 게으르고 또 모든 일이라는 건 어느 정도 이렇게 분위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여러분의 마음과 열의가 없는데 제가 어떤 걸 시작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따라오지는 않으니까 저는 지금이 예배팀을 형성할 시기라고 여기고 일단은 찬양단 중심으로 한 번 모여서 예배 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잘 드려지려면 우리가 어떤 한 물음에 답을 잘 할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 오늘 예배를 성공이냐 실패냐 따질 수는 어렵지만 예배 자체를 그래도 성공의 실패를 따진다고 생각했을 때 이 질문에 여러분이 답을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예배의 성공자고 만약에 답을 할 수 없으면 예배의 실패자가 되는 거예요.
그 물음이 나는 예배자인가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예배하러 앉아 있잖아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나는 예배자인가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 나는 예배자입니다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 우리가 예배다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갈망하지만 자기가 예배자인 거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좋은 예배를 기다리고 기대해요.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기를 원해요.
그렇지만 자기가 정말 예배자인가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배가 하나님이 기뻐한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은 먼저 예배를 이끌어간 예배팀 저도 예배팀이죠. 예배팀이 나는 예배자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고 답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없게 되면 예배를 통한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나는 예배자인가라는 물음에는 하나님의 많은 요청이 포함돼 있어요. 여러분 아셔야 될 게 예배에는 하나님의 요청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예배자들에게 요구를 하신다는 거죠. 그냥 여러분은 예배자입니까라고 묻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갖춰야 될 것들을 하나님이 예배 시간에 여러분에게 요청을 하시고 요구를 하신다는 거예요.
진짜 예배는 이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요청을 들으셨다면 여러분은 좋은 예배자인 거예요.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는데 특별히 그 예배자들에게 요청을 하셔요. 그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들을 또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요청이 있고 우리의 응답이 있어야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예배에 하나님의 요청은 있는데 우리의 응답이 없다면 이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아닌 거죠.
다시 우리는 이런 예배를 너무 오랫동안 많이 드려왔어요. 하나님의 요청을 무시하는 예배, 하나님의 요청을 귀담아듣지 않는 예배, 하나님의 요청에 아무 관심이 없는 예배,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예배만 우리가 드릴 수 있다는 거예요.
진짜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려면 우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은 요청하시고 나는 응답하고 하나님, 그리고 응답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거예요. 은혜는 그냥 가만히 있는 나 자신에게 그냥 불현듯 쏟아지고 부어지는 게 아니에요.
특별히 예배의 은혜, 여러분 인생의 은혜는 그렇게 부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라서 때로는 내가 범죄하고 죄를 지어도 은혜 베푸실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예배의 은혜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에요. 예배의 은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우리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려기보다는 내 욕구와 내 소망과 내 갈증을 채우기 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청에 요청에 응답이 없는 예배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예배를 드린 사람이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예배하는 사람인 거예요.
예배를 통해서 어떤 변화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돼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자는 나는 예배자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예배자입니다고 답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을 또 함께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요한복음 4장 23 24절 읽습니다. 시작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찾는데 이전에는 특별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예배자에 대한 요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요청이 있어요. 우리만 하나님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청이 예배에 있어요. 그 첫 번째 요청이 영과 예배로 진리로 예배하라는 거예요. 축약해서 말하면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하라는 의미이고, 좀 더 확대돼서 이야기하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요청에 부합한 예배자가 될 때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가 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주어주신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성도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배하는 장소와 예배하는 성도만 있어야 되는 게 아니라 예배자인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예배자입니다라고 화답을 하고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성도가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거예요.
두 번째는 또한 그런 예배에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거죠.
여러분 예배의 은혜가 왜 필요할까요?
예배자들에게 은혜가 부어져야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힘과 교회를 섬길 수 있는 힘을 얻고요. 그리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해야만 이런 경험들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여러분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으려고 주의 전을 찾았어요. 또 막상 세상과 살아갈 힘과 용기를 못 얻고 이 예배당을 나가는 경우가 허다해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을 하지 않고 이 문을 나갔기 때문인 거죠.
왜 결단의 기도가 필요하냐 왜 결단의 찬양이 필요하냐 내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요청에 내가 나의 응답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결단의 찬양이고 또 결단의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에 예배라는 단어가 등장해요. 헬라어로 프로스키네오라는 단어인데 이 프로스키네오라는 단어는 이렇게 합성어입니다. 뭐 뭐에게를 의미하는 프로스와 그리고 키스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퀴네오가 이렇게 합쳐져서 트레스키네오라는 헬레어가 단어가 만들어졌어요.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 무릎을 꿇는 것, 존경을 표현하는 것 이게 예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 예배란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엎드리고 존경을 표현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 예배라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요청에 하나님의 요청에 나 자신을 내어놓고 그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예배라는 거예요.
영어로는 월십입니다. 이 월십도 합성어예요. 월스라는 가치를 의미하는 단어와 뭐 뭐 겉 아니면 어떤 분을 의미하는 1이 합쳐져서 월십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 있는 분으로 여기고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거예요.
이게 예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예배라는 단어가 규정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최고의 가치 있는 분으로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인 거죠.
예배란 최고의 가치 있는 분에게 나 자신에게 가진 최고의 것을 그분께 내어놓고 드리는 거예요. 그분의 요청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은 사람으로 돈은 돈으로, 자연은 자연으로 돼야 돼요. 이 논리로 따지면 여러분 이게 벗어나면 문제가 생겨요. 사람을 사람 이하로 대해도 안 되고 사람 이상으로 대해도 안 돼. 우리는 그냥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도 돈도 그냥 돈으로 대해야 되고요. 자연도 그냥 자연으로 대, 자연을 자연 이상으로 하면 자연 숭배가 되는 거고요. 자연 이하로 대하면 자연은 파괴가 되는 거예요.
돈도 돈 이상으로 섬기면 만 문이 되는 것이고 돈 이하로 섬기면 돈 문제로 인해서 또 가정이나 교회나 이런 것들이 깨워지겠죠.
동일하게 예배는 어떤 거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게 예배인 거죠. 걸맞은 가치를 있는 가지를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을 거기에 걸맞게 대하는 것이 인생이 될 지도인 거예요. 자연은 자연으로 대하고 돈은 돈으로 대하는 거예요. 사람은 사람으로 대하고 자녀는 자녀로 대하고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인정하는 것이 예배인 겁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죄는 죄로 대하게 되고 여러분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되는 거죠. 지금 이 시대의 문제가 그거예요. 죄를 자기 마음대로 없는 것으로 여겨요. 심지어 또 없는 죄를 있는 것으로 여겨요. 죄는 죄인 거예요. 마귀는 마귀인 것이고 어둠은 어둠인 것이고 음란은 음란인 것이에요.
돈을 하나님으로 대하든 인간을 하나님으로 대하든 성공을 하나님을 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들어진 가치대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여러분 만들어진 대로 그 가치를 인정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을 뛰어넘는 가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뛰어넘는 가치는 없어야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의 긴 과정들 우리가 보통 우리가 1시간 20분 정도 찬양까지 한번 드리잖아요. 이 긴 과정 중에 하나님을 뛰어넘는 가치는 등장해서는 안 되는 거죠. 목회자도 하나님이 뛰어넘는 가치가 돼서도 안 되고요. 그 누구도 어떠한 결정도 어떠한 모양새도 하나님을 뛰어넘는 가치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역자들이 목회자들이 실수하는 게 그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뛰어넘는 가치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저도 그렇겠죠. 근데 정말 좋은 교회란 가치를 가치로 대하는 거죠. 그냥 목사는 목사인 거예요. 그 이하도 돼서 안 되고 그 이상도 돼서도 안 돼요. 전도사님들은 전사님인 거예요. 그 이상도 되고 그 이하도 안 돼요. 저나 그분들에 의해서 뭔가 결정돼서는 안 돼요. 우리의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돼요.
이게 바른 예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배란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예배입니다.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가 여기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가 되는 거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드린 찬양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찬양이었나요?
여러분이 드린 예물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물이었나요?
여러분이 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도였나요?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부어주셔요. 우리는 이 은혜를 가지고 교회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가정도 섬기며 살아야 되는 거죠.
은혜가 없다는 건 인생이 괴롭다는 거죠. 왜요?
세상을 섬길 힘도 없고 교회를 섬길 힘도 없고 가정도 섬길 힘이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힘드나요?
힘 없으면 못 섬깁니다. 힘이 빠지면 못 섬겨요. 자랑은 아니지만 하여튼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몸의 에너지가 조금 채워져도 좀 낫더라고요. 어쨌든 매일을 2시간씩 하는 운동이 정말 좀 나를 낫게 만들어요. 부정적인 생각도 좀 사라지고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으로 내가 채워지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어요?
웨이트 트레인을 해서 채워지는 그 힘보다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인정해서 채워주는 힘이 얼마나 강력하겠어요?
그걸 예배를 통해서 경험해야 교회를 섬길 힘도 없고 세상을 섬길 힘도 가지게 되고 가정을 돌볼 힘도 가지게 돼요. 여러분 그게 예배인 거예요.
근데 만약에 우리가 이 예배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들을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기도하면 강력한 기도의 응답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언제 강력해질까요? 소리가 막 높아질 때 강력해질까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겠죠 마음이 모아지고 막 하면 진짜 우리의 기도가 강력해질 때가 언제냐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때 기도가 강력한 기도가 돼요. 여러분 그 기도를 해야 내가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엄마로 살기 힘들죠?
아버지로 사는 것도 힘들잖아요. 저도 수월하지는 않더라고요. 여러분 목사로 사는 것도 재미도 있지만 정말 힘든 것도 많아요. 여러분이 그 눈이 다 저한테 있잖아요. 감사하게도 어떤 분은 그런 부담을 안 주시려고 눈을 감고 계신 분도 있긴 하더라고요. 감사는 합니다. 어떻든 지금도 눈을 감고 계신 분이 있는데 정말 내가 감사히 여기는 분들이에요. 왜냐하면 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눈을 감고 계신.
근데 여러분 이 부담되는 걸 내가 뭐로 이겨요? 도대체 인간적인 힘으로 웨이트 투쟁으로 못 이겨요. 예배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를 통해서 내가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예배는 기본으로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것들이 예배자들에게 부어져요. 성령이 부어지고 응답이 부어지고 은혜가 내려오고 변화가 일어나고 성숙과 성장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교회의 변화는 이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를 섬길 때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거예요.
쇠퇴하는 교회는 이런 경험이 없는 교회입니다. 예배가 죽어 있기 때문에 비전이 없고 예배가 죽어 있기 때문에 소그룹의 재미가 없고, 예배가 죽어 있기 때문에 사역에 참여하는 성도가 적고, 예배가 죽어 있기 때문에 성도와 성도의 교제가 기쁘지 않은 거죠.
예배 회복은 교회 회복은 어디에 시작되냐 바로 예배로부터 시작돼요. 예배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공급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돼요.
근데 이 에너지는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철저히 나의 책임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세요. 엄마로 살아갈 힘을 주시고 아버지로 살아갈 용기를 주고 직장으로 살아갈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성도로 살아갈 공유를 주셔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찾는 예배자가 되어야 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창조주가 창조주로 여겨져야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돈이 하나님 여러분 예배 중에도 여전히 돈이 하나님인 사람이 많아요. 사람이 하나님 사람 사람은 사람이 하나님인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은혜가 없는 거예요.
예배 중에는 그냥 돈은 돈이어야 돼요. 사람은 그냥 사람이어야 돼요. 반면에 하나님도 동일하게 하나님이어야 돼요. 하나님은 창조주잖아요. 최고의 가치잖아요. 최고의 것이잖아요. 그분께 그런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이고 그 영광이 올려질 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를 한번 받아보셨습니까?
그냥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를 이렇게 내려도 내가 30년 40년 쌓여온 상처가 이렇게 뻥 뚫려서 내려가요. 이게 하나님의 위로예요. 여러분 교회가 능력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기 때문에 능력 없는 교회인 거죠. 예배가 쓸모없는 행사가 아니에요.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하기도 하고요. 비전을 발견하게 하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도 해요. 내 예배를 예배로 인정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자이십니까?
하나님이 목장 교회를 통해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수많은 것을 요청하셨을 거예요. 아마 찬양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분명히 여러분의 마음과 머릿속에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요청이 들어갔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결단을 찬양을 하고 기도할 때 그 요청을 한번 응답하는 기도를 한번 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교회는 재미있는 사람이 많이 모여야 재미있는 게 아니에요. 은혜 받은 사람이 많아야 재미있는 교회가 되는 거죠.
교회 사역은 실력 있는 사람이 많이 모여야 교회 사역이 잘 되는 게 아니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야 교회 사역이 잘 되는 것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를 통해서 성령이 부어지고 응답이 부어지고 은혜가 내려지고 변화가 일어나고 성숙하고 성장하는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세상에 살아갈 힘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머니로 살아갈 은혜를 얻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 목장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해할 힘을 얻는 주님의 재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믿으십시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될 겁니다.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면서 우리가 찬양하며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