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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흑령의 귓전을 메우고 있다. 하지만 흑령은 웃음에 살기
를 머금은 채로 다가오는 강천비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둘의 거리가 3장으로 줄어든다. 거기서 강청비의 발걸음이 뚝 멎는다. 그때부터 흑령
의 손에 쥐어진 검이 현란하게 포물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동작은 살상을 위한 동작 같지가 않다. 검무(劍舞)... 마치 검무를 추는 듯이 보일 정
도로 화려한 동작이다.
이 동작은 마치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하는 것을 표현한 듯,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기
그지없다. 덕택에 강천비는 흑령의 허초에 현혹되지 않으려는 얼굴을 하고는 이를 악
문다.
‘현혹되면 안 돼... 현혹되면... 죽음이 기다릴 뿐!’
마음 속으로 부르짖고 있는 강천비의 이마에서 힘줄이 일어난다. 흑령의 검이 만들에
낸 환영이 자신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보더라도 혼을 뺏기고 덤벼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를 머금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다. 강천비는 악물고 있는 이가 덜덜 떨리는 걸 느끼며 혓바닥을
내어 바싹 마른 입술을 훔친다.
‘수라구류도를... 쓴다...!’
눈을 질끈 감은 강천비는 수라구류도를 전개시키려고 도를 앞으로 내민다. 몇 초 지나
지 않아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갈대처럼 휘날리고 있는 마음을 꽁꽁 묶는다.
“아수라멸검(阿修羅滅劍)!!”
무미건조한, 인간의 목소리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걸걸한 목소리에 강천비가 눈을 번
쩍 뜨고 앞을 바라본다. 눈앞에 서있던 선녀 대신에, 흑령이 검에 아수라를 품은 채로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다.
두사람의 거리가 어느새 1장으로 줄어들어 있다. 그리고 1장 내로 들어온 흑령은 양손
으로 쥐고 있는 검을 강천비의 아미를 향해 뻗는다.
“수라구류도!”
얼떨결에 강천비가 도를 내밀긴 했지만, 그건 엄청난 행운이다. 안 그랬으면 벌써 이
마에 검이 꽂혀 쓰러지고 말았을 테니까.
강천비의 눈앞에서 두 마리의 아수라가 충돌하며 싸우고 있다.
“이, 이잇!!”
전력을 다해 내력을 보태설까? 흑령의 아수라멸검이 눈에 띌 정도로 뒤로 밀리기 시작
하자, 강천비의 얼굴에서 간만에 화색이 돈다.
‘좋아, 이대로 밀어버리면...!?“
문득 강천비는 등이 후끈거리는 걸 느끼고 짧은 비명을 지른다.
“끄악!”
곧이어 손에 힘이 풀리더니, 쥐고 있던 도가 바닥에 쨍그렁 소리를 내고 떨어진다. 강
천비가 황급히 떨리는 것을 참으며 뒤돌아보자, 흑령... 그가 살기 가득한 얼굴로 피
묻은 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정말 둔한 놈이군. 바로 등 뒤에서 계속 노려보고 있었는데도 당하고 나서야 눈치를
채다니.”
강천비는 그 말을 무시하며 도를 주워들고는 소리를 내지른다.
“이깟 상처에 쓰러질 내가 아니라고! 죽이려면 확실하게 놀아보란 말이닷!”
강천비가 소리를 지르고 달려든다. 흑령은 뜻밖이란 얼굴로 검을 몇 차례 막아내다가
다시 그곳에서 신형을 감춘다.
“흐으윽!”
이번엔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튄다. 게다가 강천비의 등에 난 상처는 결코 작지 않다.
둘의 상태는 이제 벌어질 수 있는 데까지는 벌어진 것이다.
“흐으... 흐으... 우욱!?”
바닥에 쓰러져 도를 의지해 일어서던 강천비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진다. 그를 보고 일
찌감치 떨어져 있던 흑령이 지나가는 투로 묻는다.
“현문강기(玄門剛氣)가 제법 강하구나, 애송아. 하긴, 그게 다행일지도 모르지. 안
그랬다면 왼팔이 날아갔을 테니까.”
“쿨럭, 쿨럭. 흑령이라고 했지? 언제까지 날 갖고 놀 셈이냐?”
강천비는 몸은 엉망이지만 눈에서 뿜어내고 있는 투지만큼은 여전하다. 흑령이 손에
묻은 핏방울을 입술로 핥고는 검을 탁탁 털어내고 가볍게 대꾸한다.
“이세혁을 놓친 울분이 풀릴 때까지다.”
“호... 그러셔...?”
상반신을 움직이자 지독하리만큼 시린 고통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범인(凡人)이라면
서있는 것조차 힘든 일이건만, 강천비는 그 고통을 이겨내며 다시 몸을 움직이고 있따
.
“대단한 정신력이다. 그 정신력 하나만큼은 칭찬해 주마.”
“후... 후흐흐흐... 미안하지만, 칭찬을... 좀 더 해줬으면 하는데...”
“뭘? 3류 실력을 칭찬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때, 강천비의 양손이 도를 쥐더니 공중을 향해 뻗는다. 흑령이 뭔가 싶어 방비태세
를 취하자, 강천비의 노호(怒號)같은 목소리가 숲 곳곳을 쩌렁쩌렁 울린다.
“내 끈기와 천재성! 쿠, 쿨럭!!”
기침을 하고 피가래를 뱉아 낸 강천비가 다시금 입에서 피를 쏟아낸다. 그리고 다시
흑령에세 신형을 날리더니 단전에서 내공을 쥐어짜 도에 실어 휘두른다.
“혼을 담은 마지막 공격이다! 수라구류도!!!!”
부상당한 소년에게서 나온 기운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강한 기가 쏟아진다. 흑령은 처
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절기를 펼쳐낸다.
“흑마검법(黑魔劍法)!!!”
번쩍-! 하고 일순간 공터에서 빛이 일어난다. 두 기류의 충돌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산새들은 놀라 도망치고, 짐승들 역시 후다닥 달아난다.
얼마 뒤에, 섬광이 가라앉은 공터엔 창백한 얼굴을 한 흑령과 함께 절벽 부근에서 비
틀거리는 강천비... 둘이 있다.
“... 으흑...”
강천비의 입에서 엷은 신음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그 신음이 끊기자, 강천비의 전신
곳곳에서 피가 새어나ㄷ온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써 버티고 있었던 탓에 삽시간에
백이가 시뻘건 피에 절어 섬뜩하기 그지없다.
반면에, 거기에 비해 흑령의 상태는 너무도 깨끗하다. 왼쪽 팔부터 손목까지 길게 그
어진 것을 빼고 나면 상처라고는 없다.
“비, 빌어먹을 정도로... 강한 놈이라니... 우욱!”
강천비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도를 집어 꽂고는 다시 피를 토해낸다. 그 뒤로 흑령
의 무미건조하기만 한 말이 흘러나온다.
“강천비, 네가 마지막에 쓴 그 도법은 지극히 훌륭했다. 허나 깨달음이 부족했던 게
주요 패인(敗因)이지.”
“큭... 그랬구만...”
“처음에 말했듯이, 네놈이 하는 건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지, 결코 무기를 쓰는 게
아니다. 그 실력으로 내게 덤비기엔 10년은 일러.”
서서히 흑령의 그림자가 강천비를 덮는다. 걸어가면서 풀이 밟혀 뿌드득거리는 기묘한
소리를 낸다.
“쿨럭, 쿨럭!!”
강천비가 절벽 아래로 피를 쏟아내고는, 무능력한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바닥에 굴러
다니는 흙을 한 움큼 움켜쥔다.
‘수련을... 조금만 더 평소에 수련을 했더라면...!!’
뒤늦게 자신의 안이함을 깨달은 강천비는 후회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다.
강천비의 목에 흑령의 검이 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다. 그리고 흑령의 목소리가 강천비
의 귀를 강타한다.
[귀거래혜] 23.영혼(靈魂)이 깃든 움직임
“... 유언은?”
“유언이라... 큭, 난 여기서 안 죽어.”
전혀 뜻밖의 말이 나오자, 흑령의 눈썹이 위로 꿈틀거리더니 부드럽게 검을 쥔 손을
들어올린다.
“희한한 유언이로군. 미안하지만, 넌 여기서 죽어야...”
“에잇!!”
정말 찰나 간 일어난 일이다. 흙을 움켜쥐고 있던 강천비가 그 흙을 흑령의 얼굴로 던
진 것이다. 재빨리 검을 들이밀어 막아 보지만, 일부가 눈에 흘러 들어가고 만다.
“비, 빌어먹을!!”
흑령의 얼굴에서 분노의 기색이 흐르더니, 눈을 어루만지지도 않고 곧장 강천비에게
검을 휘두른다.
검 끝에서 살점 베는 감촉이 묻어나오긴 하지만, 흑령은 얼굴을 찌푸리며 검을 팽개친
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흙이 들어간 눈을 문지르며 섬뜩한 말을 뱉는다.
“지독한 놈, 그 몸을 하고도 여기서 몸을 날리다니...!!”
왼손으로 팽개친 검을 주우려다가, 손목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시큰한 통증 탓에 이를
악문다.
‘우연이었던 건가, 아니면 깨달았던 건지는 모르겠다만... 마지막 놈의 공격엔 혼이
울부짖고 있었다.’
찔끔찔끔 피가 배어나오는 왼팔을 보며, 흑령은 괴의한 미소를 얼굴에 새긴다.
‘살아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때를 기다리겠다, 질풍귀 강천비.
좀 더 거물이 된 뒤로, 다시 덤벼 봐라. 멋지게 저승으로 보내 주고 말 테니까!’
그때, 눈을 부릅뜬 채로 강천비가 투신한 대운하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던 흑령의 주위
로 무리를 지어 모여드는 짐승이 있다. 족히 20에서 30마리는 됨직한 숫자로 흑령을
에워싼 그 짐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늑대 떼다.
“그르르르...”
송곳니를 입 밖으로 내보이며 흑령의 곁을 둥글게 에워싼 늑대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태세다. 그에 비해 흑령은 여전히 푸르게 흩어지는 물결만 바라보고 있다.
“캬우웅!!”
한 녀석이 엄지손가락만한 송곳니로 흑령의 목을 노리고 달려든다. 1장 거리를 두고
포물선을 그리며 멋지게 늑대가 도약하는 순간, 귀신같이 흑령의 손이 반응한다.
그 손으로 자신을 노리고 덤벼든 늑대의 주둥이를 움켜쥐더니, 늑대가 미처 피해내기
도 전에 쥔 손에 힘을 가한다.
빠직하는 섬뜩한 음향이 공터 가득 퍼진다. 주둥이를 잃은 늑대는 울부짖지도 못하고
피를 쏟으며 괴로운 듯 바닥에 쓰러지더니 피를 쏟아내며 죽어버린다.
“금수(禽獸) 따위가 감히 이 흑령을 죽이려고 달려든단 말이냐. 덤비려면 모두 같이
덤벼라. 안 그러면 방금 녀석 꼴이 되고 말 테니까.”
동료의 죽음에 분노를 느껴설까? 늑대 몇몇이 죽은 늑대를 툭툭 치다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 구슬프게 울어댄다.
곧이어 공터엔 다시 한번 끈적거리는 살기로 뒤덮히게 된다. 늑대들과 한 인간이 뿜어
내는 살기로....
1각 정도 시간이 지났다. 공터엔 서른 구 정도의 늑대 시체와 흑의 청년 하나, 거기에
살아있는 늑대가 한 마리 있다.
“정말 강아지 사촌 놈들이 더럽게 끈질기네. 중원의 생물들은 다 이런 건가?”
어느새 흑령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다. 말을 마친 흑령의 검이 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다. 흑령은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얼굴로 질풍처럼 다가가 능숙하게 늑대의
목을 잘라버린다.
떨어진 늑대 머리가 바닥을 뎅굴뎅굴 구르다가 흑령의 발에 부딪쳐 딱 멈춘다. 흑령은
여전히 음산한 얼굴을 한 채로 공터를 훑어본다.
“도합 서른 네마리 척살... 한번 긁혔군.”
왼팔을 다친 흑령은 아무래도 움직이기가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흑령의 오른쪽 가
슴팍에 미미하긴 하지만 발톱에 옷이 찢겨나간 자국이 남아있다.
‘팔기군은 이미 길목에 다 배치해 뒀다. 내가 만든 지옥을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이냐
, 이세혁.’
흑령이 음산하기만 하던 미소를 싹 지우고, 천진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세 발
자국을 걸은 흑령의 신형이 흐릿하게 지워지더니, 공터에서 깨끗이 사라진다.
“헉... 제, 젠장... 헉... 움직일 힘도... 없다니...”
어느 부위 가릴 것 없이 상반신 전체가 난자당한 강천비는 어디든 쉴 곳을 찾으려고
하지만 힘이 들어 미칠 지경이다.
다섯 시진 전에 흑령에게 난자당하고 대운하에 뛰어들어 떠내려 오던 나무판자에 몸을
의지하고는 안도감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추위와 배고픔, 고통 등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달은 기울어져 있고, 강천비를
반겨주는 것은 별과 달 뿐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의 흙길을 걸어가는 강천비의 옷자락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상처의 피와 대운하의 물이 섞여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윽, 젠장. 배까지 고프다니... 아니면 옷이라도 안 젖었다면 걷기라도 좀 쉽지...’
위장은 꾸르륵거리고 물 마신 옷은 움직일 때마다 질퍽거려 힘은 세 배 이상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허리엔 도까지 매어져 있으니,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천진 선착장까지는 적어도 사흘은 걸리는 곳이니까... 그때까지 다 나아야
공주님과 대영반 나리, 그리고 주군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도 강천비는 의식의 끈만큼은 놓지 않고 있다. 흑령도,
사문도도 감탄한 정신력이니 오죽하겠는가?
천운(天運)이랄까? 강천비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던 무렵, 멀리서
비치는 한줄기 빛을 보게 된다. 고개를 들어 힘겹게 바라본, 민가(民家)가 한 채 있는
듯하다.
‘50장은... 더 가야겠군...’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살 수 있다는 희망에 강천비의 걸음속도가 빨라진다. 오직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빨리 몸을 치료해 모두를 만나리라는 생각을 하며 강천비
는 거북이처럼 한걸음씩 앞으로 걸어간다.
반 시진이나 걸어 불빛이 비치던 곳에 도착하게 된 강천비의 몸에서 힘이 급격하게 빠
지기 시작한다. 말하고 싶지만 목구멍에서 맴돌 뿐이고, 대문을 두드리고 싶지만 손도
말을 안 듣고 있는 상태다.
‘소리를 지르면 되는데... 이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이젠 쉴 수 있는데...’
더 이상 버틸 정신력을 상실한 듯, 강천비의 몸은 흙담 무너지듯이 문 앞에서 쓰러진
다. 그때 행운인지 불운인지, 쓰러지면서 머리가 문에 부딪히는 바람에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지만 덕택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민가 전체에 퍼진다.
한동안 잠잠하기만 하다. 하지만 별안간 안채의 문이 열리더니 한 청년이 걸어나온다.
“이상하네. 이 시간에,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찾지...?”
혼잣말을 하며 대문으로 다가가 청년은 문밖에 대고 소리친다.
“이 시간에 누구십니까?”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다.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생각에 잠긴다.
‘분명 문을 친 것 같은 소리가 났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곳에서 한동안 서성이던 청년은 잘못 들었나 싶어 방으로 움직인다. 그때 귓전에 들
려온 고통어린 신음소리에 깜짝 놀라게 된다.
“역시, 누가 있었던 거야!”
황급히 대문을 열어보니,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말하
자면, 백의가 피와 물에 젖어 분홍색으로 물든 것이긴 하지만.
“이봐요, 소협! 소협!!”
청년이 강천비를 흔들어 보지만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다. 결국 청년은 깨우기를 포기
하고 황급히 강천비의 팔을 어깨에 걸치더니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웃차!!”
낑낑대며 자신의 침소에 강천비를 눕힌 청년은 강천비의 옷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피
를 보고 얼굴을 굳히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무림인(武林人)인가. 상처가 장난이 아니잖아. 지혈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강천비의 백삼을 벗겨내고, 뒤이어 백의의 단추를 따내자 상처투성이가 돼있는, 피로
떡칠을 해서 섬뜩하게만 느껴지는 강천비의 몸이 드러난다. 이미 강천비가 누워있는
침소는 피범벅이 된지가 오래다.
‘의서(醫書)를 읽은 적이 있어 다행이야. 사람 하나 살리게 될 기회가 올 줄은...’
강천비의 혈도를 짚은 청년은 밖에서 수건을 가져와 조심스레 피를 닦아낸다. 상처가
물에 불은데다가 워낙 깊어서 피 닦는 일인데도 어려움이 많은 듯하다.
“휴우...”
상체의 피를 모두 닦고 상처에 금창약을 바른 뒤 마무리로 붕대까지 감은 청년이 이마
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쉰다.
‘등의 상처가 제일 큰 것 같던데... 대체 뭘했길래 이렇게까지 다친 걸까?’
조심스레 강천비를 돌려 눕힌 청년은 금창약(金瘡藥)을 치우고 수건을 든다. 그리고
강천비의 등을 닦으려다가 상처를 보고 기겁을 한다.
“우우욱!”
메스꺼운 뭔가가 목구멍을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에 청년이 고개를 돌리고 헛구역질을
해댄다. 다름이 아니라, 너무 처참하게 되어 있어서다. 피칠을 하고 있는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등 중앙이 세로로 갈라져 척추가 훤히 보일 지경이니, 헛구역질이 안 나
오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한동안 바깥공기를 들이켜 마음을 가라앉힌 쳥년은 마음을 굳게 먹기 위해 눈을 질끈
감는다.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해.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한 뒤에... 내일 새벽에 의원을
데리고 와야겠어!’
청년이 굳게 다짐한 듯 눈을 뜨고는 강천비에게로 다가간다. 이미 피범벅이 된 수건을
뒤집어 등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그러면서도 떠오르는 의문은 머릿속에서 지워질 줄
모른다.
‘이 소협은 대체 누구지...? 무슨 일을 겪었기에 몰골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거지?’
강천비가 의식을 회복하면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청년은 구슬땀을 닦지도 않으며 정성
어린 손길로 상처 주위를 닦는다.
진시에 일어난 청년은 의원을 끌고 와 강천비의 상처를 보게 했다. 그 의원은 상처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한동안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충격을 먹었다.
얼마 후에 마음을 진정시킨 의원이 상처를 꿰매고 은자 한 냥은 받아야겠다고 큰소리
를 친다. 청년이 주는 한 냥을 받고는, 의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사라진다.
얼마 안 지나 사시가 되어서야 밥을 챙겨먹는 청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다.
‘내가 왜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진 은자까지 내 주며 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밥술을 뜨면서도 멍한 얼굴로 여태까지 잠들어 있는 강천비를 흘낏 바라본다.
노곤하게 자고 있는 강천비를 바라보는 청년의 입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난다.
“... 과거 공부하긴 틀렸군.”
과거 준비생이라 그런 걸까? 이 청년의 방엔 책이 수북이 쌓여 있다. 적어도 천 권은
됨직한,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뭐, 간만에 만난 사람인데 좀 쉬자. 공부 며칠 쉰다고 해서 과거에 떨어지기야 하겠
어?”
청년이 숟가락을 입에 넣고는 반찬을 뒤적인다. 헌대 이때,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청
년의 움직임을 멎게 만든다.
“으으음... 크윽...”
평온하기만 하던 강천비의 얼굴이 벌레 씹은 얼굴로 바뀌고 있다. 청년은 밥상을 밀치
고는 헐레벌떡 강천비에게 뛰어든다.
“소협, 정신이 좀 드시오?!”
“... 여, 여긴...?”
가늘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강천비를 보고 있는 청년의 눈엔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아까 의원이 적어도 세 시진은 지나야 의식이 회복될 거라고 했는데...?’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낯설어설까? 눈을 몇 번 껌뻑이던 강천비가
흐릿하게만 보이는 사람을 보며 묻는다.
“저, 실례지만... 여기가 어딥니까...?”
강천비가 질문하고는 다시 눈을 감으며 호흡을 고른다. 그때, 잔잔하면서도 깨끗한 목
소리가 강천비의 뇌리를 뒤흔든다.
“여긴 장주 교외(郊外)요.”
“... 아... 그렇습니까...”
사내 목소리 같기도 하고, 계집아이 목소리 같기도 한 특이한 소리 덕택에 강천비는
다시 눈을 뜨고 청년을 바라본다.
사내 같지가 않다. 옷만 문사(文士)들이 즐겨 입는 옷일 뿐, 얼굴을 뜯어보면 도저히
사내라고 하면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제갈건(諸葛巾)을 쓰고 있긴 하지만, 긴 머리카락 몇 줄기가 제갈건에서 삐져나와 백
의와 대조되어 묘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엷은 미소를 걸치고 있는 아기자기한 연분홍
색 입술은 산딸기를 보는 듯하고, 갸름한 턱선은 조각칼로 다듬어 놓기라도 한 듯 부
드럽게만 느껴진다.
“아... 저, 저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천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예를 올린다.
“별 말을. 사람 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오.”
강천비가 눈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킨다.
‘마치, 주군 같은 사람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주군보다 더하군. 주군보다 더 예쁘
게 생겼잖아.’
사문도의 얼굴과 청년의 얼굴을 비교하던 강천비는 문득 올라오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묻는다.
“은인의 존함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청년은 책더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본다. 참새 세 마리가
짹짹거리며 마당에서 노닐고 있다.
“소생의 이름이라... 알고 싶소?”
“물론입니다. 제 생명의 은인 아니십니까.”
등과 전신 곳곳이 쓰라린데도 강천비는 힘들여 미소 지으며 대꾸한다.
“... 소협은 무림인이오?”
“예.”
무림인이라는데도 이 청년을 놀란 기색도 없다. 하지만 망설이는 얼굴이다.
‘가르쳐 줄까, 아니면... 대강 둘러댈까? 아버님 후광을 너무 많이 받아서, 내 이름
도 아는 사람이 많던데...’
이 문제를 놓고 청년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속사정 모르는 강천비가 묻는다.
“무림에서는 질풍귀라 하고, 본명은 강천비라고 합니다.”
“!!”
청년의 안색이 변한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생각에 빠진다.
‘... 알고 있던 사파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구나. 사파 사람이라고 하기엔 눈
이 너무 착해 보여.’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한 청년은 고개를 돌려 강천비의 눈을 본다.
“제갈영(諸葛榮)이오. 명성 높은 강 소협을 만나게 되어 반가울 따름이오.”
제갈영! 중원무성의 작전참모 제갈승의 일점혈육(一點血肉)으로, 사문도와 맞먹을 정
도의 용모와 약관도 안 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던
인물이다.
“제갈 대협이셨습니까? 그런데... 무림인은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알
고 계십니까?”
“아아, 이 부근에 있는 주막에 가 보면 무림인들 사이에서 한창 유명한 얘기가 강 소
협과 소협의 주군이란 사람 얘기요. 어깨너머로 들어 기억하고 있었소.”
강천비의 반응에 제갈령은 입가에 짤막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정말 뜻밖이야. 내가 제갈세가(諸葛世家) 사람이란 걸 몰라서 그런 건가? 강호 초행
이라 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테고...’
상대는 사파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다. 중도세력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제갈영의 부친인
제갈승이 중원무성을 돕고 있으니 얘기해 봐야 좋을 것도 없는 것이다. 덕택에 제갈
영은 강천비의 반응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몸 상태도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닷새는 푹 쉬시오. 의원이 닷새 정도는 푹 쉬라
고 하고 갔소.”
제갈영이 또다시 잔잔한 미소를 띠며 강천비를 본다. 그러다가 강천비의 안색이 흐려
지는 것을 보게 된다. 제갈영이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찰나다.
“제갈 대협께는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적어도 내일 정오쯤에는 떠나야만 할 것 같
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최소 닷새는 쉬어야 한다고 의원이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 소
협을 이렇게 그냥 보내란 말이오?”
“대명제국(大明帝國)의 존망이 걸린 일입니다. 어떻게든 닷새 안으로는 천진까지 가
야 합니다.”
“대명제국의 존망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죄송하오나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얼굴을 굳힌 채 용서를 구하는 강천비를 보고 제갈영은 말을 잃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제갈세가 출신답게, 제갈영의 머리는 치밀하게 굴러가고 있다.
‘대명제국의 존망? 대체 지금 이 하북성(河北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대
명제국의 존망 얘기까지 나오는 거란 말인가?’
잠깐 생각해보니, 제갈영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남양(南陽)에서 일어났던 학살사건과 관계가 있는 걸까? 그 사건 말고는 최근 일어
난 사건 중 황실과 관계된 사건은 없는데.’
본래 무림과 황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서로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게
벌써 천년 이상 지속되 온 일인데, 지금 강천비의 말은 그 간섭하지 않는다는 걸 무시
하는 행위다.
‘질풍귀 강천비... 알 수 없는 소년이로군.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제갈영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자, 곧이어 방안에는 폭풍 전야의 고요 같은 조용함이
엄습한다. 둘 중 어느 사람도 감히 먼저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그렇게
흘러만 간다.
제갈영이 챙겨준 아침밥을 먹은 강천비는 다시금 눈을 붙였다. 제갈영의 강력한 권유
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나서 네 시진이 지나 다시 눈을 뜬다. 처음 일어났을 때보다 몸이 많이 개운해
졌다는 것을 몸소 실감하게 된다.
“으하하함... 악!?”
갑작스레 엄습하는 등의 통증에 강천비가 짧은 비명을 내지른다. 곧이어 제갈영의 염
려스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강 소협. 등의 상처가 생각보다 심해서, 운 없으면
아마 상처가 벌어지는 경우도 생길 것이오.”
“크으... 아, 알겠습니다.”
다시 몸을 눕힌 강천비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얼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
긴다.
‘내일까지 나을 것 같지는 않아. 최소한 닷새 안으로는 완치를 해야, 흑령을 다시 상
대해도... 무리가 없을 터인데...’
적어도 내일 정오엔 떠나야 한다. 이 강박관념(强迫觀念)이 강천비의 머릿속을 지배하
고 있다. 초조하기만 할 뿐이지, 움직이기조차 힘든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운 것은
처음이다.
‘주군께서 맡기셨던 임무는 목숨을 걸고 수행하고 말 것이다. 주군께서 맡기신 건데.
.. 실명시켜 드릴 수는...’
“참, 강 소협. 궁금한 게 있소.”
갑작스런 제갈영의 질문에 강천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갈영에게 고개를 돌린다.
“말씀하십시오.”
제갈영의 입가에 알게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제갈영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더
니 간단한 질문이 떨어져 나온다.
“강 소협이 섬기고 있는... 고독랑 사문도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오?”
멍한 빛을 띠던 강천비의 눈에서 별안간 생기가 돈다. 그리고 싱글싱글 웃으며 제갈영
에게 묻는다.
“혹 섬길 맘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물론 그건 아니고, 최근 무림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는... 사문도란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이오.”
간단한 제갈영의 답변을 들은 강천비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짤막하게 대답한다.
“한 마디로... 멋진 분입니다.”
“... 멋진 사람이라면?”
“지덕체(智德體)... 이 세 가지를 갖춘 분입니다. 슬기, 덕망, 검술... 이 세 가지가
제 눈엔 모두 완벽합니다. 거기에 추가로 하나 더 말하자면... 역시, 감탄할 만한 용
모라고나 할 수 있겠군요.”
“슬기, 덕망, 검술... 그리고 용모라.”
“이미 무림에서는 대적할 만 한 자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입니다. 같은 대장부로
서... 주군은 정말, 제 이상형입니다.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게 없으신 분이니까...”
“후후, 그렇게 잘난 소협의 주군이 꿈꾸는 목표가 뭐요?”
강천비는 갑작스런 질문에도 별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제갈 대협이 무림인이 아니라 가르쳐 드리는 겁니다.”
제갈영의 눈에서 흥미가 일어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 무림인들에게 떠드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오.”
“그 말을 믿겠습니다. 주군의 목표는... 무림통일(武林統一)입니다.”
“무림통일이라면... 중원무성을 무너트려 무림을 사파천하(邪派天下)로 만들겠다는
것이오?”
강천비가 고개를 내젓더니 차근차근한 어조로, 또박또박하게 대꾸한다.
“정사(正邪)가 어우러져 정파건 사파건 차별받지 않는 무림을 만들겠다는 것이 주군
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정사가 차별받지 않는 무림이라...”
제갈영은 지혜로 가득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해본다.
‘무림통일. 중원무성이 있는 한도 내에서는 힘든 일이겠지만... 모를 일이지. 달은
차면 기우는 법. 중원무성이 무림의 1인자로 온지도 어느덧 3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
으니 말이지.’
벽에 기대어 무릎에 한 팔을 의지해 앉아 있던 제갈영이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천천
히 일어선다. 닫혀있던 방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 제갈영은 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고개 숙여 중얼거린다.
“안 그래도 무림이 좀 지루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지금 만력제가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해줄지도 의문인데, 3년 정도는 더 기다려 볼까?
무림 판도가 돌아가는 걸 본 뒤에 내가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
누워있는 강천비를 흘낏 바라본 제갈영이 다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소리친다.
‘아버님.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제갈세가 사람을 태어나 무림에 투신하는
것만치 보람된 일은 없을 일이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아버님은 검황(劍皇) 독고천을 도와 중원무성을 완벽한 무림 최강의 세력으로 키우셨
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앞으로 고독랑 사문도를 바라보겠습니다. 그자가 얼마나 성장
하는지 보고, 중원무성과 견줄만한 세력을 만들 수 있는 자라고 생각된다 싶으면...
저는 사문도의 참모가 되겠습니다.’
순간이나마 제갈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누군가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인가?
제갈영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지만, 묘하게 슬픔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다.
‘아버님께서는 모르십니다. 어머님께서 아버님 한 사람 때문에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셨는지를... 아버님께서는 전략가로서는 성공하셨는지 모르겠습니
다만, 가장(家長)으로서는 실패하신 거란 것을 말입니다.’
구름 둥실 떠다니는 허공을 바라보는 제갈영의 얼굴에 구슬픈 미소가 떠오른다.
‘모든 것은 사문도란 사람의 행동에 달렸습니다. 헛된 꿈일지도 모르는 일이긴 합니
다. 하지만 저는 제갈세가 사람으로서, 아버님이라는 최고의 적을 이겨보고 싶습니다.
’
“제갈 대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갑작스레 강천비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제갈영은 얼굴을 급히 돌린다.
“아니오. 소협께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요. 심려치 마시오.”
“...??”
그날 밤, 강천비는 제갈영이 잠든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늦여름 밤인데도 귀뚜라
미 우는 소리가 꽤나 요란하다. 시원하기 그지없는 여름밤에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귀
뚜라미 울음소리는 강천비의 가슴 한구석을 흠뻑 적셔온다.
대들보를 짚고 서있는 강천비의 상반신은 온통 천으로 칭칭 감겨있다. 척추의 상처가
터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제갈영이 손수 묶어준 것이다.
‘제갈 대협...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언제부턴가 강천비의 손에는 도 한 자루가 쥐어져 있다. 움직여 보기라도 하려는 것일
까? 도를 쥐고 있는 강천비의 몸이 서서히 움직인다. 부드러우면서도 신중해 보이는
동작 탓에, 주변에는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이 엄습한다. 귀뚜라미 소리도 뚝 그친다.
‘이틀 만에 쥐어 보는군. 그런데 왜 이렇게도 느낌이 새로운 걸까?’
강천비가 도를 쥔 손을 가볍게 휘두른다. 등을 묶어서 그런 것일까. 통증이 생각보다
강렬하지가 않다. 곧바로 강천비의 얼굴에서 가느다란 미소가 떠오르더니 지워진다.
‘영혼이 없는 칼부림은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했지. 그렇다면 흑령, 그자
는 이미 검을 휘두를 때 영혼을 담아 휘두르고 있다는 말이렷다.’
흑령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는 강천비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진다. 흑령의 말이 뜻하는
바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는 탓이리라.
‘여기서 한 단계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건 확실하다. 여기서 한 단계가 더 강해지면,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는 거지? 모용 누님 정도나 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숨을 고르던 강천비가 눈을 내려감는다. 그리고 조용히 주변
공기의 흐름을 읽어본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공기의 흐름... 그리고 자신의 흐름이.
‘기분 한번 묘하네. 공기의 흐름을 읽는 게 이다지도 마음 편한 일이란 걸 왜 여태
몰랐을까?’
희한한 일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희한한 일도 아니다. 강천비는 수련할 때 오로지
도를 정교하게 쓰는 법만 익힐 뿐이다. 공기의 흐름을 읽어보는 시간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한동안 묘한 기분에 젖어있던 강천비는 눈을 뜨고 양손으로 도를 꽉 움켜쥐고는 전력
으로 도를 휘두른다.
“으윽?!”
척추에서 통증이 전해져온다. 벼락을 맞은 듯한 통증... 그것이 몸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자, 강천비. 이 정도로 쓰러지면 네놈은 사내도 아냐! 대명제국의 미래가 이 어깨
에 걸려 있는데... 여기서 쓰러진다면, 대명제국의 앞날도 뻔한 거 아니겠어?!’
스스로에게 되뇌며 이를 악물어보지만, 강천비는 결국 도를 떨어트리고 마루에 철푸덕
쓰러진다.
“이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주군께서 맡기신 임무를... 대명제국을 위해서는... 절
대 쓰러진 수가 없단 말이다...!!”
강천비가 필사적으로 일어서 보려고 용을 쓴다. 하지만 몸이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고 있다. 그 현실이 강천비의 마음을 새카맣게 태워나가고 있다.
강천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 미시(未時) 정각에 출발하는 배를 타야 한다. 하지
만 지금 몸 상태론 제갈영이 자신을 보내줄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설사 보내준다고 하
더라도 제대로 걷지도 못할 상태다.
문득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낀 강천비가 고개를 돌려 등을 바라보려고 안간
힘을 쓴다. 하지만 그때, 제갈영이 자고 있는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
이 덜커덕 열리더니 제갈영이 뛰쳐나온다.
“세, 세상에... 강 소협,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하... 하하... 제갈 대협,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갈영이 보이자 강천비가 희미하게 웃더니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다.
“가, 강 소협! 강 소협!!”
강천비의 뺨을 몇 차례 때려보지만 강천비는 대답도 없다. 그러다가 문득 제갈영은 강
천비의 등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설마... 상처가...?”
천으로 꽁꽁 묶어둔 강천비의 등에서 피가 새어나와 천은 물론이고 마루까지 적색으로
섬뜩하게 물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제갈영은 황급히 강천비의 맥박(脈搏)을 짚어본다. 의원이 아닌 자신이 짚어 봐도 맥
박이 무척이나 희미하다. 곧바로 제갈영의 마음이 급해지더니 조심스레 강천비의 상반
신을 움직여 방에 눕힌다. 그리고 서두르면서도 조심스럽게 등을 묶은 천을 풀어낸다.
분명 척추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처가 터지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무리하게 움직여서 상처에 부담이 가 그것 때문에 피가 새어나오
고 있는 것뿐이다.
“휴... 그나마 다행이야. 내일은 천상신의(天上神醫) 어른이라도 모셔와야겠어.”
제갈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한밤중에 일어난 일에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다.
‘정말 대단한 소년이야. 이렇게까지 몸을 버려가며 명령을 수행하고 싶은 걸까?’
잘 자다가 밖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잠을 깼다. 그리고 강천비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
여기까지 나와 보니 세상에, 강천비가 등에서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한 걸 다행으로 여기자. 상처라도 터졌으면 잠은 자지도 못했을 거니까.’
당분간 강천비가 의식을 회복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한 제갈영은 강천비의 등에
새 천을 묶어주고는 다시 잠을 청한다. 진시 전에 일어나 천상신의에게 찾아가리라
마음을 굳게 먹으며 말이다.
용케도 묘시(卯時)에 눈을 뜬 제갈영은 서둘러 밥을 챙겨먹고 천상신의의 산장으로 잔
걸음을 재촉했다. 축축한 밤이슬이 제갈영의 옷깃을 여기저기 적셔서 몰골이 엉망이다
.
‘강 소협, 부디 다녀오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길 빌겠소.’
산길을 오르는 제갈영은 가까이 산장이 보이자 숨을 돌리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
친다. 그리고 조금 숨이 가라앉자 다시 부지런히 산장으로 걷고 또 걷는다.
“... 휴우...”
천상신의의 산장에 도착한 제갈영이 다시 숨을 고르고 심호흡을 한다. 곧이어 문고리
를 사정없이 두들기며 안으로 소리친다.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답답한 마음에 제갈영이 다시 한번 문고리를 두드린다.
고요한 새벽에 울려 퍼지는 이 소리가 제갈영의 기분을 확 가라앉힌다.
‘사람 하나 살리기가 장난이 아니로군. 천상신의 어른이 정말 존경스러워.’
제갈영이 혀를 내두르며 다시 한번 문고리를 두들기려던 찰나다.
“이 시간에, 누구요?”
항주 유명인사(有名人士)의 목소리다. 온화한 온기가 문밖에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그런 목소리다.
목소리 덕택에 식어가던 제갈영의 안색이 희색을 띤다. 곧이어 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천상신의, 그가 제갈영을 보고 걸어나온다.
“오오, 제갈 대협 아니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늦은 새벽부터 송구하게 됐습니다만, 저희 집으로 잠깐 와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조금만 더 있으면 진료 시간인데...”
천상신의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제갈영이 고개를 숙이며 천상신의에게 간청
한다.
“어른께서 진료 시간이 되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염치 불구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번엔 단순히 장기나 하자고 어르신을 초청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 집에 어르신 손길
이 필요한 소협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등이 찢어져서 척추까지 보일 정도로 중상을 입
었는데, 어른께서 이 소협을 잠깐이라도 봐 주셨으면 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제갈영의 대답에 천상신의가 눈빛을 고치며 제갈영에게 묻는다.
“부상 정도가 심각한 모양이구려. 갑시다. 난 또 장기라도 두러 가자고 온 건줄 알았
소.”
“감사합니다, 어르신!”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의료기구 좀 챙기고 오겠소.”
제갈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난다. 천상신의는 이미 내원으로 들어가 백삼을 걸치고
장비를 챙기고 있다.
“어디 다녀오시렵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는지, 한 하인이 눈을 비비며 천상신의에게 묻는다.
“오늘 아침 진료는 한 시진 정도는 늦어질 거라고 알려 주게나. 잠깐 다녀올 곳이 있
어서 그렇다네.”
“알겠습니다.”
하인이 가볍게 대답하고 사라진다. 천상신의는 적이 만족한 얼굴로 바깥으로 나와 숨
을 내쉬고는 제갈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갑시다, 대협. 환자가 급하다고 하지 않았소?”
“아, 예. 그런데 함께 있던 대협께서는 아직 주무시는지요?”
“아아, 문택이 녀석 말이오? 잠깐 봉려산(鳳麗山)으로 간 듯하오. 또 보나마나 휘경
이 무덤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있을 거요.”
약간이나마 천상신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제갈영은 놓치지 않는다.
‘죽은 외손녀 이야기를 하시는 거로군. 이거, 괜한 이야기를 꺼냈어.’
천상신의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다. 제갈영은 조용히 천상신의의 뒤로 따라붙으며,
아까 했던 생각은 지워버리려 애쓴다. 강천비가 천상신의와 대면하게 되는 순간 전까
지라도 천상신의의 기분을 돌려놓기 위해서리라.
“먼저 들어가 보십시오, 어른.”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갈영은 문을 열어젖히고는 천상신의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한
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천상신의가 거침없이 열린 방문으로 들어가자, 제갈영도 얼른 들어와 방문을 닫는다.
“제갈 대협이 말한 사람이 이 소협이오?”
“예.”
“어디보자... 등이 찢어졌다고 했소?”
천상신의는 제갈영의 답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금문택의 등에 감겨 있던 천을 풀
어낸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워져 있는 강천비의 등을 보고는 아미를 찌푸린다.
“에잉, 쯧쯧. 이 상처, 대체 누가 꿰맸소?”
“어제 다른 의원을 불러 꿰매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꿰매놓고 갔습니다.”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꿰맨 거요. 내가 꿰맸다면 최소한 이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을 거요.”
천상신의가 강천비의 등에 천을 덮고는, 제갈영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제갈 대협의 의사를 따르겠소. 다시 꿰매겠소, 아니면 응급처치만 대강 하겠소?”
“강 소협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보다시피 혼수상태가 아니오. 그리고 선택이 늦어진다면 이 소협은 평생 허리를 제
대로 쓰지 못할지도 모르니, 기다린다면 너무 늦소.”
‘평생’이란 단어를 강조한 탓일까? 침착하기만 하던 제갈영의 낯빛이 흔들리기 시작
한다.
“... 어른께서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꿰매는 게 나을 듯하오. 지금 저대로 방치한다면 치료되기까지 시일도 많이 걸
릴 뿐더라, 완치가 된다 하더라도 전의 8할 정도밖에 허리를 쓸 수가 없소.”
“그럼 어르신께서 다시 손을 보신다면...”
“물론 완벽하게 다시 쓸 수 있소. 시일도 열흘 안으로 짧아지고 말이오.”
제갈영은 천상신의의 말을 듣고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나직한 말투로 묻는다.
“어른께서는 너무도 당연한 걸 묻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알겠소. 제갈 대협께서는 잠깐 나가 주시겠소? 뭐, 피 냄새 맡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면 여기 있어도 상관없소만.”
“... 그럼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심부름 시킬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찾으십시오
.”
“알겠소.”
제갈영이 책을 한권 들고 방문을 빠져나가면서 등을 위로 한 채 강천비를 흘낏 바라본
다. 그리고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얼굴로 가차 없이 발걸음을 돌려 방을 빠
져나간다.
제갈영은 방문을 닫은 뒤, 제갈건을 벗고 흐트러진 머릿결을 이리저리 다듬는다. 어깨
아래쪽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바람에 희롱당해 이리저리 휘날린다.
“후우... 머리 길러서 이렇게 유지한다는 건... 역시, 너무 힘든 일이야.”
혼잣말을 하고는 자리에 주저앉는 제갈영의 얼굴에는 서글픈 미소가 피어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에 지금처럼 서글픈 미소가 걸려 있다니, 주변 공기마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듯하다.
‘벌써 세가를 비운지 3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은 역시 무시할 수 없어.’
현재 제갈영의 나이가 열아홉이다. 즉, 열여섯 때 집을 나와 혼자 사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때때로 천상신의와 장기도 두고, 학문 수양도 하고, 자연에 흠뻑 취하기도 하며 지내
온 지 어느덧 3년.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이제 그만... 세가로 돌아갈까?’
부친 제갈승은 없지만, 모친 만연옥(萬娟鈺)이 기다리고 있을 제갈세가. 요즘 따라 제
갈세가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그래도 자신이 자라난 곳이기 때문이리라.
‘가 봐야겠어. 개방(丐幇)에 연락해서 고독랑 사문도의 신변을 추적해 달라고
부탁도 하고, 어머님께 인사도 드려야겠어.’
부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란 제갈영이기에, 모친 만연옥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할 수 있다. 제갈영이 지금까지 성장하게 된 배경은, 만연옥의 애정과 관심이 큰 폭
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남(齊南)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말 타고도 한달 정도였나...?’
가물가물하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는 제갈영의 모습에서는 처음에 보이지 않던 야릇
한 흥분과 기대감 같은 것이 엿보인다. 모친과 제갈세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기쁘기 그지없는 모양이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을 테지요?
이제 어머님께 가겠습니다. 여기 일이 끝맺어지는 대로... 어머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제갈영의 눈에는, 한 가닥의 희망이 엿보인다. 고향 제남으
로 돌아간다는 희망, 그리고 한동안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다
는 여유 덕분이다.
“후우...”
천상신의가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를 닦으며 다시 한번 강천비의 등을 꼼꼼하게 살핀
다. 바늘땀 하나하나가 처음 꿰매져 있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될 정도로 정
교하면서도 세밀하게 꿰매져 있다.
“이 정도라면... 무리하게 안 움직이는 이상, 절대 안 터진다.”
호언장담을 늘어놓은 천상신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곧바로 방문이 덜커덕 열
리며 초조한 얼굴을 한 제갈영이 들어와서 묻는다.
“이 소협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물론이오. 아마 앞으로 이틀 정도는 더 푹 잘 거요.
출혈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오? 바늘로 꿰매는데 피가 거의 맺히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 쯧쯧.”
천상신의가 혀를 차며 의료도구를 주섬주섬 챙긴다.
“가시려는 겁니까?”
“물론이오. 의원에서 환자들이 내 손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시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오.
게다가 지금 노부에게 손님이 와 있으니,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실례요.”
천상신의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긋 웃는다. 그리고 지체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
순간, 제갈영의 고운 손이 막 방을 빠져나가려던 천상신의의 손에 전표(傳票) 한 장을
쥐어준다.
“... 이건 뭐요, 제갈 대협?”
“은자 닷 냥짜리 전표입니다. 나중에 술이나 사 드십시오.”
“대가를 바라고 치료한 게 아니오. 게다가 저 환자는 제갈 대협과 그리 잘 아는 사이
도 아니잖소?”
“상관없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환자를 치료해 주셨으니, 그에 상응한 보수를 받으
실 권리가 있습니다.”
막무가내인 제갈영의 눈을 바라보던 천상신의는 대책 안 선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다
가 얼른 경공술을 펼치며 소리친다.
“나중에 저 소협이 일어나거든, 앞으로 닷새는 절대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고 해 주시
오!”
“처, 천상신의 어른!”
이미 천상신의는 저 멀리 산길을 달리고 있다. 제갈영은 허탈한 얼굴로 천상신의가 달
리고 있는 산길을 바라보며 고소를 짓는다.
‘여전하시군요, 천상신의 어른. 환자들에게 돈 안 받으시는 거, 언제나 사람 미안하
게 만드시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영의 입가엔 보기 좋은 상쾌한 미소가 걸린다.
‘소협이 여기를 떠나는 날, 나도 여기를 떠날 생각이오. 여기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
산하고... 내 고향, 제남으로 돌아가 당분간은 휴식 기간을 가져볼 계획이오.’
마루에 팔을 짚고 턱을 괴어 강천비의 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는 제갈영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틀 후라... 그때까지는 푹 쉬시오, 강 소협이 하는 일이 얼마나 다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생은 소협의 건강이 훨씬 더 걱정이 되니 말이오.’
제갈영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강천비가 맡고 있는 일이, 조국 명(明)의 안녕
과 존속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일이란 것을.
강천비가 천상신의에게 치료를 받고 어느덧 해가 두 번 떨어졌다. 정오 무렵, 강천비
는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 탓에 깊고 깊은 수면에서 깨어난다.
“아흐흠...”
강천비의 하품소리에, 마루에서 참새들에게 쌀알을 뿌리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제갈영이 고개를 돌려 방을 보며 묻는다.
“강 소협, 정신이 좀 드는 거요?”
“... 아,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갈영이 마루에서 일어서자 쌀을 쪼아 먹던 참새들이 놀라 허공으로 흩어진다. 제갈
영은 어느새 준비해 둔 물 한 사발을 강천비에게 건네고 있다.
“갈증이 심할 거요. 해갈(解渴)하시오.”
“고맙습니다, 제갈 대협.”
강천비가 나른한 몸을 움직여 제갈영이 건네주는 사발을 받으며 물을 맛있게 들이킨다
.
“크하... 이제 사는 기분이 좀 나는군.”
가분 좋게 웃으며 목을 이리저리 만지는 강천비에게 제갈영이 근심스런 얼굴로 묻는다
.
“강 소협, 이제 상처는 정말 괜찮소?”
그러자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강천비가 오른손을 뻗어 허리를 슬슬 더듬어본다.
“... 어라?”
통증이 안 느껴지는 듯, 강천비는 희한한 소리를 내지르더니 이번엔 상처 주변을 꾹꾹
눌러본다. 하지만 그때야 통증이 느껴지는 듯, 강천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제갈 대협, 대체... 제가 쓰러지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허리 상처가 이렇게 많이 나
은 겁니까?”
갑작스레 강천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좌우로 돌린다. 그를 보고 제갈영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반문한다.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소?”
“예. 전에 쓰러졌을 때와는 전혀 딴판인 것 같습니다. 몸도 가뿐하고, 전신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게 한바탕 뜀박질이라도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갈영의 미소에 강천비도 덩달아 빙긋 웃으며 주먹에 힘을 꽉 주고는 힘차게 주먹을
휘두른다.
“하하, 보십시오. 이젠 멀쩡하잖습니까?”
꼬마처럼 낄낄거리는 강천비에게, 제갈영은 조용히 해 보라고 손짓한 뒤 모든 감정을
얼굴에서 깡그리 말살시키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강 소협, 소협이 쓰러져 있었을 때의 일들을 다 설명해 드리겠소. 잘 들으시오.”
제갈영의 말에 강천비는 바닥에 조용히 앉으며 제갈영의 이목에 신경을 기울인다.
“강 소협이 쓰러진 다음 날 새벽에, 의원을 새로 모셔와 강 소협의 상처를 보여 드렸
소이다. 그랬더니 그 의원께서 상처를 다시 꿰매주시고 금창약까지 조금 주시고 가셨
소.”
“...”
“그때부터 소협이 잠을 늘어지게 잔 덕택에 상처가 많이 좋아진 게 아닌가 싶소.”
그 대답에 강천비가 의아한 얼굴을 짓더니 궁금하다는 투로 묻는다.
“제가 몇 시진이나 잤다고 허리가 그 사이에 이렇게까지 낫겠습니까? 아무래도 의원
나리께서 실력이 무척이나 출중하셨던 모양인 듯합니다만.”
그러자 이번엔 제갈영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는 강천비에게 반문한다.
“치료를 받고 이틀이나 잤는데, 이틀 자고도 모자라다고 하는 거요?”
이틀이란 단어가 강천비에게는 너무도 자극적이었던 탓일까? 강천비가 눈을 부릅뜨고
는 갑자기 소리를 내지른다.
“이, 이틀?! 저, 정말 제가 그렇게 많이 잤단 말입니까?”
“그럼 소협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강천비의 얼굴이 굳어가더니 새파랗게 질려버린다. 사문도의 명령을 온전하게 수행해
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머릿속을 이미 하얗게 물들인지 오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리도 긴장한단 말이오? 그때 말한 이 나라의 운명이...”
“바로 그겁니다! 대영반 나리께서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단 말입니다!!!!”
강천비가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자신의 도를 찾고는 서둘러 요대에 둘러맨다. 황
급히 백삼을 걸치고는 제갈영에게 꾸벅 인사라도 하려는 순간, 제갈영은 마침 생각났
다는 듯 말을 주섬주섬 갖다 붙인다.
“참, 그 의원께서 소협에게 닷새 가량은 무공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소만.
..”
“닷새라,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때까지는 무공을 사용할 일도 없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이제 강천비는 더 이상 끌 시간도 없다는 듯이, 제갈영의 손에 전표 한 장을 쥐어주며
꾸벅 포권을 한다.
“제갈 대협,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있다면,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적은 액수긴
하지만, 과거공부 하시는 데 유용하게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과거에 꼭 입격하셔서 대명제국을 위해 큰 힘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
다!”
제갈영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천비는 그야말로 광풍(狂風)처럼 선착장으로 달
음질을 친다. 제갈영은 한동안 얼떨떨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다.
“대영반 나리라면, 분명히 철죽장군(鐵竹將軍) 이세혁 장군일 텐데. 그 사람 목숨이
위험하다고...?”
강천비의 말대로 이세혁, 그가 죽으면 명이란 나라는 혼란스러워진다. 한동안 예상되
는 일들을 상상하던 제갈영이 문득 자신의 오른손을 보게 된다.
“아, 아니... 뭐야, 이거. 애, 액수가...?!”
황금 열 냥짜리 전표다. 은자 열 냥도 아니고, 황금 열 냥짜리인 것이다. 은자로 계산
하면 백 냥이란 거금이 되는 돈을, 강천비는 자신에게 주저하지도 않고 주고 떠난 것
이다.
고개를 들어 멍한 강천비가 사라진 길을 보는 제갈영의 마음에서는 감동의 물결이 일
어난다. 사파 사람에게서 이렇게도 큰 보답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제갈
영은 무엇보다 강천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말이 마음에 드는 듯하다. 말은 않고 있
지만, 제갈영의 얼굴은 분명 고맙다고 소리치고 있으니 말이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강 소협. 그때까지 부디 몸 건강히 지내시
오!’
제갈영은 여전히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건채로 강천비가 아무렇게 쥐어준 전표를 바르
게 펴서 접더니, 손으로 꼭 움켜쥔다.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고이 간직하겠다
는 듯이...
천진행 배가 출발하기 직전에 강천비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야말로 구사일생
(九死一生) 격으로 천진행 배에 올라탔다.
“어쩌다 보니 이틀이나 잤군. 젠장, 늦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강천비는 고통은커녕, 걱정 어린 얼굴로 대운하의 북쪽을 보고 있다. 시원한 맞바람이
강천비의 몸을 식혀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걱정 덕택에 몸에서 열이 식을 줄을 모른
다.
‘나흘... 최소한 나흘 안으로 흑령이란 까마귀를 없앨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데...’
강천비는 갑판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생각의 늪으로 몸을 던진다.
‘내 유일한 승부수인 수라구류도를 최소 7성 이상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승부할 수 있
을 것 같단 말야.’
수라구류도 말고는 승부를 걸만한 기술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강천비가 수라구류도를
7성 이상 수준까지 끌어올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흑령 말대로, 도에다가 혼(魂)을 불어넣고 휘두를 수 있다면, 분명 수라구류도의 위
력이 두 배는 더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정말 미칠 지경이란
말야.’
강천비가 머리를 벅벅 긁어대다가 대운하로 침을 퉤 뱉는다. 그리고 패잔병처럼 터덜
터덜 움직이며 선내로 들어간다.
‘일단 목표는 정해졌다. 혼이 있는 도세를 펼칠 수 있는 경지까지 내 능력을 끌어올
린 뒤에, 수라구류도를 1성이라도 더 높은 경지까지 올려놓는 것으로!’
강천비의 걸음에 비록 힘이 없지만, 최소한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투지를 뿜어내며 빛
을 발하고 있다. 일반 범인들은 범접할 수도 없는, 무림인 특유의 날카로운 빛이 강천
비에게서도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흑령, 네놈이 날 놓친 게 일생일대 최고의 실수가 되도록 해 주겠다. 네 무덤을 네
가 스스로 판 꼴로 만들어 줄 테니, 제발 나흘만 기다려 다오!’
[귀거래혜] 24.흑령(黑靈)이라는 사내
한편, 강천비가 떠나간 직후 군선 위의 분위기는 말도 아니다. 금의위 대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묘한 긴장감이 섞여있어 갑판에는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다.
“금의위 대원 모두는 귀담아 듣도록! 지금 이 시각부터 천진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 대원 개인은 절대로 긴장을 풀지 않도록 한다!”
“옛!!”
“무한 감시체제에 들어간다. 50명씩, 사람을 나눠서 하루하루 번갈아 가며 야간 감시
도 취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도록 하라!”
“존명!!!”
금의위 대원 100명 전원이 뿜어내는 살기가 한꺼번에 갑판 위로 폭출된다. 뒷전에서
고스란히 이 살기를 느끼는 모용화운의 얼굴은 점차 굳어간다.
‘인정하기 싫지만, 여진 놈들은 분명 강해. 이 정도 능력을 지닌 군대가 바싹 기합이
든 걸로 봐서... 결코 쉬운 전투가 나진 않겠어.’
여진. 그 중에서도 현재 상대하고 있는 건주여진은 모용화운에게 있어선, 결코 같은
하늘 아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다. 식솔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거처인 북해빙궁(北海氷宮)을 깨끗하게 초토화시킨 장본인들이 그 누군가? 바
로 건주여진이 아닌가?
‘내 눈에 띄는 건주여진 놈들은 모조리 척살이다. 상대가 어디의 누구라 하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아!’
모용화운이 이를 갈며 복수열을 불태우고 있을 때, 이세혁은 이세혁대로 씁쓸한 얼굴
로 멀리 북경을 바라보며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자신의 운명, 그리고 명의 운명. 자신이 쓰러진다 해도, 분명히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
하는 관료는 있을 것이다. 허나 이세혁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것은, 자금성(紫禁城)에
서는 너무 딱딱하게만 지내온 터라 자신을 흠모하는 이는 있으되, 결정적으로 그를 따
르는 이가 황보성과 금의위, 동창 관료들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살아남자. 살아남아 지금부터라도 숨은 충신들을 끌어 모으자. 그게 늙은 내가 대명
제국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이리라.’
풍전등화(風前燈火) 처지까지는 아니지만, 명은 분명 내부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
내부가 썩은 나라는 외부침략을 감당해낼 수 없다. 그렇게 사라져간 나라가 중원에서
한둘이던가?
끊임없는 역사의 되풀이. 하지만 인간은 그걸 알면서도 결코 바로잡지 못하고 쓰러져
왔다. 그게 인간이란 이름을 지닌 동물의 한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이여, 부디 이 늙은 몸이 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도록 10년만 더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벌써 200여년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지속해 온 나라를, 적어도 폐하 대에서 망하는 것
은 볼 수 없습니다!’
이세혁은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여기서 나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할 수 는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런 이세혁의 얼굴을 모용화운의 곁에서 바라보는 주은
비의 안색은 한없이 어둡기만 하다.
‘사 소협도 하선하고, 이어 강 소협도 하선했어. 그 두 사람의 빈자리가, 이토록 클
줄은...’
게다가 이세혁까지 저렇게 긴장하고 있으니, 주은비는 또 주은비 나름대로 괴롭기만
하다.
모든 것이 억울하기만 할 뿐이다. 사람들이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원흉은
하난데, 그 원흉 하나 때문에 100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걸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후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런 공주가 아닌 다른 운명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
나게 해 주세요.’
세상 소녀들은 누구든 공주를 꿈꾸고 동경한다. 하지만 주은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공식인 모양이다.
후세에 태어난다면, 공주가 아닌 일반 백성으로 태어나개 해 달라고 빌어본다. 태양에
게...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에게.
나흘간, 군선은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다. 철통같이 경비를 한 탓인지, 흑령에게 공격
의사학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천진 선착장까지는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이다.
“여기가... 천진인가요?”
“그렇소이다. 여기서 닷새 정도만 걸어가면 북경(北京)이오.”
“북경이라... 어쨌거나, 도착지점까지는 한층 더 가까워진 거군요.”
최근 나흘간 미소 한번 짓지 않던 모용화운의 입가에 지금은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다.
사람 많은 이곳에서는 덮어놓고 공격해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후우... 영감님, 이 배는 어쩌실 건가요? 여기다 놔두고 곧장 북상인가요?”
“아니오. 이 군선을 매각해서, 그 돈으로 말[馬]을 살 거요.”
“말요? 하긴, 여기서 걸어가는 것보다야 말 타고 가는 게 훨씬 낫죠.”
모용화운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착장 남쪽을 바라본다. 시무룩한 얼굴로 우
두커니 앉아있는 주은비의 가냘픈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주은비를 주시하던 모용화운이 한숨을 내쉬고는 주은비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
고 주은비의 바로 옆에 앉으며 말을 붙인다.
“왜 그래요, 주 소저? 힘없는 얼굴로 그렇게 있으니까, 마치 평소의 주 소저처럼 느
껴지지가 않네요?”
시원한 강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간다. 얼마 후에 그 바람이 멎자, 주은비는 잔잔
한 목소리로 모용화운의 말에 대꾸한다.
“모용 소저... 사 소협과 강 소협,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죠...?”
그제야 모용화운은 주은비를 똑바로 바라본다. 고요하면서도 불안함, 슬픔 등이 섞인
그 눈빛은, 절로 모용화운의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천비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그렇게도 좋아하던데...’
차마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모용화운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입술을 잘
근잘근 씹는다.
“미안해요, 모용 소저. 괜히 두 사람 생각나게 했죠...?”
“아녜요. 안 그래도 두 사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뭐.”
모용화운은 얼굴을 굳히기는커녕 오히려 미소까지 지으며 주은비의 말에 대꾸하고 있
다. 자신 또한 사문도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도 말이다.
“강 소협... 꼭 돌아오겠죠...?”
“돌아올 거라고 믿어요. 어떻게든 돌아올 거라고... 천비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애잖아요.”
모용화운이 바람에 흔들리는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쓸어 올리며 다시 멀리 남쪽을 바
라본다.
“... 기다려요, 주 소저. 이틀 안으로, 강천비는 분명 돌아올 거예요. 약속 어길 애
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이틀 안으로 올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간
거 아니겠어요?”
주은비는 왔던 길로 여전히 막막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모용화운이 그런 주은비를 뒤
에서 꼭 안아주며 말을 덧붙인다.
“일단 가서 좀 쉬어요. 장기간 배에서 생활하는 바람에 몸도 엉망일 텐데, 가서 좀
쉬자고요.”
“하지만...”
“알아요. 누구보다... 주 소저가 천비 보고 싶어 하고 있다는 거.”
마음에 묻어나는 모용화운의 떨리는 목소리는, 주은비의 마음 한구석을 지독한 애련(
愛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일단은... 이틀 동안은 주 소저의 역할에 충실해요. 천비를 걱정하고 기다리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잖아요. 괜히 속 썩이지 말고... 괜히 이러고 있지 말고, 일단
금의위 대원 모두에게 힘이 되어 줘야죠.”
“...”
“여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금의위 대원들의 우상은, 대영반이자 영수란 직위를
지닌 사람이 아녜요. 여기서 유일한 황족(皇族)인 주은비, 주 소저 당신이 바로 우상
이에요.
누구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어요. 몸은 쓰러지되 혼은
쓰러지지 않는다고요.”
몸은 쓰러지되 혼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 말이 주은비의 마음에 한바탕 파란을 불러일
으킨다.
“주 소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금의위가 있고, 대영반 영감님이 있는 이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은비는 저 멀리 이세혁이 사라진 길목으로 발길을 옮기는 모용
화운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거침없으면서도 무거운 짐을 얹은 것 같은 모용화운의 모
습은, 끝내 주은비의 발길을 선착장에서 돌려놓게 만든다.
“모용 소저, 같이 가요!”
주은비의 외침에, 모용화운은 옮기던 발길을 뚝 멈추고 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걷
고 있는 주은비의 모습이, 이제야 공주다운 매력을 뿜어내는 듯 당차고 힘이 있다. 모
용화운은 주은비 몰래 싱긋 웃음을 지으며, 언제까지나 이런 당찬 사람이 되어달라고
마음으로 되뇌어본다.
결국, 흐른 시간은 이틀이란 날들을 모두의 앞으로 내던졌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때로
부터 22시진이 흐른 것이다.
“...”
금의위 대원들 전원과 이세혁, 그리고 모용화운까지 짐을 모두 꾸린 가운데 주은비 홀
로 애탄 눈길로 선착장을 바라보고 있다.
“공주마마, 이제 출발 시간이...”
“한 시진만 더 기다려요.”
이세혁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주은비는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대꾸한다.
“... 공주마마, 벌써 그 말씀 하신 게 세 번째이옵니다. 이젠 그만 떠날 때도 되지
않으셨사옵니까?”
“여기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대영반은 어떻게 먼저 떠날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현재 주은비의 앙칼진 음성은 신경이 곤두설 수 있는 데까지 갔다는 걸 증명해준다.
이세혁은 뒷전에서 여전히 답답한 얼굴로 가슴을 두드리며 주은비의 뒷전을 서성인다.
‘이대로 가다가는 강 소협이 올 때까지는 있어야 간다는 소리가 나오겠군. 결코 그럴
시간이 없는데도...’
이세혁은 답답함을 금치 못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황보성은 이세혁의 떨
떠름한 표정을 보고는 금세 또 거절당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휴우...”
“... 갑자기 왜 그래요, 황보 대협?”
북경으로 향하는 길목을 바라보던 모용화운이 황보성의 땅 꺼지는 한숨소리를 듣고 질
문을 내던진다.
“대영반 나리를 보고 있자니... 한숨밖에 안 나오는 것 같소이다.”
황보성의 답변에 모용화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허탈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
리고 있는 이세혁과, 반대로 앙칼진 얼굴로 선착장을 바라보고 있는 주은비의 모습이
동공에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모용화운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강천비를 이렇게까지 애타게 기다리려는
주은비가 안타까워서만은 아니다. 불현듯 잊고 있었던 강천비의 신변에 대한 불안감이
새록새록 솟아난 탓이다.
이런 주은비를 보다 못한 모용화운은 결연한 눈빛으로 이세혁이이 있는 곳까지 뚜벅뚜
벅 걷는다. 발소리 탓인지 평소와는 다른 모용화운의 분위기 탓인지, 어쨌든 이세혁을
비롯한 금의위 대원 모두의 시선이 모용화운에게로 쏠린다.
모용화운은 이세혁에게서 불과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다. 허탈한 눈을
하고 있는 이세혁의 모습은 모용화운의 마음 한구석에 무력(無力)함이란 쓸데없는 감
정을 불러일으킨다.
“자리 좀... 내 주실 수 있겠죠?”
“... 공주마마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모용 소저뿐이오. 부디 꼭 설득할 수 있길
빌겠소이다. 허허...”
이세혁은 자신의 힘으로 주은비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이
세혁의 얼굴엔 씁쓸하게만 느껴지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다. 모용화운은 이세혁의
말에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는 이세혁의 뒷모습을 흘낏 바라본다.
노영웅(老英雄)의 쳐진 어깨가 모용화운의 뇌리를 자극하고 있다. 같은 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친하게 지내온 사람이 저 지경이 되어 있으니 모용화운이 힘 빠지
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 소저.”
“...”
주은비는 아무 말도 없다. 다만 가늘게 몸을 한번 떨었을 뿐.
“북경으로 가야 되잖아요.”
모용화운은 굳은 얼굴로 조용히 주은비의 어깨를 짚는다. 다시금 주은비의 떨림이 모
용화운의 손아귀에 잔잔히 전해진다.
“주 소저,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에요. 천비가 홀로 하선한 의미를 무(無)로 돌리지
말란 말예요.”
“약속했잖아요...”
주은비의 돌발적인 대답에 모용화운이 입을 닫자, 뒤이어 목이 메는 듯 목소리마저 떨
리고 있는 주은비의 애처로운 대답이 이어진다.
“이틀 안으로 여기 올 거라고...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했잖아요...!!”
이틀간 참아왔던 감정들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이 가련한 소녀를, 모용화운은 위로할
자신이 없다. 그저 고개를 떨군 채, 주은비의 말을 들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불안해서...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다고요.
..”
“... 주 소저...”
“설마 심하게 다치거나 해서 못 오는 건 아니겠죠...? 흉수에게 당했다거나... 설마
그렇게 된 건 아니겠죠...?”
사랑이란 감정 앞에 이렇게도 쉽게 무너지는 일국의 공주를 대하는 모용화운 역시 마
음이 편치 않다. 유쾌한 웃음으로 언제나 근심을 덜어주던, 동생 같이만 느껴지던 소
년의 행방이 정말 묘연(渺然)하게 됐으니 말이다.
“천비의 뜻을, 이 나라의 대영반이란 직위를 맡은 사람과 공주님을 여진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천비의 뜻을 꺾지 마요. 천비 녀석, 경공술이랑 실력 둘 다 수준급이
란 거 몰라요? 왜 천비를 그렇게도 못 믿는 거예요?”
“걱정돼요... 모용 소저도 알잖아요. 강 소협, 절대 약속을 저버릴 사람이 아니란 걸
...”
“천비를 좋아하는 만큼은 믿어요. 좋아하는 만큼이라도 믿으면, 절대 불안하지는 않
을 테니까요.”
주은비는 눈을 내려감으며 이를 악물다. 눈물을 참아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떠나야 해요. 북경까지는 아직 조금 더 가야 한다고 들었어요. 여진족에게 뒷덜미를
잡히면 우리 주군과 천비가 하선하면서까지 달성하려 했던 목표가 무너지는 거라고요
.”
주은비는 결국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나 두 눈에 펼쳐져 있는 선착장의 아름다운 정
경이 가지 마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 주은비는 결국 다시 고개를 숙여 다시 눈을 감
아버린다.
‘가야 하나요, 강 소협? 그걸 강 소협, 당신은 바라고 있나요?’
주은비가 홀로 갈등하는 모습이 못나 가여워설까? 모용화운의 얼굴에서, 약간이긴 하
지만 슬픔의 기색이 비친다. 얼음장 같은 모용화운의 용모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편이
라, 묘한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천비도 분명 먼저 떠나기를 바라고 있을 거예요. 분명히.
”
“그렇게까지 쉽게 단정 짓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어떻게 강 소협의 심기를 그렇게까
지 읽을 수 있다는 거예요?”
모용화운의 말에 주은비가 즉각 질문을 내던진다. 차근차근 얼굴을 굳히는 모용화운은
확실한, 하지만 나지막한 어조로 가볍게 대꾸한다.
“그건, 천비 역시 주 소저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 테죠. 주 소저가 천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
주은비의 갸름한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 모용화운과 주은비, 이 둘에게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움직임도, 대화도 없다. 지독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흐
를 뿐이다.
“가, 강 소협이... 그 사람이, 절 좋아한다고요...?”
불신(不信)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턱을 움직여 묻는 주은비를 보고 모용화운은 가만
히 고개를 끄덕인다. 곧이어 주은비의 두 손이 가볍게 떨린다.
‘믿을 수가 없어. 어디까지나 나 혼자 좋아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말
도 못 하고 있었던 건데... 강 소협이... 날...’
경악하고 있는 주은비의 얼굴에서 미미하게 홍조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모용화운은 그
제야 굳게 결심하고 다시 한번 주은비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북경으로 가야 해요.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그리고 천비와 주군도 조국(祖國)의 공
주님이 전란에 휩싸이는 걸 원치 않고 있어요. 주 소저, 예전에 여기 모두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 천진을 떠나야 해요. 1초라도 빨리 북
경으로 가야 한단 거예요.”
분명 주은비는 금의위 대원 전부를 지켜주고 싶노라고 했었다. 그리고 지켜주기 위해
서는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북경의 자금성으로 가야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주은비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강천비라는 소년의 존재가, 어느덧 금의위
대원 모두를 향한 것과 맞먹을 정도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강 소협, 용서해 줘요. 끝까지 못 기다려서!’
마음으로 그렇게 소리친 주은비는 모용화운을 보고 당차게 대답한다.
“가요, 모용 소저. 북경으로 말예요!”
주은비의 꿋꿋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모용화운의 고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그 기쁨은 결코 오래 갈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쿠콰콰쾅!!”
별안간 선착장 한가운데서 물기둥이 솟아오른다. 동시에 벼락소리만치 끔찍한 소리가
선착장을 뒤덮는다. 선착장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주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까
지 선착장으로 쏠린다.
“이... 이 물기둥은 설마?!”
황보성이 물기둥을 보고는 떠듬떠듬 말을 더듬는다. 그러나 그때, 이미 이세혁은 금의
위 전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이다.
“모두들, 각자 자기 말[馬]을 타고 북경으로 출발하도록 하라!”
허둥대던 금의위 대원들은 이세혁의 명령에 서둘러 달리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이세
혁은 모용화운ㅇ과 주은비에게 달려간다.
“영감님,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물론이오! 공주마마를 부탁하겠소. 뒤만 무작정 따라오시오!”
“맡겨 줘요!”
이세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맹렬하게 북경 방향으로 신형을 날린다. 모용화운도 황급히
주은비에게 소리친다.
“업혀요, 주 소저! 경공술이라면 나도 자신있으니까!”
주은비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모용화운은 이세혁의 뒤꽁무니를 좇아 가볍게 신형을
날린다. 덕택에 모용화운과 주은비 둘 다, 물기둥 속에서 한 쌍의 눈을 가진 이가 등
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냉소(冷笑)를 짓고 있다는 걸 보지 못했다.
모용화운이 막 주은비를 설득하기 시작하고 있을 무렵, 주변의 한 객잔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한 사람은 계절에 안 어울리는 묵직한
갑옷을 입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을 입은 채다.
“기습 준비는...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홍무극, 그놈과의 연락은?”
“어제 두절된 이후로 계속 조용합니다.”
흑령... 그다. 흑령이 이곳에서 부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흐흐흐... 좋다. 달탄기(達坦基), 넌 당장 매복한 곳으로 떠나라. 다음에는 내가 포
탄으로 신호를 보낼 때까지... 그곳의 팔기군을 지휘하도록 하라.”
“존명(尊命)!”
“명심해라. 네 목표는 금의위를 전멸시키는 것이다. 금의위에서 이세혁을 제외한 전
원을 척살하는 것이 네가 우리 몽고(蒙古)를 위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달탄기... 그자가 흑령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 객잔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그런데, 여진이 아닌 몽고를 위해 할 일이라니?
“흐흐, 이제부터는 여진과 우리 몽고의 싸움이 아니다. 제 3자였던 명과 여진의 싸움
이다!”
술잔에 마저 남아있는 술을 몽땅 들이킨 흑령은 품속에 넣어둔 자모연환탄(子母連環彈
)을 만지작거린다. 품속에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한 폭탄이지만, 그 위력은 가히 대량
살상을 하고도 남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흑령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간만에 피의 향연을 즐기게 되겠군. 내일이면 몽고의 성전(聖戰)을 위한 혈전이...
벌어진닷!”
기대와 흥분으로 인해 붉게 충혈되어 있는 흑령의 두 눈에서 전신을 옭아맬 것만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대낮이라 주객이 없는 객잔에는 싸늘한 기운마저 흐른다.
“그리고... 이제 그 몽고사(蒙古史)에 길이 남을 성전을 위해, 이 흑령이 움직여야
할 때다!”
흑령이란 존재가, 정말 삽시간에 객잔에서 깨끗하게 지워진다. 점소이는 흑령, 그가
사라진 것도 모른 채 객잔 밖의 풍경을 보며 하품만 쩍쩍 해대고 있을 뿐이다.
어느새 흑령은 모용화운과 불과 석 장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섰다. 약간 슬퍼 보이는
모용화운의 얼굴을 보게 된 흑령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자모연환탄의 심지에 손가락
을 가져간다. 그러자 심지에서 연기가 일어나더니, 곧이어 자그마한 불씨가 일어나 심
지를 태우기 시작한다.
‘이걸로 혼란작전 개시다!’
심지가 다 타들어가 자모연환탄이 터지려는 찰나, 흑령의 손은 섬전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1초가 지나자, 수면 위에서는 폭음과 함께 물기둥이 선착장
을 뒤덮는다.
“뭐, 뭐냐? 뭐야?!”
“폭탄인가?!”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탄 흑령은 그림자처럼 물기둥 속으로 몸을 숨긴다. 황
급히 말을 타고 도주하는 금의위 대원들, 그리고 모용화운의 등에 업혀있는 주은비를
보고 흑령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소리친다.
‘여진과 명이 싸우기만 하면 된다! 중원 정복을 이룩해내는 건 여진이 아니라, 우리
몽고니까!’
여진족이 아닌, 몽고를 위해 싸우는 흑령. 사실 이세혁이 경계해야 할 자는 홍무극이
아니라 흑령일런지도 모른다. 짐승의 눈 같은, 짐승 이상의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흑
령의 두 눈동자에서는 물을 가르고 산을 쪼갤 듯한 살기가 쏟아진다. 입가엔 냉소(冷
笑)를 짓고 있던 흑령은 별안간 이세혁이 사라지는 곳으로 번개처럼 신형을 뻗쳐 나간
다.
어느덧 이세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서는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땀방울을 닦아내는 이세혁의 노안(老顔)은 대원들 전원을 안타깝게 만든다.
“나리, 벌써 반나절이나 달려왔습니다. 제아무리 여진 놈들이 집요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반나절동안 우리만 쫓아올 수 있겠습니까?”
황보성 역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의 질주로 인해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다.
“물론, 북경까지 가면서 쉴 여유가 없다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홍무
극이 여기를 맡았을 확률이 높아. 그자는 위험한 자다. 비록 그자가 나를 노리고 이러
는 거라고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공주마마께서 피해가 갈 것이 틀림없어!”
주은비에게도 피해가 미칠 거란 이세혁의 추측에 황보성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튀어나
온다. 하지만 이세혁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황보성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대원들에게 전하라. 선봉은 최대한 말의 체력을 생각해서 움직이라 하고, 후방에 있
는 대원들에게는 최대한 공주마마의 신변을 생각해서 움직이라고!”
“명(命) 받들겠습니다!”
황보성이 우렁차게 소리치고는 금세 이세혁 앞으로 신형을 날린다. 이세혁은 찹찹한
현재의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검을 꽉 움켜쥔다.
“정말 짜증나게 하는군. 무더기로 덤벼들 것이지, 소규모로 부대를 나눠 교란작전을
쓰다니...!!”
팔기군이 여진족 최강의 군대라면, 금의위는 명 최강의 군대다. 역대 황제들은 물론이
고, 현재 만력제의 근위대(近衛隊) 역시 전원이 금의위 소속일뿐더러, 황제의 혈족들
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는 부대라서 그들의 전투력은 어디의 어떤 부대라도 가소롭게
여길 수 없을 정도다.
팔기군은 그에 비해 창건된 지 얼마 안 된 신흥조직이다. 훈련기간도 몇 해 흐르지 않
았고, 평지에서 자란 그들이기에 산악전에서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걸
흑령이 용케 간파해내서 군대를 나눈 것이다.
이따금씩 날아오는 화살이 금의위 대원들을 하나둘씩 쓰러트려, 벌써 열 명 정도가 비
명횡사(非命橫死)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팔기군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 덕택에 수적으로 열세인 이세혁의 속은 뒤집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적으로 열세인 이상, 절대적으로 전면전은 금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
로 대원들을 잃을 바엔, 오히려 전면전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산지인데다 여긴 우리
대운들도 익히 아는 장소...’
이세혁이 고개를 흘낏 돌려 시종일관(始終一貫) 불안한 기색을 못 감추고 있는 주은비
를 바라본다.
‘건주여진은 분명 아직 여진족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주마마를 건드
려서 화를 자초하지는 않을 터이다.’
차분히, 그리고 냉정히 생각하자 금세 생각이 뚫린다. 자신이 해야 할 일, 그걸 이제
완전히 뇌리에 박아 넣은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가는 공주마마께 피해가 생길 것이다. 역시, 모용 소저에게 공주마마
를 부탁하고 나는 선봉으로 나서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세혁은 무릎에 힘을 더하고는 신속하게 선두 쪽으로 신형을
날린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주변에 있던 금의위 대원들과 주은비, 모용화운의 시선이
이세혁의 등에 꽂힌다.
“대영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주은비가 소리를 질러가면서까지 불렀는데도 이세혁은 여전히 신속하게 앞을 향해 질
주하고 있다. 모용화운이 이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찰나다.
(모용 소저, 공주마마의 호위를 부탁하겠소. 팔기군은 분명 공주마마가 아닌, 노부를
노리고 달려들 것이오. 그래서 앞장서는 것이니, 공주마마께 모용 소저께서 자초지종
을 좀 설명해 주시기 바라오.)
이세혁이 남긴 전음이 끊기자마자 이세혁은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주은비
는 이세혁이 말을 무시했는데도 화를 내는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걱정스런 얼굴로,
이세혁이 사라진 곳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다.
모용화운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주은비를 부른다.
“후우... 주 소저.”
“모용 소저?! 방금... 불렀어요?”
주은비가 고개를 돌리며 모용화운에게 묻는다.
“저 영감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같이 있으면 주 소저까지 위험해질 거라고 멀리
떨어진 거니까, 알아서 잘 처신하실 거예요.”
“... 모용 소저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모용화운은 주은비의 질문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꾸한다.
“전음으로 남기고 가셨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기로 해요. 알겠...”
하지만 모용화운의 목소리는 난데없이 쏟아지는 폭음에 묻히고 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터진 듯, 충격의 여파는 모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뜨거운 열기,
그리고 온 산에 울려 퍼지는 진동 등이 모두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모두, 전투태세로!”
곧이어 대원들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난다. 언제부턴가 모두의 움직임은 멎어있다.
길은 비교적 넓은 편이다. 후방을 맡은 금의위 대운들은 주은비를 둥글게 에워싼 채
신경을 곤두세운다.
“...!!”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진공 상태라도 된 듯한 적막함에 잠긴다. 무기 움직이는 소리도,
침 삼키는 소리마저도 어둠 속에 그대로 묻혀버린다.
그러나 이 숨 막히는 적막감도, 드디어 종결을 맺는다.
“... 크아악!!”
주은비 곁에 있던 한 대원이 날아온 화살에 어깨를 맞고 비명을 지른다. 용하게 심장
에 박히려던 화살을 피해보려고 한 것이 왼쪽 어깨에 박혀버린 것이다.
모두의 안색이 새파랗게 돌변한다. 어두운 밤이라 달빛에만 의지해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낸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화살이다!”
“피해라!”
첫발을 시작으로, 숲 속에서 화살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곧이어 쏟아지는 처절한 비
명소리는, 주은비의 마음 한구석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하나둘씩 피를 뿜으며 절명하는 대원들을 보다 못한 주은비의 두 눈에서는 언젠가부터
처량하게 보일 정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가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서 일어나는 무력감이 주은비의 혼을 빼놓고 있는 것이다.
“고, 공주마마! 여기를 어서 피하셔야... 으악!!”
별안간 숲에서 한 떼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무차별 살인을 개시한다. 화살비 탓에
우왕좌왕하던 금의위 대원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때, 얼이 빠져있는 주은비에게 한 병사가 다가와 창을 힘껏 쥔다. 주은비는 뭔
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청한 얼굴로 눈물만 쏟아내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하앗!”
흉소(凶笑)를 지으며 병사가 창을 한껏 들어올린다. 그러나 절대 절명의 위기순간, 모
용화운의 능력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빙백신장!”
모용화운의 쌍수에서 뻗어 나온, 얼음으로 이뤄진 기류가 팔기군 병사의 심장을 덮친
다.
“... 후우.”
팔기군 병사가 얼음으로 뒤덮인 걸 본 모용화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주은
비에게로 다가간다. 곧이어 여전히 얼이 빠진 채로 있는 주은비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은비는 반사적으로 모용화운을 바라본다.
“정신 차려요, 주 소저! 방해되지 않으려면, 멀리 떨어지던가 해 달라고요!”
주은비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영반 영감님께 가서 원군이라도 끌고 와요. 동행으로 다섯 명만 데리고, 어서요!
”
뾰족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모용화운의 심정을 이해하겠다는 듯, 주은비는 믿으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주인 없는 말고삐를 쥐고 모용화운의 곁에서 멀어
져간다.
“몽땅 죽여주마, 건주여진 놈들아!!”
다시 한번 모용화운이 일갈을 터트린다.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
대한 기류가 숲을 덮치고 지나간다.
몽땅 얼어붙은 숲에 만들어진 빙벽(氷壁) 덕택에, 팔기군들이 더 이상은 숲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돼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금의위 대원들은 하나씩 하
나씩 팔기군 척살을 시작한다.
“팔기군을 도륙내라!”
“공주마마를 지켜라!!”
모용화운도 정신없이 빙백신장을 쏴대며 이들을 돕는다. 그러면서도 모용화운의 얼굴
은 의혹으로 가득차있다.
‘이상한 일이야. 영감님 말씀대로라면, 절대 주 소저를 노리고 달려드는 놈들이 없어
야 하는데, 어째서 기어 나오기가 무섭게 주 소저에게 달려드는 놈이 있는 거지?’
벌써 10여 명의 팔기군을 작살낸 모용화운은 아직까지 날뛰고 있는 팔기군들을 향해
빙백신장을 쏴댄다. 자신이 품었던 의혹을 떨쳐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쌍방의 처절한 비명성이 번지는 가운데, 전운은 옅어지지 않고 점점 짙어
만 간다. 어느새 기습은 실패로 끝나고, 치열한 난투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난데없이 산을 흔든 폭음, 그리고 진동.
그것은 선봉에서 당당하게 진군하고 있던 이세혁의 움직임을 멈춰놓았다.
“나, 나리. 저, 저기는...”
황보성이 막 주은비 곁에 있는 금의위 대원들에게 달려가려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황보성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한 얼굴로 폭음이 떨어진 장소를 두 눈이 찢어져라 바라
본다.
“황보성, 지금 당장 여기 있는 대원들 전원을 이끌고 공주마마의 호위를 맡도록 하라
. 팔기군은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척살해 버리고!”
“예, 엣!”
“만일 공주마마께오서 변을 당하셨을 시에는...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이승에 남아있
지 않을 거다!”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굳은 결의를 내비치는 이세혁에게, 황보성은 묻지 못했다. 왜
홀로 여기 남겠다는 것인지를.
“조, 존명!”
대답을 마친 황보성이 손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맹렬히 이세혁에게서 멀어져간다. 대원
들 역시 말발굽소리를 요란하게 내지르며 맹렬하게 황보성의 뒤를 따른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세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측에 높이 서있는
바위의 꼭대기를 예리한 눈으로 노려본다.
범상찮은 기도를 뿜어내고 있는 흑의사내가 있다. 흡사 독수리를 닮은 흑의사내의 눈
은 이세혁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설킨다. 둘의 거리는 불과 5장. 서너 번 정도의 도약으로
도 얼마든지 상대의 목을 딸 수 있는 거리다.
“당신이, 동창의 대영반이자 금의위 영수를 맡은 철죽장군 이세혁인가?”
“... 그렇다.”
이세혁의 싸늘한 대꾸에 흑의사내는 싸늘한 살기가 어린 미소를 지으며 지상(地上)에
가볍게 착지한다. 그리고는 처음의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말문을 튼다.
“만나게 돼서 반갑군. 난 팔기군의 부제독을 맡고 있는 흑령이라 한다.”
“팔기군 사람이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날 노리는 거지?”
형형한 이세혁의 안광이 흑령의 왼편 허리춤에 꽂힌다. 흑령은 여유로운 미소를 피우
며 나지막한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읊는다.
“우리 몽고 찰합이부족(察哈爾部族)의 영웅, 임단한 족장을 위해서지.”
“뭣이? 몽고라고? 네놈은... 여진족이 아니란 말이냐?”
흑령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대답이 기어 나오자, 이세혁은 한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한
것이다.
“물론이다. 난 몽고 찰합이부족 소속의 무사일 뿐, 결코 여진 따위의 족속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몽고가 다시 이 중원대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건주여진과
명과의 싸움이 필수불가결(必需不可缺)한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흑령의 답변에 이세혁의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때 흑령의 우수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허리에 매뒀던 흑도를 들고 이세혁을 겨누며 말을 붙인다.
“명과 건주여진이 싸우기 위해서는, 이세혁 네 목과 표연공주 주은비의 목이 필요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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