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자세히 보면 유행의 주기가 있는듯 해서 올려봅니다.
1. 국가의 멸망
895 토번국의 멸망
토번은 9세기 이후 8대 왕인 랑데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된다. 당시 그는 불교를 매우 강력하게 탄압했는데(승려 강제 결혼, 강제 사냥, 사원 및 불경 화형식..) 이에 반발한 한 승려가 신의 계시를 받고 티베트 전통 종교인 본교 사제처럼 검은칠을 한 흰옷을 입고 역시 검은칠을 한 백마를 타서 당과 토번간의 회맹비를 보던 랑데르마의 미간을 맞추어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친위대가 쫓아갔으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검은 칠이 벗겨서 흰 옷을 입은 사람과 흰 말을 탄 사람으로 변해 친위대가 알아보지 못해 성공적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왕을 시해한 범인을 잡질 못했으니 왕권이 무너질수밖에 없다,) 이후 토번은 중앙 귀족간에 왕위 쟁탈이 벌어졌고 왕실 직계의 일부가 서부 티베트로 도망가 구게(Guge)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으나 막상 본국은 그 국력을 완전히 상실한채 895년 마지막 찬포 위송이 살해당하면서 멸망된다.
907 당나라의 멸망
오늘 내일하는 유약한 왕조를 보며 주전충은 당시 환관들이 황제 소종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을 황제로 세우자 껀수를 잡아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재상 최윤을 비롯한 조정대신들과 환관들을 학살하고 핍박하는 등 온갖 간행을 일삼는다. 그리고 소종을 협박하여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강요한 후, 장안을 파괴했다. 그리고 장안 궁궐에서 뜯어온 자재들을 이용해서 낙양에 다시 궁궐을 세우게 했다.
926 발해 멸망
발해는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대반란, 874~884)과 신라(후삼국 분열)의 몰락 분위기에서도 큰 쇠퇴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16대 왕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파탄나는데, 단 15일만에 요(遼)나라 황자 야율요골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되어 초토화 되었다.
--
919년, 거란이 요동을 공격하여 발해인을 포로로 잡았으나 이에 발해는 군사를 일으켜 거란군을 무찌르고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포로를 되찾는 등의 승리를 거뒀다.그러나 이 요동 전투는 발해 최후의 승리였다.
935 신라 멸망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오면 본래 종주권을 가진 나라였음에도 너무 나라가 기울어서 연전연패를 거듭할 뿐, 속수무책으로 지방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수백년만에 박씨가 왕권을 장악하게 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이후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신라의 경순왕은 결국 대세에 따라 좀 더 잘 대우해줄 것 같았던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고 멸망하게 된다.
2. 무장투쟁으로 권력을 얻은 지도자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창건자 아시카가 다카우지1338~1358
복잡해서 잘 모름;; 남북조 시대를 개창하고 막부를 세웠다
명태조 주원장1368~1398
원나라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건적의 곽자흥 휘하에 가담하였다.처음에는 일개병졸에 불과했지만,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실력으로 곽자흥 군단의 2인자의 위치까지 오른다.
조선의 이성계1392~1398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후 멸망시키고 왕이 되었다.
베트남의 레 러이黎利 1428~1434
레러이는 랑손의 호족가문 출신이었으나 명나라 영락제가 베트남을 침공, 안남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화 하자 1418년 궐기를 선언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전국적인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승리하였으나 계속 패주하여 후퇴, 허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활동을 시도, 이후 게릴라 전을 계속하여 1424년 승리를 거둔 뒤 공세를 시작하여 게안과 탄호아를 함락, 해방시켰다. 탄호아를 수복한 뒤 계속 북상하여 명나라군을 격파하고 승리하였다 이후 명나라 조정과 명나라 군대를 본토로 철수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회복시켰다. 1427년 왕으로 추대되어 국호를 다시 대월(大越)이라 정하고 통킹(東京, 하노이)에서 즉위하였다
3. 삼국시대 후반의 국제정세
600 출신이 불문명한 무왕의 등장
600년에 즉위하여 42년간 통치하며 혜왕-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여 백제의 안정기를 구축하였다는 평이 있지만 이와 반대로 무리한 토목공사와 정복 전쟁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악평도 존재한다
출신이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나 문제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이거 역시 확실치 않다. 대체로 익산의 지방귀족 출신일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 역시도 확실하지 않다.여러 가지로 보아 신분은 어쨌든 혜왕 때까지만 해도 그의 처지가 중앙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을 거라는 건 분명한 듯
618 수당역성혁명
618년에 혁명으로 양제를 폐위한 당고조 이연은, 최후의 황제인 황태손 양유(수공제)를 옹립하고 대승상이 되었다.
이후 양제가 죽자 선양을 받아 당을 건국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했다.
642 고구려 연개소문의 군사반란
642년 10월, 왕과 대신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과감하게도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꾸몄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서열식 중에 연개소문이 관할하는 동부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살해당한 대신들은 무려 100여 명에 이르었다고 한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제거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기 위해 궁궐로 쳐들어가서 마침내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그리고 바지사장 보장왕을 옹립하여 막부체제를 열었다.
654 진골출신의 김춘추
신라의 제29대 왕이자 최초의 진골 출신 왕. 본명인 '김춘추'로도 유명하다. 진덕여왕의 죽음에 따라 진골 최초의 왕이 되었다. 아마 한국사의 왕 중에서 건국 군주들을 제외하면 본명이 가장 많이 알려진 왕 중 하나. 신라의 정치사로 보면 혜공왕 때까지 이어지며 신라 역사상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시기인 신라 중대왕실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삼국통일한 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 편이다. 무열왕은 어디까지나 즉위 전의 외교 활동이나 즉위 후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사람은 그의 후계자인 문무왕이다.
--
다시보면 옛날이나 현대나 다름이 없다.
동북아 정권교체의 위엄
근데? 저 4명의 출신성분이 같으니 한명만 끝장내면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을까?
|
첫댓글 이런 식으로 한 지역의 흥망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것에 대해 자료를 정리해 본적이 있는데 보통은 둘중 하나더군요.
당말의 경우처럼 연계된 지역의 안정이 (예컨데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이 당나라 대에 이루어 졌죠. 이런 식으로 연계됐을 때.) 한번에 뒤집힐 때. 이 경우는 혁신의 도입처럼 긍정적인 혁파의 유행도 포함합니다만...
아니면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재해(소빙하기라던가. 화산폭발이라던가. 4~5세기 로마 문명 붕괴시의 소빙하기 정도? )등이 발생했을 때. 이 두 경우로요.
두번째 이유가 첫번째 이유를 유발할 때도 있고 뭐 여러 상황이 있기도 하지만요...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307705&cloc=olink|article|default
뭐 이런 느낌이요?
잘읽었어요
2012정권교체같은경우
중국은 급진개혁파의 성장으로 빚어진 보시라이 사건으로 태자당이나 공산당 원로들이 큰 위협을 받었기 때문에 시진핑이 당선되었고
일본은 후쿠시마 원자력과 센카쿠열도의 분쟁으로 우익화되어 아배당선
북한은 세습정권과 기득권을 잃어버릴것이라는 당내 원로들의 인정으로 별탈없이 이어받고
한국은 2010선거와 박원순의 당선으로 젊은층에게 밀릴것이라는 50대의 불안감으로 인하여 박근혜가 된거 같아요
아무래도 첫번째 같군요
네. 시대가 지나며 정치제, 치수 기술들이 발전하며, 특히 현대에 들어서면서 후자의 경우는 상당히 영향력이 감퇴하고
국민국가 시대가 도래하며 지역별로 독자적인 정국이 굳어지며 연계율은 상당히 떨어졌지만 여전히 외교-교역등을 통해 지역(국가)의 연계는 발생하고 있죠.
2012 정권교체는 환태평양 주요국 상당수가 선거 등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점에서 내, 외부적 요인으로 상호적인 유경화가 유발되었다는 점에서 첫번째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