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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9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18,9-18
복 음 : 요한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영국의 한 연구팀이 70세 전후의 259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자기반성과 치매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였는데, 그 결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확한 인과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반성의 시간을 하루에 10분 이상 갖게 되면
분명히 인지력과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치매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연구 발표에서도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영양제보다도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10분이라는 시간. 아주 긴 시간일까요?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뇌 건강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 10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아까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건강이 최고라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이 하는 기도, 묵상은 꼭 필요한 영양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영양제를 먹으면서 건강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고 필요한 시간인데도 항상 뒤로 미뤄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일이 급해서, 피곤해서,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등의 말로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맨 뒤로 미룹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모습입니다.
올해부터 저는 혈압약을 먹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은 뒤, 이제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면서
아침 식사 후에 한 알씩 꼭 복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경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복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혈압 조절이 안 될 수 있어서 규칙적인 복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신경 써서 규칙적인 복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묵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뒤로 미루다가는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난 전날 겪을 제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큰 사건을 기다리는 고통이라고 하시지요.
마치 진통의 고통을 겪은 뒤에 사랑하는 아기를 낳는 것처럼,
그 고통 뒤에 고통을 잊을 만큼의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지금 주님을 만나고
지금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이유를 붙여서 후회의 시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의 시간을 위해 지금 당장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변치 않을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변치 않을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떠나신다는 스승의 말씀에 근심이 가득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재회를 언급하십니다.
"다시 봄."
제자들은 반드시 잃었던 스승을 다시 만날 것이고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다시 봄"이 당시 제자들에겐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예수님 재림의 때를 가리킬 것입니다.
이 "다시 봄"의 효과와 위력이 얼마나 큰지
이후에는 어떤 고통과 환난이 닥쳐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기쁨을 굳게 간직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우리를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침 식사에 부르셨을 때,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라고 하지요.
제자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주님을 감지합니다. 그들의 기억과 사랑이 확신하니까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상태는 서로에 대한 앎이 충만한 상태, 곧 사랑의 상태입니다.
관심이 없어서 물음조차 침묵해버린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지요.
"언제", "왜", "어떻게"를 물어대던 두려움과 조바심 가득한 제자들이
처참하게 잃었던 주님을 "다시 봄"으로써 하나의 앎, 하나의 사랑 안에 잠겨 듭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가 계속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코린 18,9-10).
주님께서 환시 속에서 바오로를 친히 격려하십니다.
서간 어디에도 바오로가 느낀 감정적 반응이 언급되지 않지만,
낯선 곳에서 적대자들에 둘러싸여 주님을 전하는 그가
이 말씀으로 얼마나 힘을 받고 기뻤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환시만 해도 어마어마한 신비적 은총인데
주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역시 크나큰 위로의 내용이니 말입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사도 18,10).
이 말씀은 어쩌면 오늘의 격려 중 백미일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극심한 거부와 배척을 당하더라도
바오로가 끝까지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피하지 않고
기꺼이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 같지요.
바오로는 실제적이고 또 잠재적인 주님의 백성 틈에서 살아가며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가 아닌 사랑과 신뢰의 눈길로 모두를 대했을 겁니다.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사도 18,18).
바오로는 한바탕의 소요를 겪으며 동족 손으로 재판정까지 끌려갔지만,
성경 저자는 이에 대한 반응에 관해서도 환시 체험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합니다.
그저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는 다른 선교지를 향해서 떠나는
담담하고 초연한 모습이 보일 뿐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증명합니다.
바오로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죄와 용서, 섭리와 만남과 환시의 체험들이
그를 가벼이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무게중심을 잡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각자 주님을 체험한 원체험의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그분 사랑에 전율하고 그 자비에 눈물 흘리며,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에 대고 '주님 안에서 사랑한다'고, '주님과 함께 함께 행복하자'고
외치고 싶었던 환희의 체험 말입니다.
세파에 밀려다니느라 그 기쁨을 혹 잊고 있었다면 다시 찾아내어 머물러 봅시다.
없는 듯, 잃은 듯 보여도 분명, 있습니다.
그 기쁨은 잊을 수도 없거니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골방을 샅샅이 뒤져 그 기쁨을 찾아내고 사랑을 회복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진감래(苦盡甘來)’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는 가난과 굶주림이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길에는 넝마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냥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들이 많았습니다.
누나와 형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일하였습니다.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판자촌은 아파트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인을 보면 주눅 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당당하게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쫓아서 미국으로 이민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 의료체계가 잘 마련되어 있고, 한국 사회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 뉴욕에서 4년째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한국이 지난 50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정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입니다.
우리가 정한 물리적인 시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프고, 늙고, 죽어갑니다.
이 물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도 60년을 살아오면서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슬픔과 기쁨, 고독과 희망의 시간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에서는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습니다.
고독과 절망의 시간에서는 바늘 하나를 넣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좁습니다.
불평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감사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손을 이끌게 됩니다.
의미의 시간은 주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해산 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것이 부활 의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 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바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이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바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바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바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완전한 기쁨의 원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슬픔은 얼마 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 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고달픈 생활입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봄에 씨 뿌린 사람만이 가을에 거둘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한 신문에,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 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적 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현실적인 안락함만을 추구하면
내적인 기쁨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랑의 향기를 내는 신앙인의 소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예레15,16).
사랑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누구에게도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코리 텐 붐은 1892년 4월 15일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존경받는 시계공이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텐 붐 가족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가 깊고 이웃 사랑의 원칙을 믿는 텐 붐 부부는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집에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에 숨겨진 방을 지었고,
그곳은 그들이 수년 동안 보호했던 많은 유대인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텐 붐 일가는 네덜란드 정보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나치는 그들의 집을 급습하고 온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는 결국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가혹했고 언니는 1944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기 위해
대중 연설자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1947년 코리 텐 붐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했던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코리 텐 붐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코리 텐 붐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힘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간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러한 용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을 할 때 어떤 부자가 비싼 시계를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시계를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정말 고쳐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시계를 새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코리는 “아빠, 시계를 팔았어야지.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잖아!”라고 아빠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라.”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인데 세상은 누구도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립니다.
이미 뱀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가 흔들리면 감정도 흔들립니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이는 결국 세상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뱀을 선택한 즉시 관계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나를 버렸기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 영향을 주는 분이 되실 것이고
세상은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사람이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지만
기뻐하셨지,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사벳에게 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옥사나 말라야가 본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면
개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개가 나를 보고 짖는다고 화가 나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그 고통을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고등학교 시절 말이 별로 없으시던 미술 선생님은
학창 시절의 자신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는데,
가끔씩 꺼내어 삶에 비추어 보곤 합니다.
선생님이 서울미대에 다니던 시절
돈도 넉넉하지 못한 처지에 하루는 막걸리를 얼큰하게 마시고 학교 화실에 들어섰는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그림 연습실에는 다른 학생들도 없었습니다.
왠지 그림 그리는 것도 따분한 마음도 들고 아마 술기운이었겠지요?
이젤에 얹혀 있는 자신의 그림을 발로 한 번 뻥 찼다네요.
그랬더니 그림이 떼구르 굴러서 한 켠에 거꾸로 처박혔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근사하더래요.
그래서 그 그림을 그대로 이젤에 얹어 놓고 옆자리의 여학생이 연습하다가 만 그림의 물감을
나이프로 벅벅 긁어서 자신의 그림에다 덫칠을 했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화실에 가보니
몇몇 교수들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인사를 했더니 반가워하며 보기 드문 그림 구도라며 국전에 출품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초년 미술학도가 국전에 내었는데 그것이 입선을 했다고 합니다.
중견작가도 출품하기도 힘든 국전에 그 선생님은 출품했을 뿐 아니라 수상까지 해서
영광스러운 젊은 시절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살면서 기쁨의 순간을 맞기 전에
슬픔과 고통이 범벅이 되어 있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기쁨은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이미 되어 있는 완제품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 기쁨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당장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엄습해 올 것이고 시련의 시기가 있겠지만
부활 후에 변하지 않는 기쁨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죽음을 준비하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겪을 고통을 여인이 겪는 해산의 고통으로 비유하며 설명하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21절))
주님께서는 코린토에 있는 사도 바오로에게 환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사도 18,9-10)
아카이아 지방 총독은 유다인들이 사도 바오로의 일행에 대해서
폭력을 휘드르는 것을 목격하지만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총독 갈리오는 유다인들이 들이닥치니까
재판정에서 바오로 일행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회당장 소스테네까지 붙잡아 매질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일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복음선포의 기쁨을 맞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내실 때, 그들은 광야를 거닐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불평과 반역을 일삼습니다.
광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련의 장소였기에 고달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광야가 하느님과 함께 거닐었던 소중한 곳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곤 했습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행복의 순간을 체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행복은 되어 있는 완제품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에서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게 합니다.
거꾸로 쑤셔박힌 그림에서, 교회의 전승에 따라 전해지는 소스테네의 모욕에서,
당장 겪고 있는 고통에서 우리는 참다운 삶과 신앙의 무게를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서 삶의 기쁨을, 박해로 인한 신앙의 월계관을,
고통을 통한 기쁨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늦게서야 알아채는지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좀 더 머리를 수그리고 밀려오는 아픔, 용서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이해되지 않고 또 뜻대로 되지 않는 지금의 처지의 한쪽 켠에
행복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거나 아주 뒤 늦게 알아채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를 허락해 주신 주님을 찬미하며 멋지고 행복한 오늘을 맞도록 하지요.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