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400년에 후연의 모용희가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리를 획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700리를 환산하면 280km의 거리이다. 이를 분석하면 신성의 영역과 남소성의 영역을 함치면 약 700리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가 있다.
전쟁사에서 영역이라는 의미는 지역의 중심 도시가 함락당하면 해당 지역 전체가 함락당하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예를 들어, 대구가 함락당하면 경북 지역이 함락 당한 것이고, 전주가 함락 당하면 전북이 함락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소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소성은 옛 구다국의 수도였다. 즉, 남소성은 구다국이 있던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니 이곳이 함락되면 옛 구다국의 영역 전체가 함락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록을 보면 신성 -> 남소성 -> 목저성이 중심 가도로써 연결된 것으로 파악 된다. 신성부터 남소성 영역까지가 700리이므로 신성부터 목저성까지의 거리는 700리 이상이어야 한다.
위 그림의 남소성과 목저성의 위치는 정확한 위치 비정을 한 것이 아닌 대략적으로 갸늠해 본 것이다. 붉은색 선 지역은 국경을 고려하였을 때 번화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역이며, 남소성이 위치하고 있는 푸른색 영역은 현 조양시의 행정구역이다.
신성에서 남소성로 이어지는 루트는 이전 전쟁에서도 등장한다. AD 264년 동천왕때 관구검에 의해 남소성이 함락당하고, AD302년 미천왕때 고구려가 남소성을 회복한다. 이후 등장하는 것이 모용 선비이다. 당시 모용 선비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적봉시 지역으로 남하하여 요동과 옛 연나라 땅을 차지한다. AD339년 모용선비가 신성을 공격하고, AD345년에 남소를 함락시킨다.
전쟁사의 기본 개념은 국경과 거리이다. 국경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거리도 보통 100km 내외에 도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소성을 현 요하의 동쪽에 위치시키면 역사의 기록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게 된다. 선비의 중심지를 적봉시라고 가정하면 국력을 둘로 나누어 진격을 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진격하게 되면 요하를 건너거나 아니면 멀리 우회를 해야 하는데 이는 군사적으로 고려할 때 국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위의 그림처럼 선비가 남쪽으로 그냥 남하했다면 바로 남소성 지역과 맞닿는다. 고구려와 충돌이 발생할 수 있고, 고구려와 적절한 외교관계도 맺었을 수도 있다. 동맹관계라도 맺었다면 전력을 다해 서쪽으로 요동지역과 북경지역으로 진격이 가능해진다. 이 내용들은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끝으로, AD 406년에 연왕이 3000리를 행군한 후 목저성을 공격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목저성을 공격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거란을 치기 위해 갔다가 적의 수가 많아 퇴각하는 과정에서 목저성을 쳤다는 것이다. 3000리면 1200km의 거리이다. 후연의 군대가 북경지역에서 출발하였다면 경로는 아래 그림과 같을 것이다(붉은색 거리 : 대략 1200km임). 그리고 목저성을 공격한 이유는 단순히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공격 실패후 병사들 대부분 굶어죽었다는 것으로 보면...
* 추가로 검토한 사항
조수아님께서 남산성산성을 남소성이라고 하셔서 내용을 검토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고이산성에서 남산성산성까지는 110km 거리입니다. 여기서 거리를 상당히 더 확장하려면... 일단 남산성산성이 해당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산성산성이 해당 지역의 중심지라면 이곳이 군사적, 경제적 효과가 어느정도인지 파악을 해야 합니다.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산에서 강물이 흘러 모이는 곳에 남산성조선족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위성 사진을 보니 마치 노천 광산이 있었던 지역같은 느낌이 듭니다. (확인을 위해 자료를 검색을 해 보았지만 아직 해당지역에 대한 내용을 찾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독립된 곳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는 고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산 사이로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들지만 일단 큰 길은 보이질 않는군요. 고이산성쪽으로 가려면 산성자산성쪽으로 나와서 가야 하며, 통화시로 가려고 해도 한참을 돌아가야 합니다. 고이산성에 280Km 거리가 어느정도인지를 체크해 봤더니, 아래 그림의 검은색 선이 끝나는, 길림시 근처까지 뻗칩니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통해 280km 라인을 검토해 봤지만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비록 위성사진을 통해 간단히 지형적 특징만을 살펴보았지만 그냥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 그림에 2개의 남소성 가능지역을 표시해 보았습니다. 현재의 행정구역과 비교하여 영향력을 봤을때 한쪽은 700리가 나옵니다. 하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구분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은 사람이 많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합니다. 교통로를 비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은 교통의 중심지이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합니다.
첫댓글 지금 학계에서 비정하는 신성-남소성 거리도 280km가 됩니다. 위와 같은 지도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린 것인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남소성이 구다국의 수도였다구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네요.
학계에서 비정하는 280km 거리의 신성-남소성의 위치가 도대체 어디죠?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도는 사람이 많이 살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블록을 만든 후에 당시의 국경, 산과 강, 그리고 현재의 행정구역을 참조하여 역사 기록을 따라 정리하면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 많이 사는 곳에 역사와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 인문만 입히면 추론은 충분히 가능한 것 아닌가요? 구다국에 대한 내용은 여러 문서에 나오는 내용이라 아직 출처는 따져보질 못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남소와 구다국의 상관 관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용한 것입니다.
멀리 찾을 필요 없이 역사부도를 한 번 펴보십시오. 제가 가진 역사부도와 거기에 있는 축척을 가지고 거리를 따지니 답은 쉽게 나오더군요. 구다국은 일반적으로 함경도에 위치해 있다고 하는데 남소성과는 거리가 영 멀지요. 그러나 역사부도의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아울러 700리를 정확히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시에 지금처럼 거리를 정밀히 측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님 견해에 따르면 후연의 수도 용성은 어디로 날라갔으며, 북위, 거란 등의 위치는 어디로 잡아야 하는 걸까요? 지명 고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부도가 없어서... 위치를 말씀해 주시면 쉽게 확인이 가능합니다. 구다국을 조양시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주변 지역의 경제를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고조선 지역은 경제적 부가 밀집된 곳이었습니다. 소금(적봉), 사치품(낙랑), 약재(대방), 차(구다국) 식량(옥저), 광산(제련), 말등. 이런 품목들이 가리키는 키워드는 모두 '부유하다' 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각 지역을 설정하면서 가설을 만들었고 이후에 가설과 역사 기록에 비교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설과 기록이 일목요연하게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위치를 그림으로 보여드렸으니 한번 역사 기록 대로 찾아 보셨으면 합니다.
선비가 남하하여 북경지역은 물론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비의 발원지는 점점 다른 세력에 의해 잠식되어 갑니다. 이유는 지배세력들이 살기 좋은 땅으로 이주를 하면서 공동화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옛 선비의 땅을 차지한 새로운 세력 거란이 AD378년에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역사에 등장합니다. 당연히 국경도 변하게 됩니다. 후연의 수도들은 모두 좋은 땅에 있었습니다. 한참 확장하던 시기는 석가장시가 중심이었고, 힘을 잃고 물러났을 때는 북경 유역의 계성에 있다가 이후 북위에 밀려 동쪽 당산시 영역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곳에서 용성을 찾아야 하겠지요.
추가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연나라 영역은 강에 의해 크게 셋으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북경 영역을 중심으로 남쪽은 석가장시 유역, 동쪽은 당산시 유역으로 보는 것입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말 같습니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진나라에 밀려 계성(북경)에 있다가 요동(당산)에서 멸망당합니다. 후연 역시 계성(북경)에서 용성(당산)으로 갔다가 사라집니다. 위의 첫번째 그림이 후연, 거란 고구려의 국경관계를 나타난 것이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성은 무순의 고이산성을, 남소성은 통화의 남산성자 지역으로 비정됩니다.
특정 지역의 경제 상황과 지명을 연관시키는 것이 참 특이하군요. 그러나 구다국의 '다'가 차 다 자라고 해서 그곳을 차 생산지로 본 것이나, 그곳이 오늘날 조양 지역이라고 한 것이 납득될 만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선비족이 건국하기 이전과 이후는 당연히 구분합니다. 후연의 수도는 중산이었다가 용성으로 옮겨진 것, 당연히 압니다. 그런데 용성이 당산쪽? 당산이 용성이란 근거는 또 어디서 찾으셨는지요. 조양 지역이 용성, 화룡성으로 불리다가 훗날 영주가 되었다가 조양이 된 것인데, 참신한 이야기를 자꾸 하시니 어안이 벙벙하군요.
그리고 님의 댓글과 본문 사이에 모순이 있습니다. 지금 신성, 남소성, 목저성을 공격할 때의 선비족은 국가를 건국한 후의 선비족입니다. 345년 남소성을 칠 때 전연의 수도는 용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중심지를 적봉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 아닌지요.
선비족 모용외는 AD319년 서진의 최비를 물리치고 요동을 차지하였습니다(2번째 그림 참조). 모용황이 337년에 전연을 건국하였고 확장을 지속하면서 341년 용성으로 도읍을 정합니다. 이때부터 전연의 본거지가 요동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339년에 고구려의 신성 공략이 있었고, 345년에 동쪽으로 남소성 공격을 합니다. 모용준이 350년에 유주를 점령하였고, 기주로 나아갔고, 화북지역을 차지한 후 353년 업으로 도읍을 이동합니다. 전연은 370년에 전진에 의해 업을 잃고 멸망합니다.
384년 모용수가 연왕에 즉위하였고 업을 점령합니다. 후연의 시작이지요, 이때 고구려의 고국양왕이 385년에 요동과 현도를 습격해 점령하였지만 후연이 반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다시 회복합니다. 이후 잘나가던 후연은 394년 북위를 공격했다가 대패를 당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됩니다. 이시기에 고구려가 신성과 남소성을 점령한 것으로 보이며, 후연은 400년에 광개토태왕이 남정을 간 사이에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차지하지만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에 공격에 의해 신성, 남소성은 물론 요동까지 잃게 됩니다.
네 압니다. 뻔히 아는 얘기 반복하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 질문을 제대로 읽고 답해 주실 것도 부탁드립니다. 내 질문은 345년 전연의 중심지가 용성인데 왜 적봉 운운하냐는 것입니다. 이미 님은 선비가 더 좋은 곳을 찾아 갔기에 본래 근거지인 적봉은 거란의 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적봉으로부터 신성과 남소성의 위치를 찾는 님의 시도는 이미 모순에 빠진 겁니다.
연도별로 반복 설명 드린 것은 이동 경로를 생각을 해 보라는 의미로 적은 거구요. 선비의 이동로를 보면 적봉지역에서 흉노와 결합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후 남하하여 요동지역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341년에 그림1의 요동성 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용성으로 중심지를 옮겼고, 그리고 350년에 유주를 점령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동 경로를 생각하면서 역사를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거란(=비려)을 논한것은 선비 이후 시대적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거란이 (비려) 남하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고구려가 이에 대응한 기록이 있으니까요. 이를 통해 당연히 국경 관계도 변화되었다고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란과 관련하여 신성과 남소성의 위치를 찾은 적이 없습니다. 후연이 목저성을 공격했다고 해서 거리를 살펴본 것이지요. 도대체 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순이 도대체 뭔질 모르겠네요.
그리고 385년에 요동과 현도를 친 왕은 고국양왕입니다. 영양양(?)이 아니라. 오타는 아닌 거 같군요.
오타 맞네요. 요즘 영양왕 쪽을 보고 있어서 자꾸 깜빡깜빡 합니다.
정말 모순이 뭔지 모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