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신, 외교관, 학자.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안동 김씨(安東 金氏)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책을 읽을 때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
이황의 수제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이황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天之所出者)"라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한양에 살 무렵에는 지금의 충무로에 살았는데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 '서애길'이라는 길이 있고
그곳에 류성룡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당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특히 정여립의 난과 관련한 기축옥사와 그와 관련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있었는데
그는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건저 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는데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이 무렵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능란하며 경우가 바르고 말솜씨 있는 사람은 류 정승만 한 이가 없다."
- 이항복,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이때쯤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결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참이었지만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강력한 왜군 침입 예고와 대비 주장에도
류성룡은 같은 당파 동인이자 쌍벽을 이루는 이황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보고를 듣고 기본적으로는 설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찜찜했는지 이순신이나 권율 등을 천거해서 등용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조선군은 무너져 선조가 몽진을 가야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때 전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간관들의 탄핵으로 인해 잠시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고
이때 비변사의 도제조이면서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오늘날 국무총리 겸 총사령관)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도 바로 그였고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많은 일을 했다.
전시에 행해진 류성룡의 조치들은 유연하고도 실용적이었는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뜬금없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자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막으려고 위구르와 티베트에 원병을 청했다가 난리가 났듯 이걸 받아들이면 훗날의 우환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게 좋겠다
. 다만 여진족으로서는 예전부터 우리에 대한 원한이 크므로 단호히 물리쳐 괜히 자극할 게 아니라
'도와준다는 것은 고마운데 지금은 왜란이 거의 평정되었으므로 굳이 너희한테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정도로
잘 사양하는 게 좋겠다"라는 의견을 낸 것만 보아도 류성룡의 통찰력을 알 수 있다.
전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과 일본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치러 온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고
선조 또한 원해서 류성룡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부탁했지만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런데 북인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을 하였고 결국 삭탈 관직되어 낙향했다.
이후 1600년 복직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힘썼는데 쓰여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징비록》이다.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태와 참상 및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1604년 은거하던 안동 하회마을이 수해를 입는 바람에
하회마을에서 풍산 서미동으로 옮겨 살았고 1607년 5월 6일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의 '서애 선생 연보'에는 말년에 "조용히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손님들을 물리치며 살았다고 하며 류성룡이 임종하는 모습이 상세히 적혀 있다.
5월 6일 무진일, 진시(辰時)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그 전날 밤에는 남의 부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오늘은 정신이 환하여 병이 없던 때와 같다."고 하면서 홍범(洪範)을 끝까지 외었다.
이날 진시 초에 사람을 시켜 내의를 맞아 오게 했다. 내의는 약을 달이느라고 곧바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여러 번 명하여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들어온 뒤에 손을 잡고 영결하며 말하였다.
"멀리 와서 병을 간호해 주니 천은이 망극합니다. 그대의 수고도 많았는데, 며칠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곧 명하여 당(堂) 중간에다 자리[席]를 마련하고 거기로 옮겨 나가려 하자 모시는 사람은 힘들게 움직이다가 괴로움이 더할까 염려해서 굳이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빨리 붙들어서 그곳으로 옮기자, 북쪽으로 향하여 정좌하고 편안하게 서거하였다.
- 《서애집》, 서애선생연보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숭례문의 상인들은 철시를 하여 애도를 표했고
백성들은 "류 정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1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슬퍼했다.
청렴했던 탓에 집안에 재산이 없어서 백성들이 제수 용품을 차려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2리에 있다. 1589년 먼저 사망한 아내 전주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평가
친우인 이순신에게 가려져 그의 존재와 역할이 조명받지 못한 측면도 있으나
후세에는 조선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라 평가받는 인물이다.
류성룡은 퇴계 학풍을 계승한 인물로 근원적인 예학을 추구하기는 했지만,
왜란 때의 행보를 보면 현실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수미법'이라 하여 대동법의 전신격인 제도를 주장해서 실현시키기도 했다.
또한 가끔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까이기도 하지만, 십만양병설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류성룡의 주장이나 행보를 보면 이이의 '경장론(개혁론)'과 부합하는 면도 많다.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이황의 제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부분.
다만 실록에는 그의 단점을 들어 "재상으로서의 줏대가 없었으며 옳지 못한 일을 간하는 것이 없었다."는 등
다소 좋지 않은 평이 있다.
실제로 이순신이 탄핵될 때 류성룡은 당시 분위기 때문에 이순신을 제대로 구원하지 못했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어전에서의 발언을 보면 오히려
류성룡이 이순신의 모함에 소극적으로라도 편승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기도 한다.
이 당시 류성룡의 발언만을 그대로 옮겨보면,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 《선조 실록》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조정 신하들 중 정탁과 이원익 두 사람만이 이순신의 변호를 했고, 결국 이순신은 백의종군 처벌로 끝났다.
하지만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애초에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 모함하고 허위 보고를 했기에 이순신이 이런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원균이 보고한 내용의 진의를 말 타고 그 먼 곳까지 가봐야 알던 시절에,
조정에선 보고서만을 놓고 결정을 해야 했다.
물론 조정도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전란통에 "이순신이 출정을 안 한다."는 둥 원균이 허위보고를 했다고 해서,
그 진위 여부를 적절한 시간 안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류성룡이 임진왜란 지휘와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웠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뛰어난 일솜씨와 전란 극복의 공적은 당대 신하들도 인정하는 바였고
특히 훈련도감의 창설로 인해 조선 후기의 군제에 영향을 끼친 것도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 "지난 일을 반성하여 앞으로의 일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역작 징비록을 저술했으니,
이것들만 봐도 류성룡은 충분히 명신 대열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다.
다른 건 제쳐두고 임진왜란 최고의 양대 무장인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해서 방비한 사람이 류성룡으로,
과장 없이 말해도 그가 없으면 전쟁에서 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