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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목인(오른쪽)이 1987년 문화훈장을 받고 아내 오정심과 함께 찍은 사진.
"우리 러브(love)는 구식이었어. 요즘 사람들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몰래몰래 꼭꼭 숨어서 만나고.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들러붙었는지 몰라."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아빠의 청춘'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킨 작곡가 겸 악단 지휘자 손목인(1913~1999·
작은 사진).
평생 1000여곡을 쓴 손목인은 특히 애조 띠면서도 격조 있는 멜로디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그로부터 노래를 받았던 김정구·이난영·장세정·고복수 등은 1950~60년대 최고 인기 가수로 군림했다.
그와의 1950년대 말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오정심(87) 여사의 얼굴에는 첫사랑에 빠진 처녀처럼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가요계와 가극단을 오가며 가수 겸 배우로 활약하다가 손목인의 아내가 된 뒤 무대 뒤에서 조용히 50여년을 보낸 오 여사가 오랜만에 커튼 밖으로 나왔다. 남편 손목인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회고록 '손목인 가요인생'을 세상에 선보인 것. 이 책은 1980년대 한 일간지에 연재된 손목인의 회고록에 오 여사가 기억하는 대중음악계 풍경을 세밀하게 고증해 덧붙였다.
출판기념회(27일 서울 조선호텔)를 하루 앞두고 서울 명동에서 만난 그는 "손목인 선생님 삶이 우리 대중음악사의 큰 부분이었던 만큼 꼭 책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1943년 배우 생활을 시작한 뒤 1950년대에는 '프렌치 캉캉' '첫사랑 맘보' 등을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오 여사는 한 차례 결혼해 아이 셋이 있던 손목인과의 결혼식 장면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 시절에 번듯하게 결혼할 수 있었겠어? 교회 가서 언약식 정도로 소박하게 치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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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심 여사는 “컴백한다면 내가 활동하던 시절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스테이지 쇼(노래와 춤·촌극 등을 함께 아우른 쇼)’를 멋지게 부활시켜, 그 무대를 통해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설립에 앞장섰고 초대 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던 손목인 주변에는 항상 당대 최고 가수와 작곡가·음반 제작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부부의 집은 자연스럽게 가요계 사랑방이 됐다. 오정심은 대중음악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생생히 지켜봤고, 이난영·장세정 등 당대 최고 여가수들은 오정심과 친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며 흉금을 털어놨다.
"대중은 전혀 모르는 연예인 스캔들과 뒷얘기를 아마 나만큼 많이 알고 있는 사람 없을걸(웃음)? 근데 절대 말은 못하지. 많이 아는 것보다 나도 우리 음악계가 발전하는 데 한 게 있다는 점도 뿌듯하죠. 작곡가들 제대로 권익도 못 찾는 게 안쓰럽다면서 선생님이 음악저작권협회를 만들었는데, 창립 고사 음식도 다 내가 했거든요."
손목인은 안타깝게 객사(客死)했다. 1999년 1월 손목인·오정심 부부는 음반 계약 건으로 일본 도쿄에 머무르고 있었고, 아침을 거르지 않던 손목인이 '몸이 좋지 않다'며 침대에 누운 뒤 의식을 잃고 결국 숨을 거뒀다. "힘없이 쓰러져 침대에 눕는데 나에겐 '미쓰코시 백화점 가서 쇼핑한다며, 빨리 갔다 와'라고 채근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해요.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시고 난 뒤엔 어떻게든 선생님 인생을 책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죠."
"남편을 위해 가수로서의 삶을 포기한 게 아쉽지 않으냐"고 묻자 그가 슬쩍 꺼낸 장래 계획. "그 목소리 그렇게 두는 게 아깝다고들 해서 선생님 노래랑 애창곡 등 합쳐서 작년에 새 음반 취입했어요. 그런데 녹음을 완전히 망쳐서 발표 못 하고 있지. 내가 진짜 목소리만큼은 자신 있어. 언젠간 정말 번듯하게 다시 컴백하려고. 그런데 동정받는 식으로 나오진 않고, 아주 당당하게 나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