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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공이라는 개념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존재는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거다. 그는 직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며 동시에 당시 폭파 불교 학자들이 놓치고 있던 결정적 지점이라는 것을 이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 이식 인도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쿠션 제국은 쇠퇴하고 있었고 남인도의 왕조들도 계속 교체되고 있었습니다. 불교 역시 아쇼카 왕 이후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여러 학파로 나뉘어 서로 논쟁만 벌이고 있었습니다. 실체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20여 개 학파가 각자의 해석을 내놓으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법의 실체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있고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법위로는 당시 지배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생각했습니다. 아니다. 이건 틀렸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붓다가 말한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 독립적 실체는 없다. 있다 없다의 이분법조차 잘못된 것이다. 그는 이 통찰을 논리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의 손에서 인도 사상사를 뒤흔들 한 권의 책이 나올 것이었습니다. 남인도의 한 브라만 청년이 이렇게 불교의 세계로 들어섰습니다. 그의 앞에는 긴 여정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각지의 사원을 떠돌며 배우고 논쟁하고 사유하는 여정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목소리로 진리를 말하게 될 때까지의 여정 이것이 나가르주나의 시작이었습니다. 나가르주나가 불교에 입문한 뒤 그가 간 곳은 각지의 사원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의 불교 사원들은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학문이 전당이었습니다. 승려들이 모여 경전을 암송하고 교리를 토론하고 논리를 갈고 닦는 곳이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 사원들을 떠돌며 배웠습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는 90일 만에 3장 즉 경 율 논을 모두 독성했다고 합니다. 과장이겠지만. 그가 대단한 학습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마주한 것은 격변기의 불교였습니다. 붓다가 인멸한 지 이미 500년 가까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 세월 동안 불교는 변했습니다. 초기에 단순하고 직접적인 가르침은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승단은 분열했습니다. 기원전 100년경 계율 해석을 둘러싼 논쟁으로 상자부와 대중부로 나뉜 뒤 다시 세분화되어 20여 개의 폭파로 쪼개졌습니다. 각 부파는 자신들이야말로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부파는 단순히 계유를 두고 다툰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존재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이것을 아비닮아 즉 법에 대한 연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풋다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분석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했습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시간과 공간은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규명하려 했습니다.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학파가 설 일체 유부였습니다. 이들은 북인도에서 세력을 떨치며 방대한 논서들을 편찬했습니다. 유부라고도 불린 이들의 핵심 주장은 간단했습니다. 법은 존재한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 즉 색수상 행식 같은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법들을 세밀하게 분류했습니다.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을 나누고 각각의 성질과 작용을 정의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정교했습니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붓다는 원래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무화를 가르쳤습니다. 영원한 자아는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을 가르쳤습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난다는 연기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자아는 부정하면서 법은 인정하는 게 논리적으로 일관된 것입니까? 이런 모순을 느낀 건 나가르주나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대승불교 운동이었습니다. 기원전 일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움직임은 푸파불교를 비판했습니다. 너무 학문적이고 출가자 중심적이라고. 일반 민중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그들은 새로운 경전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반야경 법파경 화함경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반야경은 공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일체는 공화당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이것은 푸파불교의 법유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야경은 경전이었습니다. 선언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체계화된 이론은 아니었습니다. 공화당은 말만 되풀이할 뿐 왜 공한지 어떻게 공한지 공이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바로 이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브라만 집안에서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폭파 불교의 정교한 논쟁 방식을 익힌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반야경의 깊은 통찰을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둘을 결합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반야경의 공사상을 부파불교의 논리 체계로 증명하는 것 그것이 그의 과제였습니다. 그는 각지의 사원을 돌며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인도 사원의 논쟁은 치열했습니다. 단순히 의견을 나누는 게 아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야 했습니다. 한 채 허점도 남기지 않고 상대의 주장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진사람은 이긴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 논쟁의 장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상대의 논리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바로 그 전제가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기류 논법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불합리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그는 이 기법에 대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었습니다. 풋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것 해탈로 가는 길을 명확히 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핵심에 공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포파불교 학자들이 놓친 것을 그들은 존재를 분석하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작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이 실제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한다는 게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성 즉 사물 고유의 본질을 말했지만 그런 것이 정말 있을 수 있는지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자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스스로 존재해야 합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씨앗이 나무가 되려면 흙과 물과 햇빛이 필요합니다. 나무가 나무이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합니다. 모든 것은 조건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이것이 붓다가 말한 연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성이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가 아닙니다.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나가로주나가 도달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한 단계 한 단계 증명해 나가면서. 그는 푸파 불교 학자들이 제시한 모든 주장을 하나씩 검토했습니다. 운동은 가능한가?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 시간은 존재하는가?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자성을 전제하는 모든 사유가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간 축적된 폭파 불교의 논리 체계는 방대했고 정교했습니다. 그것을 정면으로 무너뜨리려면 더 정교한 논리가 필요했습니다. 나가르지나는 그것을 해냈습니다. 그는 상대의 논리를 상대의 무기로 물리쳤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논리적 도구를 사용하여 그들의 전제가 틀렸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충론 정확한 이름은 중도에 대한 근본 개성이었습니다. 산스크리트로 물라마디아마카 카리카 이 책은 27장 약 450개의 개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간결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인도 사상사를 뒤흔들 폭발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3세기 사이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불교계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푸파불교 학자들은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의 논리는 견고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나타나 스승의 사상을 옹호했습니다. 특히 제바 즉 아리아 데바라는 제자는 백론을 저술하여 나가르주나의 논리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불교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나가르주나 이전의 불교와 나가르주나 이후의 불교는 달랐습니다. 공사장은 이제 단순한 종교적 선언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이 되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이제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남인도의 한 브라만 청년이 이렇게 불교 사상사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공사상의 진정한 의미를 그것이 단순히 철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줄 차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가르주나 사상의 핵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공입니다. 이 한 글자가 불교 2천 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가장 많이 오해받았으며 동시에 가장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개념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이 공을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담은 책이 바로 죽론입니다. 중론의 원래 이름은 근본 중성 산스크리트로 물라마디아 마카카리카입니다. 근본이 되는 중도에 관한 개성이라는 뜻입니다. 27장 약 450개의 개성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간결했습니다. 하지만 그 간결함 속에 담긴 논리는 인도 사상사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세계 첫 머리 귀경계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나가르주나는 부탈을 이렇게 찬탄합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그 연기를 설하신 분께 경배합니다. 발불 여덟 가지 부정입니다. 생겨남도 아니고 사라짐도 아니고 영원함도 아니고 순간적임도 아니고 동일함도 아니고 차이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감도 아니다. 이것이 연기이며 국다가 가르친 것이라고 나가르주나는 선언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당혹스럽습니다. 그럼 대체 뭡니까?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나가르주나가 깨뜨리고자 한 바로 그 질문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있다 없다의 이분법으로 생각합니다.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는 이 이분법 자체가 문제라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공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공이 아닌 것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닙니다. 거무가 아닙니다. 세상의 환상이라거나 실제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심지어 불교도들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중론 이십 4장에서 경고합니다. 공을 잘못 이해하면 독서를 잘못 잡은 것과 같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오히려 파멸의 구덩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은 무엇입니까? 나가르주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동일한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 산스크리트로 스바바바 이것이 핵심입니다. 자성이란 스스로 그러한 성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을 뜻합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그 자체로 성립하는 어떤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묻습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수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수레가 있습니다.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만지고 타고 갑니다. 하지만 이 수레의 자성은 어디 있습니까? 바퀴입니까? 바퀴만으로는 수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수레트립니까? 수레틀만으로도 수레가 아닙니다. 바퀴와 수레틀과 축과 손잡이를 모두 합쳐야 수레입니다. 그렇다면 수레라는 것은 폭품들의 조합일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수레는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수레는 분명히 있습니다. 기능적으로 작동합니다. 사람을 태우고 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품들의 관계 조건들의 조합으로만 존재합니다. 술의 자체라는 독립적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입니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시합과 싹을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에서 싹이 나옵니다. 우리는 싹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는 묻습니다. 싹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네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싹이 스스로 생겨났다. 둘째 시앗 같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났다. 셋째 자기와 남 둘 다로부터 생겨났다. 넷째 아무원인 없이 생겨났다. 이것이 인도 논리학의 사고입니다. 그리고 나가르주나는 이 네 가지를 모두 논파합니다. 첫째 싹이 스스로 생겨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를 만들어냅니까? 싹이 이미 있다면 다시 생겨날 필요가 없고 아직 없다면 스스로 만들 주체가 없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씨앗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치약과 싹은 다릅니다. 완전히 다른 두 곳이 어떻게 인과 관계를 맺습니까? 만약 다른 곳에서 무엇이든 생겨날 수 있다면 씨앗에서 돌이 나올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치약과 싹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완전히 다른 게 아닙니다. 셋째 그렇다면 자기와 남 둘 다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첫째와 둘째의 문제를 동시에 가진 것일 뿐입니다. 넷째 아무 원인 없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생겨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가루주나의 사고 부정입니다. 생겨남에 대한 모든 가능한 설명을 논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는 싹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싹은 분명히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하지만 자성을 가진 것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독립적 실체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겨납니까?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납니다. 씨앗이 있고 흙이 있고 물이 있고 햇빛이 있고 온도가 맞고 시간이 흐를 때 싹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조건들의 화합으로 싹이 있게 됩니다. 시합만으로도 안 되고 물만으로도 안 되고 모든 조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조건에 의존한 발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공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죽론 24장 18 절에서 선언합니다. 무료 조건에 의존해 생겨나는 것 우리는 그것을 공이라고 합니다. 동일한 가립이며 바로 그것이 중도입니다. 이 계송은 나가르주나 철학의 정수입니다. 연기와 공과 중도가 같은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해서만 존재합니다.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자성이 없다고 말하고 공화당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조건 속에서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기능합니다. 작용합니다. 이것을 가리비라고 합니다. 조건적으로 상대적으로 이름 붙여져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긴 것과 짧은 것 무엇이
긴 것입니까? 비교 대상이 있어야 깁니다. 1 m 막대는 50센티 막대에 비하면 길지만 이 m 막대에 비하면 짧습니다. 긴 것 자체란 없습니다. 상대적 관계 속에서만 이미 성립합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누가 아버지입니까?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자체란 없습니다.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입니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성립합니다. 나가르주나는 이 논리를 존재의 모든 영역에 적용했습니다. 운동은 어떻습니까? 중론 이장은 가는 이에 대해 분석합니다. 지금 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간 곳에서 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갔다면 다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곳에서 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가지 않은 곳에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고 있는 곳에서 가고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 가고 있음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가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나가르주나가 보여주려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운동조차도 자성을 가진 것으로 분석하려 들면 모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운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운동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주권들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입니다. 인과 관계는 어떻습니까? 죽론 20장은 원인과 결과를 분석합니다.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있는 것입니다.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나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엇이 연결합니까? 원인이 사라진 후에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미 사라진 것이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냅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가르주나가 인과 관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과관계는 분명히 작동합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불을 켜면 방이 밝아집니다. 나가르주나가 부정하는 것은 실체로서의 인과 자성을 가진 것으로서의 인과입니다. 인과조차도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시간은 어떻습니까? 중론 19장은 시간을 다룹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경계인데 경계는 폭이 없습니다. 폭이 없다면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삽니다. 하지만 시간 역시 자성을 가진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르주너는 하나하나 검토해 나갑니다. 생겨남과 사라짐 존재와 비존재 동일함과 차이 원인과 결과 조건과 조건 지어진 것 행위자와 행위 보는 이와 보이는 것 번뇌와 번뇌를 가진 자 고통과 그 원인 행위와 그 과보 자아와 세계 붓다와 열반까지 27장에 걸쳐 존재의 모든 범주를 분석하고 그 모든 것이 자성의 없음을 공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론이 나옵니다. 당시 부파 불교 학자들은 나가루주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모든 것이 공화당은 선과 악의 구별이 있습니까? 유네와 열반의 차이가 있습니까? 수행의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공하다면 모든 것이 같은 것 아닙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나가르주나는 죽론 24장에서 정면으로 답합니다. 그는 이제 즉 두 가지 진리를 말합니다. 세속제와 승리제입니다. 세속의 진리와 궁극의 진리입니다. 세속제는 일상적 진리입니다. 수레가 있고 사람이 있고 선과 악이 있고 고통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조건적으로 상대적으로 이름 붙여져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수준에서는 분명히 존재하고 의미가 있고 구별이 있습니다. 승희제는 궁극의 진리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성이 없고 공화당입니다. 독립적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 둘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능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즉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합니다. 씨앗이 싹이 될 수 있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에 고정된 자성이 있다면 아무것도 변할 수 없습니다. 씨앗은 영원히 씨앗이고 중생은 영원히 중생이어야 합니다. 나가르주나는 말합니다. 공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공 때문에 파멸합니다. 하지만 공을 올바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공은 헤탈의 문입니다. 공은 허무 무가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조건을 바꾸면 결과도 바뀝니다. 고통도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조건을 없애면 고통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의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따와 없다의 중간이 아닙니다. 반반식이 아닙니다. 중돌한 있다 없다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존재도 자성으로써 존재하지 않고 비존재도 절대적 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조건 속에서 상대적으로 성립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연기이고 이것이 공입니다 세 단어 같은 의미입니다. 나가르주나의 논리는 예리했습니다. 그는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 후 그 주장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불합리함을 드러냅니다. 이것을 기리는 법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전제를 수용하되 그것이 모순으로 귀결됨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왜 이런 방식을 썼을까요? 왜냐하면 나가루주나에게는 옹호해야 할 자기 입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공화당주장도 궁극적으로는 공화당합니다. 공 자체도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원 뗏목과 같습니다. 강을 건너는데 필요하지만 건넌 후에는 버려야 합니다. 공은 모든 견해를 버리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동이라는 견해조차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나가르주나가 세상에 내놓은 칼날이었습니다. 예리하고 정밀한 논리의 칼날 그것은 모든 실체론을 모든 독단을 모든 집착을 배워냈습니다. 당시 불교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수백 년간 쌓아 올린 아비달마의 정교한 체계가 근본부터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해방이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논쟁을 거부했습니다. 세상이 영원한지 유한한지 자아와 몸이 같은지 다른지 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는 바로 그 붓다의 정신을 되살렸습니다. 논리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모든 논리적 집착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중론이 세상에 나온 후 불교는 달라졌습니다. 대승불교는 이제 확고한 철학적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사장은 더 이상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논증된 이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1800년 동안 인도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의 무수한 학자들이 이 책을 추적하고 논쟁하고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서양 철학자들도 놀랐습니다. 20세기의 중론이 서구에 알려졌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 하이데커의 존재론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비교되었습니다. 실체에 대한 회의 언어의 한계에 대한 성찰 모든 독단에 대한 해체 나가르지나는 이미 이 세기에 그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 자신에게 이것은 철학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공은 헤탈의 도구였습니다. 집착을 끝낸 칼이었습니다. 우리는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집착합니다. 나라는 실체 내 것이라는 실체 영원함이라는 실체를 붙잡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흐릅니다. 변합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집니다. 이것을 보는 것 이것이 공을 보는 것이고 이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나가르주나는 말년에 이렇게 회상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것을 노후라고 했을 뿐이다. 그것이 공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놓아줌 모든 견해를 모든 집착을 모든 자기 확신을 놓아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놓아 주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그것이 연기이고 그것이 자유이고 그것이 해탈입니다. 남인도의 한 승려가 이렇게 세상에 칼날을 던졌습니다. 그 칼날은 예리했지만 자비로웠습니다. 배현했지만 치유했습니다. 부정했지만 긍정했습니다. 이것이 나가르주나가 세상에 남긴 것이었습니다. 공이라는 이름의 가장 깊은 자유 여기까지 하고 또 다음 영상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왜 이제 완연한 겨울입니다. 건강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영상에 이어 이번 영상에서는 나가르주나가 생전에 남긴 방대한 양의 저작에 관해 알아보려 합니다. 자 그럼 나가르주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중론이 세상에 나온 후 나가르주나의 명성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원 안에 틀어박힌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논쟁의 장을 넘어 현실 세계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 세계의 중심에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왕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의 왕들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아소카왕 일에 불교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왕들은 사원의 토지를 시조하고 승려들을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신앙심만은 아니었습니다. 불교는 통치 이념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음교가 카스트 제도로 사회를 경직시킬 때 불교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말했습니다. 왕권을 신성시하는 브라만들과 달리 불교는 왕도 법 앞에 평등한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정의로운 왕 법에 따라 통치하는 왕을 전륜 상황이라 부르며 이상적 통치자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나가르주나가 살던 시기 남인도에는 사타바하나 왕조가 있었습니다. 이 왕조의 왕들 중 일부는 불교를 후원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나가루 주나는 한왕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 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어떤 기록은 사타바 하나의 아냐 쉬리 사타카르니 왕이라고 하고 어떤 기록은 다른 이름을 전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가르주나가 그 왕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그 편지가 바로 보행 왕정론입니다. 산스크리트로 라트나 발리 즉 보배 목걸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나가르주나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형의상학을 논하는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력을 가진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실천가였습니다. 보행 왕정로는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편은 안락 헤탈품입니다. 여기서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칩니다. 십선을 말합니다.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사업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이간질하지 말고 욕설하지 말고 꾸며 말하지 말고. 탐욕 부리지 말고 성내지 말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평범해 보입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는 이 평범한 가르침을 왕에게 말합니다. 왜입니까? 왕이야말로 이것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전쟁을 명령합니다. 수천 명을 죽입니다. 왕은 세금을 거둡니다. 때로 백성의 것을 빼앗습니다. 왕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정치란 그런 것 아닙니까? 하지만 나가르주나는 단호합니다. 아닙니다. 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왕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행위는 한 사람의 행위가 아닙니다. 수천 수만 명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이 탐욕스러우면 신하들이 탐욕스러워집니다. 당신이 분노하면 나라 전체가 분노합니다. 당신이 정의롭
않으면 백성들도 정의를 잃습니다. 그러니. 왕이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다. 두. 번째 편부터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보살의 수행을 설명합니다. 육바람일을 말합니다.
보시측의 인욕 정진 선정 지혜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단순히 개인의 수행 지침이 아닙니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통치의 원리
전환시킵니다. 보시란. 무엇입니까? 왕에게? 보시란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식량을 주고 병든 자
주고 학문을 구하는 자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창고를 열어라 여행자들을 위해 휴게소를 지어라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세워라.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우물을 팔아 이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닙니다
국가의 책임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은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백성의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돌봐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2. 말은 이 세기의 인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왕권. 신수설이 지배하던 시대에 왕은 신이 내린 존재라고 믿던 시대에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당신은 섬기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계란 무엇입니까?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에게 지계란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왕은 법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가르주나는 말합니다. 법 위
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 앞에 왕도 평등합니다. 아니. 왕이야말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왕이. 법을 어기면 어떻게 백성이 법을 지
또? 말합니다. 폭력으로 다스리지 마십시오. 형벌을 남용하지 마십시오. 사형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고문은 진실을 밝히는. 도구가 아니라 거짓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감옥은 복수의 장소가. 아니라 교화의 장소여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급진적입니다. 그러니 2000년. 전에는 얼마나 급진적이었을까요 인육이란 무엇입니까? 참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에게 인욕이란. 성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합니다. 신하가. 때야말로. 때 화내지 마십시오. 백성이 비판할 때. 귀를 막지 마십시오. 반대 의견을 들으십시오. 당신이 옳다고 확신할. 때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고립됩니다. 기구를 두라고 권합니다. 현명한 사람들을 곁에 두고. 그들의 의견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나가르주나는 말합니다. 사채에 빠지지 마십시오. 향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매일 아침. 1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고립됩니다. 고립된 왕은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정진이란 무엇입니까? 게으르지 않은. 것입니다. 왕에게 정진이란 통치에. 태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말합니다. 사채에 빠지지 마십시오. 향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국사를 돌보십시오. 나가루 주나는 말합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분노로 판단하지
백성의 고통을. 살피십시오. 변방의 소식을 들으십시오. 선정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의 고요함입니다. 왕에게 선정이란 침착함입니다. 나가루 주나는 말합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분노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결정하지. 마십시오. 고요한 마음으로. 상황을 보십시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침착함입니다. 나가루 주나는. 말합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분노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결정하지 마십시오. 마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결정하지 마십시오. 고요한 마음으로 상황을 보십시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의존합니다. 백성의 지지 신하의 충성. 충성 이웃 나라와의 관계 경제 상황 모든. 것이 조건입니다.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절대적 안전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겸손을 낳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죽습니다. 당신의. 왕국도 사라집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안전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겸손을 낳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죽습니다. 당신의 왕국도. 사라집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왕조가. 일어났다가 사라졌습니까? 당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겸손하십시오.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겸손을 낳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죽습니다 당신의 왕국도 사라집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왕조가 일어났다가 사라졌습니까 당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선을 행하십시오 백성을 행복하게 만드십시오 그것이 왕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세 번째 편에서 나가르주나는 더 나아갑니다 사회 제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카스트 제도를 비판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귀하거나 천한 것이 아닙니다 팽이롭게 해지고 행위로 천해집니다 브라만도 악을 행하면 천하고 천민도 선을 행하면 귀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 구조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그는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부자가 너무 부유하고 가난한 자가 너무 가난하면 사회가 불
싸우십시오. 무고한 백성을 해치지 마십시오. 항복한 적을 확대하지 마십시오. 전쟁 후에는. 관대하십시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네 번째. 편에서 나가르준하는 보살의 십지를 설명합니다. 보살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 단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이것을 왕의 수행 단계로 재해석합니다. 왕도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왕이야말로. 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한 결정이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편은 공의. 가르침으로 끝납니다. 나가르주나는 왕에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모든 일 법을. 만들고 전쟁을 결정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모든 일은 조건. 속에서 일어납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 유연하십시오.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하지만 동시에 원칙을 잃지 마십시오. 그. 원칙이란 바로 자비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보행 왕족로는 단순한. 윤리 교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정치 철학자였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 책을 통해 불교를 개인의 해탈 추구에서 사회 개혁의. 이념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보살핌이. 산 속의 수행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실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의 영향은 컸습니다. 인도에서. 티베트에서 중국에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수많은 왕들이 이 책을. 읽었습니다. 불교를 믿는 왕들에게 이 책은. 통치의 지침서였습니다. 물론. 모든 왕이 나가르주나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권력은 사람을 부패시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상은 제시되었습니다. 광도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 권력은 섬김이라는 것. 통치는 자비여야 한다는 것. 나가르주나의 또 다른 저작 번개 왕송 산스크리트로 수홀레카 즉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짧고 간결합니다. 123개 개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나가르주나는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술 마시지. 마십시오. 도박하지 마십시오. 가늠하지 마십시오. 폭력을 쓰지 마십시오. 왕에게 하는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솔직합니다. 이 두 책을 통해 나가로주나가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불교가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사장이 허무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즉 고정된 운명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불이한 제도를. 고칠 수 있습니다. 가난을 줄일 수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나 혼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함께. 구제하는 것 나가르주나는 이. 정신을 철학적으로 정처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구현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권력자에게 조언했습니다. 사회 제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공사상을 논리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사원의. 벽을 넘어 궁궐의. 방으로 개인의 수행에서 사회의 개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형이상학자이면서 동시에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윤리학자였습니다. 스승이면서 동시에 행동가였습니다. 이세계의 한 승려가. 왕에게 보낸 편지 그 편지는 단순한. 개인적 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어떻게 세상과. 만나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선언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권력은 섬김이어야 한다는 것 정의는 모든 이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 사회는 가장 약한.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것 이것은 2000.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이제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승불교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인도를 넘어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인도의 한 승려가 시작한 사유의 혁명이 이렇게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가르주나의 말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적습니다. 그가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조차 정확하지. 않습니다. 고마라습이 번역한 용수 보살전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남인도 크리쉬나강. 하류의 흑봉산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 지역을. 나가르주나 혼다 즉 나가르주나의 언덕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전승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 전승에 따르면 그가. 후원하던 왕의 아들이 왕위를 서두르다가 나가르주나에게 자신의 목을 요구했고 나가르주나는 이를 받아들여 순순히.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승은 상자부 승려가 나가르주나에게 앙심을. 품었고 나가르주나가 조용히 방에 들어가 며칠 후 매미가 허물을 벗듯. 죽어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죽음은 불에 극적으로 각색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22야기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나가르주나는 생사조차 집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는 자신이 설파한 대로 살았다는 것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고 죽음도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지난 후 남인도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위해 묘를 짓고 부처와 같이 공격했다고 합니다. 실존 인물이면서도 보살이라 불린 몇 안 되는 이중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무착 새친 마명과 함께 나가르주나는 용스보살로 추앙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존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교. 역사에서 붓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가 남긴 저작들은 방대했습니다. 중돈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12문론 회장론 70. 공성론 60 송열이론 같은 철학 논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행 왕 정론 번개왕성. 같은 윤리 저작들도 있습니다 찬가와 기도문도 있습니다. 참법 개송 같은 것들입니다. 심지어 의약서와 연금술에 관한 책도 그의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실제로. 그가 쓴 것인지는 논쟁거리입니다. 후대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쓴 것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가르주나라는 이름이 하나의 전통을 대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간 전통입니다. 중간 산스크리트로 마데아. 마카 중도의 길 나가르주나가. 시작한 이 학파는 그의 제자 제바 즉 아리아. 데바에게 이어졌습니다. 제바는 백론을 저술하여 스승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제발 이후 몇세기 동안 중간 전통은 인도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 세계는 프로 즉 붙다 발리타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중론에. 주석을 달면서. 순수하게 귀류 논법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주장을 세우지 말고 상대의 주장이 모순에 빠진다는 것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귀류 논증파 산스크리트로 프라산키카라고 합니다. 육세기는. 청년 즉 바바 비백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불우와 달리 독립논쟁. 즉 자기주장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을 증명하려면 논리적 논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립논증파 산스크리트로 스바탄트리카라고 합니다. 이렇게 중간 학파는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나가루주나의 공사상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칠세기에는 월칭 즉 찬드라큐리티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불호의 귀륜언쟁파를 계승하면서 입중론과 명구론을 저술했습니다. 특히 연구로는. 중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주석으로 평가받습니다. 월층은 나가루주나의 논리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해석이 후대 티베트 불교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한편 인도 밖에서도. 나가르주나의 영향은 퍼져나갔습니다. 4세기 초 중국의 구마라습이 나가르주나의. 저작들을 한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중론. 12 문 그리고 제바의 백론 이세논설을 합쳐 삼론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삼론을 중심으로 삼론종이. 성립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삼론 교학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육 세기 기장은. 삼론의 대가로 삼론연의. 중관론소 같은 방대한 추석서를. 저소했습니다 그는 나가르주나의 사고 부정 논리를 이제 삼. 시로 재해석했습니다. 질리에는 층이가 있고 집착을 단계적으로 끊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삼로는 일찍부터 받아들여졌습니다. 고구려의 승랑은 중국에. 가서 삼론 교학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길장으로 이어지면서 중국. 삼론종의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해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쇼터쿠 태자에 스승이 되었습니다. 백제 해관은 일본 3농종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신라의 원유도 삼농 종류를 저술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의. 가장 큰. 영향은 역시 티베트에 있었습니다. 팔세기 티베트에 불교가 전례된 이후 인도에서 온 학생들이 나가르주나의 저작들을 티베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중간 사상은 티베트 불교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1. 세기 아티샤가 티베트에 왔을 때 그는 월층의 중간 해석을. 가져왔습니다. 14세기 종가파는 아티시아의 전통을. 계승하여 티베트 불교를 재정비했습니다. 그가 창시한 갤룩파는 월층에 귀륜 온증파를. 정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승려들은 반드시 중놈과 입중론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모든 학파 곧 닉마파. 카교파 사키파 갤루파는 나가르주나의 중간 사상을. 공부합니다. 승려들은 수년간 중로를 잃고 암송하고 토론합니다 현재 달라이라마. 14세는 나가르주나를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나가르주나는 단순한 과거의 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는 전통의 일부입니다. 20세기 들어나가르주나는 서양에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13년 러시아의. 불교학자 스체르바츠코이가 나가르주나를 칸트에 비유했습니다. 둘 다. 인식의 한계를 탐구했다는 것입니다. 1950년대 이후 서양. 학자들은 나가르주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놀랐습니다 2000년 전에 인도 승려가 20세기. 서양 철학자들이 고민하던 문제를 이미 다루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나가르주나는 이미 언어가 실체를 포착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의 이분법을 넘어서려 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미 있다 없다를 모두. 부정했습니다.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하게 해체를 시도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이미 모든 실체론을 해체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나가르주나를 2000년 전에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렀습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가르주나는 확실성에 대한. 집착 실체에 대한 믿음. 이분법적 사고를 모두 해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 철학이. 시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나가루주나는 세계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인도 철학 수업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수업에서도 그의 논쟁이 다뤄집니다. 비교 철학 연구에서 나가로주나는 필수 주제입니다. 양자 역학의 철학적 함의를 논할 때도 나가르주나가 언급됩니다. 관찰과 관찰 대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양자 역학의 세계관이.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 자신에게 이 모든 명성은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는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공을 이해하면 집착이 사라집니다. 집착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충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