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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0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18,23-28
복 음 : 요한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 늦은 봄이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성당 마당에서 재미있게 노는데,
한 친구가 “눈 온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음덩어리인 우박이었습니다.
눈인 줄 알고 맞았다가 따끔하고 아파서 얼른 우박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금세 그쳤지만, 우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박으로 농산물 피해가 크고, 단단한 차에도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습니까?
그때 우박의 크기가 훨씬 컸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따끔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 봅니다. 눈 대신 매번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음이 정말로 다행스럽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불평불만만을 늘어놓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불만 거리만 찾고 있으며, 이런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본당 신부를 하다 보니 완전히 초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의욕이 넘쳐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형편없는 강론도 잘 들어주시는 것 역시 감사합니다.
주일 미사에 충실히 나와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신나게 떠들면서도 성가를 힘차게 부르는 어린이들,
공부할 것이 그렇게 많은데도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는 청소년들,
할 일이 많은데도 열심히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
세상의 힘듦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신자들…. 모두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 제가 얼마나 행복한 본당 신부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감사할 일을 찾는 데 집중한다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고 감사할 일을 주시는 주님임을 받아들여야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 안에서 우리는 계속 주님께 청할 수 있고,
또 이런 믿음으로 청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이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함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 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별히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 16,24)라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이 말씀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네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네 개의 동사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선재하셨으며, 하느님이시라는 것,
곧 자신이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세상에 왔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인간화(육화), 곧 강생은 ‘보내심을 받아’ 오시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셨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세상을 떠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음을 말해줍니다.
넷째,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구원의 역사가 마쳐졌다는 것이요, 하늘로 돌아가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시어
당신 백성을 위해 대신 기도해주신다는 것이요(로마 8,34; 히브 7,25),
당신 자신이 다시 오실 그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신의 기원과 목적지를 밝혀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원과 사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단지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인격을 통하여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심을 밝혀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드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27)
이 모든 것이 먼저 베푸신 당신의 하염없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 하염없는 사랑에 우리도 하염없는 감사로 기도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하염없는 사랑이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도록 자신을 하염없이 내어놓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명제를 의심하면서 사유하였습니다.
그러다 의심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명제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입니다.
지난번 성지순례를 갔다 오면서
늘 입고 다니던 옷이 낡아져서 더 이상 입기가 어려웠습니다.
해외여행 중에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권, 핸드폰, 지갑’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권’입니다.
여권이 없으면 함께 이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탑승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옷이 찢어지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권을 보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깨에 메는 가방에 보관합니다.
여자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옷에 보관합니다. 주로 남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여권은 늘 입고 다니는 옷의 안 주머니에 보관하였습니다.
순례 중에도 여권을 보관하는 옷 생각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생각’이란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입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애주가는 ‘술’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뻐서 한잔, 우울해서 한잔, 비가 와서 한잔, 경치가 좋아서 한잔을 떠올립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거나 해결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잡은 고기에게는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하고 결혼하면 사랑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생각이 덜 나기 마련입니다.
저도 아마존에서 여행에 필요한 ‘옷’을 구매했습니다.
여권을 보관할 옷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주가들도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더 이상 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할 정도로 마시면 며칠 동안 술을 가까지 하지 않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가 있었고, 미사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와 생각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라면 기도는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생각은 내가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나의 전구로, 타인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의 만족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나의 욕망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생명을 살리는 ‘우유’가 됩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저도 그릇된 생각 때문에 위험을 자초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죄’가 되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하였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해 주셨고, 모두가 건강하게 순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는 반항하던 유다인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쪽 벽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흩어졌고, 1년에 한 번 무너진 성전의 한 쪽 벽에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2000년이 지나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한 지 7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유다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면 ‘하느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폴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번 순례의 여정에도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난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성가 봉사를 해 주었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부축해 드렸습니다.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도 필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26절)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영적인 사람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분과 일치하여 그 이름에 걸맞은 청을 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이 큰가? 교회가 더 큰가?
박재찬 안셀모 신부
“세상이 큰가? 교회가 더 큰가?”
제가 신학생 때 가졌던 의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교회를 세우셨기에 교회가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말을 좋아해서 외적인 것 보다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무시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생각이 미숙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교회, 육신과 영혼 등의 이원론적인 사고를 벗어나,
모든 것의 주인이요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 주시는 주님과 하나되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합시다.
찬미 예수님!
예전에 토론토 교우들과 성지순례에 다녀온 다음
어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신부님, 순례 다녀와서 보니 일상이 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문제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이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때,
세상과 교회 사이의 이원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100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사상, 유대 문학,
원시 그리스도교 사상과 바오로의 신학,
그리고 필로의 철학 등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과 소ㄱ, 교회와 세상, 영혼과 육신 등에 관한
이원론적인 사고가 스며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마치 세상에 속하는 것과
예수님께 속한 것이 충돌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뽑힌 우리들은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을 거부하고
박해를 견뎌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속된 것도, 거부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거룩한 하느님을 발견하고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속적인 것들, 교회를 박해하는 정치적인 세력들,
혹은 영적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심과 욕망”들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는 분명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에
걸림돌이 되거나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 안에 있는 이런 문제들에 직면하셨고,
이 문제를 인간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늘의 방식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박해를 받으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방식의 문제 해결은 ’눈앞에 보이는 생존‘이 아니라,
’온 인류와 우주 만물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께서 사랑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사랑을 택하게 될 때,
내면으로부터 혹은 외부로부터 박해와 오해와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극복하라는 가르침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 갈 때,
모든 경계가 무너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경계, 나와 너의 경계, 교회와 세상의 경계,
거룩함과 속됨의 경계,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마저도 무너지고,
오늘 나와 너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여기에서 나누는 사랑이
진정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말은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말고
내적인 것에 더 마음을 쓰라는 말이지 외적인 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셨겠습니까?
왜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만드셨겠습니까?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모든 것들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임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던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 계십니다.
어두운 밤처럼 절망 속에서 하느님께서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 듯할 때,
명상의 집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며 지금의 어둔 밤 역시
우리가 내가 아는 하느님을 넘어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고
묵묵히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주님께서는 침묵의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가장 크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날,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 100% 보장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의 죽음이 초래할 세상의 기쁨과 제자들의 슬픔이
부활이라는 뜻밖의 사건으로 완전히 뒤 바뀌어 질 대역전극이 예고된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올 제자들의 기쁨은 성령의 강림으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되었다.
성령 하느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속성을 보장해 주실 분이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에
성령께서 보호자로 그리고 진리를 일깨워주시는 자로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청함‘과 ’얻음‘에 대하여 하신 말씀으로 시작된다.
청함과 얻음에 대한 말씀은 2차 고별사 중에 이미 한 번 있었다.
처음은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마무리하시던 즈음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고 하신 말씀이다.(15,16)
정말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면 다 받아들여지는가?
딱 잘라 말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청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데는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세상에 나가 섞지 않고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 것,
즉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며(13,34; 15,16-17),
동시에 그 행동으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수용되는 조건은
곧 구체적인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며,
나아가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곧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 直航路가 개설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떤 길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바로 그 직항로의 길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시적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신다.
그러나 세상의 배경에 비가시적으로 머물러 계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 하느님, 그리고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더 밝아졌고 따뜻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슴이 더 이상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명확해졌으며,
보호자이시고 진리이신 성령의 약속도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의 충만한 기쁨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구하는
모든 것 안에 경험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장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높은 이름이 되었다.
이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은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셨으며,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께는 기쁨과 영광이 되며,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된다.
그 안에서 우리의 기쁨도 충만히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人間性을 수용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居處를 마련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름 아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궁전을 마련하셨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예수님 안에 이루신 肉化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지려 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그분 자체가 되시는 것과 같다.
이제 인간의 모든 정신과 영혼과 육체의 원동력은 하느님 성령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신비스러운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나아가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아버지께서 친히 그대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릴리안 수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듯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청하라고...너희를 사랑한다고...
나에게 의지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자비를 허락하시고
재림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하면 과연 들어주실까 하는 의심과
예수님을 이제는 내 눈앞에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은 근심과 걱정이 사로잡히지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한발 한발 그분께로 내딛는다면
어느새 내가 청했던 선한 지향에 있는 곳에
데려다 놓아주실 것입니다.
[출처] 요한 16,23ㄴ-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