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후 서울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23일이 걸렸다.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32일이 걸렸고, 북경에 42일 동안 머물렀다.
돌아올 때에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8일이 걸리고, 의주에서 서울까지 13일이 걸렸다. 왕복한 것이 도합 138일이요,
이역(異域)에 있었던 것이 101일이다. 이수(里數)로는 왕복을 모두 계산하여 대략 6000여 리가 되고 지은 시가 392수이다.
압록강을 건넌 후에 이틀을 노숙하고, 책문(柵門)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참(站)에서 잤다. 그 참은 모두 30개인데 각 참마다 각각 찰원(察院) 하나씩을 설치하였으니 우리나라 사신을 거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朝鮮), 유원(柔遠) 등의 관명(館名)을 붙였던 것이다. 그 30참이란 봉황성(鳳凰城), 송참(松站), 통원보(通遠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 낭자산(狼子山), 요동(遼東), 십리보(十里堡), 심양(瀋陽), 변성(邊城), 주류하(周流河), 백기보(白旗堡), 이도정(二道井), 소흑산(小黑山), 광녕(廣寧), 십삼산(十三山), 소릉하(小凌河), 고교보(高橋堡), 영원위(寧遠衛), 동관역(東關驛), 양수하(兩水河), 산해관(山海關), 무령현(撫寧縣), 영평부(永平府), 사하역(沙河驛), 풍윤현(豐潤縣), 옥전현(玉田縣), 계주(薊州), 삼하현(三河縣), 통주(通州)이다.
찰원은 거의 모두가 퇴폐했기 때문에 전부터도 늘 사가(私家)를 빌려서 자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낮이나 저녁이나 한 곳에서 머물면 그 집에 반드시 세를 내야 하는데 그것을 방전(房錢)이라고 한다. 이것을 종이나 부채 등 각종 물건으로 주었는데, 심술꾼들이 물건을 더 요구해서 혹은 다투는 일이 있는 것도 괴로웠다. 만일 한 참(站)을 지나가려면 반드시 수행하는 여러 호인(胡人)들에게 주선을 청한 뒤에라야 갈 수가 있기 때문에 비용이 꽤 든다.
사람과 말을 대기에 어려울 염려가 있어서 한결같이 본참(本站)을 찾아서 투숙하는 것이 순탄한데 이번에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졸곡(卒哭)을 지내고 떠나느라 날짜가 촉박하여 부득이 변성(邊城)을 지나쳐서 고가자(孤家子)에서 자고, 주류하(周流河)를 지나쳐서 백기보(白旗堡)에서 자고, 이도정(二道井)을 지나쳐서 소흑산(小黑山)에서 자니, 참을 지나친 것이 이틀이나 된다.
무녕(撫寧)에는 찰원이 있기는 하지만 산해관과의 거리가 몹시 멀기 때문에 유관(楡關)에서 자는 것이 이미 근래의 예가 되어 왔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러했다. 돌아올 때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바빠서, 갈 때 건너뛰었던 두 참 이외에 또 첨수참(甛水站)을 건너뛰어서 연산관(連山關)에서 잤으니, 모두 세 참을 건너뛴 셈이다.
구련성(九連城)에서 봉황성(鳳凰城)까지는 산수가 아름답고 이따금 들이 펼쳐 있다. 봉황성에서 낭산(狼山)에 이르기까지는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은데 여러 번 큰 내를 건넜고, 냉정(冷井) 10여 리를 지나서야 요동 평야가 나왔고, 여기서 400여 리를 더 가서야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북경에 가기까지는 비록 나지막한 언덕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이것은 모두 평야이므로 다시 높은 고갯길을 넘지 않았다. 연도(沿道)에서 가까운 산으로는 구련성의 송골산(松鶻山), 봉황성의 봉황산(鳳凰山), 광녕(廣寧)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십삼산(十三山), 산해관의 각산(角山), 계주(薊州)의 공동산(崆峒山), 반룡산(盤龍山)이다. 이 일곱 산은 모두 돌산이며, 연도에서 먼 산으로는 창려현(昌黎縣)의 문필봉(文筆峯)과 요동의 천산(千山)이 가장 기이하게 빼어났다. 그리고 서북쪽의 만리장성 일대에도 역시 기이한 봉우리가 많다.
물은 요동의 태자하(太子河)와 심양(瀋陽)의 혼하(混河), 요하(遼河)와 금주위(錦州衛)의 대릉하(大凌河)ㆍ소릉하(小凌河)와 무령현(撫寧縣)의 양하(羊河)와 영평부(永平府)의 청룡하(靑龍河), 난하(灤河)와 풍윤현(豐潤縣)의 환향하(還香河)와 계주(薊州)의 어양하(漁陽河)와 삼하현(三河縣)의 호타하(滹沱河)와 통주(通州)의 백하(白河)인데, 모두 배가 있다. 조그만 개천으로서 하(河)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역시 곳곳에 있는데, 옛날에 이른바 북쪽 지방에 흐르는 물의 총칭이라 한 것이 사실이다. 백하와 요하가 가장 커서 거의 우리나라 임진강과 같고, 그 나머지 10개 물은 저탄(猪灘)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북경성(北京城)의 둘레는 40리이고, 남쪽 가의 겹성[重城]은 둘레가 28리이다. 통주성(通州城)의 둘레는 8, 9리가 되고, 서쪽에 겹성이 있다. 계주성(薊州城)과 영평부성(永平府城)은 모두 둘레가 8, 9리나 되고, 나성(羅城 성의 외곽(外廓))이 없다. 금주위성(錦州衛城)은 둘레가 8리인데 동쪽에 나성이 있고, 영원위(寧遠衛)에는 내성(內城), 외성(外城)이 있는데 둘레가 8리이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가 7리쯤 되고 동서에 나성이 있다. 심양(瀋陽)에는 내외성(內外城)이 있는데 외성은 토성이고 내성은 둘레가 8리이다. 중우소(中右所), 중후소(中後所), 전둔위(前屯衛), 중전소(中前所) 등에 있는 성 둘레는 금주위성과 서로 비슷하다. 모든 성들은 벽돌로 쌓았는데 높이는 3장 이상이며, 산해관이 가장 웅장하다. 무령현(撫寧縣), 옥전현(玉田縣), 풍윤현(豐潤縣), 삼하현(三河縣) 및 여러 역보(驛堡)에도 모두 성이 있는데, 3장 이하인 것은 없다. 현(縣) 이상의 성에는 모두 십자가루(十字街樓)가 있어 2층 처마 혹은 3층 처마로 되었으며 푸른빛과 금빛이 공중에서 번쩍거렸다.
요동, 심양 이후로는 길가에 연대(煙臺)가 많다. 연대의 제도는 모가 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한데, 모가 난 것은 한쪽 면이 3장이 넘고, 둥근 것은 주위가 19아름쯤, 높이가 5장 이상이 된다. 벽돌로 회를 섞어서 쌓았는데 사면이 깎아 놓은 것 같다. 3분의 2 가까이 올라가면 앞뒤로 두 문이 있는데 겨우 사람이 출입할 만하고, 거기를 오르내리는 데는 반드시 성벽을 오르는 긴 사다리를 써야 한다. 대(臺) 위에는 층대(層臺) 하나가 있는데 높이가 반 길이나 된다. 이것은 장령(將領)이 앉는 곳이다. 위아래 대에는 모두 타첩(垜堞)이 있다. 가까우면 5리, 멀면 10리만큼씩 바둑처럼 놓여 있어 서로 바라다보게 되는데, 한 대에 백 명이 지키고 일이 있으면 포(砲)를 쏘아서 서로 알린다. 이것은 처음에 척계광(戚繼光)이 만든 것으로서 그 뜻이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허물어진 곳이 많다.
북경 궁궐의 제도는 태화전(太和殿) 앞에 다섯 중문(重門)이 있는데, 첫째는 태화문(太和門)이요, 둘째는 오문(午門)으로 오봉문(五鳳門)이라고도 한다. 셋째는 단문(端門)이요, 넷째는 천안문(天安門)이요, 다섯째는 태청문(太淸門)이다. 문밖 수백 보쯤 되는 곳에 정양문(正陽門)이 있으니, 이것이 성문이다. 태화문에서부터 정양문까지는 그 곧기가 마치 줄자와 같아서 문을 열면 안팎이 훤하고 하나도 굽은 곳이 없다. 태청문 안에 있는 좌우 월랑(月廊)은 각각 백여 칸이나 되고, 천안문 안의 좌우 월랑은 각각 22칸이다. 중간에 각각 문이 있는데, 왼쪽으로 종묘(宗廟)에 통하는 것은 묘가문(廟街門)이라 하고, 오른쪽으로 사직(社稷)에 통하는 것은 사가문(社街門)이라고 한다. 단문(端門) 안의 좌우 월랑은 각각 40여 칸인데 북쪽 머리 쪽에 두 문이 있어 왼쪽이 궐좌문(闕左門), 오른쪽이 궐우문(闕右門)이며, 남쪽 머리 두 문은 오른쪽이 사좌문(社左門), 왼쪽이 신주문(神廚門)이다.
북경의 궁궐은 영락(永樂) 때에 세운 것으로, 갑신년에 이자성(李自成)의 난리에 불탔지만, 그 뒤에 많이 중수하여 제도는 모두 옛것 그대로이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정제된 것이 참으로 제왕(帝王)의 거처답다. 오문(午門)의 제도는 성의 높이가 4장이나 되고, 동서로 60보가 되는 가운데에 세 홍예문(虹霓門)이 있는데, 문루(門樓)는 모두 2층, 9칸이다. 문 좌우에서 성이 꺾여 남쪽으로 각각 60보씩 나갔는데, 성이 꺾인 곳이나 끝난 곳에는 모두 3층으로 된 십자각(十字閣)이 대치(對峙)하고 있으니, 이것이 곧 궐문이다. 문루와 십자각 사이에 각(閣)이 있어 서로 닿아 있는데, 모두 누런 기와로 이었고, 십자각에는 금칠을 한 지붕을 위에 얹어서 빛이 유난히 찬란하다. 일찍이 듣건대, 이것은 금이 아니고, 바로 풍마동(風磨銅)인데 외국산으로 금보다 귀하며, 바람을 맞으면 더욱 빛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각(閣)의 제도는 기이하고 교묘하여 그림과 같다. 단문(端門)과 천안문(天安門)의 문루도 2층 9칸인데 태청문만이 유독 단층이다. 이 세 문은 모두 닫아 두고 오직 황제만이 출입한다. 천안문, 태청문 사이의 좌우에는 서장안문(西長安門), 동장안문(東長安門) 두 문이 있는데, 이것은 백관(百官)이 통행하는 문이다. 동장안문의 기둥과 난간은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태청문 안으로부터는 모두 벽돌을 깔았으나 모두 모로 세워서 울퉁불통하므로 다니기가 어렵다.
시가는 북경 정양문(正陽門) 밖이 가장 번창하고 고루가(鼓樓街)
궁성 북쪽에 있다. 가 그 다음이다. 통주(通州)와 북경은 서로 비슷하고, 심양과 산해관이 또 그 다음이다. 거마가 밀리고 온갖 물건이 풍부한 것은 이 두 곳이 같다. 사녀(士女)들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은 산해관이 제일이고 영평부(永平府)가 그 다음이며, 무령현(撫寧縣), 풍윤현(豐潤縣), 옥전현(玉田縣)이 또 그 다음이다. 그런데 대체로 시루(市樓)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역시 북경이 제일이다. 시가지 상점마다 목판(木板)을 달거나 세우고, 더러는 융으로 현수막을 쳐서 좋은 이름으로 아무 누[某樓], 아무 사[某肆], 아무 포[某鋪]라 했다. 그리고 날마다 쓰는 음식, 서화(書畫), 기완(器玩)에서 백공(百工) 천기(賤技)에 이르기까지 모두 벌여 놓고 팔지 않는 것이 없다. 희고 굵은 베로 상점 앞에 가로 치기도 하고, 깃대를 내세우고서 무슨 물건을 판다고 크게 써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핏 보아도 바로 알 수 있게 해 놓고는 꼭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는데, 술에 난릉춘(蘭陵春), 차에 건계명(建溪茗)이라고 하는 따위이다.
공가(公家)나 사가(私家)는 대개 남향으로 지은 것이 많고, 비록 하층민의 초가일지라도 모두 오량(五樑)으로 지었는데, 들보가 긴 것은 20여 척이나 되고 작은 것도 14, 5척은 되었다. 그중에 큰 집은 7량, 9량이 되는 것도 있고, 더러 들보가 없는 집도 있는데 칸살이 많고 적은 것을 불문하고 모두 일자로 되어 굽었거나 잇대는 제도가 없다. 전면 중앙에는 문을 내고 좌우에는 창을 냈다. 동쪽, 서쪽, 북쪽 세 면에는 모두 담을 쌓았고, 북쪽 담 한가운데에 문을 내어 남쪽 문과 서로 곧게 통하도록 해서 사람이 왕래하게 하였다. 앞뒤 문의 중간이 곧 정당(正堂)이요, 정당 좌우에 각각 문이 있는데 그 안이 곧 방이다. 방 안에는 창을 달고 온돌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걸터앉을 만하고, 길이는 1칸이나 되며, 넓이는 누울 수는 있지만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다. 온돌 밖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는데, 가난한 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부엌이 방 안에 있는데, 모두 솥을 걸어서 밥 짓는 연기가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괴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항상 습관이 돼서 그렇다.
문의 지도리는 모두 나무를 썼고 문에는 쇠고리가 없이 나무를 문 중앙에 붙여서 그 안으로 구멍을 뚫어 놓았다. 문을 닫으려면 그 구멍에 나무를 꽂고 열려면 그것을 뽑는다. 창을 모두 안으로 향하게 해서 안에서 여닫도록 만들고 밖에다가 종이를 발랐다. 동팔참(東八站)이나 요동 등 많은 상점은 우리나라 백지로 발랐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가까워서 사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를 지나면 제일 얇은 당지(唐紙)로 발랐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장지(壯紙)로 창을 발라도 오래되면 찢어지는 것을 면치 못해서 구멍이 많은데, 여기서는 당지(唐紙)나 우리나라 종이 할 것 없이 가장 얇은 것으로 발랐다. 연기에 그을은 정도로 보아 그것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도, 조금도 구멍이 뚫린 데가 없다. 게다가 당지로 벽을 발랐어도 전혀 주름진 데가 없으니, 그 마음씀이 정세(精細)한 것은 우리나라가 따라갈 수 없다.
지붕에 기와를 올린 것은, 궁전, 관청 및 사관(寺觀)에만 암키와와 수키와를 썼다. 사가(私家)에서는 수키와는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암키와만 쓰게 했으며, 공후(公侯)와 부마(駙馬)의 집은 암키와와 수키와를 쓰도록 허락했다. 집 대마루는 모두 벽돌로 했고, 집 용마루도 역시 벽돌로 했는데, 모두 아로새기고서 푸른 채색을 하기도 했다. 벽의 두께는 한 자가 넘는데 벽돌에 회를 섞어서 쌓고 혹은 흙벽돌로 쌓고서 겉에만 석회를 발랐다. 기와와 기와가 잇닿는 곳은 역시 모두 석회를 써서 참새와 쥐가 뚫지 못하게 했다. 가는 곳마다 참새와 쥐를 보기 힘들었는데, 또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봉황성에서부터 주류하(周流河)에 이르기까지는 초가가 많고, 주류하로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土屋)이 많다. 토옥이 있으면서부터는 이따금 기와집은 있어도 초가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이것은 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초가집 위에는 흙으로 평평하게 발라서 비가 새지 않게 했는데 풀이 그 위에 자랐다. 혹 석회로 바른 곳도 있다. 초가를 덮은 띠[茅]는 모두 엮지 않고 다만 다발로 묶어서 마치 생선 비늘처럼 덮었는데 그 두께는 한 자 남짓하고 집 용마루는 진흙으로 이음새를 발랐다.
북경성 안의 모든 거리와 궁벽한 골목 좌우에는 모두 하수도를 파 놓아서 온 성안의 낙숫물이나 빗물이 모두 여기로 들어가 옥하(玉河)로 모여 성 밖으로 나가도록 하고 성안에서는 또 거위, 오리, 양, 돼지 같은 것을 먹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성안에는 도랑도 없고, 오물도 없다.
인가에는 변소가 없고 대소변을 모두 그릇에 받아서 버린다. 성안의 궁벽한 거리에는 가다가다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인가에서 분뇨를 버리는 곳이다. 이것이 차면 실어서 밭으로 쳐낸다. 그 변 그릇은 요강 같거나 술 담는 그릇과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보면 술그릇으로 알고 들이마신다. 호인(胡人)도 역시 우리나라 요강을 가져다가 밥그릇으로 썼다니 참으로 똑같은 일이다.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화상(畫像)을 모시고 조석으로 향을 피운다. 상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관제묘(關帝廟)에는 반드시 부처를 모시고, 절에서도 반드시 관제를 모셔서 승려들도 한결같이 이를 받든다.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절이 있고, 절에는 묘(廟)가 있다. 요양, 심양, 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고, 북경에 이르면 성 안팎에 사관(寺觀)이 거의 인가의 3분의 1은 된다. 다만 한 절에 사는 승려가 아무리 큰 절이라도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도사(道士)는 더욱 적다. 그 중들은 모두 글을 알지 못하여 완고하고 무뚝뚝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중으로서 수양하거나 근신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검거나 누런 빛깔의 긴 옷을 입는데, 머리에는 검은 모자를 써서 그 모양이 마치 우리나라의 침모(寢帽)와 같으면서도 모서리가 뾰족하다.
호인(胡人)들이 보통 때에 입는 것은 모두 검은 옷으로서 귀천의 구별이 없다. 조복(朝服)은 피견(披肩), 접수(接袖), 마척흉(馬踢胸) 등의 이름이 있다. 그 모자의 정자(頂子)와 대판(帶版), 좌석(坐席) 및 보복(補服)은 각각 품급(品級)에 따라서 같지 않다. 대개 모자의 정자는
홍석(紅石)을 단 것이 제일 높고, 그 다음은 남색 석영이요, 그 다음은 소남석(小藍石)이요, 그 다음은 수정이요, 아무것도 물리지 않은 것이 가장 아래가 된다. 대판은 옥이 제일 귀하고, 그 다음은 기화금(起花金)이요, 그 다음은 소금(素金)이요, 그 다음은 양각(羊角)이 최하가 된다. 좌석은 머리와 발톱이 있는 호피(虎皮)를 귀하게 여기고, 그 다음은 머리와 발톱이 없는 호피요, 그 다음은 이리요, 그 다음은 너구리요, 그 다음은 오소리요, 그 다음은 들양이요, 그 다음은 포효[狍]요, 그 다음은 흰 융[氈]인데 최하가 된다. 여름에는 3품 이상은 붉은 융을, 4품 이하는 모두 흰 융을 쓴다고 한다.
보복은 문관은 새, 무관은 짐승으로 하여 모두 명 나라 제도를 따랐다. 속옷은 그 길이가 복사뼈까지 오고,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넓다. 겉옷은 그 길이가 허리에 닿고 두 소매는 팔꿈치에 닿는데, 이것을 접수(接袖)라고 한다. 둥글게 만든 비단 모자에 정자(頂子)를 꿰어서 어깨 앞뒤에 올려 놓아 깃을 가리는 것을 피견(披肩)이라고 한다. 피견과 겉옷과 속옷은 모두 검은 것으로 하는데 거기에 네 발톱이 있는 구렁이[蟒]를 수놓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보복은 겉에 있게 하고 띠는 속에 있게 한다. 4품 이상의 문무관이라야 비로소 구슬 약간을 단 마척흉(馬踢胸)을 걸치는데, 마척흉은 그 제도를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복색들은 비록 중화의 제도는 아니라도 그 귀천과 품급이 역시 뚜렷하여 문란하지 않다.
관원의 행차에는 말 탄 사람 하나가 좌석을 가지고 앞에 간다. 대개 좌석을 가지고 그 품급의 고하를 구별하기 때문이다. 대소 인원이 황자(皇子)를 만나면 모두 말에서 내리는데 각로(閣老) 이하는 그렇지 않다. 벼슬이 높은 자는 모두 교자(轎子)를 타는데 청인(淸人)은 교자를 타지 못한다. 교자의 제도는 안을 2층으로 만들어 우리나라의 초거(軺車)와 같아 걸터앉도록 되어 있고, 밖에는 검은 휘장을 드리워서 우리나라의 옥교(屋轎)와 같다. 길을 인도하는 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인도한다.
남자의 의복은 부자로 사치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포(大布)를 쓴다. 비록 북경이라고 해도 역시 그러하다. 여자의 의복은 가난한 자 이외에는 모두 비단을 입는데, 아무리 궁촌(窮村)이라도 역시 그러하다. 여자는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머리털을 묶어 상투를 만들고 이것을 검은 비단 등으로 싼다. 그리고 관자놀이에는 깁을 입힌 옥판(玉版)을 붙이고 분칠을 하고 꽃을 꽂는다. 그런데 그 남편은 의복이 떨어지고 얼굴이 누추하여 언뜻 보면 여자의 종으로 안다.
모든 크고 작은 역사(役事)는 모두 남자가 맡아 한다. 수레를 끌고, 밭을 갈고, 나무를 지는 일 외에도 물을 긷고, 쌀을 찧고, 곡식을 심는 일로부터 옷감을 짜고, 옷을 짓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자가 한다. 여자는 문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여자가 하는 일이란 신 바닥을 꿰매는 일뿐이다. 촌 여자는 곡식을 까불고 밥 짓는 등의 일을 하기도 한다. 상점에는 절대로 여자가 왕래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여자는 대체로 사람을 피해, 우리들이 상점에 들어가면 갑자기 피해서 숨는 자가 많다. 그러나 역졸(驛卒)들은 피하지 않고 심지어 함께 섞여 앉아서 담배도 피우고 무릎을 마주 대고 손을 잡아도 꺼리지 않으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남자가 착용하는 호모(胡帽)와 갖옷은, 부유한 사람은 초피(貂皮)를 쓰고 그 다음은 염소와 양, 그 밖의 여러 짐승의 가죽을 쓴다. 그러나 개가죽은 쓰지 않는다. 대체로 갖옷을 입을 때는 털이 겉으로 가도록 한다. 남녀의 의복은 고급스럽거나 검소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검은빛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인(漢人) 여자들은 다 그렇지가 않아서 푸르고 붉은 바지를 입은 자가 많다. 남녀의 옷은 모두 옷깃이 없고, 겉옷이나 속옷에 옷고름이 없다. 모두 조그만 단추를 무수히 달아 놓아서 옷을 벗기가 몹시 어렵다. 호인(胡人)이나 한인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모두 호모, 호복(胡服)을 착용한다. 그런데 화본(畫本)을 보면 비록 근래의 인물이라고 해도 관모(冠帽)가 모두 한 나라 제도를 따랐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비록 부득이해서 당시의 제도를 따르기는 하지만 실제로 마음으로는 불만스러워 함을 알 수 있다.
남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혜(鞋)나 화(靴)를 신는다. 비록 수레를 끄는 자라고 할지라도 역시 그러하다. 그 신들은 모두 포백(布帛)으로 만들었고, 가죽으로 만든 것은 없으며, 미투리나 짚신도 없다. 봉황성, 심양 사이에서는 더러 가죽 버선을 신었는데, 이것은 곧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다로기[月吾其]이다. 호녀(胡女)는 발을 동여매지 않고 신을 신기도 한다. 비록 두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도 또한 모두 버선을 신고 혜나 화를 신어서 다리를 내놓는 자가 없다. 그들이 옷을 입고 띠를 묶고 호모(胡帽)를 쓴 것이 어른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얼굴을 보고 어른과 어린이를 구별한다. 어린아이로서 앉거나 서지 못하는 자는 으레 큰 바구니에 담고, 바구니 밑에는 포대기를 깔고 끈을 매서 대들보에 걸어 놓고 마치 그네를 태우듯이 좌우로 흔들어 주어 어린애가 좋아서 울음을 그치게 한다. 대소변을 싸면 꺼내어 씻어 주고, 다시 딴 포대기로 바꾸어 담는다. 그리고 종일토록 쉬지 않고 흔들어 준다.
남자는 어깨에 메기는 해도 등에 지지는 않는다. 기다란 나무 하나의 양쪽 끝에 물건을 달고 어깨에 멘다. 이것을 ‘편담(扁擔)’이라고 하는데 담(擔) 하나의 무게는 100근이나 된다. 물이나 나무를 운반하는 데 모두 이 방법을 쓴다. 먼 길을 가는 자는 행장과 침구(寢具)를 말아서 한 가닥으로 만들어 어깨에 메고 가는데 무게를 느끼게 되면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옮긴다. 비록 천 리의 먼 길을 가더라도 역시 이와 같이 한다. 대체로 물건은 어깨로 메고 등에 지지 않는다.
큰 수레는 말 다섯 필이 끌고 어떤 것은 말 8, 9필이 끌기도 하며, 작은 수레는 말이나 소 한 마리가 끌 뿐이다. 그리고 수레바퀴는 모두 바퀴살이 없고 다만 나무를 꿰어 하나는 세로로 하고 2개는 가로로 한다. 세로로 한 것을 바퀴통[轂]으로 하는데, 그 구멍을 네모지게 하여 바퀴와 굴대가 함께 돌게 한다. 바퀴는 철판으로 싸고 주위에는 못을 박아서 달아 해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몽고의 수레 제도도 우리나라와 꼭 같은데, 조금 가볍고 얇다. 또 독륜거(獨輪車)라는 것이 있는데, 한 사람이 뒤에서 밀면 100여 근이라도 넉넉히 싣는다. 인분을 싣는 데는 모두 이 수레를 쓰고,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싣고 가는 자도 모두 이 수레를 쓴다. 수레는 북경 시중에 가장 많다. 수레를 끄는 데는 반드시 말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모두 노새를 쓴다. 이것은 노새가 힘이 세기 때문이다. 수레를 모는 자는 한 길이 넘는 채찍을 쥐고 수레 위에 앉아서 채찍을 힘껏 쓰지 않는데도 모든 말들이 일제히 힘을 내어 수레가 나는 듯이 간다.
납작하고 둥근 큰 돌을 땅 위에 놓고 그 중앙에 나무 기둥 하나를 꽂는다. 그리고 두어 자쯤 되는 크고 둥근 돌을 그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나무로 꿰어서 활기(活機)를 만든다. 그리하여 그 한쪽 머리는 기둥에 매고 한쪽 머리는 나귀에 매고 돌린다. 이것이 연자방아인데 집집마다 있다. 조를 방아질해서 좁쌀을 만들고 또 메밀도 방아질한다. 이 밖에 또 맷돌이 있다. 그 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은데, 다 나귀를 부려서 맷돌을 돌린다. 나귀로 맷돌질을 할 때는 모두 나귀의 눈을 가리는데 나귀가 눈을 놀려 사방을 보느라 굴리는 것을 잊을까 해서이다. 사람이 채찍을 가지고 있으면 종일토록 그 도는 것을 쉬지 않는다. 또한 말이나 소로 맷돌을 돌리는 자가 있는데 이 역시 그 눈을 가렸다.
나귀는 동팔참(東八站)과 금주위(錦州衛)에 가장 많아서 관내(關內)에 있는 사람이 많이 여기에 와서 나귀를 사 간다. 나귀는 일이 가장 많아서 사람이 타고 다니는 일 외에도 땔나무를 싣고 물을 싣고 연자와 맷돌을 돌릴 때에 모두 나귀를 쓴다. 심지어는 소를 대신해서 밭을 갈기도 한다. 밭 가는 방법은 관내(關內)에는 농기(農器)가 간편해서 노새나 사람이 끌기도 하여 거의 소를 쓰지 않지만 관외(關外)는 소만을 쓴다. 요동에서는 소 두 마리를 한꺼번에 쓴다. 농기의 제도는 역시 우리나라 산골에서 쓰는 것과 같다. 이것은 어쩌면 고려의 옛 풍속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소의 몸집은 작은데, 뿔은 길고 굽어서 앞으로 향해 있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 소와 같지 않다. 또 코를 꿰지 않고 다만 노끈으로 두 뿔을 얽어맸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말 머리를 얽어매고 소의 코를 꿰는 것은 사람이다.”
라고 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소의 코를 꿰는 것은 실상 옛 풍속을 따른 것인데, 연중(燕中)에서는 코를 꿰지 않으니, 호속(胡俗)이어서 그런 것인가?
낙타는 본래 사막에서 난다. 이것은 능히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가기 때문에 기르는 자가 많다. 그 모양은 키가 한 길이나 되고 몸은 파리하고 머리는 작고 목이 가늘고 아래로 굽었는데 걸을 때는 걸음을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머리는 양과 같고 발은 소와 같은데 발굽은 얇고 작아서 털 속에 있다. 등에 2개의 혹이 있어서 저절로 안장 모양을 이루는데, 앞의 혹에는 털이 있어 흩어져 드리운 것이 마치 말에 갈기가 있는 것과 같다. 그 혹은 낙타가 살찌면 딱딱하게 일어서고 파리하면 물렁물렁하게 쭈그러들기 때문에 항상 소금을 먹인다. 소금을 먹이면 살찐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코로 누런 물을 뿜는데 누린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새끼로 코를 꿰어 그렇게 못하게 한다. 그 힘은 말 세 필이 싣는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 소리는 소와 비슷하게 운다. 성질이 바람을 좋아해서, 바람이 불면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응한다. 그 빛깔은 대개 누르고 검으며, 또한 흰 것도 있다. 말도 빛이 흰 것이 열에 여섯, 일곱은 된다. 소는 흰 것도 있고, 회색, 흑색과 얼룩진 것도 있는데, 회색과 백색이 많고 순전히 누런 것은 전혀 없다. 돼지도 역시 흰 것이 많고, 닭은 털과 깃이 희게 얼룩진 것
속명(俗名)으로 구수치(求數雉)라 한다. 이 많고, 누렇거나 붉은 빛은 전혀 볼 수가 없다. 대체로 육축(六畜)은 모두 흰 빛이 많은데, 요동과 연(燕) 지방은 서쪽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양 떼가 매우 많다. 모두 붉은 끈으로 머리와 뿔을 묶었고, 등에는 모두 붉은 점을 찍었는데, 이것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매일 아침이면 시장 점포 곁에 열(列)을 지어 놓는데, 거의 100여 마리나 된다. 머리를 구부리고 발을 나란히 하고 가지런히 서 있어 어지럽지 않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말도 또한 한 조그만 아이가 수백 마리 떼를 몰고 가는데, 끝내 옆으로 달아나거나 어지럽게 달리는 놈이 없다. 호인(胡人)이 금수를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장기이다.
말이 멀리 가는 놈은 비록 하루에 수백 리를 가더라도 도중에 풀이나 콩을 먹이지 않고 자는 곳에 도착해서야 한두 시간 쉰 뒤에 비로소 안장을 끄르고 풀과 콩을 먹인다. 밤이 깊은 뒤에 맑은 물을 먹이고 새벽에 이르러서 또 풀과 콩을 먹인다. 물은 있으면 먹이고 없으면 그대로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가서야 먹인다. 여러 달 동안 잘 먹여서 몹시 살진 놈은 멀리 가더라도 콩을 먹이지 않고 밤마다 긴 풀 한 묶음과 맑은 물만 먹이다가 8, 9일이 지난 뒤에 비로소 콩을 먹인다. 먹이고 기르는 방법이 우리나라보다 간편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요령을 얻은 것이다. 또 추운 계절을 만나면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마의(馬衣)
곧 이른바 삼정(三丁)이다. 로 등을 덮어 주지만, 연중(燕中)에서는 들판이나 마당에 내버려 둔다. 원래 덮어 주는 일이 없으나 그래도 역시 상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은 또 우리나라보다 나은 점이다. 발꿈치에는 쇠를 대지 않는데, 나귀는 쇠를 대기도 하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안장과 고삐의 장식은 구리나 쇠는 드물게 쓴다. 나귀의 등자(鐙子 말을 탔을 때 두 발로 딛는 제구) 같은 것도 대개 나무를 휘어서 만든다. 이것은 구리나 쇠가 귀하기 때문이다. 작두는 날이 얇고 날카로워서 한 사람의 손으로도 능히 꼴을 썰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발로 밟고 손으로 넣어 주기 때문에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연중(燕中)에서는 한 사람이 썰어도 몹시 빨라서 잠깐 썬 것이 산처럼 쌓였으니 이것은 우리나라보다 나은 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말을 타려면 따로 사람을 시켜 끌게 하지만 연중 사람은 이것을 큰 웃음거리로 안다. 어린애들이 말을 탈 때면 사람을 시켜 말을 끌게 하면서
권마성(勸馬聲)을 내는데, ‘고려 고려(高麗高麗)’라고 하면서 간다. 이것은 장난으로 권마성을 내어서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다. 일찍이 옛 그림을 보니, 말을 탄 자가 자기 손으로 말을 몰고 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사람을 시켜 말을 끌게 하는 것은 실상 우리나라 법이다. 자기 스스로 말을 모는 것은 호인(胡人)의 풍속일 뿐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중국 사람 모두가 그러했다.
또 연중 사람은 죄를 다스릴 때에 채찍으로 그 궁둥이나 다리를 때릴 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곤장 치는 걸 보면 몹시 해괴하게 여긴다. 사관(舍館)에 머물던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한 아이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서 스스로 나무 지팡이를 어깨 위로 높이 들어 큰 소리를 치면서 매를 치는 것이 마치 곤장 치는 시늉을 했다. 이것은 대개 그들이 곤장 치는 것을 마음으로 항상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참 우스운 일이다.
개는, 큰 놈은 망아지[駒]만 하여 사슴이나 노루를 잡을 수 있고 작은 놈은 고양이와 같은데 더욱 몸이 가볍고 재빠르다. 호인(胡人)들은 개를 가장 소중히 여겨서 사람과 개가 한방에서 자고, 심지어는 함께 이불을 덮고 눕기도 한다. 도중의 일인데, 한 호인의 집이 대단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벽에는 채색 그림을 바르고 방에는 붉은 융을 깔았는데, 개가 그 위로 걸어다니면서 놀아 보기에 추하였다. 또 우리가 상(賞)을 받던 날 개와 호인이 서로 반열 속에 섞여 있었으니, 더욱 해괴하다.
청인(淸人)들은 대개 몸이 살지고 큰데 그중에는 얼굴이 몹시 가증스러운 자도 있다. 누린내가 많아서 사람에게 풍기기도 한다. 언사와 행동이 전혀 공손한 기상이 없다. 한인(漢人)은 상당히 몸을 단속하고 외모도 좀 단정하지만, 남방 사람은 경솔하고 간사하며, 얼굴 모양도 뾰족하고 얇으니, 이것은 기품이 그러한 것이다. 말투는 남방 음성이어서 보통 한인과는 아주 달라서 자기들끼리도 말이 다 통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먼 지방의 사투리와 같다. 청인들은 모두 한어(漢語)에 능하지만, 한인은 거의 다 청어(淸語)에 익숙하지 못하다. 길에서 본 일인데, 청인과 한인이 섞여 있게 되면 모두 한어로 말하고 절대로 청어로 말하는 자는 없다. 청인은 만주(滿洲)라고 하는데 한인은 만자(蠻子)라고 부른다. 만주란 본래 여진(女眞)의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런데 만자라고 부르는 것은 알 수가 없다.
길에서 호인 남자를 만나면 거의가 수염이 성기어서, 비록 수십 수백 명을 만나도 수염의 많고 적은 것이 한결같이 똑같아 수염이 볼을 덮은 자가 전혀 없다. 이것은 머리를 이미 모두 깎았기 때문에 수염도 깎아 내고 얼마만 남겨 두어 남자임을 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또 남녀를 불문하고 얼굴이 얽은 자가 거의 없으니, 또한 마마의 극성이 우리나라처럼 심하지 않아서인가?
도중에서 본 이른바 수재(秀才)라는 자도 더불어 말할 만큼 글을 잘하는 자가 전혀 없고, 비루하고 무식하기가 우리나라 촌구석의 상놈들만도 못하다. 호인이 비록 중원(中原)에 들어가 주인이 되었지만, 그 땅은 곧 사방으로 통하는 큰 도회(都會)이다. 요(堯) 임금이 다스린 이후로 대대로 옛 성왕(聖王)의 교화와 혜택을 입었는데도 지금 무식하기가 이와 같으니, 이것은 중국의 문물이 모두 오랑캐의 풍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저절로 이렇게 된 것인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연중(燕中)의 소위 상견례는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는다. 공경함을 나타내는 데는 몸을 굽히고 감사할 때에는 머리를 조아린다. 말을 하려면 반드시 손짓을 하고, 서로 친한 사람을 만나면 앞에 나가서 두 손을 잡고 흔들어 반가운 뜻을 표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
상복(喪服)은 백대포(白大布)로 만들고 거친 베를 쓰는 자는 없다. 초빈(草殯)이 끝난 뒤에는 술 마시고 고기를 먹어 보통 때와 같이 한다. 발인(發靷)할 때에는 산 닭 한두 마리를 관(棺) 위에 놓는다. 그 까닭은 알 수가 없지만, 재앙을 물리치는 법이 아닌가 한다. 발인하기 전부터 이른바 반우(返虞 장사 지낸 뒤 신주를 집으로 모셔 오는 일) 때까지는 반드시 나각(鑼角)을 불고 북과 징을 쳐서 이것으로 장사 지내는 예를 삼는다. 청인은 모두 화장(火葬)을 하지만 한인은 그렇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화장하는 자도 꽤 된다. 이것은 대개 호인의 풍속에 물들어서 그런 것이다. 비록 화장을 하기는 해도 모두 입관(入棺)해서 불에 태운 다음 그 뼈를 거두어 그릇에 담아다가 묻고 흙을 모아 조그만 봉분을 만든다. 성읍(城邑)이나 촌락 및 불사(佛寺)에는 노천에 널[柩]을 버려둔 것이 많다. 혹은 널 밖에 벽돌을 쌓고 회로 바르기도 했고, 혹은 다만 돌덩이로 널 위를 눌러 놓아 자연히 썩도록 내버려 둔 것도 있다. 이것은 가난해서 장사 지낼 곳이 없거나, 혹은 객사(客死)해서 돌아가지 못한 자인데, 결국엔 화장하게 된다.
촌락에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보면, 신주(神主)도 없이 다만 종이쪽에 초상을 그려서 대들보나 벽 사이에 붙이고, 그 앞에 판자 하나를 놓고 향로, 향합 따위를 벌여 놓은 뒤 때로 향을 피울 뿐이다.
분묘나 절 및 길가의 당원(堂院)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속을 깊이 판 것이 마치
신주(神主)의 함중(陷中)과 같은 것도 간혹 있었다.
일찍이 듣기로는 길거리에 걸인(乞人)이 몹시 많다고 하더니, 이번 가는 길에는 그다지 많지 않으니, 혹 농사가 흉년이 들지 않아서인가? 그러나 지나가는 길가 마을들은 쓸쓸하게 비어 있고, 허물어진 곳이 많으니 살기 어려운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조석 식사는 밥도 먹고 죽도 먹는다. 남녀가 한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서 각각 조그만 그릇으로 나누어 먹는데, 한 그릇을 다 먹으면 또 한 그릇을 더하여 양에 따라 먹는다. 손님을 대접하는 데도 주객(主客)이 함께 한 탁자에서 먹는다. 손님이 여러 사람이 되어도 역시 따로 상을 차리지 않고 다만 한 사람 앞에 한 쌍의 수저와 1개의 잔을 놓는다. 그리고 종자(從者)가 병을 가지고 술을 따르는데 마시는 대로 술을 따른다. 잔은 몹시 작아서 두 잔이 겨우 우리나라 한 잔만 하다. 그런데 그나마도 한꺼번에 마시지 않고 조금씩 마신다. 보통 반찬은 촌가(村家)에서는 김치 한 보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부잣집에서는 많이 차린다 해도 구운 돼지고기와 ‘열과탕(熱鍋湯)’ 따위에 지나지 않을 뿐, 별다른 반찬은 없다. 이른바 열과탕이라는 것은 양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계란 등 여러 가지를 썰어서 서로 섞어 삶아서 국물을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의 잡탕과 같다. 이것은 본래부터 연중의 맛있는 반찬이라 하지만 누린내가 나고 기름기가 몹시 많아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또 이른바 분탕(粉湯)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물국수로서 간장 물에 계란을 넣은 것으로 역시 열과탕과 같은 종류인데, 조금 담백해서 기름기가 그다지 많지 않다. 모든 음식은 모두 젓가락을 쓰고 숟가락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숟가락도 있는데, 사기로 만들었으며 자루는 짧고 담는 부분은 깊다. 젓가락은 나무로 만드는데, 어떤 것은 상아로 만들기도 하였다.
손님을 대접하는 데는 반드시 차로써 다례(茶禮)를 행하는데 역시 술 돌리듯이 한다. 사람마다 각각 종지를 놓고 마시는 대로 따른다. 차는 반드시 뜨거워야 하고 종지에서 조금 식으면 병 속에 도로 붓는다. 차를 마시는 데는 천천히 마시는 것을 요한다. 차 한 잔을 마시는 데 거의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 걸린다. 차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일 뿐 아니라 늘 마시지 않는 때가 없다. 동팔참(東八站)과 같이 차가 귀한 데에서는 볶은 쌀로 대신하는데 이것을 노미차(老米茶)라고 한다.
담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차와 함께 내놓는다. 그런 이유로 담배를 ‘연다(煙茶)’라고 한다. 시장 상점에서 파는 자가 많으며, ‘명연(名煙)’이라고 써 붙인다.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그 담배는 가늘게 썰고 몹시 바싹 말려서 습기 한 방울도 없기 때문에 한숨에 타 버린다. 그러나 역시 계속하여 피우지는 않고 한 대만 피우고 만다. 그래서 온종일 피우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네댓 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는 또한 가늘고 짧아서, 이것으로 우리나라 담배를 피우게 하면 한 대를 다 피우기도 전에 눈썹을 찡그리고 그만두며, 맵고 독하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계속하여 여러 대를 피우는 것을 보고는 눈을 굴리면서 두려워하는 빛이 있으니, 이것은 그 중독됨을 두려워해서이다.
온돌 위에 식탁을 벌여 놓는데 길이가 겨우 3척, 높이가 6, 7촌이며, 넓이는 길이의 3분의 1이 못 된다. 이것을 탁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직 밥상으로만 쓸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글씨도 쓴다.
온돌 밑에 설치한 탁자는 높아서 등의(凳椅)라고 한다. 등의의 제도는 둥글기도 하고, 모가 나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그 높이는 걸터앉을 정도로 한다.
이른바 유박아(柔薄兒)라고 하는 것은 밀가루로 만드는데, 우리나라 떡 상화(霜花)와 같고, 그 합쳐지는 곳에 주름을 잡은 것은 우리나라 만두와 같다. 이것은 대개 옛날 만두이다. 그 속은 돼지고기에 마늘을 섞어서 만든다. 또 밀가루로 둥근 떡을 만들고, 돼지나 양의 기름에 볶아서 가볍고 무르고 쉽게 부스러지게 만드는데, 우리나라 건정(乾飣) 모양과 같다. 그중에 좋은 것은 사탕가루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 비록 깔끔하고 거칠거나 좋고 나쁜 차이는 있어도 점포에서 파는 것은 모두 이 종류이다.
또 사탕, 밀가루, 깨 같은 것을 합쳐서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대략 우리나라 백자병(柏子餠)과 같다. 박산양(薄饊樣)이라는 것은 너무 달지도 않고, 또한 기름기도 없어서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대체로 연중(燕中)의 반찬은 모두 돼지나 양의 기름으로 튀겨서 만들기 때문에 누린 기운이 많아 먹기에 좋지 않다.
실과로 말하면 배는 크기가 계란만큼이나 작지만 맛은 좋다. 잘 익은 배는 역시 맛이 좋다. 감은 우리나라 것에 비하면 몹시 큰데 담담하고 맛이 없다. 말려서 둥글게 만든 것이 우리나라 준시(蹲柹)와 같은데 맛이 약간 좋다. 그러나 그 달기가 밤만은 못하다. 개암, 석류, 사과, 능금도 맛이 역시 보통이다. 오직 아가위만이 크기가 오얏만한데 벌레 먹은 것이 하나도 없고 과육이 많고 맛이 좋다. 포도는 자줏빛 나는 것이 맛이 가장 좋다. 대추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에 비하면 배나 더 크고 살은 두껍고 씨는 작다. 이른바 흑조(黑棗)라는 것이 더욱 좋다. 감귤(柑橘)은 6, 7종이나 되는데, 그 맛이 모두 좋다. 그중에서 유감(乳柑)은 가죽이 유자와 같고, 맛은 배나 더 좋다. 가장 큰 것은 맛이 시어서 먹을 수 없다. 여지(荔支)와 용안(龍眼) 따위는 남방에서 오는 것인데 꽤 많이 있다. 그러나 모두 말린 것이다. 전번에 사신이 왔을 때, 날것을 얻어서 먹어 보니 맛이 몹시 좋았다고 하였는데, 이번 길에는 맛볼 수가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수박씨는 모양이 둥글고 검으며 살이 두꺼워서, 우리나라의 뾰족하고 얇은 것에 비교할 바 아니다. 수레에 실려 시장에 쌓여 있어서 남녀노소가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항상 먹는다. 빈랑(檳榔)은 남방에서 나는데 단단해서 먹을 수 없고, 맛도 또 시고 떫다. 그러나 연중(燕中)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 넣어 두고 항상 씹어 먹는다.
오곡은 모두 있으나, 옥수수가 가장 흔하고, 그 다음은 콩이요, 그 다음은 조다. 콩은 빛이 검고 작은 것이 더욱 흔하다. 그 모양은 우리나라 흑두(黑豆)와는 조금 다르며 맛도 또한 없다. 소나 말에게 모두 이 콩을 먹인다. 대개 좁쌀과 옥수수로 밥 짓는데 옥수수가 더 많다. 이따금 밭벼도 있다. 북경에는 논벼가 있다. 논벼란 것은 논에 심은 것으로 그 빛이 희기가 은과 같으나, 밥을 지어 놓으면 딱딱하다. 그래도 밭벼에 비교하면 낫다. 대체로 논벼 쌀은 우리나라 것만 못해서, 황제에게는 역시 우리나라에서 바치는 쌀로 밥을 지어 올린다고 한다.
생선은 중순어(重唇魚), 메기, 쏘가리, 잉어, 붕어가 가장 많은데 맛은 모두 좋다. 채소는 무, 미나리, 고사리, 배추, 마늘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더러 김치를 만드는데 맛이 모두 짜다.
마늘은 더구나 항상 먹는 것으로, 누린내가 나는 것은 비단 오랑캐이기 때문만이 아니고, 역시 항상 마늘을 먹기 때문에 언제나 매운 기운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오이는 절여 두어 짜게 해 가지고 흰죽 먹을 때 먹는다. 이것이 이른바 오이지인데 맛이 가장 좋아서 우리나라에서 담근 것보다 못하지 않다. 대소릉하(大小凌河)의 것은 달고 짠 것이 우리나라 것과 아주 비슷하지만 맛은 못하다.
동팔참(東八站)의 꿩 맛은 우리나라 것만 못하지 않다. 기름진 꿩과 메추리도 또한 맛이 좋다. 북경에 들어가니 계속하여 닭, 거위, 양, 돼지, 쇠고기를 내는데, 닭은 먹을 만하나 거위는 맛이 좋지 않다. 양을 푹 익힌 것이 맛이 가장 좋으나 뜨거워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돼지고기는 비록 연하기는 하나 또한 몹시 누린내가 나고 기름기가 많다. 쇠고기도 역시 우리나라 것만 못하다. 오직 족(足)을 삶은 것은 꽤 맛이 있다. 노루나 사슴고기도 또한 맛이 좋다. 술은 계주(薊州) 술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독하지 않아서 쉽게 깬다. 어떻게 담그는 것인지 모르지만, 대개 찰수수로 만드는 것 같다. 우리나라 소주(燒酒)는 연중(燕中) 사람들은 너무 독하다고 해서 마시지 않고, 마셔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간장은 모두 콩과 밀을 섞어서 만드는데, 만드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것과 같다. 한 덩어리의 크기가 말[斗]만하다. 간장 맛은 싱겁고 약간 시다. 시장에서 파는 간장은 혹 팥을 섞어서 만든다고 하는데 맛은 더욱 좋지 않다.
땔나무는 모두 옥수숫대를 쓰고, 그것이 아니면 버드나무를 쓴다. 이것은 모두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베지 않으니, 뽑힐까 염려해서이다. 숯은 모두 석탄을 쓰는데 목탄도 있다. 석탄은 빛이 검고, 그 덩어리는 크고 작은 것이 똑같지 않다. 잘게 부서진 것은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풀을 섞어서 무늬가 있는 벽돌을 만든다. 시장에 무더기로 쌓인 것이 모두 이것인데, 불에 타지 않는 것은 그 불을 껐다가 다시 태운다고 한다. 석탄은 그 연기가 독해서 연기를 쬐면 사람이 머리가 아프다. 내가 사관(舍館)에 머문 며칠 동안 두통으로 몹시 괴로웠는데 그 까닭을 몰랐다가 시험 삼아 석탄을 꺼내고 태우지 않았더니, 즉시 아프지 않아, 그 독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연중(燕中) 사람은 계속하여 때고 있어도 괴로워하지 않으니, 이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그런 것이다.
그릇은 궁촌(窮村)이나 벽향(僻鄕)에서는 모두 그림 그린 사기그릇을 쓰는데, 그림 그린 사기가 아니면 모두 검은 사기이다. 흰 사기는 보기 드물고, 구리나 놋쇠 그릇은 거의 없다. 모든 사관(寺觀)의 향로나 인가의 술통, 찻그릇, 촛대는 흰 주석으로 된 것이 많다. 대소릉하(大小凌河) 사이의 상점에 걸어 놓고 파는 호로소강(葫蘆小釭)이 있는데, 투명하기가 마치 유리나 수정과 같다. 그런데 이것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손을 대면 바로 깨지므로 다만 어린애가 한때 가지고 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밥을 지을 때는 모두 가마솥을 쓴다. 가마솥의 바닥은 평평하기 때문에 쉽게 끓는다. 냄비 종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 긷는 그릇은 모두 버들로 짠 것을 쓰는데 가볍고 깨지지 않으며, 또한 새지도 않는다. 우물 주둥이는 몹시 좁아서 겨우 물 긷는 그릇이 드나들 정도이다. 말[斗] 모양은, 주둥이는 넓고 밑바닥은 좁은데, 그 반을 막아서 주둥이가 둘이다. 그 크기는 우리나라 곡(斛)의 거의 반이 된다. 되[升]는 우리나라 말[斗]만 하다. 활은 모두 뿔로 만들었고, 길기는 우리나라 것에 비교하면 5분의 2는 더 있다. 화살은 호목(楛木)으로 만들었고, 대에는 황새깃을 꽂았으며, 화살통 하나에 7개씩 넣는다. 조총(鳥銃)은 길이가 거의 한 발이나 되어 세워 가지고 멘다. 말 위에서 쏘아도 나는 새를 맞힐 수 있다.
문방구의 진기함은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붓은 토끼털로 묶었는데 너무 부드러워서 글씨 쓸 때에 맘대로 되지 않고, 또 오래 쓰지 않아 해진다. 수숫대로 자루를 만드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 대로 만든 것만 못하다. 먹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개 우리나라의 송묵(松墨)과 같다. 그중에 좋은 것은 극히 드물다. 종이는 이른바 태사련지(太史練紙)라는 것이 곧 우리나라 백지(白紙)다. 그 밖에 분당지(粉唐紙), 은면지(銀面紙), 모면지(毛綿紙) 따위가 또한 많지만, 모두 연하고 얇아서 우리나라 것이 질긴 것만 못하다. 벼루도 역시 좋은 것이 없다. 예전에 들으니 청석령(靑石嶺) 돌이 벼루로 쓸 만하다기에 돌아올 때 얻어 가지고 와서 공인(工人)에게 보였더니, 못 쓴다고 한다. 먹을 갈아 보았더니 역시 단단해서 잘 갈아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벽돌을 만들려고 해도 공역(工役)이 몹시 거창해서 많이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연중(燕中)에서는 잠깐 사이에 능히 만들어 내고 또 몹시 견고하니, 흙이 우리나라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면 공인(工人)들이 묘한 방법을 알아서 그런 것인가? 연중에서는 온돌방에
구들장을 쓰지 않고 다만 벽돌만 깐다. 불을 땔 때는 수숫대를 쓴다. 가볍고 힘이 없어서 나무만 못한 것인데도, 10여 줄기만 때면 7, 8칸이나 되는 긴 위아래 온돌방이 비록 거리가 넓고 멀어도 더운 기운이 밤새 한결같고, 또 차고 더운 차이가 없다. 이것으로 온돌방을 잘 만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자기(磁器)에 그린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희미한 것이 많은데, 연중(燕中)의 그릇은 마치 가는 붓으로 그려서 만든 것과 같아, 실이나 터럭만큼 가느다란 것도 자세하여 분명하니, 또한 구워 만드는 기술이 능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모든 일용의 소소한 물건을 매매하는 데는 온 천하가 대개 돈을 쓰는데, 우리나라 돈은 연중에서 쓰지 못하기 때문에 북경 경계에 들어가면서는 백금이나, 종이, 부채 등 물건을 연중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서 물건에 따라서 그 돈을 준다. 그 돈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소전(小錢)으로서 333개를 1냥으로 친다.
연중 경계에 들어가면 밀랍은 볼 수가 없고, 모두 짐승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고 조그만 나무를 그 속에 꽂아서 태운다. 초의 모양은 상당히 큰데 기름이 끝내 흘러내리지 않고 밝고 깨끗하여 밀로 만든 초보다 나았다. 기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날씨가 조금 따뜻하면 가지고 멀리 갈 수가 없다. 연전에 재상 조태채(趙泰采)가 수십여 쌍을 얻어서 짐 속에 넣었는데, 반도 못 와서 모두 녹아 없어졌다고 한다. 대개 으레 늦은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질 때에 돌아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비록 소위 육초[肉燭]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정밀한 정도는 여기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정세태(鄭世泰)는 북경의 큰 장사꾼으로 그 부(富)함은 견줄 사람이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사 오는 비단은 모두 그 집에서 나온다. 심지어는 세상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이 집에서 구하면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꽃, 실과, 대나무, 돌, 명향(名香), 보기(寶器)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구비되어 있다. 집은 옥하교(玉河橋) 큰길 남쪽에 있는데, 제도가 몹시 커서 궁궐에 견줄 만하다. 우리나라의 매매하는 주인이 되는 때문에 역관들은 크건 작건 매매할 것이 있으면 그 집으로 달려가므로 밤이나 낮이나 시장과 같다. 이 사람은 남쪽과도 교역을 하는데 이번 화물이 도착하는 것이 조금 늦어서 역관들이 이것 때문에 행기(行期)를 늦추고 있는 것이니, 사신 행차가 더디고 빠른 것도 이 사람이 실상 그 권리를 잡고 있다. 그 용모는 파리하고 검어서 풍채가 몹시도 없어, 만금(萬金) 재산을 가진 자 같지가 않다고 한다.
서반(序班)이란 곧 제독부(提督府)의 서리로 오래 되면 간혹 승진되어 지현(知縣)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연중 사정을 알려고 하면 이 서반을 통해야 알 수가 있다. 이들은 번번이 위조 문서를 만들어 많은 값을 받고서 역관들을 속이기도 한다. 그들의 집은 대개 남방(南方)에 있다. 서책은 모두 남쪽으로부터 여기로 가져와서 이들이 매매를 담당하게 된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거간과 같은데 역관들이 또 그 중간에 끼어 있다. 사신이 책을 사려고 하면 반드시 역관들을 시켜 서반에게 구하는데, 이들은 상호간에 이익을 취하기 때문에 몹시 교분이 깊다.
우리가 산 책은 다음과 같다. 《책부원귀(冊府元龜)》 301권,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100권, 《도서편(圖書編)》 78권, 《형천비편(荊川稗編)》 60권, 《삼재도회(三才圖會)》 80권, 《통감직해(通鑑直解)》 24권, 《명산장(名山藏)》 40권, 《초사(楚辭)》 8권, 《한위육조백명가집(漢魏六朝百名家集)》 60권, 《전당시(全唐詩)》 120권, 《당시정성(唐詩正聲)》 6권, 《당시직해(唐詩直解)》 10권, 《당시선(唐詩選)》 6권, 《설당시(說唐詩)》 10권, 《전주두시(錢註杜詩)》 6권, 《영규율수(瀛奎律髓)》 10권, 《송시초(宋詩鈔)》 32권, 《원시선(元詩選)》 36권, 《명시종(明詩綜)》 32권, 《고문각사(古文覺斯)》 8권, 《사마온공집(司馬溫公集)》 24권, 《주염계집(周濂溪集)》 6권, 《구양공집(歐陽公集)》 15권, 《동파시집(東坡詩集)》 10권, 《진회해집(秦淮海集)》 6권, 《양귀산집(楊龜山集)》 9권, 《주위재집(朱韋齋集)》 6권, 《장남헌집(張南軒集)》 20권, 《육방옹집(陸放翁集)》 60권, 《양철애집(楊鐵厓集)》 4권, 《하대복집(何大復集)》 8권, 《왕엄주집(王弇州集)》 30권, 《속집(續集)》 36권, 《서문장집(徐文長集)》 8권, 《포경재집(抱經齋集)》 6권, 《서호지(西湖志)》 12권, 《성경지(盛京志)》 6권, 《통주지(通州志)》 8권, 《황산지(黃山志)》 7권, 《산해경(山海經)》 4권, 《사서인물고(四書人物考)》 15권, 《황미고사(黃眉故事)》 10권, 《백미고사(白眉故事)》 6권, 《열조시집소전(列朝詩集小傳)》 10권, 《만보전서(萬寶全書)》 8권, 《복수전서(福壽全書)》 10권, 《발미통서(發微通書)》 10권, 《장원책(壯元策)》 10권, 《휘초변의(彙草辨疑)》 1권, 《제금편(製錦篇)》 2권, 《염이편(艷異篇)》 12권, 《국색천향(國色天香)》 10권.
이중에서 잡서(雜書) 몇 가지는 서반(序班)들이 사사로이 준 것이다.서화(書畫)로는 미원장서(米元章書) 1첩(帖), 안로공서가묘비(顔魯公書家廟碑) 1건(件), 서호서삼장화상비(徐浩書三藏和尙碑) 1건, 조맹부서장진인비(趙孟頫書張眞人碑) 1건, 동기창서(董其昌書) 1건, 신종어화(神宗御畫) 1족(簇), 서양국화(西洋國畫) 1족, 직문화(織文畫) 1장, 숭채화(菘菜畫) 1장, 북극사정비(北極寺庭碑) 6건이다.
이것은 탑본(榻本)한 것이다.북경의 태액지(太液池)와 창춘원(暢春苑)과 정양문(正陽門) 밖의 시가가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여 볼 만하다. 또 태학의
석고(石鼓)는 바로 주(周) 나라 때의 옛 물건이다. 문산묘(文山廟)도 또한 한번 보고 경의를 표할 만한 것이지만, 사신은 맘대로 출입을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천주대(天主臺)에는 서양국주(西洋國主)의 상(像)을 놓았고, 그 가운데에 그림자로 방위를 보는 것과 자명종 등의 물건이 있어서 상당히 교묘하여 볼 만하다. 상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 보기가 쉬웠는데, 역시 사정이 어긋나서 보지 못했으니, 몹시 한탄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망해정(望海亭)과 각산사(角山寺)에 올라가지 못한 것은 평생의 크나큰 한이라고 하겠다.
첫댓글 그리고...제 칼럼남에 제가 글을 못 쓰게 조치를취했나 봅니다...?...홍진영 칼럼난에 올린 글이 뭔 선택을 하라 하면서...
정작 제 칼럼난 메뉴는 뜨질 않습니다.
유신독재시대같습니다.
조속히 홍진영님 컬럼을 볼 수 있게 운영자님의 발빠른 개선 부탁드립니다,
에구 공지사항을 보니 홍진영님이 연구회원이 되셔야 자격이 부여된다고 하네요. 아직 정회원(?)이라서...난감합니다....
젊은 시절에 1km를 7분에 2km는 8분에 3km는 9분 식으로 자동차 km로 한번 내기 한적이 있음 지금은 2km 정도를 20분에서 25분 사이로 주파 하는데 버스와 시간차이는 10분에서 5분 차이라 그냥 걸어 다닌다 하루에 10시간을 계산하여 대충 시간을 잡아보니 30~40km 정도 주파로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1000km에서 1300km정도 사이의 거리가 나와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것으로 보여지나 거리가 좀 더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이고 흰 백산 산맥 줄기를 이야기 할때는 분명 서경쪽의 지형 인대 봉황성과 봉천성은 구분이 되는 성이조 읽으면서 같은성으로 착각하여서 호인은 호로자식 연관이 되는지 호인이 혹 뙈놈이 아니면 어느 종족인지 혼선이생겨
"연중에서는 구들장을 쓰지 않고 벽돌을 쓴다."(?)벽돌 제작이 능해서(?) 현재 한반도에서 유행 중인 한옥/구들과 관련해서 구들장을 만주에서 수입해서 쓴다고 합니다. 워낙 비싸고 구하기 힘들어서...구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제작방식에 따라 비용이 천차만별이라고 합니다. 근래 한반도 민초들의 상징인 막구들과 초가집은 아마 산지가 70%인 지형의 반영으로 땔감과 흙을 구하기 쉬워서 그럴 것입니다.근래에 번역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보면 늘 청 농업/의식주 발달&조선 그 반대 열악...구들과 관련된 내용도 윗 내용과 유사...구들! 제대로 연구하면 오히려 역사왜곡의 흔적이 더 빨리 증명될 것이라 보입니다.
한반도만 조선이었다 라는 식이니 구들이 한반도에서만 쓰여졌다는 말은 맞긴 하겠네요. 조선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에 따라 그를 주장하는 사람들 거짓말쟁이도 되고 아닐 수도 있고. 이런게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