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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1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제1독서 : 사도 1,1-11
제2독서 : 에페 1,17-23
복 음 :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연구기관에서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면담하면서,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백만장자가 된 이유를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백만장자 대답의 1위는 아주 뜻밖이었습니다.
글쎄 ‘우연한 기회에’(29%) 이라는 답변이었습니다.
2위는 27%는 시행착오에 의해서, 3위는 예전 직업과의 관련성 때문에(12%),
4위는 이전 고용주가 놓친 기회 때문(7%)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며,
어쩌다 한 일로 돈을 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즐겼다는 것입니다.
일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소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지금 자리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기뻐하십니까?
삶 안에서 사랑이 가득하면 기쁨도 저절로 생깁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집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고,
직장에서의 일을 사랑하면 직장 출근이 기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어떨까요? 성당 가는 것이 기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은 단순히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 전체 안에서 사랑을 키워 기쁨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사랑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이 세상일을 모두 마치고 승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시며,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전할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뵙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모습입니다.
성당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성체 앞에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6-20)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따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그날을 기대하면서,
사랑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의 시간을 계속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승천 대축일에 저는 어린 왕자를 생각합니다.
어린 왕자.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오는 책입니다.
어린 왕자를 쓴 쎙떽쥐베리는 작가이면서 조종사였습니다.
1940년대, 사하라 사막과 안데스산맥 상공의 외로운 하늘에서 장거리 비행을 하는 조종사였습니다.
비행 중 지중해 상공 어딘가에서 행방불명이 됩니다.
영원히 그분의 품으로 비행해 간 것입니다.
저에게 조종사의 이미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조종사들은 창공을 날다 보면 별들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을 지나기도 하지만,
난기류를 만나기도 하고 폭풍을 만나기도 하지요.
여러 가지 위험을 감수하고 시련을 겪으면서 황량한 상공을 비행하여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때로는 푸른 초원을 지나며
은총이 넘치는 강물을 건너기도 하지만,
때로는 황량한 사막을 지나기도 하고 깜깜한 밤을 걸어야 할 때도 있지요.
그런 여정 안에서 기쁨과 슬픔, 평화와 고독을 체험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쎙떽쥐베리의 마음속에 성서의 한 구절이 떠올라 그의 영혼을 휘감았습니다. 그 구절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는다 해도
그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그 구절을 깊이 묵상한 후 인간의 영혼을 위한 작품을 쓰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어린 왕자였습니다.
<어린 왕자>는 바로 사람들이 영혼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쓴 작품이기에
그토록 우리의 영혼을 매혹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잃을 때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 빵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과 생에 대한 분별과 하느님을 아는 일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부활하셨던 예수께서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그대들은 왜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가?”
무슨 의미입니까?
하느님을 향한 삶의 여정에서 그 목표를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때로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분이 사셨던 사랑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왕자에 보면 비행사가 나오지요.
작렬하는 태양 아래 무방비 상태로 펼쳐져 있는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비행사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하는 여정의 모습입니다.
하늘만 바라보면서 그분이 물을 쏟아 주시기만을 바랄 수 없고 우리가 우물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성당을 나오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영혼의 목마름에 대한 해소, 영원에 대한 동경, 사랑에 대한 갈망,
바로 그분 하느님에 대한 추구이겠지요.
제가 오늘 강론에서 어린 왕자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이 <어린 왕자>야말로 어른의 세계에 대한 깊은 물음을 던지면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어린 시절의 꿈을 통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또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동의어입니다.
사랑은 마음속에 지닌 어떤 것,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 바로 영혼에 대한 어떤 것입니다.
저는 어린 왕자에서 백미가 되는 부분은 어린 왕자와 여우와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하기에 그 대목의 일부를 들려 드립니다.
여우가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안녕. 넌 누구니? 참 예쁘구나...” 어린 왕자가 말했다.
“응, 난 여우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쓸쓸하단다...”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우린 아직 정을 나누지 않았거든.” 여우가 말했다.
“아!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한 후에 그는 덧붙였다.
“정을 나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넌 여기 사는 애가 아니구나. 무얼 찾고 있니?” 여우가 말했다.
“난 사람들을 찾아. 그런데 정을 나눈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건 너무나 잊혀져 있는 일이야.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란다.”
“관계를 맺는다고?”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렇지.”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까지 세상에서 흔히 보는 애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필요 없어. 너도 물론 내가 아쉽지도 않겠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와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불과할 거야.
그러나, 네가 나와 정을 나눈다면 서로가 필요하게 돼.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나는 너한테 단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테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꽃이 하나 있는데... 그 꽃이 나와 정을 나누었나봐...” 어린 왕자가 말했다.
.. 중략...
서로 이야기를 나눈 후
“누구나 자기가 정을 준 것밖에는 알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은 이미 무얼 알 만한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어.
그들은 미리 만들어진 것을 상점에서 산단다. 그렇지만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에게 정을 나누어주렴.”
여우가 말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우선 넌 내게서 좀 떨어져서 바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말은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더 가까이 앉아도 돼...”
이튿날 어린 왕자가 다시 왔다.
여우가 말했다.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령 오후 네 시에 네가 온다면 세 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해질 거야.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난 알 수 없을 거야.
의례가 필요한 거란다.”
“의례가 뭐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건 어떤 날을 그 외의 날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그 외의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와 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잘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잘 가. 내가 비밀 하나를 알려 줄게.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볼 수 없다. 알맹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여우가 말했다.
“알맹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잊지 않으려고 따라 말했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정을 나누며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어. 그러나, 넌 잊으면 안 돼.
네가 정을 준 것에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영혼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남, 그리고 이어지는 정을 나누는 시간을 들일 때 그때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소중해집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시간을 들이지 않을 때, 결코 하느님이 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참으로 소중한 존재가 될 때 나는 하느님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과 저와 맺는 관계, 서로 정을 나누면서 맺는 관계,
특별히 의례인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만나는 이 만남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서로가 정을 나누면 서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아주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요.
늘 서로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물론 보내주실 당신의 영,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의미도 있겠고,
성체를 통해서도 매일 우리 안에 오시기에 늘 함께 계시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제자들의 마음 안에, 우리들의 마음 안에 늘 머무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작별의 시간에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그대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시오.”
우리도 복음에서 들은 대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힘차게 세상 안에 나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아벨의 의로운 피로도,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도,
모세의 열성으로도, 예언자들의 충성으로도, 결코 그 누구도 열 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하늘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날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모두 ‘승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사도 1,11)
하늘, 그것은 지붕이 없는 저 위 어디쯤의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무소부재하시니, 그 모든 곳이 하늘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이 내 안에도 계시니, 내 자신이 하늘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거처이니 말입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편에 앉히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승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몇 군데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는데(5,24),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5).
열왕기 하권에는 예언자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올라가셨고(2,11),
토비트서에서는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20).
그런데 승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사도신경의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승천”도 물리적인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어느 한 장소로 있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나 같이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곧 승천을 통해서 육신의 모습은 사라지셨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 영광을 주시려 찾아오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처럼 “승천”은 떠나감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어 함께 계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요, 벗이요,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영광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식탁의 자리에 와 계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먹이십니다.
이토록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은
우리에게 복이 내리는 날이요, 우리가 영광을 입은 날입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말씀하셨듯이,
영광스럽게 하늘나라에 들어가시어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지상 삶의 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우리가 단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현양 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을 의미합니다.
곧 세상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권능을 지니신 주님으로 살아계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오늘은 홍보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의사소통의 참된 힘은
‘이웃되기’(제48차 홍보주일 담화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답하셨습니다.
곧 어려운 형제를 돌보아주는 것이 이웃이 되는 길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사소통이 고통을 달래주는 향유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맛 좋은 포도주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웃 되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승천의 삶이 될 것입니다.
곧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비유를 많이 드셨습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조개에 들어있는 진주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든 빵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보물과 같으니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끝에 가서는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당부를 하셨습니다.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막달레나는 주님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 사도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형제들과 빵을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하는 미사의 원형입니다.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착한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니, 성령께 의탁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어머니께서 시골에 가실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하셨습니다.
반찬을 미리 만들어 놓으셨고, 빨래도 다 해 놓으셨습니다.
큰형님에게는 동생들 잘 돌보라는 당부를 하셨고,
동생들에게 는 형의 말을 잘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서 며칠은 신나지만, 집은 엉망이 되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시골에 가시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오시는지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도 깨끗하게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도 가고,
연탄불도 꺼트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면 흐뭇한 모습으로 형제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었던 농부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이제 ‘하느님’께로 올라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들의 자세를 전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주님은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넋 놓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신앙의 신비를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오늘을 ‘홍보 주일’로 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많은 벌과 나비는 꽃이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향기를 따라서 꽃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가 된다면,
우리의 발과 손이 주님을 전하는 발과 손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교회를 찾아올 것입니다.
바다로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것은
바다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지난 6주 동안 있었던 주님 말씀의 핵심 키워드를 살펴봅니다.
“갈망, 믿음, 나눔, 착한 목자, 진리, 참된 평화”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천상이다.
이 천상은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사실 것으로 생각하는
어떤 지정학적 공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 우리와 더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그분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분은 우리와 더 친밀히 일치하시고,
그러기에 그분이 가신 데로 우리도 따라갈 수 있기를 감사송에서 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상에 대한 향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생명에 결합하고자 하는 여망이다.
예수승천대축일은 우리가 이 지상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지가 다른 곳에 있음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행전은 주님 승천의 주제를 가지고 그 내용을 풍부히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연장인 성령의 오심과 연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은 이제 막 일어나려 하는 보다 큰 사건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
흰옷을 입은 두 사람(사도 1,10)이 나타난다.
이 천사들은 구원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 역할을 한다.
구름은 예수님을 못 보게 하는 것보다도 하느님의 특별한 구원적 계시의 상징이다.
루카는 예수승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고해주고 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11절).
모습 그대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하늘에 올라가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셔서 당신의 지배권을 확인시키고 온 인류의 역사를 당신 안에 모아들이실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다시 오심에 대한 보증이다.
떠남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더욱 위로를 주는 당신의 현존에 대한 약속이다.
복음: 마태 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복음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마지막 만남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만남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복음 선포가 시작되었던(4,12-17) 갈릴래아의 산,
아마 행복에 관한 가르침(5-7장)을 선포했던 산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나간 날을 모두에 대한 타당성을 재확인하고,
그 산상설교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신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0절)는 말씀을 듣고 있다.
또한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마지막 말씀의 선교 사명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
마태오는 복음 여러 곳에서 권한,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권위에 대해 말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에”(7,29),
또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며 당신께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시고(9,6-7),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21,23)라고 묻는다.
이 권한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권한이 그분의 부활과 함께 그분에게서 충만히 드러난다.
즉 부활은 승천으로 완성되며, 예수님을 성부 오른편에 영원히 자리하게 하시어
온 세상의 주님이 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권위로 사도들을 파견하신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19절).
사도들을 온 인류를 향해 파견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은
신앙 외에 세례와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에만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그 신비 자체에 잠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과 승천으로써 인류가 하느님 아버지의 품 안에 들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도 똑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세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지상의 생활보다는 천상의 생활 형태로 삶을 바꾸어 나갈 때 진실한 것으로 입증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20절)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온 인류의 여정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자랄 것이다.
이 교회는 지상의 순례를 마치면서 사랑을 통해 실현되는
율법의 의미가 드러나고 생명의 신비가 벗겨지게 되면 사명을 다하고 끝나게 되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축복받은 이들만이 예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해
미리 마련하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셨습니다.
마침내,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며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각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 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사도행전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떠나면서도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요한14,2). 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제자들이 있었고,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품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 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 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의 원천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과의 관계 형성에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께서 늘 옆에 계시다는 믿음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항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있고,
우리 마음에는 늘 예수님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오늘 우리를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시며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러므로 두려워 말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비자 확보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주셨으니 그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으면 복음은 선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워 주님으로 충만히 채워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내 것을 내려놓고, 우리의 거처를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한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1,11)는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고,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서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 가셨다고 말하는 양식은 각각 다릅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40일 후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 앞에서 하늘로 오르시고, 구름에 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고,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사도행전도 기록하였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오늘 우리가 들은 대로
승천이 부활 40일 후에 올리브 산에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공동체가 기록한 두 문서인데, 승천의 때와 장소를 각각 달리 말합니다.
그렇다면 승천에 대한 기록들은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양식의 기록들을 남긴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그들의 믿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는 승천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예수님은 부활하여 갈릴래아 산에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다고 보도합니다.
사도행전이 부활 후 40일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활 후 어느 기간이 지나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한 사실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부활로 영광스러워진 예수님이
그 영광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군림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떠나가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의 기억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회상하여 기억하는 일들 안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살아계셨습니다.
제자들이 회상하며 알려 주는 그분의 말씀과 삶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었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영광과 권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상하며, 그분의 영광을 탐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천사의 입을 빌려 말하였습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늘을 우러러 상상하고 하늘에서 주어지는 혜택을 바라고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천사는 말합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
하늘로 올라가신 그 보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부활하여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하느님에게로 가신 예수님은
그런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안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분에게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영광스럽게 된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의 숙원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오늘도 신앙인들은 흔히,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실현은 현실적 삶을 외면하고, 초현실적 기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초현실적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셨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교 실세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 위에 지도자로 군림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당시에 대한 기억을 제자들 안에 남겼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기억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행세하지 않으시며,
사람들 위에 군림할 인물들을 교회 안에 남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떠나가셨다고 말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 안에 돌아와서 그들의 실천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하느님의 일은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면서 하느님의 생명을 철저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服裝을 달리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배경으로 당신의 영광이나 위엄을 찾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자유가 소중하였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자유롭게 섬길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자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들의 다양함을 아끼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위험과 고통을 감수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위험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위험과 고통을 각오하고 감수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요한복음서(15,9)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이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군림하지 않으신다는 오늘 승천의 메시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군림하겠다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사도행전이 지적하듯이,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삶을 시야에서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스스로를 훌륭한 지도자로 포장하여 군림하며,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같은 복음서는 다른 곳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25,40)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실천들 안에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ALLELUIA!
정 세레나 수녀
부활의 기쁨을 맞이한 지 40일이 되어갑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날로
비록 형상은 함께 하시지 못하지만,
우리 생명의 부활을 보증하시며
하늘길에 오르신 기쁘고 거룩한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마지막 장의 내용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구절인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시는 임마누엘 복음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세상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그동안의 부활시기 복음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예컨대, 목자이시고, 양들을 지키시는 문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하고 선포하시는
여러 보증의 말 중에 저는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계셔주시는 분’만큼
확실한 약속이자 우리에게 끝까지 위로를 주는
자기 정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제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
걸려 넘어져 땅에 엎어져 울고 있을 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어머니의 마음으로
또 가족과 친구의 마음으로 제 곁에 계시며
언제나 모든 위험에서 건져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항상 함께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약속에 대한 희망 하나로 오늘을 살기에 충분합니다.
[출처] 마태 28,16-20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