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질하는 농부
1885년, 검은색 크레용
테오에게...
밀레, 레르미트, 레가메이, 도미에 등이 그린 인물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물론 구성을 잘했지만,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방식은 아니다. 인물이 아무리 아카데미식으로 옳게 그려졌어도 현대 회화의 특징인 개인적이고 친밀한 느낌과 행동이 결여된다면, 앵그르가 그렸을지라도 피상적인 그림에 불과하다(앵그르의 '샘'은 예외다. 그 그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항상 새로운 것을 담고 있었고, 담고 있으며, 담고 있을 것이기에).
그러면 인물이 더 이상 피상적이지 않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땅을 파는 사람이 땅을 파고, 농부가 농부답고, 시골 아낙이 시골 아낙다울 때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 말이지? 그러나 오스타테와 테르보르히가 그린 사람조차도 요즘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할 말이 많다. 내가 새로 시작한 그림을 얼마나 향상시키고 싶어하는지, 또 내 그림보다 다른 화가의 작품을 얼마나 더 높이 평가하는지도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 옛 네덜란드 화파의 그림에서 밭갈이 하는 농부나 바느질하는 여자를 단 한 명이라도 본 적이 있니? 그 화가들이 일하는 사람을 그리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벨라스케스가 그의 '물장수' 속에 일하는 사람을 그리거나, 민중 속에서 모델을 찾은 적이 있을까? 전혀 그런 적이 없다. 전 시대 그림의 등장인물이 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노동이다.
작년 겨울 눈 속에서 당근을 뽑고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지난 며칠 동안은 그 모습을 그렸다. 밀레도 일하는 사람을 그렸지. 레르미트, 이스라엘스 같은 농촌화가들 중 상당수가 노동을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제는 인물을 그리는 화가가 얼마나 적은지 모른다. 그래, 다른 무엇보다 인물 자체를 위해서, 형식과 입체적인 표현을 위해 그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인물을 그린다면,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다. 움직임 자체를 위해, 그것을 포착해서 그리고 싶다. 관습적인 동작을 많이 그렸던 옛 거장들과 네덜란드 거장들조차 피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움직임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유화든 데생이든 인물 자체를 위한 인물화, 그러나 동시에 눈 속에서 당근을 뽑고 있는 인물화라야 한다. 제대로 설명했는지 모르지만, 네가 잘 이해했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를 세레에게도 전해다오.
더 간결하게 말할 수도 있다. 카바넬의 누드화, 자케의 귀부인 초상화, 아카데미에서 데생을 배운 한 파리 화가가 그린 시골 여인(바스티앙 르파주가 그린 게 아니라), 그런 것은 사람의 팔다리와 몸의 구조를 늘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아주 매력적으로 그린 것도 있다. 비례도 정확하고 해부학적으로도 세부 묘사가 사실적이다. 반대로 이스라엘스, 도미에, 레르미트의 인물화를 보면, 몸의 형태는 더 잘 감지할 수 있지만 비례가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고, 전체적인 구성이나 해부학적 묘사도 아카데미 사람들 눈에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그림은 살아 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설명이 미진한 것 같다. 내 그림 속 인물이 훌륭하게 표현된 걸로 보인다면 내가 절망할 것이라고 세레에게 전해라. 나는 인물이 아카데미식으로 정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밭갈이 하는 농부의 사진을 찍는다면, 사진 속의 농부는 더 이상 밭을 갈고 있지 않을 게 분명 하다.
미켈란젤로의 인물은 어떠냐? 다리는 길쭉하고 엉덩이도 펑퍼짐하지만 아주 근사하지 않니. 세계에게 전해다오. 밀레와 레르미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그건 그들이 건조하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검토한 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대상에서 받은 느낌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 '부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구걸 거짓말이라고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이다.
이제 편지를 끝맺어야 할 때가 되었지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농부의 삶이나 대중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상류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길게 봤을 때 이국적인 하렘 풍경이나 추기경의 성찬식을 그린 화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시기가 좋지 않을 때 돈 부탁을 하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가장 어렵고 돈도 많이 든다. 그림을 그리는 데 꼭 필요한 비용은 생활비와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이다. 농촌에서 살면서 농부처럼 생활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안락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농부가 원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단지 물감과 모델이 필요할 뿐이다.
이 편지를 읽은 뒤에는 내가 인물화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네 편지를 읽으니 세라가 '감자 먹는 사람들'의 구성에서 결함을 발견했다지. 나도 그런 결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에서 그 시골 농가를 바라보느라 무수히 많은 밤을 지샌 후에, 그리고 사람의 두상을 40여 차례 그려본 후에 얻은 인상을 내 나름의 관점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인물화 이야기를 하다보니 할 말이 계속 떠오른다. 너도 라파엘리가 '개성적 인물'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말은 아주 적절했고, 그의 데생이 이 개념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파리의 미술계와 문학계를 드나드는 라파엘리는 시골에서 작업하는 나 같은 사람과는 아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요약할 수 있는 용어를 찾고 있는 듯하다. 라파엘리는 '개성적 인물' 이라는 말을 미래의 인물화 이념을 압축해 주는 용어로 제시한다. 그 의미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말의 정확성에 대해서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처럼, 그 말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나는 내가 구사하는 언어의 정확성이나 그것의 효과도 그리 믿지 않는다.
나라면 "밭갈이 하는 농부에게 개성이 있어야 한다" 고 말하기보다는 "농부는 농부다워야 하고, 밭을 가는 사람은 밭을 가는 사람다워야 한다" 고 말하겠다. 그럴 때 그 그림은 진정으로 현대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사실 이런 말은 아무리 장황한 설명을 덧붙여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큰 부담이지만 모델비를 줄이기보다는 조금 더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작은 인물' 데생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움직이고 있는 농부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현대 인물화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현대 예술의 진수이고, 그리스에서도, 르네상스 시기에도, 옛 네덜란드 화파도 하지 않은 것이다.
1885년 7월
첫댓글 민중의 삶속에서 예술을 창조하고자
고뇌했던 화가
그의 외로운 투쟁이 빛을발해
다행입니다~
밀레 이전의 그림은 귀족. 왕족을 그린 인물화였어요
나는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