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2.23 18:41 | 수정 : 2013.12.24 11:02
1995년 '핫바지' 발언했던 JP도 "충청도 더 시끄럽게 떠들어라"
“충청도가 ‘핫바지’유?”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는 이 말 한 마디로 지난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석권했습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DJP 연합을 통해 김 전 총재의 정치 인생을 다시 한 번 꽃피우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사실입니다.
“충청도가 더 시끄럽게 떠들어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누가 입에 떡을 넣어 준답니까?” 김 전 총재는 최근 자택을 찾아온 충청권 출신 한 중진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의원은 “정치에 있어서도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
-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지난 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자신의 기념사업회 '운정회' 창립총회에 참석했다. 정치권에서는 운정회가 충청권 출신 정치인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날 창립총회에는 강창희 국회의장과 이홍구·정운찬 전 총리,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서청원·정몽준·이인제·정우택 의원, 민주당 정대철 상임고문,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충남지사 출신인 새누리당 이완구 의원은 김 전 총리의 휠체어를 직접 밀었다.
‘충청권 역할론’ 정치권 핫이슈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 핵심에 진입해 역대 최다선(最多選·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한국 현대 정치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김 전 총재가 다시 충청도를 거론한 배경에는 올 들어 정치권 핫이슈로 떠오른 ‘충청권 역할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충청권 역할론은 지난 5월 충청권 인구가 사상 최초로 호남권 인구를 추월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이 때부터 중앙 정치권에서는 “인구가 적은 호남권에는 국회의원 의석이 30개나 되는데, 인구가 많은 충청권에는 의석이 25개뿐인 것은 옳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정치권에서도 영·호남 다음으로 충청권을 거명하는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인구 수에 맞춰 영남, 충청, 호남 순서로 바꿔 불러야 한다며 ‘영·충·호’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새누리당 충청권 모임 ‘중부권 대망론’ 거론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는 충청권 역할론 논의가 뜨겁습니다. 새누리당 안에는 지역구가 충청권이거나 고향이 충청권인 의원들이 ‘충청권 모임’을 수시로 갖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소속 전체 의원 155명의 20%에 가까운 28명이 충청권 출신입니다. 이들의 충청권 역할론은 크게 두 갈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
- 새누리당 충청권 출신 의원 모임 소속인 정우택 최고위원이 지난달 14일 "충청권 인구가 늘어난 만큼 국회의원 의석 수도 많아져야 한다"며 기존 공직선거법이 호남권보다 인구가 많은 충청권에 의석 수를 적게 배정한 것은 정치적 평등을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우선 외부적으로는 “충청권 인구가 많아진 만큼 의석수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달 정우택 최고위원(충북 청주상당)은 “충청권 의석 수가 인구 비례에 맞지 않아 정치권 평등을 침해하고 있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박성효 의원(대전 대덕)은 “의석 배분 기준은 도 단위 인구 비례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내기도 했습니다. 차기 국회의원 총선은 2016년 열릴 예정이라 헌법소원과 법 개정 모두 시급한 사안은 아닌데도 충청권 의원들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충청권 역할론은 새누리당 내에서는 “내친 김에 당권(黨權)까지 잡아야 한다”는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이 ‘경상도 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려면 충청권을 중심으로 수도권을 아우르는 중부권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입니다. 충청권이 앞장서 당 중심 세력을 교체하며 차기 당권에 이어 차기 대권까지 도모해 보자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충청권 출신의 한 의원은 “영남 기반의 새누리당, 호남 기반의 민주당으로는 지역 갈등을 조정할 수 없다”며 “새누리당이 중부권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를 펼치며 보수의 가치를 확산할 수 있도록 충청권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충청권 역할론에서 한 단계 나아간 ‘중부권 대망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이런 움직임의 근저에는 “영남과 호남 사이에 껴 ‘핫바지’ 소리나 들으며 ‘들러리’ 역할이나 하던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심리가 엿보입니다. 또 지난 17대, 18대 국회 때 각 1명뿐이던 충청권 지역구 의원이 이번 19대 국회에는 14명이나 됐으니 본격적으로 세력화 할 때가 됐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6선 이인제 의원, 3선 정우택·이완구 의원 등 중진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들 간에는 김종필 전 총재를 뒤이을 충청권 맹주(盟主)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민주당 충청권 의원들 ‘의석 수 늘리기’ 동의 민주당 소속 충청권 출신 의원들도 의석 수 늘리기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여야 충청권 의원 13명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불합리한 선거구 획정 관련 충청권 의원모임’을 열고 의석 수 조정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들은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의석 수 조정을 위한 단일요구안을 내기로 합의했습니다. 정치권 관계자는 “올해 온갖 문제로 다퉈온 여야가 오랜 만에 한 목소리를 낸 것 같다”며 농반진반으로 말하기도 하던데요.앞으로 ‘산 넘어 산’하지만 충청권 역할론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의석 수 조정 문제만 해도 그렇게 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인구 비례만 놓고 보면 수도권 인구 증가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충청권 의석이 늘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충청권 의원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호남과 영남의 반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당의 경우 정치적 텃밭인 호남권 의석 수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충청권 의석 수 증대를 적극 추진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새누리당에서도 충청권 의석 수 늘리기를 당론화 할 경우 결과적으로 ‘호남 죽이기’라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충청권 출신 의원들 사이에서는 “결국 영호남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를 못 면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영남권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새누리당에서 충청권 자력으로 또는 수도권과 연합해서 당의 중심세력이 되겠다는 건 어쩌면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것”이라고 할 정도입니다.가장 큰 부담은 ‘충청권 역할론도 한 겹 벗기면 또 다른 지역주의 아니냐’는 비판입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이후 대선 때마다 후보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지역감정에 편승해 득표 활동을 벌였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대통령 집권 후 주요 인사에서 특정 지역 출신들이 우대받으며 지역편중 인사로 비판받는 일도 되풀이 돼 왔습니다. 앞으로 충청권이 이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지 궁금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