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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사명의 땅으로 3 - 시골에 사는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그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입술이 남보다 파랜 그는 친구들과 뛰지도 못하고 놀이도 못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큰 병원엔 가보지도 못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시는 할머니는 얼마나 마음만 졸이시는 줄 몰랐다.
어느날 한국사람의 눈에 딱한 처지가 눈에 띄어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고 심장이 선천성 기형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형편에 천문학적인 돈이 없어 한숨만 내쉬는 처지인데 한국사람의 도움으로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우리 팀은 정성껏 여비에 쓰라고 헌금을 했고, 그는 몇주 후 입술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할머니는 연신 춤사위다! 할렐루야!
너무 고마워서 그 이름을 "한국"이로 개명하였다.
"잘 커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돌려줘!"
15만 원의 월세 아파트를 임대해 거주했다.
주위의 주민들이 별로 환영하는 눈치가 아니다.
먼저 반갑게 인사해도 시큰둥이다.
현지인의 집을 방문해 보면 대문 안쪽은 반들반들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데, 대문 밖은 글자 그대로 쓰레기 천지다.
먼지가 많은 특성상 계단에 5밀리는 먼지가 쌓여 있다.
수대에 물을 받아 밀대걸레로 계단을 닦기 시작했다.
육층 아파트 계단 두 줄을 닦으려면 수대 네 번을 새로 비워야 한다.
처음엔 주민들이 말끔하게 닦인 계단과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몇번 반복되니 그들이 먼저 인사해왔다.
어떤 분이 우리 가족을 식사초대하셔서 간단한 선물을 가지고 갔더니 귀한 손님에게 대접한다는 수제 만두를 빚고 음식을 정성스레 대접해 주셨다.
친해진 후 물어보니 우리 집에 미국적의 한인 선교사가 살았는데 당시엔 아주 드물게 사륜 지프를 몰았단다.
한번은 전기회사로 전기세를 내러 주민 수십 여명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가정의 전기세가 현지인의 열 배였단다.
순서대로 누구라고 말하면 얼마라고 불러 지불하는 방식이기에 누구나 액수를 알 수 있었다.
그댁의 전기세를 알고 나서는 주민들이 마음문을 닫았단다.
그집에 내가 세들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으리라!
중국 대학생들을 사귀고 싶어 한어과에 청강했는데 학생들이 얼마나 환영해 주던지!
조선족 학생이 한 명 밖에 안되고 모두 한족이다.
수업이 끝나면 종종 간단한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몇몇 학생은 집으로 초대해서 다과를 대접하기도 하고...
여름 소풍을 길도 없는 오지로 갔는데, 냇물이 불어 조그만 강물을 건너야 했는데 남학생들도 용기를 내어 건너지 못했다.
한국 남아의 기상을 뽐내려 가벼운 여학생부터 없어서 건냈더니 줄줄이 따라 건넜다.
몇명의 여학생을 업어건네고 나는 파김치 재료가 되었다!ㅋ
"따거! 나 백혈병 걸린거 같아요!"
한 여학생이 잇몸에서 피가 난다고 호소해서 당시 케나다의 사역자들이 운영하는 치과병원에 대리고 가서 치위생사에게 치석제거를 맡기고 아울러 칫솔질의 중요성과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비용이 15위안
(1500 원)이어서 학생들을 몽땅 데리고 가서 치석제거를 시켰다.
한무리의 소학생들이 소풍을 갔다.
재잘거리는 모습이 우리 어릴 때와 똑같다.
그런데 머리에 똑같이 양은 냄비를 뒤집어 쓰고, 베낭 대신 후라이팬에 줄을 묶어 등에 매고, 손에는 쌀과 대파 몇 개, 약간의 채소를 들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생소했는데 아마 야외 생존 실습을 겸한 야외 체험학습 같았다.
한국 초등생들이라면 가능할까?
극성스런 엄마들이 뷔페를 배달시키거나, 햄버거나 피자를 싸주지 않았을까?
시내에서 20키로나 떨어져 있는 깡촌마을에서 한쪽 다리가 무릎이 굳어 구부려지지 않는 사십 대의 아저씨가 그 다리가 부풀어 오르고 물집과 혹이 무수히 올라 터져 진물이 줄줄 흐르는 증상으로 계셔서 입원시켰다.
몇번의 수술 후에 상처가 완치되어 가정에 모셔다 드렸는데, 남의 평방집을 세내어 살면서 남편은 그 몸으로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고 아내는 다리를 펼 수 없는 앉은뱅이 장애인인데, 손재봉틀로 남의 옷을 수선해서 가용을 벌고 있었다.
늦게 결혼한 부부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아들 하나를 얻었고 소학교를 다녔다.
그들의 얼굴에는 "우리는 순박 그 자체랍니다!" 하고 씌어 있었다!
이후 그분들과 친해져서 팀원들과 버스를 타고 여러차례 방문했다.
한번은 현지인 대학교수와 방문해서 오랫동안 교제하다보니 막차를 놓쳤다.
택시도 없고 모바일 폰도 없는 시대라 난감했으나 방법이 없어 걸어오기로 했다.
그 때 그 교수님의 난감한 표정이라니...
가로등 하나없는 깜깜한 비포장 신작로를 걸으며 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초신자인 저 교수님 시험에 들지 않게 차를 좀 보내 주세요!"
삼십 분 쯤 걸었을까? 거짓말 같이 뒤에서 밝은 헤드라이트가 비취어서 무조건 손을 들었다.
와! 보기드문 검은 세단이다!
한족 아저씨 두 명이 태워 주시는데 이십 원(이천 원)을 요구하셔서 감사함으로 드렸다!
할렐루야!
어느덧 그 아이가 영특하게 커서 북경대 법학과에 합격하여 연변 일대에 경사가 났다는 소문을 귀국 후에 듣고 최장님께 말씀드렸더니 4년 장학금을 주셨다!
할렐루야!
서울대는 오천 만명의 최고 대학이지만, 북경대는 17억의 최고 대학이다!
"양선생님! 내일 우리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난감한 목소리로 여성의 대부격인 간호부장으로부터 밤늦게 전화가 왔다.
사연인즉 5,1 부녀절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큰 명절인데, 여성 대표격인 그녀가 그날 소풍갈 차를 예약해 놓지 않아 당황해서 기사를 수배했으나 모처럼의 휴일을 누가 반납하고 차량운행을 하려하겠는가?
기꺼이 봉사하겠다고 해서 무사히 그녀의 위기를 탈출시켜 드렸다.
난 그날,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생리대를 선물받았다! 캬!
지역신문사에서 나를 취재온단다.
한국에서 고교 시절부터 한두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헌혈하는 습관을 그곳에서도 했는데 이것이 화제가 되었나보다.
당시 그곳에서 대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두 번씩 의무적으로 헌혈을 해야하는 규정이 있어 학생들이 두려워했고, 어떤 학생은 사람을 대신 사서 대리헌혈을 시키곤 했단다.
대학의 유력한 교수님으로부터 감사장과 유리로 만든 정교한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유리구슬을 선사받았다.
아마 자가 들은 두려워하는 헌혈을 외국인이 자기들을 사랑해서 기꺼이 동참한다고 침소봉대하지 않았을까?
다음날 신문에 서너단 되는 기사가 얼굴과 함께 실렸다!
출근길 거리에 항상 씻지 않아서 온 몸에 때가 덕지덕지 앉아 있고, 머리를 감은 지 육개월 쯤 되어 보이는 구두수선공이 있다.
그의 가족을 우리 집에 식사 초대했는데,
남방 천 키로 이상 떨어진 지방에서 생활을 위해 이민온 셈인 부인과 어린 딸이 같이 와서 따뜻한 물에 목욕을 권하니 한사코 거절한다.
겸양인지, 정말 싫어서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현지인들은 아홉 번 권해서 그만 권하면, 왜 열 번째 권하지 않냐고 한단다!
아내가 정성스레 마련한 요리를 맛있게 먹는 것 같지도 않아 서운했다!
도대체 문화의 차이인지 뭐가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길거리에서 작은 물품을 파는 얼굴에 다닥다닥 때가 낀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분간이 안가는 삼십대 정도의 여성을 초대해서 따뜻한 물로 목욕 후에 보니 훤칠한 미모였다.
아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서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십 초반에 남친이 있었는데 배반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했단다.
그런데 그가 헤어질 때 목걸이를 하나 주며,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했다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십여 년을 혼자 살았단다!
의리가 있는 건지 바보스러운 건지 이해가 안갔다!.
23. 사명의 땅으로 4 - 팀원들과 같이 백두산을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출발했다.
거리가 200여 키로 정도인데 5시간 정도 달려야 한단다.
한두 군데를 들러 백두산 근처를 갔는데 밤이 되어 길을 헤맸다.
시골이라 이정표나 불빛 하나가 없고, 비포장 신작로에 지나는 차나 길을 물을 사람 하나 없고, 당시 네비게이션도 없으니 그야말로 산중을 헤맸다.
몇시간을 헤맸는데 신작로에 나무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빵빵 거리니 자다가 나온 산림업 직원이 투덜거리며 나와 운행하다가 산불을 낼 수 있으니 야진을 만 원 정도 해야한단다.
그곳을 통과해서 한참을 달려 어느 마을을 통과하는데, 또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왜냐니까 이번에는 입업국이 아닌 위생국 관할이어서 통과세를 내야 한단다.
다시 어느 마을 차단기 앞에서는 이 마을을 통과해야하니 통행세를 내야 한단다.
되돌아 오는 길에 예의 야진금을 돌려달랬더니 다른 직원이 그랬으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란다! 햐!
산 입구에서 정상까지 짚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요금이 오천원 정도로 비싸다.
정상에 도착하니 그 위용이 어마어마하다!
과연 한민족의 영산답다!
바울이와 선이가 정상에서 천지가 바라보이는 광경을 사진 찍어 주려니 너무 두려웠는지 포즈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천지로 내려 가서 천지물에 발을 담그니 감개무량하다!
사진을 찍으려니 관리인인듯 한 이가 돈을 내란다!
현지인들이 8월인데도 두꺼운 국방색의 군용 오바를 입고 가서 의외였는데, 원래 산은 100미터 올라가면 1도씩 떨어지는 법!
2744미터니 영상 십도 정도에 바람이 너무 강해 체감온도는 영하의 날씨여서 준비없이 반팔 입고 간 나는 평생 추위를 그날
다 떨었다! ㅋ
그후 현지인들과 여섯 번 올랐는데 다섯 번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보통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확률이 20% 정도란다.
그만큼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아이들을 한족소학교 1, 3학년에 편입시켰다.
바울이가 선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등교했는데 마침
출국할 때 두꺼운 스키복을 장만해서 간 것이 주효했다.
영하 20도 정도의 날씨에 자전거를 타면 눈썹과 머리에 콧김이 하얀 서리가 되어 얼어 달라붙는다.
나중에 들으니 옷 잘입고, 맛있는 도시락 싸오고, 깔끔하게 매일 씻는, 한어도 잘못하는 녀석들이 오니 왕따를 당했나 보다.
도시락을 먹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모래를 뿌리기도 하고, 앞문이 없는 화장실을 학생들이 들여다 보는 바람에 용변을 귀가할 때까지 참을 수 밖에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바울이는 성격이 약간 내성적이어서 수업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육개월 동안 만화책만 보거나 잠을 잤는데, 어느날 부터 수업이 들리기 시작했단다!
선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용감해서 어렸을 때 오빠가 벌레가 무섭다고 하면 그것을 손으로 잡는 용맹함을 조상의 빛난 얼로 이어받았는데, 역시 적응도 잘했다.
누가 귀찮게 굴면 같이 싸웠단다! ㅋ
한번은 시장 아주머니가 "너는 한족애가 어찌 한국말도 잘하니?" 했단다.
한어 발음이 원어민 발음이니 오리지날 한족애로 본 것이다.
자주 산륜처(바퀴가 세개인 짐싣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이백원 정도인 요금을 항상 깍아 달래면 쪼그만 한국애가 한어를 잘하니 귀여워서 깍아주곤 했단다! ㅋ
한번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않고 씩씩하게 등교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어느날 아이들이 "왜 아빠는 우리를 가난하고 더러운 나라로 데려왔냐?"고 불평했다.
"너희 친구 중에 백두산과 한라산 다녀온 친구 있어? 필리핀, 중국, 싱가폴, 말레이시아 다녀온 친구 있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 다하는 친구 있어? 비행기 7번 타본 친구 있어?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친구 있어?
말을 타본 친구 있어?
태평양에서 수영해 본 친구 있어?" 하고 물으니 다시는 불평하지 않았다.
애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사귀도록 하자고 아내와 상의해서 반 전체 친구들을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서 집으로 생일파티에 초대했는데 한명도 오지 않았다! 햐!
팀원들과 종종 모아산으로 25인승 버스를 몰고 소풍을 갔는데 바울이에게는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오도록 했다.
오르막이 심해 바울이의 얼굴 표정이 심히 이글어져 있었으나 팀원들의 대단하다는 칭찬에 금새 표정이 자랑스러움으로 바뀌있다! 그것이 아빠의 속내이다! ㅋ
그즈음 팀원 중 소아마비를 앓았던 두 자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먼저 자전거를 끌고 가도록 해서 달리면 넘어지지 않음과 균형잡는 법과 공포심을 없애주면 쉽게 탈 수 있었다.
햐!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모양이다.
실제로 수영엔 젬병이지만 타인에겐 수영을 가르쳤으니깐! ㅋ
두 가족이 길림으로 열차 여행에 나섰다.
당시 외국인은 차표나 호텔비가 현지인의 두 배를 받았다.
꾀를 내어 현지인 행세를 하기로 하고 도착 때까지 6시간을 애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소학교 1,3학년인데 얼마나 답답했으랴?
바울이가 "다시는 아빠와 여행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ㅋ
일주일 휴가를 내어 홀로 남방 여행에 나섰다.
북경까지 30시간, 거기서 8시간을 기다려 환차하여 다시 상해까지 30시간!
처음 북경 나들이여서 8시간을 시내에 나가 이곳저곳을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해서 지루한줄 몰랐다.
당시 북경역에는 외국인들이 현지인과 경쟁해서 표구입이 불가능했기에 외국인 전용 대합실이 따로 있어 편리했다.
표를 일천 장 발매하면 대부분을 역무원 지인이나 여행사에 팔아 웃돈을 챙기니 정작 역에서 표를 사기가 별따기였기 때문이다.
표발매 시간이 되자 외국인들이 수십 여명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대합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라인 업!(줄서!)"
한 중년의 백인 남성이 고함을 쳤는데, 순간적으로 다들 움찔하며 얼어붙은 듯 줄을 섰다.
아! 그 문화적 모멸감이라니!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상해의 장강이 바다를 만나는 포구인 와이탄은 너무 유명해서 주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붐빈다.
일이백 년씩 된 서양식 건축물이 즐비해서 마치 서양의 중세시대를 보는 느낌이다!
상해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옛뱃길을 따라 소주를 거쳐 항주까지 장장 12시간을 갔다.
"수항이 천하 제일경"이란 말이 있단다.
다시 열차편으로 상해에 도착해서 귀가길은 배를 타고 대련항을 거쳐 연길로 가는 편을 택했다.
대련으로 가는 배삯이 의외로 싸다.
거리가 일천 키로 정도는 되고 30시간을 타야하는데 일만 원도 안되어 의아했다.
배에 올라보니 아뿔사! 침대나 좌석이 없는 입석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할수없이 다른 사람이 하는데로 싸구려 돗자리를 사서 그들 틈에 섞여 갔다.
그들 일가족은 남쪽이 살기가 어려워 농민공이 되어 두세 살 딸까지 데리고 일하러 북쪽으로 가는 중인데 성도이고 매우 친절해서 먹거리를 나눠주시고 나도 음식을 사서 대접하기도 하며 즐겁게 대련항에 도착했다.
다시 대련역에서 열차로 15시간 여를 내달렸다.
일주일 여행했어도 전체 1/10도 못본 셈이다.
대련에서의 일이다.
옛괘도전차를 탔는데 칠십 대의 어르신이 타셔서 자리를 양보해드렸더니, "하오런 하이여우아!"
하셨다. 좋은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의미이다.
한번은 연길에서 길림까지 밤열차에서 대학생들이 가득 앉아 가는데 좌석이 없는 칠십 대의 어르신이 6시간을 꼬박 서서 가셨단다.
개혁개방 이전에는 사회적인 약자들, 어르신, 어린이, 장애인, 임신부들을 우대하고 보호했단다.
그러나 그 이후 자본주의가 들어온 후 희생정신이 사라지자, 옛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길거리에서 젊은 여성이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서 들어드렸더니 "일 없시요!" 해서 충격을 먹었다!
혹시 성추행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역 지하도에서 한 여인이 이민가방 두 개를 낑낑거리며 운반해서 도와드렸는데 동행하던 현지인이 돕지 말라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천진 시내에서 자전거 리어카에 감귤을 잔뜩 싣고 가던 농부 할아버지가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다.
자전거에서 내려 열심히 널부러진 감귤을 모아 담아드렸는데 얼마나 고마와 하시던지!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주민들은 정이 많고 선량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면서 사회 전체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탈북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강변에서 만났는데 계속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물이 불은 두만강에서 꼭잡은 아내의 손을 놓치고, 살아온 그는 산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공포에 질릴 수가 있을까?
멀고 깊은 시골로 떠나보낼 수 밖에 없는 그에게 두둑한 여비를 들려줄 수 밖에 없었다.
조교(중국거주 북한동포) 한 분을 잘 알아서 북조선을 방문한다기에 여비와 라벨을 뗀 한국옷 몇 박스, 쌀을 몇 가마를 준비해서 보냈다.
귀국하기로 한 날이 몇 달 지났어도 연락이 없다.
드디어 연락이 닿아서 만났는데 두려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자신의 중국생활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었다고 귀국해서도 두려움에 연락조차 못했다고 했다.
"주여!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첫댓글 목사기 뭐여?
성경에 있남?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선물을 나눠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돌보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엡4:11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돌보는 사람 말하는 것 같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