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후손들이 일제시대 선친의 유산을 되찾겠다는 소송을 제기하고, ‘친일청산법’이 누더기로 통과되면서 사회적으로 반일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독립유공자들의 고달픈 삶이 공개되면서 이들과 유공자후손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반응이 사회각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청산리전투의 주역으로 독립군 사령관의 증손녀가 약사법위반으로 구속되는가 하면, 생계가 힘들어 카드대출을 사용하다 신용불량자가 돼 거리로 내몰린 유공자 후손들이 한둘이 아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일제 때는 독립운동 하다 가정이 풍비박산됐고, 독립된 후에는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지난 7일 서울역, 경찰은 불법 약재·약물 일제단속을 벌였다. 이날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점을 열고 중국산 약품을 팔던 서모(47)씨 역시 경찰에 체포됐다. 마약 성분이 함유된 약품을 판매한 혐의였다.
약사법을 위반한 서씨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하기 위해 신원조회를 하던 인천 부평경찰서의 형사과 직원들은 서씨가 독립유공자의 증손녀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한 장군의 직계 증손녀였던 것이다.
“조국이 우리 독립군 자손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가난뿐이에요. 먹고살려고 이렇게 발버둥치는데, 이제 와서 친일청산을 한다고 하니…. 정말 이상한 나라입니다.”
약사법 위반으로 인천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수감 중인 서씨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약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면서 “선친과 어르신들께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경찰은 “서씨가 팔아온 약물에 향정신성 물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서씨의 약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내 성분분석을 의뢰한 상태다. 마약반의 한 관계자는 “향정신성 성분의 포함 여부를 떠나, 서씨는 일단 약사법 위반으로 구속될 상황이다”고 귀띔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좌판을 벌여가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서씨의 증조부는 독립운동가 서모 장군. 서 장군은 일제시대 역사에서 최고의 독립군 쾌거로 불리는 ‘청산리전투’의 주역으로 만주지역의 일본군을 떨게 만들었던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였다.
이런 서씨가 구속된 사연은 무엇일까. 서씨는 “지난 93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영구 귀국해 있던 아버지의 초청으로 국내에 들어왔지만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직을 하려 했으나 나이 때문에 막히고, 결국 어머니와 좌판을 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먹고살기 힘든 우리에게 ‘독립군 집안의 증손’이란 사실은 장식품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지만 이념·분단 문제 때문에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 김모 지사(1904~1946)의 둘째 딸인 김모 할머니(68)가 대표적인 예. 아버지가 농민단체에 몸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좌익분자로 매도됐었던 김 할머니는 “장인 때문에 평생을 연좌제로 묶여 살아간 남편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할머니의 아버지인 김 지사에 대한 유공에 지난 96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기록이 늦게 발견된 데다 농민운동 전력이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좌익으로 몰리면서 가족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준 아버지이지만 너무나도 보고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반면 독립운동가로 선정됐음에도 친일 행적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경우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 중 친일행적 논란이 일고 있는 이들은 총 6명이다.
보훈처는 지난 93년 이들에 대해 재심사에 나섰지만 마무리짓지 못했고, 지난 96년 당시 민주당 김홍신 의원이 낸 보고서에 포함된 4명에 대한 예우를 박탈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독립유공자’와 ‘국가유공자’의 차이를 아는 이들조차 드문 상황이다. 광복회의 한 유공자는 “광복회원 중 한명이 버스를 타려고 독립유공자증을 제시했더니 기사가 ‘그게 뭐냐? 국가유공자도 아니고 위조증 아니냐’고 해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다”면서 “유공자 중 대다수가 그런 수모를 당하기 싫어 요금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광복회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다른 건 몰라도 친일파 척결을 확실히 했고,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에 대해서도 깍듯한 예우를 하고 있다”면서 “독립운동이나 친일문제, 애국지사들에 대한 인식은 북한보다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12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서씨도 “중국에 살다가 한국에 정착하고 난 뒤, 놀란 것은 친일했던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라면서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한편 보훈처가 발표한 ‘애국지사 및 유족 생활정도 분포’에 따르면, 생존 독립유공자 3백9명 중 연금을 포함해 월소득 1백50만원 이하의 유공자들은 전체 유공자 중에서 3분의 1 정도로 이들은 국민평균 소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