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그래서 70평생 사 모은 시집도
목월의 「나그네」, 미당의 「팔 할이 바람」, ‘명동백작’ 박인환의 「박인환 시집」,
딱 세 권밖에 없다.
시를 잘 모르면서도 <국화 옆에서>를 읽다 보면,
거울 앞에 앉아있는 누님의 희끗희끗한 뒷모습이 선하여 콧마루가 시큰해지곤 한다.
요즘도 생각날 때마다 위의 세 시집 가운데서 시를 한두 편씩 읽는데,
아름다운 시어로 사람과 사물을 풀어낸 시인의 심성이 맑게 전해져오곤 한다.
어느 날 신문에서 우연히 『미당 전집』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 산문집 「안 잊히는 사람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렇게 애타게 찾았건만 상굿도 만나지 못한 이봉구의 「명동백작」 대타!
미당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지난 시절 문인들 얘기일 터,
나는 그 어려운 시절을 치열하게 보냈을 가난한 문인들 얘기가 좋다.
그러나 동네서점에 주문하여 책을 사다 읽어보니 내가 기대했던 문인들 얘기가 아니라,
1930년대에 미당이 겪었던 ‘文學外傳’ 에피소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집의 아귀를 맞추기 위해 여기저기 신문이나 잡지에 쓴 글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대부분의 시인은 산문에 서툴기 마련인데
원고청탁을 받고 매달 마감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에도 없는 하찮은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미당이나 출판사가 독자를 속인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뭐든 좋게 해석하는 습관 덕에 지레짐작하여 속는 것이다.
어쨌거나 누군지도 모르는 미당의 개인적 지인들 얘기는 빼고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문인들 얘기만 골라 쪼매 소개하고자 한다.
미당 서정주(1915~2000) 선생은 대표적인 생명파 시인이다.
그의 고향 고창에 가면 더도 덜도 말고 딱 미당을 닮은 선운산이 아담하게 솟아있고,
4월 하순이 되어야 가로늦게 피는 선운사 뒷동산의 동백꽃이 처연하게 아름답다.
선운산은 가장 높은 곳이 300m 정도로,
선운사를 오목하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가 꼭 겸재 정선이 그린 한 폭의 병풍 같다.
<국화 옆에서>처럼 이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지었으면서도
미당은 후배들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친일활동을 했고 박정희와 전두환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좌파들이 미당에게 유독 저주를 많이 퍼붓는 데는 까닭이 있다.
해방 후 미당은 순수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좌파문학에 적극 반대했다.
미당은 김동리 김춘수 박목월 유치환 조연현 조지훈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선 적이 있다.
좌파들은 미당의 친일 행적보다 이 사실에 더욱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땅의 좌파들에게는 국가나 국민보다 빨간 사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젊음을 몽땅 바쳐 달달 외운 게 마르크스‧레닌과 김일성 일대기밖에 없으니까.
창씨개명한 미당의 일본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였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좌파들은 창씨개명을 친일의 주요 지표인 양 들이댄다.
당시 현실을 잘 모르는 젊은이들을 오도하기 위한 속임수다.
왜정시대 때 초등학교를 중퇴한 내 아버지도 호적에 일본이름이 올라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나라를 왜놈들에게 빼앗겼으니 창씨개명은 당사자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한 사정을 번연히 알면서도 창씨개명을 나라라도 팔아먹은 짓인 양 침소봉대한다.
이게 당선되면 김정은에게 달려가 배알(拜謁)부터 하겠다는 문재인 일파의 진면목이다.
미당의 시 <자화상>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한다.
미당의 부친은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으로 일했는데,
미당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그 일을 두고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고 표현했다.
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당은 시어를 캐고 심성을 닦아 불세출의 시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시인을 두고 후세의 잣대로 친일을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속 좁은 단견이다.
그러나 내가 봐도 전두환에 대한 아첨은 좀 지나쳤다.
처음으로
-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訟詩 -
서정주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무려 30연으로 이뤄진 전두환 송시의 들머리다.
읽는 사람의 등뼈가 뒤틀릴 정도로 낯간지러운 아첨이다.
72세의 고령인 미당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
16년 연하의 전두환에게 그처럼 심하게 아부를 했을까?
미당의 시집은 그 자체가 이 나라 현대시의 역사다.
발간 연도별로 정리하면
<화사집><귀촉도><시선><신라초><동천><질마재 신화><늙은 떠돌이의 시>,
시집의 제목에도 운율이 흐를 정도로
미당의 일생은 ‘8할이 바람’이 아니라 ‘10할이 시’로 가득 차 있다.
끝으로 송창식이 노래로 부른 미당의 시 <푸르른 날>을 함께 감상해보자.
그 청정한 마음 어디에 진정으로 친일을 할 여지가 있었겠는가.
‘고놈들이 고르코롬 일찍 망할 줄 모르고’ 몇 줄 찬양시를 써줬으되
미당의 가슴에는 조국과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긍지가 그득했던 것이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비가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아,
뉘라서 천지운행의 이치를
이보다 더 예리하게 관찰하고 간결하게 표현해낼 수 있으랴!
첫댓글 내게 있어 부끄러운 추억담 하나가 고창 선운사에서 있었지.
30여 년 전의 일인데,
아내와 함께 동백꽃 보겠다고 찾았다가 그 뒤로 안돌아가보고 동백꽃 없다하고 돌아온 것이 그것..
그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
서정주 시비 부근에서 만난 황소와의 눈싸움...
서로 눈을 노려보다가 겁이 나서 눈길을 돌리고 도망을 쳤었지.
그러고도 그런 일 없었던 척 살아온 지난 30년 세월이 또 부끄럽고...
건필 잘 읽었습니다.
아래 내 블로그에 퍼 갑니다.
요즈음은 창작품의 출판법으로 시를 복사하기 어려워요.
감사합니다.
http://kydong77.tistory.com/16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