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밖이 어둑어둑한 여섯 시 집을 나선다. 천리 밖 통영이 목적지다. 동양의 나폴리라 일컫는 통영과 욕지도 사량도엔 봄이 한창일 것이라고, 오는 봄을 미리 마중가자고 떠난다. 남해 곳곳에 서려있는 충무공의 조국사랑 흔적과 우리 씨족의 고흥선영을 찾아 선조를 배알하자고 나선다. 그간 말로만 간 것은 내가 게으르기도 하려니와 승용차가 부실하니, 장거리를 여행이 부담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더하여 젊은 날과는 달리 장거리 운전이 자신이 없는 이유도 있다. 40대 젊은 날에는 하루에도 7~800km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루 200km도 버겁다. 다만 이번엔 주로 고속도로로 가니 아내와 운전을 교대하기로 약속하고 떠나는 것이고, 새 자동차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해서다. 다만, 역병의 진정기미가 아직 안개속이니,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키며 극히 조심하자고 다짐하고 떠난다. 광양이나 진해는 절대로 기웃대지 말자고 했다.
우리 동네도 이젠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대전을 넘어서니 산색이 다르다. 연둣빛은 한층 더 진하고 양지에는 분홍빛 립스틱을 곱게 바른 진달래가 뭉텅뭉텅 피어 유혹한다. 또 한 쪽에는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가 반긴다. 저 정도면 제아무리 꽃샘추위가 몰려와도, 코로나가 제아무리 설쳐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가당찮을 것이다. 머지않아 산은 온통 울긋불긋하고, 향기에 취한 벌 나비는 어느 꽃에 앉아야 할지 정신이 몽롱할 것이다. 덩달아 마음이 제법 가볍다. 이 정도만 해도 집을 나선 보람이 있다.
통영. 옛 지명은 충무김밥이 유명한 충무. 충무공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 저 멀리 한산도를 바라보니 공의 애끓는 시조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남해가 대체로 그렇지만, 곳곳에 공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절과 백척간두에 섰던 조국을 구한 전흔이 서려있는 곳. 동양의 나폴리랄 만큼 해안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다. 이순신공원에서 장군의 숭고한 구국일념인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일필휘지가 조각된 장군의 동상 앞에 서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장군이 아니 계셨다면, 저 그림 같이 아름다운 파란 바다가 과연 우리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장군께 추모시 必死卽生 한 수를 올렸다.
구국일념으로 거북선을 지으시고
군사들과는 必死卽生 必生卽死를 다짐하시니
옥포해전으로부터 노량해전까지 32차례 전투에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전대미문의 32전 전승을 거두신 원동력인가 합니다
특히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께 고하신 말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는 必死卽生의 결의가 아닐는지요
노량에서 마지막 가시는 길
‘戰方急愼勿言死我’를 읊으며 눈 감으시니
그 새까맣던 적군이 모두 물러 간 후에야 전사 사실을 발표하였다지요.
오늘날 장군은 아니 계시지만 ‘必死卽生’ 4자는
후손들 머리에 각인되어 조국선진화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세세무궁토록 평안하시고 우리민족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여기서 머지않은 진해와 광양은 도시가 온통 꽃물결로 덮였겠지만, 천하의 잡것이 언제 어디서 내 몸을 파고들지 몰라 초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욕지도에 들어선다. 육지에서 제법 멀지만, 배는 자동차를 태울 수 있는 카훼리라 요금은 좀 비싸도 참 편리하다. 다만, 후진으로 승선하라니 어렵다. 보석 같은 섬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과연 넓지는 않지만, 해안절경이 눈부시다. 일주 관광선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대로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여기저기 둘러본다. 도로사정이 지극히 불편한 울릉도와 비교된다.
깎아지른 절벽을 4인승 모노레일카가 외짝 궤도를 붙잡고 잘도 오르내린다. 일부러 불안감을 조성하여 승객에게 짜릿함을 주려하였는지 모르지만, 보기엔 퍽 불안정해 보인다. 그나마 어쩌면 45도 급경사에서는 금방 밑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조마조마 하다. 속도만 올린다면 여전 청룡열차다. 정상에 도착해 바라보는 섬의 주변 경관은 파란 물감을 풀어 놓은 그릇 위에 뜬 자잘한 섬들 같고, 물결은 바람한 점 없이 윤슬이 반짝인다. 자연스레 이은상의 시어 ‘가고파’가 떠오른다. 주민들의 삶은 풍요로워 보이고, 봄은 역시 우리 동네보다 조금 앞서 곳곳에 진달래, 개나리가 활짝 웃고 있다.
어딜가나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끄는 출렁다리가 눈앞에 있으니 상하 좌우로 흔들리는 다리난간을 꼭 잡고 건넌다. 마치 다리를 건너면 피안의 세계에 다다를 것처럼. 여하튼 번지점프만은 못해도 스릴 만점이다. 이 때 다리 밑을 바라보니 너비가 10미터는 됨직한 바위틈에 정박한 검은색 보트 하나가 보인다. 정박한지 수천 년이 되어 보인다. 육지로 올라간 사람을 기다리다 바위로 변한 배처럼 보인다. 얼핏 미생지신(尾生之信)이 떠오르니 가여운 마음이 들어 사진을 찍고 짧은 디카시 한수를 읊는다.
어인 까닭이오
수천 년을 기다리시니
미생지신을 꼭 지키려 하시오
이젠 잊으시고 떠나면 어떨실지.
몇 년 전 울릉도에 갔다가 주민들이 온통 돈의 노예처럼 도무지 여유라곤 없고, 인심은 야박하기 짝이 없는 이전투구 모습에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이곳은 사실 볼 것이 많지 않지만 해상공원답게 해안선이 특히 아름답고, 주민들이 여유로워서 좋다. 그러나 곳곳에 여행객이 버렸음직한 쓰레기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새에덴동산이란 묘한 건축물을 보고 왔다. 병든 딸을 위하여 자력으로 버섯모양의 묘한 집을 여러 채 지어 놓은 곳이다. 방송에 나와 매우 유명해진 곳이지만, 두 모녀가 지은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집과 예술적 조형물이 많다. 자식을 위한 가없는 사랑과 굳은 의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종교적 신념이 없인 더욱 어려운 일이리라. 그분들은 이미 3년 전 타계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가족이 관리만 하고 있다 한다.
통영으로 다시 나왔다. 현대문학의 대들보 같은 박경리 선생을 기념관으로 뵙고 왔다. 시골집 마당에서 고추를 봉지에 담는 모습은 소박하고 인자한 시골 할머니의 정겨운 모습이다. 나는 종종 이 모습을 보면서 인자하신 우리 큰어머니를 떠올린다. 또 전혀 소설가 같지 않은 평범한 아주머니 같은 분이 그런 대작들을 어찌 쏟아내셨을까 경탄한 것도 여러 번이다. 빈민촌 같은 해안주택가 동피랑을 아름답게 꾸민 예술가들 못지않게 존경스럽다.
사량도로 들어갔다. ‘사량’이라 하니까 예전에 자주 듣던 양주동박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반세기 전 라디오 동아방송에서 밤 열시에 양박사와 김상희씨 등 명사를 초대한 대담프로그램. 사회자의 질문이다. 사랑의 어원은 무엇일까 하니 양 박사의 즉답인 즉 한자로 생각 사(思)와 헤아릴 량(量)이라 많이 생각하는 게 곧 사랑이 아니겠느냐 하신다. 자천타천 국보1호 석학이라 하신 분의 말씀이니 다들 박수로 화답한다. 그럴듯하다. 이후 나는 ‘사랑=思量’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혔다. 양 박사의 쉰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사량도는 蛇梁島라 쓴다. 남북 두 섬 사이의 해협 모습이 뱀을 닮았다고 생긴 이름이란다. 남북 섬 간 연결다리는 얼핏 호사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사장교다. 아마도 교량의 상판을 높이고 교각 사이를 충분히 넓혀 여객선과 어선의 운항을 편하게 하려함이라고 추측해 본다. 하긴 남해에 수 없이 많은 다리는 대체로 사장교다. 여기는 대형 여객선들이 드나드는 곳도 아니니 혹여 기능보다는 아름다움 추구가 우선은 아닌지 모르겠다. 숙소 앞에 멀찍이 보이는 둥근 참 다랑어 가두리양식장 십여 개가 퍽 귀해 보인다.
숙소에서 옥녀봉을 바라보면 제법 높은 산 정상에 출렁다리 세 개가 보인다. 많은 등산객이 찾는 산이다. 높이는 300여 미터지만, 시작점이 해발 십여 미터밖에 안 되니 육지의 사오백 미터 산과 같다. 거기에 중간부터는 암벽이라 여간 가파르지 않다. 건장한 젊은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체력이 고갈된 사람들에게는 무리일 수도 있다. 등산객들은 이점을 북한산 인수봉 오르듯 즐기나 보다. 아내와 둘이 쩔쩔매며 겨우 올라가 사진 한 번 찍고 출렁다리에서 심장테스트를 한 번 하고 내려왔다. 스스로 조심할 일이다.
思量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첫댓글 통영 거제는 여러번을 다녀 온 곳이지만
섬까지는 게을러고 무심해서 들리지 않았는데
덕분에 섬 구경도 하게 되어 감사 합니다
부인과 교대로 운전하며 피로도 풀고
정겨운 여행 많이 즐겨 보세요
저는 요즘 당일치기로 그냥 막 다녀요 ㅎ ㅎ
저는 임진생. 종종 작품 속에서 저와 비슷한 연배로 느낍니다. 아니라면 큰 실례니 송구합니다. ㅎㅎ
저도 자주 다니려고 노력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한 달 전에 몰래 다녀왔습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靜岩 유제범
나이라는 놈이 상의도 없이 일흔 고개를 살짝 넘어 가네요 -ㅎ-
지면으로 글벗 하면 되지요
나이 먹으니 몇년 차이는 별 일도 아니더라고요
혹 수`년전 서정모임에서 뵌 일이 있는 지 싶기도 합니다
좀 오래 되었지만 -
@초록 꿈 그러시군요. 제가 결례했습니다.
글쎄 서정모임에서 어쩌면 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이 없으니 송구하네요.
서울에서는 먼곳인데 용기를 내셨군요. 그래도 한 번쯤은 꼭 들릴만한 곳이니 잘 하셨습니다. 저도 가본 곳이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공감하는 글귀마다 미소를 보냅니다. 건강하십시오.
제범 멀지만, 명소를 어렵게 다녀왔으니, 기행문을 남겨야겠기에 몇 줄 썼습니다.
사진만으로는 뒷날 여행소회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꼭 남기곤 있습니다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수필집 원고는 차대표에게 넘김지 20여일이 지났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차대표가 한참 편집작업으로 바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통영관광 명물 케이블카 타고 미륵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 자그만 섬들이 많아 절경이드군요
유선생님. 자세한 기행문으로 못 가본 곳 감상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모노레일, 타볼만한 관광상품이더군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늦게나마 읽어 보고 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