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전남 신안군에는 순례자의 섬, '기점·소악도'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듯한 이 작은 섬은 ‘섬티아고’라고도 불리는데요. 다섯 개의 작은 섬이 노두 길(섬과 섬 사이를 잇는 길)을 따라 이어져있어 종교와는 상관없이 기도, 휴식, 명상을 할 수 있는 평화로운 장소라 느껴진다는 조유리 작가의 여행기를 '정책주간지 K-공감'에서 확인해 보세요.
12개의 집 따라 12㎞ 걸었더니
마음속 폭풍우가 잔잔한 바다로
마음을 치유하는 길,
전남 신안군 ‘기점·소악도’
러시아 성 바실리 성당을 연상시키는 마태오의 집. 소기점도와 소악도를 잇는 노두 길 중앙에 있다.
평범히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슬픈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사랑하는 아이가 허망하게 떠나고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져내렸다. 마치 길을 잃고 표류하는 작은 배가 폭풍우치는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떠난 아이는 빨리 잊으라고 말했지만 나의 편협한 마음은 아직도 미움과 슬픔을 다 털어내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얼기설기 꼬인 실타래 같은 이 마음을 다시 올바르게 풀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은런 척하기가 힘든 시기가 찾아오곤 한다.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나쁜 꿈인 것처럼 우울한 순간이 나를 덮쳐오는 것이다. 아이가 떠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그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아마도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인정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두운 이 마음을 풀어내야 하는 시간과 장소가 절실히 필요했다. 마음을 솔직하게 풀어놓지도 못하고 아직도 어딘가 뒤틀려 있는 나를 위한 여행지. 나는 남편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이 작은 기도가 되는 ‘순례자의 섬–기점·소악도’로 마음을 치유하는 길을 찾아 떠났다.
한국의 ‘섬티아고’ 작은 순례자의 길,
대기점도–소기점도
순례자의 섬은 친절하지 않다.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하루에 네 번 정해진 시간에 맞춰 물때를 체크하며 섬들을 건너야 하는 여행지다. 순례자의 섬은 신안 증도면에 위치한 ‘대기점도-소악도-진섬-소기점도-딴섬’ㄹ 있다. 이 섬은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12개의 아름다운 건축미술 작품이 있으며, 미로 속 보물을 찾듯이 장소를 발견해나가는 독특한 여행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듯한 이 작은 섬은 ‘섬티아고’라고도 불린다. 종교와는 상관없이 기도, 휴식, 명상을 할 수 있는 평화로운 장소다.
전남 신안 송공항에서 여객선을 타면 순례자의 길이 시작되는 대기점도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다. 대기점도가 가까워지자 선명한 푸른 지붕을 가진 산토리니풍의 ‘베드로의 집’이 우리를 맞이해줬다. 커다란 건물이 아닌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아담한 크기의 건축물 내부에는 작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이 있다.
순례자의 길을 따라가면 두 번째 ‘안드레아의 집’이 나온다. 해와 달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으며 바다를 배경으로 청량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예배당을 바라보니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눈을 가진 고양이 조각상이 집 문을 지키고 있다.
세 번째 ‘야고보의 집’은 그리움의 집으로 불린다. 독특한 나무 문이 특징인 이곳에서 그리운 이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요한의 집’은 긴 바람 창을 통해 들어갈 수 있으며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게 빛나는 장소다. 대기점도와 소기점도를 잇는 노두 길가에 다섯 번째 ‘필립의 집’이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호빗족이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귀여운 건축물이다. 소기점도 호수 위에 한 송이 꽃처럼 피어 있는 여섯 번째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햇빛을 받아 색유리가 눈부시게 빛난다. 소기점도가 끝나는 길에 일곱 번째 ‘토마스의 집’이 있다. 새하얀 도자기 위에 박힌 유리구슬이 마치 별빛처럼 반짝였다.
기점·소악도에서는 누구나 순례자가 된다
방랑자에서 순례자로,
소악도–진섬–딴섬
대기점도-소기점도를 모두 보고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두 길은 꽤나 긴 거리를 자랑한다. 노두 길 중앙에 태양처럼 빛나는 여덟 번째 ‘마태오의 집’이 있다. 황금빛 양파 모양의 지붕이 만화에 나오는 왕궁 같은 느낌을 준다. 소악도로 넘어오면 아홉 번째 ‘작은 야고보의 집’이 있다. 유럽의 작은 오두막 같은 느낌이며 물고기 모양의 유리창이 특징이다.
소악도 삼거리에 도착하면 나오는 열 번째 ‘유다 타대오의 집’은 뾰족한 삼각 지붕에 작은 창들이 앙증맞게 나 있다. 칭찬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어떤 기도를 할까 고민했는데 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하는 남편의 직업이 떠올라 ‘우리 신랑이 앞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진섬 북쪽에는 사랑의 집으로 불리는 열한 번째 ‘시몬의 집’이 있다. 조가비 문양의 부조와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열린 창이 바다로 들어가는 성문 같은 느낌을 준다. 힘든 시간을 함께 겪은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 여기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이곳은 예배당이 없다. 단지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예배당을 대신하는 장소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딴섬에 외로이 유배된 열두 번째 ‘가롯유다의 집’으로 향해 갔다. ‘시몬의 집’에서 ‘유다의 집’으로 향하는 길의 숲과 해변은 기점과 소악도 내에서도 절경으로 손꼽힌다.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모래사장 뒤로 ‘가롯유다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때를 맞추지 못하면 다가갈 수 없는 예배당으로 붉은 벽돌의 높은 첨탑이 특징이다. 천천히 섬티아고 길을 걸으며 남편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소에 다다랐다. 문 옆에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12개 예배당을 지나며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천천히 생각하며 무언가를 빌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마지막 기도는 단 하나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우리는 기도를 마친 후 힘차게 종을 쳤다.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즐거운 불편’을 지향하고 있는 여행지인 순례자의 섬은 시간이 정해진 우리의 삶처럼 12개 지점을 때맞춰 통과해야 하고 헤매더라도 바른 곳을 향해 찾아가야 하는 곳이다. 불편한 만큼 신비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최근에 한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 한 군데를 뽑으라고 하면 나는 이 ‘기점·소악도’를 선택할 것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입고, 무거운 관심과 시선이 나를 꼭꼭 숨게 했다. 그럼에도 다시 사람들에 의해서 용기를 얻고 온기를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원망은 멈추고 내가 나를 위로해야 할 시간이다.
얼굴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바다 향기, 따뜻한 햇살, 그리고 나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걸은 덕분에 조금 행복해졌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내 마음속의 흔들리던 배는 고요해지고 가야 할 길로 다시 떠난다.
‘기점·소악도’ 여행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