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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사명의 땅으로 5 - 한족 할머니 한 분이 대퇴골 수술을 받고 퇴원하시는데 백두산 근처가 댁이셨다.
삼월이어서 엠블런스 로 별 겨울장구를 갖추지 않고 출발했는데 아뿔싸 그 근처가 일 미터 정도 눈이 쌓여 있었다.
천지가 온통 하얐다.
사단 수동으로 가다가 약간 내리막길이어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기어를 삼단으로 조정했는데 아차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돌아버렸다.
브러이크도 핸들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도로 옆에 꽁무니를 걸쳐놓고 환자를 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 휴!
내려서 보니 도로가 유리알 같이 미끄럽다.
마침 지나가는 버스가 있어 5,000원을 주기로 하고 견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환자댁에 도착해서 보니 그 영하의 날씨에 난방이 없는 것이 아닌가,
군대 막사 같이 흙 복도가 있고 그 안쪽으로 두어 평의 50센티 높이의 침상이 있는데 다 낡아 빠진 것은 물론 난방이 아예 없는 것이다.
동행한 팀원들과 갹출하여 인민폐 300원(3만 원)을 드리면서 만일 아프셔서 전화하시면 언제든지 모시러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작별인사를 하시는 어르신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내과 의사가 한 분 있었는데 마음이 순박해서 형제같이 가깝게 지냈다.
얼마 후 사직하고 남방으로 장사를 하러 떠났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들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일이니 말릴 수 없었다.
몸은 약했으나 성실하게 사시는 젊은 집사 한분이 있었는데 생활고에 지쳐 아내가 가출했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아내가 인신매매 되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아내를 다시 포용하고 전에 없이 평온하게 일상을 꾸려나가 우리 팀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집안일을 도맡기고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렸다.
우리가 철수 후 그 지역의 암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집을 렌트해 드리고 운영비를 드렸으나 감당하지 못하셔서 호스피스 사역을 접게 되었다.
한 여전도사가 성실히 성도들을 섬기셔서 꾸준히 교제했는데, 귀국 후 한국에 오셔서 눈이 안보인다고 진찰을 요구하셔서 정영택 안과병원장님께 보였다.
선천적으로 안구에 기형이 있어 대수술을 요하며, 오백여 만원이 소요된단다.
방법이 없어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원장님께 상황을 말씀드리니 쾌히 무료로 수술해 주셨다!
할렐루야!
"세상이 또렷이 보이니 넘 좋아요!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할빈의 빙등축제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의 의거장소인 할빈역을 돌아보니 아무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날의 거사를 앞둔 의사의 두근거림이 내 심장에 전이되는 듯 하다.
영하 25도의 날씨인데도 바람이 없어서인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안문, 만리장성, 심지어 파리의 개선문 등 세계적인 건축물을 수키로 떨어진 강에서 얼음을 덩어리 채 톱으로 썰어와 만든 것이 예술이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하기사 규모하면 중국 아닌가?
천안문을 보며 남대문만 드나들었던 조선의 사신이 그 규모에 놀라 기어갔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나라는 외양을 치장하기를 어마어마하게 하는데, 내실은 부족한듯 했다.
로켓을 발사하는 나라인데 시장에서 산 나사는 헐거워 못쓰기 다반사다.
왜 첨단기술을 일상생활에서 적용하지 못할까?
연변과기대에서 군대시절의 이춘근 형제를 반갑게 맞았다.
그의 부인 또한 순수함이 남편 못지 않으시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부총장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제 일생일대의 최대의 결정을 선생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엘리트 교수로 소문난 교수 한 분이 내 의견을 물었다.
나라의 최대도시의 저명한 대학에서 교수 초빙이 왔는데 재직 중인 대학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 모두가 반대한단다.
한국의 오지 중 으뜸일듯한 태백 정도의 연변에서 유사 이래 한번도 진출해 본 적이 없는 최첨단 도시의 저명 대학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지역사회의 영광이지만, 문화 차이와 수준이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은 엄청난 결단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본토를 떠나도록 종용받는 기로에 선 아브람의 머뭇거림이 이랬을까?
"도전하세요! 인생은 어차피 선택과 책임이에요!"
응원한다는 의미에서 금일봉을 전달했다.
"여보! 엄마집에서 춘절 초대가 왔어요!"
아내가 엄마로 사귄 한족 할머니 가정에서 설명절에 초대가 왔단다.
임대해서 사는 아파트의 양지녁에 칠십 대의 머리가 하얗게 센 전형적인 노파 한분이 항상 친구도 없이 외롭게 앉아 계셔서 아내가 말벗을 해드리며 집으로 모시고와 음식도 대접하고 목욕도 시켜드리며, 나중에는 딸이 없다고 수양딸로 삼아주신 한족 할머니 댁이다.
안방에서 침대 위에 할머니와 세 며느리가 배를 깔고 티비를 보며 깔깔거리고 계시고.
아들들은 어디 있냐고 물으니 주방을 가리키신다.
주방에서 세 아들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하얗게 밀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만두를 빚고 있었다.
한국 만두를 중국은 "교자(지아오즈)"라고 하고, 앙꼬없는 찐빵을 "만두(만터우)"라 바꿔 부른다.
이런 농담이 있다.
"엄마, 아빠, 과년한 딸 셋이 있다. 밥을 누가 하게?"
"아빠와 과년한 딸이 있다. 밥을 누가 하게?"
정답은 모두 아빠다!ㅋ
요리 못하는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원!
남방에선 애낳는 것만 빼고 모두 남편이 한단다.
조선족들은 예외다!
그래서 한족들은 조선족 남정네들을 부러워한단다.
나는 한국남자들은 아무 가사도 안하지만 아들은 낳아 준다고 했다.
그 증거가 아들 바울이가 나를 꼭 닮지 않았느냐고 했다! ㅋ
그 댁 아들들이 얼마나 효도하는 지, 아들 셋이 퇴근하면 매일 엄마댁에 와서 두어 시간씩 놀다간다.
중국엔 최고의 친구를 "쯔지(自己)"라고 한단다.
이 정도의 친구는 "친구가 원수에게 죽으면 대신 원수를 죽여주는" 정도의 친구란다!
실제로 이들은 우리 가족을 친형제로 여겼다.
한족 교회의 지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슨 프로그램 말고 성경을 가르쳐달라"고.
하루종일 가르쳤는데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진작 알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아! 이분들이 성경 자체에 관심이 있구나!
중국교회에 소망을 보았다!
문제가 생겼다!
환율이 100대 1이어서 한국돈 만원이면 위안화로 100원을 줬는데, 180:1로 평가절하 되어서 만원을 바꾸면 60원 정도 밖에 안줬다.
앉아서 생활비가 절반쯤 깍인 셈이다.
게다가 가지고 온 돈과 선교비가 바닥났다.
할 수 없어 전 가족이 귀국해야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계시는지?
꾸준히 선교비를 후원하신 황요한, 김영안, 조생구, 여수 은혜와 평강교회 성도님들께 감사하다!
아내의 수양엄마께서 꼬깃꼬깃한 돈 2,000 원 정도를 한사코 주셨다.
아드님들이 주신 용돈을 모으셨을게다.
이돈은 거의 40만 원 정도로 공무원 봉급 두세 달 분량이다.
떠나던 날 팀원과 현지인들이 백여 명 열차역에 배웅해 주셨다.
그냥 와서 멋진 추억 만들며 사랑을 나눈 것 밖에 없는데 되돌려 받는 사랑이 너무 컸다.
15시간을 열차 타고 천진역에 내려 부두에 가서 한국행 페리를 탔다.
"대륙이여! 잘있어! 또 올께!"
배 안에서 비빔밥을 파는데 일인분에 오천원씩 해서 너무 비싸 30여 시간을 온 식구가 굶고 왔다.
아내는 기억력이 좋아서 그때의 배고픔을 지금도 꺼내 곱씹는다! ㅋ
지금 생각하니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하다!
"한국에 맛있는 것들이 우릴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햐! 입맛 돈다!
이민가방 여섯 개에 초라한 몰골의 우리 일행이 비까비까한 차림의 서울 깍정이들 앞에 좀 그랬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죽을 자들인가?
"당신들이 열차와 배를 60시간 씩 타봤수?
천안문, 만리장성, 이화원, 백두산, 상해 와이탄, 할빈 빙등축제, 경박호 가봤수?"
귀국한 기념으로 슬리퍼 차림으로 북한산에 올랐다.
와! 한국에도 이런 명산이 있다니?
그날 한 등산 오신 할아버지께 등산화 부터 한 개씩 사라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슬리퍼 끌고 북한산 오는 사람이 어딧냐고!
"피! 남의 주머니 사정도 모르시면서!"
25귀국, 교회 개척 - 25. 귀국, 교회 개척
귀국 후 당장 묵을 곳이 없어 난감했다.
형제간도 반가와서 하루이틀 머물 수 있지만 자기들의 생활이 있는데, 계속 기댈 수야 없잖은가?
당장 생활비도 문제여서 일단 아내가 형부의 한의원에 출근했다.
아이들이 큰 형님댁에서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밖에게 기다리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힘들었다고 형님이 말씀하셨다.
사실상 두번 째 부도를 맞은 셈이다!
마침 처조카가 총각 때 살던 열 평 정도의 방 하나 거실 하나의 낡은 아파트를 장가가려 내놓았는데 나가지 않는다고 당분간 살라했다.
우선 다급한 불은 껐다.
얼마 후 아내와 친분이 두터운 최두락 집사님이 자기 퇴직금을 담보로 2,800만 원을 대출받게 도와주셔서 그돈으로 송천동에 이십여 평의 이층 홀을 임대하여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선배 의사들과 대화하다가 한 분이 "나는 돈에 부족함이 없어서 만 원 짜리는 버릴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네 식구의 가장인 나는 주머니에 천원짜리 한 장이 없는데! 하나님! 들으셨지요?"
정의감이 투철하신 김장로님 가정이 등록하셔서 귀하게 동역해 주셨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우리 부부는 장로님과 더불어 멋진 휴가의 추억을 쌓았다.
부안의 바닷물과 부안댐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해창의 시냇가에서 투망질을 하면 팔뚝만한 크기의 숭어와 잉어가 몇 마리씩 걸려들고...
어떤 날은 이십여 마리씩 잡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내는 신바람이 나서 구경군들에게 고기를 나눠주기도 하고...
요리 솜씨 좋은 아내의 생선 냄비 찌개는 왜그렇게 맛있는지? ㅎ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콤한 휴가를 주신 것으로 생각됐다.
같이 여행을 다니면서 식사대접을 하면 장로님은 "아! 장로가 목사님께 매번 식사대접 받기가 쑥스럽네요!"를 연속하셨다.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물고기 낚는 어부가 되었다고 웃기도 했다.
아이들은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바울이네 학급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단다.
중국에서 온 등치 큰 녀석이 뒤에 앉아 버티고 과묵하게 앉아있는데, 틀림없이 장풍을 쓰거나 태극권의 고수일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지 누가 감히 건들지 못했단다.
평소 주눅이 들었던 체구가 작은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바울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집으로 몰고와 공부도 같이하고 예배도 참석했다!
선이가 다니는 중학교에서도 작은 소란이 있었단다.
입학해서 처음 자기가 아는 한자를 전부 써보라고 했는데 학생들이 겨우 열 자나 쓰는 정도였는데 선이는 300 자를 썼다나!
더 놀라운 사실은 소풍을 가서 토너먼트로 춤 대결을 했는데 전교 일등을 했단다!
기고만장해서 수도권 여행을 보내주기만 하란다.
상품으로 용인 에버랜드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티켓을 타왔다! ㅎ
교장실 청소를 와서는 "양선 학생 교장실 청소왔습니다!" 하고,
돌아갈 때는 "양선 학생 청소 마치고 돌아갑니다!"
큰소리로 복창하고 가니 김용환 교장선생님께서 등록금 절반을 장학금으로 주시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키우고 계시는구나를 느꼈다!
어느날 김강호 목사님과 여수교회 후임 목사께서 주스 두 병을 사가지고 위로차 방문오셨다.
당시 청송감호소에서 사형수 옥중전도로 유명하셨던 박효진 장로님의 <하나님이 못고칠 병은 없다>는 간증수기를 수십여 권 사서 주윗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십여 권을 여수교인들에게 가지고 갔다.
먼저 신풍의 최집사님에게 들러 안부를 묻고 책을 드리려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가 평소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님같은 분이어서 친하게 지냈었는데, 오년여 만에 선교를 다녀와서 처음 200여 키로를 달려와 방문했는데도 방에 들어오라는 인삿말도 않고 얼굴 표정이 냉냉하셨다!
책 선물을 한사코 거절하셨으나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드리고 나왔다.
그렇게 순수하시고 다정했던 부인 집사님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다.
무슨 일이 있으셨을까?
"최목사님 한테 얼마 받았어요?"
뜬금없이 장집사님이 물으신다.
"뭘 받아요?"
내가 되묻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마도 후임목사에게 돈을 받고 교회를 물려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인 것 같아서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광열이네 집을 심방해서 같이 계시던 선자 집사님에게도 책을 선물했다.
평소 믿음의 용장이신 선자 집사님은 선교를 다녀온 후의 우리 가정의 노후를 걱정해서 준비하려는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을 가지신 분인데,
나를 보더니 무슨 일을 하다 들킨 양 안절부절을 못하셨다!
마침 광열이 여동생이 고층 아파트에서 베란다로 뛰어내려 다행히 몇 군데 골절로 누워있어 손을 골절 부위에 대고 간절히 주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드리고 나왔다.
한두 분을 더 방문해서 책을 드리고
여수를 출발해서 전주로 향하고 있는데 광열이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얼굴을 못본지 오년여 만이다.
"다시는 여수에 오지 마세요!"
"네ㆍ알겠습니다!"
오년여 만에 얼굴도 못본 상태에서의 첫 대화였다.
여수에서 개척 맴버이고 광열이를 둘러싼 얼마나 많은 눈물과 사랑의 사연이 많은 관계였는데, 왜 이렇게 삭막해졌을까?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 다시는 여수에 오지 말자! 옛성도들의 명령에 순종함도 주님께 순종하는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천국에서 주님께 여쭙자!"
노회에서 후임 목사님을 만나자마자 교인들이 자기들은 자가용 있으니 불편함을 못느껴서 목사가 자가용이 없어도 차를 사줄 생각을 안한다고, 또 몸이 아파 죽겠는데 신경도 안쓴다는 등의 불평을 하셨다.
오죽했으면 나에게까지 그러시랴 싶어서 여비 십만 원을 봉투에 담아 남모르게 가방에 넣어 드렸다.
한주쯤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돈 목사님이 넣으셨어요?"
"네! 몸이 편찮으신 것 같은데 보약이라도 조금 지어드시라고요!"
"당장 계좌번호 대세요! 돌려줄께요!"
"그러지 마시고 동역자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쓰세요!"
나중에 들으니 성도들에게 양목사와 교제를 끊으라고 엄명했단다.
선물했던 "하나님이 못고칠 병이 없다" 란 책의 "병"을 "사형수"로 보지않고 진짜 병으로 생각해서 이단같다고 여긴 것 같다!
평화동으로 교회당을 이전해서 주변의 가난한 주민들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섬김을 모색했다.
한 장애를 입어 이동의 어려움을 겪는 형제의 발이 되어 드렸고, 매주 한번 장애인 수영장에 가서 장애 중학생들의 수영 학습을 도왔다.
항상 예배당이 열려있기에 큰 쌀통을 입구에 놓고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쌀을 퍼가시도록 했다.
한번은 비장애 아주머니 한 분이 자녀는 많고 정부에서 주는 양식이 부족하니 쌀 좀 달라고 하셨으나 조건이 안된다고 거절한 것이 몹시 가슴이 아팠다!
후일 생각하니 규정에만 매여 사랑을 잃은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른가로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아는 지인이 팔다남은 각 중고교의 교복을 몽땅 주셔서 교회당의 한 방에 진열해서 필요한 학생들이 가져다 입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