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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체벌 유감 강석태 (꿈나무 제33호 게재)
◈ 들어가면서
학생인권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작년 한 해 세계를 우울하게 한, 특히 이 나라의 인권 상태를 후퇴시킨 사건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민주 국가이며 경제적으로는 세계 랭킹 10위권으로써 금년엔 세계 선진국 모임인 G20 국제회의 개최국이란 지위에 올랐다. 또한 지난 반세기 동안 외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대외원조를 베푸는 위치로 올랐다는 자랑거리(?)가 있는 반면 숱한 인권 침해 사건이 하루가 멀다시피 일어난 한 해였던 것이 부끄럽다. 그 중에서도 작년 이맘때, 곧 1월 20일 오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는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강제 철거에 항의하여 농성 중이던 철거민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철거민 5명과 진압 경찰관 1명이 희생당한 인권 침해 사건이 가장 먼저 뇌리를 때린다. 사건 진압이란 명분으로 희생된 경찰관에 대하여는 동료 경찰들과 유가족, 그리고 관계 행정 당국에 의해 장례가 치려졌으나,
공권력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희생된 민간인 5명의 죽음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한 해가 다 된 오늘날까지 그 억울한 주검이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병원 냉동실에 갇혀있고 영혼이 갈 길을 못 찾고 허공에 맴돌고 있다.. 이들은 이승에서도 가난과 싸우고 사회적 낙오자로 어려운 삶을 살다가 피땀으로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쫓겨나게 된 것에 항거하여 싸우다 목숨을 잃었건만, 어쩌면 저승 가는 길조차도 이다지 멀고 험하단 말인가! 이 일에 대해선 더 말을 멈추겠다.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으나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마다 이와 같이 삶의 권리를 잃은 사람들이 숨죽이며 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 아이들, 곧 초중고 학생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고 있다.
◈ 학교는 초법적, 치외법권 영역인가?
해병대 훈련소에서 삼청교육대 식 이중 처벌이 웬말
작년 말 모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 안양시의 모 고교에서 교칙을 어긴 학생들을 일차적으로 처벌을 한 후 다시 그들을 모아서 경기도 김포 소재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시켜 1박 2일간의 훈련을 받게 한 이중 체벌을 가했다 한다.
해병대 훈련소에 다녀온 아이들의 입을 빌어 그들이 겪은 상황의 일단을 알아보자. (독자의 이해를 위해 기사를 필자 나름으로 각색했다)
해병대 캠프 훈련이라는 처벌을 받았던 학생 중 한 명인 진 아무개(18, 고3)군이 그가 겪은 체벌훈련에 대해 이렇게 증언
했다.
“우리는 10월 24~25일 해병대 캠프에서 1박 2일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첫날 오전 10시 입소 식을 마친 후, ‘누워서 몸통 들기’와 같은 피티 체조와 기초유격훈련을 받았습니다. 통나무를 들고 앉았다 일어서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줄사다리 오르기 등 고된 훈련이었어요.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 봤던 삼청교육대가 따로 없었어요. 우리가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데, 이런 훈련을 왜 해야 하나요?
“저녁엔 7시부터 해병 정신교육, 상황판단 훈련, 침묵 명상을 한 뒤 자정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도 비슷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진군과 같은 학생들이 어떤 교칙을 어겼으며 그 교칙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고교는 학생이 교칙에 정해 진 벌점 제도에 따라 한 가지 위반에 1~3점씩인 벌점이 쌓여 15점을 넘으면 이들에게 해병대 훈련을 과한다. 처벌 대상 위반 항목은, 흡연. 음주와 학교 폭력 등은 물론, * 교직원에 대한 결례, * 실내·외에서 떠들거나, * 돌아다나면서 밥을 먹거나, * 지각, * 입술 보호제나 살구색 선크림을 바르거나, * 교복 넥타이를 안 매거나, * 껌을 씹거나 하는 행위 등이다.
이와 같은 처벌 대상 조항을 어기면 일차적으로 운동장을 돌고 복도에 서있게 하는 벌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서 벌점이 15점을 넘으면 이차적으로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시켜서 이중 처벌을 과하는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처벌로 학생들의 행동이 교정될까? 학생들의 반응은 반성이나 교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대부분 “이를테
면, 정말 우리들이 흡연을 하지 않게 하려면, 왜 흡연이 좋지 않은지 금연 교육을 하는 게 맞지 않는가. 학교는 오직 징계를 위한 징계를 일삼는 것 같다,”고 반발한다.
한 가지 더 기막힌 것은 학생이 10점 이상 벌점을 받으면 학부모를 학교로 불러서 ‘학생 신분에 어긋난 행위를 했을 경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 는 ‘서약서’ 를 제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학생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그들의 부모에게도 책임을 분담케 하는 비겁한 비인도적, 반교육적 처사이다.
해병대 캠프 훈련에 불참한 몇 명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대하여 “학교의 과도한 복장 규제, 해병대 캠프 등이 학생의 다양성과 개성, 의사결정권 등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라며 항의를 했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이를 학생 모두의 의견으로 볼 수 없고, 해병대 캠프는 ‘이중 처벌’ 이긴 하지만 학생의 행동 개선을 위해 교칙으로 정한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화금보석? 돈? 명예? 그런 것이 귀하긴 해도 ‘가장’ 귀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자마자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 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 위로 하늘, 아래로 땅에서 나 홀로 가장 귀하다)” 하고 갈파한 것이나,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한 것은 하나같이 인간의 존귀함을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여 천하 그 무엇과도 비꿀 수 없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란 우리의 고유 사상이다(동학사상).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며 이에 대해“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제31조에서“모든 국민이 능력에 다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정하였다.
학교는 이 인간의 존엄성, 곧 천하 만물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인간성을 일깨우며, 타고난 무한한 가능성을 신장케 하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학교라는 제도는 인간이 살아오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장치이지, 절대적이며 신성 불가침한 존재가 아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없어도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라는 제도가 생긴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정보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 멀지 않아 학교가 무용지물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웃기는 것은 이 학교라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절대적 불가침의 권위를 가진 것처럼 무소불위를 권위를 휘두르려 하는 것이다. 즉, 헌법 위에 군림하고 초법적, 치외법권적인 ‘교칙’을 만들어서 학생의 인권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인권의 사각지대가 바로 학교이다.
◈ 체벌 예찬한 어느 여교사 이야기
얼마 전 한 용감한 중견 여교사가 학교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소수의 문제 학생들을 제거하고 수업 학생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은 책에서 “선생님을 우습게 아는 5%의 아이들이 교권에 공공연히 도전하고, 20%의 건들건들파 아이들이 그에 가세함으로써 학급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이에 영향력 있는 15%의 열쇠파가 가세하게 되면 그 교실은 통제 불능의 무법천지가 된다”고 했다. (통계학 전공인가?) 그러면서 이 선생님은 “왜 그럴까?”하고 그 원인을 자문하고 나서 그 해답을 제시했다. 즉, “학생을 체벌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학생들이 그와 같은 교사의 약점(?)을 노려서 수업을 방해한다는 것. 그러므로 학생 체벌은 해야만 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필자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첫째, 교사를 우습게 안다는 5% 학생은 어떤 부류인가. 확실하진 않으나 추측컨대 성적이 우수하거나 외국 유학파가 아닐까 한다. 이 선생님은 초등학교 6학년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가르치는 학생 중 상당수가 영어를 그 교사에게서 배울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의 실력 소유자일지 모른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전국의 많은 영어교실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발음하고 원어민과 자유로이 의사소통이 되는 것을 영어교육의 한 목표로 삼고 있는 현행 교육방침하에선 영어 실력이 그 목표에 미달하는 영어교사가 받는 수모가 안쓰럽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관계에 신뢰가 중요한 것처럼, 특히 교사. 학생 간에는 무엇보다 믿고 따르고 믿고 이끌어주는 신뢰가 없다면 교육이라는 기능이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사제지간의 사랑과 존경이 있어야 마음과 마음의 교류, 공감을 통해 가르침과 배움의 열매가 열린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얼굴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를 귀여워하고 이해하며, 마음에 들고 좋아야 공부할 마음이 생기고 공부를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물을 길들이듯이 채찍과 당근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리고 도 하나는 학부모의 태도이다. 곧잘 “우리 아이 때려서라도 공부 좀 잘하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데,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어선 안 된다.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사람은 매를 맞아야 제대로 자란다는 미신이 자리하고 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것이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우리가 왜인들에게서 세뇌당한 찌꺼기가 남아서 주인의식 없이 힘센 지배자에게 복종하며 사는 꼴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우리들 기성세대가 이 낡은 것들을 하루 속히 정리하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될 어린이, 청소년들이 올바른 교육 환경에서 자라도록 힘쓸 의무가 있다.
◈ 사랑의 매는 없다!
교사와 학부모가 야합(?)해서 만들은 합작품으로 한국 교육계에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관행이 있는데, 교사들의 교육용 필수품의 하나인 ‘사랑의 매’라는 것이다. 필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용처와 방법은 가정에서와 학교에서는 달라야만 하고 그 효력도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에 사랑의 매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매를 들어 훈계해야 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보모 자녀 간에는 애정 어린 대화가 있어야 하고 훈계도 최소한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매질을 한다는 것은 가정의 화목을 깨기 쉽고 아이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도록 방목을 하라는 건 아니지만. 아이의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사랑의 매를 그야말로 적절히, 적절히 사용한다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제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마음에 두자.
내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닌 한 사람의 인격체이다. 특히 부모인 내가 손으로 아이를 때리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지 말자. 평소에 아이와 가까이 지내고 여러 모로 관심을 가지고 대하면 아이가 스스로 잘못을 교정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자율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로 키우도록 노력하는 가운데서 매를 들 필요가 없어지게 하라.
그리고 부모는 ‘사랑의 매’라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당신은 매를 든다는 것을 아예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허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아이의 잘못을 훈계하려고 할 때에 호흡조절, 곧 ‘숨 고르기’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고, 이성적인 마음으로 아이와 ‘대화’를 하게 되면서 온화한 분위기에서 아이의 잘못을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바로잡도록 유도할 있으면 좋을 것이다.
훈계를 하려면 아이가 왜 그런 훈계를 들어야 하는지, 부득이 매를 때린다면 왜 매를 맞아야 하는지를 아이가 납득하도록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잊지 말자.
다음으로 교사의 입장에서는 ‘사랑의 매’를 어떻게 사용함이 좋을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명박 정권 하에서 가장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것이 법치와 실용이란 말인 상 싶다. 그래서인지 법의 아류인 학교의 교칙이란 것도 법치주의 사조의 물결을 타고 각급 학교에서 체벌이 힘을 얻으면서 ‘사랑의 매’의 설 자리가 단단해 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 자율화 = 교장 자율화’신화의 허구
그러면서 고개를 든 것이 학교 자율화, 나아가 학교장의 자율화 강화이다. 이명박 정권의 시장지상주의 경제정책과 궤를 같이하여 교육정책도 규제완화와 자율화라는 기치 아래 3불 정책을 시행하면서 마련되었던 각종 규제를 일시에 풂으로써 뒤따라 우열반 편성, 0교시학습, 심야 보충 수업 등 강제적 ‘자율학습’이 나타났다. 그러면서 허울 좋은 권한 위양이란 명분으로 중앙부서가 장악했던 감시 감독 기능과 권한이 대폭 지방교육청에 위임됐다. 이것은 나아가 학교장의 권한 강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소위 학교장의 권한 자율화로 자리매김했다. 학교장이 제대로 된 교육관을 가진 경우라면 이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대부분의 각급 학교장들에게서 학생의 인권을 옹호하는 학교 교육 행정을 펴리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감히 말한다. 앞에 언급한 체벌 옹호 영어교사를 비롯하여 아직도 학생 체벌을 해야만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교사들은 하루 속히 교단을 떠나라고! 왜냐하면 당신들은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을 모독하는, 반교육자들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영어나 수학, 역사 등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그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니다. 교과목 수업을 통해 피교육자의 인간 성장을 돕는 과업이 교사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참교육의 현장에서 도태 당해야 마땅한 교사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받은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이더냐고. 교사들 뿐 아니라, 오늘 이 나라의 각계각층에서 지도자연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 대부분이 올바른 학교교육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종래의,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교육이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 곧 가치를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만 가르치고, 그 지식을 달달 외워서 시험지 상에 정답으로 토해 내는 기술 만 가르쳤다. 그러니 ‘가치’와 ‘값’의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 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 결과 숭배사상으로 무장시켜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공하고 출세하면 장땡이로 숭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진. 선. 미와 같은 근원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없는 교육을 받았다. 지난 10년간의 민주 정권을 제외한 그 밖의 독재정권과 군사정권하에서는 지배세력이 기획하고 인도하는 바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출세와 성공의 길인 것을 뼈저리게 일고 그에 익숙하도록 세뇌 당하면서 소위 지도적 위치에 오른 자들이 현재의 지배세력들이 아닌가. 극히 소수가 사회의 부조리를 의식하고 그것과 싸웠으나 겨우 10년간 인권 존중에 기반한 민주정치, 민주교육을 하다가 보수정권의 재등장과 더불어 반동적인 주류 세력에 밀려서 도로 오늘과 같은 상태로 주저앉고 있다. 이 세력들이 아직도 학교교육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면 잘못일까? 군국주의, 독재 치하에서 배운 것이 몸에 밴 교사이기에 저 ‘해병대 캠프’훈련 따위 처벌이나, 초등 영어교사의 체벌예찬과 같은 반교육정 발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결론으로 필자는 학교에선 체벌을 절대 금지하도록 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학교에 학생체벌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갈 할 자격은 없다.
◈ 학생인권 보장 법규
심각한 교육계의 학생인권 침해를 방지하고자 오래 전부터 사회 각계각층의 여론을 수용하여 정치계에서 학생인권을 보호하는 장치를 법제화하려고 하였다. 2006년 3월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기존의 ‘초중등 교육법’의 개정안을 제안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사회에서도 ‘아이들살리기운동본부’가 ‘학생인권법 국회통과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진행하였으며, 뒤따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입법화운동 추진을 선포하였다. 이듬해에 청소년, 교사, 학부모들도 입법 촉구를 부르짖고 나섰다. 이와 같이 학생인권 문제가 큰 국가적인 과제로까지 떠올라 마침내 그해 11월 23일 국회를 통과하여 12월 14일에 공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2008년 3월 1일부터 아래와 같은 초중등 교육법 제18조의 4항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초중등교육법 제18조 4항(학생의 인권보장)
< 학교의 설립자. 경영자와 학교의 장은‘헌법’과‘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
이것은 비록 애당초 기안하고 추진하였던 학생의 자치권 보장, 체벌 금지 등 핵심 내용이 빠지고 선언적인 조항에 그친 아쉬움이 있으나, 그나마 학생인권을 보호한다는 구체적인 언급을 한 것만으로도 매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학생인권의 시장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학교자율화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2008년 4월 19일의 촛불문화제를 들 수 있다. 이때 우리 청소년들이 부르짖은 소리(구호)는 무슨 고답적인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너무나도 현실적이며 절실한 일상적인 요구의 분출이었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은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
오늘 고교선택제가 더 진행되면서 학교마다 ‘모범생’을 요구하며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면 이 ‘범생’(위너=winner)들의 대열에서 떨어져나간 다수의 학생들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루저’(loser)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살아야 할 것인가?! 학교를 서열화하고, 학생을 점수에 따라 줄 세우는 교육정책 하에서 학생의 인권 보장은 걸음을 멈춰야 할 것인가?
정지된 학생인권 앞으로 나아가려면 모두가 하늘로부터 받은 인권의 존엄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힘으로는 약하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 어느 분이 남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가 새삼 정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올바른 나라꼴이 중요한 것 아닌가.
사족으로 내가 보고 온 미국에선 부모가 어린이를 혼자 집에 두고 외출하거나 직장에 나감으로서 아이를 방임하거나, 건강상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정을 알고도 16세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일을 하도록 내버렸을 때와 같은 우리가 생각하기엔 별일이 아닌 것이 ‘아동 학대’죄에 해당되어 처벌을 받는 다는 것과, 교사가 학생을 체벌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란 것을 말함으로써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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