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조선초는 역사의 격랑기이다. 이 격동의 시기를 잘 헤처나가 명문가를 이룬 집안이 있다.바로 교하 노척(盧頭) 집안이다.
고려 충목왕(1344~1348) 때 좌정승을 지낸 노척(盧正頁)은 아버지가 이부상서(이조판서)를 지낸다.그는 왕실의 평양공 왕현의 딸
경녕옹주와 결혼하면서 크게 현달할 수 있었다.공민왕 때는 딸을 원나라 황제에게 주고서 집현전 학사라는 원나라 관직을 얻는 등
친원(親元)노선의 핵심인사로 떠오른다. 그러나 기철 권겸 등과 함께 공민왕을 축출하려는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만다.
그에게는 노제(盧濟) 노진 노은(盧 ) 노영(盧瑛)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 군(君)으로 책봉될 만큼 당대 최고 실력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누리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반역자의 아들로 전락했다. '서원군' 노제는 아버지가 죽자 얼마 후 저잣거리에서 참수(斬首)를 당했다.둘째 '창성군' 노진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복권돼 밀직사 판사에까지 오른다. '경원군' 노은은 북원(北元)에서 병부상서에까지 올랐지만 사신이 되어 고려를 찾았다가 공민왕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노영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이렇다 할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노척의 네 아들 중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둘째 노진이다.
밀직사는 조선시대의 승정원과 중추부를 겸한 핵심기관이며 그곳의 최고책임자인 판사(判事· 2품)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로 인한 반역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그만큼 노진은 능력이나 인품 어느 하나 혹은 둘 다 뛰어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진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화(禍)를 가져다 줄 아들이 있었다. 노진에게는 노정(盧楨) 노선(盧瑄) 노균(盧鈞)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인 노선이 화태(禍胎)였다.말년의 공민왕은 미쳐가면서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들을 선발해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다. 자제위 소속 청년들은 "음탕하고 추악한 짓으로 왕의 총애를 얻었다."
여기에 '얼굴이 아름다운' 노선이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등과 더불어 선발됐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문세가의 자식들이었다.
홍륜의 아버지 홍사우는 전라도 방어의 책임자였고 한안의 아버지 한방신은 찬성사, 권진의 아버지 권용은 밀직부사, 홍관의 아버지 홍사보는 각문 판사였다. 그들은 공민왕의 성(性)노리개이면서도 언제든지 비빈(妃嬪)들과 간통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결국 홍륜과 관계를 가진 익비(益妃)가 임신을 하자 공민왕은 자제위 청년들을 제거해 익비의 아이를 자기 아들로 만들려 했다.
이 음모는 내시 최만생을 통해 홍륜 등에게 전달됐고 홍륜 등 '자제위 5인방'은 공민왕 23년(1374) 9월 최만생을 앞세워 국왕을
시해(弑害)했다.아버지의 반역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노진은 결국 아들 노선의 공민왕 시해로 말미암아 다른 두 아들 노정 노균과 함께 먼저 사형당한 노선의 뒤를 따라 처형당했다. 멸족(滅族)의 화를 당한 것이다.
아마도 노선은 처형 당시 자기 집안은 이 땅에서 다시는 회복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예도 좀 더 일찍 회복된다. 그의 사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양왕(恭讓王)이다. 그로 인해 딸은 순비(順妃)에 봉해졌고 노진도 '제효공(齊孝公)에 추증될 수 있었다.
나아가 노진의 한(恨)은 막내 노균의 유복자(遺腹子) 노한(1376~1443)이 풀어주게 된다.

'孝思亭' 현판은 공순공 노한의 17대손 노태우(盧泰愚) 제13대 대통령의 친필이다.
그 효사당(孝思堂) 노한(盧閈 1376-1443)이 노량 언덕에 자리한 효사정(孝思亭)의 주인공이다.
그의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좌의정 민제(閔霽)의 세째 사위로 태종과 동서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종 2년(1400) 4월 6일 신축 11번 째기사 <노한으로 공조 의랑을 삼고, 전이로 사헌부 시사를 삼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노한(盧閈)으로 공조 의랑(工曹議郞)을 삼고, 전이(田理)로 사헌 시사(司憲侍史)를 삼았다.
처음에 노한이 시사가 되고 전이가 의랑이 되었는데, 세자(世子)가 임금에게 여쭈기를,
"민제(閔霽)가 정승이 되었는데, 그 사위 노한으로 헌관(憲官)을 삼으니 사리에 불편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라서 그 직(職)을 바꾸었다.'
민제의 첫째 사위는 한양 조박이며 개국1등 정사1등 좌명3등공신에 사람이다.둘째가 태종 조선 3대왕이며
셋째 사위가 바로 교하 노한이며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성 윤 노한이 민무질의 옥사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은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1409)9월 27일 병신 2번 째기사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단산 부원군(丹山府院君) 이무(李茂)를 순금사(巡禁司)에 가두었다. 한성 윤(漢城尹) 노한(盧閈)을 불러 묻기를,
"이무(李茂)가 일찍이 너에게 이르기를, ‘안성군(安城君)의 당(黨)이 성(盛)하다.’고 하였는데,
네가 이 말을 민씨(閔氏)에게는 말하고 어째서 나에게는 고하지 않았는가? 네가 민씨에게 별다른 은과(恩過)도 없고,
과인(寡人)에게 또한 수원(讎怨)이 없다."하였다. 노한이 대답하기를,
"신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이에 지신사(知申事) 안등(安騰)을 시켜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 등을
불러 노한(盧閈)과 대질하게 하였으니, 민무회 등이 일찍이 노한의 말을 임금께 고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노한을 옥에 가두고,
또 집의(執義) 이공유(李公柔)를 옥에 가두었으니, 공유는 이무(李茂)의 아들이다. 옥관(獄官)이 그 아비의 음모를 물어,
곤장을 거의 90대나 맞고도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임금이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묻는 자가 잘못이다.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법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아비의 죄를 증거해 이루겠는가?"
하고, 곧 명하여 석방하였다.
노물재(盧物載?∼1446)는 본관은 교하(交河)로서 우의정 노한(盧閈)의 아들이다.
노물재(盧物載)는 심온(沈溫)의 딸과 결혼했다.윗 동서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른다.
아버지 아들 2대가 나란히 국왕의 아랫동서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심온의 첫째 사위가 세종대왕이며 둘째가 노물재이다. 막내사위가 진주 강석덕이다.
그 아들이 유명한 강희안 강희맹형제다.강석덕이 효사정이라는 이름을 짓고 강희맹이 효사정기문을 썼다.
노물재에게는 노회신(盧懷愼) 노유신(盧由愼) 노사신(盧思愼) 노호신(盧好愼) 네 아들이 있었다.
1431년(세종 13) 유거감찰(謬擧監察)에 임명되었을 때 최안우(崔安雨)의 천거에 사사로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해서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되지는 않았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인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고, 같은 해 부인이 죽자 부의는 물론 곡식과 종이·관곽까지 하사받았다.
1490년(성종 21)에는 노물재의 재산상속시 유서 중에 첩자에게는 재산상속을 하지 말라는 문구가 있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상속법과 상치하기 때문에 조정의 논란이 되었으나, 의금부의 계에 따라 첩자에게도 상속이 되어 유서보다 상속법이 우선한 일례가 되었다. 특별한 재능은 없었으나 외척의 신분으로 2품의 품계에까지 올랐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노사신盧思愼)은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 노균(盧鈞)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노한(盧閈)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載)이며, 어머니는 심온(沈溫)의 딸이다.
1451년 생원시, 145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선임되었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여 국가 사명(國家詞命)을 관장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 이듬해는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462년에 세조의 총애로 세자좌문학에서 5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를 거쳐 1463년에는 도승지에 초배(超拜)되어 국가의 기무(機務)를 관장하였다.
같은 해 홍문관직제학을 겸하여 세조가 주석(註釋)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要解)』를 증보하여
찬진(撰進)하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하였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로서 충청도 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하여 지방 행정의 부정을 낱낱이 조사했고,
이듬해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또한, 1466년에 실시된 발영(拔英)·등준(登俊) 양시에 응시하여
각각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
1467년 말에는 건주위 정벌(建州衛征伐)의 공으로 군공 2등(軍功二等)을 받았다.
1468년에는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9년에 의정부 우참찬·좌참찬을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우찬성에 재임 중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의 사신 강호(姜浩)와 예교(禮交)를 맺어 외교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470년(성종 1) 의정부좌찬성에 올라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1471년에는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사서(史書)와 시문을 찬진하고 성균관에서의 강의 등으로 성종의 문치를 도와,
1482년에는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85년에는 영중추부사로서 평안도와 경기도의 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진휼사 겸 호조판서(賑恤使兼戶曹判書)가 되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487년 말에는 명나라 효종(孝宗)의 즉위를 맞아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우의정으로서 영안도도체찰사(永安道都體察使)가 되어 국가의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담당하였다.
1492년에 좌의정, 149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문과 독권관(文科讀卷官)이었을 때 처족을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윤필상(尹弼商)·유자광(柳子光) 등이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 논의를 주동하자,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처지 때문에 미온적으로나마 동조하였다.
그러나 유자광 등이 옥사를 확대하려는 것을 적극 견제하여 사림파의 피해를 줄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사옥(史獄)이 진행되는 도중인 같은 해 9월에 병사하였다.
유년 시절에 홍응(洪應)과 함께 윤형(尹炯)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문과 급제 직후에 이미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집현전학사 때에는 장서각에 나가 독서에 전념하여 ‘진박사(眞博士)’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세조·성종의 총애를 받아 문치를 도와서, 호조판서에 재직할 때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주관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은 직접 편찬을 담당하였다. 또한 성종 때는 여러 사서(史書)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 1476년 12월에는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와 함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진하고,
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수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서거정·성임(成任)·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총재했으며,
이를 위해 1476년부터 동국문사시문(東國文士詩文)을 수집하였다.
한편 1482년에는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신증(新增)하고, 이듬해에는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서거정·어세겸(魚世謙) 등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