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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쪽은 상주의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함창현(咸昌縣)의 경계까지 54리, 서쪽은 충청도 연풍현(延豐縣)의 경계까지 18리, 북쪽은 같은 현의 경계까지 36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다.
【건치연혁】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이다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고, 또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에 관산(冠山)으로 고쳐 고령군(古寧郡)에 소속시켰던 것을,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공양왕 때에 감무로, 본조의 태종 때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가은현(加恩縣) 현의 남쪽 4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이름을 가선(嘉善)이라 고쳐 고령군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이 현에 내속(來屬)되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관문(冠文)ㆍ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ㆍ관산(冠山)ㆍ문희(聞喜)ㆍ관현(冠縣).
【성씨】본현 최(崔)ㆍ장(蔣)ㆍ박(朴)ㆍ송(宋)ㆍ전(錢), 김(金) 선산(善山). 박 은풍(殷豐).가은(加恩) 전(全)ㆍ윤(尹)ㆍ변(邊)ㆍ연(延)ㆍ길(吉) 호계(虎溪) 백(白)ㆍ황(黃)ㆍ김(金)ㆍ나(羅)ㆍ방(芳). 병곡(柄谷) 방(方)ㆍ신(辛) 내성(來姓)이다.견천(絹川) 방(方) 고곡(高谷)ㆍ적촌(赤村)ㆍ소산천(小山川)ㆍ마량(馬良)도 같다. 황(黃) 내성(來姓)이다.벌천(伐川) 심(沈). 잉을항(仍乙項) 고(高).
【형승】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릿길[棧道]을 만들었다. 권근(權近)의 기문에,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해서 사다릿길을 만들었다.” 하였다. 함곡관(函谷關)같이 장하고, 촉(蜀) 나라의 길처럼 험하다. 어변갑(魚變甲)의 시에, “방비의 시설이 함곡관같이 장하고, 가기 힘들기는 촉 나라 길처럼 험하다.” 하였다.
【산천】 주흘산(主屹山) 현의 북쪽에 있는 진산이다. 관혜산(冠兮山)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희양산(曦陽山) 가은현 북쪽 15리에 있다. 3면이 모두 석벽이고, 옛날 군사 창고가 있었던 성이 있다. 재목산(梓木山) 가은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장산(獐山) 호계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소둔산(所屯山)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봉명산(鳳鳴山)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화산(華山) 가은현의 서쪽, 본현에서 67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이화현(伊火峴) 현의 서쪽 18리, 충청도 연풍현의 경계에 있다. 계립령(雞立嶺) 속칭 겨릅산[麻骨山]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현의 북쪽 28리에 있고, 신라 때의 옛길이다. 새재[鳥嶺]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다. 세상에서 새재[草岾]라고 부른다. 관갑천(串岬遷)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고, 토천(兔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릿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ㆍ7리나 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兔遷)이라 불렀다.”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봉우리에 옛날에 지키던 돌 성터가 있다. 소야천(所耶川)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계립령에서, 하나는 새재[草岾]에서 나와 화봉원(華封院)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관갑에서 가은천과 합쳐진다. 가은천(加恩川) 가은현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속리산에서, 하나는 희양산에서 나와 합쳐져 동쪽으로 흘러 소야천과 합쳐진다. 용연(龍淵) 현의 남쪽 22리, 가은과 소야 두 내가 합류하는 곳에 있다. 견탄(犬灘) 호계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용연의 하류다. 나루터가 있고,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현의 경계로 들어간다. 조천(潮泉) 조천은 둘이 있다. 하나는 현의 남쪽 소둔산에 있는 것으로서 물이 바위 구멍에서 나온다. 그 근원이 줄[線]같아 매일 아침저녁으로 솟아 넘치어 3리까지 번져 가고 멎는 것이 마치 조수가 왕래하는 것 같다. 또 하나는 현의 남쪽 5리 정곡리(井谷里)에 있는 것으로서 흙구멍에서 나와 매일 세 번 뿜어 넘쳐 동구(洞口)로 나와 소야천으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물밀이[水推]라고 부른다. 용추(龍湫) 새재[草岾] 밑의 동화원(桐華院) 서북쪽 1리에 있다.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폭포가 있다.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 이변갑(李變甲)의 시에, “용이 꿈틀거리어 소용돌이를 헤치니, 잠긴 하늘에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레 소리에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하구나! 누가 그 신비를 알리.” 하였다. 인천(寅川) 호계현의 동북쪽에 있고, 현에서의 거리가 32리다.
【토산】 은어ㆍ꿀[蜂蜜]ㆍ석이버섯[石蕈]ㆍ송이[松蕈]ㆍ산무애뱀[白花蛇]ㆍ잣[海松子]ㆍ웅담.
【봉수】 선암산(禪巖山) 봉수 호계현의 북쪽 7리에 있다. 북쪽으로 탄정산(炭頂山)에, 동쪽으로 상주 산양현(山陽縣)의 소산(所山)에, 남쪽으로 함창현의 성산(城山)에 응한다. 탄정산 봉수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선암산에, 서쪽으로 충청도 연풍현의 겨릅재[麻骨岾]에 응한다.
【누정】 경운루(慶雲樓) 객관 동남쪽에 있다. ○ 이지강(李之剛)의 시에, “고을의 누각이 겹겹이 쌓인 봉우리에 의지하였으니, 날아가는 새의 길이 몇 번을 따라서 돌았던고. 뜰가로 돌아드는 시냇물은 흐느끼는 듯, 마당에 얼룩진 것 가득하게 낀 이끼로다. 고기잡이 등불이 시내를 건너가고, 나무꾼의 노래 소리 구름 속에서 나오는구나. 시흥이 많은 경치에 휘둘려, 붓을 들고도 감히 쓰지 못한다.” 하였다.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눈 없어지니 흐르는 시내 소리 가늘고, 연기 사라지니 나무 그림자가 돌아온다. 누각은 높아서 살에 소름이 돋고, 집은 낡아서 기와에 이끼가 끼었다. 밝은 해는 산에 의지하여 고즈넉하고, 맑은 바람은 땅을 흔들며 불어 온다. 난간에 의지하여 천만 가지 생각에 잠겼으니, 일에 임하여 가릴 바를 모르네.” 하였다.
【향교】 향교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유곡역(幽谷驛)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 찰방(察訪)을 두었다. 본도에 속한 역이 열여덟인데, 요성(聊城)ㆍ덕통(德通)ㆍ수산(守山)ㆍ낙양(洛陽)ㆍ낙동(洛東)ㆍ구며(仇㫆)ㆍ쌍계(雙溪)ㆍ안계(安溪)ㆍ대은(大隱)ㆍ지보(知保)ㆍ소계(召溪)ㆍ연향(延香)ㆍ낙원(洛源)ㆍ상림(上林)ㆍ낙서(洛西)ㆍ장림(長林)ㆍ낙평(洛平)ㆍ안곡(安谷)이다. ○ 찰방 한 사람이다.
요성역(聊城驛)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유곡의 하룻밤은 술에 취하여 자고, 요성에서 한나절 멍에 풀고 머문다. 돌아온 완적(阮籍)은 하염없이 긴 휘파람만 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짐짓 벼슬에 실증이 났네. 우정(郵亭)의 아전들 보내고 맞이하는 것 언제나 끝나며, 사신들의 내왕이 어느 때에나 멎으려는지. 오직 나같이 한가로이 다니는 사람만이 다행이로구나. 와도 사람을 귀찮게하지 않고 가는 것 자유롭네.” 하였다. 새재원[鳥嶺院]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겨릅재 밑에 있다. 곶갑원(串岬院) 관갑 북쪽에 있다. 회연원(回淵院) 용연 위에 있다. 개경원(開慶院) 호계현 서쪽 3리에 있다. 불정원(佛井院) 호계현 서쪽 8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호계현의 남쪽, 본현에서 45리 되는 곳에 있다. 동화원(桐華院)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 견탄원(犬灘院) 견탄 북쪽 기슭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백 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곶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릿길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는 전에 원(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문도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짓고 또 길손들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의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자리를 달리하고, 사람과 가축의 처소를 따로 하였다. 또 그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서 길가는 이는 거기서 쉬어가고, 구경하는 이는 올라가 보며, 지친 사람은 거기에서 쉬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 하였다. 몇 해 안 되어 준공하였다. 또 그의 문도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깨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곶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릿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밟는 것 같아서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씀이 부지런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함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 오는 것을 인하여 나에게 누각의 기문을 써달라고 하는데, 화엄대사와 반룡대사는 같이 뽑힌 이들이다.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겠으므로, 삼가 《주례(周禮)》를 살피건대, 무릇 나라의 도로에는 10리마다 여(廬 초막)가 있고, 30리마다 숙(宿 여관)이 있었다. 또 후세에는 10리마다 장정(長亭 쉬는 집) 하나, 5리마다 단정(短亭 쉬는 작은 정자)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하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이나 기름진 땅 안에 있어서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는데,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임에랴. 평원에 있어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집이 없어도 잘 데가 있지만,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사가 이 원(院)을 지어 막히고 호젓한 길에 사람을 들게 한 것은, 그 공이 다른 원을 지은 데 비하여 천백 배나 될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불법에서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길과 다리를 보수하고 원집을 짓는 것도 그 중의 한 가지 일이니, 그 공덕을 짓고 보은을 받는다는 내용은 나는 배우지 않아 잘 모르지마는 대사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화봉원(華封院) 속칭 초곡원(草谷院)인데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 고려 유희(劉曦)의 시에,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을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 들의 경계를 밟았다. 요성(聊城) 근처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궁벽한 군 하나 문경이라 부른다. 군 변두리에 새 원집 형세 매우 엄숙하여, 금빛과 푸른 빛이 찬란하게 뒤섞이어 비치는데, 동쪽의 작은 누각이 더욱 기관이라, 훌륭한 글 옛 팔영(八詠)을 압도한다. 아름답구나, 이 집 누가 지었던가. 그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은 민씨로다. 내가 그 민공 문하의 사람이었는데 이제 이 건물 창건(創建)한 것을 보고 더욱 공경하네. 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머물게 하여, 천하를 경영케 하였으면 탈 없었을 것을. 어찌하랴, 하늘 위에 옥루(玉樓)를 이룩했으므로, 기러기가 넓은 하늘을 지나간 듯 그림자도 머물지 않네. 속세와는 이미 아득히 떨어져 찾기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영원하기를 찬탄하노라.”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온갖 인연이 재처럼 싸늘한 노거사(老居士) 아직도 충심은 있어 임금을 받든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華封)의 이름을 혼자서 차지했는고.” 하였다.
【불우】 봉암사(鳳巖寺)- 양산사(陽山寺)라고도 하며, 희양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중 지징(智澄)의 비와, 이몽유(李夢遊)가 비문을 지은 중 진정(眞靜)의 비가 있다. 금학사(金鶴寺) 봉명산에 있다. 오정사(烏井寺) 선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주흘산사(主屹山祠)- 사전(祀典)에 실려 있기를, “봄ㆍ가을에 향을 하사하여 소사(小祀)를 지낸다.” 하였다. 성황사-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희양산사(曦陽山祠)ㆍ재목산사(梓木山祠)ㆍ장산사(獐山祠)- 모두 그곳에 있는 관원으로 하여금 봄ㆍ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관혜산사(冠兮山祠)- 주흘산에서 부제(祔祭)한다.
【고적】 호계폐현- 현의 동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호측현(虎側縣)이었으며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되었으며, 본조의 태종 때에는 본현에 내속되었다. 벌천부곡(伐川部曲)-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곡부곡(高谷部曲)ㆍ견천부곡(絹川部曲)ㆍ소산천부곡(小山川部曲)ㆍ마량부곡(馬良部曲)- 호계에 있다. 잉을항소(仍乙項所)-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고려 흥달(興達)- 태조 10년에 강주(康州)를 순(徇 순행하여 그곳 백성을 복종시킴)하기 위해 사갈이성(思葛伊城)을 지날 때, 그곳 성주(城主) 흥달이 먼저 아들을 보내어 귀순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히 여겨 청주록(靑州祿)을 하사하였고, 맏아들 준달(俊達)은 진주록(珍州祿)을, 둘째 아들 웅달(雄達)은 한수록(寒水祿)을, 셋째 아들 옥달(玉達)은 장천록(長淺祿)을 하사하였다.본조 허종항(許從恒)ㆍ조추(趙秋)- 세종 때에 모두 현감이 되었고 다스린 업적이 있다.
【인물】신라 아자개(阿慈介)- 가은현 사람으로, 농사로 자활하다가 뒤에 집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견훤(甄萱)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견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수풀 아래에 놓아 두고 바라지를 했는데, 범이 와서 젖을 먹이므로 마을 사람들이 듣고 이상히 여졌다. ○ 고기(古記)에, “옛날에 한 부자가 무진주(武珍州) 북촌(北村)에 살았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몸매와 용모가 단정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하고 간다.’ 하므로,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아라.’ 하여,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어 견훤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전(本傳)과 다르니 아마 믿을 만한 것이 못 될 것이다.” 하였다.
【제영】 분단명협리(奔湍鳴峽裏)- 최수(崔脩)의 시에, “북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세월만 깊어 간다. 달리는 여울은 골짜기 속에서 울고, 쌓인 눈은 벼랑 음달에 덮었다. 충성된 절조 붉은 마음속에 있으나, 화사한 얼굴엔 백발만이 침노한다. 이름 따르는 길에서 무슨 일을 이루었는고. 부질없이 벼슬자리 싫어하는 노래만 읊었노라.” 하였다. 동밀청운합(洞密晴雲合)- 고려 정포(鄭包)의 시에, “동구는 그윽하여 맑은 구름이 합치고, 누각은 높아 좋은 달이 비치어 온다.” 하였다. 산기혼여무(山氣昏如霧)-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산기는 안개같이 아득하고, 시냇물은 이끼처럼 푸르구나.” 하였다.
○ 팔영(八詠)- 서거정의 시다. 주흘(主屹)의 영사(靈祠)- 험한 산은 하늘 끝에 닿았고, 깎아지른 벼랑은 구름 속에 들어 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비록 그 자취 없으나, 구름을 일으킴에는 공이 있다. 곶갑의 사다릿길[串岬棧道]-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에, 구불구불 새 다니는 길 같은 것 기이하기도 하다. 봉우리 하나하나 모두 빼어나니, 그런 대로 말 가는 길이 더디구나. 창 밖의 오동나무[窓外梧桐]- 솔솔 부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데, 이즈러진 달이 성긴 가지에 걸렸구나. 갑자기 내리는 한밤중 비에, 고향 생각을 어이하리. 뜰 앞의 버드나무[庭前楊柳]- 영남에 그 많은 나그네가 꺾어 보내어 이제는 남은 것이 없으련만, 의연히 봄바람에 떨쳐지니 긴 가지는 짐짓 여전하구나. 푸른 벽에 빨간 단풍[蒼壁楓丹]- 빨간 잎이 푸른 벽을 장식하니, 강산이 아주 딴판이로구나. 내가 온 때가 마침 늦은 가을, 이렇듯 좋은 경치 본 적이 없네. 그늘진 벼랑에 흰 눈[陰崖白雪]- 겨울 깊어서는 얼음이 골짜기에 가득하고, 봄이 반되면 물이 시내에 생긴다. 자연의 모습은 때에 따라 달라지는데, 인정은 늙어가며 어지러워진다. 오정의 종루[烏井鐘樓]- 나그네 길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데, 외로운 베갯머리엔 달빛만 비쳐온다. 어디가 한산(寒山)의 절이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 한밤중에 들려 온다. 용담 폭포(龍潭瀑布)- 옥 같은 무지개 높다랗게 드리웠는데, 휜 눈은 산뜻한 맑음을 뿌려 준다. 날고 자맥질하는 술법을 묻지 말고, 변화의 신통을 알아야 하리.
완적(阮籍) : 완적은 진(晉) 나라 사람인데 그는 휘파람 잘 불기로 유명하였다. 《사기(史記)》 사마상여 열전(司馬相如列傳)에 ‘長卿故倦游’라는 말이 나온다.
우정(郵亭)의 아전들 : 우정(郵亭)은 역(驛)집을 말하는 것이요, 우정의 아전은 역리(驛吏)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 역에서는 오고가는 손님 접대도 맡았지만 문서 전하는 것도 맡았으므로 우리(郵吏)라고도 했다.
옥루(玉樓) : 하늘 위에 백옥경(白玉京)이란 하늘나라의 서울이 있는데, 그 백옥경에 옥으로 건축한 누(樓)가 낙성될 때에, 그 상량문(上樑文)을 지으라고 옥황상제가 불러 갔다는 뜻이다.
화봉(華封) : 화(華)는 땅 이름이요, 그 지방의 장(長)을 봉인(封人)이라고 고대에는 말하였었다. 그 화의 봉인인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에게, “수하고, 부하며, 아들 많이 낳으라.”고 축수한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온 세상 백성들이 모두 우리 임금에게, 수하고, 부하며, 아들 많이 낳으라고 축수하는 화봉인과 같은데, 어찌해서 이 원만이 그 이름을 독차지하였는가 하는 말이다.
그 많은……남은 것 : 버들은 길가에 서 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잘 꺾게 된다. 특히 떠나고 보내는 사람이 그 나무 아래에서 작별할 때에 잘 꺾게 되므로 그런 말이 있는 것이다.
한산(寒山)의 절 : 당 나라 사람 장계(張繼)의 시에, “고소성 밖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에 밤중에 치는 종소리 나그네 배에까지 들리네[夜半鐘聲到客船].”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고소성이 아니고 한산사가 없는데, 어디에서 이런 종소리가 들려 오는가 한 말이다.
2. 봉암사(鳳巖寺)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 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지선의 사리부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선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169호의 봉암사3층석탑이 있는데, 기단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였는데 보물 제171호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이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 제172호로 봉암사정진대사탑비가 지정되어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고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배행정(拜行亭)·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지는 곳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봉암사 주변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여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 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명승지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
≪참고문헌≫ 韓國寺刹全書(權相老,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 名山古刹을 따라(李孤雲·朴雪山, 宇進觀光文化社, 1982), 韓國의 名山大刹(국제불교도협의회, 1982).金渭錫
*희양산문
희양산문의 개창자는 지증이다. 지증은 9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켰다. 일찍이 신라의 법랑(法郎)은 중국 4조 쌍봉(雙峰)의 법맥을 받아 와서 신행(信行)에게 전하였고, 그는 다시 준범(遵範)에게, 준범은 다시 혜은(惠隱)에게 전하였다. 지증은 혜은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긍양대사(兢讓大師)의 비문에 의하면 지증은 마조의 제자인 신감(神監)의 법을 받아 온 혜소(慧昭, 雙谿)의 법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지증이 생시에 혜소와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 현재로서는 자세히 밝히기 힘들다. 그는 심충의 청으로 희양산에 거주하면서, 다른 선문들과는 달리 태사공의 문구를 인용하는 등 유학에 밝았고, 6이(異)와 6시(是)를 제창하였다.
6 이는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데, 탄생·금기·출가 및 율계와 훈계 등을 받는 특이함을 말한다. 6시는 불사의 당연성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왕실의 청을 거절하면서 단월 세력과 연결되는 면과 사원경제의 당연성을 말한다. 그의 제자에 양부(楊孚)가 있으나 행적이 자세하지 않고, 양부의 제자에 긍양이 있다.
그는 90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의 제자인 도연(道緣, 谷山)의 법을 받아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으며,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그 뒤 그는 혜종·정종·광종의 귀의를 계속 받으면서 왕정을 돕기도 하였다.
신라 말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회양산문은 적당의 침입을 받아 폐허가 되었는데, 긍양이 이를 재건하였다. 선풍으로 그는 10개(十介)의 선자(禪子)가 동급제(同及第)라고 하였다.
긍양의 제자에 형초(逈超)가 있으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제자에 지종(智宗)이 있다. 지종은 고려 광종 때 중국 연수(延壽)의 문하에 들어가 법안종(法眼宗)을 받아 왔다.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3.41m. 보물 제137호.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사리탑으로서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되었다. 이 부도는 현재 사찰 중심에서 서북쪽의 한적한 곳에 탑비와 함께 나란히 동편에 서 있다. 옥개석(屋蓋石)이 약 3분의 1 정도 절단된 것 이외에는 별다른 파손이 없고 전체적으로 보아 완형으로 보존상태도 좋다.
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기본으로 한 부도로서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짠 방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건립되어 있다.
지대석은 높으며 윗면을 평평히 다듬고 그 중앙에 8각형의 굄대를 마련하였는데, 밑에는 낮은 각형(角形)을, 그 위에는 높은 원호(圓弧)와 낮은 각형을 조각하여 기단부를 받고 있다.
기단은 상대(上臺)·중대(中臺)·하대(下臺)로 구성되었으며 하대석은 1단뿐인데, 하대석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1구씩 오목새김하고 그 안에 사자상(獅子像)을 1구씩 돋을새김하였는데, 사자들은 방향과 사지(四肢)의 형상이 각각 달라서 동적인 느낌을 준다.
하대석 상단은 두툼한 갑석형(甲石形)을 이루었고 그 상면에 낮은 각형 굄을 1단 각출하여 8각의 중대석 굄돌을 받고 있다. 중대 굄돌은 일반적인 형식과는 달리 2단으로 되어 있어서 이 하단을 하대석의 부재로 보아 2단의 하대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자체의 형태상 중대석 굄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굄대의 하단은 전면에 웅대한 운문(雲文)을 돌리고 그 위에 상단석을 놓았다.
상단 굄대는 하대석의 형식과 같이 8각의 측면과 상단의 갑석형으로 이루어졌는데, 측면의 각 모서리에는 권운문(卷雲文)이 조각된 원주형을 세웠으며, 각 면에는 모두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迦陵頻伽: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를 1구씩 돋을새김하였다.
그리고 상단의 갑석에는 하면에 낮은 각형 받침이 각출되고 상면에도 중대석을 받는 낮은 굄단이 마련되었는데, 상면에는 특별히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홈을 파서 굄단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대석은 여덟 면에 똑같은 양식의 안상을 오목새김하고 그 내면에 여러 형태의 조각을 배치하였다. 안상 안에는 정면 한 면에만 탁상 연좌 위에 사리합(舍利盒)을 안치하고 그 위에 보개(寶蓋)·보주(寶珠)·영락(瓔珞) 등으로 장식하였으며, 다른 일곱 면에는 연화좌 위에서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합장공양상, 혹은 비파나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1구씩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하면에 낮고 높은 각형 받침 3단을 각출하였고 측면에는 단엽의 앙련(仰蓮)을 돌렸으며, 각 판내는 자방(子房)이 있는 화문(花文)으로 장식하였다. 상대석 상단은 갑석형으로 이루어졌고 그 상면에 낮은 각형과 높은 원호, 그리고 또 한 단의 낮은 각형 굄단을 마련하여 8각의 탑신 굄대를 받고 있다.
탑신석 굄대 또한 기단부의 굄대 형식을 따라 측면과 상면으로 구분되는데, 측면에는 모서리마다 둥근 원각단주(圓刻短柱)를 세우고 그 위에 가목(架木)의 형태를 표현하였으며, 단주와 단주 사이의 각 면은 깊숙이 파서 입체감을 주고 있다. 상면은 낮은 각형과 넓은 원호, 낮은 각형의 3단굄이 되어 탑신석을 받았는데, 원호의 굄단에는 복엽32판(複葉三十二瓣)의 복련(覆蓮)을 돌려서 화사한 굄대를 장식하고 있다.
탑신석은 각 면의 모서리에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모각되고 전면에 조각이 있다. 앞면·뒷면에는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여 자물쇠를 표시하였고, 문비의 좌우에는 각각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입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탑신이나 기단부 각 부재에 비하여 매우 광대하며 현재 많은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하면은 탑신석에 놓이는 부분에 1단의 각형받침이 조각되고 처마 부분에는 곡선을 그리는 큼직한 받침을 나타내면서 그 전면에 운문과도 같은 형태의 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추녀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처마에 모각된 서까래는 각형 이중연(二重椽)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은 여덟 면의 합각(合角)에 굵직한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을 표시하였고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없이 평평한데, 이와 같이 기왓골이 모각되지 않은 낙수면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추녀에는 막새기와의 모각이 없이 얕은 갑석형으로만 마감을 하였고, 추녀의 각 면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나 모서리에 이르면서 경사가 약간 급해졌는데, 여덟 귀퉁이의 전각(轉角)에는 좁고 높은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을 조각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다른 돌로 조성한 연화대석(蓮花臺石)을 놓아 상륜부(相輪部)를 받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상륜부재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인데 노반은 8각이고 그 이상은 원형이다. 각 부재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으나 보주는 연봉형으로 이루어진 측면에 연잎을 조각하였다.
이 부도의 바로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지증대사의 생애와 행적 등 여러 사실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참고문헌≫ 韓國의 美 15-石燈·浮屠·碑-(鄭永鎬 監修, 中央日報社, 1983).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높이 273㎝, 너비 164㎝, 두께 23㎝. 보물 제138호.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귀부(龜趺)·이수(賂首) 및 비좌(碑座)의 조각이 뛰어나다.
지증대사는 17세에 부석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뒤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창시자로 봉암사를 창건하였다.
882 년(헌강왕 8)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지증(智證)'의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에 적힌 최치원의 관직명으로 보아 893년(진성왕 7)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30년이 지난 924년(경애왕 1)에 분황사 중 혜강(慧江)이 비문을 쓰고 이를 새겨 건립하였다. 글씨는 자경 2㎝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꾸밈없는 필획은 일가를 이룬 글씨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大東金石書, 海東金石苑, 朝鮮金石總覽 上, 韓國金石文大系(趙東元, 圓光大學校出版局, 1983), 朝鮮金石攷(葛城末治, 東京 國書刊行會, 1935).金世豪
*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에 있는 고려말 조선초의 불상. 높이 6.0m, 너비 4.5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1965년 3월에 조사된 이 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으로서 백운대(白雲臺)라고도 불리는 옥석대(玉石臺)의 북벽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모양 안에 양각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나지막한 육계(肉鉅)에 계주(鉅珠)가 뚜렷하다. 비교적 큰 귀가 달려 있는 갸름한 얼굴에는 우뚝한 코와 치켜진 가느다란 눈, 꾹 다문 입 등이 잘 조화되어 있으며,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공(白毫孔)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뚜렷한 옷주름선은 유려하다. 두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한줄기의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데, 이러한 손모양은 동화사염불암마애보살좌상(桐華寺念佛庵磨崖菩薩坐像)과 거의 같아 주목된다.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대좌는 단판연화좌(單瓣蓮花座)로서 마멸이 심하다.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된 여말선초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불상은 고려 말 조선 초기 마애불상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鳳巖寺磨崖佛坐像(金和英, 考古美術 56·57, 1965).
*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보물 제171호. 높이 5m. 신라 말과 고려 초의 고승인 정진대사 긍양(兢讓)의 사리탑으로, 그가 입적한 해인 956년(광종 7)과 탑비가 세워진 965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는 봉암사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 중턱 가까이 능선 위에 건립되어 있어 산형(山形)의 배경과 아울러 경승지를 택하여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도의 형식은 지대석(地臺石)부터 옥개석(屋蓋石)·상륜부(相輪部)에 이르기까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다.
높은 8각의 지대석 상면에 낮은 각형(角形), 높은 원호(圓弧), 낮은 각형의 3단 굄을 마련하여 기단부를 받고 있는데, 기단은 통식대로 상대석(上臺石)·중대석(中臺石)·하대석(下臺石)으로 이루어졌다.
하대석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높은 하단의 각 면에는 1구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고 그 안에는 화형(花形)이 장식되었으며 상단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는 갑석(甲石)이 덮여 있다.
상면에는 운문(雲文)이 가득 조각된 높은 1단의 굄대가 있어 이 위에 상단을 받고 있는데, 상단 면석(面石)의 각 모서리에는 거의 원각에 가까운 원주형(圓柱形)을 모각하고 그 표면에 운문을 가득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운문과 쌍룡문(雙龍文)을 조각하였으며 상단에는 역시 갑석형을 덮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의 각 면에 안상 1구씩을 조각하였는데 상하의 좌우에서 안으로 뻗은 화형이 강조된 특이한 형태이다. 안상 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앞면 1면에만 탁상의 사리합(舍利盒)과 보개(寶蓋)·보산(寶傘)·보주(寶珠)를 조각하였을 뿐이다.
상대석은 하면에 2단의 받침이 각출되었으며, 그 위로 복엽16판(複葉十六瓣)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이 상단에는 두툼한 갑석형을 덮고 그 상면에 높은 2단의 탑신 굄대를 마련하였는데 3단의 낮은 굄을 조출하여 받고 있다.
하단이나 상단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난간을 돌리고 또한 각 면석에는 단주(短柱)를 세웠는데 하단은 1주씩이나 상단에는 2주씩을 배치하였다. 탑신석은 각 면에 양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앞면에는 문호형(門戶形)과 자물쇠가 조각되었으나 다른 일곱면은 양 우주뿐으로 기단부 중대석과 같이 조식이 생략되었다.
옥개석(屋蓋石)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이 각출되고 이에 이어 각형의 부연이 가늘게 조각되었다. 옥개석의 각 모서리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면서 상향(上向)과 반전(反轉)이 심한데 전각에는 귀꽃이 조각되지 않았다.
낙수면은 정상에서 약간 급한 듯하나 차차 평박해졌으며 기왓골의 표시는 없고 굵직한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만이 표현되었다. 옥개석 정상부에는 각 우동부에 1판씩 8판의 복련(覆蓮)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부재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 8판의 입상형앙련(立狀形仰蓮)이 화사하게 조식된 앙화석(仰花石)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보륜 하나가 남아 있다.
이 부도는 양식상 같은 봉암사 경내에 있는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 : 보물 제137호)의 각 부를 많이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같은 지역 내에 남아 있는 전시대 작품의 모든 양식과 수법을 따르는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부도를 자세히 보면 기본구성이나 조식에 있어 지증대사적조탑에 비하여 간략화의 경향이 보일 뿐만 아니라 각부 비례에 있어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가 좁아 고준한 느낌을 주며 옥개가 두꺼워 둔중한 감을 주고 있어 시대적인 변화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韓國의 美 15-石燈·浮屠·碑-(鄭永鎬 監修, 中央日報社, 1983).
*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 965년(광종 16) 건립. 비신높이 270㎝, 너비 139㎝, 두께 26㎝. 보물 제172호.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고려 초기의 석비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부표현이 강한 조각수법이다. 정진대사 긍양(兢讓)은 신라말·고려초의 고승으로 성은 왕씨(王氏)이며 900년(효공왕 4)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에서는 태조·혜종·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965년에 입적하자 왕은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당대 문장가 이몽유(李蒙游)가 짓고 명필 장단열(張端說)이 썼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부드러움을 더하였다. 한편, 비문 중에는 '聖朝光德二年(성조광덕2년)'이라는 문구가 있어 고려시대 연호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大東金石書, 海東金石苑, 朝鮮金石總覽 上, 韓國金石文大系(趙東元, 圓光大學校出版局, 1981), 朝鮮金石攷(葛城末治, 東京 國書刊行會, 1935).
3. 대승사(大乘寺)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사불산의 산마루에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으며,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僧堂)·동상실(東上室)·관음전·조전·미륵전·중실(中室)·시왕전(十王殿)·향로전(香爐殿)·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침계당(枕溪堂)·금당(金堂)·영자전(影子殿)·향적전(香積殿)·응향전(凝香殿)·나한전(羅漢殿)·청심전(淸心殿) 등을 신축하였다.
이 중 금당은 1692년(숙종 18)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1727년(영조 3) 종각을 단장하였고, 1730년 금강문(金剛門)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해 천왕문과 금강문·일주문을 단장하였다.
그 때의 산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聊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 9암이 있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腹藏)에서 사리(舍利) 1과와, 신룡(神龍) 1년(705)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862 년(철종 13) 명부전(冥府殿)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취월(就越)·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 누각 등을 건립하였다. 1872년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 30여 칸을 신축하였다.
1899 년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念佛堂)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하였으며, 환경(幻鏡)·화응(華應)·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하였다.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들이 정진할 수 없었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만일회(雙蓮庵萬日會)를 개설하였다. 1956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나한전·시왕전·선원·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윤필암·상적암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75호인 대승사목각탱화부관계문서 4매, 보물 제991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사적비와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금자 ≪화엄경≫ 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있으며, 창건설화에 얽힌 사불암과 그 아래에 세워진 대웅전은 조화를 이루어 신비감을 준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寺刹全書(權相老 編,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
* 대승사목각탱부관계문서(大乘寺木刻幀附關係文書)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승사의 목각탱과 관련된 문서. 4매. 보물 제575호. 이 문서는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尙州大乘寺外四寺僧徒等狀〉·〈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尙州四佛山大乘寺僧徒等狀〉·〈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道內尙州四佛山大乘寺諸僧等狀〉·〈완의 完議〉이다.
등장은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연서하여 관에 올려 인증을 받는 문서로서, 이 목각탱에 관계되는 등장은 1869년(고종 6)과 1876년(고종 13)에 작성되었다.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있었던 것으로, 1862년(철종 13) 대승사의 화재로 법당이 불에 타 없어지자 새로 법당을 짓고 폐찰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목각탱화를 옮겨놓았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여 시비가 일게 되자 등장을 올리게 되었고, 1876년 대승사에서 부석사의 조사전(祖師殿) 수리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합의를 보게 되어 〈완의〉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문서는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에 얽힌 유래와 조선 후기의 부석사와 대승사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밖에 1875년에 작성된 ≪순흥부석사승도등장 順興浮石寺僧徒等狀≫도 대승사에 보관되어 있다.
* 대승사사방불상(大乘寺四方佛像)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 약 295㎝, 너비 약 150㎝. 커다란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로서, 동·서면에는 불좌상(佛坐像), 남·북면에는 불입상(佛立像)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불상의 윤곽선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중 상태가 비교적 좋은 동면의 불좌상의 양식으로 미루어 8세기경의 사방불로 추정된다. 이 사방불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에 "진평왕 9년 갑신, 문경의 대승사라는 곳에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587년(진평왕 9)은 갑신년이 아니고 정미년이므로, 갑신년을 위주로 해서 생각한다면 이 기록은 624년에 해당되지만, 사방불의 양식이 8세기 이후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므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마멸이 심하여 불상양식은 알 수 없지만, 최초의 사방불에 대한 자료로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四佛山四佛岩과 妙寂庵磨崖如來坐像(秦弘燮, 考古美術 74, 1966), 新羅四方佛의 起源과 神印寺(南山塔谷磨崖佛)의 四方佛-新羅四方佛硏究 1-(文明大, 韓國史硏究 18, 1977), 新羅四方佛의 展開와 七佛庵佛像彫刻의 硏究-四方佛硏究 2-(文明大, 美術資料 27, 國立中央博物館, 1980).
4. 대승사마애여래좌상(大乘寺磨崖如來坐像)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높이 6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대승사에서 묘적암으로 가는 길 오른쪽 위의 남향한 암벽에 새겨져 있다. 연화대의 일부가 떨어졌을 뿐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육계(肉鉅)는 비교적 크다. 육계의 표현으로 생기는 굴곡점에서 양측으로 마치 세 가지의 초화형(草花形) 같은 돌기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길쭉한데, 눈은 거의 감은 듯 길고 코는 밑이 약간 넓으나 거의 같은 굵기로 융기된 감을 준다. 코의 양끝에서 연장된 눈썹은 중선으로 표현하였고 백호공(白毫孔)은 없다.
입술의 윤곽은 뚜렷하고 두꺼워서 시대적인 특징이 뚜렷하며 두 귀는 긴 편이다. 턱에는 한 가닥의 음각선이 있고, 이 음각선을 따라 아래에 평행한 음각선이 하나 더 있다. 약간 간격을 두고 한 줄의 음각선이 또 있어, 삼도(三道)의 표현이 이례적이며 비만감을 느끼게 한다.
어깨는 넓고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가슴에는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엄액의(掩腋衣)의 깃이 보이는데 그 밑으로 군의(裙衣)의 매듭이 있다. 법의는 두꺼워 보이지는 않으나 어깨에서 두 팔을 거쳐 무릎까지 늘어진 모습이 마치 장막을 친 듯하여 불신의 윤곽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무릎 너비는 어깨 너비보다 약간 넓을 뿐 상체에 비하면 좁은 편이다. 두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跌坐)하였고 음각선으로 옷주름을 표현하였으며, 옷자락의 일부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맞대고 새끼손가락을 꼬부려 손바닥을 보이도록 하고,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다섯 손가락을 위로 약간 꼬부렸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평행한 음각선으로 나타내고 그 주변을 화염문으로 처리하였다. 불신 밑에는 만개한 칠엽연판(七葉蓮瓣)을 음각선으로 조각하였다. 암석 가까이에는 평평한 판석이 약간 튀어나오게 얹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불상의 머리 위에 개석(蓋石)을 얹는 형식과 상통한다.
이 불상은 불신의 표현에 요철이 거의 없고, 의문(衣文 : 옷자락 무늬)도 모두 음각선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입체적인 표현이 비교적 쉬운 코도 평평한 판처럼 처리하는 등 조각 수법이 매우 평판적이다. 그러나 보기 드문 대작이고, 지리적 위치를 생각할 때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제작 연대는 고려시대 전반기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四佛山四佛庵妙寂庵磨崖如來坐像(秦弘燮, 考古美術 74, 1966).
5. 김룡사(金龍寺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雲達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588년(진평왕 10) 조사 운달(雲達)이 창건하여 운봉사(雲峰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사적은 전래되지 않고 있다.
1625 년(인조 3) 혜총이 중창하였으나, 20년 만에 소실된 것을 1649년(인조 27) 의윤(義允)·무진(無盡)·태휴(太休) 등이 중수하였다.
절 이름을 김룡사라 한 것은 문희(聞喜 : 지금의 聞慶)부사 김씨가 이 산에 은거하고 불공을 드려서 처음에는 신녀(神女)를, 두번째는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용(龍)이라 하였더니 가운이 번창했으므로, 이에 불공드리던 곳을 김룡동이라 하고, 그 북쪽에 있던 운봉사를 김룡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선대(金仙臺)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 따서 금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민족항일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교통의 불편으로 옛 말사였던 직지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1940년 요사와 종루를 개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김룡사 일원의 계곡을 운달계곡이라 하는데, 맑은 물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져 '문경8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당 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응진전(應眞殿)·금륜전(金輪殿)·명부전(冥府殿)·상원전(上院殿)·영산전(靈山殿)·원통전(圓通殿)·첨성각·범종각·수월당(水月堂)·만월당(滿月堂)·연하당·일주문(一柱門)·천왕문·요사 등 전각 48동이 있다.
일주문에는 문 윗부분에 '紅霞門(홍화문)', 아랫부분에 '雲達山 金龍寺(운달산 김룡사)'라고 쓴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고, 대웅전에는 1644년(인조 22) 조성된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地持) 보살상을 묘사한 삼장탱화(三藏幀怜)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다시 지은 건물로서, 16나한상과 나한도가 모셔져 있다. 절 입구에서 보면 정면에 '慶興講院(경흥강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300인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온돌방으로서, 자연 지층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축한 것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시대를 알 수 없는 석조 약사여래입상과,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맷돌·떡시루·쇠북·범종, 지옥의 염라왕청에서 죽은 이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업이 나타난다는 업경대(業鏡臺) 등이 사물(寺物)로서 남아 있다.
〔부속 암자〕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화장암(華藏庵)·양진암(養眞庵)·금선대(金仙臺)·토굴 등이 있다. 양진암은 1658년(효종 9) 설잠(雪岑)이 창건하였으나, 1664년에 불탄 뒤 1749년(영조 25) 환월(幻月)이 중건하였다.
그 뒤 1769년 무영이, 1825년 해운과 경봉이, 1840년 정봉이, 1929년 인택이 각각 중수하였다. 대성암은 1800년(정조 24) 영월(潁月)이 청하당을 옮겨 창건하였고, 1886년 혼성(渾性)이 중수하였다.
현재는 여승들만의 수도처로서, 이곳에는 고승의 진영이 담긴 영정과 동물 그림의 병풍 등 많은 현판들이 있다. 전래되는 대표적인 전설로는 산너머의 대승사(大乘寺)에 불이 났을 때, 일심으로 염불하면서 바가지에 시냇물을 퍼서 불을 끈 동승(童僧)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寺刹全書 上(權相老,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 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 名山古刹따라(李孤雲·朴雪山, 우진관광문화사, 1982).
6. 고모산성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위치하며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둘레 1,256m, 익성의 길이 390m이며 합친 성벽의 길이는 1,646m의 규모이다.
신라는 계립령의 개통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에서 이곳을 장악하고 방어하기 위해 고모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고모산성은 좌우 통로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고 영강이 그 밑을 흐르는 천혜의 요새이다.
문경은 예부터 교통의 요지였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다. 문경읍에서 동쪽으로 오르면 1,500년 전에 만든 도로인 하늘재가 나타나고 서쪽으로 가면 이화령 길이 드러난다. 이러한 길목을 지켰던 산성 중 하나가 바로 고모산성이다. 다른 성도 많다. 새재의 조곡관과 주흘관 등도 조선조때 만들어진 산성이다. 하늘재와 부봉 정상의 사이에 차단성이 있다. 또 고모산성 건너편에는 고부성이 있었다.
유곡에서 고모산성에 이르는 5㎞의 협곡지대에는 관갑천이 흐른다. 고모산성이 얼마나 험한 요새였는지는 임진왜란때 증명됐다.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은 당시 텅 빈 고모산성을 보고 겁을 먹고 진군을 멈추었다. 꼬박 하루를 정찰하다 까마귀가 나는 것을 보고야 빈 성인 줄 알고 통과했다는 기록이 유성룡의 <징비록>에 보일 만큼 조선시대까지도 중요한 산성이었다.
1728 년(영조) 이인좌(李麟佐) 난 때 신사일(申思日)의 의병이 군사를 모아 고모산성에 진을 치고 막았다고 한다.
한말 이강년(李康秊)도 항일의병을 일으켜 이 산성에 방어진지를 세웠다.
7. 봉생정(鳳笙亭)
경북 문경의 봉생정(鳳笙亭)은 강변에 자리한 아름다운 정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선조 때의 명재상 유성룡이 하회마을을 오갈 때 이곳에 들러 노닐며 선유를 즐겼다 하며, 그 당시 봉생정 앞에 용소라는 깊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이 배를 띄워 선유를 즐겼던 곳으로 추정되며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 이 고장 유림들이 복원을 추진하여,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각지붕의 정자를 세웠다.
*鳳笙亭重建記
尙賢崇德 後生之道也 物毁更新 久傳之術也 猗歟李韓 宣廟朝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 以天挺之姿 篤生世閥 早登退陶之門 得傳心學嫡宗 猗然爲斯文百世宗師 立朝四十年 布施其所蘊 無任不善 而當曠古極慘之壬丁倭亂 七年風塵 出將入相 而經紀運籌之功 再造江山之績 燦然靑史 如日星於中天 惠被萬民 澤流百世之大名相也 於乎先生安東豐山人也 京路往來之際 每到此心醉鎭南山水之勝 輒休筇游踪於泉石 竊窕之間 吟風弄月 以敍行路之疲 而心點藏修之所者矣 生歿後 門人愚伏鄭文壯公 承師之意而創亭而遺後者 四百餘年于玆矣 歲久年深 間或毁而或修 維持今日者 實因地方士林之誠款所使 然挽近以來 傾棟破瓦等 其毁損之甚 遽至於無復着手之境矣 去年聚會之餕席上 重建之論峻發於士林之間 都廳申錫厚有司 蔡熙允 柳殷夏諸彦 以報先師之誠慨然立重建之計 竭力周旋 得士林之協調 呼龥周旋於當局者 數年而遂見撤去舊物 而一新 更建之擧 矧乎子孫之誠力士林之呼應有以動當局之所致 然大以觀之 則大賢之遺風餘韻 所愈久不替之所以也 亭之規模 則擬舊制 而亭宇五架十間之瓦葺垣墻環境等 無不盡善 而經費一切當局負擔 幹其事者 道知事李義根 前市長金學文 市長朴仁遠 道議員蔡熙永氏也 於乎懿哉 奧然新容 屹然蒼空 於淑氣之間 山川改觀 行路咸賀 而向所謂尙賢崇德物毁更新之義 兩得而成矣 豈不幸哉 登斯亭者 追先生之風 學先生之道則重建之效 有補於風敎者審矣 而後來者 亦承此之旨 使大賢遺躅永保無斁 則不啻斯文幸甚云爾
大韓民國 八十五年 癸未八月 日
後學 從十四代孫 端夏 謹記
봉생정중건기鳳笙1)亭重建記
어짊을 높이고 덕을 받드는 것은 후인들의 길이며, 사물이 훼손되면 고쳐 새롭게 하는 것이 오래 전하는 방법이다. 아름답구나, 조선과 대한민국이여! 선조 때의 영의정 문충공 서애 유성룡선생은 하늘이 낸 성품으로 대대로 공로있는 가문에서 나셨으며 일찍이 퇴계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의 적통을 전해 받아서 의연히 우리 유학의 백대의 스승이 되시고, 조정에 선지 사십년에 그가 쌓아온 바를 베풂에 어떤 임무도 잘하지 못한 일이 없었으며, 일찍이 전에 없었던2) 지극히 처참한 임진․정유왜란의 칠년의 병란을 겪으면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3) 기율을 다스리고 전략을 세운 공과, 강산을 다시 살려낸4) 공적이 역사에5) 빛나는 것이 마치 중천에 해나 별과 같아서 은혜가 만 백성에 끼쳐지고 혜택이 백세에까지 흐르는 위대한 명재상이다. 오호라! 선생은 안동 풍산사람이다. 서울에 왕래하시던 길에 매번 이곳에 이르러 진남산의 산수의 형승에 심취하시면서 문득 지팡이를 멈추고 샘과 바위에 발자취를 남기시며 조용한 틈에 바람을 쐬고 달을 즐기면서 여행길의 피로를 풀고 숨어서 수양할 곳으로 마음에 두셨던 곳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문인인 우복 정경세 선생이 스승의 뜻을 이어서 정자를 창건하여 후대에 물려준 지가 여기까지 사백여년이 되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간에 혹은 무너지고 혹은 수리되며 오늘날까지 유지된 것은 실로 지방 사림들의 정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건물이 기울고 기와가 깨지는 등 그 훼손이 심각하여 갑자기착수하여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 모임의 회식상에서 중건하자는 논의가 사림들 사이에서 높이 일어나 도청의 신석후申錫厚유사와 채희윤蔡熙允, 유은하柳殷夏 등 여러 인사들이 선사先師의 진심을 알리자 개연히 중건의 계획이 세워졌다. 힘을 다해서 서로 뒤를 쫓아 사림의 협조를 얻었고 서로 이어서 당국자에게 호소하였다. 수년이 지나서 마침내 옛 건물이 철거 되어 면모가 일신되었다. 다시 세우고자 하는 계획은 자손들의 정성스러운 노력과 사림들의 호응을 기초로 하여 당국을 움직이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크게 본다면 큰 현자들이 남긴 유풍과 여운이 더욱 오래도록 폐기할 수 없게 하는 까닭이다. 정자의 규모는 옛날의 방식에 의거했으며 정우亭宇는 오가五架열칸의 기와지붕과 담장환경등이 모두 잘 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경비 일체를 당국이 부담하였으며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도지사 이의근, 전 시장 김학문, 시장 박인원, 도의원 채희영씨이다. 오호라 아름답도다. 그윽하구나 새로운 모습이! 우뚝하구나 푸른 하늘에! 맑은 기운 사이에 산천의 면모가 일신되고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니, 앞서 말한 ‘어짊을 높이고 덕을 받들며 사물이 훼손되면 고쳐 새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 둘 다 얻어져 이뤄진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은가! 이 정자에 오르는 자가 선생의 풍모를 추모하고 선생의 도를 배운다면 중건重建한 효과가 덕행으로 사람을 감화시키는 일을 보충하는 것이 자세할 것이며 이후에 오는 자 또한 이러한 뜻을 계승해서 대현이 남긴 자취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을 싫증내지 않는다면 우리 유학계로서는 다행일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팔십오년 계미 팔월 일
후학 종십사대손 단하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