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 12년(1271) 봄 정월 기사일에 공유(孔愉)와 안세정(安世貞)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또 아해(阿海)가 적을 보고 위축되어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아해의 관직을 파면하고 소환하였다. 경오일에 문하시중 이장용, 참지정사 최영(崔瑛) 등이 임연의 국왕 폐립 음모에 참여한 죄로 면직당하였다. 박천주가 진도에 이르니 적들이 그를 벽파정(碧波亭)에 영접해 놓고 연회를 열어 위로하면서 가만히 병선 20척을 보내 관군을 습격하여 그의 배 한 척을 빼앗고 90여 명을 죽였다. 신미일에 홍다구의 숙부이며 복야 벼슬에 있다가 치사(致仕)한 홍백수(洪百壽)를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고 치사시켰다. 병자일에 불화(不花), 맹기(孟棋) 등이 돌아갈 때 왕이 추밀원사 김련(金鍊)으로 하여금 동반하여 가게 하였으며 그 길로 청혼을 하였다.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전일 당신을 예방하였을 때에 당신의 지극한 배려를 받았으며 장차 세자를 당신의 친척과 혼인시키려고 하였더니 얼마 후에 당신이 결혼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나의 소원이 성취된 것이었었다. 그런데 그때 당신은 나에게 ‘본국으로 돌아가서 육지에 나온 후에 다시 요청하라’고 말씀하였었다. 당신의 친절한 말씀을 들었을 때 나의 기쁨이 어찌 한량이 있었으랴? 본국에 귀환한 후에는 바야흐로 옛수도로 옮겼는바 응당 세자를 다시 보내 사유를 보고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그때는 아직 새 궁궐도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으므로 당신이 나를 너무 조급하다고 나무랄까 염려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밀어 오면서 청혼하는 말을 드리지 못하였다.” 또 다른 글에 이르기를 “조서에서 말한바 남송의 배를 떠나 보내었다는 일은 전번에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옛적에는 송나라 선박이 왕래하였지마는 그 후 10년간에는 아직 온 것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마침 연전에 선박 한 척이 우리 나라의 경내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 해당 관리들이 황제가 혹시 ‘그 전에도 계속 왕래하였는데 그 실정을 숨기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할까 염려하여 돌려보내기로 의논하는 것을 내가 즉시로 금하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게 되었으니 양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일본이 해마다 공물을 바친다는 문제는 전번에 알린 바와 꼭 같다. 당신이 보낼 글에 ‘앞을 다투어 정성을 다 바쳐 공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 대하여 전부터 악감을 가진 자들이 귀국에 곱게 보여 이 땅에 사변을 일으키려는 자일 것이다. 당신은 널리 양해하여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그 성과 여부를 기다려 보기를 바란다. 또 조서에 ‘젊은 패들과 소인들이 당신조차도 마음대로 폐립(廢立) 하거늘 항차 금후 당신의 자손에 대하여 진심으로 힘을 다하여 도우려고 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 말을 받고 더욱더 당신의 은혜를 느낀다. 국왕의 폐립을 음모하던 두목들이었던 시중 이장용, 참지정사 최영(崔瑛)은 이미 철직시켰다”라고 하였다. 이때 몽고의 중서성에서 고려에 둔전 경략사(屯田經略司)를 둘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에 둔전(屯田)을 둘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연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귀국의 군대가 문죄(問罪)를 할 때에 반역을 음모하던 자들이 공연히 자신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난을 일으키고 남녘으로 내려갔었으며 또 우리 나라에 오랫동안 악감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본국에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을 기회로 행동한 것이며 우리가 섬에서 육지로 나올 때에 그들이 군대들을 내놓아 크게 약탈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는 원망과 한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또 역적들이 아직 다 소탕되지 못한 까닭에 귀국의 군대가 아직 남녘 변방에 머물러 있으므로 우리 나라의 인민들은 밖으로는 역적을 토벌하는 일에 피로하고 안으로는 군대, 마필, 자재, 군량의 비용을 조달 공급하기에 곤란을 받고 있다. 국내에 축적하였던 식량과 물자들을 작년에 역적들에게 약탈당하고 남은 것이란 없다. 겨우 육지로 나와서 사는 신민(臣民)들이 장차 제 목숨을 연명하면서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곤란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청을 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 자들은 아마도 작년에 맛을 본 자들이 버릇이 되어 또 우리 나라로 와서 둔전(屯田)한다는 명목을 걸고 실제로는 우리 백성들을 해치려 하여 우리 나라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여러 가지로 청원한 것이다. 만일 조정에서 이 자들의 말을 들어준다면 그들은 반드시 제멋대로 온갖 침해를 다할 것이요, 우리 나라의 인민들은 아마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이미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자재와 식량을 운반하는 사업을 지시하고 이미 여러 도들에 권농사(勸農使) 등을 보내 있는 힘을 다하여 마련하고 있다. 대신 여러 분들은 황제에게 잘 여쭈어 간사한 자들의 둔전 설치의 청을 방지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낭장 이영(李瑛)이 몽고로 도망해 가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사천감(司天監) 오윤부(伍允孚)는 천문에 밝으며 또 낭장 김희목(金希牧)은 손으로 능히 돌을 빠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불화가 오는 편에 그들을 불렀으므로 왕이 명령하여 두 사람을 보내었다. 기묘일에 몽고가 일본에 국신사(國信使)로 비서감 조양필(趙良弼) 및 홀림적(忽林赤), 왕국창(王國昌), 홍다구(洪茶丘) 등 40여 명을 보내왔다. 그들이 가져온 조서에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일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통하여 우호 관계를 맺어 왔고 또 당신의 나라와는 그 국경이 아주 가깝기 때문에 일찍이 당신에게 조서를 보내고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열며 우호를 맺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 지방 관리들의 방해로 나의 뜻이 명확히 전달되지 못하였었다. 그 후에는 임연의 사건으로 그 문제를 미처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제 와서는 당신의 나라가 안정되었으므로 다시 조양필을 국신사로 보내니 반드시 일본에 그가 도착하도록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홀림적, 왕국창, 홍다구의 장병들을 해변가에까지 보내 국신사가 돌아올 무렵까지 우선 금주(金州-김해) 등지에 주둔하게 되었으니 이에 필요한 군량은 당신이 그 사업을 전임 관리에게 맡겨 그 지방에 파견하고 그 인근 지방에서 마련하여 공급하도록 할 것이며 선박과 군함들을 한데 모아 금주에서 대기하게 하되 늦어지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교외에 나가서 조서를 받았다. 홍다구는 왕을 보고 절하지도 않고 중서성의 통첩을 내보이었다. 그 통첩에 이르기를 “홍다구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비 홍복원(洪福源)은 누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고려에 있는 그의 부모 형제 친척들을 다 데려갔으나 아직도 숙부 홍백수(洪百壽) 등 5호(戶)는 데려가지 못하였다. 이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말하니 홍백수 등을 찾아 보내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오일에 조양필이 왕의 총애하는 신하 강윤소(康允紹)와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므로 왕이 할 수 없이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병술일에 박천주(朴天澍)가 진도에서 돌아왔다. 역적들이 함께 갔던 객사(客使) 두원외(杜員外)를 억류하고 조서를 박천주에게 도로 주면서 이르기를 “이 조서는 우리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받을 수 없다”고 하고 국서(國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복종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밀성군(密城郡) 사람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공(朴公), 박경순(朴慶純), 박경기(慶祺) 등이 군내 사람들을 모아 장차 진도와 호응하기 위하여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 병마사(攻國兵馬使)라고 자칭하면서 군, 현들에 통첩을 보내었으며 도당을 보내 청도(淸道)감무 임종(林宗)〔최량자(崔良梓)라고 적은 데도 있다〕을 죽이었다. 청도군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거짓 항복하고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한 다음에 모조리 잡아 죽이었다. 이때 밀성 사람 조천(趙阡)이 일선(一善) 현령(縣令)으로 있었는데 적들이 조천을 불러다가 같이 반역하기를 약속하자고 하니 조천이 이에 동의하였다. 그는 얼마 후 그 일당이 청도에서 몰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을 사람 손일(孫逸)과 더불어 역적의 괴수를 죽일 계획을 하였다. 안찰사 이오(李敖)〔이숙진(李淑眞)이라고 쓴 데도 있다〕가 금주 방어사 김훤(金晅), 경주 판관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고 갑자기 이르니 조천 등이 방보 등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반란이 평정되었다. 정해일에 전 평장사 유경(柳璥)을 애도(哀島)에 귀양 보내었다. 기축일에 박천주(朴天澍)를 몽고에 파견하였다. 계사일에 관노(官奴) 숭겸(崇謙), 공덕(功德) 등이 무리들을 모아 가지고 달로화적(達魯花赤)과 우리 나라의 관직에 있는 자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서 투항하려고 음모하였는데 대정(隊正) 송사균(宋思均)이 이 변란을 고발하였으므로 왕이 장군 최문본(崔文本), 조자일(曹子一)에게 명령하여 이를 문초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지후(祗侯) 신좌선(辛佐宣)이 항간에서 7∼8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수군 공론하는 것을 보고 왕에게 달려와서 “일이 급합니다”라고 고하였다. 그때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대신들과 승선, 중방, 내시(內侍), 다방(茶房) 등이 서로 돌아보며 크게 놀라 얼굴색이 변하였고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왕이 지 추밀원사 이현원(李玄原)과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보내 탈타아(脫朶兒)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탈타아는 홍다구 등과 함께 재상들을 모아 놓고 숭겸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다가 고문하니 모두 사실이라고 자복하였다. 2월 초하루 을미일에 숭겸 등 4명을 거리에서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송사균(宋思均)에게 별장(別將) 직무를 대행케 하고 은병(銀甁-고려 시대의 화폐), 항라, 명주 등 물품을 주었다. 기해일에 상장군 정자여를 몽고에 파견하여 방보, 숭겸의 반란을 보고하였다. 신축일에 착량(窄梁)의 초소를 지키고 있던 몽고 군대가 대부도(大部島-남양 대부‘大阜’섬)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침해 약탈하니 주민들의 원망이 심하였다. 대부(大部) 사람들이 숭겸 등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몽고 병사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주(水州) 부사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므로 안열의 관직을 5품으로 올리어 주었다. 계묘일에 도병마사가 말하기를 “요사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창고들이 비어 아무것도 없어서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니 선비들을 고무할 수 없습니다. 경기 8현(八縣)에다 품위에 따라 녹과전(祿科田)을 주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이 제의를 좇았다. 권신이 처단되고 난 뒤에 제왕(諸王)들과 총신(寵臣) 이현원(李玄原), 강윤소(康允紹), 이분희(李汾禧), 김자정(金自貞), 이분성(李汾成) 등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왕에게 청하여 권신들의 전원(田園)을 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상들이 이 전원(田園)을 회수하여 모두 영송고(迎送庫)에 소속시켜서 국용에 충당하자고 요청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그것을 먼저 발기한 자를 죄 주려고 당리(堂吏-도당‘都堂’의 관리) 최승적(崔承的)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대신들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므로 저는 누가 먼저 그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장흥부(長興府)와 조양현(兆陽縣)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심히 많이 하고 병선(兵船)을 불태워 버렸다. 방어(防禦) 도령(都領) 진정(陳井)은 본래 유학(儒學)으로서 자원하여 군대에 들어온 자인데 주색에 빠져서 군사 대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전당한 것이다. 정미일에 충청도 안찰사 홍자번(洪子藩), 교주도 안찰사 노문좌(盧文佐) 등이 사업 정형에 관하여 복명하니 왕이 친히 민간에 어떤 고통들이 있는가를 물었다. 무신일에 연등회가 있었으므로 왕이 봉은사에 갔다. 때마침 저시교(楮市橋) 근방의 민가에서 불이 나서 3백여 호가 탔다. 그래서 연등회 때에 하는 기악(伎樂)은 그만두게 하고 다만 태조 진전에 가서 참배만을 하였다. 신해일에 탈타아가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대들 중에서 남방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여러 주, 군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고 있으니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안무시켜야 한다”라고 제의하였다. 이에 왕이 장일(張鎰)을 경상도에, 주열(朱悅)을 전라도에 곽여필(郭汝弼)을 충청도에 파견하였다. 을묘일에 본 궁궐에다 소재 도량(消災道場)을 베풀었다. 장군 인공수(印公秀), 보성(寶城) 천호 등을 몽고에 보내 둔전(屯田)을 폐지하라고 요청하였다. 표문에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귀국의 조정에서 둔전을 경작할 군인을 떠나 보낸다고 하는데 이 일에 대하여 내가 감히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축적은 육지로 나올 때에 모두 역적들이 약탈해 갔고 또 귀국 군대의 비용을 충당하였기 때문에 다 소비하고 남은 것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주둔하고 있는 군대와 마필들의 소요량마저 전국의 인민들에게서 집집마다 거두어 내는 아주 어려운 형편이다. 설사 경작할 군인이 또 온다고 하더라도 농량이 떨어지고 없는 이때에 종곡을 또 어디서 구해 내겠는가? 그리고 밭갈이 할 소로 말하면 원래 많이 기르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성 안에 있는 주민들 중에는 가축을 길러서 부리는 자가 아주 드물게 있으니 지방 고을에서 소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충청도, 전라도는 역적 토벌에 곤란을 겪고 있으니 거기서 소를 징발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경상도에서나 혹 구해 낼 수 있는 것이나 그것도 많지 못할 것이다. 그런즉 귀국의 사업을 협조함에 있어서 어찌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랴마는 밭갈이하러 오는 군인들도 역시 식량 부족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세자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대행케 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나라의 모든 형편에 대하여 글로써 다 밝히지 못한 것들은 3월경에 나 자신이 귀국에 직접 가서 모두 말하겠다. 내가 보내는 사신의 말을 참작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병진일에 우부승선 홍문계(洪文系)가 사직하였으므로 홍자번을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백관들에게서 은과 포를 차등 있게 거두라 하여 왕 자신의 몽고로 가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하였다. 경신일에 박지량(朴之亮)을 수로 방호사(水路防護使)로 임명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경상도로 가게 하였다. 이달에 탈타아가 제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하는데 대신의 가문에서만 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딸을 가진 자들은 두려워서 서로 앞을 다투어 사위를 맞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대신의 집 두세 집을 적어 주어 탈타아 자신이 간택하게 하였다. 탈타아가 얼굴이 고운 자를 가린 결과 김련(金鍊)의 딸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그 집에서는 이미 데릴사위를 데리고 있었으며 그 사위는 두려워서 집을 나가 버렸다. 김련은 그때 몽고에 입조하고 아직 귀국하지 않았으므로 그 집에서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예식을 하자고 하였으나 (탈타아는) 듣지 않았다. 나라의 풍속에 나이가 어린 남자를 받아들이어 자기 집에서 양육하여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는 것을 데릴사위라고 하였다. 3월 병인일에 몽고가 흔도(忻都) 및 사추(史樞) 등을 보내 아해(阿海)를 대신케 하였다. 그 조서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사신을 보내 일본을 개유하였는데 일본이 완미하게 고집을 부리고 문호를 열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말로 알아듣게 하기는 힘들게 되었다는 것은 당신도 아는 바이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해당 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어 군대를 파견하고 둔전을 경작하여 진취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니 이것은 당신의 나라로 하여금 일후에 군량 운반의 폐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다시 사신을 그들에게 보내 나의 편지를 전달하여 우선 먼저 위무하는 의사를 보이게 하겠으니 당신은 깊은 관심으로 나의 계책을 도와 이 일이 성공되도록 하며 나의 뜻에 부합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중서성의 공문에 이르기를 “황제의 지시를 받들고 흔도, 사추 등을 봉주(鳳州) 등지에 보내 경략사(經略司)를 설치하고 둔전을 경영케 하니 소유해야 할 둔전과 소 6천 두는 동경 등지에서 그 절반을 내고 나머지 3천 두는 경략사로 하여금 값을 받아 고려에 가서 사들이도록 하였으니 이 외의 농기구, 종자 같은 것과 가을까지의 군량을 모두 공급하여 부족함이 없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사일에 동계 안집사(安集使)가 보고하기를 “양주(襄州)의 백성 장세(張世), 김세(金世) 등이 수령 및 아전, 선비들을 죽이려고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처단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도당들인 천서(天瑞) 등이 가만히 고(古) 화주(和州)의 조휘(趙暉)에게 투항해 가서 그에게서 군사 4백여 명을 청하여 가지고 양주에 들어와 인민들을 데리고 바다 섬으로 옮겨가 산다고 거짓말로 속이어 지주(知州) 및 관리, 인민들 1천여 명을 배 3척에 나누어 강제로 싣고 가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임신일에 삼별초가 합보(合浦)에 침입하여 감무(監務)를 잡아갔다. 계유일에 봉주 경락사(經絡司)에서 명주 12만 3백 50필을 가지고 와서 농우(農牛)를 사 갔다. 갑술일에 왕이 남산궁(南山宮)에 자리를 옮겼다. 정축일에 몽고 중서성에서 공문으로 통고하기를 “고려 사람들이 몽고에서 병기와 말을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하였다. 임오일에 추밀원사 김련이 몽고에서 돌아왔다. 황제는 숭겸, 방보 등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을 듣고 요청한 모든 것을 다 허락하지 않았다. 갑신일에 삼별초가 동래군에 침입하였다. 계사일에 몽고 단사관(斷事官) 심혼(沈渾)이 와서 군량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유경, 유천우를 소환하였다. 인공수가 몽고에서 돌아왔는데 황제의 회답 조서에 이르기를 “왕이 나에게 보고한 것은 잘 알았다. 앞서 왕이 제 나라에 있는데도 오히려 간사한 자들이 사건을 일으켰는데 지금 반역자들이 아직 진압되지 못했으니 내조해서는 안 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백관들이 바쳤던 은과 포를 모두 다 돌려주었다. 이달에 전중감 곽여필을 몽고에 보내 진정 표문을 제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황제의 사신 흔도, 사추가 와서 황제가 일본을 개유한 일에 관하여 전달하였다. 이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 나라는 방금 섬에서 육지로 나왔는데 이것은 마음을 다하여 당신에게 성의를 다하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일본과 비밀리에 통하여 그를 비호해 준다고 하니 어찌 그럴 이가 있겠는가? 다만 일본의 풍속이 완미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기 때문에 사신이 들어가면 그 대접이 정중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제 다시 당신이 엄격히 독촉하니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에 대하여 사신의 지휘에 따라서 반드시 성공하도록 노력하겠다. 또 중서성의 공문도 받았는데 그 글에 지적한 봉주 둔전에 관한 농우, 농기구, 종자, 군량 등의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농우는 전번 보고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서울에는 가축을 길러 부리는 자가 적으며 지방 농민들은 가산이 많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가축을 기르는 것이 한두 마리에 불과하며 가난한 자들은 대개 손으로 쓰는 따비(耒)를 사용하여 경작하거나 혹은 서로 삯소를 빌려 쓴다. 지금 지방의 소와 가축들은 모두 전라도로 보내 군량을 수송하다가 굶어죽고 손실된 것이 태반이나 된다. 농기구로 말하면 우리 나라 인민들은 원래 충족하게 갖추고 사는 자가 없다. 그러나 상기의 물건은 모두 지시된 수량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힘 자라는 대로 마련하겠다. 종자로 말하면 백성들이 해마다 경작하여서는 공물과 부세(貢賦)를 바치고 그 나머지를 식량으로 삼는데 겨우 몇 말, 몇 섬밖에 안 되어 다음해 경작의 종자로 준비해 두는 정도이므로 비록 매개 농호들에서 징수한다 하더라도 몇 섬이 못될 것이다. 군량으로 말하면 오랜 전쟁 끝에 우리 나라의 축적이 역적들에게 약탈된 것을 그만두고라도 주둔하고 있는 군마(軍馬)와 역적을 토벌하는 군마들에게 공급하고 보니 조금도 남은 것이 없다. 온 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서 징수한 것도 벌써 몇 차례나 되었으므로 이것도 계속적으로 보장하지 못하겠다. 그런데다가 또 이번에 제시한 종자, 사료, 가을까지의 군량을 다 합치면 모두 몇만 석이 될는지 모르니 어디서 구해 내겠는가? 항차 지금 역적들이 날이 갈수록 번성하여 그 피해가 경상도의 금주, 밀성에까지 미치었고 게다가 또 남해, 창선, 거제, 합포, 진도 등 해변 부락에서는 모두 다 습격 약탈을 당하였기 때문에 일체 곡물 징발 사업은 보장하기 힘들게 되었다. 경상도, 전라도의 공물과 부세는 다 육상 운수로 나르지 못하고 반드시 바다로 운반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역적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진도는 해상 수로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 지점인 까닭에 내왕하는 선박들을 그곳으로 통과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군량, 사료, 종자는 비록 징수하여도 운반할 길이 없다. 그러나 감히 명령을 어길 수는 없으니 힘 자라는 한 거두어 보겠다. 다만 이른바 농기구, 농우, 종곡, 사료는 모두 다 백성들의 농사 밑천인데 이것을 다 빼앗아 공급한다면 곧 삼한(고려)의 백성들은 실제에 있어서 더 자주 기아에 빠져들어 영락하고 죽어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민망히 생각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당신은 이 실정을 똑똑히 살피고 잘 처분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여름 4월 병신일에 각 도에 농무(農務) 별감을 보내 황주와 봉주로 농우와 농기구들을 가져가는 것을 독촉하게 하였다. 경자일에 어떤 사람이 달로화적(達魯花赤) 탈타아(脫朶兒)에게 일러 바치기를 “우리 나라 풍속에 4월 8일에는 등불을 관람하는데 내가 가만히 엿들은 바에 의하면 그 누구인가가 이 기회에 난을 일으키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탈타아가 그 말을 믿고 집을 나와 성 밖에 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아니 하였다. 신축일에 삼별초가 금주에 침입하였다. 방오 장군 박보(朴保)가 별초(別抄)와 함께 모두 도망하여 산성에 들어가니 삼별초가 불을 지르고 약탈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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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충렬왕 경진 6년(1280)
12월 계유일에 허공을 참 문학사 세자보(參文學事世子保)로, 홍자번을 지 첨의 부사 세자 이사(世子貳師)로, 한강을 좌상시로, 송분과 이존비를 모두 지밀직사사 세자 원빈(世子元賓)으로, 박구와 김주정을 모두 동지밀직사사로, 김백균(金伯均)을 밀직부사로, 채인평(蔡仁平)을 삼사사로, 주열을 판도 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갑신일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신묘일에 조인규, 인후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왕이 성의 서문 밖에 나가서 조서를 맞이하였다. 황제는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中書) 좌승상(左丞相) 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로 책봉하고 해당하는 도장(印信)을 보내 왔다. 또 김방경을 중봉(中奉) 대부(大夫) 관령(管領) 고려군 도원수 지밀직사사로, 박구, 김주정을 소용(昭勇) 대장군 좌(左)우(右) 부도통(副都統)으로 각각 임명하고 그들에게 모두다 호두 금패(虎頭金牌)와 도장을 주었고, 조인규를 선무(宣武) 장군 왕경(王京) 단사관(斷事官) 겸 탈탈화손(脫脫禾孫)으로 임명하고 금패와 도장을 주었고, 박지량(朴之亮) 등 10명을 무덕(武德) 장군 관군천호(管軍千戶)로 임명하고 금패와 도장을 주었으며, 조변 등 10명을 소신(佋信) 교위(校尉) 관군 총파(管軍摠把)로 임명하고 은패와 도장을 주었으며, 김중성(金仲成) 등 20명을 충현(忠顯) 교위(校尉) 관군 총파로 임명하였다. 갑오일에 새 궁전에서 연회를 열었다.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정해 13년(1287)
정해 13년(1287) 봄 정월 갑자일에 부지밀직사사 염승익이 왕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무진일에 동판(同判) 밀직사사 이본지(李尊庇)가 죽었다. 신미일에 박지량(朴之亮)을 부지밀직사사로 김혼(金琿)을 삼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기묘일에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2월 경자일에 첨의 중찬 원부가 죽었다. 연등회가 있었으므로 왕이 강안전(安戩)으로 옮겼다. 기미일에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경신일에 송분을 지 도첨의사로, 조인규를 삼사사로, 공유를 동판 밀직사사로, 김혼, 안전을 각각 부지밀직사사로, 유승(柳陞), 임정기(林貞杞)를 좌우 부승지로 각각 임명하였다. 윤달 무진일에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금주(禁酒)하였다. 경오일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인일에 왕이 친히 대전에서 소재 도량을 베풀었다. 3월 초하루 임진일에 왕이 친히 강안전에서 삼계(三界)에 기도하였다. 경자일에 왕고 공주가 묘련사에 갔다. 갑진일에 장군 장순룡 등을 원나라에 보내 이인춘(李仁椿)의 딸을 바치게 하였고 또 공주가 입을 진주(眞珠) 옷을 사오라고 명령하였다. 을사일에 원나라에서 형부(刑部) 시랑(侍郞) 육십(六十)을 보내 동녕부의 사건을 조사 해명케 하였다. 갑인일에 비가 내리라고 기도를 올리었다. 병진일에 4년(충렬왕)에 왕을 수종(隨從)한 공신들에게 각각 노비 2명과 전(田) 1백 결씩을 주었는바 간혹 내료들로서 수종한 일이 없는 자들도 함부로 준 일이 있었다. 경신일에 합포를 수비하던 군사들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여름 4월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죄수들을 재심사하였다. 무진일에 왕과 공주가 복령사(福靈寺)에 갔다. 한발(가물)로 인하여 시장을 골목 안으로 옮겼다. 경오일에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였다. 계유일에 왕과 공주가 서해도에서 사냥하였는바 말을 타고 사냥 가는 자의 수가 1천 5백 명이나 되었으므로 재상이 간하기를 “가물이 벌써 아주 심하며 또 백성들이 방금 농사가 바쁜 때이니 이 번 행차가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또 새와 짐승들이 지금 새끼를 배는 때니 사냥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성을 내고 그 말을 듣지 아니 하였다. 왕이 자기를 따라 가는 군사들에게 미리 녹봉을 주라고 명령하였는데 어사가 이것을 반박하였으므로 왕이 성을 내어 어사를 순마소에 가두었다. 을해일에 낮에 여우가 대전(大殿)에 들어갔다. 경진일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여 사흘 동안 계속하였다. 계미일에 재상들이 자기 재물을 내어 보제사에서 비가 내리라는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무자일에 왕이 서해도에서 돌아왔는바 여우가 대전에 들어간 괴변이 일어났으므로 신효사에 처소를 잡았다. 5월 초하루 신묘일에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많이 내렸다. 을미일에 왕고 공주가 양루에 올라서 격구(擊球)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임인일에 왕이 내안(乃顔) 대왕의 반란을 일으킨 소식을 듣고 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보내어 “고려에서도 군대를 출정하여 역적 토벌을 원조하겠다”고 청하였다. 당시 내안이 우리 나라의 반역자인 유초(庾超)를 보내 도망한 자기 군인들을 조사 대조하고 있었는데 유초가 내안의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금교까지 간 것을 고려에서 사람을 보내 붙잡아 죽였다. 6월 임술일에 유비가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황제가 병력 원조를 수락하였다고 전하였다. 계해일에 군대를 사열하였다. 채모를 부지밀직사사로, 유백정(庾伯貞)을 삼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갑자일에 정가신(鄭可臣)을 경상도에, 채모를 전라도에, 안전을 충청도에 각각 보내 모두 안무사(按撫使)로 임명하고 김주정은 강직시켜 청주 목사(牧使)로 임명하였다. 병인일에 최유엄(崔有渰)을 전법(典法) 총랑(摠郞)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하였다. 정묘일에 조인규를 지 도첨의사사로, 공유를 판삼사사로, 나유를 부지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기사일에 군대 사열이 끝난 후에 왕이 친히 궁문(宮門)에서 독기(纛旗)를 제사지냈으며 김주정의 호두패(虎頭牌)를 박지량에게 주어 그를 좌익(左翼) 만호로 임명하고, 박구(朴球)의 호두패를 나유에게 주어 그를 중익(中翼) 부 만호로 임명하였다. 당시 대정(隊正)에 이보(李普), 이성(李成)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다 군목(軍目)에 올라 있었다.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형은 동생을 남겨 봉양하게 할 것을 청원했고 아우도 역시 형을 남겨 두어 달라고 청원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의 효성에 감동되어 둘 다 남아서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허가하였다. 왕이 친히 원정하기로 되어 계유일에 공주가 양루에서 왕을 전벌하고 겸하여 출정하는 장령들과 군사들을 위문하는 연회를 배설하였다. 박지량이 해가 높이 떠오른 후에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왕이 양루에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을 탄 채 누각 아래까지 곧바로 오니 왕이 노하여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호두패를 빼앗아 한희유(韓希愈)에게 주었으며 희유를 좌익 만호로 지량은 부 만호로 각각 임명하였다. 갑술일에 한희유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기묘일에 감악산(紺嶽山) 산신(山神)의 둘째 아들을 봉하여 도만호(都萬戶)로 임명하였는바 이것은 원정을 도와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병자일에 양부(兩府)가 왕을 양루에서 전송하였다. 무인일에 역관 김인(金仁)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전하기를 “황제가 내안(乃顔)의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니 공주가 기뼈서 그에게 금선(金線)과 명주를 한 필씩 주고 대위(隊尉)로 임명하였다. 개성 성안에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모두 기뻐하였으며 대낮에 저자에게 경축 휴업(罷市)하였다. 임오일에 개경에 남아 있을 시위군(侍衛軍)을 선발 정비하였다. 가을 7월 경인일에 왕이 친히 전군(前軍)을 통솔하고 인후를 중군(中軍) 만호로 임명하여 개성을 출발하여 난산(卵山)에 이르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얼굴을 가리면서 울었다. 임인일에 동경 총관 강수형(康守衡), 요동 선위사 등이 사람을 보내 전달하기를 왕이 만약 빨리 올 수가 없다면 우선 정예로운 군사 1천 명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장군 유비, 중랑장 오인영(吳仁永)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왕이 친히 장병들을 거느리고 이미 출발하였다고 통지하였다. 경술일에 선대 왕들에게 존호(尊號)를 추가하여 올렸으며 또 전국의 명산, 대천, 신지(神祗)들에 덕호(德號)를 더 붙이었다. 8월 정묘일에 유비, 오인영 등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친히 내안을 정벌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 성을 함락시키고 이미 연경(북경)에 귀환하였으므로 여러 노(路)들에서 군사들을 징발 파송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하였으며 또 “왕은 역전(驛傳)을 타고 입조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전달하니 왕이 기뻐서 유비를 대장군으로 오인영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무진일에 공주가 유비를 원나라에 보내 공주도 왕을 따라서 입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경진일에 동녕부 역어 중랑장 구천수(丘千壽)가 쌍성(雙城)의 간첩 홀도대(忽都歹), 덕산(德山) 등을 붙잡아 왔다. 신사일에 조변(趙抃)을 부지밀직사사로, 권단(權㫜)을 좌부승지로 각각 임명하였다. 을유일에 낭장 정지연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쌍성의 간첩을 체포한 데 대하여 보고하였다. 9월 경자일에 동진 골외국(東眞骨嵬國) 만호 첩목아(帖木兒)가 만군(蠻軍) 1천 명을 영솔하고 경비 임무를 끝마친 후 원나라로 돌아가던 차에 개경에 와서 공주를 예방하였다. 갑인일에 왕이 연경에 체재하면서 공주와 세자를 입조하라고 통지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으나 비가 오지 아니 하였다. 경오일에 공주와 세자가 차신(車信)의 저택으로 처소를 옮겼다. 무인일에 공주와 세자가 원나라로 떠났다. 11월 계사일에 원나라에서 탑라아(塔剌兒)를 보내 탑라 달로화적으로 임명하였다. 을미일에 공주가 서경에 이르렀을 때 함평부(咸平府)에서 반란이 일어나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돌아왔다. 임자일에 대장군 기관(奇琯)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신년을 축하하였다. 지 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서 치사(致仕)한 주열(朱悅)이 죽었다. 12월 병인일에 왕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염승익을 첨의평리로, 정가신을 판삼사사로, 김흔을 동판 밀직사사로, 한의유를 부지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기사일에 왕명으로 “양가(良家)의 처녀들은 먼저 관청에 보고한 이후에 출가시킬 것이며 위반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라고 포고하고 이어 허공 등에게 명령하여 숫처녀(童女)를 선발하게 하였다. 계미일에 허공을 첨의 중찬으로 홍자번과 한강을 첨의찬성사로, 조인규, 염승익을 지 도첨의사사로, 박지량을 판삼사사로, 인후를 판밀직사사로, 나유를 동지밀직사사로, 임정기, 김지숙(金之淑), 김혼, 채모를 모두 부지밀직사사로, 권단을 밀직 학사로, 정가신을 감찰 대부로, 이혼(李混)을 우부승지로 각각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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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82권 - 지 제36 > 병 2 >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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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진(州鎭)에서 농한기에는 매월 여섯 아일(六衙日)에 활과 기계활을 연습하게 하는데 계관(界官), 행수원(行首員), 색원(色員)을 시켜서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활은 40보, 기계활은 50보 밖에 과녁을 두고 열 번 쏘아서 다섯 번 맞춘 자와 계속 맞춘 자에 대하여는 양경(兩京)에서 사업하는 문무관이면 녹과 연한을 올려 주거나 다른 좋은 직에 옮겨 주며 산직인 동반 남반이면 내외직에 올려 주고 보통 하층 관리이면 자원에 의하여 직을 주고 산직 장상 장교면 연한을 올려서 다른 좋은 직에 옮겨 주며 직이 없는 사람이면 적당한 직에 올려 썼다. 태조 3년 3월에 북계 골암성(鶻岩城)이 자주 북적(北狄)의 침략을 받으므로 유검필(庾黔弼)에게 명령하여 개정군(開定軍) 3천 명을 거느리고 골암성에 가서 동산에 큰 성을 쌓고 주재케 하니 이로 인하여 북방이 평안하게 되었다. 10년 8월에 배산성(拜山城)을 수리하고 정조(正朝) 제선(悌宣)에게 명령하여 두 개 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다. 11년 2월에 대상(大相) 염경(廉卿) 능강(能康) 등을 안북부(安北府)에 보내 성을 쌓게 하고 원윤(元尹) 박권(朴權)으로 진두(鎭頭)를 삼아 개정군 7백 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다. 4월에 운주(運州) 옥산(玉山)에 성을 쌓고 주둔군을 두었다. 이 해에 왕이 북계를 순시하고 진국성(鎭國城)을 옮겨 쌓고 이름을 통덕진(通德鎭)이라 고치고 원윤(元尹) 충인(忠仁)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12년 3월에 대상(大相) 염상(廉相)을 보내 안정진(安定鎭)에 성을 쌓고 원윤(元尹) 언수고(彦守考)를 시켜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9월에 대상 식렴(式廉)을 안수진(安水鎭)에 보내 성을 쌓고 원윤 흔평(昕平)으로서 진두를 삼았다. 또 흥덕진(興德鎭)에 성을 쌓고 원윤 아차성(阿次城)으로 진두를 삼았다. 13년 2월에 이어진(昵於鎭)에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 고치고 백성들을 성 안에 옮겨 채웠다. 8월에 대상 염상을 마산(馬山)에 보내 성을 쌓게 하고 정조 흔행(昕幸)으로 진두를 삼았다. 14년에 원윤 평환(平奐)으로 강덕진(剛德鎭) 진두를 삼았다. 17년에 대상 염상을 통해진(通海鎭)에 보내 성을 쌓고 원보(元甫) 재훤(才萱)으로 진두를 삼았다. 성종 원년 6월에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우리 나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군사들이 아직 편히 잠자지 못하고 군량도 낭비를 면치 못한 것은 서북 지방이 오랑캐(戎狄)와 인접하여 있어서 수비할 곳이 많은 까닭입니다. 마헌탄(馬歇灘)을 경계로 한 것은 태조의 의사였고 압록강변 석성(石城)을 경계로 한 것은 명나라가 정한 것입니다. 청컨대 요해지를 골라서 국경을 정하고 그곳 사람으로서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방위에 보충하고 또 편장(偏將)을 뽑아 이를 통솔하게 한다면 서울 군대(京軍)는 수자리를 서로 바꾸는 괴로움을 면할 것이고 마초와 군량을 운반하는 비용도 안들게 될 것입니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전투할 때 쓰는 배 75척을 만들어 명구진(溟口鎭)에 정박시켜 동북의 해적을 막았다. 문종 원년 정월에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상음(霜陰), 학포(鶴浦) 두 고을의 연해에 군사를 주둔시켜서 변방 도적의 친입을 제압하게 하라”하였다. 고종 4년 정월에 대장군 오수기(吳壽祺)를 보내 보병 수천을 거느리고 동계(東界)를 방위하고 겸하여 동계의 여러 부대를 거느리게 하였다. 원종 11년 11월에 만호 고을마(高乙麻)가 병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남쪽에 주둔하여 삼별초에 대비하였다. 충렬왕 원년 3월에 탐라(耽羅)에 주둔한 병사가 적어졌으므로 사람을 모집하고 직무를 주어 보냈다. 7월에 부병 4영을 제주도에 보내 수비하게 하였다. 8년 3월에 상장군 인후(印侯)를 합포(合浦)에 보내 수비하게 하였다. 10년 정월에 재추로서 능히 만호를 겸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동쪽 변강을 눌러 지키게 하였다. 13년 7월에 박지량(朴之亮)으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동쪽 경계에 주둔하여 여진에 대비하게 하였다. 15년 12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김흔(金忻)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나유(羅裕)를 동쪽 경계에 보내 방수군(防戍軍)을 징발하였다. 16년 2월에 중군 만호 정수기(鄭守琪)를 금기산동(禁忌山洞)에 보내 주둔시키고 좌군만호 박지량을 이천(伊川) 현계에 주둔시키고 한희유(韓希愈)는 쌍성(雙城)에 주둔시키고 우군 만호 김흔은 환가현(豢猳縣)에 주둔시키고 나유는 통천군 지경에 주둔시켜 거란적에 대비케 하였다. 충숙왕 5년 4월에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진변 별초(鎭邊別抄)는 원래 이전 직함 가진 산직과 서울에 있는 양반으로서 돌림 차례로 국경 방어에 나갔었는데 근년에 와서 주장하는 관리들이 친분과 사정을 보고 이속들이나 백성으로 대신시켰다. 이로 인하여 공부(貢賦)가 날로 적어지고 또 무식한 사람이 서로 이어 도망쳐 흩어져서 그들이 살던 주, 현에는 빠진 군대를 징발하는 일이 많이 거듭되어 백성이 폐해가 적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이전 직함을 가진 산직과 서울에 있는 양반을 철저히 조사하여 돌림 차례로 전선 방어에 나가게 할 것이다.” 12년 10월에 왕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합포 기타 지역의 진수(鎭戍) 군인과 대소 군현의 군인 정원 수가 고르지 못하니 금후는 순무진변사(巡撫鎭邊使)가 정형을 참작하여 정원 수를 고쳐 정하며 또 모든 영, 진(營鎭) 관내의 백성들을 못 살게 굴므로써 자기 사욕을 채우는 자에 대하여는 엄격히 금지할 것이다.” 공민왕 5년 6월에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각 처에서 별초를 더 모집하는데 노인, 어린이와 단정(單丁-한 집에 장정 한 사람 있는 것)을 막론하고 강제로 멀리 보내 주둔케 하므로 그들이 가고 오는 데 지쳐서 서로 도피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연해 군민을 모두 방수군에 채워 넣고 노역은 면제해 주며 그 노역은 먼 곳에서 온 사람에게 부담시키고 방수에는 참가하지 않게 하면 양편이 다 편리하게 될 것이다. 또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습속으로 되었으니 마땅히 동계(東界) 교주의 군사는 쌍성에 주둔하고 북계와 서해의 군사는 압록강에 주둔하고 양광, 전라, 경상도의 군사는 왜적 방어를 맡게 하되 자질이 좋고 용감한 사람을 뽑아서 쓰는 것이 무방하다.” 9월에 각 도에 사신을 보내 제주 사람과 화척 재인들을 몰아다 서북면을 지키는 군사에 보충하였다. 6년 정월에 도평의사가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동서 북면에 수자리하는 병졸들은 2월에 갈리고 군관은 8월에 갈리는데 군관과 병졸이 각각 한 번씩 갈리므로 방어 사업이 공허하게 되니 마땅히 2월, 3월과 8월, 9월로 먼저와 뒤의 번을 정하여 차례로 수자리를 갈되 3월에 갈리는 것은 반드시 상순에 하여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2년 5월에 왜구(倭寇)가 우리 섬에 가까이 침입하므로 성 안의 각호를 검열하여 10호로 한 통(統)을 만들되 그 중 한 사람은 방어에 내 보내고 5일에 한 번씩 서로 바꾸도록 하였다. 7월에 왜적이 서강(西江)을 침략하므로 성안의 연호군(煙戶軍)을 조사하여 모두 방어에 나가게 하였다. 윤 11월에 도총도감을 설치하고 성 안의 각호를 조사하여 큰 호와 중간 호는 5호를 합하여 하나로 하고 작은 호는 10호를 하나로 하여 각각 한 사람씩 나오게 하되 중, 동부(中東部)는 동강에 가고 남, 서, 북부는 서강에 가서 왜적을 막게 하였다. 신우 원년 9월, 처음에 경상, 양광, 전라 각 도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익위군(翊衛軍)이라 하고 동서강에 주둔케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서북면 치는 데 나가게 하고 5부 방리 각호 사람들과 성 밖에 있는 모든 능에 속한 사람들, 잡인들을 양강에 가서 막게 하였다. 2년 7월에 도평의사가 다음과 같은 계시를 내었다. “성을 지키는 원수는 방리군을 거느리고 네 곳의 문을 지키게 하고 또 백관은 부하를 거느리고 연해를 지키게 하며 방어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은 다만 문하성, 사현부, 내시, 다방(茶房), 지제교(知製敎), 예문(藝文), 춘추(春秋), 양관(兩館)과 각 관아의 성상(各司城上) 뿐으로 한다.” 허튼 말이 돌기를 왜장이 도성을 침략한다 하므로 밤중에 방리군을 발동시켜 성을 지켰다. 또 적장이 벌써 송악산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중을 발동시켜 군인으로 삼아 요해지를 나누어 지켰다.” 3년 3월에 최영(崔瑩)이 각 원수에게 명령하여 종사 10명씩 내게 하고 또 각 애마, 궁사 창고인을 징발하여 군졸로 삼아 강화에 주둔시켰다. 공양왕 3년 정월에 안주(安州), 압록(鴨綠), 용천(龍泉), 대동(大同) 각 요해지에 파절관(把截官)과 참부(站夫)를 두었다.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기축 15년(1289)
기축 15년(1289) 봄 정월 무자일에 왕과 공주가 묘련사에 갔다. 경자일에 찬성사 강수형(康守衡)과 중찬으로서 치사하였던 송송례(宋松禮)가 죽었다. 2월 임자일에 세자의 관례(冠禮)식을 거행하고 서원공(西原侯) 왕영(王瑛)의 딸을 세자비(妃)로 삼았다. 무오일에 왕과 공주가 묘련사에 갔다. 임술일에 원나라에서 감찰 아로온(阿魯溫)을 보내 은을 채굴하였다. 병인일에 원나라에서 호, 광로(湖廣路)의 행상서성 참지정사 장수지 (張守智), 한림 직학사 이천영(李天英) 등을 보내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상서성의 보고에 의하건대 ‘작년에 요동으로 군대들과 군마들을 파견하였을 무렵에 그 지방 인민들이 난리를 겪고 곡식도 거두어들이지 못하여 모두 먹을 것이 없는 형편이라 하며 강남(江南)은 요동에서 거리가 멀고 길이 험하여 배로 양곡을 운반하여도 나누어 줄 수량을 다 보장하지 못하겠는바 요동과 고려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그곳(고려)에서 양곡 10만 석을 마련하여 가져다가 구제하여 주도록 명령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장수지 등을 파견하니 힘을 다하여 상기 수량을 수집하여 관원을 시켜 수송하여 주면 내년 봄에 구제하는 데 쓰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축일에 왕이 병에 걸렸으므로 공주가 세자와 함께 효신사(孝信寺)에 처소를 옮겼다. 3월 경진 초하루날에 일식이 있었다. 정해일에 장군 오인영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군량의 수량을 보고하였다. 경인일에 원나라의 아고대(阿古大)가 와서 진주(眞珠)로 장식한 옷 두 벌을 공주에게 바쳤는바 이것은 장순룡이 원나라에 가서 구매한 것이다. 왕과 공주가 아고대를 위하여 수녕궁(壽寧宮)에서 연회를 배설하였다. 신묘일에 감찰사(監察司) 승(丞) 여문취(呂文就), 직사관 진과(陳果) 등으로 하여금 배 4백 83척과 뱃사람 1천 3백 14명을 데리고 쌀 6만 4천 석을 개주(盖州)에 수송해 가게 하였다. 충청도 지휘사 대장군 임비, 전라도 지휘사 좌사의대부 최양(崔諹)은 군량 수송을 기한 내에 보장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철직시켰다. 이에 지밀직사사 나유를 충청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판삼사사 박지량을 경상, 전라도 도순문사로 임명하여 군량 수송을 독려하게 하였다. 홍문계(洪文系)를 소환하였다. 기해일에 내고(內庫)의 쌀 4천 석을 출고하여 군량에 보충하였다. 여름 4월 초하루 기유일에 원나라 황제가 금으로 만든 독(金甕)을 왕에게 선물을 주었다. 경술일에 서리가 내렸다. 무오일에 왕이 목촌(木村)에 사냥하였다. 정묘일에 장수지, 이천영 등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수지는 사사로이 노새 열 마리와 말 스무 마리 그리고 가는 베(細布)를 청하여 가지고 갔다. 을해일에 각 품(品)의 인원들에게서 징수하였던 군량을 도로 내어 주었다.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술을 금지하였다. 5월 경진일에 가물이 계속되므로 시장을 골목으로 옮기게 하였다. 신사일에 비와 우박이 내렸으며 약간의 눈도 내렸다. 계미일에 왕과 공주가 양루(凉樓)에서 단오(端午)라 하여 연회를 배설하고 격구(擊球)를 관람하였다. 이때는 모란꽃이 모두 떨어졌으므로 채랍(綵蠟)으로 꽃을 만들어서 가지마다 매어 달고 놀았다. 을유일에 지밀직사사 나유를 보내 개주에 군량을 운반하였다. 신묘일에 무당들을 모아서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게 하였다. 갑오일에 원구(圓丘)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6월 경술일에 대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보내 모시를 바치게 하였고 또 장군 남정(南梃)은 새매(鷂)를 바치러 보냈다. 가을 7월 임오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으며 계미일에도 역시 나타났다. 원나라에서 아로혼(阿魯渾), 이성(李成) 등을 보내 은을 채굴하였다. 을유일에 유비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원나라 황제가 왕에게는 옥띠를, 공주에게는 금포(金袍)를 보내 주었다. 기축일에 공주가 병에 걸렸다. 갑오일에 왕이 서해도에 사냥 갔다. 무술일에 판삼사사 박지량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계묘일에 해도(海都)의 군사들이 변강을 침범하였으므로 황제가 장차 친히 정벌하려 가기 위하여 아단 불화(阿旦不花)를 파견하여 출병을 요구하였다. 8월 무신일에 홍자번, 조인규 등에게 명령하여 봉은사에 모여서 군사들을 초모, 선발하게 하였으며 또 여러 도들에서 병정을 징발케 하였다. 신해일에 찬성사 박구(朴球)가 죽었다. 을묘일에 인후, 김흔에게 명령하여 통구(通衢)에서 군대들을 점검 사열케 하였다. 대장군 장순룡을 원나라에 보내 동지밀직사사 채인규(蔡仁揆)의 딸을 바치게 하였다. 정사일에 왕이 친히 외원(外院)에서 소재 도량을 베풀었다. 무오일에 탐라 안무사 홀도탑아(忽都塔兒)가 원나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청색 자기(靑砂)로 만든 항아리(甕), 분(盆), 병(甁)을 요구하였다. 임술일에 만호 김흔으로 하여금 정벌 원조군을 인솔하고 요양행성으로 가게 하였다. 9월 초하루 정축일에 왕이 서해도로 사냥 갔다. 당시 환관들과 권세 있는 고위 고관들이 모두 사전(賜田)을 받았는바 많이 받은 사람은 20∼30결에 이르렀으며 각각 양민(良民)을 차지하고 모든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그런데다가 왕이 사냥하러 나가기만 하면 안렴사, 권농사들이 각각 연회를 배설하여 왕을 대접하였으며 혹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연회를 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매질하였으므로 모두 앞을 다투어 백성들을 침해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해독을 혹심하게 입었다. 경진일에 원나라에서 대왕(大王) 석렬흘(石列紇)을 인물도(人物島)에, 야리불(野里不)을 여음도(與音島)에 각각 귀양 보냈다. 임진일에 왕이 수강궁에 갔다. 병신일에 대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을사일에 대장군 양공적(梁公勣)으로 하여금 합포(合浦)를 수비(鎭)하게 하였다. 병오일에 찬성사로서 처사하였던 신사전(申思全)이 죽었다. 이달에 원나라에서 고려국 유학 제거사(高麗國儒學提擧司)를 설치하였는바 그 질(秩)은 종5품이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정미일에 왕이 마제산으로 사냥하였다. 모오일에 왕이 현성사에 갔다. 경신일에 원나라 황제가 조정군(助征軍) 파견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임술일에 대장군 원경을 원나라에 보내 왕이 친히 입조하겠다고 신청하였다. 을축일에 나유가 개주로부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군량 운반선으로 파괴된 것이 44척이요 바람을 만나 잃어진 것이 9척이며 쌀이 침몰된 것이 5천 3백 5석이요 양식 부족으로 가만히 당겨 먹은 것이 9백 8석 4두이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백 19명, 병으로 죽은 자가 4명, 도망간 자가 67명, 행방불명된 자가 87명이다”라고 하였다. 윤달 을유일에 왕이 금자원(金字院)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경찬(慶讚)하는 불교 의식을 거행하였다. 기축일에 원나라 상서성 및 추밀원에서 관원을 보내 동쪽 일본을 정벌할 때에 사용하던 무기로서 합포에 보관해 둔 것을 검열하였다. 신축일에 왕과 공주가 묘련사에 처소를 옮겼다. 11월 초하루 병오일에 장군 백정인(白挺仁)을 원나라에 보내 새매(鷂)를 헌납하였다. 정미일에 첨의 중찬으로서 치사하였던 유경(柳璥)이 죽었다. 임자일에 왕과 공주 및 세자가 원나라로 떠나갔는데 조인규, 인후, 염승익, 안향 등이 따라 갔다. 이번 행차에 수행하여 공을 세워 보려는 자가 많아서 인원 수를 결정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의 명령으로 사관(史官)은 이번에 관계될 일이 없다고 하여 따라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관이 왕을 따라 다니지 않는 관계가 이때부터 시작하였다. 12월 경인일에 궁저내(弓箭陪) 중원후(中原侯) 왕온(王★(溫-氵))이 원나라로 가게 되니 대장군 박의(朴義)가 따오기(鵠) 고기를 바쳤다. 계사일에 지밀직사사 김흔, 동지밀직사사 나유를 파견하여 동계 방수군(防戍軍)을 징발케 하였다. 무술일에 왜선이 연화(蓮花), 저전(楮田) 두 섬에 와서 정박하였다.
|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무자 14년(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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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 14년(1288) 봄 정월 기축일에 안향(安珦)을 좌부승지로 임명하였다. 경인일에 한강을 첨의 시랑 찬성사로, 조인규를 첨의찬성사로 임명하였으며 지 도첨의 염승익이 사직하였으므로 인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기해일에 애가적(愛加赤) 대왕이 사신을 보내 말을 구하였다. 임인일에 내전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왕이 여러 번 춤을 추었으므로 공주가 말리었으나 듣지 아니 하였다. 계묘일에 왕과 공주가 묘련사에 갔는데 환자(宦者) 장군 최세연(崔世延), 김의광(金義光) 등이 채붕(綵棚)을 가설하고 각종 놀이를 차리었다. 병오일에 황제가 만호, 천호, 백호의 금은패를 보내 주었는데 그 중 쌍주(雙珠) 금패 네 개는 박지량, 나유, 한희유, 장순룡에게 각각 주었고 은패는 백호 이하의 군사들에게 각각 주었다. 갑인일에 지 도첨의 인후가 사직하였으므로 김혼을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고 안전을 지밀직사사로, 한희유를 부지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2월 초하루 병진일에 최세연이 왕에게 음식을 바쳤는데 공주는 반찬이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받지 아니 하였다. 정사일에 원나라에서 패라해(孛羅奚) 등을 보내 대사령을 실시한다는 것을 전달하였다. 신유일에 장군 오인영(吳仁永)을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당시에 북방의 역적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마땅히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을 도와야 할 것이었으나 왕이 곤란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오인영을 원나라에 보내 고하기를 “지금 동쪽 변방이 아직 평안하지 못하니 청컨대 내가 직접 북쪽을 정벌할 군사들을 인솔하고 쌍성으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으면서 지키겠다”고 청하였다. 임술일에 안적재(安迪材)를 회원(會源) 방호사로 임명하였다. 여러 만호들과 군사들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대전에서 연회를 배설하였다. 정축일에 왕이 도라산에서 사냥하였다. 무인일에 중랑장 정지연이 원나라에서 금패와 은패를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의 공론이 “우리 나라에서는 백성만 있고 따로 군대라는 것이 없는데 만호, 천호의 금패, 은패를 많이 청하였다가 만일 원나라 조정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 패(牌)의 수효대로 계산하여 군사를 징발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근심하였다. 갑신일에 왕이 강안전에서 친히 기도하였다. 3월 정해일에 좌우익[군] 만호 나유, 한희유, 장순룡 등이 내전에서 왕을 위하여 연회를 열었는데 술이 한창 흥겨울 무렵에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손벽을 치면서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신묘일에 왕이 왕륜사와 현성사에 갔다. 무술일에 경상도 권농사의 세마포(細麻布)를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신축일에 최충소(崔沖紹)를 회원(會源) 방호사로 임명하였다. 임인일에 장군 오인경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내안(乃顔)의 잔당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군대를 징발하여 황제가 친히 정벌하게 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군대는 동번(東藩)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다”라고 하였다. 무신일에 사신을 각 도에 파견하여 소금을 전매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초하루 을묘일에 낭장 김정(金精)이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조서로써 왕을 정동 행상서성(行尙書省)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고 전달하였다. 계해일에 비와 우박이 많이 내렸다. 정묘일에 판삼사사 박지량을 동북면 병마사로, 대장군 김덕지(金德之)를 지 병마사(知兵馬事)로 각각 임명하였다. 경오일에 원나라의 우승(右丞) 탑출(塔出)이 사람을 보내 군사 5천 명과 군량을 건주(建州)에 수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북쪽을 정벌할 군사들을 데리고 쌍성에 옮겨가 지키겠다고 요청하였고 황제도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중서성에서는 황제가 탑출에게 “동번(東藩)을 관할 수비하는 문제는 마땅히 고려 왕과 협의하여야 한다”라고 지시한 바를 준수하기 위하여 탑출이 군대와 군량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건주는 우리 나라에서 3천여 리나 떨어진 먼 곳이요 지세가 험준해서 군량을 수송할 길이 통하지 못하며, 또 근년에 국가의 축적이 모두 다 소모되어 아무리 타산하여도 군량이 나올 곳이 없었다. 왕이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니 모두 다 말하기를 “요청대로 하자니 힘이 모자라고, 요청을 거절하자니 전자에 황제와 약속한 본의를 저버리는 것으로 될 터이니 군사를 파견하여 싸움을 원조한다고 성원하면서 군량의 운반을 늦추는 것이 제일 상책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오인영 등으로 하여금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사실대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무인일에 왕궁의 꽃들이 만발하였으므로 향각(香閣)에서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한창 흥겨울 때에 왕이 전리(典理) 정랑(正郞) 민지(閔漬), 국학(國學) 직강(直講) 조간(趙簡)에게 명령하여 새로운 곡(曲)을 지으라고 하였으며, 좌부승지 안향도 또한 시를 지어 왕에게 올리었다. 기묘일에 군사들을 사열하였다. 5월 신묘일에 왕이 복령사에 갔다가 또 영통사로 가서 은 10량과 쌀 1백 석을 주었다. 기해일에 첨의찬성사 조인규가 장전(帳前) 만호의 직을 사직하였으므로 부지밀직사사 한희유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신축일에 만호 동지밀직사사 나유가 군대들을 거느리고 쌍성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경술일에 왕과 공주가 금경사(金經社)에 갔다. 임자일에 오인영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건주에 군량을 운반하여 정벌을 원조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것과 “군사들을 철령으로 옮겨 주둔하여 수비하며 국왕은 자기 나라에 머물러서 지키고 있으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6월 을묘일에 왕이 봉은사에 갔다. 정사일에 대장군 박의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바쳤다. 원나라에서 활활대(闊闊歹) 대왕을 대청도에 귀양 보내었다. 쌍성 달로화적이 내조하였다. 경오일에 첨의찬성사 한강이 퇴직하였으므로 또다시 인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을해일에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가을 7월 정해일에 원나라에서 총관(摠管) 김지무(金之茂)를 보내 군사 기자재(兵器)를 검열하였다. 경인일에 왕과 공주가 신효사에 갔다. 임진일에 정가신을 판밀직사사로, 이익배(李益培)를 부지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고 즉시 치사하게 하였다. 을미일에 전법 판서 원정(元貞)을 파직시키고 김균(金頵)을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는바 당시에 환관(宦官)들과 내료(內僚)들이 권세를 농락하여 법사(法司)의 10여 명 관원들을 죄 없이 동시에 파면시켰다. 경자일에 지밀직사사 안전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임인일에 행성(行省)에서 중랑장 송현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지밀직사사 조변(趙抃)이 죽었다. 환자(宦者) 장군 최세연, 낭장 도성기(陶成器)를 해도(海島)에 귀양 보냈다. 사판궁에 새로 군기고(軍器庫)를 만들었다. 무신일에 송나라 상인 고개(顧愷), 육청(陸淸)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8월 정사일에 만군(蠻軍)들이 쌍성에서 왔는데 남녀노소(老弱) 모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몸에는 거적(苫)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홍자번이 옷 2백 벌을 주었다. 임술일에 왕이 차신의 저택으로 처소를 옮겼다. 계해일에 지방 고을들의 응방(鷹坊)을 폐지하였다. 기사일에 다시 응방을 두었다. 9월 갑신일에 왕이 수강궁으로 갔다. 무자일에 왕이 건성, 왕륜 두절에 갔다. 을미일에 황제가 왕과 공주에게 입조하라는 명령이 왔다. 계묘일에 윤선좌(尹宣佐)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무신일에 대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보내 왕이 친히 입조하겠다고 보고하였다. 기유일에 사신을 여러 도들에 보내 공부(貢賦)를 참작하여 다시 사정하도록 하였다. 임자일에 이날은 세자의 생일인 까닭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는데 상장군 정인경은 난쟁이(侏儒)놀음을 하고 장군 간홍(簡弘)은 광대 노릇을 하였으며 왕도 또한 손벽을 치며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 겨울 10월 병진일에 부지밀직사사 감찰 대부 임정기(林貞杞)기 죽었다. 무오일에 왕이 강안전에서 친히 영보 도량을 베풀었다. 경오일에 원나라 황제가 왕에게 입조하지 말라고 통지하였다. 계유일에 도적이 의릉(義陵)을 발굴하여 은으로 만든 그릇들을 훔쳐 갔다. 11월 을유일에 도적이 공릉(恭陵)을 발굴하였다. 정해일에 전 추밀원 부사 홍문계를 해도(海島)에 귀양 보냈다. 갑오일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서 낮에 천지가 어두웠고 사람들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경자일에 상장군 차신을 원나라에 보내 처녀를 바쳤다. 왕이 평주 온천에서 사냥하였다. 12월 임지일에 찬성사 조인규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신년을 축하하였다. 병진일에 왕이 구요당(九曜堂)에 가서 십일요(十一曜)에 기도하였다. 신미일에 장군 이병(李㻂)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바쳤다. 병자일에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瑊),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廣平公譓)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여 승선 박항(朴恒)을 보내 그 다음날에 서울에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방경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그 날로 들어가 왕을 뵈었다.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紅鞓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지시하기를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웠기로 심지어 몽고에까지 응원 부대를 청하여 이것을 토벌하게 되었다. 만약 군사 기간이 오래 되었더라면 그 군기, 군량의 수송비가 한없었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가는 데에서 의외의 변고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국가)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이 실로 이번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 전역 때부터 탐라 토벌에 이르기까지 전심 전력하여 온갖 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제기되는 일들을 옳게 하였다. 전함, 병기, 군량이 잘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군을 독려,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쳐 없애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바이다. 또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먼저 남방으로 가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처리하였고 김방경과 함께 마음과 꾀를 합치어 싸웠으니 그 공훈이 특이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야 할 상전(賞典)에 대하여 빨리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군대와 전함을 인솔, 관리하였던 장령, 군사들 및 장교, 전군(典軍)들, 그리고 외별초(外別抄-지방에 있던 별초 군대)에게 줄 상전(賞典) 조건들에 대하여도 다 함께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15년(원종)에 황제는 일본을 정벌코자 글을 보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전함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전함 건조를 중국 남방에서 하는 방식대로 진행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장차 제 기한 내에 완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되어 먼저 전라도에 가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서성(원나라의)의 공문을 받아다가 우리 나라에서 만드는 방식대로 전선들을 건조하게 독려하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忻)은 곧 김수(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趙抃)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더러 말하기를 “병법에 군대가 천 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마는 벌써 적의 지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陰-한신)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라고 하니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복형이 유시(流矢-날아 오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올라가게 되어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 침몰되었으며 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도착하여 포로들과 노획한 군기, 병장들을 황제와 왕에게 바쳤다. 왕은 추밀 부사 장일(張鎰)을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먼저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그에게 상주국(上柱國)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의 관직을 주었다. 원년(충렬왕)에 관제를 고치게 되자 그를 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判典理監察司事)로 임명하였다. 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 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김방경이 귀국하게 되니 왕은 서울(개성) 성 밖에 나가서 그를 출영하였다. 흔도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고 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국왕에게 미루고 국왕은 또 그대에게 밀어 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 군의 관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출정시에는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새 새끼가 그들이 앉은 집 뜨락에 와서 있었는데 흔도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을 잡으라고 하여 얼마 동안 가지고 희롱하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김방경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 두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당신이 그것을 죽인 것은 역시 백성들을 가긍히 여기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흔도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한족들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들을 멸시하면서 ‘몽고 사람들은 그저 살육하는 것을 일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는 데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고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공주가 원나라에 공장(工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건축 공사를 대규모로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목장 제령(木匠提領) 노인수(盧仁秀)가 큰 나무 한 개를 골라 내어 가지고 암시하는 방법으로 충고하려고 김방경, 유경(柳璥)과 인후(印侯), 장순용(張舜龍)더러 각각 톱을 가지고 나무의 두 끝을 자르게 하고는 “신하로 된 자들은 응당 이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제안공 왕숙(齊安公淑)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말 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유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유경(柳璥)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 정벌의 전역 당시 김선(金侁)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김방경이 위득유(韋得儒)가 자기의 상관 김선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위득유의 관직을 파면시킨 일이 있었으며 또 낭장 노진의(盧進義)도 김방경을 따라 진도를 공격하였을 때 힘써 싸우지는 않고 남의 재산만 약탈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이 그의 재산들을 국가의 것으로 몰수해 버린 일이 있었으며 김복대(金福大)란 자도 역시 당시의 전역에 김방경을 따라 갔던 자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김방경에게 악감을 품고 있었다. 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忻), 사위 조변(趙抃),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忻)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이에 흔도는 3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석말 천구와 더불어 국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비록 그 사실이 무고이며 허망한 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마는 하는 수없이 유경, 원부(元傅), 이분희(李汾禧), 한강(韓康), 이습(李槢)에게 명령하여 흔도, 천구와 더불어 함께 심문하게 하였다. 위득유와 함께 연명 고발한 궁득시(宮得時) 등 4명이 고하기를 “우리는 글자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위득유가 우리들을 속여 말하기를 ‘여기에 참여하면 너도 다 같이 공로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우리와 함께 여기에 연명하여 관작과 상품을 받도록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기에 우리가 이름을 연서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글에 고발한 것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득유가 또 흔도에게 고하기를 “을해년에 김방경이 저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관군(몽고군)을 모조리 격멸하고 해도에 들어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만일 저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면 그와 대질을 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성품이 침묵을 잘 지키는 데다가 분하고 성이 난지라 마치도 대꾸를 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다. 유경이 말하기를 “위득유가 이미 여덟 가지 일을 들어 김방경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하였는데 지금 말한 바를 들으니 이는 더욱 엄중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고발장에다 먼저 기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여러 죄수들은 무서워 떨고, 위득유와 노진의 두 사람도 감히 눈을 똑바로 보지를 못하였다. 김천록이 그들을 돌아다 보며 꾸짖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 같은 놈들이다. 진도를 공격할 때 너희들 둘이 군율을 범하였기에 중찬(中贊-김방경)이 너희들이 훔친 물건들을 몰수하여 국가에다 드린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이에 대한 악감을 품고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있지도 않은 말들을 꾸며 내어 대신을 모함하고자 하니 하늘이 만일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라고 하였다. 김복대 등 14명이 또 고하기를 “위득유가 자꾸 꾀이기에 서명하였을 뿐, 우리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더욱 더 고발이 무근거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갑옷을 감추어 둔 한희유 등 12명의 죄만을 다스려 그들에게 곤장을 치게 하고 석방하였다. 홍다구(茶丘)는 자기의 조국인 고려에 대하여 오랜 악감을 품은 자였으므로 무슨 짬이라도 있는가 하고 엿보고 있다가 화를 전가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는 중서 성에다 자기를 고려에 보내 문초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흔도 역시 이보다 앞서 그의 아들 길대(吉歹)를 보내 위득유의 말을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한 바 있었으므로 황제는 글을 보내 국왕과 공주가 함께 문초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김흔을 문초하게 되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으며 또 형장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하였으며 종일토록 알몸뚱이로 세워 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서 먹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왕이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먼저 번에 내가 흔도와 함께 이미 문초를 다 끝내었는데 하필 다시 문초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홍다구는 듣지 아니 하였다. 때마침 낭가대(郞哥歹)가 전라도에서 돌아왔다. 왕이 그들과 함께 문초하자고 하였더니 낭가대가 말하기를 “내가 곧 조정에로 돌아가겠는데 황제께서 만일 고려 일에 관하여 물으면 응당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홍다구도 상당히 휘어 들었었다. 그 후에 다시 문초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을 받들기를 하늘을 받들 듯이 하고 귀국을 사랑하기를 친어버이를 사랑하듯이 하는데 어찌 하늘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거슬러 스스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을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원통하게 죽을지언정 감히 무근거한 고발을 승인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홍다구는 반드시 그를 자복시키려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기 때문에 몸뚱이가 온전한 데라곤 없었으며 죽어 넘어졌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였다. 홍다구는 왕의 측근자들을 가만히 달래기를 “지금 한창 아주 춥고 비, 눈이 그치지 않는 때여서 왕도 역시 심문에 피로하였다. 만일 김방경으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며 법에 따라 다만 귀양을 보내게만 될 것이니 고려를 위해서도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홍다구의 말을 믿기도 하고 또 고문받는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장차 그대의 실정을 밝혀주고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인데 어째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느냐?”라고 한즉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왕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저는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홍다구를 돌아다보며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홍다구는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무고하기를 “김방경은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 갑옷을 감추어 두고 불칙한 짓을 하려고 꾀하였으니 왕경(개경) 이남의 지리 상 중요한 지대를 골라서 방수군을 두며 또 여러 주와 군에도 모두 달로화적을 두며 김방경과 그 아들, 사위 기타 일가 권속들은 모조리 수도(북경)에 압송하여 노예로 만들고 그 소유지는 몰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군량에다 충당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인후(印候)가 김방경을 귀양 보내는 것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갔을 때 황제가 묻기를 “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라고 하므로 인후는 “46부(副-벌)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황제는 “김방경이 그래 이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주, 현의 조세를 모두 왕경으로 운반하고 있는데 배들을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김방경은 자기 집을 왕경에다 지었다 하니 만일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 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득유와 노진의가 또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담선 법회(談禪法會)를 개설하는 것은 귀국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홍다구는 그 말을 천구에게다 전하였고 천구는 사람을 보내 중서성에다 보고케 하였다. 왕도 역시 장군 노영(盧英)을 원나라에 보내 대변케 하였다. 평장 합백(哈伯)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황제께 아뢸 만한 일이 못된다. 그대도 귀국해서 국왕 자신이 직접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경인 16년(1290)
경인 16년(1290) 봄 정월에 왕이 원나라에 체류하였다. 정미일에 대장군 원경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일본이 변경을 침범한 데 대하여 보고하였다. 갑자일에 장군 오인영 등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내안(乃顔)의 잔당인 합단(哈丹) 역적들이 장차 우리 나라의 동쪽 국경을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다. 을축일에 첨의찬성사 홍자번, 판 밀지사 정가신 등이 병부(兵部)에서 군사를 징모 정비하였다. 안전(安戩)을 경상도 도지휘사로, 김지숙(金之淑)을 전라도 도지휘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무진일에 첨의 참리(僉議參理) 송분(宋玢)을 충청도 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2월 을해일에 중군 만호 정수기(鄭守琪)를 금기산동(禁忌山洞)에 주둔시키고, 좌군 만호 박지량을 이천(伊川)에 주둔시키고, 한희유를 쌍성에 주둔시키고, 우군 만호 김흔을 환가(豢猳)에 주둔시키고, 나유를 통천(通川)에 주둔시킴으로써 단적(丹賊)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3월 임자일에 도리첩목아(闍梨帖木兒)가 사람을 보내 쌍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경신일에 원나라 황제가 금자경(金字經)을 필사시키기 위하여 글씨 잘 쓰는 중을 요구하여 왔으므로 중 35명을 원나라에 보냈다. 병인일에 전(前) 지첨의부사 김주정이 죽었다. 정묘일에 왕과 공주 및 세자가 원나라로부터 귀환하였다. 황제의 명령으로 동녕부(東寧府)를 폐지하고 서북의 여러 성(城)들을 우리 나라에 다시 돌려주었다. 왕이 그 총관이었던 한신(韓愼), 계문비(桂文庇)를 대장군으로, 현원열(玄元烈)을 태복윤(太僕尹)으로, 나공언(羅公彦), 이한(李翰)을 장군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정유일에 불경을 필사할 중 65명을 원나라에 보냈다. 5월 초하루 계묘일에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저자를 골목 안으로 옮겼다. 갑진일에 최함일(崔咸一)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병오일에 왕이 주연을 배설하였는데 서북(西北)의 여러 성(城)들에서 우리 나라로 되돌아온 사람들에게 모두 다 연회에 참석할 것을 허락하였다. 무신일에 김흔, 나유, 정수기 등이 “합단이 해양(海陽) 지경에 침입하였다”고 급보하였다. 을묘일에 군사를 점검하였다. 무오일에 장군 김연수(金延壽)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합단이 침입한 것을 보고하였다. 6월 계유일에 왕이 봉은사에 갔다. 갑술일에 대장군 한신으로 하여금 서경(西京) 군사들을 인솔하고 동계로 가서 합단을 방어하게 하였다. 병자일에 장군 김흥예(金興裔)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헌납하였다. 무인일에 원나라 황제가 조서에 이르기를 “역적 토벌군을 고려로 보내면 길이 멀고 또 우회될 터이니 함평부(咸平府)로부터 남경(南京), 해양(海陽)으로 나가서 적군의 길을 끊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사일에 왕이 송분 등으로 하여금 경병(京兵)을 점검, 사열하도록 명령하였다. 가을 초하루 7월 임인일에 다시 서북의 여러 성(城)들에 수령들을 배치하였으며 장군 정복균(鄭復均)을 서경 유수로 임명하였다. 계묘일에 원나라 개원로(開元路) 달로화적 팔독만(八禿滿)이 사신을 보내 군량을 요구하였다. 경신일에 부지밀직사사 정인경을 서북면 도지휘사로 임명하여 서경을 유수(留守)하게 하였다. 임술일에 지첨의부사 김혼(金琿)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8월 신미 초하루날에 일식이 있었다. 계유일에 장군 조감(趙瑊)으로 하여금 불경을 필사할 중들을 데리고 원나라로 가게 하였다. 병자일에 왕과 공주 및 세자가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임오일에 왕과 공주가 안국사(安國寺)에 갔다. 계미일에 왕이 수강궁으로 갔다. 기출일에 한희유를 판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경인일에 대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보내 병력으로 원조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며 또 강화로 가서 적(賊)을 피할 데 대하여 보고하였다. 계사일에 전(前) 추밀원 부사 홍문계의 딸을 세자비(妃)로 정결하였다. 9월 정미일에 왕과 공주가 도라산(都羅山)에서 사냥하였다. 계축일에 위위부윤(衛尉府尹) 민훤(閔萱)을 전라도 지휘사로, 판 사재시사(判司宰寺事) 엄수안(嚴守安)을 충청도 지휘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장경(藏經)을 보수(補修)하였다. 기미일에 유비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바 황제가 왕의 보고한 바를 모두 승낙하였다고 전달하였다. 경신일에 왕이 수강궁에서 독기(纛旗)를 제사지내었는바 이것은 대개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무진일에 상장군 차신으로 하여금 처녀 17명을 데리고 원나라로 가게 하였다. 겨울 10월 임신일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특사령을 전달하였다. 무자일에 왕과 공주 및 세자가 왕륜사에 처소를 옮겼고 경인일에는 다시 묘련사로 옮겼다. 병신일에 적의 기병이 남경, 해양 지경에 이르렀다. 무술일에 부인들과 노인들 및 어린이들을 강화도로 옮기고 여러 고을들에 명령하여 산성(山城)과 해도(海島)에 들어가서 이것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11월 갑진일에 국사(國史) 및 보문각 비서사(秘書寺)의 책들을 강화도로 옮겼다. 정미일에 대장군 유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합단이 쌍성에 침입하였다고 통보하였다. 무신일에 궁인(宮人)들을 강화도에 옮겨 보냈다. 경술일에 태조의 소상(塑像)을 강화도로 옮겨 모시었다. 신해일에 원나라에서 평장사 도리첩목아(闍梨帖木兒)를 보내 합단 토벌을 원조하였는바 도리첩목아가 사람을 보내 전하기를 “국왕은 마땅히 경성에 남아서 우리 군사들을 호궤(犒饋)하여야 하겠다”고 요청하였다. 정묘일에 세자를 원나라에 파견하였는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가신, 예빈윤 민지 등이 수행하였다. 동경으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어간에 있는 행성들, 노, 주(路州)의 관원들이 모두 사람을 보내 세자를 위로하고 문안하러 오가는 사람들이 길에 연락 부절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여 동첨 추밀원사(樞密院事) 홍군상(洪君祥)의 저택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황제가 여러 번 안마(鞍馬)와, 옷, 띠를 주어 총애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황제가 조인규를 고려국 왕부 단사관(王府斷事官)으로 임명하고 금호부(金虎符)를 주었다. 12월에 안전을 충청도 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합단 군대 수만 명이 화주(和州)와 등주(登州) 두 고을을 함락시키고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하였으며 부녀자들은 붙잡아서 짐승들처럼 난잡하게 윤간한 다음에 죽여서 포(脯)를 떴다. 만호 인후(印侯)를 파견하여 합단을 방어하게 하였다. 계유일에 원나라 평장사 설도간(薛闍干), 도리첩목아, 우승 탑출(塔出) 등이 보병 및 기병 1천 3백 명을 인솔하고 왔다. 정해일에 왕이 병란을 피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선원사(禪源社)에 처소를 잡았고 지 도첨의사사 송분에게 명령하여 왕경(王京)을 유수(留守)하게 하였는데 무자일에 송분도 개성을 버리고 강화로 들어왔으며 정인경 역시 서경으로부터 도망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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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충렬왕 경진 6년(1280)
(1) 관군관(管軍官)은 자기가 관할하는 군인들 가운데서 친정(親丁)으로 훌륭한 자 1명을 선발하여 항상 충분히 군인들에게 무예를 연습시켜 숙달하도록 하며 전진(戰陳)의 구성과 변화 진퇴하는 법칙 등을 교련하여 모두 정예로운 군인으로 단련시킬 것이다. 또 구정(驅丁-노예로 쓰는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을 고용하여 원래의 군대 대신에 인수만 채우며 병역을 담당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이미 훈련하여 둔 좋은 군인들을 제멋대로 교환할 수 없으며 또 남모르게 가만히 그 누구에게서 물품-금전을 받아먹고 그 때문에 있지도 않은 이름을 지어 두고 군대에서 놓아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교대가 있으면 반드시 교대할 자들을 모아서 관총사(管摠司)의 해당 관으로 하여금 서로 대조 검사하게 하여 군대로 복무할 수 있을 만한 자라야 비로소 교대하는 것을 허락하고 총사에서 증명서를 주어 병역에서 놓아 보내 귀가하게 할 것이며 교체하여야 할 군인이 한번도 서로 대면하여 보지도 않고 증명서 없이 도망간 자는 곧 도망한 군인과 같이 취급할 것이다. 하급에 있는 군관들 진무들은 자기 독단으로 증명서를 발급하여 교체시키지 못하나 시위(侍衛) 친군(親軍)인 경우에는 이 규례에 구속되지 않는다. 만일 불의에 관원을 파견하여 점검 시찰하여 군인 수가 적다든가 또는 구구(驅口), 연약한 사람을 고용하여 명목을 채우는 일이 드러나면 반드시 추궁하여 그 죄를 다스릴 것이다. (1) 상하급의 관원들이 차지하고 있는 합필적 발도아 군인은 주둔 방어하러 간 곳에서 때때로 함부로 자기 소속 인원으로 차지하여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 황제의 명령이 도착한 날로 모두 본익(本翼)에 돌려 보낼 것이요, 친관(親管) 두목은 그들을 그 나머지 군인들과 함께 관할하여 함께 다 같이 차별 없이 교대 순서가 돌아오면 관계 관원에게로 역사를 하도록 파견할 것. 만일 출병이 있어서 반드시 합필적 발도아를 써야 할 자들은 해당 장소에 도착한 날에 각 익군의 수효를 참작하여 선택 지정하여 징발해 낼 것이며 돌아가는 날에는 그 이전대로 각각 본익〔군〕에 돌려 보내도록 할 것으로 금후에는 상하급 관원을 막론하고 주둔 방수하러 간 곳에서 이전처럼 항상 합필적 발도아들을 함부로 차지하고 부려먹고 그 나머지 군인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밤이 되면 다만 수성군(守城軍) 가운데에서 숙직 수위병을 교대로 내게 하여 관원에게 위임하여 관할케 하여 위수를 주관하게 할 것. 또 자기 뜻대로 군인들을 공사(工事), 노역, 영선, 운반 작업에 동원하여 쓰지 못하며 또 관군(管軍) 관원으로 하여금 정사(定司)를 차지하여 관리하게 하거나 민호 등을 초모하는 등의 일을 하게 할 수 없다. 신부군인(新附軍人)으로서 무릇 양식을 청하러 오는 자도 역시 이 규례에 따른다. 군관들의 합필적(合必赤)의 인원 수는 양양부(襄陽府) 때에 행성에서 이미 규례를 정한 바 있어 각각 그 수효를 결정하였던 만큼 이 수효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더 많이 차지하지는 못한다. (1) 출병시에 군인들이 구득한 사람, 동물, 기타 일체의 물건들은 각각 그 구득한 군인이 주인으로 될 것이며 그 군인을 관할하는 두목(頭目) 등은 결코 지명(指名)해서 거두어 낼 수 없으며 또 죄명을 덮어씌워 위협 공갈하여 빼앗아 낼 수 없다. (1) 군인들의 말은 군관이 그것을 빌릴 수도 바꿀 수도 없으며 군인들의 말을 주관하여 일을 시킴으로써 여위고 약하게 만들어 쓰러져 죽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또 그 경우에 군인들에게 강요하여 빚을 내어 사서 보충케 하여 거저 받아 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1) 군대 내에서 만약 앓는 군인이 있으면 곧 유능한 의원들로 하여금 진찰 투약하며 간병하게 할 것. 각 익〔군〕에서는 좋은 사람을 선발하여 간호를 하여 줄 것이며 (그런 때에는) 이내 본 익〔군〕에서 정원(定員)을 받을 것이니 수령관은 본직에 관계없이 전문적으로 병을 맡아 간호하게 할 것이요, 병들었던 군인이 휴양하여 건강이 희복되었을 때에 비로소 교대 당번에 보충하여 보낼 것이며 수시로 그 숫자를 기록하여 본익〔군〕에 보고케 할 것이다. 만일 검열 때에는 병으로 죽은 군인이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사병관(司病官)의 상벌을 결정하여 시행할 것이다. (1) 군인들이 전진(戰陣)에서 적군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자가 있으면 그 직속 상관(두목)에게서 사실대로 보고를 받고 보증서를 다시 받아서 예에 따라 상을 줄 것. 본호(本戶) 군역(軍役)은 전례에 따라 1년간 원호하여 주고 만약 병들어 죽은 자들도 또한 반년간 원호하여 주되 연한이 지나면 해당 군호(軍戶)의 그 다음 차례의 장정으로 군역에 보충케 할 것이다. (1) 성을 공격하거나 들판에서 싸우거나 할 때 다만 적군을 만나 서로 대진하여 사살한 자는 그 사실대로 앞을 향하여 뛰어나가서 용력을 내어 공을 세운 두목이나 군인들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명백하게 확인한 후 종파(從把) 군관이 명부와 군공의 실적을 열서(列書)하고 보증하여 결정하며 행성행원은 관례에 따라 황제께 보고하여 관상(官賞)을 주게 할 것. 태만하였던 자들도 역시 증거를 가지고 문초하여 변명할 수 없는 사실로 확정된 자들은 상급에 보고하여 죄를 판결하도록 할 것이며 중간에서 은혜와 원수의 관계에 따라 공적과 과오를 허위 신고하여 착오가 나도록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매개의 천호(千戶)는 믿음성 있고 독실한 천량관(錢糧官) 2명을 선발하여 관청에서 군인들을 위로하여 음식을 특별히 먹이거나 상 줄 때에는 그에게 위임하여 군중들에 대한 급여를 나누어 주게 할 것이며 직계 상관(두목) 등이 중간에서 깎고 잘라 먹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다른 곳에 파견할 일이 생긴 군인들은 관계되는 금전 물품을 관에게 그 숫자를 인계하고 본군(本軍)에 회수 보관하여 두었다가 돌아오는 날에 내어 주게 할 것. 그 군인들 가운데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가족들에게 보내 주어 침범 사용하거나 은닉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 군인, 군마의 식량, 사료를 인도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면 역시 이미 위임하였던바 믿음성 있고 독실한 전량관으로 하여금 그 인도 사업을 관할케 하여 축감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만일 사망한 군인의 식량과 병사한 군마의 사료로서 다 먹지 못한 것이 있으면 잔존 수량을 도로 바치게 하며 또는 출장한 군인, 군마의 식량, 사료는 거두어 두었다가 돌아오면 지급하게 하며 또는 다음달에 양식을 청구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쓰게 하여 사사로이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 갑옷, 병기, 군수 물자는 미리 점검 시찰하고 충분히 갖추게 하여 불의의 용도에 대비하도록 할 것이요, 일이 생겼을 때에 가서 부족하게 되자 비로소 군인들을 독촉 강요하며 급히 몰아서 빚을 내어 구매 보충케 하여 많은 이익을 공짜로 받아 내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 이미 군대 내부에 소요가 없음에도 오히려 도망가는 군인들이 있으면 직계 군관들은 그때마다 즉시로 상급 관청에 신고하고 도망 군인의 소속 오로 관사(官司)에 통보하여 사람을 보내 모이기로 약속하고 함께 철저히 수색하여 모름지기 본래의 도망한 본인을 붙잡아서 문초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군전(軍前)에 내어 세우고 이미 내린 황제의 명령에 비추어 죄명을 결정하고 군중 앞에서 처벌할 것. 만일 오로관이 방리정(坊里正) 향사(鄕司)의 이웃 사람들로 도망 군인을 도와 준 자 등과 함께 실정을 알고도 조사하여 본래의 도망한 정군(正軍)을 붙잡지 아니 하는 자는 이미 결정한 죄명에 따라 판결하여 보낼 것이다. 만일 군관이 비밀리에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또 소속 오로관에 통보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관원을 파견하여 오로들 가운데서 도망했거나 사고 있는 군인들을 대신하여 보충케 한 자는 오로관이 황제의 명령서의 뜻을 받들어 그 군관의 성명을 써서 추밀원에 신고함으로써 그 사건을 취조 심문할 때의 중빙으로 되게 할 것. (1) 군대 군마가 주둔하러 간 곳에서는 모름지기 군관(軍管) 내의 각 천호 백호 패자(牌字)를 관찰하여 한 곳에다 주둔시킬 것이며 총파(摠把) 관원 관계 관원의 관사 숙소를 거리에 있는 새로 투항하여 온 관민(官民)의 주택들을 빼앗아서 사방으로 흩어져 있게 배치함으로써 새로 투항하여 온 백성들을 기만 억압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 관군(官軍) 군인들에게 깨닫도록 잘 타일러서 투항해 온 관리 인민들의 주택, 점포, 재산(莊産), 전지(田地), 화과(花果), 송죽(松竹), 채균(菜菌), 일체의 임목(林木)을 강제로 빼앗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강제로 빼앗은 것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할 것. 또 남의 집과 무덤을 파괴 약탈하지 못하게 할 것. (1) 군관 군인들이 새로 투항하여 온 고을들과 성들에서 자기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처나 딸과 강제적으로 결혼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만일 서로 의논이 맞아서 결혼한 자라 할지라도 그 여자에게 혹 친족이나 다른 식구가 있거나 또는 고용인 등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전매(典賣)하거나 시집 보낼 수 없다. (1) 관군(管軍) 관원들이 엄격히 금지할 것은 각자가 관할하는 군인 군마가 주둔하거나 출정하여 지나가는 곳들에서 전자에 황제의 명령으로 금지한 부근 지역들 이외에도 무릇 새로 투항하여 온 지역이기만 하면 동물들을 몰아서 백성들의 논밭의 곡식을 밟거나 실과 나무 뽕나무를 먹지 말게 하며 백성들의 집에서 술, 음식을 무상으로 먹거나 돼지, 닭, 거위, 집오리 등을 잡아 먹지 말며 백성들의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빼앗지 못하게 금지할 것이다. (1) 관관(管官) 이중(吏衆) 군인들에게 잘 타일러서 차(茶), 소금, 술, 세국(稅麴) 그 밖의 일체 법률로 금지하는 통제품들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할 것. 만일 위반하여 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정범(正犯)을 법률 조항대로 추궁하여 다스릴 뿐만 아니라 그를 관할하고 있는 두목으로서 단속을 잘못한 자도 또한 단죄할 것이다. (1) 군관 등은 군인들에게 함부로 할당하여 몇 푼의 돈, 몇 마리의 가축, 기타 일체의 물품들을 거두어 내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하였다. 또 행중서성(行中書省)의 공문에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서의 조항 중 한 구절에는 상급 관원 등이 차지하고 있는 합필적 발도아 군인은 주둔 방어하러 가는 곳에서 언제든지 함부로 자기 소속 인원으로 차지하여 부려먹어서는 안 되는바 황제의 명령이 도착한 날로 모두 본익(本翼)에 돌려 보낼 것이요, 친관(親管) 두목은 그들을 그 나머지 군인들과 함께 관할하여 교대 순서가 돌아오면 관계 관원에게로 역사를 하도록 파견할 것이다. 만일 출병이 있어서 반드시 합필적 발도아 군인을 써야 할 자는 도착한 날에 각 익군의 수효를 참작하여 선택 징발하여 낼 것이며 돌아가는 날에는 이전대로 각각 자기의 익(翼)으로 돌려 보내도록 할 것이다. 금후에는 상하급 관원을 막론하고 주둔 방수하러 간 곳에서 이전처럼 항상 합필적 발도아를 함부로 차지하여 부려먹음으로써 그 나머지 군인들에게 결코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있는바 현재 출정할 날짜도 가까워 오고 있는 데 비추어 본 성(행중서성)에서 의논하여 다음과 같은 각 익의 관군(管軍) 관리들의 합필적 발도아 군인의 정액을 결정함에 이르렀는바 만호(萬戶) 이하 관군 총관(管軍摠管) 및 천호 총파 등의 관원은 각각 관할하는 군인들의 수효에 따라 정액대로 차지하되 차등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군인들의 수효가 부족하여 절반으로 감소하여 받아 쓰게 된 이후에 관군 관원들이 각각 본래 결정되었던 정액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출정한 군인들을 여분으로 더 많이 차지하여 쓰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면 상급 관청에서 규찰하여 알아 내거나 또는 여러 사람들의 고발을 먼저 받아 사시를 밝힌 다음에 원수, 만호, 총관으로부터 문초하여 성원(省院)에 공문을 보내면 여기서 황제께 보고하여 결정할 것이다. 그 밖에 이하 관원들인 천호, 총파, 백호 등은 다만 위반 범죄하기만 하면 즉시 철직시키며 먼저 고발한 자가 관직(職役)이 있으면 그 명분(名分)을 높여 줄 것이요, 산군(散軍)이라면 그 즉시로 현직에 임명하여 쓸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열서(列書)하여 공문을 보내니 접수한 다음 빨리 관군(管軍) 관원들에게 내려보낼 것이다. 상기한 바에 의하여 시행할 대상 관원들 즉 “도원수 1백 명, 좌우 부원수 80명, 사(使), 만호 50명, 부만호 40명, 총관이 관할하는 군인 수 1천 명에 합필적 군인의 정액이 총관 20명, 부총관 10명, 천호가 관할하는 군인 수 5백 명에 합필적 군인의 정액이 천호 10명, 부천호 5명, 총파가 관할하는 군인 수 2백 명에 합필적 군인의 정액이 4명, 백호는 합필적 군인의 정액이 2명, 원수부(元帥府)의 수령관들인 경력은 한 사람에 7명, 지사(知事)는 한 사람에 4명, 〔그리고 원수부의〕 영사(令史) 다섯 사람에게 각각 3명, 역사(譯史)는 3명, 통사(通事)는 3명, 지인(知印)은 3명, 진무(鎭撫)는 7명, 가각고 관구(架閣庫管勾-장적‘帳籍’ 등 문부를 관할하는 관원)는 1명을 각각 차지한다. 진무소(鎭撫所)의 영사 2명은 각각 1명을 차지하며, 만호부(萬戶府)의 수령관인 지사는 3명을, 영사(令史) 4명은 각각 2명을, 통사는 2명을, 역사는 2명을, 지인은 2명을, 진무는 3명을 차지하며, 총관소(摠管所)의 수령관인 지설 제령안독(止設提領案牘) 명분 제령 안독(名分提領案牘)은 3명을 차지하며, 영사 3명은 합필적 군인 2명을 차지하여 쓰며 지인은 1명을, 탄압(彈壓)은 1명을 차지하며. 천호〔소(千戶所)의〕 수령관인 지관(知官)은 1명을 차지하며 지인 탄압은 1명을 차지하여 쓰며 총파〔소(摠把所)의〕 영사 2명은 각각 1명을 차지하며, 백호〔소(百戶所)의〕 사리(司吏), 탄압 등은 1명을 차지하여 쓴다”라고 하였다. 11월 임인일, 3관(三官) 5군(五軍)을 사열하였다. 병오일에 총랑 김원(金洹), 장군 조윤번(趙允璠)의 딸들을 아합마(阿哈馬)에게 시집 보냈다. 무신일에 새 궁전에서 탑납 합백나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기유일에 우승지 조인규 대장군 인후(印侯)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중서성에 보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병선 9백 척과 초공. 수수 1만 5천명, 정군(正軍) 1만 명을 준비하였으며 군량은 중국의 석(石)으로 계산하여 11만 석을 준비했고 그 밖의 기자재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준비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려 하고 있다. 내가 그전에 귀국에 가 있을 때에 일찍 행성의 일을 맡아 볼 것을 황제에게 말한 바 있었는데 아직도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생각건대 제후(諸侯)로서 조정에 들어가서 제상이 되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항례이다. 요, 금 두 나라에서 우리의 선대 왕들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책봉하였으며 나도 역시 황제의 은혜를 입어 특진상주국(特進上柱國)으로 임명된 일이 있었다. 이로써 보아서 제후로서 정부에 들어가서 재상으로 되는 것은 옛날의 항례라는 것을 알았다. 황제에게 잘 아뢰어 행성으로 하여금 군사 관계의 모든 대소 사건과 국가 사업에 대하여도 반드시 나와 상의한 후에 시행하며 사신을 조정에 보낼 때에도 반드시 나의 사신과 함께 동행하게 하기를 바란다. 또 요즈음 행성에서는 공문을 보낼 때에 ‘이상과 같이 고려 국왕에게 묻는다’라는 글을 쓰는가 하면 그 피봉 겉에는 ‘국왕에게 도착하면 열어 볼 것’이라는 문투(文套)로 써보내는데 내가 중서성에서 보내온 공문들을 상세히 살펴본즉 그 글자를 조심하여 썼고 종이도 두터운 것을 썼으며 매개의 공문마다에는 ‘청컨대 잘 받아 보시라 삼가 통첩함’으로 되어 있으니 행성의 문투들은 대체 어떤 격식(格式)에 따른 것인지 명백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건대 행성은 국왕과의 사이에서 이미 의구 기탄할 바가 없으니 만큼 비록 자관(咨關), 차부(箚付)라고 하여 평등한 입장에서 공문 격식을 써도 좋겠지마는 만약 여러 부마(駙馬)들에게 부득이 편지를 보내어야 할 경우에는 어떠한 문투와 격식을 써야 마땅할지 모르겠다. 이전에 독련가(禿輦哥) 국왕이 나의 부왕(원종)에게 대하여 한번도 바로 편지를 보내는 일이 없었고 반드시 달로화적에게 하달하였다. 바라건대 피차간에 왕래하는 공문의 문투와 격식을 결정해서 회보하여 주기 바란다. 우리 나라에서는 수년간이나 계속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식량 곤란에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량은 일찍이 뜻대로 다 징수 저축하여 본 적이 없다. 현재 저축하여 둔 군량 7만 7백 27한석(漢石) 이외에는 내외 공사(公私) 간에 모두 저축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각급 관료들의 월봉과 국가 기관 소용의 많은 세납들을 모두 다 거두어 내고 다시 전국 각지에서 매개 민호로부터 징수하여 대략 4만 한석을 준비하였는데 이 보다 더는 공급을 보장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정군(正軍) 1만 명의 한달 양식이 대개 3천 한석으로 계산되는바 귀군으로 말하면 3∼4만 명이나 되고 또 활단적(闊端赤) 역시 적지 않으며 또 초공, 수수들이 역시 1만 5천 명을 밑돌지 않는데 요새 받은 행성의 공문에 의하면 “내년 봄에 길을 떠나 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바 만일 여러 노(路)의 관원들이 계속 내려온다면 풀들이 돋아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는 군량도 오히려 부족하겠거늘 군마의 사료는 장차 무엇으로써 보장하겠는가? 또 듣건대 장차 5∼6월에 바닷길을 떠나 갈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해마다 5∼6월이 되면 장마가 그치지 않고 조금만 서풍이 불면 바닷길에 안개가 차서 앞이 어두우니 혹시 출발이 연기되어 오래 체류하고 바다로 떠나지 못하게 된다면 가을까지의 식량과 배에서 먹을 식량은 또 어떻게 공급할 수 있겠는지 다만 군대와 백성이 한 시에 식량 부족으로 될까봐 두려워하는 바이다. 이러한 실정을 미리 말씀드려 두지 않았다가 나중에 부족하든가 잘못이 생기면 그 이해가 적지 아니하니 잘 검토하여 실시하기 바란다. 우리 나라의 군대로서 탐라를 지키고 있는 자 1천 명은 이전에 일본 정벌 때의 우리 나라의 군액(軍額) 5천 3백 명 가운데서 나온 것인바 가만히 생각해 본즉 우리 나라는 지역이 편벽하고 인구가 희박하여 군대와 백성 간에 구별이 없는지라 이 번에 다시 정벌군으로 4천 7백 명을 첨가시키라고 하니 그 수효를 모두 보장하기 어려울까 매우 걱정되는 바이니 상기 진수군(鎭戍軍) 1천 명으로써 새로 정토군에 첨가할 군인 수에 보충케 하여 주기 바란다. 우리 나라는 그 전에 달로화적이 있을 때에 국내의 사람들로서 쓸 만한 활과 화살을 가진 것이 있으면 심지어 포수들의 소유물까지도 모두가 거두었고 또 이전의 일본 정벌 때에 5천 3백 명의 군인들이 가지고 간 갑옷, 활, 화살들은 많이 내버렸거나 잃어버렸기에 겨우 남은 것을 수습하여다가 관청 창고에 보관해 둔 것도 실제 쓸 만한 물건이 못된다. 항차 이번에 새로 초모한 4천 6백 명의 군인들은 본래부터 병기 기자재가 하나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몸을 방호하겠는가?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갑옷 5천 벌과 활 5천 개와 활줄(弓弦) 1만 개를 보내 주어 그들의 용기를 돋구게 하여 주기 바란다. 우리 나라의 군대와 백성들로서 일찍이 진도, 탐라, 일본 3개소에서 여러 번 군공을 세운 자들은 아직도 귀국으로부터의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전의 공적들을 추가 등록하고 각각 패면(牌面)을 주며 금후에도 힘써 일한 보람을 내도록 장려하게 하여 주기 바란다. 1천 명의 군대마다에 총관 천호는 각각 1명씩 총파는 각각 2명씩 명단을 뽑아 연기(連記)하여 보내니 이전에 청하였던 바와 같이 상장군 박지량(朴之亮), 대장군 문수(文壽), 나유(羅裕), 한희유(韓希愈), 조규(趙圭), 친종 장군 정수기(鄭守琪), 대장군 이신(李伸), 박보(朴保), 노정유(盧挺儒), 안사(安社) 등 10명은 총관으로 임명하고 대장군 조변(趙抃), 장군 안적재(安迪材), 허홍재(許洪材), 김덕지(金德至), 서정(徐靖), 임개(任愷), 김신정(金臣正), 이정익(李廷翼), 박익환(朴益桓) 등 10명은 천호로 임명하고 중랑장 유보(柳甫), 김천록(金天祿), 이신백(李臣伯), 신혁(辛奕), 최공절(崔公節), 여문취(呂文就), 안흥(安興), 이순(李淳), 김복대(金福大), 차공윤(車公胤), 이당공(李唐公), 낭장 박성진(朴成進), 고세화(高世和), 중랑장 송인윤(宋仁允), 낭장 옥환(玉環), 계부(桂富), 김천고(金天固), 이정(李貞), 서광순(徐光純), 함익심(咸益深) 등 20명을 총파로 임명하여 주기 바란다. 지금 초모한바 우리 나라의 군인 정액은 개경 2천 5백 명 경상도 2천 3백 90명, 전라도 1천 8백 80명, 충청도 1천 9백 명, 서해도 1백 90명, 교주도 1백 60명, 동계 4백 80명, 총계 1만 명이요, 병선은 모두 9백 척인데 그 중 3백 척에 써야 할 초공(梢工), 수수(水手)는 1만 8천 명이다. 그런데 신중히 생각해 보니 우리 나라의 호구는 그전부터 축감되어 지난해 일본 정벌 때에 큰 배가 1백 26척이었는데도 초공 수수가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3백 척에 소용되는 인원을 무엇으로써 그 수효대로 다 보장하겠는가? 그래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장정이면 모두다 징발하여 대개 1만 5천 명을 초모하였지마는 아직도 부족되는 수수(水手) 3천 명은 어디서 징발하겠는가? 동녕부에서 관할하는 여러 성들 및 동경로 연해의 주, 현들에는 초공 수수가 많이 있으니 거기에서 3천 명을 징발하여 보내 부족한 인원을 보충케 하여 주기 바란다. 나의 신하인 김방경은 직무를 맡아 보는 이후로 무릇 조정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받들어 응대하되 변함없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하여 일하였으며 또 진도, 탐라, 일본 등 3개소에서 황제의 군대를 따라 토벌하여 여러 번 승리하는 공적을 세웠으니 황제는 호두패(虎頭牌)를 주어 장려하고 위로하여 주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정군 1만 명, 수수 1만 5천 명을 관할하여 일본을 정벌하러 가게 되니 만일 군대를 영솔하는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지휘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우려되며 또 혹시 잘못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방경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용감한 마음은 오히려 여전하여 다시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고 있으니 잘 보고하여 원수부에 참여하여 공사(公事)를 주관할 수 있도록 하여 주기 바란다. 군량은 1년 동안에 거둔 것이 총계 1만 6천 7백 32석이요, 지난해에 거두어 저축한 것 및 금년에 거두어 저축한 것이 총계 7만 7백 27한석(漢石)이며 우리 나라에서 초모한 정군이 1만 명, 수수군(水手軍)이 1만 5천 명인데 이들을 중찬 김방경에게 인도하여 그를 두령으로 삼고 통솔하게 하는 이외에 밀직부사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을 만호로 임명하여 일본을 정벌하게 하려는데 내가 귀국에 갔을 때에 황제에게 만호 패면(牌面)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아직 명확한 회답이 없으니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박구, 김주정 등에게도 역시 호두패를 주어서 장차 힘써 복무하도록 장려할 것이며 우승지 조인규는 몽고어, 중국어에 통달하여 무릇 조정에서 보내는 명령이나 상급 관청의 공문이나 간에 모두 명백하게 통역 전달하여 잘못이 없었으며 또 내가 그전에 귀국에 가 있을 때에도 시종일관하게 따라 다녔고 또 공주에게 대해서도 아침 저녁으로 각별히 복무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은지라 그에게도 역시 패면을 주고 그를 왕경(개경)의 탈탈화손(脫脫禾孫) 겸 추고관(推考官) 두목으로 임명하여 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경술일에 중서성에서 회동관사(會同館使) 장헌(張獻) 이부 주사(吏部主事) 야선해아(也先海牙)로 하여금 명주 2만 필을 가지고 와서 쌀을 사서 군량에 보충하게 하였다. 임자일에 왕이 사판궁에 있으면서 팔관회를 개설하였다. 을묘일에 김방경이 또다시 왕에게 글을 올려 퇴직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기미일에 일관(日官)에게 명령하여 지금부터는 “동지 원정력(冬至元正曆)을 왕에게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경신일에 중찬 김방경, 밀직부사 박구, 김주정이 일본 정벌에 참가할 군사들을 사열하였다. 병인일에 중찬 김방경, 장군 정인경(鄭仁卿)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신년을 축하하였다.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왕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 김방경이 무고하게 죄를 당했다는 것을 해명하였는바 그 글에 이르기를 “위득유, 노진의 등이 흔도에게 김방경이 공주, 국왕,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장차 강화도에 들어가려 한다고 고발하였는바 만일 정말 그러하였다면 위득유는 응당 나에게 먼저 고발했어야 할 것인데 왜 바로 수부(帥府-몽고의 원수부)에다 고발하였겠는가? 흔도가 김방경을 고문하였는데 김방경은 일찍이 어떤 병기도 갑옷도 집에 감추어 둔 것이 없었고 다만 나유 등 41명이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유 등도 한결같이 ‘김방경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위득유 등이 김방경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그를 해치려 하여 그러나 봅니다’라고 말하였다. 위득유 등도 한번도 직접 김방경의 반역 음모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그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다고 하였다. 다만 정동(일본 정벌)시에 김방경의 부하들이 군기를 관가에다 납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반역 음모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말을 바꾸어서 김방경이 반역 음모를 두 번이나 이야기하였다고 하였으니 앞뒤의 말이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또 위득유 등은 지원 12년(충렬왕 1년) 12월 어느 날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흔도가 나의 방원(房院)을 헐어뜨리고 갔다’고 하면서 반역할 데 대한 말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수부(원수부)의 진무(鎭撫) 야속달(也速達)이 보낸 글을 보건대 흔도는 지원 12년 12월 28일에야 왕경에 도착했고 이듬해 정월 초 3일에 염주(鹽州)로 돌아갔은즉 위득유는 어디서 12월에 갔다는 말을 끌어 내게 되었겠는가? 또 노진의는 지원 12년 4월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은 문 앞에 서서 반역 음모를 말하였다 라고 하였었는데 그 후에는 김방경이 정방(政房)의 동랑(東廊) 밑에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했으니 그 말한 바가 전후가 다르다. 이로써 볼지라도 그들의 말이 모두 허망하게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흔도가 달로화적과 함께 문초를 하였는데 결국 갑옷을 감추어 두었던 자들만 곤장을 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며 다만 김방경만은 남겨 두어서 황제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홍다구는 또 균지(鈞旨)를 받아 한희유, 안적재(安迪材), 김흔 등을 문초하였는데 그들로 말하면 실제는 나 자신이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마치도 김방경이 제멋대로 파견하여 오목강(吳木江)에서 양곡을 적재하도록 한 것처럼 심문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죽주(竹州) 등 군, 현에서 공, 사의 곡물을 운반하여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김방경이 저축해 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남(潘南) 등지에 있다는 선박들도 모두 다 종전군인(種田軍人-둔전‘屯田’ 군인)들이 갖추어 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김방경의 선박들이라고 하여 억지로 문건을 꾸며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거듭하여 반드시 자백하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 형세로 보면 사태가 저절로 명백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김방경의 목숨이라도 살려 두어 우선 섬에 귀양이라도 보내었다가 황제의 명령 내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 하였더니 황제는 저간의 사정을 다 알고 김방경으로 하여금 수도에 올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번에 황제께 올린 글과 달로화적이 보낸 글을 자상히 살펴보고 하나도 빠짐 없이 잘 아뢰어 줄 것을 바라는 바이다. 위득유와 노진의는 또 ‘담선 법회는 장차 귀국에 대하여 불리한 일을 일으키게 하려고 개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위득유를 불러다가 이것을 물어 본즉 ‘대정(隊正) 김현(金玄)의 말에 의하면 장차 담선 법회를 개설하려다가 그만 중지되고 말았다고 했으며 또 군인(軍) 성일(成一)도 역시 어떤 중이 공주에게 담선을 하는 것은 귀국에 불리하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주가 성일의 누이 우긴(于緊)에게 옷을 기워 오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그 중에게 상으로 주었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김현에게 물어 보니 그는 ‘위득유가 나를 불러서 담선 법회가 무슨 까닭에 중지되었는가를 묻기에 나는 모른다고 하였고 그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일에게 물어 보니 그는 ‘나는 노진의네 집에서 기숙하고 있는데 노진의가 나를 데리고 위득유의 집에 가서 그를 만났더니 위득유가 무슨 다른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못들었나 라고 묻기에 못들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주가 중에게 상을 주었다는 것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위득유에게 했겠습니까? 또 나에게 만약 누이가 있다면 누이의 집에서 기숙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노진의네 집에서 기숙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현과 성일의 말이 모두 이러하다. 게다가 선법(禪法)이란 것은 천하에 모두 행해지는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3백60여 년간이나 대개 3년에 한 번씩 봄철이 되는 첫달에 법회를 개설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에는 위득유, 노진의의 무고로 말미암아 나라 안이 소란스럽기 때문에 4월달에 개설할까 하고 어물어물 시간을 늦추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위득유는 내가 직접 황제를 보고 말하게 되면 자기 죄가 더해질까 두려워하여 내가 귀국으로 가는 것을 방해할 셈으로 또다시 허망한 소리를 달로화적에게 하였고 달로화적은 잘 구명해 보지도 않고 갑작스레 보고하였던 것이니 실로 황공한 일이다. 황제에게 잘 아뢰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중서성의 관원들이 위득유의 말을 듣고는 모두 크게 웃었다. 10여 일 더 있다가 위득유 역시 혓바닥이 헐어서 죽어 버렸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하늘이 그들의 소행을 미워해서 죽여 버린 것이라고들 하였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귀국 후 다시 김방경을 중찬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은 10근을 주었다. 6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리어 정계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보내 잘 타일러 다시 정사를 보게 하였다. 겨울에 또다시 연로 퇴직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늙었지마는 세운바 훈공과 업적은 보통 사람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경솔하게 벼슬살이를 그만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황제가 일본 정벌의 명령을 내리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응당 황제에게 말하여 원수를 두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훈공도 업적도 없는 자를 황제에게 요청할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허락하지를 아니하였다. 그후 또다시 글을 올려 퇴관하려 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고 우승지 조인규(趙仁規)를 보내 중서성에다 글을 보내 이르기를 “나의 신하인 김방경은 마음을 다하여 자기 직무를 충실히 집행하였고 귀국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근면하게 일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또 진도, 탐라,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관군을 따라서 토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승리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호두 금패를 주어서 그 공적을 장려하고 위로하여 주었다. 지금 다시 정군(正軍) 만 명, 수수(水手-뱃군) 1만5천 명을 관할, 인솔하고 일본 정벌에로 떠나는데 만약 그가 군사 지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호령이 잘 되지 못하며, 또 혹시 실수를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김방경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장한 마음만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시금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고 있으니 황제께 잘 아뢰어 원수부의 성원으로 참가케 하여 사업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내 김방경에게 중선 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의 관직을 주었다. 이때 김방경은 신년 축하 차로 원나라에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명전(大明殿)에 나와 앉아서 축하를 받았다. 4품 이상 인원들은 전상(殿上)에 올라가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김방경도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좌석을 승상(丞相)의 다음에 잡게 하였으며 진수 성찬을 그에게 주고 또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계속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였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을 주었으며, 또 활 천 개, 갑옷 백 벌, 반오(胖襖솜옷) 2백 벌을 주어 동정에 나가는 장령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이내 동정 조령(東征條令)을 보여 주었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 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었다. 7년 3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 정벌을 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도착하여 군사 기자재들을 검열하였고 왕은 합포에 도착하여 대규모로 각 군의 사열을 거행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홍다구,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하여 일본의 세계촌 대명포(世界村 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통역)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관문서)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타이르게 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군과 전투를 시작하니 제군(諸軍-좌, 우, 중군 등)이 모두 배에서 내리어 왜군과 싸웠는데 낭장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전사하였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 박구, 박지량(朴之亮), 형 만호(荊萬戶) 등이 일본군과 접전해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는데 일본 군사들이 돌격해 왔으므로 관군(몽고군)이 무너지고 홍다구는 말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왕(王) 만호가 다시 측면 공격을 들여 대어 일본군 50여 명의 목을 베니 일본군이 이로 인하여 물러갔으며 홍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튿날에 또다시 싸웠으나 패전하였고 군사들이 많이 유행병에 걸리어 죽은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흔도, 홍다구 등은 여러 번 싸워서 승리하지 못했고 도 범문호(范文虎)가 약속한 기한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하자고 의논하기를 “황제의 명령은 강남군(江南軍-범문호의 군대)과 동략군(東略軍)이 반드시 이 달 보름까지에는 일기도(一岐島)에서 합세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강남군은 도착하지도 않았고 우리 군사들만이 먼저 도착하여 몇 번 싸웠으나 배는 썩고 양식은 다 되어 가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한 열흘쯤 지난 다음에 다시 먼저 번처럼 논의가 되었는데 김방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우리는 석 달 동안의 식량을 가지고 떠났는데 지금 아직 한 달 분의 식량이 남아 있으니 남군(강남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반드시 일본을 격멸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감히 또다시 무어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가 만군(蠻軍) 10여만 명을 인솔하고 도착하였는데 선박의 총수는 9천 척이나 되었다.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만군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밟고도 걸어갈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군하였다.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告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 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라의 정사에 참여한 지 오래되고 또 금부를 받아서 도원수가 되자 권력이 온 나라에 미쳤다. 그가 지휘한 전장이 전국의 주와 군에 분포되어 있게 되었으므로 부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내상(內廂)이라고 일컬으면서 날마다 그의 문전에서 경비를 섰으며 권세에 아부하고 남의 위력을 빌어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전국을 쏘다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들을 말리지 아니 하였다. 또 그가 일본을 정벌하려 갔을 때에 군공에 대한 관작과 상품의 수여에서 불공평하게 된 것이 상당히 많아서 사람들의 신망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으로 하여금 차신(車信-제국 공주에게 총애를 받은 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김방경의 아들들로 김선(金愃), 김흔(金忻), 김순(金恂)이 있다. 김선은 관직이 부지밀직 사사에 이르렀고 김선의 아들들로 김승용(金承用), 김승택(金承澤)이다. 김승용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밀직사(密直使)에까지 이르렀는데 청렴하다고 칭하였다. 김승용의 아들 김후(金厚)는 공민왕 때에 여러 관직들을 지나 검교첨의 평리로 되었다가 원나라의 박 새인불화(朴賽因不花)에 아부하여 합포 만호로 되었다. 김후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그의 처도 마음이 사납고 인색하여 참혹한 짓을 잘 하였다. 일찍이 능직 피륙을 잃은 일이 있었는데 그 아들 김칠우(七祐)가 훔쳐다가 첩에게 준 것이라고 짐작하고 김칠우를 결박해 놓고 종일토록 고문한 결과 드디어 김칠우가 죽게 되었다. 그는 종을 시켜 목을 매어 달아 두게 하고 “사람들이 묻거든 제가 목을 매어 죽었다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능직이 아들보다 더 소중하다고들 하였다. 김승택은 중서 평장사로 치사하고 죽었다. 양간(良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김묘(昴)는 상락군(上洛君)이었고 김묘의 아들은 김구용(金九容)과 김제안(金齊顔)이다. 김구용의 자(字)는 경지(敬之)이니 처음에는 김제민(齊閔)이란 이름을 썼다. 공민왕 때 나이 16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왕이 모란꽃에 대한 시를 지으라고 하였을 때 김구용이 제일 잘 지어 첫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왕이 기특히 여기고 산원(散員) 벼슬을 주었다. 그 후 과거에 합격하여 덕녕부(德寧府) 주부가 되고 여러 관직을 지나 민부 의랑(民部議郞) 겸 성균관 직강으로 되었다. 그는 후진들을 힘 써 추천하고 그들을 가르쳐 주어 권태할 줄 몰랐고 비록 휴일에 집에서 쉬게 되는 날이라 하더라도 질의하러 오는 여러 학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신우 원년에 삼사 좌윤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 이르기를 “백안 첩목아(伯顔帖木兒-공민왕의 몽고식 이름) 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맺었으니 그대의 나라에서 왕(공민왕)을 죽인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은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김구용은 이숭인(李崇仁), 정도전, 권근 등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이르기를 “만약 이 사신을 맞아들인다면 전국의 모든 관료, 인민들이 모두 임금을 반대한 반란 도당의 죄를 둘러 쓰겠으니 죽어 저승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공민왕)을 만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복흥(慶復興)과 이인임은 이 글을 받아 주지 않았으며 간관(諫官)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이 글을 올려 이인임의 죄를 논하고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은 도리어 간관을 곤장으로 쳐서 귀양 보내었으며 또 김구용, 이숭인 등도 자기를 음해하려 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을 보내었다. 김구용은 죽주(竹州)에 귀양 갔다가 얼마 후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가 있게 되었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 경개가 좋은 곳에서 시 짓기와 술 마시기로써 낙을 삼았으며 자기 거처에 편액을 달아 육우당(六友堂)이라고 하였다. 7년에 신우(우왕)가 불러서 좌사의대부로 삼으니 곧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에서 침범해 와서 나라 안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므로 전쟁은 그칠 날이 없고 백성은 자기 생업을 잃게 되어 굶주리고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공부(貢賦), 군대 복무, 출정 등의 세(稅), 역(役)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변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마음을 수양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전하는 침식과 일상 생활이 절도가 없고 술에 취하여 말을 몰아 거리와 골목을 다니니 그러다가 혹시라도 넘어지게 되면 옥체를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전하 자신은 설사 자기를 중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묘와 사직(국가)을 맡아 나가는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간난하게 경영한 선조들의 국가 사업을 생각하고 하늘이 견책하는 뜻을 살피어 날마다 대신들을 만나 국가 통치의 방도를 강구, 논의하며 궁중에서 출입할 때면 모두 옛규범에 따라 거동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신우는 듣지 아니 하였다. 이듬해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전임되고 얼마 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되었다. 처음에 의주 천호(千戶) 조계룡(曹桂龍)이 요동에 가니 도지휘(都指揮) 매의(梅義) 등이 거짓 말하기를 “우리는 그대의 나라일에 항상 마음을 다하여 잘 해주느라고 하였는데 왜 그대의 나라에서는 감사의 뜻을 표시하지도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10년에 김구용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아서 편지와 은 백 냥, 가는 모시 베와 삼베 각각 50필을 가지고 가게 되었다. 요동에 이르니 요동 총병(摠兵) 반경섭(潘敬葉), 왕여의(旺與義) 등이 말하기를 “신하로 된 자들은 의리상 사사로이 교제를 하는 법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구용을 붙잡아서 서울(남경)로 데려 가니 황제는 그를 대리위(大理衛-지금 운남)로 귀양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가 귀양 가는 도중 노주(瀘州) 영녕현(永寧縣)에 이르러 병을 얻어 죽으니 나이 47세이었다. 그 후에 신우(왕)가 조계룡이 매의의 말을 그릇되게 전달하였던 죄를 소급하여 다스리고 조계룡을 귀양 보내었다. 김구용이 시, 부, 잡문(詩賦雜文) 등 글짓기를 잘하여 그의 저서인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세간에 전한다. 그의 아들은 김명선(金明善), 김명리(金明理), 김명윤(金明允)이다. 김제안(齊顔)의 자(字)는 중현(仲賢)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13년에 좌정언이 되었다. 당시에 내수(內竪-내시) 한휘(韓暉), 이귀수(李龜壽)의 두 사람은 변방에서 세운 공이 있다 하여 승급 순서를 뛰어 넘어서 첨의평리의 벼슬을 얻어 하게 되어 국가의 기밀 사업을 관할하였으며 왕의 총애와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으나 간관(諫官)이 그들의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김제안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왕에게 참소하기를 “저희들이 나라일을 위하여 집안일을 잊어 버리고 외지에 나가서 풍상을 헤아리지 않고 노력하였는데 김제안은 나이가 어린 자로서 그릇되게도 임금을 충고하는 관직 자리에 있어서 저희들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을뿐더러 무릇 달천(㺚川덕흥군의 군대가 침입하였을 때 싸우던 전투) 전역에 공이 있었던 장령, 군사들이라면 모두 그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으니 이것은 왕을 배반할 뜻이 있어서 장령, 군사들의 통일 단결을 해체해 버리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이 크게 성을 내어 시중 경천흥(慶千興), 첨서 밀직(僉書密直) 원송수(元松壽),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에게 말하기를 “한휘(韓暉), 이귀수(李龜壽)는 고초와 간난을 겪으면서도 나를 위하여 많은 힘을 썼고 그 공로가 크기 때문에 작위를 주어 보답하려고 하였더니 김제안이 그들의 임명장에 서명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를 문초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다. 경천흥 등이 대답하기를 “낭사(郞舍-중서 문하성 첨의부 관원들)가 많은데 어찌 김제안 한 사람만이 그 책임을 다 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김제안은 그대들의 일가 친척이기 때문에 그대들을 위해서도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 원송수를 꾸짖기를 “그대는 관리의 선발, 임명을 맡아보면서 그대의 친척을 이끌어다가 간관으로 삼았으니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였는가?”라고 하니 원송수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땀을 흘리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왕이 장차 김제안을 옥에 가두려고 하니 경천흥은 밀직부사 송인적(宋仁績)과 더불어 그러면 안 된다고 간하였으나 말려 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김달상이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김제안은 간관입니다. 만일 그를 감옥에 가둔다면 후세 사람들이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임명장에 제때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무슨 죄로 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왕이 더욱 노하여 궁내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주정
〔김심(金深), 김종연(金宗衍), 김석견(金石堅)의 기사 첨부〕김주정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성질이 침착하고 후하여 말이 많지 않았으며 함부로 친구들을 사귀는 일이 없었다.그는 문음으로 부성 위(富城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몽고 군대가 대거하여 와서 전국이 놀라고 시끄러웠는데 김주정은 제때에 적당한 조치를 취하였기 때문에 그의 위세와 혜택이 모두 현저하여 그 지방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순문사(巡問使) 한취(韓就)가 그를 상부에 추천하였기 때문에 김주정은 권지도 병마녹사(權知都兵馬錄事)로 임명되었다.원종 5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해양부(海陽府) 녹사로 임명되고 또 전첨(典籤)으로 승진되었다. 해양공(海陽公) 김준(金俊)이 그의 재간을 아끼어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였고 정방(政房)에 들어가 일을 보게 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조동되어 이부시랑에까지 이르렀다.충렬왕 원년에 태부 경(太府卿) 좌사의대부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 해에 왕에게 글을 올려 안렴사, 수령들의 근태 정형과 공부(貢賦)의 부과에서의 경중과 향리(鄕吏)들이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여 이역(吏役)을 도피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 조사 규명하고 죄 있는 자를 다스릴 것들을 요청하였더니 왕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측근자들이 방해하는 바 되어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4년에 왕이 원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김주정은 행종 도감사(行從都監使)로 되어 왕에게 우리 나라에 와 있는 달로화적(達魯花赤), 왕경 유수군(王京留守軍), 합포 진수군(鎭守軍), 황주, 봉주, 염주, 백주(黃鳳鹽白)의 4개 주의 둔전군(屯田軍)에 대한 각종 경비의 지출이 너무 번다하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감당해 낼 수가 없다는 것과 또 김방경은 원나라 조정에 대해서도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인데 남의 무고를 받아서 먼 곳에 귀양 가 있다는 것들을 황제에게 잘 아뢰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이 원나라 조정에 가자 그것들을 황제께 보고하였더니 황제는 모두 다 좋도록 해주마고 승인하였다. 그래서 왕은 김주정을 더욱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귀국하자 그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삼았다. 옛제도에 무릇 국가적 사업은 재추(재상과 추밀)들이 회의에 부치었으며 승선(承宣)이 왕의 뜻을 받아서 연락을 하였다. 김주정이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지금 재추의 수효가 아주 많아서 정사를 토의함에 있어서 주되는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따로 필도적(必闍赤)을 설치하는 요긴한 사무는 그들에게 맡겨 처리케 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료(內僚)가 모든 일들을 왕에게 아뢰는 것도 좋지 않으니 몇 사람을 선택하여 신문색(申聞色)을 두고 나머지는 폐지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도 염승익(廉承益), 이지저(李之氐)를 시켜서 왕에게 귀띔하여 빨리 두자고 한 결과 왕이 드디어 필도적과 신문색을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주정, 참문학사 박항(朴恒), 밀직부사 설공검(薛公儉), 좌승지 이존비(李尊庇), 판례빈사 염승익, 대장군 인공수(印公秀), 조인규(趙仁規), 비서윤(秘書尹) 정흥(鄭興), 내시(內侍) 장군 이지저, 보문서 대제(待制) 곽여(郭預), 태부 소윤 안전(安戩), 천우위(千牛衛) 녹사 이자분(李子芬), 첨사부(詹事府) 녹사 윤문옥(尹文玉), 태상부 녹사 정현계(鄭玄繼)는 필도적으로 되고 내료 낭장 정승오(鄭承伍), 김의광(金義光), 강석(姜碩), 이서(李恕), 하예(河汭)는 신문색으로 되었다. 이들은 항시적으로 궁중에 모여서 중요 사무를 처결하였는데 당시 이들의 모인 곳을 별청(別廳)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재추들은 이것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옛제도가 아니라 하였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당시 태부(太府)에서는 내료들의 구전(口傳-입으로 왕명을 전하는 것)과 내시원(內侍院)의 전청(傳請)으로 인하여 재원이 고갈되어 한 주부(注簿)는 자기 개인이 꾸어다 대다가 지탱할 수가 없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까지 하였다.김주정이 생각하기를 “지후(祗候) 윤해(尹諧)는 그전에 내시로 있었으니 반드시 전청(傳請)을 적당히 조절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대장군 김자정(金子廷), 장군 차득규(車得珪)는 내료의 우두머리이니 여러 내료들의 구전(口傳)으로 재물을 요청하는 폐단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왕에게 요청하여 그들을 별감(別監)으로 삼아서 감찰 별감과 더불어 서로 태부시의 세입(歲入)을 각 방면으로 조사, 대조하여 그 경비 지출을 감축시키게 하였다. 그 후 구전은 더욱더 많아지고 전청도 더욱더 잦아졌다. 그리하여 내료들은 제가끔 다른 사람의 실례를 원용하여 각사(各司)의 별좌(別坐)로 되기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금지해 내지 못하였다.낭장 최종언(崔宗彦)이 공주(公主-충렬왕 비)의 유모에게 부탁하여 견룡 행수(牽龍行首)로 되었더니 김주정은 낭장 김희(金禧)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김희의 형 김의(儀) 및 조순(曹淳)도 역시 낭장으로서 행수가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주정과 옹서(翁婿)간이 되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한 집안에서 세 행수가 동시에 났다고들 하였다.김주정이 일찍이 자기 딸을 대장군 윤수(尹秀)의 아들에게 출가시켰는데 윤수가 마침 그 장인의 사망으로 상복을 입게 되었다. 김주정은 윤수의 공무 보는 것을 면제시켜 줄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승지 조인규는 그것이 절차에 맞지 않는다 하여 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주정은 내료를 통하여 왕에게 그러한 요청을 하여 허락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김주정이 옳지 못하다고들 하였다.또 그는 응방(鷹坊) 도감사로 되어 매와 개로 왕에게 아첨하여 상당히 권세를 부렸다.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는 “왕명이 있어서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원나라에서 장차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왕은 김주정에게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있다 하여 그를 만호로 삼고 중서성에 글을 보내 호두 패를 그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를 소용(昭勇) 대장군, 우부도통(右副都統)으로 임명하고 호두 금패 및 인장을 주었다. 얼마 후에 동지밀직사사로 되었다.일본 정벌에 나가게 되어 대명포(大明浦)에 도착하였는데 갑자기 폭풍이 불어 배들이 뒤집어지고 관군(몽고군)이 많이 물에 빠져 죽었다. 김주정은 계책을 꾸며 내어 그들을 건져 내어 살리게 한 것이 아주 많았다.10년에 지도첨의사로 되었다. 왕이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이때 김주정은 왕에게 잔을 올려 그의 장수를 축원하고 물러가려 하는데 공주가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의 아들 김심(深)은 자기 처에게 강박하여 목을 매어 죽게 하였다는데 그대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징벌하지도 못하느냐?”라고 하였다. 김주정이 대답하기를 “범도 그의 새끼를 잡아 먹지 않는답니다”라고 하니 공주가 좋아하지 않았다. 김주정이 물러가서 턱을 고이고 졸고 있었더니 공주가 사람을 시켜서 책망하기를 “그대는 취하였는가? 잠을 자는가?”라고 하였다. 김주정이 “저는 졸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공주가 크게 성을 내어 끌어 내라고 명령하였고 이튿날에 그를 파직시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청주(淸州) 목사로 강직시키고 호두 패는 빼앗아서 박지량(朴之亮)에게 주었다. 얼마 후 다시 불러 올리고 패를 도루 내어 주었다.16년에 그가 죽었는데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은 김심이다.김심(深)은 충렬왕 때에 독로화(禿魯花)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그 후 낭장이 되었다. 또 궁전배(弓箭陪-의장병의 지휘관)로서 원나라에 간 적이 있고 여러 번 조동되어 밀직부사로 임명되고 아버지의 만호 관직을 계승하였다. 얼마 있다가 동지(同知)로 승진하였다. 그는 일찍이 국서를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에게 귀국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충선왕이 특별히 참리(參理)의 벼슬을 주고 교서를 내리기를“재상 홍자번(洪子藩), 최유엄(崔有渰), 유청신(柳淸臣), 김심, 김이용(金利用) 등은 국가를 평안하게 할 것을 기도하면서 도의를 중히 여기며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아 모두 원나라 조정에 가서 이해 관계를 일일이 밝히고 나를 위하여 귀국하도록 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으니 그들의 공이 특이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들 관직의 등급을 올려서 임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찬성사로 승진하였다.원나라에서는 그에게 고려 도원수(都元帥)의 관직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의 딸 달마실리(達麻實里)가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딸은 그 후에 황후로 책봉되었는데 김심은 자기 집에서부터 나와 직접 총부(摠部)1)에 가서 개선(開宣)2)하게 되었다.이때 행성(行省)에 있었던 국왕 우승상(右丞相)이 쓰는 수정 부월(水精鈇鉞) 등의 의장(儀仗)을 마전(馬前)에 늘여 놓고 개선하였으며 개선이 끝나자 3관 5군(三官五軍)이 뜨락에 늘어서서 김심에게 절을 하였는데 유식한 사람들은 그가 자기 신분을 넘쳐 왕과 비등한 예를 받았다고 비난하였다.그 후 갑자기 밀직사(密直使)로 전임되고 화평군(化平君)의 봉호를 받았다.왕이 원나라에 가 있었을 때 김심은 밀직사 이사온(李思溫)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황제와 태후(太后)는 여러 번 조서를 내려 왕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왕은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본국(고려)에다 명령하여 해마다 베 10만 필, 쌀 4백 곡(斛)을 운반해 오게 하며 다른 물건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요구하니 나라 사람들이 수, 육으로 운반해 가는 폐단이 더욱 심하여 가고 있다. 또 왕을 따라 온 여러 신하들도 모두 객지에 나와 있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권한공(權漢功)과 최성지(崔誠之)는 함께 선법(選法-관리의 선발, 임명)을 맡아 보면서 그것이 많은 뇌물을 가져다 주는 것은 탐하고 있으며 박경량(朴景亮)은 왕의 복심(腹心)으로 되어 여러 번 상을 받고 산업(産業)을 설치, 경영하고 있었다. 왕이 귀국하지 않는 것은 실로 이 세 사람 때문이다. 어찌 이들을 없애 버리고 왕을 모시고 귀국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태후의 총애하는 환관인 매살(買撒)을 통하여 휘정원사(徽政院使)3) 실렬문(失列門)에게 이야기하게 하였더니 실렬문이 그래도 좋다고 허락하였다.이에 김심 등이 세 사람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써서 대호군 이규(李揆), 호군 김언(金彦), 김상(金賞), 최지보(崔之甫), 신언경(申彦卿) 등 수백 명에게 서명하게 하여 휘정원에 제출하였더니 실렬문은 태후의 명령인 것처럼 꾸며 가지고 권한공 등 세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왕이 성을 크게 내어 태후의 시비(侍婢) 야리사반(也里思班)을 통하여 태후에게 말하기를“저를 따라 온 신하들 가운데 세 사람만큼 저를 사랑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김심 등은 나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휘정원에다가 고발하였으니 그들이 뜻하는 바는 세 사람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는 불쌍히 여겨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권한공 등도 역시 뇌물을 바쳐 죄를 면하려 하였으므로 태후가 즉시로 세 사람을 석방하라고 명령하고 김심, 이사온을 곤장을 쳐서 임조(臨洮)로 귀양 보내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고 한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이규, 김언, 김상, 최지보, 신언경은 모두 달아나 숨어 버렸기 때문에 왕은 신언경의 아버지 신양규(申良揆)의 외조부 김정(金貞)을 순군(巡軍-순군 만호부)에다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버렸다. 황제는 얼마 후에 김심을 소환하였다.처음에 김심이 원나라로 떠나 가려 할 때 인후(印侯)가 나와 송별하면서 이르기를“지금 국왕이 원나라의 수도에 있는데 그대는 왕의 소환도 받지 않고 가니 어찌 의도하는 일이 없으랴? 그런데 말을 능란하게 해서 원나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데 있어서 누가 나만 하겠는가? 또 화폐와 재물을 많이 장만해서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들에게 돈을 안겨 주는 일은 누구가 나만 하겠는가? 그러니 나는 일찍이 나라에 죄를 지어서 겨우 죽는 것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대는 잘 조심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김심은 이 말을 옳게 받아들여 쓰지 못하였다. 충숙왕 때에 수(守)첨의 정승, 판총 부사로 임명되고 여절 보안(礪節保安) 공신의 칭호를 받았더니 얼마 후에 수성 수의 충량(輸誠守義忠亮) 공신, 화평(化平) 부원군으로 고쳐 주었다. 또 그 후 도첨의 중찬으로 고쳐 임명하고 협보(協輔) 공신의 칭호를 더하여 주었다.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 장백상(蔣伯祥)이 재물을 탐욕스레 모아서 권세와 행복을 좌우하였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였는데 원나라에서는 객성 태사(客省太史) 도적(都赤)을 보내 장백상을 잡아 가두고 김심 및 만호 홍수(洪綏)로 하여금 권성사(權省事-권행정동성사)로 삼았다.그가 죽은 후 충숙(忠肅)이라고 시호를 주었다. 그의 아들은 김승사(金承嗣), 김승한(承漢), 김승진(承晉), 김승로(承魯)가 있었으며 천첩 출생의 아들로 김석견(石堅)이 있었으며 김승사의 아들로는 김종연(宗衍)이 있었다.김종연의 아버지밀직부사 정(精-승사의 오자로 인정)은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신돈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김종연은 도망하여 숨어 있었는데 신돈이 처형되자 비로소 나와 다니게 되었다.신우(우왕) 때에 여러 번 원수로 되어 왜구를 쳐서 공로를 세웠으며 공양왕 때에 왕방(王昉), 조반(趙胖)이 명나라 수도로부터 돌아왔을 때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獄)가 일어났는데 국가에서는 처음에 조반의 말을 듣고 그를 문초하려 하였으나 의심 나는 바도 있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지용기(池湧奇)가 김종연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가만히 김종연더러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이 윤이, 이초의 글 가운데 있으니 그대의 일이 위태롭구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종연이 겁을 먹고 밤에 도망을 갔다. 이에 국내 각지를 샅샅이 수색한 결과 봉주(鳳州)의 산속에서 김종연을 붙들어 순군(巡軍)에 잡아 가두어 대성(臺省)과 형조(刑曹)의 관원들이 문초하였으나 그는 자복하지 않았다.이튿날 밤중에 김종연이 뒷간의 구멍으로 빠져 나가 그의 아들 김백균(金伯鈞), 김맹균(金孟鈞), 김중균(金仲鈞) 및 종 수명을 데리고 또 달아났다. 그래서 성 안을 사흘 동안 뒤졌으나 잡지 못하였으므로 옥의 경비가 엄하지 못하였다는 죄로 당직이었던 영사(令史)를 참형에 처하고 진무(鎭撫) 이사영(李士穎)을 순군에 구금하였다.서경(평양) 천호 윤귀택(尹龜澤)이 천호 양백지(楊百之)와 더불어 술을 마셨는데 술이 얼근하게 취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재상으로 될 뜻이 없는가?”하니 양백지가 “누가 그런 마음이 없겠는가? 다만 그렇게 되기가 어려울 뿐이지”라고 대답하였다. 윤귀택이 말하기를 “김종연이 조유(趙裕)와 공모하여 이 시중(이성계)을 해하려 하니 그대가 만약 정예로운 군사들을 인솔하고 우리와 한마음이 되어 일한다면 재상은 얻어 할 수 있는 것이다. 심 시중(심덕부)도 역시 이 음모를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양백지가 겉으로 이에 동의하는 체하였다. 윤귀택은 음모가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남경(南京-서울)에 와서 태조(이성계)에게 고발하기를“김종연이 서경에 도망 와서 나와 함께 군대를 발동시켜 당신을 모해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김종연은 이미 비밀리에 송경(松京-개성)에 들어와서 시중 심덕부(深德符), 판삼사사 지용기, 전 판 자혜부사(前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문하평리 박위(朴葳), 동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 한양부윤 이빈(李彬), 나주도(羅州道) 절제사 이무(李茂), 전주도(全州道) 절제사 진을서(陳乙瑞), 강릉도 절제사 이옥(李沃), 전 밀직부사 진원서(陳原瑞) 및 이중화(李仲和)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킬 것을 음모하고 있습니다. 조유(趙裕)도 나에게 ‘심 시중이 그 부하인 진무, 조언(曹彦), 김조부(金兆府), 곽선(郭璇), 위중(魏種), 장익(張翼)으로 하여금 조유 등과 함께 자기들의 지휘하에 있는 부대들을 동원하여 장차 이 시중을 공격하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태조가 그의 말을 그대로 심덕부에세 말하였더니 심덕부는 태조와 상의하여 조유를 옥에 가두었고 천호 정을방(鄭乙邦)을 송경에 보내 김종연의 처와 장인 송호산(宋壺山), 김종연의 종 파두(波豆)를 순군에 잡아 가두었으며 또 김종연의 친척 박천상(朴天祥), 박가흥(朴可興)도 아울러 구금하여 문초하게 되었다. 김종연의 처가 울면서 말하기를“설령 내가 남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기로서니 어찌 차마 그것을 대어 주어 남편을 잡아 먹을 수 있겠소? 그런데 하물며 나는 그것을 모르니 어떻게 하란 말이요?”라고 하였으며 종 파두는“저의 상전 김종연은 상복을 입고 박가흥의 집에 가서 박가흥의 부부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나와서 저에게 ‘윤귀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면 일은 잘 수습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박가흥을 고문하니 박가흥이 그제야 그렇다고 시인하였다.처음에 김종연이 안협현(安峽) 어떤 사람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군사들을 풀어서 그 집을 포위하니 석굴 속으로 달아 들어갔다. 또 석굴을 포위하니 김종연은 검을 뽑아 들고 군졸 하나를 쳐 죽이고 포위를 뚫고 평양까지 달아나서 전 판사 권충(權忠)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권충의 아들 진사 권격(格)과의 사이가 좋았다. 이때에 와서 권격을 체포하여 고문하면서 김종연과 공동으로 음모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더니 권격은 지용기, 정희계, 박위, 윤사덕, 이빈 등이라고 대었다.사헌부에서는 왕에게 상소하여 지용기 등을 극형(極刑)에 처하자고 요청하였는데 왕은 이것을 믿지 않고 그들의 상소문을 궁중에 두어 둔 채 내려 보내지를 아니하였다. 그래서 대간(臺諫)들이 며칠 동안 계속 궁문 앞에 꿇어 엎드려 그들의 죄를 논하고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그제야 지용기를 삼척(三陟)에, 박위를 풍주(豊州)에, 정희계를 안변에, 윤사덕을 희양에, 이빈을 안협(安峽)에다 귀양 보내었다. 대간들이 말하기를“지용기 등은 이미 귀양 갔으나 이무, 진을서, 진원서, 이옥 등의 범죄 내용이 권격(權格)과 연결되어 그의 죄가 지용기 등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받지 않고 있으니 그들의 죄도 옳게 밝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무, 진을서, 이옥은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며 또 김종연이 달아나기도 전에 벌써 지방 관직으로 임명한 자들이니 그 정상이 의심할 바가 있다 하여 진원서를 흥덕(興德)에 귀양 보내는 데 그쳤고 조유를 교형에 처하고 심덕부 및 조언 등을 유형에 처하였다. 이에 관한 말들은 심덕부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또 김종연의 일당인 김가물(金可勿), 이방춘(李芳春) 등을 문초하니 김가물이 말하기를“내가 서경에 도착하여 이방춘의 집에서 김종연을 만났는데 김종연이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서울개성)에 들어가 박가흥의 집에 기식하면서 김식(金軾), 이중화(李仲和)와 더불어 두 시중(侍中)을 없애려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식과 이중화는 곧 이전에 김종연의 지휘하에 있던 진무(鎭撫)들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이방춘은 말하기를“김종연이 두 번째 달아 난 후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시중은 성품이 본래 인자하다. 그러나 그가 다만 정몽주(鄭夢周), 설장수(偰長壽),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의 유혹하는 바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게 되었다. 나는 권격과 함께 개성에 들어가서 박가흥에 의거하여 정양군 왕우(定陽君瑀-공양왕)에게 말씀드리고 지용기, 정희계, 박위, 윤사덕, 윤귀택, 김식, 이중화, 정자련(鄭子連) 등과 함께 공모하여 이시중을 해하려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고 하였다.권격을 문초하니“김종연이 나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지용기가 김종연더러 ‘그대의 이름이 윤이, 이초의 글 가운데 있으니 그대의 일신이 위태롭다’라고 하기 때문에 김종연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봐 도망해 온 것이다”라고 하면서 저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0월 초 이튿날 저와 함께 서울(개성)로 가서 저의 여 종인 칠보(七寶)의 집에 유숙하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11월 초 하룻날 이동지(李同知)의 집에 가서 잤는데 이튿날에 이동지가 김종연을 칭찬하면서 ‘김종연은 대장부다. 어찌 이런 곳에서 우울한 생활을 하고 있겠는가? 여러 재상들을 없애 버리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김종연이더러 ‘동지(同知)는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여러 재상들을 살해 할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김종연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다만 동지 한 사람과만 의논한 것이 아니라 서경 천호 양백지, 윤귀택 등이 안주(安州), 서경에 군사들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으니 나는 지용기, 박위, 정회계, 윤사덕, 진을서, 이빈, 진원서, 이옥, 이중화 등과 같이 모사하여 이시중 및 정몽주, 정도전, 설장수, 조준, 성석린(成石璘) 등을 죽이는 것이 무엇이 어려울 바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또 ‘누가 그대를 따르려 하는가?’라고 물으니 김종연은 ‘나와 양백지로 말하면 본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그래도 양백지가 나를 따르거늘 다른 천호들이야 누가 감히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 나는 서울(개성)에 있으면서 여러 군대들과 정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으며 그 날짜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그런데 마침 진을서는 출타하고 없었기 때문에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후 이옥이 저의 집에 와서 의논하였으나 저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옥이 성을 내어 문짝을 차고 가 버렸습니다. 저는 또 김종연더러 ‘그대가 만일 중흥(中興) 공신을 해친다면 왕이 성을 내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즉 김종연은 ‘여러 사람과 같이 큰 일을 일으키는데 무엇 때문에 왕을 두려워하겠는가?’고 대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박천상(朴天祥)을 문초하니 그가 말하기를“오중화(吳仲華)가 저더러 ‘김종연이 순군 옥에서 도망쳐서 지용기의 집에 4,5일간 숨어 있었고 정희계네 집에 5,6일간 숨어 있었으며 박가흥네 집에는 10여 일간 숨어 있었는데 그 후에야 성 밖에 나갔다’라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오중화를 쫓아 잡아다가 박천상과 대질시키니 박천상의 말은 헛소리였다.왕이 말하기를“박천상이나 오중화의 사람됨이 부실한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그들을 석방하게 하였다.순군 진무 임순례(任純禮)를 시켜 서해도(황해도)에 가서 김종연을 체포케 하였다. 수색이 심하고 다급하였으므로 김종연이 지나간 곳이면 곧 사람들을 고문하고 잡아 가두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들이 또 서로 연루자를 이끌어 대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김종연은 굶주리고 군색해서 곡주(谷州-곡산)의 숲속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하나 보고 “나는 배가 고파서 죽겠으니 나를 구원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럼 여기 있으라! 내 가서 죽을 쑤어 가지고 오리라”고 하고는 그 길로 관가에 가서 고발하여 습격, 체포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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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34년에 이, 병, 예부 등을 통합하여 둔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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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명령서를 받고 개봉하여 보는 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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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황태후 관계 사무를 맡은 기관(1333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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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 17년(1291) 봄 정월 기미일에 합단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에 침입하였고 양근성(楊根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갑인일에 합단이 원주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별초(別抄) 향공(鄕貢) 진사(進士) 원충갑(元沖甲)이 적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계해일에 세자가 황제를 만나 보고 합단을 토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황제가 나만알(那蠻歹) 대왕에게 명령하여 군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2월 정해일에 세자가 장군 오인영을 시켜 황제에게 “합단이 북계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였다”고 보고하였더니 황제가 묻기를 “그대의 나라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되 오히려 이기지 못한 나라요 또 우리 왕조가 창건된 초기에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왕조에서 정벌했으나 역시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조그마한 도적을 왜 그렇게도 무서워하는가?”라고 하니 오인영이 대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이 다르며 나라의 융성과 쇠약이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는 야습전(夜襲戰)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3월 무오일에 대장군 송화(宋華)를 보내 개경의 궁궐을 경비하게 하였더니 송화가 합단적의 기병 10여 명을 만나서 그 중 3명을 죽이고 1명을 사로잡았다. 이천(利川) 사람 신비(申費)가 합단의 간첩과 함께 음모를 꾸미었고 용강 사람 김철(金哲)이 또한 적들에게 투항하였으므로 모두 거리에서 참(斬)형에 처하였다. 여름 4월 초하루 무진일에 순마소의 남쪽 동리에서 1백여 호의 집이 불탔다. 계유일에 홍문계를 첨의찬성사로 임명하여 곧 퇴직하게 하였으며 한희유를 판삼사사로, 김흔을 판밀직사사로, 최유엄을 부지밀직사사 감찰대부로, 백거(白擧)를 우승지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주(原州) 산성(山城) 방호(防護) 별감(別監) 복규(卜奎)가 포로 58명을 바쳤다. 병자일에 곡주(谷州) 별장 강평기(康平起) 등이 합단 적들에게서 노획한 말, 안장 등의 물품을 바쳤다. 충주 산성 별감이 적을 격파하고 적의 머리 40급을 바쳤다. 신사일에 왕이 남도(藍島) 북쪽 교외에 나가서 원나라 군대를 영접하고 하서 국왕(河西國王), 경중 군왕(慶重君王), 설자간, 도리첩목아 평장사들, 탑출 우승, 백첩목아(白帖木兒)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설도간이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강남에서 오는 군량 운반선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만일 적군과 싸우게 될 때에 부족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고 또 찬성사 홍자번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상국(相國)이니 돈과 곡식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을 터인데 마땅히 수시로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왕이 곤란하게 생각하다가 설자간에게 말하기를 “내고(內庫)에 저축하여 둔 것으로 공급하도록 하겠다”라고 답변하였다. 임오일에 왕이 다시 선원사(禪源寺)에 돌아왔다. 군량을 거두었다. 무자일에 왕이 나만대(那蠻歹) 대왕과 탑해(塔海) 원수를 산예(狻猊-개성 부근의 역명)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나만대가 왕에게 말하기를 “왕도 역시 친히 출정하여 적을 방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늙고 병이 있어서 그러지 못하겠노라”고 사양하니 나만대가 다시 말하기를 “적이 방안까지 들어왔는데 어찌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자기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은 대답하였다. 기축일에 왕이 선원사(禪源寺)로 돌아왔다. 나만대가 사람을 보내 왕에게 전하기를 “어제는 일부러 와서 수고스럽게 위로하여 주었으니 어찌 깊이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적을 방어할 일에 대해서는 대답하시지 않고 돌아갔으니 나는 실로 의혹을 품게 됩니다. 이웃집 사람이 화재를 당하여도 오히려 가서 구원하거늘 항차 이것이 자기 집의 일인데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길에 공주에게 말안장 한 벌을 바치니 공주 역시 안마(鞍馬)로써 답례하였다. 갑신일에 중익군 만호 인후, 좌익군 만호 한희유, 우익군 만호 김흔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출동시켰다. 임진일에 설도간(闍干)의 대군이 금령역(金嶺驛)에서 머물렀다. 갑오일에 장군 오인영을 원나라에 보내 합단이 왕경(개경)에까지 침입하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5월 초하루 정유일에 합단적들이 연기현(燕岐縣)에 머물러 있었는데 설도간의 대군과 우리의 3군이 정좌산(正左山) 밑에 이르러 합세하여 공격하였더니 적이 대패하였다. 기해일에 교주(交州) 산성 별감이 보고하기를 “합단 적군으로서 뒤떨어져 온 기병 3천명이 철령을 지나 교주에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계묘일에 왕과 공주가 장봉(長峰)의 새 궁궐에 가서 연회를 배설하였다. 만호 박지량, 정수기 등은 군대를 영솔하고 가면서 그곳에 거두어 둔 쌀을 경기 8현(八縣)과 동계에서 온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갑진일에 합단이 군대들을 정돈해 가지고 다시 와서 우리와 대전하였는데 아군이 급히 쳐들어가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합단 노적(老的)의 부자는 기병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도망갔다. 을사일에 인후, 한희유, 김흔이 사람을 보내 승전을 보고하고 포로한 부녀자 8명을 바쳤다. 병오일에 설도간도 역시 또 적들의 괴수는 포위에서 빠져 도망갔다고 보고하였다. 정미일에 왕이 장전군(仗前軍)을 인솔하고 배를 타고 강화도에서 나와 적(賊)군을 토벌한다고 성세(聲勢)를 돋우었다. 무신일에 공주가 병에 걸렸으므로 왕이 장봉의 새 궁궐로 돌아왔다. 기유일에 왕과 공주가 선원사(禪源寺)로 돌아왔다. 경술일에 첩보를 맡은 자가 와서 “적 1천 명이 고동주(古東州)까지 왔다가 관군이 연기에서 적을 격파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도로 철령을 넘어갔다”고 보고하였다. 계축일에 평양 사람들이 2백 명의 적을 공격하여 4명을 사로잡아 왔다. 정사일에 왕이 승천부로 가서 관군을 위로하고 음식을 먹였다. 신유일에 공주가 강을 건너서 개경으로 갔다. 찬성사로 퇴직하였던 김련(金連)이 죽었다. 계해일에 왕이 개경으로 갔다. 설도간이 공주를 예방하고 포로한 남녀 50명과 좋은 말 5필을 바쳤다. 도간은 군령을 엄격히 하였으므로 병사들이 무서워 떨었으며 지나가는 곳에서 털끝만큼도 민간의 물건을 침범하지 않았고 적이 연기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날짜를 앞당겨 가서 적을 불의 공격하여 두 번 싸우고 적을 완전 격파한 것은 모두 그의 힘으로 이룬 것이었다. 을축일에 설도간이 돌아갔는데 왕이 그를 초청하여 연회를 배설하려고 하였으나 설도간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임무를 완수하였으니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길로 길을 떠나 원나라로 갔다. 병인일에 나만대 등이 모두 귀환하였다. 이달에 황충(蝗)이 생겼다. 6월 초하루 정묘일에 왕과 공주가 강화도로 돌아왔다. 김흔을 죽전(竹田)에, 한희유를 충청도에, 나유를 교주도에 보내 합단 적의 남은 무리들을 추격하여 체포하였다. 신미일에 한희유로부터 “〔합단〕적 5백 80명이 항복하였다”는 보고가 왔다. 노적(老的)은 군사들을 이끌고 평양으로 도망갔는데 나유가 이것을 방어하였고 낭장 이무(李茂)가 맹렬히 공격하여 적의 전사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임신일에 유홍신(兪洪愼)을 부지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계유일에 낭장 고세(高世)를 원나라에 보내 왕이 친히 입조(入朝)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청하고 아울러 다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겠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갑신일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강남 지방에서 고려로 쌀 10만 석을 운반해다가 진급(賑給)하게 하였다. 을미일에 7품 이하의 관원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7월 무술일에 충청도와 서해도에 구급(救急) 별감들을 파견하였다. 임인일에 민훤을 우승지로 임명하였다. 정미일에 황제로부터 “왕이 10월에 입조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또 수도를 개경에 도로 옮길 것을 승인하였다. 임자일에 정당문학 정가신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계축일에 원나라에서 절서 영전사(浙西營田使) 대탑(大塔) 등을 보내 특사령을 실시한 것, 상서성을 폐지하고 다시 중서성을 설치하는 것, 초법(鈔法)을 정리하게 된 것 등을 전달하였다. 병진일에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이 죽었다. 정사일에 안전을 서북면 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8월 임신일에 첨의 중찬 허공이 죽었다. 기묘일에 장군 김위량(金位良)을 원나라의 동경, 심주(瀋州) 등지에 파견하여 우리측의 인구들을 조사 적발하여 데려 오게 하였다. 을유일에 이덕손(李德孫)을 서북면 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신묘일에 근시(近侍) 낭장 김룡검(金龍劒)을 경상, 전라, 충청도 소복(蘇復) 별감으로 임명하였다. 여러 고을들에 합단적들이 침입한 나머지 백성들이 곤란을 겪고 재산을 손실 당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높아졌으므로 앞으로 지방 관리들의 정치의 선악(善惡)을 검토하여 상벌을 실시하려는 것이다. 9월 을미일에 홍자번을 판 전리사사 세자 사(師)로, 조인규를 판 군부사사(判軍簿司事) 세자 부(傅)로, 염승익을 판 판도사사 세자 보(保)로, 정가신을 첨의찬성사 세자 이사(貳師)로, 김흔을 판밀직사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판삼사사 한희유, 지밀직사사 유승(柳陞)에게 명령하여 강도(강화)에 머물러서 지키게 하였고, 전란을 입은 고을들의 조세(租稅)를 감소, 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기해일에 원나라에서 홍중경(洪重慶)을 보내 왕에게 정동행중서성 좌승상의 관직을 주었고, 인후를 진변 만호부 달로화적으로, 송분을 선무(宣武) 장군 진변 만호로, 유석(劉碩)을 충현(忠顯) 교위 관군(管軍) 천호로 각각 임명하고 모두 금패를 주었다. 병오일에 왕이 원나라로 떠나 갔다.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들을 용서하였다. 청주 부사 김승우(金承祐)의 아들은 세루(世累)로 인하여 관직을 받을 길이 막혀 있었으나 그 사위인 찬 성사 강수사(康守謝)가 왕을 보좌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5품 관직에 등용할 것을 하락하였다. 정미일에 왕이 흥의역(興義驛)에 들렀더니 낭장 강미(康渼)가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황제가 ‘왕의 입조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무신일에 왕이 개성으로 돌아왔다. 계축일에 인후를 원나라에 보내 새매(鷂)를 바쳤다. 이달에 황제가 세자에게 특진 상주국 고려 국왕 세자의 관작을 주고 해당한 금인(金印)을 주었으며 그 임명 조서에 이르기를 “나라를 계승하는 면에서 본다면 세자는 왕의 적자(嫡子)이지마는 친척 관계로 본다면 곧 나의 생질이라 나에게 와서 각근히 인사를 차린 데 대하여 가상히 여기면서 세자를 고려의 계승자로 정식 임명하니 그대의 직분을 힘써 지키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수정(水精)으로 만든 술잔(杯)과 서각(犀角)으로 만든 연엽잔(蓮葉盞)과 옥배(玉杯) 및 산해의 진미(珍味)를 주고 총애의 뜻을 표시하였다. 겨울 10월 정묘일에 황제가 왕에게 신년 축하를 위하여 입조하라고 명령하였다. 임신일에 도지휘사들을 각 방면에 보내었는바, 송분을 경상도에, 한희유를 동북면에, 김지숙(金之淑)을 서북면에 각각 파견하였다. 11월 무오일에 왕이 안남(安南)에서 사냥하였다. 경신일에 지밀직사사 나유를 원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하였다. 12월 기묘일에 상장군 유비, 장군 허평(許評)을 원나라에 보내 세자를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을유일에 박의(朴義)를 우부승지로, 이혼(李混)을 좌부승지로 임명하였는바 무릇 관직 명칭에 좌(左), 우(右)가 있는 것은 우(右)가 붙은 것이 높은 것으로 정하였다. 계사일에 쌀 6천 9백 64석을 백은(은) 1백 11근, 은병 57개(口), 모시 1천 4백 50필과 바꾸었고 또 영송고(迎送庫)와 대부(大府)의 흰 모시를 각각 1백 50필씩 출고하여 왕의 여비에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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