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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성(唐城) 원문보기 글쓴이: 현산(顯山)
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홍(洪)씨는 이조에 정승 15명, 대사헌 7명, 공신 17명, 왕비 2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여 조선 10대 벌족으로 뽑혔다. 문헌에는 10여본이 나와 있지만 현존하는 본은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4본 뿐이다. 이중 단연 으뜸가는 본이 남양홍씨다. 그런데 남양홍씨 가운데는 전연 계통을 달리하는 두 집이 있다. 당홍(唐洪)과 사홍(士洪)이 바로 그 것. 당홍은 고려 초기의 인물인 홍은열(洪殷悅, 三重大匡太師, 그의 선조가 당나라로부터 문화 사절의 임무를 띄고 왔다고 함)을 시조로 하고 있는 반면, 사홍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홍천하(洪天河)는 중국 강남 휘주 사람으로 당나라의 태학사였다. 그는 640년 고구려 제28대 영류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유학을 가르칠 학사의 파송을 요청하자 제일 먼저 선발되어 우리나라에 입국, 평양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은수포 당관으로 옮겨 문화를 진흥시키니 왕은 그가 사는 곳을 당성이라 하고 이에 사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 태사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중시조 1세로 하고, 본관은 당성이 고려시대에 남양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남양으로 하였으며 같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인 홍선행(洪先幸)계와 구분하기 위해 <당홍(唐洪)>이라 통칭하고 있다.
당홍의 파계는 시조의 12대손에서 14개 파, 그 윗대에서 3개 파로 도합 17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벼슬 열력이 뛰어나고 후손의 수가 많은 파는 아래와 같다.
남양군<주>파(南陽君<澍>派)
문정공<언박>파(文正公<彦博>派)
판중추공<언수>파(判中樞公<彦修>派)
익산군<운수>파(益山君<云遂>派)
예사공<복>파(禮史公< >派)
중랑공<후>파(中郞公<厚>派)
당홍(唐洪)은 조선조에서 상신 8명, 대제학2명, 왕비 1명, 호당 7명, 청백리 3명, 문과 급제자 206명, 그리고 공신 10여 명을 배출했으며 그중 종파인 남양군파가 주류를 이루어 상신 5명과 대제학2명, 왕비1명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판서급을 배출, 열력이 단연 으뜸이다.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은 천민(天民), 일민(逸民), 성민 (聖民)형제를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셋째 졸옹공파(拙翁公派)에서만 상신 4명이 나왔다.
백파인 율정공파(栗亭公派)에서 천민의 아들 문정공(文靖公) 홍서봉(洪瑞鳳)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 자신과 아버지 천민, 조부 춘경이 모두 호당에 뽑혀 3대 호당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파인 연기공파(燕岐公派)에서는 일민의 손자 해봉(海峰) 홍명원(洪命元)이
인조때 관찰사를 지내고 당대의 시문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또 명신으로서 <장덕군자>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의 다섯 아들인 처후(處厚),
처심(處深), 처윤(處尹), 처대(處大), 처구(處久)가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맏아들 처후의 자손이 가장 번창했다. 경종 때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과 맞섰던 충간공(忠簡公) 홍계적(洪啓迪)은 처후의 증손이요,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나오는
<도둑이 들어왔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 것을 보고 엽전꾸럼미를 두고 갔더니 방문을 붙여 되돌려 주었다.
>는 일화의
주인공 홍기섭(洪耆燮)은 계적의 증손이며, 헌종의 국구로 여영대장을 지낸 익헌공(翼獻公) 홍재룡(洪在龍)은 기섭의 아들이다.
졸옹공파에서는 졸옹 홍성민이 선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그의 손자
문간공(文簡公)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명하의 형 명구(命耉)의 아들인 충익공(忠翼公) 홍중보(洪重普)는
현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중보의 아들 효간공(孝簡公) 흥득기(洪得箕)는 효종의 부마가 되었고,손자인 충간공(忠簡公) 홍치중(洪致中)
영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고종때 수구 강경파의 거두로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洪淳穆)은 치중의 7대손으로 아들 영식(英植)이 개화당 간부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만에 실패하고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자 자결했으며, 영식의 형 홍만식(洪萬植)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음독
자결했다.
이밖의 남양군파 인물로는 중종반정 공신인 홍경림(洪景霖), 홍경주(洪景舟) 형제가 있다. 문정공파에서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안무공(安武公) 홍달손(洪達孫)이 나왔고, 판밀직공파에서는 청백리 홍계방(洪桂芳),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에서는 태조의 부마 홍해(洪海)와 단종조의 정난공신 홍순로(洪純老)가 나왔다. 익산군파(益山君派)에서 성조조에 좌의정에 오른 충정공(忠貞公) 홍응(洪應)과 성종의 아버지로 추존된 덕종의 부마인 소양공(昭襄公) 홍상(洪常)등이 나왔다.
예사공파에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홍효손(洪孝孫), 선조조의 호성공신 홍진(洪進), 그리고 헌종 때 대사헌을 지내고 유학자로 이름높은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등이 나왔다.
중랑공파에서는 조선 개국공신 문경공(文景公) 홍길민(洪吉旼)과 그의 아들로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문량공(文良公) 홍여방(洪汝方) 등을 배출했다.
이밖에도 경력공파에서는 위평공(威平公) 홍윤성(洪允成)이 나왔다. 그는 문종즉위년에 문과에 급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예종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고려 고종때 인물로 금오위 별장을 지냈다. 그는 당성(지금의 남양)에 토착한 호족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선대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조상의 세거진인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남양에는 당나라의 귀화족인 홍천하(洪天河)계의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있어 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홍선행계의 홍씨를 <토홍(土洪)>으로 통칭하고 있다. 토홍의 세계는 시조 홍선행의 9대손에서 12대손 사이의 5개 종파로 구별된다.
문희공<언필>파(文僖公<彦弼>派)
정효공<담>파(貞孝公<曇>派)
참의공<한>파(參議公<澣>派)
주부공<귀호>파(主溥公<貴湖>派)
대호군공<귀연>파(大護軍公<貴演>派)>
사홍은 조선조에서 상신 2명, 대제학1명, 청백리3명, 부마1명, 공신 3명, 그리고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했는데 각파별 열력은 다음과 같다.
문희공파에서는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은 승지 홍형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로 지도에 유배,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 저작·지평 등을 지냈다. 사가독서한 후 우부승지가 되었고, 기묘사화로 투옥,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나왔다. 1526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여섯 번 대사헌을 역임, 이어 이조·호조·형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다시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 1544년 영의정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류관(柳灌)과 함께 원상이 되어 시정을 처결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545년(명종즉위) 위사공신2등으로 익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548년(명종3) 다시 좌의정·영의정에 올라 궤장을 하사받았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경헌공(景憲公) 홍섬(洪暹)은 영의정 홍언필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23)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홍양에 유배, 석방된 후 사찬, 부제학,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7) 에 청백리에 녹선, 그후에 좌찬성,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했다.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삭직, 다시 편의금부사로 복직하여 양관 대제학, 예조판서룰 지내고, 선조 즉위 원상으로 서정을 처결, 우의정이 되었고,1571년 좌의정, 1573년에 궤장을 하사받고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 157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홍섬의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중종 때의 영의정 송질(宋帙)의 딸이어서 외조부와 부자가 모두 영의정에 오른 집안으로 유명하다.
정효공파에서는 언광(彦光)의 아들인 정효공(貞孝公) 홍담(洪曇)이 훈구파의 거두로서 선조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정효공의 손자 희(熹)의 아들 충목공(忠穆公) 홍진도(洪振道)와 충정공(忠靖公) 홍진문(洪振文) 형제는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외손자요, 인조와는 이종간으로 둘다 인조때 반정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진도의 5대손 정간공 홍억(洪檍)은 정조 때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참의공파에서는 이조참의 홍한(洪瀚)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화를 당했고,
그의 증순 문장공(文莊公) 홍가신(洪可臣)은 광해군 때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에도 뛰어났다. 가신의 손자
문간공(文簡公) 홍우원(洪宇遠)은 남인의 중진으로 숙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홍우량(洪宇亮)은 효종때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莊僖公) 홍숙(洪淑)이 중종때 형조판서로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숙청에 간여한 후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홍려(洪礪)는 중종의 부마이고, 병자호란 때 척화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은 진서 홍이성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2) 공주행재 정시문과에 장원, 사서가 되었고, 1635년에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굴욕적인 요청을 하므로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친을 주장하므로 극력 반대하다가 평양서윤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척화신으로 몰려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심양에 압송되어 1637년(인조15) 3월 15일에 순절하였다. 1653년(효종4)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86년(숙종12) 에 이조판서에 가증되고,정려를 명했으며, 1757년(영조33)에 의리장과 부조묘를 명했으며, 청나라 태종은 그 충렬에 감복하여 삼한태두라는 비석을 건립하였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이밖의 인물로는 실학자로 혁신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했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있다. 그는 목사 홍력의 아들이다. 당시 유학자들과는 달리 군국, 경제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였고, 숙부를 따라 청나랑에 가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경의, 성리, 역사, 풍속등에 대하여 토론 했으며, 천주당에 가서 서양문물을 견학하고 독일인 흠천감정 할레르슈타인, 부감 고가이슬과 면담, 관상대를 견학하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귀국 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1775년 음보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이어 세손익위사 시직, 감찰, 태인현감, 영주군수에 이르렀다. 종래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기화설을 주장한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하고, 경제정책에 있어서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국민생활의 보장과 국방의 기반을 견고히 하며, 계급의 타파, 인재의 등용, 학제개혁, 관제개혁, 민권옹호 등 혁신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했다. 천주교를 배척하고 주자학,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음악가로 <봉선화>의 작곡가인 홍난파(洪蘭坡)가 있다.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치고 동소교사가 되었다. 1918년 도교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업, 귀국후 <봉선화>를 작곡하였고, 1922년 연악회를 창설,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한편 음악잡지《음악계(音樂界)》르 발간했으며, 그 동안 소설《처녀혼(處女魂)》·《향일초(向日草)》·《폭풍우 지난 뒤》 등을 발표,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7년 도교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2년 뒤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내고 이해 도미, 셔우드음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1933년 귀국,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서양음악을 보급했다. 작품으로는 <봉선화> <옛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다.
첫댓글 궁금합니다.당나라학사공이왜?평양에먼져갔데요?그러함의고증은무었입니까?어느옛날고증록에 학사공이선발대로먼저오셔서평양에잠시머물렷다고기록되어있읍니까?분명히밝혀주셨으면합니다
당태종의치세법과일대기 비슷한,정관정요에보면몇구절씩태자승건의난과그에따라서 학사공이요동으로은거하신상황이,한두곳나옵니다,그보다 당나라역사서,구당서 를 읽으시면자세한기록을알수있답니다.자료의출처를찾아갔더니,남평이나오던데요,아마남평종중실무자의착오거나,잘몰라서그랬을수도.....
잘알지는못합니다만,정확하지않은,자료는 시간이지나면,옳은기록을바꾸는 괴력이있답니다
세상에어느사절단의단장이선발대로간답니까? 정확한고증기록도없이남의집안자료를.잘못전달하면안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