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발음은 "기브리" 또는 "기블리"이지만, 미야자키의 실수로 "지브리"로 되었다고 하네요..
- 지브리의 출발-
지브리의 출발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소속사인 텔레콤에서 신인을 양성하는 일과 몇편의 작품에서 부분적인 활동을 하면서
휴식기간을 가졌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2년부터 출판사 토쿠마쇼텐에서 발간하는 월간 [아니메쥬]에 신작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편집자들과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쳐서 처음부터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연재시 이색적인 소재와 독특한 그림 스타일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당시 미야자키라는 이름은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았고 토쿠마쇼텐은 에니메이션에 대해서 어떠한 노하우도, 작업할 스튜디오도 없었다.
또한 작업을 지휘할 감독인 미야자키는 있었지만 그를 충분히 뒷받침해 작업할 스텝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톱크래프트의 하라 토오루와 스즈키 토시오,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등을 메인 스텝으로 하여
"대외 지향적으로 에니메이션을 발전시키자"는 장가적인 안목을 갖고 만들어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내용면으로나 흥행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나우시카]의 성공후 [천공의 성 라퓨타]의 기획이 한창이던 1985년 토쿠마쇼텐이 중심이되어 마침내 멘처 성격(자본금 500만엔)을 지닌
에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설립된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양 감독체제를 구성하여 극장용 위주로
에니메이션을 만들어 가게 된다.
-지브리의 발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이어 86년에 발표한 [청공의성 라퓨타]도 일본내에서 8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고 높이 평가를 받는다.
또한 1988년에 [이웃의 토토로], [반딧불의 무덤]을 미야자키와 타카하타가 감독을 맡아 제작하게 된다. 스즈키 토시오의 제안으로
추진된 이 계획은 당시 지브리의 상황으로는 큰 모험이었다. 이 두 작품은 영화 비수기인 4월에 개봉되어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작품성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웃의 토토로]는 그해 실사 영화를 합쳐 일본내 모든 상을 휩쓸었고 [반디불의 무덤] 역시
문예 영화로서 큰 호평을 받게 된다.
지브리가 흥행면에서 처음으로 대성공을 거둔 것은 89년에 만든 [마녀의 특급배달]에서였다. 1차 배급에서만 25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여 그해 일본 방화 흥행 1위라는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후 미야자키는 '스텝의 사원화, 고정급 제도의 도입과
신인 정기 채용,육성'의 2가지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1991년에 개봉된 타카하타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은 흥행관계자들의 불안과는
달리 그해 일본 영화 중 최고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2배 임금 지급과 신인 채용이라는 미야자키의 소망이 이뤄진다.
91년 [붉은 돼지]의 개봉 직후 지브리는 미야자키 본인이 스스로 구상한 스튜디오의 설계대로 도쿄 부근의 코가네이시에 지어 놓은
새 건물로 이사하게 된다. 93년 지브리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2대의 대형 촬영기를 도입하여 촬영부를 신설, 분업화를 이루어 작품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같은해 지브리는 처음으로 TV용 장편 에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를 제작한다. 당시 20-30대의 젊은 스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이 작품은 '신속, 저렴, 양질'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70분 짜리 TV스페셜 판으로 제작되어 예산을 크게 초과하여
지브리에게 적지않은 부담으로 남게된다. 그러나 지브리의 장편 히트는 계속 이어진다.
94년 타카하타 감독의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코코]가 디즈니의 [라이온 킹]을 누르고 흥행 1위를 하여 일본영화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1995년 지브리는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을 주로 담당했던 콘도 요시후미가 감독한 [귀를 기울이면]을 제작 공개한다.
미야자키는 그해 프로듀서, 각본, 콘티를 맡아 일하는 것과 동시에 단편인[On Your Mark]를 감독한다. 이와함께 [원령공주]의 제작에도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그후 3년이라는 긴 세월을 걸쳐 만들어진 미야자키 감독의 [원령공주]가 97년 여름 개봉되어 [잃어버린 세계]를
누르고 개봉 두달만에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하는 대열풍을 일으키며 연말까지 장기 상영하게 된다.
-지브리의 특징-
지브리가 타제작사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작가중심'으로 제작과 운영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웃의 토토로]라는 작품을
미야자키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지브리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지브리라는 제작사보다
미야자키라는 작가가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로 외부하청을 주지 않고 제작의 중심이 되어 감독의 역량이 다른 제작사들보다
매우 크고 강하게 작용하는 '작가 중심 체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작가 주의는 지브리의 모든 애니메이터들을 일하는 노동자가
아닌 한 명의 장인으로 대접하게 만든다.
95년 기준으로 지브리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작화 46명, 채색 8명, 미술 12명, 촬영 4명, 연출 및 제작 12명, 출판 및 상품 개발 부문 5명,
사무 관리 및 기타 12명으로 모두 합해 99명이다. 전체 직원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작가 주의의 소산으로
재능 있는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신중을 기하기 때문이다.
-지브리의 미래-
1996년 7월 지브리는 디즈니와의 배급 및 업무 제휴를 맺으면서 전세계 애니메이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서양을 대표하는 디즈니와
동양을 대표하는 지브리의 협력은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거대한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대사건으로 배급망이 취약한 지브리로서는 최강의
디즈니 배급망을 타고 전세계에 자신들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97년에는 토쿠마 그룹이 지브리를 포함한 3개의 자회사를 합병하였다. 출판위주에서 음반, 게임, 영상 등 멀티미디어 지향으로 사업 방향을
바꾼다는 계획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함께 디지탈 위성 방송인 디렉 TV는 이런 토쿠마 그룹에게 경영 참여를 요청, 받아들여졌다.
"작품 제일주의만이 우리의 살길이다"라는 미야자키의 구호아래 좋은 작품 만들기에 힘쓴지 어언 15년이 지난 현재 지브리의 미래는 한동안
밝으리라 기대된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4대 인물>
미야자키 하야오 (MIYAZAKI HAYAO - 宮崎 駿)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1월 5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비행기 회사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했으나 단지 테크닉만을 배우기 위해 미술학교에 진학하긴 싫었던 그는
학습원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일본산업론을 전공했다.
미야자키는 대학 재학시절 만화에 뜻을 두고 만화연재를 시작했는데, 그것을 실은 매체 는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 였고,
<사막의 백성>이라는 제목의 SF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시킨 만화였다.
63년 대학 졸업 후에는 도에이 동화에 입사해 애니메이터가 되는데, 입사이유는 "미제국주의 디즈니에 대항하는 애니메이션을 일본에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연수를 마친 후부터 <멍멍이 충신장>, <걸리버의 우주여행> 등의 작품에서 동화를 담당했다. 이 즈음 소련의 장편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보게 되고 자신의 길에 확신을 얻는다. 그곳에서 미야자끼는 주도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서기장이 되었고
당시 부위원 장이었던 다카하타 이사오를 만나는데, 이후 둘은 평생 창작의 동지로서 함께 하게 된다.
그 시절 미야자키는 사상과 철학, 사회주의 등에 식견이 깊은 다카하타의 영향을 받으며, 다카하타가 감독을 맡게 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라는 장편 만화영화의 제작에 메인 스텝으로 참여하여 당시 상업 만화영화로서는 획기적인 여러 실험들을 한다. 그러나 너무 왕성했던
열정과 회사와의 마찰로 인해 제작이 지연되었고, 결국 흥행에서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기존의 만화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인간 내면 심리의 묘사, 군중 드라마, 일반 민중의 생활상의 자세한 묘사 등이 훌륭했으며, 나중의 '지브리' 작품들의
원형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부터 미야자키 만화 영화들을 관통하는 이상주의적 주제, 사실적 표현기법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권력과 폭력에
대항한 이상적 사회건설의 희망을 읽을 수 있다.
1971년에 다카하타와 함께 A프로덕션으로 이적한 후인 1978년에 TV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을 통해 연출자로 데뷔를 하였으며,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연출 데뷔는 그로부터 1년 후인 79년에 <루팡 3세 : 카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이루어진다. 미일 합작 애니메이션 <리틀 니모>의
연출을 포기하고 매달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하였다. 같은 해 도쿠마 서점의
도움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다.
'스튜디오 지브리'를 통해 다카하타 등과 함께 작업한 여러 편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작품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주제와 형식을 통해 저패니메이션의 한 축이 되었고, 이 때부터 만들어진 미야자끼의 장편 만화영화들은
높은 완성도와 깊은 주제의식으로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을 사로잡게 된다.
86년 <천공의 성 라퓨타>, 88년 <이웃의 토토로>, 89년 <마녀 우편배달부>, 92년 <빨간 돼지> 등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이래 그의 작품들에도
역시 과거 그가 관여했던 경험들이 관통하고 있으며, 사실적 표현기법을 통해 이상주의적 주제를 현실화시켜내는 그의 작업은 완숙함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의 장편 영화들을 감독하는 사이사이에 다카하타 감독의 87년 <문화기록영화 야나기가와 운하 이야기>의 제작, 91 년 <추억은 방울방울>
의 제작프로듀서, 94년 <헤이세이 너구리 대작전>의 기획을 담당하기도 했다. 92년 지브리의 신사옥을 도꾜에 준공한 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아니마쥬' 연재를 10년 만에 종료했다. 95년 오랫동안 자신의 작화 감독으로 일해온 콘도 요시후미를
<귀를 기울이면>을 통해 감독 데뷔시켰다.
미야자키는 <원령공주>를 97년 여름에 개봉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미야자키의 건재함을 다시 과시했다.
타카하타 이사오 ( TAKAHATA ISAO )
미야자키 하야오를 말할 때면 언제나 꼭 따라다니는 이름이 있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그 주인공으로 미야자키의 유명세와 화려한 작품성으로
왠지 뒤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 그는 세계 애니메이션계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해내는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이전까지 상업 애니메이션의 주변에서만 맴돌던 '일본'이라는 요소를 작품 속으로 끌어 들여 일본인의 시각에서 진정한 일본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노력은 그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에게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엄마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등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명작 만화영화 시리즈로 알려져 있는
타카하타는 애니메이터형이 아닌 연출가형감독이다.
타카하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인간의 일상'이다. 일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작품의 메시지도 일상의
표현에서 나온다. 그의 모든 영화적 관점이 일상에서 출발하고 일상에서 끝을 맺는다. 타카하타는 이 일상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하여 배경을
치밀하게그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마치 정밀 사진을 옮겨 놓은 듯한 배경 묘사는 나뭇잎의 음영, 작은 돌뿌리, 빗물 위의 그림자 등 일반 작품에
서는 놓쳐버리는 미세한 부분까지 보여 준다. SF적 요소와 가상적 리얼리티를 절묘하게 엮은 것으로 유명한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타카하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여 타카하타의 사실주의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를 새삼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콘도 요시후미 (KONDO YOSHIFUMI , 1950 - 1988)
콘도 요시후미는 지브리의 차기 대표주자로서 <귀를 기울이면> 에서 작품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원인 불명의
동맥파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원령 공주>제작 후 감독으로서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느끼고 현역에서 은퇴할 뜻을 내비쳤던 미야자키는 콘도라는 믿을 만한 후배에게
지브리를 맡기고 1998년 1월에 퇴사했었다. 그러던 그에게 콘도이 죽음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은퇴 번복이라는 해프닝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콘도는 미야자키와 타카하타를 이어 지브리를 이끌어 갈 지브리의 희망이었던 사람이었다.
히사이시 죠 ( HISAISHI JOE )
미야자키 작품이 완성도를 최고조에 달하게 해주는 일등공신인 천재음악가.
모든 미야자키 작품들이 음악을 전담 작곡해 오고 있는 그는 고전적 클래식에서 현대 감각이 테크노 뮤직에 이르기까지 범위와 다양성에서
탁월한 음악 세계를 구현하며 매순간 작품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다.
히사이시 죠가 미야자키의 1984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음악을 담당하게 된 건 대부분의 미야자키 작품의 음악적 연출을 맡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