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루카치를 얼마만큼 '통과'하고 있을까.
루카치, 그람시, 사르트르의 공통점은 아마 당시의 현실사회주의 소련이나 공산당 그룹과의 애매한 관계유지일 것입니다. 여기서 확실히 문제가
되는 인물은 루카치입니다. 언젠가 읽은 리처드 세네트의 소설 <겁없이
울어댄 개구리>의 주인공의 모델은 루카치인데, 여기서 루카치는 고독하고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는 동성애자로 나오지만, 그 자신은 그 사실을
극도로 숨기고 자신의 동성애의 욕망을 민중에 대한 욕망으로 승화시킵니다(그렇지만 여전히 그는 동성애자이며 여성과 결혼도 합니다). 확실히
공식적인 공산당 그룹,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에서 체험한 루카치의 고뇌
혹은 상처는 너무 골이 깊고 핵심적이어서 그를 교조주의자라고 비판하던
아도르노, 그의 정치적 입장의 모호성을 언제나 문제삼던 브레히트 사이에서 그는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그의 고뇌와 상처는 일종의 원장면(프로이트)이 되어 루카치라는 상징은 사르트르에서 알튀세르(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의 삶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저질러지는 오류와 실수라는 나쁜 반복의 원천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당과 공동체의 공식적인 실천에 내재한 전체화의 이데올로기라는 위험성의 내/외부에서 애매한 입장을 자처할
수 밖에 없었던 좌파적 인물의 상징이자, 상처이죠. 그런 그를 비난하고
저버리기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벤야민을 좌절하게 만들었던 독소조약(1939) 이후에도 루카치는 여타의 공산주의자처럼 소련을 지지했죠. 님의
말씀을 빌면 "그는 공산주의가 당시의 유럽 전체를 집어삼키려했던 파시스트 체제보다는 적어도 나은, 혹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당한
체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정확히 반영합니다 : '2차세계 대전이라는 제국주의의 전쟁에서 소련의 사회주의를 거부한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이유로 최선의 민주주의를 실천한다고 보았던 미국에 희망을 걸었다.' 파시즘이냐, 민주주의냐 사이의 기로에서 그들은 당연히 파시즘을 악으로 규정하고 손쉽게 미국에 손을 들었고, 전후의 한나 아렌트처럼 미국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전통에서 유토피아를 찾을 수도 있었겠죠(여기엔 사회주의에 대한 연합전선이라는 고려가 숨어있지만, 이 동맹관계는 곧 깨질 그릇이었죠). 좋습니다. 이렇게 2차대전 그리고 그 후의 지식인들에겐 소련과 미국은 각각
서로에 대해 자기 반영적 관계의 모델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루카치의 입장과 한나 아렌트의 입장은 또한 체제
내에서의 반영 모델로 결국 같은 기능을 맡는 것으로 수렴됩니다. 요컨대, 님께서 말한 문장["그는 공산주의가 당시의 유럽 전체를 집어삼키려했던 파시스트 체제보다는 적어도 나은, 혹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당한 체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은 소련과 공식적인 당과의 애매한
관계를 맺은 루카치의 독특한 입장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즉, 좌파 맑시스트로서의 루카치의 입장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어집니다. 그래서 님의
이야기는 루카치, 사르트르, 알튀세(그는 68혁명 당시 프랑스 공산당 수뇌였지만, 이 혁명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죠. 그때부터 그의 불운한 내리막길의 삶이 시작됩니다)가 가진 실존적(정치적) 입장의 불투명성과 애매성(그 자체로 역사의 구성이자 산물인)에 대한 고려를 뒤로 한 채 다음과
같은 희생자 이야기로 불쑥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더 나아.' 저를 거북하게하는 것은 저 '그래도'와
'결국은'이라는 두 마디에 깔려죽는, 아니 죽었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채 사라져가는, 사라져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의문입니다.
대단히 휴머니즘적이고(비난의 의미는 없습니다) 또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을 법한 이 질문에 대한 저의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더 나아'라는 말에 이어 곧 침묵으로 스러져간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다름아닌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나오는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더 나아'라는 중얼거림
자체는 루카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식사회주의와 당의 실천을 맹목으로 신뢰하는 스탈린주의자들도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요('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더 나아'라는 말은 처칠처럼 '민주주의는 현존하는 최악의 정치체제이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정치체제가
없기 때문에 그래도 최선으로 나은 정치체제이다'라는 말에 정확히 대응합니다)? 문제는 희생양의 얘기입니다. 루카치든 사르트르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100명이 죽는 것보다는 10명이 죽는 것이 더 낫다." 희생자의 담론은 바로 사르트르나 루카치와 같은 좌파를 곤혹스럽게
만든 질문으로 적절하게 제기할 만 합니다(말 그대로 우리가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요?). 그러나 희생자의 담론은 그것이 제기되자마자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올가미의 구조를 상대방에게 덮어씌우는 마력적인 힘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왜 우린 100명이냐, 10명이냐와 같은 질문과 전제를 가정해야만 하는지요? 자유주의자들은 보통 질문이 아니라
대답(언제나 주어져 있는 대답)이 폭력적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런 질문(100명이냐, 10명이냐)자체가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매우 근본적으로 보이더라도 사실은 전혀 근본적인
담론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 질문에서, 이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윤리학이나 단독성(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소중히하는)의
입장을 세운다는 것은 인간을 궁지에 몰게 해놓고 결국 그를 초라하게 만든 다음에야 세워지는 조금은 저열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루카치와 사르트르가 희생양 담론과 같은 구속의 상황에서 자유로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님의 질문이 그렇듯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님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문장["그가 '물은' 것은 정말 우리는 언제나 10명을 죽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양자택일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가라는, 결국 우리는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거기에서만, 그렇게 절대절명의 순간속에서 만들어내는 '비'인간적인, '비'역사적인 해결책, 아니
'질문'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토록 인간을 궁지와 초라한 처지로 몰아넣은 다음 푸코와 들뢰즈가 정말 그렇게 질문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그리고 그들이 과연 역사의 무게를 얼마만큼 훨훨 털어버렸는지도 의문입니다. 아래 문장은 전적으로 님의 생각(하이데거를 모방한)인
듯 합니다.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지라르가 냉소적으로 딛고 서있던 '인간'의 지반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10명을 죽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유혹'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생각' 하려면, 정말 '생각'할 수 있으려면 죽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죽음과, 단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끔찍한' 생각입니다.
일견 아찔하고도 혹하게 들리지만, 위의 하이데거적 어조(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고 본)는 매우 허무주의적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들뢰즈가 참조한 스피노자와 로렌스의 넘침, 과잉, 혹은 잉여의 삶이란 제가 인용한 님의 문장으로부터 사실은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 것입니까. 달리
말해, 인간이 그런 근거-없음에 처한 다음 무엇을 만들어낼까 하는 궁핍한 처지에서 출발하는 윤리학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일까요. 그것은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끔찍한 생각"이 아니라, 물에 빠진 채 지푸라기를 잡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다시 루카치(사르트르)로 돌아와 말해보자면, 우리는 그 원초적인 상처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지 의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루카치를 "통과pass"했을까요? 혹, 우리가 그
상처와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즉 루카치나 사르트르의 오류나 상처에 어떠한 부담도 느끼지 않고 있다면, 희생양 담론에 대한 강박을 굳이 떠맡은 다음, 거기서 윤리학을 정초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님께서는 푸코와 들뢰즈가 자신들의 선배로부터 급격하게 단절한 것처럼 언급하시다가 희생양 담론 혹은 롤즈식의 분배적 선택(?)을 끌여들어 다시 푸코/들뢰즈를 이들 선배와 연속선상에서 존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사일까요?
오래 전 마이클 라이언의 <해체론과 마르크스주의>를 읽으면서 레닌을 탈구조주의적 독해를 통해 비판하는 내용을 주목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레이건 시대(1982)에 나온 이 책에서 라이언은 분명 마르크스와 데리다를
훌륭한 솜씨로 근접시키지만, 레닌은 거의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잘 해봤자, 전위당을 통해 계획적 사회주의를 만든 창시자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미국에서 레닌주의란 별로 억압된 적도 없었을 텐데, 즉 거의 존재한 적도 없는데, 왜 이토록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인가. 저는 레닌주의를 숙고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레닌은 마르크스를
독해하기 위한 하나의 걸림돌에 불과한 것일까요? 레닌을 통해 만들어 낸
역사에 대한 부담감이 거의 없는 미국인 라이언의 레닌 비판은 죽은 개를
다시 한 번 걷어차는 격이 아닐까요? 그 전에 우린 얼마나 레닌을 "통과"하고 있을까, 하고 물음을 던져봅니다. 라이언은 가볍게 공기중에 떠서 해체론과 마르크스 원전을 자유자재로 접합시키고 있지만, 이때 마르크스주의와 그에 따른 역사는 그야말로 허공에 뜨고 맙니다. 자주 인용되는 마르크스의 말이지만, "역사가 우리의 머리를 악몽처럼 짓누른다"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숙고했을까요? 그 폭과 넓이를 어떻게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2. Wo Es war, soll Ich werden
우선 제 글을 꼼꼼히 읽고 좋은 답변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그러나 제 글에 대한 님의 반론을 읽어보고 난 다음, 사실은 어떤
답변을 올려야할지 조금은 망설여졌습니다. 분량이 많은 글이었지만, 많은 부분은 님께서 옮겨놓은 제 문장으로 채워졌고 또 제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님의 생각을 개진하는 데에 많은 부분이 제 글에 대한 님의 반론에 할애되었기 때문입니다. 님의 글만으로는 아직 제 견해에 대한 님의
비판적인 생각이 그리 명확하게 제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느낌을
저에게 주었으니까요(그러나 이는 어쩌면 당연합니다. 님의 글은 제 글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일종의 서설이니까요. 그렇지만 곧 나올 님의 글은
그런 제 의구심을 말끔하게 씻어주시겠죠). 그래서 단지 몇 가지 오해를
낳은 각자의 견해에 대한 지적을 좀더 분명히 하는 것으로 이어질 제 글의 범위를 한정지을까 합니다.
님의 견해와 제 견해가 약간의 오해를 둘러싸고 만나는 곳은 바로 님의
아래 진술에 대한 제 반박, 그리고 이어지는 님의 진술입니다. 순서대로
인용한 다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님의 문장입니다 : 예를 들어 푸꼬는 좌파에 대한 거부를 라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론가와 나눈 대담에서 가장 극명하게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좌파의 문제제기가 언제나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00명이 죽느냐 10명이 죽느냐라는 절대절명의 '자명한' 문제 앞에서 '나는 여자와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아달라'는 호소는 분명히 상황파악을 못한
비역사적인,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역사(a-history),
이 시대착오(anachronistic)이 바로 그가 얘기하려던 것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은, 위의 대담자를 포함해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나
'자명한' 문제를 갖게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오해했듯이 모든 체제가 똑같이 나쁘다고 얘기하려던 것이 아니며, 100명을 죽이자고 얘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물은' 것은 정말 우리는 언제나 10명을 죽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양자택일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가라는,
결국 우리는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거기에서만, 그렇게 절대절명의 순간속에서 만들어내는 '비'인간적인, '비'역사적인 해결책, 아니 '질문'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않다라는 하이데거의 문장이 가끔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그가 모든 진정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죽음을 통과한 자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지라르가 냉소적으로 딛고 서있던 '인간'의 지반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10명을 죽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유혹'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생각' 하려면, 정말 '생각'할 수 있으려면 죽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죽음과, 단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끔찍한' 생각입니다.
2) 위의 생각을 비판한 제 문장입니다 : 문제는 희생양의 얘기입니다. 루카치든 사르트르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100명이 죽는 것보다는 10명이 죽는 것이 더 낫다." 희생자의 담론은 바로 사르트르나 루카치와 같은 좌파를 곤혹스럽게 만든 질문으로 적절하게 제기할 만 합니다(말 그대로 우리가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요?). 그러나 희생자의 담론은 그것이 제기되자마자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올가미의 구조를 상대방에게 덮어씌우는 마력적인 힘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왜 우린 100명이냐, 10명이냐와 같은 질문과 전제를 가정해야만 하는지요? 자유주의자들은 보통 질문이 아니라 대답(언제나 주어져 있는 대답)이 폭력적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런 질문(100명이냐, 10명이냐)자체가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매우 근본적으로 보이더라도 사실은 전혀 근본적인 담론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 질문에서, 이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윤리학이나 단독성(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소중히하는)의 입장을 세운다는 것은 인간을 궁지에 몰게 해놓고 결국 그를 초라하게 만든 다음에야 세워지는 조금은 저열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루카치와 사르트르가 희생양 담론과
같은 구속의 상황에서 자유로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님의 질문이 그렇듯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님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문장["그가 '물은' 것은 정말 우리는 언제나 10명을 죽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양자택일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가라는, 결국 우리는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거기에서만, 그렇게 절대절명의 순간속에서 만들어내는 '비'인간적인, '비'역사적인 해결책, 아니 '질문'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토록 인간을 궁지와 초라한 처지로 몰아넣은 다음 푸코와 들뢰즈가 정말 그렇게
질문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그리고 그들이 과연 역사의
무게를 얼마만큼 훨훨 털어버렸는지도 의문입니다.
3) 다시 님의 문장입니다. 제 글 2)에 대한 님의 반론입니다 :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정말 말문이 막히더군요. 폭력적이라고, 저열하다는 '가치판단'도 분명히 제 것이었고, 그것이 결국 지라르의 이론이라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쿤데라님의 경우야 제 글 속에 사용된 "중간"이라는 말이 핑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해드렸지만, 이 경우는 아무리 다시 제 글을 읽어봐도 왜 이런 '송장치고 살인내는' 끔찍하고 억울한 해석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군요. 특히 쌍수대인님처럼 글의 결을 읽어내는 데에 익숙하신 분께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께서 서슴없이 쓰신 "저열하다"는 표현이 만약 글을 넘어 저 개인을 표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저는 그렇게 읽었고 그런 소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해가 개입된 문장 전문을 순서대로 다시 옮겨와 봤습니다. 2)에서 "100명이냐 10명이냐"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님께서는 지라르를 언급하면서 그를 비판한 것이라고 보셨고 저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이
부분 2)를 님은 님에 대한 제 비판이라고 보았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에서 제가 비판(거부)한 것은 님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한 지라르 식의 양자택일적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님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여기에서 님에 대한 제 비판이
굳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왜 이 양자택일식의 물음이 어떻게 푸코가 제기한 것처럼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님의 해석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제 비판은 푸코에 대한 비판과도
무관하게 됩니다). 전후 문맥을 다시 고려해보고 판단하건대, 제가 "송장치고 살인내나는 끔찍하고 억울한 해석"을 한 혐의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1)에서부터 다시 검토해보면 '그'라고 지칭되는 사람은 푸코입니다.
그러나 제가 2)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정말 푸코(와 들뢰즈)가 과연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지라르가 냉소적으로 딛고 서 있던 '인간'의 지반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님의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사유를 제공했느냐는 것입니다. 계속
반복해보겠습니다. 님의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가 모든 진정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죽음을 통과한 자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지라르가
냉소적으로 딛고 서있던 '인간'의 지반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삼인칭 대명사 그=푸코를 언급한 문장의 다음 문장, 즉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지라르가 냉소적으로 딛고 서있던 '인간'의 지반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는 제 판단으론 푸코가 아니라 님의 견해를 서술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푸코와는 무관하게 방금 인용한 문장이 전적으로(문맥상으로 보나, 그 의도로 보나) 님의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입니다. "이것이 또한 그가 모든 진정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죽음을 통과한 자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를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지라르가
냉소적으로 딛고 서있던 '인간'의 지반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10명을 죽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유혹'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생각' 하려면, 정말 '생각'할 수 있으려면 죽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죽음과, 단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끔찍한' 생각입니다." 사실 이 문장은 마지막에 가서 "이들의 '끔찍한' 생각입니다"로 끝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님의 의견에 따르면, 이들은 푸코와 들뢰즈가 아니라,
지라르와 형이상학일 것입니다. 그래서 님이 이들의 생각이 "끔찍하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인용한 이 문장 전체는, 제가 아둔한 탓인지도 모르지만, 일종의 자유간접화법으로 보여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님의
생각이고 "이들의" 생각인지 분명하게 나누어지질 않습니다. "그가 모든
진정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죽음을 통과한 자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라는 문장과 "그러나 정말 '생각' 하려면, 정말 '생각'할 수 있으려면
죽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죽음과, 단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끔찍한' 생각입니다."라고 할 때,
각각의 '그'와 '이들'은 표면적으론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제가 틀리지 않고 다시 반복한다면, 여기서 '그'는 푸코이며 '이들'은 아마 지라르와 형이상학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목소리로
'죽음을 통과하기, 또는 죽음과 일대일로 대면하기'라는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저는 어떻게 이 문장을 이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제 비판은 님에 대한 비판이라는
오해가 없이도 "이들의" 견해(허무주의적인 지반에서 윤리학 정초하려는
생각)자체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제 문장을 다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님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문장["그가 '물은' 것은 정말 우리는 언제나 10명을 죽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양자택일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가라는, 결국 우리는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거기에서만, 그렇게 절대절명의 순간속에서 만들어내는
'비'인간적인, '비'역사적인 해결책, 아니 '질문'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는 님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행여나 우려컨대, 저는 '저는 님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문장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이 문장은 제가 처음에 님의 글에 답변할 때 나름대로 다듬은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한편 사소한 지적일 수 있지만 여기서 조금은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문구인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잘 잡히지 않습니다. 마치 요즘의 철학과 사상이 자기합리화 기제의 만능 도구로 자주 사용하는 '경계'(경계에 머무르기, 경계를 너머, 경계를 가로질러 등등)라는 모호한 개념처럼, "죽음을 경유하는
사유"라는 말도 조금은 그 절실함이 감속되는 듯 합니다. 이에 대한 님의
견해를 더 경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2)에서 제가 "저열하다"라고 한 표현을 다시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어디까지나 비판하는 것은 인간을
초라한 궁지상태(희생양의 메커니즘을 루카치, 푸코와 들뢰즈에게 부과하는 것)에 몰아넣은 다음 윤리학을 세우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 "저열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님의 의견에 따르면, 이런 혐의는 냉소적인
지라르에게 부과된 것입니다). 님은 레비나스를 인용하셨고, 이에 대해서도 저는 님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하고 싶지만, 일단 저는 우리가 보통
헤아리고 가늠한다고 하는 희생양의 고통, 혹은 타인의 고통, 더 넓게 타자에 대해 잘 해봤자 '상상적인' 판단(예를 들면 고통당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연대감이나 동정심)을 하는 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발하는 윤리학의 가능성을 의심해봤던 것입니다. 한편 3)에서 제가 님에게 "저열하다"라는 혐의를 두었다고 본 님의 판단은 지금까지 제가 서술한 것처럼 제 비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프로이트적 의미의 감정전이, 혹은 님께서 쿤데라님에 대한 비판 때에 쓰신
외적 투사(projection)라는 말은 그 전염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번
경우에 그 화살("'송장치고 살인내는' 끔찍하고 억울한 해석")은 아프게도 제게 씌워졌군요.
그리고 아울러 쿤데라님의 글에 대한 비판에서 제 부분이 언급된 데에 대한 님의 해명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 째는 지라르의 ?포교활동?이 루카치의 정치적 실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는, 제 글에 대한
쌍수대인님의 해석에 가까운 결과가 바로 그것입니다"(쿤데라님에 대한
답글 1)라는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저는 이 문장의 뜻을 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 문장의 문자적인 뜻부터 해석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일단 님의 글에서 "루카치의 원초적인 상처가 희생양의 논리"와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이 님의 "주요논지"라고 한 부분을 짚고 싶습니다. 제 비판은 과연 루카치(사르트르 등)의 원초적 상처를 희생양 논리로서 보는 것이 얼마만큼 타당할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스탈린주의 정치체제에서) 희생양 담론의 본질은
그런 체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폭력을 어떻게 작동시키고 그 폭력의 참여자들이 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희생양 제의의 메커니즘은 어떤 체제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체제의 다수 집행자(이 글에서 문제되는 스탈린주의에서는 당과 대중)가
체제 내부에서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불안정한 본질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체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그 불안정한 본질(사실은 그 비이성적인 체제의 일부분인)을 떠맡아 해소할 만한 대상을 선택하고, 조금이라도 체제에 위협적이라고 생각되는 혐의가 있는 소수들(님께서 언급했지만, 실제론 엄청나게 많은 다수들)이 지목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희생양에게 체제는 자신의 불안정함을 투사(projection)하고, 희생양이 그것을 어떻게든 승인하는 형태, 즉 선택된 희생양 자신이 죄인이든 무죄이든 그 죄를 떠맡는 형태로 체제의 구멍, 혹은 결여를 메웁니다. 형은 집행되고 희생양의 제의과정(숙청, 굴락, 추방)을 통해 그 체제는 전처럼 평화롭게 유지됩니다(지라르라면 여기에서 그 체제의 점진적인 몰락을 보았겠지요). 넓게 봐서 파시즘과 독재 그리고 공리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도 비슷한 메커니즘의
작동방식을 담고 있겠죠(그렇게 유지되는 문명이라는 것엔 항상 어떤 특유의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야기도 이런 메커니즘을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겠습니다). 지라르의 논쟁적인 저서인 <희생양>은 아마 태곳적부터의 희생양의 신화, 혹은 신화적 담론의 희생 메커니즘이 현대 정치체제에서도 강박적으로, 즉 구조적으로 반복된다는 논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이에 비해 신약의 네 복음서는 그 희생 메커니즘을
탈구축할 가능성을 제공해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좌파든 우파든 그들이 내세우는 공식적이고 신화적인 역사주의의 기저를 그 근본부터
흔듭니다(희생양 신화를 탈구축하는 지라르에 대한 제 이해의 견지에서
볼 때, 님의 지라르 비판의 의도는 조금은 불분명하게 보입니다)......
다시 루카치로 돌아와 의문을 던지자면, 님이나 제가 언급한 루카치의 원초적 상처라고 말한 것이 과연 이 희생양 담론의 구조적 메커니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과 직결된 문제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확실히 둘은 관계가 있습니다. 추정해본다면,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소련에서의 루카치는 확실히 스탈린주의의 엄혹한 시절 곁에서 공산주의적
희생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지켜봤을 것이고, 아마 그 역시 그런
역사, 혹은 그런 체제를 유지하는데 협조했던 구성원이었을 테니까요(공식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담론에 맞서 그 체제 내부에서 전복의 담론을 구상했던 바흐친도 루카치보다 더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체제의 한계는 그 체제가 허락하는 한에서 그 체제에 초과적인
사육제의 구상을 시도했던 바흐친의 한계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희생제의는 지라르도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체제와 체제의 구성원 대다수, 민중 혹은 대중(거기에 희생양도 포함되어 있겠지요)이 적극 참여하는 게임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루카치의 문제는 그 외연이 확장되어 마르크스주의 운동 혹은 역사 자체의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혹은 지식인뿐 아니라, 그 운동을 구성한 계급과 민중의 역사 자체의 문제로. 그리고
그렇게 되면, 루카치의 문제는 사실 마르크스주의 운동 자체를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대단히 공소해지거나 협소한 문제로 넘어갈 소지가 있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그것을 가능케 한 체제와 소수 전위당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체제 내부의 구성원 대다수가 적극 참여하는 게임이라는 데서 루카치-그가 아무리 민중과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라는 지식인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른 각도로 통해서 보지 않는다면 대단히 협소할 수도 있는 문제틀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결국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루카치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어떤 본질적인 상처를 짚는 문제에 희생양 담론 자체가 너무 크고 헐거운 바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언급한 그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나 소수의 문제는 루카치를 통해서 다룰 부분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경유를 제쳐놓고 그 자체로 언급해야 할 문제입니다(님도 역시 푸코와 들뢰즈의 인용을 통해서 그 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님께서는 이때 푸코와 들뢰즈의 소수 담론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셨지만, 제가 불만인 것은 방금 언급했듯이 이를
여전히 지식인 문제와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님의 접근방식입니다. 즉,
그런 희생양의 메커니즘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의 한계, 그리고
그 상처란 무엇인가가 마치 매우 중요한 질문인 것처럼(저도 이 대목에서
맨 처음에 님께 의문을 던지면서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 것 인양 취급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질문 자체의 틀을 바꿔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루카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부차적이며 그리 어울리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지식인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정말 커질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희생양 메커니즘은 이성에게 부과된 그 자체의 한계(슬라보예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국역), 135쪽)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문제는 루카치라는 지식인이
보여준 상징적 트라우마(그 외연이 아무리 마르크스주의 역사로 확대될
만큼 '실재적'이지만, 여전히 뭔가가 부족한)의 수준에선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한편으로 루카치나 그 밖의 좌파 지식인들의 행적과 변별되는 비-역사, 혹은 사건을 구성한 푸코와 들뢰즈의 공적이 충분히 인정되었다면, 이젠 그 저자들을 지워버려도
되지 않을지요(푸코와 들뢰즈가 정말 깨고 싶었던 지식인=저자의 환상,
그리고 그것을 지워버리는 실천을 우린 얼마나 반복하고 있을까요). 님의
글에서 제가 이따금 발견하는 일종의 환원론[1)루카치-좌파 지식인의 문제-> 2)억눌리고 희생당한 소수자-그에 대한 애매한 입장을 취한 좌파 지식인 루카치의 한계와 상처->3)희생양 메커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한계->4)푸코, 들뢰즈의 소수자 담론의 적극적 구성->4)다시 희생양 메커니즘과 루카치-좌파 지식인의 문제]이 저는 불만인데, 왜냐하면 님의 글
곳곳에선 소수자 담론, 혹은 그런 운동을 실행했던 선구적인 저자들과 그들의 말씀들에 대한 경의와 인용이 솔직히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님께서 언급하고 있는 푸코, 들뢰즈의 담론은 솔직히 아직은 본격적인 토론과 논의에는 부족하기만 한 '지식'의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제가 되는 님의 글에선 아직 제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님의 견해(푸코/들뢰즈의 견해)가 너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푸코와 들뢰즈의 사유에 대한 님의 계속된 언급은 저에게 약간은 지루하게 들립니다. 저는 그들의 생각을 '경유'한 다음의 님만의 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 메커니즘의 악순환에서 탈피시켜야 할 이 소수자의 문제를 님은 다시 루카치와 같은 좌파
지식인의 역사, 그리고 그 한계의 역사와 연결(환원)시키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지식인이며, 그들의 사유와 실천의 실험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층위를 달리 해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즉 푸코나 들뢰즈와는 변별되게 실질적인 좌파 지식인의 역사의 층위에서 루카치를 어떻게 언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처음부터 문제제기가 시작된 이래로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제가 "통과"라고
명명한 것은 그들의 역사적, 실존적 상황과 오류와 한계의 몸짓 자체를,
아직 그 무게가 덜어지지 않은 그것의 과부하를 부러 떠맡아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때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아무래도 좋은 그 언급이, 때론 그 담론이 나온 층위와 관계된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그것은 자칫 루카치를 과거의 유물로, 오류의 역사의 산물로, 마르크스주의의 죽음에 대한 일종의 최종선고로 받아들일 소지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그것은 1990년대 초반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공식 사망선고를 주창한 것이 우파(?)의 목소리-그래도 우파에겐 남한의 민중적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위협적이었죠-였다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럴 상황이 적어도 이 논쟁에서 불거져나올 염려가 없다면(제가 보기엔 님의 생각도 이런 우려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젠 마음을 놓고 다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일단 저는 제 입장과 님께서 해명을 요구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서툴게나마 답변을 시도해볼까 합니다.
입장 1) : 희생양의 메커니즘이 부과하는 강요된 선택을 거부할 것. 그러나 이를 저는 약간은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저는 롤즈의 말을
빌어 분배적 선택-실은 거기에 걸맞는 올바른 용어는 "분배적 정의"입니다-이라 이름했지만, 이는 님을 향한 비판에서 쓰인 말로, 사실 그리 정확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희생양의 메커니즘이 부과하는
강요된 선택을 분배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거부한다는 것이 실제 그런 상황을 맞이했을 때, 희생양 메커니즘에 종속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면, 애초에 제가 비판한 것을 좀더 명확히 해서 저는 이렇게 정리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 자체를 '탈구축=해체'하지 않은
채, 그것이 강요한 선택의 내부에서 윤리학이나 타자에 대한 언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즉, 타자의 문제에서 일단 주체로 이동하는 것이 제 관건입니다. 이는 입장 2)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입장 2) : 제가 "통과"라고 부른 것에 대해. 만일 타자의 고통에 대한 주체의 헤아림에 함정이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 상상적일 경우, 다시 말해
그토록 주체의 수준에선 상상적일 위험 부담이 큰 타자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서라도 여기서 문제가 여전히 주체에게 있다면, 그리고 여기서 그
문제를 좌파 지식인 루카치의 실존적/역사적 트라우마로 돌려본다면, 우리는 그의 실천과 오류와 그리고 그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허구)의 실존적/역사적 과부하를 스스로 떠맡아 반복하는 몸짓을 구성해보자. 이것을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 교육 및 분석과정에서 말하는 "통과"로 이름할 수 있다(혹은 라캉이 말한 것처럼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운동의 역사에서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교조적인 회귀라는 명칭에 부여한 적절한 의미이다). 즉 주체는 분석의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욕망하지 못하는 주체 자신의 트라우마(주체가 주체이지 못하게끔 신경증과 환상을 유발하는)를
재구성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횡단해야 할 것이다. 주체의 증상에 자신의 욕망이 개입하여 그 증상의 자리를 주체가 무의식의 차원에서까지 떠맡기를 해야한다("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가야할지어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유명한 "당신의 증상을 즐겨라"라는 말은, 주체가 그
증상=외부적 트라우마를 자신의 것으로 스스로 떠맡는 과정을 이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욕망하는 자신의 삶의 좌표로 설정해야 한다.
답변 1) ""들뢰즈가 참조한 스피노자와 로렌스의 넘침, 과잉, 혹은 잉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들뢰즈에게는 넘침과 과잉,
잉여가 극도의 궁핍과 단식을 통해 산출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구절에 대해 답변을 짤막하게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두 문장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수동적/능동적)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들뢰즈가 말하고 욕망하는 삶에 금욕적인 형상이 부과된다는
것은 그가 카프카의 소설 <단식광대>를 통해 말하기도 했지만, 님께서도
인용하신 것처럼 알랭 바디우가 그의 <존재와 함성>에서 지적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기호의 숭고하고도 예기치
못한 폭력을 온전히 맞이하는 주체의 모습은 온전히 법복을 입고 신과의
만남이라는 희열을 준비하는 금욕주의자의 그것입니다. 한편으로 그가 대양적 삶을 이야기할 때 참조되는 멜빌의 소설과 앙리 미쇼의 시, 그리고
수많은 '영미' 문학, 그리고 철학에선 스피노자와 니체 모두는 들뢰즈에겐 삶의 과잉과 넘침, 적극적인 향유의 차원에서 다루어집니다. 들뢰즈에게 "욕망하는 기계"는 프루스트의 지팡이 혹은 단식하고 있는 카프카의
중절모를 받아든 로렌스 혹은 헨리 밀러의 모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