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Neckless of Time-
2.웃기지도 않는 헤프닝.
삐비비빅 삐비비빅
"으음..."
탁
"으읏...읏차아~~!"
데르나는 아침부터 울려대는 자명종을 끄고는 기지개를 한껏 펴며 창가로 내비치는 나른한
햇살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콤한 새벽 공기가 방안 가득 밀려 들어왔다.
"...오늘로써 이틀째인가?"
데르나는 잠시 턱을 괴면서 창가로 비친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구름떼가 몰려 오고 있
었지만 변함없이 맑은 날씨였다.
시계를 보던 데르나는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내려왔다. 그러자 그녀는 곧 해왕과 마
주칠 수 있었다. 해왕도 마침 씻으러 나오는 길이었다
"아, 잘 잤어?"
"응. 너는?"
"나야 뭐."
둘은 서로를 향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좋은아침."
"여어, 안녕!"
"안녕~!"
"......."
교실문을 들어서면서 해왕이 먼저 인사하자 어제 만났던 그 진석이란 남자애와 다른 친구
들이 해왕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그러나 데르나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약간 넋이 나
간 몇몇의 애들을 빼고는 전부 말대답만 하고 홰액 돌아서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식
당에서 보여준 데르나의 그 마법이 아직도 머리 속에 깊게 인식된 상태였고, 그 자리에 없
던 애들도 곧 쏜살같이 퍼진 소문에 데르나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노려봐?"
화들짝
"응? 아, 아무것도 아냐."
아직까지 넋을 빼 놓던 남자아이들을 단 한 마디로 물리쳐 버린 데르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거나 교실을 벗어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앙증맞은(?)웃음을 흘리고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해왕은 약간 피곤해 보이는 데르나를 넌지시 바라보다가 문득 어제 영어
시간의 일이 생각나 데르나에게 물었다.
"아참, 데르나."
"응?"
마침 교과서를 정리하던 데르나는 갑작스런 해왕의 부름에 그를 바라보았다.
"너 어제 영어시간에 뭐 했어?"
뜨끔
마음으로 다가오는 한 가닥 짧은 비수에 데르나는 슬쩍 몸을 떨었다. 그러나 데르나는 아
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안 그랬다~ 하는 미소
를 지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엔 뭔가 어색한 기운이 실려 있었고, 우둔해 보여도 가
끔 섬세하게 바뀌는, 음...변덕스럽다고나 할까?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해왕이 그것을 놓
칠 리가 없었다.
"...너, 어제 뭐 했지."
"아니? 아무 일도."
"거짓말 하지 마."
"...무슨 소리야."
"이익, 이실직고 해!"
"아씨, 도대체 뭘 말하라는 거야~~!"
둘의 언성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을 무렵.
드르륵
문이 열리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섰다. 1학년 6반, 해왕 반의 담임이었는
데, 보기와는 다르게 실제 나이는 26. 미혼이었다.(그런데도 왜 이렇게 늙어 보이냐.)
"차렷."
"너, 이따가 두고 봐."
"흥, 웃기지 마."
"...차렷!"
박태연의 우렁찬(!)목소리에 그때까지 티격태격하던 둘은 곧 조용해졌고, 등교할 때와는 사
뭇 다른 분위기에 모두 해왕과 데르나의 눈치를 살폈지만 대부분 데르나를 더 신경쓰는 눈
치였다. 그러나 몇몇 남자애들은 저렇게 다투기도 할 수 있는 해왕이 부럽다는 눈치였다.
"..경례."
"안녕하세요."
약간 기어가는 목소리에 선생님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곧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
왔다.
"출석체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전달사항이 있다. 3월말 모의고사가 이번 주라는 건 알
고 있지?"
"네."
"그런데 3학년 선배들이 오늘 먼저 시험을 보기 때문에, 오늘은 조용히 다녀야 한다. 알겠
지?"
"네에~."
"이상. 오늘 하루도 잘 보내자."
드르륵 탁
"...야, 너."
"너, 있잖아."
"........"
"........"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를 물어보려 할 때였다. 그러나 둘이 서로
동시에 마주치는 바람에 둘은 그 다음 말을 이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
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뭐 할 말 있어?
"...너 먼저 말해."
'레이디 퍼스트'라는, 약간 구세대적인 생각에 해왕은 선수를 먼저 양보했다. 게다가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지만 그 말이 자신의 궁금증을 해명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데르나의 호기심 어린 말투에 해왕은 잠시나마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자
신이 은근히 창피해졌다.
"모의고사가 뭐야?"
"...말 그대로 모의적 시험을 본다는 거야. 네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가 테스트하는 거
지."
"헤에...그럼 잘 봐야겠네?"
"당연하지."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네가 말해."
"좋았어. 너 어제 영어시간에 뭐 했어?"
순간 데르나는 자신의 말이 미칠 파급 효과를 생각해야 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데르나
자신은 좀 편해질지 모르지만 문제는 해왕 외 여럿이 이걸 알게 되면 자기도 미러 이미지로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조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데르나의 부
담은 더 커질 것이고, 만약 못 해 준다고 하면 '마법으로 쫌생 부리는 녀석'으로 낙인찍혀
한순간 왕따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정 반대 방법, 즉 제대로 알려 주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말을 해 주지 않으면
해왕은 '하루 종일',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알아내려 할 게 뻔하였다. 단 하루, 아니 이
틀을 같이 지냈을 뿐이지만 그 이틀 동안 데르나는 이 녀석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
다. 하긴 한집인데 모를 리가 있나.
"...뭐야,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응? 아, 미안."
"어떻게 된 거야? 좀 알려줘 봐."
생각을 정리한 데르나.. 그녀는 약간 단호한 투로, 그러면서도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미소
를 지으며 해왕에게 대답해 주었다.
"비~~~~밀!"
"...어어? 야, 야!"
스윽
데르나가 비밀이라 말하며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해왕은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갔다.
"자, 여기 잠깐 주목해 보자. 여기 이 To이하 내용은 목적격인데 반해 여기 있는 To는..."
"...하아암..."
졸리다. 데르나가 영어 첫 시간부터 느낀 점이었다. 그렇다고 미러 이미지를 쓰자니 자면서
유지해야 하는 마나가 아깝고, 해왕이 눈치챌까 무섭고... 시간을 앞으로 돌려 볼까 하다가
그 때에더 마나가 들어가기에 데르나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버리고 말았다.
데르나가 차고 있는, 엄지손톱 크기의 기하학적 마법진이 새겨진 Neckless of Time, 시간
의 목걸이는 말 그대로 '시간'을 사용자, 시전자의 의지대로 이동할 수 있는 목걸이였다. 시
간을 멈추기도 하고, 시간을 앞으로 돌리기도 하며, 시간을 빠르게 지나갈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평상시 시간처럼 유유히 움직이게 할 수도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사용에 따라
기능상의 제재는 없지만 이 목걸이도 나름대로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목걸이에 들
어가는 마나량이었다.
목걸이에 사용되는 마나는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목걸이 내에 자체적으로 저장해
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시간인 만큼 기능 사용상의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 마나가 얼마나 저장되어 있는가에 따라 시간을 넘나드는 범위도 달
라지는 것이다. 즉 마나가 적으면 보다 많은 시간을 앞으로 돌릴 수도, 빠르가 지나가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을 중지하는 기능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지만, 마나량이 많은
반대의 경우라면 데르나가 이 곳으로 넘어온 것처럼 많은 양의 시간을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을 움직이는데도 일정한 공식이 필요한데, 아무리 어려운 책도 1~2년이면 다
떼어 버리던 책도 어머니가 준 그 책은 정말 틈틈히 읽어 4년을 붙잡고 있는데도 도저히 이
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중 한 구절을 들자면, 시간이 앞으로 돌린다는 가설이 성립할
경우 문장만으로 보자면 '시간의 이동이 유형의 힘에 의해 이러우지면 시전자는 시간상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라는 내용이었다. 즉 무형의 기운을 통해 갑작스런 사건을 당하게 되고,
그 사건 덕에 시간의 이동이 이루어지면 시전자나 당사자가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따라 자
신의 모습 또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의 사람이 무형의 기운 덕에 10년 전으로 가면
10살이 된다는 게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자신이 기운의 유동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모
른 채 살아가게 되고 많은 시간을 이동할 경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 하지만 위와
같이 앞으로 돌아간 경우 10년의 시간을 더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유형의 기운, 그러니까 데르나처럼 목걸이에 시간을 돌리는 마법을 설정해 둔다면 시
전자는 수 십년, 수 백년을 이동해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20세의
남자가 50년, 100년으로 움직여도 계속 20세라는 공식이 성립되는데, 시간 이동상의 수치상
제약은 없지만 영원히, 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연장하거나 줄일 수 없다는 단점이 있
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유형은 무형에 비해 부담이 크고, 더 많은 준
비가 필요하다. 이것은 시간의 육체 종속 편 제 3항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나마 이것
이 제일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었다. 다른 내용으로는 시간 중복편의 '자신의 모습이 미래 모
습과 겹쳐질 때'와 '시간이동물 제작'편의 '시간을 유형물로 종속시키는 방법'등이 있다. 데르
나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지만.
데르나는 점심 후의 이유모를 춘곤증을 느끼며 5교시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반이 넓은 모래운동장에서 체육을 하고 있었는데, 학기 초인 것을 감안해 대부분의 학급은
자유체육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농구 아니면 축구를 하고 있었고, 여
자아이들은 한 곳에 모여 피구를 하거나 아직 해가 뜨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늘막에 모
여 가만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던 데르나의 눈에 문득 장난기가 번졌다. 그녀의 눈은 운동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얼
룩덜룩한 축구공에 가 있었는데, 데르나는 이리저리 뻥뻥 차이며 날아가는 축구공을 향해
가만히 손가락을 들었다.
"...텔레키네시스."
순식간에 축구공은 갑작스런 데르나의 손길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스윽
부우웅 퍼억
"크앗! 이 자식...어디다 공을 차는 거야~~!"
"응? 무슨 소리야."
"쿠쿠쿡~."
데르나의 손가락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공은 같은 편의 반대쪽 공격수 머리에 맞
고 떨어졌으며, 예상치 못한 공의 공격에 공격수는 같은 편 수비수-아까 공을 찼던 녀석-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대었다. 이 꼴이 재미있다는 듯 데르나는 낮게 쿠쿡, 거리며 웃어 재꼈고,
데르나의 목소리와 함께 살짝 다가오는, 전에도 느낀 그런 기운에 해왕은 그녀를 향해 고개
를 돌렸다. 해왕의 눈에 비친 데르나의 모습은 마치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실성해 버린 어
떤 아녀자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왜 웃는 거지?'
해왕은 슬슬 선생님의 바쁘게 돌아가는 눈을 보아 가며 데르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
가락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가끔 크게 웃는 데르나의 모습에 문득 해왕은 아까 자기가
좀 심했나, 하는 얼굴을 하다가 곧 희안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축구공과 그것을 쫓아가느라 기진맥진한 선수들 때문이었다. 데르나는 공은 무작정 데르나
의 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뻥 차면 이상한 데로 날아가게끔 하고 있었는데, 그것
이 아무래도 선수들을 힘빠지게 만든 원인이 된 것 같았다.
'...데르나 짓인가?'
해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창가 여자애, 거기."
"...네?"
창가 여자애란 말에 고개를 돌린 데르나는, 곧 일어서 보라는 영어 선생님의 손짓에 자신
이 저 공에 걸었던 텔레키네시스 마법에 역으로 당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것과 동시에
운동장의 축구공은 그제서야 어지러운 운동을 멈추었고, 선생님은 조용히, 그러나 살기를 띄
우며 칠판에 있는 글씨를 대고 데르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문장 해석해 봐라."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무척이나 피곤한...듯...보였다, 입니다."
"뭐라고?"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한 듯 보였다, 입니다!"
슬몃 선생님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곧 선생님은 유도심문을 하듯 데르나에게 재차 질문을
해 왔다.
"정말이냐?"
"......."
"정말이냐!"
"네!"
"이게 그 뜻이라구?"
"네."
"확신할 수 있어?"
"네!!"
"...으음..맞았다. 앉아라."
스윽 털썩
'...되게 질문해 대는군.'
데르나는 자신이 틀린 줄 알았지만 잘못된 게 없다고 판단하고는 끝까지 맞다고 우겨 대었
고, 덕분에 그녀는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이야~! 대단하더라. 어떻게 그걸 맞추었지?"
"중학교 수준의 질문 아냐. 나도 그 정돈 할 수 있겠던데."
"그 독종에게 끝까지 물리지 않았다는 게 더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안 물리고
무사히 도망친 사람은 없었잖아."
"으음...그런가?"
해왕과 그의 친구들은 데르나가 없어진 틈을 이용해 그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이맘때 모여서 특정 인물에 대해 토론을 하곤 했는데, 이번 타깃은 데르
나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아직 그녀의 단점을 모르기에 어디서 그런 힘을 내는
지, 또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지로 논점이 옮겨 갔다.
"혹시 그 마법이란 거, 단순한 마술 같은 거 아냐?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설마, 전학생인 데다가 아는 녀석도 별로 없을 텐데 무슨 수로 그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
을 침묵시키겠냐? 나는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일이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있어?"
"으음...그건..."
"것 봐. 내가 보기엔 단순한 마술 같아."
토론은 조금씩 격해져만 갔다. 그러나 아직 해왕은 입조차 벙긋거리지 않았고, 대신 그 공
백을 '화린'이라는, 데르나의 뒷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대신했다.
본명은 이씨 성을 가진 화린, 성적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모범생이자 우등
생이었다. 냉혈녀 박태연을 앞지르는 성적에 남자들의 보호 근성을 쟁취하는 청초하고 가련
한 용모와 아름다움...그러나 그녀가 반에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귀여움과 어벙벙한
면에서였다. 냉혈녀가 차가움과 무뚝뚝함이 있다면 화린은 따스함과 귀여움이 있다고나 할
까? 한때 해왕이 마음에 품었던 여자였지만 지금은 화린을 향한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 상태
였다. 그러니까,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 주겠지.'
하는, 적극적인 태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난 진짜 같은데? 그럴 것 같지 않아?"
갈색으로 살짝 염색한, 조금 길어진 단발머리를 흔들며 화린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그
러자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남자애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 말을 반박했다.
"있다고도 못 하잖아. 게다가 어쩌면 짜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헤헷,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짜고 하자고는 못할 거 아냐. 게다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이득도 없을 거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말한 것처럼, 그 힘이 이 세상에 아예 없다고 증명
할 수는 있어?"
바로 반격해 들어오는 화린의 말엔 어느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 보였다.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했다지만 그것은 공격에 대한 역공격, 반격으로 쓰였으므로 그리 이상해 보일 일
도 없었고. 곧 남자애가 얼굴은 붉히면서 눈을 찌푸리는 이중적인 얼굴로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응? 내 자리에서 뭐 하는 거야?"
"아, 마침 잘 됐다. 너 마법 쓸 줄 안다고 했지?"
"응? 아, 그랬지."
갑작스런 남자애의 목소리에도 데르나는 당황하기는커녕 싱긋 웃으며 그렇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서 그러는데, 혹시 마법 좀 모여 줄 수 있어?"
"....뭐?"
"마법 좀 보여 줄 수 있냐고."
"맞아, 나도 보고 싶은데."
"........"
갑자기 눈총이 한 군데로 몰리기 시작하자 데르나는 무척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저번 사일런스 필드 사건을 당했던 사람들도, 그 험악한 소문을 들은 다수의 사람들도 그저
순수하게 데르나의 마법을 보고 싶어했고, 그 무언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어 데르나의 어깨
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데르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밝혀질 일, 아예 지금 해 버리
자는 마음에서였다.
"그, 그러지 뭐...뭐,뭘 할까?"
...왜 말을 더듬지? 데르나는 잠시 긴장을 풀고 자신의 얼굴을 때렸다. 하여간 이놈의 자신
감은...게다가 여기 와서부터 이상하게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파이어볼!"
"아냐, 어제 그 마법 다시 해 봐."
"그냥 미티어 스트라이크나 때리고 말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리에 데르나는 이 녀석들은 마법 쓸 줄도 모르면서 마법 이름은 많
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기본적인 걸 먼저 해 보기로 했다.
"...파이어."
화락
데르나가 치켜든 손과 함께 그 손에서 붉은 불덩이가 일렁였다. 순간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조그만 비명성을 질러 대었지만 남자애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인 듯 데르나를 향해 빈정거
렸다.
"에이~~뭐야~!"
"것 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까."
와글와글
쑥덕쑥덕
데르나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잠시 당황했다. 자신이 살던 곳에는 그저 조그만 불만 만
들 줄 알면 마법사로 인정해 주었는데...데르나는 그 푸른 눈을 깜빡거리며 머리를 북북 긁
적였다.
'...확실하게 강력한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인가?'
한참 머리를 긁적이던 데르나는 곧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걸로 안 된다면 더 큰 걸 보
여주면 된다 이거지, 그럼 이 마법보다 좋은 게 있을까? 없었다.
"에헴, 흠."
쑥덕쑥덕...조용...
데르나의 헛기침에 반 아이들은 모두 멈칫거렸고, 데르나는 아직도 시전하고 있는 불꽃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잠시 아이들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놀랄까, 하는 한 가
지 모습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곧 데르나는 마법을 시전했다.
"....일루젼."
데르나아게서 내뻗어진 무형의 마나가 넘실거리며 아이들의 동공을 점령해 버렸다. 물론
시전자인 데르나와, 마법방어력 덕에 마나가 튕겨진 해왕은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
"...어엇?"
"꺄아악~~!"
"우앗! 저것이 바로...!"
우르르르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며 창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뭔가를 주시하
며 그것이 땅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떨어 대는 것이었다.
"...일루젼은 무슨 마법이야?"
은근히 자신만 보지 못했다는 서러움 비슷한 말투까지 묻어 나왔으나 데르나는 개의치 않
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일루젼, 환상을 만드는 거야. 아마 지금쯤 내가 메테오로 운동장을 초토화하는 장면을
보고 있을걸?"
..약간 피로에 젖은 목소리였다.
소문은 날개를 달고 옆반, 선배님들 교실방으로 날아갔다. 일루젼의 환상은 데르나가 말한
대로 데르나 본인이 메테오를 날려 운동장에 불타는 엄청난 크기의 구멍을 내고 그 곳을 데
저트 스톰으로 다시 운동장을 메운다는 내용의 환상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일루젼이 풀어
지고 난 뒤였다. 모두 대단한 데르나의 마법(?)에 감탄했고, 여자애들은 이 소문을 전파하는
데 힘을 써 주었으며, 해왕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루젼'이라는 마법을 썼다는 것
에 설레설레 고개를 내 저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해 주고 말았다.
"그 모래 폭풍이 운석 덩어리가 떨어진 구멍을 메우는데 말이야,"
"아, 저기 데르나다!"
"꺄아아~~!"
...이러다 레즈비언 되겠구만.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데르나는 약간(많
이?)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이제 그만 하지?'하는 듯한 마음이 담겨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알아먹을 정도로 반 아이들의 눈치가 빠른 것은 아니었다.
"...걱정된다. 휴우~~..."
데르나의 기나긴 한숨에 옆에 있던 해왕이 그녀를 불쌍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조용히 있
어도 되는 일을 왜 그리 크게 만드는지...가만히 있으면 단지 평범한(아, 어차피 외국인이니
까 평범하긴 글렀군.)전학생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겠다는 건
가? 나 이런 마법 쓰니까 덤비지 말라고.
해왕은 왜 마법을 썼냐고 그러는 대신 점심을 먹고 난 뒤의 식곤증을 해소하기 위해 교실
로 직행햇다.
"으랏차사~~!"
콰앙
"으윽...!"
...교실에선 두 남자가 손을 맞잡고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데르나와 해왕이 들어올 즈음엔
이미 경기는 왼쪽 남자의 승리로 끝난 상태였는데, 데르나는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팔씨름을 신청했다.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 한 개를 놓고 대결을
신청했는데, 그 녀석도 금방 사내에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하, 한참 멀었네. 다른 사람 없어?"
남학생은 한껏 거드름을 떨며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해왕이 보기엔 그가 자만하는 것도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그의 덩치는 일반 사람의 두 배를 넘는 데다가 걷어붙
인 팔에는 몇 점의 근육이 울룩불룩 솟아나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힘은 장사일
게 틀림없었다.
그때 그녀-데르나-에게서 풀풀 풍겨오는 악의(?)에 해왕은 몸을 추스리며 그녀를 말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어느새 데르나는 그 덩치 큰 사내의 맞은 편 빈자리에 앉아 대결을 신청
하고 있었다.
척
"........"
"........"
"...지금 나랑 팔씨름 해 보겠다는 거냐?"
"응."
너무도 간단 명료한 데르나의 대답에 해왕은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고,
반대로 그 덩치 큰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하하하, 좋아. 그런데 난 내기 씨름 아니면 안 해."
"그래? 그럼...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
오오오~~!
순간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그렇게 자신있는 건가? 반 아이들은 그녀가 황당한 짓을 한다
는 생각을 넘어서 저 덩치를 꺾을 방법이 있어 저러는 거라고 점차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반면 덩치 큰 사내는 새파란 여자가 '자신을 이기면 자신을 어떻게 해도 좋다.'는 조건을 내
걸었다는 것에 무척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벌써 온갖 환상이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내가 이기면 뭘 해 줄 거지?"
"으음...잠깐만.
탁
덩치는 주머니에서 돈을 탈탈 털어냈다. 합치면...3만원?! 이 녀석 전문 도박꾼이군...해왕이
그렇게 생각하는 반면 데르나는 앙큼하게 눈을 빛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저 돈이면 해
왕과 자신이 매일 1000원씩 써도 한 달이나 가는 양의 돈이었다.
"......이거면 돼지?"
"좋아, 해 보자구."
꽈아악
벌써부터 둘이 손을 잡는 게 '꽈아악'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잡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데르나의 가녀린 손이 사내의 우락부락한 팔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옆에
있던 학생들은 자신들의 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버리고 말았고, 해왕은
이미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지만 그 대신 데르나가 무척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해왕은 서둘러 데르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데르나, 그만 둬. 이 녀석 우리 전교에서 제일 힘이 센 녀석인데...."
"괜찮아. 힘으로는 나도 지지 않으니까."
힘으로는 나도 지지 않는다? 덩치나 위압감 면에서는 질지 몰라도 힘으로는 절대 지지 않
는다라...어쩌면 순전히 억지를 부리는 수도 있었다. 해왕이 보기에는 그것은 무척 아이러니
컬하면서도 황당한 말 같았고.
"준비~~!."
그러나 해왕이 미처 그녀를 끄집어 내기도 전에, 해왕이 그녀의 무모한 짓을 말리려 하기
도 전에 둘은 어느새 대결의 준비를 시작했다.
"...시......작!"
옆에 서 있던 비쩍 마른 남자애가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 놓자 곧 대결
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데르나는 덩치의 힘을 잘 버텨 내었지만, 여자라는 것 때문에 봐 주
려고 생각하던 남자는 의외로 잘 버티는 데르나의 힘에 자신의 생각을 싸악 지워 버리고는
급하게 밀어 붙이기 시작했고, 데르나는 그런 녀석의 힘에 밀려 차츰차츰 뒤로 넘어가기 시
작했다.
'...업 스트랭스.'
그때 가녀린 마나의 기운이 그녀의 팔을 휘감았고, 마악 그녀를 포기하려던 해왕이 갑작스
런 마나의 기운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 곳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뒤로 넘어가던 그녀의
팔은 어느 한 곳에서 석고상처럼 딱 굳어 버렸고, 남자가 더 힘을 내어 보았지만 도저히 넘
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넘어가지 않자 남자는 당황하며 모든 힘을 쏟아 부었지만 역시 마찬
가지로 넘어가지 않았다. 반면 데르나는 여유만만한 얼굴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데르나가 버티고 있는 저 각도는 왠만한, 대부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마는 힘의 각도였다. 저 각도에 계속 버티고 있다간 근육이 파열되어 며칠간 손을 쓰지 못
한다는 것을 학생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으로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소문을 듣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기 같으면 저 각도에서 그냥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잘 버티고
있다니....
1분....30초쯤 지났을까? 남자의 힘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자 석고상처럼 굳었던 손이 기기
긱, 소리를 내며 점차점차 사내의 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밀리고 있던 데르나는 언제부턴
가 그와 대등한 위치까지 손을 올렸고, 이번엔 반대로 손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큭, 젠장....!"
사내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잔기술을 쓰기 시작했다. 손목을 살짝 비
트는가 하면 힘을 주었다 뺐다 주었다 뺐다 하면서 데르나의 손을 올려 놓으려 안간힘을 썼
지만 그것은 데르나의 전진을 잠시 가로막았을 뿐 데르나를 아예 뒤로 물리게까지 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남자는 힘겹게 버티던 손의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서 균형을 잃은
손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바닥에 힘없이 고꾸라졌다.
콰아앙
"와아~~!"
"힘도 무지막지하게 쎄네."
기어코 그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던 손이 넘어가고 말자 그 녀석에게 돈을 빼앗긴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마법이란 것도 쓰면서 힘도 저렇게 쎄다니...완전한 팔방미인형의
여자였다. 얼굴도 반반하고, 공부도 잘하고-영어시간을 통해 증명?-, 마법도 잘 쓰고, 힘도
쎄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데르나의 저력에 놀랄 뿐이었지만 몇몇은 그런 데르나를,
비록 양딸이지만 형제로 둔 해왕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단 한 사람, 해왕은 그런 아
이들의 반응과 마법이란 편법으로 사내를 넘겨 버린 데르나의 방식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
다.
그러나 데르나는 그런 해왕의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들어 초록색의 직사각형 인물
화 종이 1장과 각종 동전, 노랑색 지폐, 붉은색 지폐를 끌어 모아 주머니에 쥐었다. 그리고
크게 손을 흔들며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돈 돌려받을 사람~~!"
툭.......투투툭............쏴아아아아
결국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밤 비(Night Rain...밤비가 뭔지 모를까봐 적음. 밤에 내리는 비)
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른 봄인 만큼 비가 내릴 만도 했지만, 해왕은 은근히 눈(Snow)을 바
라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눈을 바라기엔 문제가 많은 날씨야."
야자시간..모두가 고요한 가운데 해왕은 손에 펴들던 책에서 눈을 돌려 시원한 밤비가 쏟아
지는 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조금 컸는지 몇몇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나마 눈치가 빠른 사람은 해왕의 말 속에 잠
긴 뜻을 알아내고 쿡쿡 소리를 죽여 가며 웃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바로 우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종 칠 텐데 뭐 쓰고 가냐?"
조금 큰 진석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모두 감상에서 벗어나 집에 어떻게 갈 건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이제 15분만 있으면 하교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만났던 이 진석이란 녀석은, 시원한 용모에 약간의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는, 반
아이들 사이에서 소위 날라리로 통하는 녀석이었는데, 사실 보기에는 그리 껄렁껄렁하게나
반항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시원스런 용모에 어울려 관대함이 깃들어 있다고나 할
까? 일단 해왕이 받은 첫 인상은 그랬으나 중학교 시절에 같은 학교였던 아이들의 말로는
그가 근처 공고의 고등학생 10명을 때려눕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나 해왕은 그것이 거짓말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은 주먹을 함부로
쓰는 타입이 아닌 데다가, 굳이 사람을 쳐야 할(?)상황엔 한 사람만 붙잡고 위압적으로 갈기
는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진석, 이 녀석은 다른 중학교 녀석과 친구가 된 첫 번
째 녀석이기도 했다.
"별수 없지 뭐. 가방이나 뒤집어 써야겠군."
"쳇, 매고 가는 가방도 무거운데 어떻게 우산처럼 쓰겠냐? 난 그냥 맞고 갈련다."
"그냥 맞고 가면 브레지어 다 비치는데..."
"우산 있는 사람 없어?"
"어허~~조용! 왜 이렇게 떠드냐!"
서서히 소란스러워지려던 1학년 6반을, 감독 선생님은 선생님 특유의 큰 목소리로 그들을
싸그리 잠재워 버렸다. 그러나 감독선생님이 지나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이 울렸다.
따르르릉
"좋았어. 가자!"
우르르 드르륵
"먼저 가. 나는 주번일 때문에..."
"안녕! 내일 봐~!"
"집에 가면 뭐 할 꺼야?"
은은한 종소리와 누구 입인지 모를 목소리에 죄다 몸을 일으켜 집에 갈 준비를 하고는 바
로 교실을 뛰쳐나왔다. 해왕은 데르나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손수 그녀의 새 신발-황토색
톤의 약간 굽이 있는 신발-을 건네 주며 아래로 내려갔다.
"아, 고마워. 그냥 비 맞고 갈 거야?"
"뭐...산성비 맞는다고 머리가 녹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맞고 갈 거야."
"산성비?"
말 그대로 하면 산성을 띄는 비라는 소린데...(실제로 비는 아주 약한 산성을 띈다.) 그럼
몸이 녹거나 그런 건가? 그러나 해왕이 그냥 맞고 가겠다면 괜찮은 수준인 것 같은데..데르
나는 난생 처음 듣는, 그러나 리어닝 랭귀지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
를 까딱였다.
쏴아아
"...와...."
"...꽤 세네..."
둘은 생각보다 강렬한 비의 위력에 입을 쩌억 벌렸다. 비를 맞은 모든 사람들이 땅에 몸부
림치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아니, 비가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째 퍼붓는 것처럼 굵고 많았
기 때문이었다. 이거 완전히 장마비 수준이군...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
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비를 보고 비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우산이나 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려가기도 했으며, 우산을 들은 사
람들에겐 한꺼번에 세네 명씩 달라붙어 같이 우산을 쓰고 집을 향해 움직였다.
"...우리는 조금 기다렸다가 가자."
"으응..."
해왕은 등에 짊어졌던 가방을 툭 내려놓은 뒤 가방에서 가만히 영어 단어장을 꺼내었다.
반면에 데르나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슬몃 미소를 지었다.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해왕은 곧 데르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자신의 손에 들린 영어 단어장에 눈을 돌리고는 주욱
단어들을 훑어 볼 뿐이었다.
.......그러나........
10시가 다 되고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 3학년들의 자
습이 시작하고 몇 십분이 흘렀는데도
비는 좀체 천천히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끝까지 기다렸던 사람들 대부분은 실내화
가방이나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려갔고, 하나 둘 끝까지 남으려던 사람들도 결국엔 그 곳
을 벗어나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현관에는 비를 구경하는 데르나와 영어단어
를 외우는 해왕만이 남겨졌다.
"...그냥 갈까?"
"...이 비를 맞고?"
"뭐 어때? 비 맞고 가는 것도 좋지 않아?"
"...가방도 젖는단 말야. 마법 쓰면 안 돼?"
"...쉴드 같은 건 일반 자연물은 방어할 수 없단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쉴드를 썼다고 물이나 흙, 공기가 들어오지 못한다면 쉴드를 전개하자마자
그 속의 사람은 엄청난 고갈 사태(산소 부족....)를 맞게 될 터였다. 그것을 이해한 해왕은 한
숨을 쉬며 데르나에게 변명했다.
"...가방도 젖는단 말이야..."
"할 수 없잖아.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거야?"
척
"어엇? 야, 야!"
해왕은 자기보다 먼저 나서는 데르나의 뒤를, 황급히 영어단어장을 집어넣으며 그 뒤를 따
랐다. 굵은 빗방울들이 둘의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며 푸른 한기를 느끼게 했고, 해왕은 교복
위로 내려앉는 빗방울에 약간 추운 모양인지 으슬으슬 몸을 떨었으나 데르나는 여전히 미소
를 머금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데르나는 앞서서 비를 맞고 걷다가 뒤에서 따라오는 해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
직히 중얼거렸다.
"...비 맞고 가는 것도 괜찮지?"
"좀 춥긴 하지만...괜찮네."
"헤헷."
둘은 폭우 속을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그 다음날 둘은 결석을 했다.
에혀~~간단한 유머도 이렇게 힘들군요...거의 12장? 13장? 주말마다 쓰기가 힘들어서 평일에도 가끔 시간을 내 쓰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시험기간엔 어떻게 전개를 할지 암담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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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필, 즐독하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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