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김해김씨 경파(금녕군파)
 
 
 
 
 
카페 게시글
기본 게시판 스크랩 삼중대광 금녕군 휘 목경 경파 상주 화산제
김영광 추천 0 조회 67 13.05.10 09: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해김씨(金海金氏) 씨족史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우리나라에서 수가 가장 많은 성씨이다.
수로왕(首露王)의 탄생설화에 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같이 적혀있다.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창건한 것은 서기 42년(후한 건무(建武) 18년)이다. 수로왕(首露王)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가락(駕洛)의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나 군신(君臣)의 칭호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족의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오천간(五天干)ㆍ신귀간(神鬼干) 등 9간(干)이었다.
서기 42년 3월 이들의 제삿날에 구지봉(龜旨峰) 산정에서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2, 3백인이 모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를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원을 하던 중 한 줄기 붉은 빛이 하늘에서 내려 달려가 보니 해같은 황금알 여섯이 금합(金盒)에 담겨져 있었다. 다음 날 여석 개의 황금알은 동자(童子)로 화했고 그중 먼저 나온 동자이름은 수로(首露)라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姓)을 김(金)씨로 하였는데 그가 바로 대가락국(大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6개의 알에서 화생(化生)한 첫 번째의 수로(首露)는 대가락(大駕洛)(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함)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童子)들도 각각 5가야(伽倻)의 국주(國主)가 되었으니 아라가야(阿羅伽倻)(현 함안(咸安)지방), 고령가야(古寧伽倻)(현 함양(咸陽)지방), 대가야(大伽倻)(현 고령(高靈)지방), 성산가야(星山伽倻)(현 성주(星州)지방), 소가야(小伽倻)(현 고성(固城)지방), 금관가야(金官伽倻)(김해(金海))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黃山)(신라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남쪽으로는 남해(南海)에까지 이르러 지금의 경상도 일원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수로왕(首露王) 뒤 아유타국(阿踰陀國)(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비(妃)로 맞이하여 10왕자(王子), 2공주(公主)를 두었다. 10왕자 중 장자(長子)인 거등왕자(居登王子)가 왕위를 잇고, 둘째ㆍ셋째 왕자는 모성(母姓)을 따라 허(許)씨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가야산(伽倻山)에서 진상원(震上院)으로 들어가 수도,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도 경남(慶南) 하남군(河南郡)에 칠불사(七佛寺)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허(許)씨의 모성(母姓) 계승을 우리나라 고대의 부계(父系)사회와 모계(母系)사회와의 접합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거등왕(居登王)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들이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칭하고 있다.
대가야(大伽倻)는 532년 10대 구형왕(仇衡(구해(仇亥))王)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가 망하였다. 신라에서는 병합된 대가야(大伽倻) 유민(遺民)들의 민심수습을 위해 구형왕(仇衡王)에게 대등(大等)의 위(位)를 주고 본국 김해(金海)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즉 가야왕족(伽倻王族)은 신라의 진골 신분에 포함되었는데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 (족보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있음) 김무력(金武力)은 신라에서 벼슬하여 각간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김유신(金庾信)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맺어지고 삼국통일에 큰공을 세워 흥무대왕(興舞大王)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신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가문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김해김씨(金海金氏)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누어진 분파(分派)도 1백48개에 이른다. 그중 대표적인 분파는 다음과 같다.


김유신(金庾信)의 직계종파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경파(京派)(금녕군파(金寧君派)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중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감무공파(監務公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다.
삼현파(三賢派)의 삼현(三賢)은 김극일(金克一), 김일손(金馹孫), 김대유(金大有)를 가리킨다.

수로왕(首露王)을 1세로 하여 56세조 김유공(金維公)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이고 51세조 김지서(金之瑞)의 후손이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김평(金平)의 후손이 양의공파(襄毅公派)다.
40세조 김명해(金命海)의 후손에서 김명택(金明澤)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 김불비(金不比)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김만희(金萬希)의 후손이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김종정(金宗貞)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천익(金天翼)의 후손이 부호군파(副護軍派), 김을동(金乙棟)의 후손이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김문(金汶)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이장(金以章)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다.


31세조인 김상인(金商寅)의 후손은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40세에 들어 김상경(金尙慶), 김중경(金重慶)의 두 후손이 있게 되었으나, 김중경의 후손은 없고 김상경의 후손도 단계로 이어져 51세조 김운(金芸)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로 분파되었다.
27세조 김진의(金進意)의 후손은 42세로 김시원(金時元)까지 단계(單系)로 이어지고, 김시원의 두 아들 이후 여러파로 나누어졌다. 57세조 김대진(金大震)의 후손이 운은공파(雲隱公派)이고, 54세조 김세장(金世章)의 여덟 아들의 후손이 8개 파로 나누어졌는데, 김탁(金琢)의 후손이 문경공파(文敬公派), 김근(金瑾)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김관(金王寬)의 후손이 한림공파(翰林公派), 김구(金球)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 김련(金璉)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 김현(金現)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호(金琥)의 후손이 휴은공파(休隱公派), 김선(金璇)의 후손이 장사군파(長沙君派)다.
56세조 김인서(金麟瑞)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51세조 김득하(金得河)의 후손이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50세조 김경신(金敬臣)의 후손이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다.


22세조 김천여(金天與)의 후손은 단계(單系)로 이어져오다 38세 이후 두 계통으로 후손이 이어지고 있으나 분파로는 김덕휴(金德休)의 후손 첨정공파(僉正公派)만이 ‘무오보(戊午譜)에 보이고 있다.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옹 14년 백제 동북(東北)의 땅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을 때 군주(軍主)가 되었는데 관산성(管山城)싸움에서 신주병(新州兵)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성왕이 이끄는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데 기여하였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眞興王)의 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결혼하였다. 각간(角干)에 올라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진평왕(眞平王) 51년 (629)에 소판(蘇判)으로 각간(角干) 김용춘(金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 아들 김유신(金庾信)이 적장을 베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시조 김유신(金庾信)은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로 신라왕실인 만명부인(萬明夫人)에게서 태어났다. 진평왕(眞平王) 31년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심신(心身)을 수련했다. 629년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高句麗軍)을 격파하고, 압양주군주(押梁州軍主)가 되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백제군(百濟軍)과 여러번 싸워 이겼으며, 진덕여왕(眞德女王) 1년 반역을 꾀한 비담(毗曇)ㆍ염종(廉宗)의 반군(叛軍)을 토벌하였다. 648년 백제(百濟)의 대양주(大梁州)를 공격하여 12성(城)을 함락, 이찬(伊湌)이 되어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다음 해 침입한 백제(百濟)군을 소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고, 654년 왕(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알천(閼川)과 상의,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 (무열왕(武烈王) 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 사비성(沙沘城)을 함락시켜 백제(百濟)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문무왕(文武王) 3년 백제(百濟)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7년 당(唐)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 다음 해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신라의 최고 위계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올랐다. 문무왕 13년(673)에 죽었는데, 왕명에 의해 장례를 지내고 비문을 세웠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그 후 160여 년이 지나 흥덕왕(興德王) 10년(835)에 ‘순충장렬 흥무대왕(純忠壯烈 興武大王)’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이다.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花郞)이 되고, 무열왕(武烈王) 7년 형 유신(庾信)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唐軍)과 호응하여 백제(百濟)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668년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고, 다음 해 양도(良圖)와 함께 사죄사(謝罪使)로 당(唐)나라에 갔다가 다음 해 귀국했다.
김유신(金庾信)은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그 중 둘째가 유명한 원술(元述)이다.
당(唐)은 멸망된 고구려ㆍ백제의 옛 땅을 당(唐)의 영토로 편입하려고 했으나 신라가 백제ㆍ고구려의 유민과 힘을 합쳐 당(唐)의 세력을 쫓아내려 하자 문무왕(文武王) 12년(672)에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에 쳐들어왔다. 원술(元述)은 패장(稗將)으로 출전, 대전하다 전세가 불리하여 부하 담릉(淡淩)의 권유로 뒷날을 기약하고 후퇴했다.


왕이 패전 이유를 묻자 김유신(金庾信)은 “장군과 병졸이 목숨을 걸고 병영을 지켰어야 하는데 원술(元述)은 말을 돌려 달아났으니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임전무퇴의 가훈까지 어겼으니 참형을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고 하였다. 원술(元述)은 부끄럽고 두려워 아버지 김유신(金庾信)을 보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살았다.
김유신(金庾信)은 죽은 뒤 어머니 뵙기를 청하였으나,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삼종(三從)의 뜻에 따라 남편이 없는 지금 의당 자식을 쫓을 것이나, 원술(元述) 같은 자식은 이미 선군(先君)에게 자식의 도리를 못했으니 내 어찌 그의 어머니가 되겠느냐”며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원술(元述)은 탄식하며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문무왕(文武王)15년(675) 당병(唐兵)이 매소천성(買蘇川城(楊州))에 쳐들어 오니 元述은 지난날의 욕됨을 씻기 위해 다시 출전,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니,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자식임을 한으로 여겨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화개(花開)에 식읍(食邑)을 받았다 하는데, 그의 후손이 진주(晉州)김씨(金氏)로 분적하였다.


김암(金巖)은 유신(庾信)의 현손으로 대아찬(大阿湌) 김윤중(金允中)의 서손(庶孫)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젊어서 이찬(伊湌)이 되었다. 당(唐)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는데, 틈틈이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혜공왕(惠恭王)때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양산(梁山)))ㆍ강진(康津(진주(晉州)))ㆍ한주(漢州(광주(廣州)))등 3주(州)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을 지냈다. 외관(外官)으로 나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위무하고 여가에 병법(兵法)을 가르쳐 사람들이 편하게 여겼다.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으로 있을 때 황충(蝗蟲)의 해를 구했다.
김유신(金庾信)을 정점으로 하여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김해김씨(金海金氏) 이후 그만한 가세(家勢)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에서는 정승급 15명, 명신(名臣)ㆍ공신(功臣)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하였다.


경파(京派)(금녕군파(金寧君派))의 파조(派祖)인 김목경(金牧卿)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품계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나 국사(國事)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보(金普)는 목경(牧卿)의 아들로 충정왕(忠定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고 공민왕(恭愍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시종(侍從)한 공으로 즉위한 후 1등공신(功臣)에 올라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攘竊匡輔功臣)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 의성덕천창제조(義城德泉倉提調)를 겸했다. 공민왕(恭愍王) 12년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해졌으나, 기철(奇轍)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좌시중(左侍中)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에게 국정(國政)을 위임함이 옳지 않다고 누차 왕에게 건의하여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유학자로서 불교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김관(金管)은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의 파조(派祖)다. 일찍이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ㆍ국자사(國子師)에 이르렀는데, 충선왕(忠宣王) 때에 누차 부도(浮屠(불교(佛敎)))를 배척하고 학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자고 상소하였다. 고려말 불교배척에 앞장섰던 유학자 중의 한 명이라 하겠다.
감무공(監務公) 김익경(金益卿)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은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ㆍ첨교태박(僉校太博),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 우복야보문각대제학(右僕射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 후 은거했다.
문경공(文敬公) 김탁(金琢)은 충혜왕(忠惠王)조에 문과에 오른 후 좌정언(左正言), 우사의(右司議),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을 연경에서 시종(侍從)한 공으로 공민왕 즉위 후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攘竊匡輔功臣)이 되고 전리판서(典理判書),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최유(崔濡)가 원병(元兵)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물리칠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뒤에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ㆍ특진봉조가(特進奉朝駕)에 올랐다. 성리학의 보급에 힘썼고 친명외교팡 속했다.


부사공(府使公) 김근(金瑾)은 공민왕조에 좌정언(左正言)을 거쳐 행용성부사(行龍城府使)에 이르렀다. 신돈이 나라일을 도맡아 처리하자 그 부당함을 누차 상소하여 호남으로 귀양갔다.
충정공(忠貞公) 김구(金球)는 충정왕 때 지밀직사(知密直使)를 지내고 공민왕조에 원(元)에서 시종(侍從)한 공으로 동덕보리공신(同德輔理功臣)이 되고 참의평리(參議評理)에 올랐다. 그의 손자 김득필(金得弼)은 조선 태종 즉위년 문과에 올라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장사군파(長沙君派) 김선(金璇)의 아들 김충(金冲)은 태종조에 문과에 올라 호조참의(戶曹參議), 참판(參判)을 지냈다. 김명택(金明澤)은 공민왕 때 동지밀직(同知密直)을 거쳐 도첨의(都僉議)ㆍ판삼사부사(判三司副使)에 이르렀다


김만희(金萬希)는 공민왕 때에 대언(代言)을 거쳐 좌찬성사(左贊成事), 삼중대광도첨의문하시중(三重大匡都僉議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 후 태조(太祖)가 고려조의 유신(遺臣)을 불렀으나 항절(抗節)하고 나가지 않았으므로 제주에 유배되었다.
율은(栗隱) 김손(金遜)은 충목왕조에 과거에 올라 공민왕조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호위한 공으로 호위공신(護衛功臣)이 되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했다. 신돈 집권 때 귀양갔다가 풀려나 한림학사(翰林學士)ㆍ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대호군참정(大護軍參政)에 이르렀다.


아들 김전(金鈿)은 공민왕조에 문과에 오른 후 한림학사(翰林學士) 겸(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 정몽주가 이성계(李成桂)파에 의해 살해되자 포은과 동원(同原)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 유언하고 단식하며 죽었다.
김두(金㺶)는 김전(金鈿)의 아들로 공민왕조에 관직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겸(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성계(李成桂)가 자기 휘하에 두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 율은(栗隱)이 옥중에서 죽은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양왕이 왕위에서 쫓겨나 원주에 안치(安置)되자 두문동인(杜門洞人)들과 함께 불조현(不朝峴)에 올라 조선에 불조(不朝)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앞서 율은공(栗隱公)이 은풍(殷豊)에 내려가 학사고(學士庫)를 짓고 누대의 교지(敎旨)와 남하지(南下誌)를 간직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김두(金㺶)가 선적(先蹟)을 참고하여 이어서 학사고(學士庫)에 간직하였다. 어느날 홀연히 불이 일어나 한 동리가 전부 탔는데 학사고(學士庫)에 간직해온 개국공 이하 29대(代) 문적(文蹟)과 교지(敎旨)등의 물건이 모두 탔다. 이에 그는 “국운이 다하였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며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사정공(司正公) 김이형(金利亨)은 사헌부사정(司憲府司正)을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ㆍ지제교(知製敎), 예문관수찬관(藝文館修贊官)을 지냈다.
김유(金庾)는 공민왕 11년 강릉도병마사(江陵道兵馬使)로 홍건적(紅巾賊)을 대파, 다음 해 왕경(王京)수복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이 해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鏞)의 난을 평정, 1등 공신이 되었다.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 있을 때 덕흥군(德興君)이 고려왕(高麗王)을 칭하고, 원(元)나랑 있던 고려인도 모두 이를 따랐으나 홀려 고려에 있는 공민왕을 지지하였다. 1367년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로서 탐라(耽羅)의 목호(牧胡)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고, 1374년 다시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 겸(兼) 서해교주도도순문사(西海交州道都巡問使)로서 탐라(耽羅)를 평정하였다.
우왕 때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지고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인수(宗人數)에 비해서는 조선조에 크게 가세(家勢)를 떨치지 못했다. 신라, 고려에서보다 조선조에 들어 쇠퇴하였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옛날에는 성했다가 지금은 쇠한> 성씨를 지적하는 가운데 김해김씨(金海金氏) 나로 들고 있다.
이에 대해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1464~1498년)의 사초(史草)에서 일어난 무오사화로 가문이 큰 화를 입었기 때무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 김문(金門)의 꽃은 모암(母巖) 김극일(金克一)에게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김극일(金克一)은 삼현파(三賢派)의 파조(派祖)인 김관(金管)의 5세손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조모가 병으로 눕자 단지(斷指)로 피를 흘려 넣어 그 병을 낫게 했다. 뒷날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묘막을 지어 시묘의 예를 올렸고 조부상에도 조석으로 성묘하여 정성을 다하니 호랑이가 나와 길동무가 되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그의 2남 김맹(金孟)이 세종(世宗)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에 이르렀는데, 맹(孟)의 세 아들 준손(駿孫)ㆍ기손(驥孫)ㆍ일손(馹孫)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고에 올라 ‘김씨삼주(金氏三珠)’란 호칭을 들었다.


김준손(金駿孫)은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고, 김기손(金驥孫)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는데 이 가운데서도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가장 돋보인다.
김일손(金馹孫)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17년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성종(成宗) 때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관리(官吏)들의 비행을 직필(直筆)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는데 전라(全羅)관찰사 이극돈(李克墩)에 대한 史草가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으로 참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었고, 그 때 김일손(金馹孫)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말썽이 되었다. 이는 옛날 항우가 초(楚) 양왕(壤王)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이극돈(李克墩), 노사신(盧思愼), 한치형(韓致亨) 등이 들고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金馹孫) 등 일족은 참수 당하거나 유배되고 만다.
탁영(濯纓)은 시가(詩歌)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탁영집(濯纓集)’이 전한다.

이 시문집은 초간(初刊)연대는 미상이나 1669년에 중간되었으며 1~4권에 시문이, 5권에는 습유(拾遺)가, 6권엔 행장(行狀)ㆍ묘문(墓文)ㆍ제문ㆍ사향(祀享)에 관한 기술 등이 실려 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의 형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은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 김준손(金駿孫)의 아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숙부(叔父) 김일손(金馹孫)이 사형되고,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가가, 중종반정(中宗反正)후 풀려나왔다. 다음 해 진사(進士)가 되고,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을 지내다가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역임했다. 이해 칠원군수(漆原郡守)를 지내다 己卯士禍가 일어나 현량과(賢良科)가 없어지자 고향인 청도(淸道) 운문산(雲門山)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시서(詩書)로 만족했다.


그의 호 삼족당(三足堂)은 60을 살았으니 나이도 족하고 벼슬도 족하고 의식주도 족하다 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뒷날 남명(南溟) 조식(曺植)은 묘지(墓誌)에 짓기를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아아 애달프다. 내가 일찍이 남을 보증한 적이 없었고 천하의 선비로 인정한 이는 오직 공(公) 뿐이다.”라고 했다.
김자정(金自貞)은 단종 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한 뒤, 성종 3년 선위사(宣慰使)로 충청(忠淸)ㆍ전라(全羅)ㆍ경상도(慶尙道)에 파견되었다.
1477년 재가금지(再嫁禁止)의 논의(論議)가 일어나자 이극돈(李克墩)ㆍ심한(沈翰) 등과 함께 유약(幼弱)한 과부일 경우에는 재가(再嫁)를 허락하자고 주장했다.
1481년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성임(成任) 등과 함께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했다. 그 뒤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김극일(金克一)의 5세손이며 목사(牧使) 김언유(金彦諭))의 아들이다 명종 1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거쳐 양주목사(楊州牧使), 사재감정(司宰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9년 동지(同知) 돈녕부사(敦寧府事) 때 왕명(王命)으로 평양(平壤) 기자비(箕子碑)의 비문을 베껴 가지고 돌아왔는데 마침 벌어진 폐모론(廢母論)의 정청(庭請)에 불참하여 면직,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다.
시(詩)ㆍ서(書)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를 따랐으나 평양(平壤)의 숭인은비(崇仁殷碑), 회인(懷人)의 조중봉(趙重峰) 고택 유허비, 여수(麗水)의 이충무공수군(李忠武公水軍)대첩비의 글씨가 작품으로 남아있다.


충간공(忠簡公) 김보(金普)의 후손인 갑봉(甲峰) 김우항(金宇杭)(1649~1723)은 청송부사(靑松府使) 김홍경(金洪慶)의 아들로 조선조에서 김해김씨(金海金氏) 은 유일한 정승이다. 현종 1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길에 오른 뒤 숙종 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형(刑)ㆍ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일찍이 이상(李翔)을 구하는 변호를 한 혐의로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기용되어 회양부사(淮陽府使)ㆍ전라도(全羅道)관찰사를 지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때는 노론(老論) 4대신이 화를 입자 그들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숙종(肅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종(景宗)은 성격이 온순하고 무자다병(無子多病)했다. 이에 하루 빨리 왕세자를 책봉하자는 사람이 당시의 노론(老論) 4대신이었던 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이이명(李頤命ㆍ조태채(趙泰采)였다. 이들의 의견을 쫓아 경종(景宗)의 동생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었으나 뒤에 승지(承旨) 김일경(金一慶)등이 4대신을 4흉(凶)으로 몰아 공격하고 끝내 역모의 죄를 씌워 극형을 당하게 했던 것이다. 갑봉(甲峰)이 죽자 왕은 관(棺)을 하사하여 장례를 지내도록 했다. 문집으로는 ‘갑봉집(甲峰集)’이 전한다.
명장(名將)으로는 김경서(金景瑞), 김완(金完)을 들 수 있다.

 

김경서(金景瑞)는 부정공(副正公) 평(平)의 후손으로 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미천하다는 이유로 파직되는 불운을 맞았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능력을 인정, 다시 기용되어 평양(平壤)방위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오는 적병을 격퇴한 공으로 평안도방어사(平安道防禦使)가 외었다. 이듬해 7천7백의 병력으로 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 경상도방어사(慶尙道防禦使)로 전직했고 이곳에서 권율(權慄)장군의 명으로 남해안 일대 적을 소탕,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승진되었다. 1618년 그가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을 때 후금(後金)을 치기 위한 명(明)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다.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한다. 부차(富車)싸움에서 패전한 강홍립(姜弘立)은 적군을 이끌고 금(金)나라에 항복, 김경서(金景瑞)도 함께 포로의 몸이 된다. 그는 6년 간 포로생활을 하면서 적정을 탐지하여 이를 기록, 본국에 보내려다 강홍립(姜弘立)의 밀고로 이역 땅에서 사형을 받았다. 죽은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양의공(襄毅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김완(金完)은 학천군(鶴川君) 김극조(金克祧)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 밑에서 무술과 학문을 익혀 무과에 급제했다. 1624년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亂)을 만나 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반군을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고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남파(南派) 김천택(金天澤)은 조선후기 시조정리에 큰 업적을 남겨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숙종(肅宗)때 포교(捕校)를 지냈다. 창곡도(唱曲道)에 뛰어난 천재이며, 시조도 잘 지어 ‘해동가요(海東歌謠)’에 57수(首)를 남겼고, 영조 4년(1728)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 국문학사상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수장(金壽長)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에서 후진을 양성, 시조의 정리와 발달에 공헌하였다.


조선조 화단의 최고봉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도 김해김씨(金海金氏) 중이다. 만호(萬戶) 김진창(金震昌)의 증손으로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滉)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 된 뒤 어진화사로 정조(正祖)의 얼굴을 그렸다.
정조 19년 신창현감(新昌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했다. 다음 해 왕명으로 용주사(龍珠寺)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ㆍ판화를 그렸다. 김응환(金應煥)에게 그림을 배웠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 산수ㆍ인물ㆍ화초 등 그의 뛰어난 필치는 묘경(妙境)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표작 ‘투견도(鬪犬圖)’는 양화(洋畵)와 음영을 사용했고, 용주사(龍珠寺)의 ‘삼세여래후불(三世如來後佛)탱화’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훈염(暈染)기법을 구사,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원근고저(遠近高低)를 표현했다. 특히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시켜 서민적인 풍취를 담았는데, 그의 이 같은 기풍은 생활에도 나타나 생기면 마시고 없으면 굶어버리는 생활을 했다.
남겨진 작품으로는 ‘투견도(鬪犬圖)’ 외에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신선도병풍(神仙圖屛風)‘, ’쌍치도(雙雉圖)‘,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 등이 있다.


단원(單元)의 아들 긍원(肯園) 김양기(金良驥)도 아버지의 재질을 이어받아 산수와 집ㆍ나무를 잘 그렸고 작품으로 ‘월전취적도(月前吹笛圖)’, ‘고목소림도(古木疏林圖)’ 등이 있다.
김대건(金大建)은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다. 세례명은 안드레아, 용인(龍仁)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은 1839년 기해(己亥)사옥 때 순교,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를 따라 마카오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45년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는데 성공, 앞서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이래 위축된 교세(敎勢)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 한 때 병을 얻어 눕기도 했으나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上海)에 갔다. 김가항신학교(金家港神學校)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인(韓國人)최초의 신부에 임명되어 만당성당(萬堂聖堂)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執禮)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ㆍ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해(上海)를 떠나 충남(忠南) 강경(江景)에 잠입, 서울로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 전도에 힘썼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黃海道) 연안을 답사하려다 등산진(登山鎭)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하고 순교했다. 로마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7월 5일 그를 복자위(福者位)에 올렸다.


낭산(郎山) 김준연(金俊淵)은 일제시대에서 광복 후에 걸쳐 활동했던 인물이다. 일본동경제국대학(日本東京帝國大學)과 독일 베를린 대학(大學)에서 정치(政治)ㆍ법률(法律)을 연구하였다. 그 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내고,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27년 좌익계의 화요회(火曜會)에 가담, ML당(黨)(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조직하고 신간회(新幹會)조직에도 참가하였다. 1928년 제 3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사건으로 투옥, 7년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와 동아일보(東亞日報) 주필(主筆)로 있다가, 1937년 일제기말소(日帝旗抹消)사건으로 사직하였다.
8ㆍ15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創黨)에 참여하였고,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되어 초대 법무부장관(法務部長官)을 지냈으며 3ㆍ4ㆍ5ㆍ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에는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으며,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대표최고위원(代表最高委員)을 지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