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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29~30/ 참사랑교회 수양회 말씀 / 신명기 33:29 / 행복한 신앙생활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할렐루야!
참사랑교회 수양회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8월 수양회에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당황했습니다.
왜냐면 말씀은 우리 최종환 목사님께서 부족함 없이 너무나 잘 전하시고 가르쳐 주실 것인데 내가 가서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는데 목사님께서 특별한 주제보다 살아왔던 이야기 등을 해주시라고 하셔서 대답했습니다.
대답을 하긴 했는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의 삶은 온전히 감사뿐이었음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해 보려고 합니다.
제게 두 번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먼저 간증을, 그다음엔 행복한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미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보면 그 교회 성도들의 행복 수준을 알 수 있거든요.
최 목사님은 틈만 있으면 교회 장로님 자랑, 권사님 자랑, 집사님 자랑을 하시거든요.
얼마나 충성을 잘하고 순종을 잘하시는지 신경 쓰실 일이 없다는 거예요.
교회 이전을 하면서도 어려움이 있을 뻔했지만, 장로님들이 잘하셔서 은혜롭게 해결되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시는 데, 제가 시기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참사랑교회 성도들은 참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는 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 우리 집 12남매 중에 아홉 번째로, 그것도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 어머니께서 제 위로 형 둘, 누님들이 여섯, 모두 8명과 저와 동생들 모두 12명을 나셨는데, 그중에 네 명은 홍역으로 죽고 8명만 살았습니다.
제가 아홉 번째 그것도 아들로 태어났으니 장남, 장손의 권세가 보통이었겠습니까?
마을에서 깐깐하고 고집쟁이로 이름을 날리셨던 할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귀하게 높여주셨던지 누님들이 저에게 꼼짝을 하지 못했다니까요.
셋째 누나와 넷째 누나가 같은 시기에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갈 때 넷째 누나는 제 책 보따리를 들고 셋째 누나는 저를 업고 다녔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배경 때문에 동네에서도 골목대장 노릇을 했지요.
그렇게 성장하다 보니 온갖 못된 짓은 앞장서서 하게 된 저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다면 얼마나 빗나간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아마 감옥은 아닐지라도 경찰서는 수십 번 다녔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께서 사촌 형을 통해 불러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형은 나만 전도해 놓고 자신은 군대 가더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이 되어 왔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슬픔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집이 매우 가난했다는 것입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했지요. 중학교를 못 가게 되어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만 보면 미워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때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가출까지 했지만 넉넉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2. 신앙생활의 시작
원망, 불평 가운데 살다가 17세에 형을 따라 삼길교회라는 장로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집에서 교회까지 8km(약20리)에 있는 교회인데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일 예배는 기본이고, 수요일 예배와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는 말 그대로 열성 당원이었지요.
그때 성경도 엄청 많이 읽었습니다.
시냇물을 하나 건너야 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북정물이 배꼽 위 가슴까지 차오르는데 옷을 벗어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 교회에 갔습니다. 그 강이 붕어섬 출렁다리 있는 곳이지요.
강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건널 수 없을 때는 30리도 넘은 산길을 돌고 돌아서 갔지요.
11시 예배 시간에 지각은 당연했고..., 그래도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고 반겨주시는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의 따뜻한 정에 예수가 아닌 교회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학교 교사(반사)로 임명받게 되었고, 얼마나 좋았는지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교회에서 10리도 넘는 곳까지 교회 차도 없던 때라 걸어가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걸어서 데려다주었지요.
그렇게 28세까지 믿음 생활을 하다 보니 곽영철 담임 목사님께서 권사님 딸을 소개해 주셨고, 그 권사님도 저를 좋게 보셨는지 허락을 하셔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35세에 장로로 피택 받아 장로고시까지 합격은 했지만, 안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장로 안수 받을 때 드려야 할 감사헌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시온교회에서도, 새군산교회에서도 임직자를 세울 때 헌금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신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제가 우리 집안 장손이기 때문에 장손이 예수 믿는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핍박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영접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 작은아버지께서 얼마나 핍박을 하시는지 성경책은 모두 찢거나 태워 버리고 할아버지 제사에 절하지 않는다고 이만한 돌을 들고 죽이겠다고 쫓아다니셨습니다.
그 작은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찾아가 예수님 믿으라고 하면서 기도해 드렸더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후,
3. 김 농사와 갈림길
33세 때, 새만금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이지요. 내초도에서 살던 처의 사촌 오빠가 김농사를 하는데 바쁘다고 며칠 와서 도와달라고 하여 마침 농한기 때라 가서 도왔습니다.
김농사를 돕다 보니 대박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더라구요.
25년 전, 500만 원을 투자해서 7천5백만 원을 번 것을 제가 보았고 제 손으로 그 돈을 관리했지요. 그렇게 해서 한 해 김 농사가 끝나고 임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형님이 만나자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그 형님 집으로 가서 만나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수입이 얼마나 되냐고 묻기에, 이저 저것 다 제하고 나면 한 2백만 원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를 도와주면 1000만 원은 보장해주고, 플러스 알파로 더 준다는 거예요. 제가 어떤 대답을 했을까요?
제가 직접 김 농사를 해봤잖아요. 그리고 대박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자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부푼 꿈을 꾸면서 집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팔 것은 팔고 못 팔 것은 이웃 사람들 나눠주고 와서 소룡동에 있는 장민 주택 13평짜리를 샀습니다.
13평짜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6식구가 사는 것입니다.
내초도에까지 아내는 아이를 업고 안고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김농사를 했는데 그해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불지 않아 김농사를 망쳐 버렸습니다.
그 형님도 전해에 벌었던 7천 5백을 다 투자했는데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1,000만 원에 플러스 알파까지 기대하면서 열심히 죽을 뚱 살 뚱 일했는데 그해 그분으로부터 받은 돈은 전부 40만 원 한 번 받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기가 막힐 상태에 있었는데 초등학교 동창생이 빵 대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빵 배달을 했고, 아내는 델몬트 쥬스 배달을 하게 됩니다. 그때 해망동교회 앞에 있는 조그만 가게까지 자전거를 타고 배달했습니다.
그래서 해망동을 지나갈 때마다 그때가 생각이 나서 서로 얼굴을 보면서 웃곤 합니다.
그렇게 2년을 살았습니다.
4. 어떤 부흥회
그러다가 또 우연히 친구였던 벧엘교회 이병영 목사를 만났는데 자기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하여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첫날 밤 부흥회 말씀을 마치고 부흥강사 목사님이 상담하실 분은 상담하라고 하는데 저는 부흥강사와 상담하는 것은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이병영 목사가 잡아끌다시피 하여 강사 목사님 숙소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이병영 목사님이 “목사님, 제 친구인데 기도 좀 해주세요”라고 하더라구요.
강사 목사님은 한동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이 목사님이 재촉하는 거예요.
그때 강사 목사님이 하신 말씀,
“해야 할 일은 안하고 다른 짓을 하고 있으니 고생길이 멀었구만...”
궁금해 여쭈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안 한다니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신학교 공부해 봤나?” “아니요”
“신학 공부한 것 같은데, 정말 안했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통신 성경 공부와 김리교 웨슬레 신학을 공부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그 길이 바로 집사님이 할일이야” 하시기에 제가 두 번도 생각않고 못한다고 했지요.
가진 돈도 없고, 아내와 함께 하루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데 팔순 노모와 아이가 셋이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이 정규 신학교로 편입시켜 주고 등록비를 대주고 자기 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하게 할테니 신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래도 못한다고 했더니, 그 목사님 하시는 말, “아이가 다칠텐데...” 하시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그러나 속으로는 “이 양반이 겁주고 있네” 하고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분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전화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 땐, 그때 그 목사님 말씀을 들었더라면 어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목사님이 많이 알려진 배명국 목사님이셨습니다.
5. 느닷없이
그 일은 잊어버리고 빵 배달과 아내의 델몬트 배달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수요일과 새벽예배 나가던 은적사 앞 은천 감리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돌아오다가 그 교회 박 권사라는 분을 만났는데 이렇게 묻더랍니다.
“남편 집사님 지금도 빵 배달하나요?” “예” 권사님 가로되
“내가 어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집사님 남편을 품에 꼭 안고 계시는데 남편 집사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서요” 이러더랍니다.
아내는 그런 말을 제게 하지도 않다가 나중에 사건이 벌어진 후에 그 말을 하더라구요.
어떤 사건일까요?
주일날 교회에 가서(소룡동에 살면서 2년 동안 본교회인 임실 신덕면 명광교회 출석)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 축도까지 마치고 끝나는데 제가 갑자기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가더니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물론 저는 그때도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 신학 공부하겠습니다. 그러니 기도해 주십시오.” 하더라는 거예요.
아내는 지금도 가끔 그런 말을 하는데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청문회 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6. 작은 기적
사실 저는 신학교를 갈 자격이 없던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때는 부끄럽게 여겼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당시 최종학교 졸업장이 고등학교도 아니고 중학교 졸업장도 아닌 운암국민학교 제38회 졸업장 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담임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호성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지요.
간증서와 함께 입학원서를 내게 된 동기를 쓰라고 해서 “저는 제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어린이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라고 썼지요.
당시 교무과장이던 인후동교회 김필수 목사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입학원서를 보니 국민학교 졸업,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야간반이라고 썼네”
“예‘
목사님께서 제 간증문을 읽어보았는데 목회를 해야 할 사람 같으니 야간에 다니지 말고 주간으로 다니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의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지요.
학력도 부족하고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하고, 가족들 때문에, 주간은 힘드니 그냥 야간으로 다니겠다고 하고 돌아왔습니다.
입학식 날, 주간 부과 야간부를 따로따로 부르는데 제 이름이 주간부에 있더라구요.
그때 저의 입학 동기생은 35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김필수 목사님을 찾아가 물었지요.
”목사님, 왜 제 이름이 주간부에 있습니까?“
”목회를 해야 할 사람 같아서 그랬으니, 등록금은 다니면서 조금씩 나누어 내고, 중고등학교 졸업장은 신학교 졸업하기 전에 검정고시를 합격해서 갖추면 된다“고 하신 겁니다.
당시에 김필수 목사님은 교단 어른이셨고, 목사님들 말씀에 거절해 본 일이 없었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를 다니면서 중검, 고검, 신학을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1학기를 마치고 성민교회 이원봉 목사님께서 만나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만났더니 교육전도사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소룡동 집 가까이 있는 은천감리교회에서 봉사하기로 하고 다다음 주일에 인사하기로 약속이 된 때였습니다.
감리교회 제안, 등록비 다 대준다, 식량 대준다, 한 달에 20만 원씩 주겠다였습니다.
성민교회 제안, 등록비는 말도 없고, 식량과 한 달에 15만 원씩 주겠다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한 주간 동안 기도하면서 주일날 담임 목사(박원종)님께 상담을 요청했지요.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앞으로 성결교회에서 목회하려면 성민교회가 났다고 하셔서 그대로 순종하여 성민교회로 정하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지요. 이미 약속된 감리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약속한 주일 이틀 전 금요일 날 감리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그간 사정을 말씀드렸지요.
그러니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곤란한 얼굴을 하시면서 이번 주일에 환영 예배와 모든 준비를 다 했는데 그럴 수 있느냐면서 광고 시간에 변명할 시간을 줄테니 본인이 직접 나와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광고 시간에
목사님이 시간을 허락하셔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을 알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웅성웅성하면서 ”그럴수가 있느냐? 저래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해, 환영 예배야 송별 예배야...“ 그랬습니다.
7. 작은 목회부터
신학교 등록금도 다 내지 못하고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1학년 2학기 때 성민교회에 초청받아 교육전도사로 갔습니다.
목사님은 부흥회를 1년 내내 나가시는데, 1주일에 두 번, 주일 오후부터 수요일까지,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러니 신학교 1학년짜리 교육전도사가 거의 담임목사였지요.
새벽기도 1,2,3부까지 설교해야 하고, 수요일 설교해야 하고, 어떤 때는 주일 오후까지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엄명이 있었는데요, 부목사는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잘하면 안 되고, 설교 시간은 15분 안에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짧은 설교 공부 많이 했습니다.
설교 준비해야 지요, 신학교 공부해야지요, 또, 검정고시 준비해야지요, 심방도 했습니다.
교육전도사로 부임한 지 7일 만에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정호 목사님 부친께서 돌아가셨는데 담임목사님은 부흥회 가셔서 전화했더니 임종예배, 장례예배, 하관예배 성경 구절 알려주시면서 장로님들과 상의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신학교 1학년인데 황당했습니다.
다행이 장로님들이 잘 인도해 주셔서 하긴 했지만, 그것이 소문이 나 가지고 신학교에서 장례식에 대한 공부를 하는데, 제가 조교로 앞장서서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검정고시 보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때는 또 주일날 자격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주일날 시험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하신 말씀 ”그것은 전도사님이 알아서 해“ 그래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이어서 하신 말씀, “그런데 주일날 전도사가 시험 보러 갔다고 하면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게 뭡니까? 시험을 보라는 겁니까 보지 말라는 겁니까?
제가 시험을 보았을까요, 안 보았을까요? 당연히 포기했습니다.
그 후로 검정고시는 국가공휴일에만 보게 되었고, 시험을 볼 때마다 합격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합격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검정고시에 시험 볼 때 가장 어려운 과목이 수학이었습니다.
수학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요. 시험지를 받아 들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한 문제도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제를 읽고 나서 연필로 찍었습니다.
그래서 받은 점수가 60점 이상이면 합격인데 넉넉하게 80점을 맞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거 내가 했겠습니까? 주님이 쓰시려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여 서울신학대학교 목회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도 단번에 합격하여 안수를 받았습니다.
8. 단독목회
그렇게 신학교 4학년 마치고 서울신대 목회신학원 시험에 합격하고 단독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온교회에서 단독목회를 하면서 한일장신대학교를 입학하여 8학기 해야 할 공부를 열심히 하여 7학기 만에 조기 졸업을 하였습니다.
시험이란 시험은 한 번도 떨어져 본 일이 없는 것을 보면 제가 공부는 좀 잘했나봐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당시 왈인정 교회가 담임목회자를 구하는데 이대열전도사, 오명식전도사, 또 타교단 목사까지 설교를 하고 갔습니다. 그때 실로암교회 신기봉 목사님이 저를 추천해 주셨지요.
교회 측에서 설교를 해 달라고 했는데 저는 거절을 했습니다.
성민교회 이원봉 목사님이 허락하지도 않으실 것이고, 저도 별로이었습니다.
설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한 번의 설교는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설교 한 번 들어보고 담임 목회자를 구하는 교회는 싫다고 했습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지금도 아찔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저를 허락해 준 것입니다. 설교도 안 해보고 부임했습니다.
가서 보니 당시에 시골 작은 교회에서 세 교회로 갈라졌을 때입니다.
한 팀은 임재복 목사님과 함께 익산에 영등소망교회를 개척했고, 일꾼들은 다 따라갔지요.
다른 한 팀은 장로교 이도재 목사님과 함께 옆 마을에 서수중앙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본교회에 남은 성도는 어린이들을 합쳐 모두 27명이었습니다.
그래도 신학교 막 졸업하자마자 단독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비가 오는데 교회 강단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거의 10분 만에 한 대야씩 채울 정도로 많은 비가 샜습니다.
그 주일날 설교를 하면서 ”교회를 건축하겠습니다. 모두 기도하십시다.“ 선언했지요.
교회 부임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병아리 전도사가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월요일에 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서울신학대학원으로 공부하러 가버렸습니다.
금요일에 내려와서 보니 집사님들이 자기들끼리 건축위원회를 만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사님 말씀대로 교회를 건축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너무나 고맙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사람과 의논하고 성민교회에서 받은 퇴직금과 저의 통장을 심지어 주택적금통장까지 있는 대로 몽땅 건축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때 배일호 집사(장로)가 “사모님 아파트는 제가라도 사 드릴께요.”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택곤 집사는 직장 다니면서 들었던 적금 만기가 되었는데 적금을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당시에 1천만 원 정도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여 교회 건축을 마치고 교회 명칭을 시온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되었지요. 주일 예배 참석 성도들 107명이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107명이 함께 예배드린 일은 그 교회 역사상 처음이었답니다.
전도사가 부임한지 3년 만에 27명이 107명으로 부흥된 것입니다. 그것도 농촌에서 말입니다. 익산에서도 왔고, 함열과 서수면, 임피면에서도 왔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죠.
제가 부임했을 때 교회 역사가 33년이었는데 제가 16대 담임 목회자이었습니다.
평균 2년에 한 번씩 목회자가 좋은 말로 하면 바뀐 것이고 사실은 쫓겨난 것이지요.
그때 저는 강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전원목회를 하면서 은퇴할 것입니다. 나를 내보내려면 관속에 넣어서 내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목회자들의 평균보다 다섯 배가 많은 10년을 목회했습니다.
전원교회를 위한 첫걸음으로 교회 아래에 있는 논 1,000여 평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군산에 살던 집사 심방을 왔다가 냉면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사택에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조립식 25평 건물 불타는데 30분이면 충분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렸는데 그중에 2,000여 권의 책이 타버린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불이 난 후 사 놓았던 땅에 지금의 사택 50평을 건축하게 되었지요.
당시 전북지방에서 제일 큰 사택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교회 고질적인 병이 10년 만에 꿈틀거렸습니다.
목회자를 바꾸고 싶은 것이지요. 사택에 보일러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 더 이상 교회가 부흥이 안 되네, 목사님 목회 실패했으니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때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예배 시간에 칼부림까지 났습니다.
다행이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사임하는 것이 해답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04년 12월에 사임을 하고 우리 가족 6명이 동신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2005년 2월 15일에 새군산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진 돈은 교회에서 받은 퇴직금 5천만 원이 전부였고, 그것으로 먼저 동신아파트 4천만 원 전세로 들어갔고, 600만 원짜리 교회 중고차 한 대 구입하니 400만 원 정도 남았습니다.
그것으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상가를 알아보러 다니는데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곡동 우체국 2층을 임대 입찰한다고 하여 참여했는데 떨어졌습니다.
입찰에 성공한 사람을 찾아가 사정하여 100만 원을 더 주고 양보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계약금 2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으로 가족(6명)개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현재 교회를 샀습니다. 성도는 모두 20여명 정도 되었지요.
3억 2천 5백만 원 중 2억 원 정도 대출을 받아 월 이자 148만 원씩 갚아나갔습니다.
매월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하면서 10년 만에 완전히 갚았습니다.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지곡동에 개척하면서도 개척할 때부터 선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매월 83만 원씩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심했을 때 월세를 못 내던 지방회 내, 다섯 교회의 월세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창립부터 지금까지 성탄절 감사헌금은 전액 이웃돕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선교하니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채워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자 148만원에 원금까지 갚아나가면서도 선교를 할 수 있었는지...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빚도 갚게 하시고 더 많은 선교도 하게 하시더라구요.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지방회 때마다 큰 교회들이 지방회 선교예산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 존재 이유가 선교이고, 주님의 지상명령이 선교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여기서 제 가족들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자랑이 아닌 은혜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3남매가 있는데 자녀들에게는 많은 미안함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녔던 학원 한번 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잘 자라주어서 고맙기도 합니다.
*** 제 아내와 저는 자녀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십일조를 가르쳤습니다.
십일조의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확실하게 가르쳤습니다.
태어날 때 받은 축의금, 명절 때 받은 용돈, 모두 십일조를 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 아내 이야기
아내가 저를 만나 고생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미안하고 고맙고 그런 마음으로 삽니다.
담임 목사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지 3달 만에 제가 손을 다쳤거든요.
농사지을 때인데 소를 키우기 위하여 카트기를 사다가 시험하는데 그만 손이 딸려 들어가 손가락 세 개를 잃었습니다.
아내는 많은 고민을 했을거예요.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족들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과 본인은 손 다쳤다고 결혼을 안하면 사람도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고 반대하는 가족들을 설득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에게는 고생길이었지요.
서울 살면서 농사는 한 번도 지어보지 않던 사람이 논밭으로 따라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아기를 업고 논과 밭에 따라다니고, 털털거리는 경운기 타고 복숭아 팔러 이동네, 저 마을 다니고, 비틀거리는 짐 빠리 자전거를 타고, 넘어지기도 여러 번 했지요.
김농사 때문에 군산으로 이사 와서도 교회는 신학교 가기 전 2년 동안 본교회를 다녔는데, 아이 셋을 데리고 하나는 업고 둘은 손을 잡고 내초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40분) 중동 간이정류장까지 와서 전주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1시간)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시골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2시간) 고향에 가서 교회까지 20분을 걸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버스타는 시간 3시간 40분, 걸어서 20분 꼬박 4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본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것이 신학교 1학년 때 성민교회 교육전도사로 부름을 받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가버리니 그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델몬트 쥬스를 배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민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공장 생활을 4년간 하고, 시온교회 담임할 때, 주택적금 통장까지 모두 건축헌금으로 바치고, 새군산교회 개척할 때, 너무 많이 고생했습니다.
다시 결혼해야 된다면 아내하고는 안 할 것입니다.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켜 미안하니까...
*** 큰아이 이야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진학이 어려워 일찍 군대를 가려고 해병대에 지원했으나 눈이 나빠서 떨어지고, 육군 일반병으로 지원했지만 역시 눈 때문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방위산업체 근무하게 되었는데, 서수 농공단지에 있는 과자공장에서 근무하면서 받은 월급을 모으기 시작하여 나중에 사업자금으로 쓰더라구요.
대학교 다니면서 또 아르바이트했어요.
1학년 마치고 2학년 등록금을 준비하는데, 어려운 사정을 눈치채고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아빠, 엄마, 대학교는 졸업장 받고 취업하기 위하여 다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저는 휴학을 하고 사업을 하겠습니다. 졸업장이 필요하면 사업하면서 공부하겠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야, 배움이란 때가 있고 사업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기회가 있을 때 지금은 공부해야 한다. 등록금은 염려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 돼“
그러나 아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텔레콤 알바를 했습니다.
그때가 우리 교회 빚을 갚아야 할 때였기에 등록금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때라 단호하게 말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본사에서 직원들에게 대리점을 내 주기 위하여 현장 판매 시합을 시켰습니다.
광주에 가서 호남대회를 하는데 1등을 하고, 부산에 가서 전국대회를 하는데 뽑혔습니다. 그리하여 알바를 그만두고 중앙동 우체국 앞에서 직접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첫 매점은 회사에서 마련해 주었고, 그 후로 매점 4개를 운영하는데 직원이 4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니까 그 어린 나이에도 잘 감당하더라구요.
그렇게 시작된 사업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한 달에 200만 원 300만 원씩 십일조를 하더라구요. 그것이 교회 빚을 갚을 수 있는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 빚을 다 갚고 나니까 정부 정책에 의해서 텔레콤 사업이 예전 같지 않고 가게 월세는 올라가고 하더니 과감하게 그 사업을 접드라구요.
한 3개월 정도 기도하면서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도시락 사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익산에서 친구와 함께 시작하던 도시락 사업이 잘되어 군산에도 사업장을 내더니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갑부 도시락“입니다. 사무실에, 사업장에, 공장에 배달합니다.
교회나 사업하신 분들 단체로 급식이 필요하신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둘째 아이는 전주사대를 다니면서 ROTC 장교로 군대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더니 단번에 중고등학교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장항중학교, 서천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진포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ROTC 장교로 근무하면서 모은 월급이 3천만 원 정도 되어서 그것으로 노량진 학원에 가서 공부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도 안 다니던 학원을 왜 다니냐고 하며 군산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더니 8개월 만에 중고등학교 임용고사 합격하고 합격한 후 3개월 만에 발령받았습니다. 그때 아이가 하는 말은 ”나는 엄마, 아빠 기도로 합격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좋은 아내 만나서 딸만 셋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ᄒᆞᆫ님의 은혜이지요.
*** 딸내미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닭고기 공장에 가서 알바를 하면서 공부하였습니다.
아빠 엄마 도와준다고 국립대학교인 군산대학교를 다녔는데, 얼마나 검소했는지...
그때가 교회 개척을 할 때였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한 달에 대학생 용돈 5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 5만 원은 십일조 5천 원 떼고, 감사헌금, 주일헌금 떼고, 시내버스 차비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커피 한잔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웃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 자격증을 따고 어린이집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는 시집 안가고 아빠랑 함께살겠다고 하더니 마음에 드는 좋은 사람을 만나니 석달 만에 결혼하여 지금 강남에 아파트 두 채를 가지고 잘살고 있습니다.
사위는 서울 강남에서 외제 차(BMW) 딜러를 하는데 참 잘하고 있습니다.
딸은 지금 스페인어 학원에 다니면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저에게는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목회를 허락하셨지만, 좋은 아내와 착한 아이들을 통해서 위로해 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왜 이런 제가 신앙생활, 목회까지, 그리고 자녀들 이야기까지 말씀을 드리냐면 결코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자랑할 만한 일도 못 되지만, 오늘 참사랑교회 수련회 강사로써 성도님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일 했더니 주님께서 내 일을 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신앙생활,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체험을 했고, 지금도 행복하기에,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해 나갈 때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칭찬하심을 믿습니다.
착하다는 말과 충성이란 말은 동의어이고 동격어입니다.
착한 사람은 충성스럽고, 충성스런 사람은 착한 종이라고 칭찬해 주십니다.
반대로 악하고 게으른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악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주님께로 부터 칭찬이 아닌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행복한 신앙생활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제가 경험하고 보았던 행복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기도
오늘 부족한 종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던 날들을 증언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과정은 힘들고 어려워서 고통스럽기도 하였지만, 지나고 난 후 돌이켜 보면 그 어느 것도 그 무엇도, 크고 작은 일들이 주님의 간섭하심이 아니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고,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깨닫고 더 큰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는 착하고 충성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모든 삶을 계획하시고 이끄시고 마침내 승리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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