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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모든 것이 전형적인 가을답다.
강변길, 강원도로 나가는 길은 이미 소통이 벅차다. 내심 걱정스럽다. 어디를 가나 길은 더딜 텐데 ......
마음으로 갈 길을 지레 가늠하며 약속 장소로 향하였다. 기흥휴게소, 평택, 충주 고속도로, 음성, 장호원, 감곡,,,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도착하겠지. 다른 날 보다 일찍 도착하였다. 이건 다 데레사 총무님 덕분이었다. 점심과 떡을 받으러 갈 길을 멈추게 한 장본이 바로 총무님이시다. 내친김에 이것저것 다 챙겨 현장으로 오신다는 이야기에 아침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이다. 퍽이나 일찍 온 사람은 수산나 자매님, 그리고 이어서 릿다자매님과 펠리지아 자매님이 부군과 함께 나타나셨다. 그리고 점심과 아침대신용 떡을 차에 싣고 총무님이 오셔서 물건을 내려놓으시고 환한 미소로 잘 다녀오라 배웅해 주셨다. 오후에 있을 음악 경연 대회를 난 좋은 결과를 기원하는 마음을 가지며 출발하였다. 예상대로 톨게이트 부근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가을을 느끼려 떠나는 사람들이 가을보다 더 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간신히 도착한 감곡, 미사 시작 전 15분인 10시 45분, 다행스럽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미사 참례 준비만 하고 내려도 된다 공지한 후, 먼저 성지 광장으로 들어섰다. 옅은 안개와 어울린 성지 풍광은 몽환의 아름다움이 조금 남아 있었다. 보루처럼 높은 곳에 있는 메괴 성모순례지 지리적인 특성과 생활 환경 영향으로 옛부터 사람 살기 좋은 고장이다.
중원 지방을 관통하여 계립재(하늘재)를 넘어 영남으로 나가는 길목이 바로 감곡이다. 여주 부엉골 보다 여간 좋은 환경이 아니다. 성전도 사람이 있어야 전교가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찾는 사람이 많아야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 뜻이 구만리 넘어 방방곡곡에 햇살 퍼지듯 퍼져 나가는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아시아 전교를 위하여 약 4000명의 사제를 아시아로 보낸다. 조선도 그 안에 포함된다. 특히 극동아시아 지방은 거대한 중국이 타겟이었다. 마카오에 전지 기지를 세운 파리외방전교회 보다 앞선 전교회는 예수회였다. 마카오에 도착한 마테오 릿지는 18년의 시간이 걸린 끝에 북경에 도착한다. 그 길고 긴 시간을 운하을 통하여 북경으로 오면서 중국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문물과 사회상 등등 문화를 접한다. 이런 바탕들이 마테오 릿지의 전교사업에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다. 유교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사회 중국에서 가장 추앙 받는 이들은 유사들이었다. 하느님을 믿는 백성 마테오 릿지와 중국의 저명한 유사와 하느님에 대하여 담론을 벌인 내용을 정리한 책이 바로 천주실의다. 천주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책이다. 상제를 믿는 중국과 하느님을 믿는 서양 종교와 다를께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같은 하느님이지 하는 설득은 결국 땅을 받아내고 그 자리에 최초 성전을 세우고 그 꽃은 아담샬을 통하여 번성의 길로 접어 든다. 이 후 조선도 지식인들의 뼈아픈 반성으로 실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으며 그 안에 함께 실려 온 천주에 대하여 빠져든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천진암 냉천 위 모셔진 다섯분이시다. 그들을 신분적으로는 사대부라 불렀고 인격적으로는 사군자라하며 세상 사람들은 존경하던 이들이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남인들, 공교롭게도 그들은 한양 동북방에 위치한 경안에 몰려 살고 있어 알게 모르게 유대관계 있었고 혼인을 통하여 혈연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대단한 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보통 일이다. 북경교구와 분리된 만주교구 비로서 조선에서 전교할 선교사들은 장춘, 소팔가자 등등에 전진 기지를 세우고 많은 순교자를 만들면서 끝까지 노력한 결과 임가밀로 신부님 같으신 분께서 감곡 매괴 성모 동산을 만들어 우리들이 순례할 수 있는 지금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셨던 임가밀로 신부님의 전교사업은 51년간 지속 되어었다.
위치를 잡은 후 카메라를 꺼내 성전으로 입당하려 걸어 오는 작은자의 마음으로 순례를 즐겨 하는 순례자를 찍었다. 엘리사벳, 카타리나 자매님이 대상이었다.
이어서, 모니카, 체칠리아 자매님도 화인더에 잡혔다.
충북 장호원에 있는 감곡성당은 189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임가밀로 신부님에 의하여 건축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신부님께서는 1893년 서품을 받으신 후 1894년 첫 본당 사목지로 교우촌과 배론으로부터 이전해 온 신학당이 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신다. 하나 본당 사목지가 북쪽끝 산지에 있어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대궐 같은 집을 발견하게 된다. 건물울 대하는 즉시 본당 사목지로 적합함을 발견하고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신다. " 성모님 만일 저 대궐과 산을 저에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되겠습니다. 또한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부엉골로 돌아와 끊임없이 기도로 청해 올리셨다. 당시 집의 소유는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 민응식 집이었다. 1892년 임오군란을 피해 명성왕후가 피난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신부님은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집과 산을 매입하고 매괴성월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신다. 이어서 신부님은 본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여 감곡매괴 성모 순례지가 된 것이다. 매괴성월에 즈음하여 순례의 장소로 정한 것이다.
임 가밀리로 신부님은 "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하시며 51년 동안 감곡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하셨습니다. 1947년 10월 25일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 하시며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프랑스 타르부교구 빌레아두르 지방에서 태어 나신 후 정기적으로 루르드 지방을 방문 루르드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시며 성장하셨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조선에 입국하신 것입니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한다. 1991년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서 두 번째다. 선포식날 장봉훈 주교는 성모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의 징표는 다음과 같다. 설명하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터로 지정되어 공사중 천둥과 벼락 등등의 요인으로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갔으며 1950년 6,25동란중, 공산당원들이 매괴 성모님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였으나 파괴되지 않았다. 7 발의 총탄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성모님의 칠고묵상을 하도록 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징표로 본 것이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과 창호를 통하여 아주 머~언 과거를 유출할 수 있었다. 감곡에 오면 항상 마음은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말기와 열강들의 문호개방 요구, 정치적 혼란, 왕권 뒤에 숨은 외척들의 끝없는 공략으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부러 찾고 찾아 들인 며느리 민비, 그녀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었으며 대원군이란 무시무시한 시아버지와 대척점이었다. 그 사이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대원군의 처 민씨, 그는 천주교인이 된다. 운현궁의 안주인이었지만 자식과 갈등, 남편의 끝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 등등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민응식이란 민비의 육촌 오빠가 살던 집 터이고 임오군란 당시 민비는 이곳에 찾아와 숨어 지낸 적도 있었다. 민비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민응식도 결국 세상이 바뀌자 유배자 신세가 된다. 권력과 영화는 덧 없이 흘러 퇴색하는 것이 속성이다. 성당 주변을 돌며 생성하고 퇴락하는 만고의 진리에 대하여 스스로 관찰해 보았다. 반성할 점이 수두룩하였다.
찰밥으로 점심 나눔의 시간을 갖았다.
성체강복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공경과 같은 신심행사가 전례와 조화를 이루고 신자들을 전례에로 인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고(전례헌장 13항) 성체신심에 관한 예부성성(훗날의 성사경신성성)의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훈령 이 1967년 5월 25일 반포되었다.
이 훈령의 제3부에서는 성체신심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반복적으로 미사가 거행되는 성당에서는 적당한 숫자의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다면 1년에 한
번 장엄하게 성체공경을 위한 현시를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63항). 또한 성체공경과 성체성사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체신심을 위한 여러
가지 다른 지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성체현시 중의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있으며(61항) 이는 새
예식서에서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 훈령의 내용에 맞추어 1973년에<미사없는 영성체와 성체 신심 예식서(De Sacra
Communione et de Cultu Mysterii Eucharistici extra Missam)>가 출간 되었다.
임가밀라 신부님 가묘, 그래도 모셨던 곳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래토록 순례를 이어 온 네 자매님이 냉큼 올라가더니 큰 절로 참례의식을 갖춘다. 공경한다는 사실은 보기 좋은 일이다. 겸손하지 못한 자는 평생 누굴 공경할 수 없다. 겸손은 평화로 나가는 길목이다.
오석에 새겨진 매괴 성모순례성지 표시석 앞에서 ....
이로서 성지순례는 매듭지어 졌다.
성지 참례를 마친 후, 일행은 오늘 걸음여행 재를 향해 출발하였다. 사과 과수원이 아름답고 가을풍광이 넘실되는 월악산 자락으로 접근하였다.
신라는 초기부터 백두대간이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넘어 북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8대왕)이 재위 3년(서기 156)에 계립령(하늘재)을 개척했다. '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계립령(하늘재)은 지금도 문헌상 제 1호 고갯길로 불리우고 있다. 단양 죽령은 이보다 2년 늦게 신라인 죽주에 의하여 158년에 개척되어 죽령이라 부른다 전해 오고 있다. 나제동맹에 밀려 한강유역을 내줘야 했던 고구려는 6세기말 영양왕대에 이르러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조에서 당시 사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자원을 해 선봉에 선 장수는 온달(溫達?~590)로, 그는 영양왕에게 다음과 같은 출사표를 남긴다.'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以西不歸於我 則不返也).
계립령의 또 다른 지명은 하늘재이다. 계립령은 신라 때는 '계립령', 고려시대에는 '대원령'(大院領)으로 불렸다. 어문학자들은 후자에 하늘재의 어원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원령'을 순우리말로 옮기면 '한울재' 정도가 된다. 이 한울재가 빠르게 발음되면서 지금의 '하늘재'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 바로 하늘재와 연관된 이야기가 있다. 하늘재 사이로 연관 마을 이름이 미룩리와 관음리다. 남쪽은 문경 관음리이고 북쪽은 수안보 미룩리다. 관음은 현실을 뜻한다면 미룩은 미래를 뜻하기 때문이다. 신라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신라의 미래를 위하여 결국 하늘재를 넘어 한강유역을 정복한 후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우고 끝내 삼국 통일을 하게 된다. 또한 백두산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뻗은 산맥은 영동과 영서로 갈리지만 소백에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다음 민주지산까지 산맥은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하늘재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하늘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6km 떨어진 조령과 이화령에게 넘는 고갯길로서 관심밖의 재로 변해 버렸다.
몸과 마음이 숲에 드니 참 편안하다. 냉기가 적당하게 피어 오르고 습기 또한 숨쉬기 너무 적당하다. 메마른 곳에 오전내내 있다 숲을 찾으니 심신 모든 것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문헌을 보니 매일 30분 걷는 습관을 유지할 경우 비만, 당뇨, 우울증 발생을 막을 수 있고 암발병과 관절염 예방율도 50%, 고관절염도 40% 이상 막을 수 있다 한다. 치매와 만성피로도 예방할 수 있다한다.
어디 그뿐인가!
걷는 것 만으로도 창의력이 증가 된단다. 앉아 있을 대 보다 걷고 있을 때 창의력이 60% 이상 향상 되었다는 실험이 있다.애플 창업자 스티브잡스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걸으면서 면접하고 회의하기로 유명하다.
적절한 햇빛은 전립선, 유방암, 여드름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비타민 D는 체내 칼슘과 인을 흡수 혈액속에 보관시켜 뼈를 튼튼하게 하고 저항력을 키워 주기도 한다. 걷기는 치매 예방에도 탁월하다 한다. 그것은 바로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하면 뇌 인지 기능 손상이 39% 줄어 들고 기억력 감퇴도 40% 이상 줄어 든다 한다. 치매 예방을 위하여는 일주일에 적어도 10- 14km를 꾸준히 걸어야 효과가 있다 한다. 새겨 둘 일이다. 걷지 않는 자는 삶의 길로 나갈 수 없다 !
서쪽 방향으로부터 드는 빛이 참 곱다. 빛처럼 고운 하늘재로 가는 길, 우선 숨이 차지 않는다. 가을빛 따라 무언(無言)하며 걷다보면 내 안에 숨은 삶의 찌꺼기을 발견하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일들중 과연 합당한 것들은 얼마나 될까? 우수마발(牛溲馬勃 )이 대부분이다. 필요한 것이 하나라면 그것을 애워싸고 있는 것들은 수만가지가 현실이다. 모든 것을 구하려면 모든 것을 버린 후래야 그 일은 가능한 일이다. 세베리노의 지론이다. 얻는 것만큼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역광이 너무 좋아 동행하는 사람, 여럿을 세웠다. 그리고 잠시 역광, 사광 순광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았다. 빛은 파장으로 색이 결정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빛과 구도, 배경, 그리고 찍는 자의 감성이 들어 있어야 사진에도 나름 혼이 깃들게 된다. 숲에선 나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놓아 두고 숲 속으로서서히 침잠해 가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서 자유인이 된다. 다시 숲을 떠나 도시로 돌아 갈 망정, 그렇게 잠시라도 머물며 사색의 시간을 갖아 보는 것이 걸음여행 취지다.
드디어, 하늘재 마루에 섰다. 감곡을 떠나 수안보 미룩리에 들어선 후 하늘재를 걸어 관음리가 내려다 보이는 계립령에 선 것이다. 령이라 부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령하면 사람들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마루금이다. 구름도 쉬어간다 하지 않았던가!. 령 보다 낮은 고개마루가 바로 재다. 재를 넘어야 산 넘어 마실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종일 발품을 팔아야 넘어갈 수 있는 길이 령이라면 재는 이웃마을에 마실 가는 길이다.
포암산을 배경으로 걸음여행을 마감짓기 위하여 ....
동서로 갈려 있던 백두대간이 비로서 남북으로 잠시 갈리는 하늘재 표시석에 모여 단체 사진을 만들었다. 욕심같아선 다들 이런 생각을 하며 있는 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샷다를 눌렀다. 지금 나에 프란치스칸적 사고와 행동은 무엇이고, 미래의 프란치스칸적 사고와 행동은 무엇인가( 나의 지금은 무엇이고 앞의 나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방을 알려 주는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방 5시. 관음리를 지나 내려가다 진안리에 잠시 들러 최양업 신부님 선종터를 찾기로 하였다.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갖았다. 그리고 다시 수안보 산채 집으로 가 순례와 걸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7시 귀경하기 위하여 출발하여 서울에 9시 30분 도착하였다. 10월 순례와 걸음을 아름답게 끝나도록 주신 은총에 깊은 감사들 드리고 함께 한 모든 순례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샬롬.
ps. 사진이 필요하신 분은 카페 앨범을 이용하여 가져 가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계절에 붉게 물드는 숲길을 걸으며 ,...
가을이 정취를 마음것 누리신 걸음팀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부재로 인한 아쉬움이 숲향 기처럼 가득~~
아름다운 정취를 누리고 왔읍니다만...
총무님이 없는 빈공간~
허전함이 말할수 없었지요.
담엔 시간을 꼭 마련하셔야죠?
새벽에 챙겨준 맛있는
찰밥과 떡~
먹으면서 울 총무님 생각...😂
수고와 감사 💖
공감!
하늘재의 숲의 향기와 맑은공기와 햇빛은 모든 병을 예방하고 뼈도 튼튼, 저항력을 키워주며 치매 예방까지 치료해 준다는 그곳...
"하늘재,
걷는 발걸음도 가벼웠음을~
휼륭하신 리더님이 계셨기에
오늘도 이 아름다운 곳도 걸을 수 있었고....
가을의 정취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
리더님!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샬롬. 샬롬~
아름다운 대원들이 계시기에 리더도 존재 가능하다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