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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사모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경나라
유평리.
대원사 계곡
유평계곡 30리 물길은 천왕봉에서 시작, 중봉
하봉을 거쳐 쑥밭재와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진 산자락 실개울이 모여흐른다.
보통 대원사계곡이라 부르는 유평계곡.
대원사 계곡의 행정 지명은 원래 유평리.
대원사가 있기에 대원사계곡이라고 부른다.
하여, 유평 계곡은 행정지명으로만 쓰일 뿐.
유평계곡이 끝나는 지점은 새재마을.
'하늘 아래 첫동네'라고 불리웠던 오지.
이제는 승용차로 그곳까지 오를 수 있다.
좁기는 하지만 차량 두 대가 교행할 정도.
용수동, 삼거리, 중땀, 아랫새재 마을을 지나
윗새재 마을까지 승용차도 무리없이 갈 수 있다.
해발 700m대 윗새재 마을엔 민박집들이 들어섰다.
도로 끝지점이., 비둘기산장.
유평 계곡은 여름철에는 피서지.
가을엔 꽃단풍이 곱게 물드는 곳.
깊은 정적을 깨는듯한 개울물 흐르는 소리.
바람이 흔들고 가는 나뭇가지 몸짓이 곱다.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임야 공시지가는 ㎡당 100원
껌 한통이면 임야 5㎡의 '지주'가 될 권리를 살 수 있는 곳.
명동서 가장 비싼 평당 2억원에 육박하는 땅값과 비교된다.
유평리 사과밭은 원래 옛 화전민들의 삶터.
1950년대 소개령으로 고향을 떠난 화전민들.
소개령이 해제된 후에도 돌아오지 않은 주민들.
'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일까?'
옛 화전민 마을터는 꿀사과 밭으로 변해있다.
낮밤 일교차가 커서 꿀사과 농사짓기 좋은 곳.
얼핏 보면 정착하고 싶을만큼 평화로운 골짜기.
그러나, 이곳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었던 골짜기였다.
'반란의 역사'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대원사계곡.
빨치산 토벌대이던, 빨치산이던, 어떤 이유로 갔던 마찬가지.
그당시 유평리는 덕산 유독골로 불리웠던, 화전민들의 삶터였다.
덕산 유독골 숯막. = 죽는다.= 골짜기로 갔다. = 골로 갔다.
대원사계곡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골로 갔다."라는 말은 대원사계곡에서 유래되었다.
덕산 유독골 = 삼장면 유평리 = 대원사 계곡.
30리 개울이 홍수 때 독처럼 넘치기에., 유독골.
유평리(油坪里) = 기름 油., 평평할 坪, 마을 里.
천왕봉의 빗물 대부분이 모여드는.,시천면 유암폭포.
화살처럼 빠른 물살 개울이 면을 통과해 시천면(矢川面)
유평(油坪)계곡과 합류해 그림 같은 양당촌을 이루는 덕산.
덕산은 옛부터 풍류 묵객들이 즐겨찾던 곳.
덕이 많은 선비들이 찾는다 하여., 덕산(德山).
옛부터 지리산 유람 길의 들머리는 으례히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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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 방향에서 흘러온 신천(新川)과
대원사 방향 삼장천이 모여 덕천(德川)
두 끝의 물이 한데 모인다 하여 양단(兩端)
두 새냇물이 큰 못(潭)을 이루면서
한 줄기로 합쳐진다 하여 양당(兩塘)
하여, 사윤동 마을의 이름은., '양당촌'
남명은 양당촌에 살게 된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덕산은 남명 조식의 발자취가 많은 고장.
인근에는 8담 8정으로 유명한 화림동계곡.
하여, 풍류 묵객들이 즐겨 찾던 대원사계곡
한편, 대원사계곡은 옛부터 역사적인 피난처.
변환기 때마다 중요한 피난처이자 역사의 현장.
구한말 ~ 1960년 대까지 화전민들 삶터., 유평리.
1862년 2월 산청군 단성면에서 진주로 농민항쟁 확산.
농민항쟁에서부터 동학혁명에 실패했던 사람들의 은둔처.
그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화전을 일궜던 유평리 마을.
일본과 무역 개항으로 영세수공업 등은 경쟁력 상실.
소수 지주 부농층만 대일 미곡수출을 통해 재산을 축적.
지주제가 강화되자 몰락 농민들이 모여 일군 화전민 마을.
동학은 서학에 대칭이 되는 종교.
서학은 서양학의 줄임말에서 유래.
서양학은 천주교를 통해 들어왔다.
하여, 동학은 동양의 종교라는 뜻.
따라서, 서학은 천주교를 의미한다.
동학은 천주교 영향으로 일어난 종교.
동학(東學)은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
동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후천개벽 종교.
1894년(고종 31) 농민들의 사회개혁 운동.
농민들의 봉기로 양반은 지배 계층 위치를 상실.
천주교 남녀평등 사상에 의해 이조 유교관념 붕괴.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및 쇄국정책으로 국정 혼란기.
이 무렵 동학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 등
개혁 지도자를 중심으로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의 혁명.
몰락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체제 반봉건 근대화 운동.
호남 동림서원과 다산 정약용 등의 실학사상
동학혁명을 일어나게 한 밑바탕이 되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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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 75세로 운명.
농민, 피지배층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던 인물.
청렴한 관리 양성, 붕당정치를 고쳐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역적 누명을 쓰고 무려 18년 간이나 귀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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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을 진압하려 조정은 청일에 원병을 요청.
결국, 일본군이 동학 농민을 진압하고 한일합방.
이조는 국운을 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유평마을은 일제 항일 의병들의 은신 거점이었다.
6.25 전란 후에는 밤에 빨치산, 낮에 토벌군 세상.
옛 화전민 마을 터에는 꿀사과 밭으로 채워져 있다.
대원사계곡은 고산준령들이 애워싼 거대한 협곡.
1998년 7월 31일 밤 10시~ 8월 1일 새벽 2시 사이.
피서철 절정기에 유평계곡이 범람해 수많은 희생자.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내리면 유평 계곡은 물난리.
하여, 대원사는 길가보다 약간 높은 산기슭에 있다.
비구니 참선도량 대원사는 유평리 조개골 끝에 있다.
작은 샘에서 발원한 물길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
신밭골 조개골 밤밭골로 모여 새재와 외곡마을을 지나
대원사가 있는 유평리에서부터 청정 비구니들 독경처럼
세상을 깨우치듯 흐르는 물소리로 깊은 산속 정적을 깬다.
'유평계곡의 선녀탕, 세신대, 세심대, 옥녀탕.'
비구니 참선도량 대원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한 이름이다.
선녀같은 여인들이 몸을 씻고 마음을 씻고 욕망을 씻는 곳.
구도자이기에 앞서 인간이라 씻고 씻어도 씻기 어려운 세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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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밖에서 본 봉상루.
대웅전.
대웅전 앞에서 본 봉상루.
범종각은 봉상루 바로 옆
석등 안에등잔.
원통전 전서체 현판 글씨.
법당의 문.
지리산은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대원(大源)이란 계곡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듯.,
'뜻을 세운 일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산길에는 주인이 없다.
누구라도 걷는 이가 바로 주인.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그걸 모를 뿐."
지금으로부터 육십 몇 년 전 25세의 청년 이영주.
고향 산청을 떠나와 가랑잎이 뒹구는 이 길을 걸었다.
그는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출가의 길을 내딛고 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백련암, 운부암, 복천암, 성전암, 금강굴.
생전에 그 나그네가 머물렀던 암자들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경남 통영 천제굴
나그네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곳.
그 나그네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암자이자
가장 암자답고 가난한 신기루같은 초가 암자.
“인생이란 자신을 가둘 줄도 알고 풀 줄도 알아야 하고,
버릴 줄도 알고 모을 줄도 알아야 한다”며 삶을 반추한 그.
그러나 어딜 가나 그 나그네의 화두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
그가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던... 나그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생각을 찾아 다녔지만,
결국 그 마음 안의 부처를 발견하고야 만다.
그는 스님이고 자신이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는 봄비에 젖은 어두운 산길을 내려선다.
"자기를 바로 보아라. 자기를 속이지 말아라.”
그 나그네가 첫발을 내딛었던 곳이 대원사.
그는 대원사에서 몇일 낮, 몇일 밤을 버틴다.
그 나그네의 기이함은 곧 해인사까지 알려진다.
기이한 행적으로 해인사로 불려간 나그네.
그리고, 그는 그 해인사에서 여행을 마감.
그 나그네가 길을 떠난지 59 년이 되던 해.
그 나그네 '해탈의 길' 들머리는 대원사였다.
-1993년 11월4일 성철스님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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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 정석은 화엄사부터 대원사.
백두대간 1구간은 대원사로부터가 정석.
진주에서 대원사까지 40 km...시외버스
대원사 입구 하차 후 내원골 따라...2.5 km
유평리 조개골 들머리에 있는., 비구니 사찰.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2 번지 108...사찰.
수십년 전 세월속에 머물러있는 듯한 유평리 마을.
옛 산골마을 풍경이 정겨운 곳에 있는 사찰이.,대원사.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 말사
1685년(숙종 11)에 중창 대원암이라 하였고,
1890년(고종 27)에 3차 중창 대원사라 하였다.
1913년 2월 불탄 후 1917년 주지 영태스님 보수.
1948년 1월 여순반란 사건으로 8 년간 폐허로 방치.
1955년 9월 '비구니 만허당 법일스님'이 주지로 부임.
1957년 사리전 신축 후, 비구니 선원(比丘尼禪院) 개설.
1991년 10월 10일.. 타계( 36년간 주지스님으로..4차 중창).
2004 년 10월 10일 법일스님의 탄신 100 주년 추모제 행사.
대원사 정갈한 장독대는 비구니 여성의 섬세함이 담긴 흔적.
'입구부터 여인의 정갈하고 단아함이 배인 대원사.'
544년(백제 성왕22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화엄사.
58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역시 창건했다는 대원사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 모두 소실되었다가 1954년 중창
대원사가 위치한 유평리는 옛부터 전략적인 군사 요충지.
하여, 전란에 시달려 왔기에 고찰 다운 맛은 찾기 어렵다.
50 명의 비구니들의 참선도량 답게 경내가 깔끔하고 고즈넉.
사찰 입구 계단을 지나면 천왕문
2층 누각 봉상루를 지나면 대웅전
대원사를 알리는 인터넷 글귀가 눈길을 끈다.
'지리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방장산 대원사.'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중국 전설에 마고 할미가 산다는 삼신산 중 하나가 방장산.
발해만 동쪽 '영주산, 봉래산, 방장산' 상상의 3신산 중 하나.
백두대간에서 백두(영주)산, 금강(봉래)산, 지리(방장)산이다.
백두대간 양대 거봉인 백두산은 단군 할아버지의 양산(陽山)
지리산은 삼신 할미 음산(陰山)이라 산청 옛지명은 산음(山陰)
산청은 '산 높고 물 맑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이란 뜻의 지명.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2 - 108...대원사.
(지리산 옛 지명) 산음은 곧 삼신할미 음기.
지리산은 양성을 갖고있다는 문수보살의 상징,
백두대간 정기를 몸에 담고 탄생한 神人이 단군.
백두산 영주, 금강산 봉래, 지리산 방장,..3 수호신.
백두대간은 3 면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天神의 정기.
백두대간 머리인 백두산을 다스리는 산신령은 영주
백두대간 뿌리인 지리산을 수호하는 산신령은 방장.
백두대간 허리인 금강산, 황홀경 지킴이 산신령 봉래.
즉, 백두대간은 정기를 쏟아내는., 천신의 남근.
백두산은 정상 주위가 흰눈에 덮여 있어 유래된 이름.
이름 그대로, 백두(百頭)산의 산정호수는 천지(天地).
천신의 정기가 백두를 통해 분출된 산정호수 천지(天地)
천지인(天地人)은 우주(宇宙)를 주장하는 삼원(三元)
'하늘, 땅, 사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삼재(三才).
금강산 수호신 '봉래'는 무릉도원 황홀경을 지키는 산신령.
지리산 수호신 '방장'은 그곳에 있는 불로초 지킴이 산신령.
'천신의 정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는 숨은 뜻으로도 해석.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영역을 말해주는 소중한 이름.
하여, 동해 남해 서해 3면 바다까지 우리나라 영역.
백두대간의 정신적인 근원은 백두산이 아니고 지리산.
'백두산은 옛부터 사람이 살 수 없이 추운 곳.'
따라서, 백두대간 제 1구간은 지리산의 천왕봉이 들머리.
지리산 우리 말 이름은 '위에서 내리 누른다.'는 '달룰뫼'.
天神의 정기가 지리산 천왕봉으로 들어감을 상징하는 이름.
'즉, 지리산은 天神의 정기를 받은 문수보살'
그 잃어버린 발해 옛 영토까지 백두대간 역영임을 알리는 방장산.
대지문수지리(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의 사찰이 곧 대원사란 뜻이다.
대원사는 백두대간의 출발점 들머리에 있어 그 숨은 의미가 심장하다.
지리산에서 이조 박해를 견딘 고찰.
대원사는 합천 해인사의 말사인 사찰.
합천군은 대원사가 있는 산청군과 이웃.
해인사는 가야산에 위치한 유서 깊은 사찰.
가야산은 가락국 김해 영역에서 가장 높은 산.
해인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불교문화가 꽃핀 사찰.
'현재,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해인사.'
태조 왕건이 국찰로 삼고 전지 500결을 하사한 해인사.
해인사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줬던 보답
하여,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고려 쇄퇴 이유 중 하나를 '팔만대장경 불사'로 꼽았던 이조.
고려는 라마교 숭배로 쇠퇴한 원나라 영향을 받아 불교 숭상.
국가의 위기에서 국력을 키우지 않고 오직 불교에만 의존했다.
하여, 이조 유림들은 불교를 무위도식 집단으로 여기며 배척.
그 대신에 공자사상이 뿌리인 유교를 실학으로 정착후 종교화.
지리산의 500 사찰은 이조시대를 거치며 손꼽을 정도만 남는다.
지리산은 문수보살을 섬기는 불교의 성역이다.
마야부인, 천왕성모, 성도성모, 위숙왕후 포함.
원래, 고대사회로부터 천왕봉 여신은 천왕성모.
선도성모를 여신으로 신격화한 노고단.
신라를 창건한 박혁거세 생모가 선도성모.
원래, '지리산 노고단의 여신은 마고 할미.'
'지리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방장산 대원사.'
대원사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려는 홍보용 멘트.
그 숨은 뜻을 다시 한번 더 음미하게 되는 문귀이다.
'방장산 대원사' 현판 아래로 뜰 가운데 우뚝 선 '석탑'
무심히 바라만 보다가 문득, 호기심이 솟는 그곳의 석탑.
조개골 들머리 비구니 사찰 안 깊숙한 곳에 우뚝 선 석탑.
마치, 방장산의 정기를 상징하는 듯한., 석탑.
비구니 수도자의 길은 비구가 겪는 고행보다 험란하다.
비구니는 전생에 업보가 더 많다고 보는 윤회설에 근거.
애욕이 금기라 남자와 살만 닿아도 쫓겨나는 불교 계율.
'사찰 뜰 가운데 남근처럼 우뚝 선., 석탑.'
그것을 바라보고 맴돌며 애욕과 싸워야할, '수도자.'
수도자가 일생동안 극복해야 할 인간의 본능, '탐욕'.
원래 남근석을 두는 사찰은
백제왕실 내원사찰(內願寺刹)
귀신사 경내의 남근석이 사례.
불교에서 아버지와 딸 관계를 전생의 연인으로 본다.
어머니와 아들 관계는 모성애 만큼 깊은 전생의 연인.
부모는 자식에게 전생에 갚다 못 갚은 빚이 많은 관계.
오누이는 전생에서 못 이룰 사랑을 나눴던, 연인.
그 업보들의 모질게 질긴 윤회고리를 단절하는., 금욕.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고승을 화장할 때 나온다는 사리.
사찰에서 고승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을 사리탑이라 한다.
자장육사가 세웠다는 진산사리탑(보물 1112호)이자
경내에 높이 6.6m의 9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30호).
신라시대 화강암 석탑으로 현재의 모습은 1972년 보수.
석탑은 그곳 사찰의 길고 긴 역사를 침묵으로 대변.
544년(신라 진흥왕 9년) 인도 승려 연기스님 창건.
그후 무려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평원사
사리전 앞에 있는 이 탑은 일반인들 출입금지
646년(선덕여왕 15)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이운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대원사 경내 석탑은., 옛 평원사의 9층석탑.
대원사가 유서 깊은 사찰임을 대변해 주는듯.
경내 장독대에 단아하고 가지런히 놓인 장독들
장독마다 여성스러운 섬세함이 물씬 배여있는듯
비구니 사찰 임을 느끼게 해주는., 정갈한 장독대.
법일스님.
1904. 8. 23. 종로에서 태어나 비구니가 되었던.. 소녀.
부유하고 개화된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봉이'
36년간 대원사에 몸 담고 그곳을 떠나지 못한, 법일스님.
경기여고에 입학했던 김봉이 소녀는 휴학을 했다가 전학.
동덕여고 졸업 후 일본유학을 가려다 청운의 꿈을 접는다.
경남 진주 외가에 내려와 진주 식산은행에 입사하여 근무.
불심 깊은 인척과 대원사를 오가다가 출가를 결심.
1936년 9월 15일 대원사에서 출가한 이후로부터 1954년까지
해인사 동학사 운문사 비구니 주요직위 역임 후 다시 대원사.
청빈한 수행정신과 각고의 절약으로 대작불사 위업을 이룬다.
종교세계는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이 많다.
보통 사람이 사는 세상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듯.
보통 여자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삶을 살았던.,법일스님.
20년 간 재소자 교화활동으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던 스님.
1985년 대흥사 사회국장 시절부터 재소자를 위한 포교를 지속.
뭇 재소자들과 끈끈한 결연을 맺고,
경제적 지원과 함께 상담자 역할까지
그녀는 자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진 어머니 같았다.
때론 큰나무 그늘 같았고, 때론 한떨기 풀꽃 같았다.
'대지문수사리보살' 지리산을 닮은 비구니., 법일스님.
유평리 조개골에 있는 비구니 참선도량 대원사.
50 여년 동안 대원사를 떠나지 않았던 법일스님.
법일스님이 소녀의 꿈을 접고 뼈를 묻었던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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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후 구족계(비구니가 지킬 348 계율)를 받고
이를 지키며 불도에 전념하는 불교 교단의 구성원.
불교에서 남녀 차별은 없지만 계율은 비구니가 많다.
비구니는 전생에 업보가 더 많다고 보는 윤회설에 근거해
수도에 전념하며 겪는 고행은 비구보다 훨씬 더 험란하다.
8 기계(八棄戒)가 있어 살생 도둑질 음행(淫行) 망어(妄語)
촉(觸;남자의 몸에 닿음) 등을 저지르면 교단에서 쫓겨난다.
하여, 꽃다운 나이의 비구니는 사찰 깊숙한 곳에서 은거한다.
비구니의 교단은 비구 교단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남아시아 일대의 소승불교에서는 ·비구니 교단이 소멸.
대승불교를 믿는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에서만 비구니가 존속.
'비구니는 어떤 득도 과정을 거쳐야 할까?'
비구니가 되려면, 4주간 합동득도수계산림(合同得度受戒山林)을 수료.
매일 새벽 3시 기상, 하루 천배 고행을 거쳐 팔뚝에 뜸뜨는 연비 의식.
수미계를 받으면 1년 후에 다시 소집되어 승적을 부여받게 된다고 한다.
불교대학이나 사찰에서 3~ 5년 수료.
비구계를 받아야 정식으로 스님이 된다.
입산후 최소 4년 7개월 이상 힘든 수련과정.
비구니로서 수도자의 길은 그후에도 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비구니 스님은 총무원장에 취임할 수 없고
원로 의원에도 속하지 못할 만큼 여성에게 배타적인 불교계.
천왕봉 천왕성모와 마야부인, 노고단 성도성모와는 비교된다.
<천왕성모>와 <마야부인> 그리고 <선도성모>
'지리산 전설'의 핵심적인 숭배 대상의 여성들.
비구니.
조개골.
조개골은 지리산 동부 유평계곡 최상류부 계곡
유평계곡이 품은 손씨골,삼밭골,밤밭골,맹생이골,
물골,한판골,앵골, 신밭골, 대원사 뒤에 있는 조개골.
조개골 들머리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 대원사.
다른 골짜기에 비해 아직은 사람 발길이 뜸한 곳.
서울 전주 방면에서 접근하기가 최근 한결 쉬워졌다.
평촌리에서 산청으로 넘어서는 밤머리재 도로가 개통.
남원까지 간 다음 88고속도로 인월 나들목에서 나와
지리산 북쪽 임천강변 1084번 지방도로로 접어든 뒤
산청군 소재지 직전 우회전하여 군도 6번 즉 밤머리재
밤머리재길이 나기 전에는 3번 국도를 타고
산청 하정리 덕산으로 빙 돌아 들어가야 했다.
밤머리재 고갯길을 거의 다 내려간 다음
평촌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5km 가면
널찍한 주차장과 대원사 입구 매표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대원사 앞까지 붉은 보도블럭을 깐 산책로
늘 사람이 다니고 노폭이 좁아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대원사 입구를 지나면 다시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변한다.
도로가 좁기는 하지만 차량 두 대가 교행할 정도이다.
용수동 삼거리, 중땀, 아랫새재 마을 지나 윗새재 마을
이 길이 끝나는 곳까지 승용차도 무리없이 갈 수 있다.
해발 700m 윗새재 마을엔 깨끗한 민박집들이 들어섰다.
이 마을 제일 끝집인 비둘기봉 산장에서 도로는 끝나고
왼쪽 조개골 물소리가 짙은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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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골은 일명 얼음골 허공다리골이라 한다.
(얼음골 허공다리골은 함양 방향에서의 지명)
얼음골은 골짜기에 어름터가 있어 유래된 이름.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조개골은 조개골이고
허공다리골은 얼음골 또는 허공다리골이다.
그 이름에 걸맞는 유래를 품고 있는 지명.
그 지명만 들어도 그곳 유래가 짐작될 만큼.
쑥대밭은 불타 모든 식물의 싹조차 나올 수 없는 곳.
불탄 곳에서 제일 먼저 올라오는 식물이 쑥과 대나무.
하여, 쑥과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에서 유래된 '쑥밭골.'
.....................쑥밭재...........................
벽송사-쑥밭재-왕등재-밤머리재-웅석봉-내리마을 27Km
함양 마천과 산청 삼장을 잇는 고개마루.. 쑥밭재
독바위 아래 경사가 제법 부드러운 고개마루..쑥밭재
544년 전 김종직의 유두류록 속 청이당이 바로..쑥밭재.
원래 쑥밭재는 '하룻밤을 쉬어가는 숙박(宿泊)재'
현재 쑥밭재는 '쑥이 많이 나는 고개마루'라는 뜻.
6.25 전란후 38선이 가로막아 피난길이 막힌 인민군.
좌익 세력과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왔던 조개골
결국, 토벌군에 쫓겨 총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은 곳.
그후, 불탄 곳에서 쑥과 대나무가 무성해져, 쑥밭재.
벽송사는 남부군 부상자를 치료하는 임시 환자 수용소.
쑥밭재는 남부군과 토벌대 간에 치열했던 격전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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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무심히 쓰는 말속에도 깊은 사연이 담겨있다.
예를 들면 "금테 두르다."는 여인의 신분을 빗댄 말.'
옛날 사대부 여인들이 피임 도구로 사용했다는 금테.
서민 여인은 몸속에서 변하지 않는 마대를 사용했다.
지금은 부작용이 많아 사라진 루프와 같은 피임 기구.
'남녀의 성기를 일컫는 우리말 같은 외래어.'
여성은 步(걸을 보) 藏(감출 장) 之(갈 지)라 보장지.
남성은 座(앉을 좌) 藏(감출 장) 之(갈 지)라 좌장지.
걸으면 감춰지고, 다리를 꼬아 앉으면 감춰진다는 뜻.
'여기서, 감출 장(藏)을 빼 지칭한 말이 남녀 성기.'
조개골은 치밭목 산장으로 가는 인적드문 지름길.
높은 산은 그곳 만의 산 다운 체취가 물씬 풍긴다.
골짜기는 그곳만의 골짜기 다운 체취가 배여있다.
유평리 대원사계곡을 조개껍질처럼 애워싼 동부능선.
천왕봉 - 중봉 - 하봉 -왕등재 - 웅석봉 = 동부능선.
조개골은 그 안 깊숙히 감춰진 여인의 신비 같은 곳.
윗새재-조개골-하봉-국골사거리-독바위-왕등재-외곡리.
웅석봉 - 왕등재 - 쑥밭재 - 하봉 - 천왕봉 - 웅석봉.
<웅석봉 들머리 : 산청읍 남쪽의 어천마을에서 오름.>
조개골 일대를 오르는 등산로는 모두 인적이 드물다.
끝없이 가리워져 그 끝을 허락하지 않는 베일 속 신비.
마치, 여인의 치마 속에 깊숙히 가리워진 골짜기와 같다.
태고부터 산속에 있었을 흙과 돌, 원시림, 맑은 개울과 공기.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그곳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분위기는 자연 그대로 남아 있을 때 더욱 더 그 체취가 진하다.
'날이 갈수록 그 체취가 희미해져가는 산과 골짜기.'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도 독특함을 잃어가는 듯 싶다.
그나마 아직은 색다른 체취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골짜기..조개골.
지리산에서 가장 청정하고 깨끗한 계곡 중 하나로 손꼽힘은 당연.
'지리산 주능선은 크게 S자 형태로 흘러가는 산맥.'
전남 남원시 인월의 덕두산에서 바래봉, 세걸산, 고리봉,
만복대, 노고단으로 이어진 능선은 다시 천왕봉까지 1백리.
천왕봉에서 능선은 다시 중봉, 하봉, 쑥밭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를 거쳐 웅석붕까지 연결된 코스.. '지리산 태극종주'.
그 中 지리산 동쪽 끝 하봉에서 웅석봉 사이는 찾는 이가 드물다.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 5개 고개가 연 이은...구간.
옛날 마천 주민들이 산넘어 산청으로 왕래 했음을 엿볼 수 있는 곳.
'쑥밭재 새재 중봉 하봉 물줄기가 모이는 조개골.'
대원사 계곡 내원골 지류 중 하나지만,
물이 많아 운치 있는 골짜기인 조개골.
대원사 골 지류로는 손씨골, 삼밭골, 밤밭골, 망생이골, 물골, 한판골,
앵골, 신밭골, 조개골 이름을 갖고 있는 9 골짜기 中 조개골이 맨 위쪽.
대원사를 지나 유평마을, 중땀, 새재마을 거쳐 하봉으로 오르면 보인다.
'아!.. 보인다. 보여.,숨겨진 조개골.'
중봉 하봉 써리봉의 물줄기가 합류
유평 계곡으로 흘러 내리는 조개골.
깊고 높은 산속 특유의 체취마저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이 큰 매력.
지리산 북동쪽 가장 높고도 깊은 곳에 꼭꼭 숨어있는 듯한 골짜기.
그 옛날 마천 사람들이 쑥밭재, 새재를 넘으며 갈증을 해소하던 곳.
조개골 등반 목표지점은 치밭목 산장.
계곡 따라 하봉 써리봉으로 직등 코스.
중봉을 거쳐 천왕봉 당일 등정도 가능하지만,
시간과 거리상으로 치밭목 산장 하룻밤 좋을 듯.
조개골 상단부는 치밭목 산장을 찾는 등산객이나 찾는 곳.
대부분, 유평리, 새재마을, 신밭골, 한판골 따라 무재치기폭포.
치밭목 하산길에도 조개골 대신에 무재치기 폭포를 거쳐 유평마을.
조개골의 상단 지점은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 골짜기를 타고 치밭목 산장으로 가는 길은 단조롭다.
다른 등산로처럼 미로 속의 길이 아니고 확실히 열려있다.
치밭목 산장을 가려면,
여기까지 만 알면 된다.
.........조개골 따라 하봉 쑥밭제로 가는 길.......
유평마을의 산판도로 따라.. 한판골 신밭골 따라..
무재치기 폭포를 거쳐 새재마을 지나면 집터 흔적
깊은 산속 답지 않게 넓은 산판도로가 눈앞에 보인다.
조개골 주민이 원시림 목재를 실어나르던 생계수단의 길.
주변의 광활한 지역은 화전민이 떠난 후, 버려진 옛 화전.
이곳을 떠난 화전민들이 그들만의 이상향을 꿈꿨던 흔적들.
쑥밭재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조개골이 합류.
유평계곡을 거쳐 대원사계곡으로 흐르는 지점.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쑥밭재 지나 마천 가는 길.
현재 등산로만 있지만 예전엔 두 마을이 있던 곳.
마천의 광점동 얼음터로 가거나 쑥밭재에서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뚜렷하다.
조개골 비경을 보려면 왼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된다.
새재마을에서 조개골 입구까지는 평평한 분지인 고산.
마치 조개 껍질을 닮은 듯 아늑하게 들어간 산 속 분지.
'아하!....조개를 닮아서 조개골이로구나.'
조개골 입구에 들어서면 하늘을 가리는 듯한 원시림.
맑은 물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수림은 조개골의 매력.
조개골 등반은 계곡 상단부 오른쪽 하봉으로 갈 수도 있다.
조개골 상단부 써리봉 능선은 설악산 공룡능선 같은 암릉.
써리봉은 오랜 세월 조개골의 처녀지 신비를 지켜왔던 관문.
처녀의 순결인양 접근 조차도 허락않듯 까칠하게 솟은 써리봉.
써리봉은 조개골 천년의 신비를 고이 지켜온 숨은 공로자.
써리봉이 없었다면, 조개골의 신비 또한 유지 어려웠을 듯.
조개골 따라 지리산 동쪽 크고 작은 봉우리와 암릉능선,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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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전민들의 애환과 '먼 옛날 가락국 마지막 왕'의 발자취
이곳 어디엔가에 그 역사의 발자취가 있을 것 만 같은 곳이다.
조개골이란 지명은 그 옛날 해상왕국 가락국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