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13
야마의 왕. 학창시절 본인의 별명이다. ‘야마’는 몰아치기 시험공부에 요구되는 요약 정리된 족보를 말하는 바 야마의 왕이라 함은 시험기간만 되면 족보 만들기에 열심인 사람을 뜻한다. 펜을 들고 종이에 끄적이면서 정리를 해야만 공부가 되는 습관이 본인을 이처럼 야마 메이커로 만든 것이다. 때론 본인 야마 중에서 시험문제를 고르는 교수님이 계실 정도로 본인의 야마가 동기들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은 훈련된 언어표현 덕택이다. 따라서 표현 훈련을 위한 지껄임이 반드시 학술논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창한 논문을 쓰는 것 못지 않게 야마 만드는 것, 단순히 책 한 권을 요약 정리하는 것 역시 펜을 통한 훌륭한 표현 공부다. 이에 본인은 야마 한 장을 만들더라도 이를 표현 훈련이라 여겼으니 시험보다도 야마 제작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어찌 보면 야마의 왕은 공부해서 남 주는 바보왕 일 수 있겠으나 알량한 시험점수보단 언어학습을 중시하는 본인에겐 엄청난 훈련이 되었다.
‘계통해부학’과 ‘맹선생님 약이야기’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는데 ‘약이야기’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맹화섭 선생님의 약성부 강의 내용을 10번 이상 일독一讀한 본인의 본초 언어력은 복사실에서 구해서 쉽게 읽어보는 수준과는 다른 것이다. 즉 남이 정리한 내용을 쉽게 보는 형태가 아닌, 자신이 직접 펜을 휘두르며 정리하는 언어표현 훈련은 일독一讀의 구체적인 학습방법으로서 한의학의 언어와 관觀을 형성케 한다.
“선배에게 무얼 받을 것인가 보다는 후배에게 뭘 줄 것인가를 고민하라.” 본인이 늘 후배들에게 하는 이상의 말은 표현 훈련이 바로 한의학 공부법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즘 목요일마다 두리내리에서 시행되는 세미나도 세미나 대상인 예과생보다는 강사인 97후배들에게 더 큰 공부가 된다. 남에게 퍼 줄수록 자신이 채워지는 묘한 이치. 선생은 가장 큰 학생이라는 점, 학생이 진정 공부하는 자가 되려면 스스로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 말(語)과 글(文)을 아끼지 말라. 지껄이고 끌적이는 표현을 통해 음양오행陰陽五行 언어력이 커짐을 알아야 한다.
본인의 [역학원리강좌] 일독一讀도 그 의문점을 정리한 ‘?노트’가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노트를 펴 본다. 노트표지에 싸인펜으로 크게 써놓은 다음의 글을 보면서 감회에 젖는다.
“주역周易은 너무 평범하고 이론이 아닌 직관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미신적인 것은 아니고 극히 심오하여 천지묘법天地妙法이 다 들어 있는 것이므로 너무 이론으로만 해석하려하지 말고 직관적인 감성으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