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의 상념
(수 필)
신 채 숙 사모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수필이라 하지만 막상 펜을 들고 보면 펜 끝이 멈추어 있을 때가 더 많다. 대지 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제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마치 우리의 여행을 재촉하듯 고속버스는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제 시간에 출발했다. 4시간 30분의 여행이기에 나는 쿠션을 만져보기도 하고 뒤쪽으로 몸을 기대어 보기도 하면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유리창에 세차게 내리치는 빗소리는 그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의 지루함을 예방하려 하는듯 책을 읽으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9년 만에 찾아가는 목포, 어머니와 혈육이 살아 계신 곳.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이라도 하듯.....한참을 달렸다. 저 멀리서 굽이굽이 산꼭대기에 안개비가 자욱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은 한없이 펼쳐져있었다.
호남에 이 거대한 지평선은 가을이면 볼거리이다. 군데군데 무리 지어 피어오른 억세풀, 무게를 지탱하기 힘겨워 고개 숙인 벼, 무리 지어 날아가는 참새 떼, 여기저기 허수아비, 모양도 다양하고 마치 이 거대한 지평선 위에 펼쳐질 황금물결을 바라며, 지금은 녹색으로 물들어 버린 저 대지 위에 한 포기 한 포기 자라고 있는 벼들이 싱그러움과 함께 바람이 지나갈 때면 물결친다. 어디선가 날아온 백로 몇 마리가 귀족적인 자태로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 마치 그림의 한 장면과 같다. 나 또한 주님 안에 평강을 찾으며 잠시 잠을 청해보았다.
이제 내 나이 40대. 소위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 나이이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 자인가를 주님은 아신다. 나의 정신 또한 아직도 모자라고 어리석고 철없는 설익은 풋내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고향에 그리움이 가슴으로 스며들 때면 나이가 먹어 감은 분명한 사실인가보다. 내가 유년 시절을 잊지 못함은 고향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향수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와 공장으로 변해버려 마음속에 그림으로만 남아있는 고향이기에 더 그리워질까? 지금 저 창가에 보이는 시골에 빨강, 노랑, 파랑, 주황의 예쁜 집이지만,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볏집을 엮어서 지붕을 덮고 흙을 이겨 담을 쌓은 태풍을 두려워하던 그 흙집. 그 초가집은 꽁꽁 얼어붙은 손 녹이며 오손도손 온 식구의 정을 주고받으며 형제 우애가 있으며 효가 살아있는 곳이었다. 사계절을 통해 평상 위에 누워서 두 손 베개삼고 밤마다 열리는 별들의 축제를 밤이슬 맞아가며 바라보노라면 온 세상이 행복 속에 꿈꾸는 것 같았다.
그때 내 생애를 통해 잊지 못할 하나의 사건이 있었지. 마당 평상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나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수 없을까?” 내 마음에 솟아오른 이 슬픈 의문에 어린 영혼은 눈물을 흘리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은 어린 나에게 중요한 상처였다. 이 추억은 내 생애에서 특별한 의미를 던지며 내 평생을 인도했던 별과 같다. 말하자면 이 의문은 성령께서 어린 내 안에 일으키신 바람과 같은 것. 이 추억을 따라 하나님께선 역사하셨고, 지금의 나는 그때 나를 슬프게 했던 의혹을 넘어서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고마우신 나의 주님! 그 시골의 산골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기에, 예배당은 어디에 있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가끔 현숙한 아주머니 한 분이 흰 저고리의 검정치마를 입으시고 검은머리의 기름을 발라 비녀를 꼽으시고 종종 어머니와 이야기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분이 우리의 집에 복음의 씨를 뿌리신 것은 먼 훗날에 나의 가정에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가엾은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루에 4시간 정도 기도하시는 분이 되었다. 그 분께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러고 보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전도는 헛되이 끝나는 법이 없지 않은가!
금년에도 계절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왔다. 어린시절의 나는 시골의 들판을 달리면서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생명의 역동하는 소리를 들어보았다. 강남 갔던 제비의 귀환을 바라보았다. 애절히 죽어 가는 매미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여름밤 울어대는 맹꽁이의 합창을 들어보았다. 가을 새벽 처량히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빨간 고추잠자리 무리를 관찰하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붕어 떼를 잡아보고, 해가 질 무렵 일곱 색깔 무지개의 찬란함을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나 어린 시절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지. 눈 위에 반사된 눈부신 광채, 허리까지 쌓인 눈더미, 수정처럼 빛나는 처마 밑에 늘어진 고드름 따먹던 그 시절.
유달산에 올랐을 때. 가수 이름은 알 수 없어도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하루종일 서글프게 유달산에서 흘러나오지만, 웬일인지 내 마음은 그 노래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오랜 성상을 거치며 서있는 저 깎아 내린 바위들은 목포를 대표할만하다. 다람쥐, 족제비도 이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만큼 사람과 친숙해진 것인가? 아무래도 유달산 정상 오름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아 우리, 곧 내 남동생과 내 딸들은 하산하여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지나간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있어서 어떤 뜻이 있는가를 상념해본다. 단순히 하나의 낭만 또는 아름다운 추억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내가 이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이 모든 추억을 통하여 내 인생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취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보잘것없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나, 그리고 어린 소녀의 감상이었지만 생각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한 은총인가? 고향을 상념하면서 나는 이런 내 자신의 의미를,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감사하는 것이다. 바라옵기는 부족한 나이지만 부디 언제까지나 이 작은 한 몸 버리지 마시고 나와 우리 은총 식구 모두를 끝없이 보살펴주시기를......
내 고향 영암을 추억하며. 2003년 8월 27일 오후에 신 채 숙
이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