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진. 아래 왼쪽 흰 점선:아우슈비츠 1수용소, 위 흰 점선: 아우슈비츠 2 수용소)
1939년 9월 전쟁이 일어난 후 오시비엥침市(아우슈비츠의 폴란드식 이름)를 포함해 그 일대는 독일 제3제국의 일부에 편성되었고 동시에 이름을 아우슈비츠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바로 1939년말 폴란드의 브로츠와프市 의 SS사령부(SS : Schutzstaffel 나치 독일 친위대)와 경찰국에 의해서 수용소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그 이유는 실레지아 지방(지금의 폴란드 남서부)의 형무소가 수감자로 가득 찼고, 실레지아 지방과 총독관구(독일의 폴란드 점령지)에서 폴란드 주민의 대량체포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수용소 부지 선정을 위한 몇 번의 특별회의 결과 전쟁 전 오시비엥침시의 폴라드군 기지가 있었던 곳이 성정 되었다. 그곳은 인구밀집지역과 떨어져 있고 증측과 격리가 용이 했다. 게다가 오시비엥침은 철도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유럽각지에서 수송이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1940년 4월, 설립명령이 내려 졌고 수용소장은 루돌프 회스(Rudolf Hoss)가 임명되었다.
첫번째 수감자는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타르누프市 에서 정치범 죄목으로 체포된 728명의 폴란드인이 호송되어 왔다. 설립 당시 20동(단층 16,동 2층 4동)이 있었다. 수감자들이 노동력으로 1942년 까지 모든 동을 2층으로 개축하고 새로 8동을 증축했다. 취사장과 관리동을 제외하고 모두 28동의 건물이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1942년 한 때 28,000명이 수용된 적이 있었지만, 평균 13,000-16,000명이 수감 되었다. 수감자가 늘어남에 따라 수용소의 크기도 확대되었고, 수용소는 거대한 살인공장으로 변해 갔다.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는(KL Auschwitz I)는 새로운 수용소 건설 계획의 기본이 되었다.
1941년 오시비엥침 시에서 3km떨어진 브졔치카(Brzezinka, 비르케니우의 폴란드식 이름)라는 마을에 제2 수용소 건설작업이 시작되는데, 그 후 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 (KL Auschwitz II)라고 명명되었다. 그리고 1942년에는 오시비엥침 가까운 모노비체(Monowice)라는 마을의 염색공장이 있던 자리에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를 세웠다.
1942년부터 1944년에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관리하에 약 40여개의 소규모 수용소가 세워 졌는데, 그 수용소 대부분의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공장, 철공소, 탄광들이 근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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