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은 우리 모두에게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6.25의 아픈 역사로 인해 조금 우울한 달이다.
연수 프로그램 참여로 6월 6일 현충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백두산, 두만강, 옛 북간도 지역(현재의 북만주)을 두루 답사할 기회를 얻었다.
일본의 지진 참사 후, 곧 화산활동을 재개할거라는 '백두산 천지'를 꼭 보고 싶었다.
한 4~5년 전부터 언론이 집중적으로 기사화하기 시작한 동북공정!
중국은 언제부터인가 중국땅에 분명하고도 뚜렷한 역사를 남긴 우리 한민족의 삶을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평가절하 하여 은근히 축소하고 왜곡하여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는 현장을 보고 온 셈이다.
1920년대의 대표적인 항일무장 투쟁 지역, 신민부 관할 지역이었던 연길, 해림, 화룡, 연변용정, 목단강을 두루 경유하면서 백두산 천지와 두만강의 체험까지를 머리 속에 저장할 수 있어 참으로 의미있는 연수였다.
암살 직후 만주 땅에 묻혔다가 방물장수로 위장한 대범한 부인 덕으로 대한민국에 뼈골이나마 묻힐 수 있었던 김좌진 장군은 지금도 생생한 기록으로 무장 투쟁 역사를 한중우의 공원 전시실에 사진 및 관람 자료로 남겨 방문객들에게 '나라 사랑'을 일깨우고 계셨다.
북만주 지역 항일 역사 기념관, 한중우의 공원 안에 흑백 사진으로 모셔진 장군 부인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단정하며 기품 있고 당당하다.
내 조모도 1800년대 말에 출생하셨지만 그 당시 여인네들과는 차별화된 당당한 기품이 있는 분으로 나는 기억한다.
당연히 내 어린 시절의 모든 가르침은 조모라는 스승을 통해 이루어졌다.
49세 중년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 인텔리겐차 지아비를 잃은 조모는 4남 1녀의 어머니였다.
사회적 관습에 주저앉을 사이 없이 참으로 거침없이 용감한 모습으로 서러운 긴 세월의 강을 건너셨다.
의전 졸업반이던 둘째 아들이 6.25 당시 북괴의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안전을 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적십자 깃발이 꽂힌 의무반을 폭격하여 아들의 생사가 달라지자 조모는 보름 동안 정신을 놓고는 목을 물로만 축이시며 견디셨다고 한다.
그리곤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남은 자식들까지 다 놓칠 수는 없다는 결단 아래 번듯한 큰 살림을 한 푼의 미련도 없이 팽개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맨몸으로 남하를 하셨다.
그런 조모가 한 번은 잘 하시지도 못하는 술을 드시고는 ‘두만강 푸른 물에~~~~’를 부르시며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시는 모습을 어린 중학생인 내게 보이셨다.
어린 마음에도 조모의 아픔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삼팔선 이북에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서 그리 하셨는지 아니면 지아비의 묘소를 홀로 두고 떠나와 버려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을 안타까움에 그랬는지 그때도, 지금도 잘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백두산 천지를 보는 감동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두만강 푸른물~~’의 현장도 내겐 퍽 소중했다.
그런데 흘러간 옛 노래의 ‘두만강’은 조모가 부르시던 노랫말 가사처럼 푸른 물이 아니었다.
푸른 물이 아니라 오히려 누런 흙탕물로 황하를 보는 듯했다.
북한이 지하에서 석탄을 캐내느라 거죽에 있는 흙을 마구잡이로 걷어내는 바람에 한 3년 전부터는 이렇게 빗물에 씻겨 내려온 흙탕물로 벌써 3년째 푸른 물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문득 조모가 그립다.
그리고 조모의 참던 그 눈물이 지금도 가끔 내 마음에 전해져 갑자기 아득해지곤 한다.
첫댓글 당신이 참으로 훌륭한 수필가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접할 기회가 없었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수필가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그냥 마음가는대로 생각이 머물렀던 부분들을 이렇게 몇 자 적어보는 것이 전부인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카페 관리를 해주시는 지기님이 있어
미흡한 글이나마 올릴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맑고 깨끗했던 조국의 강들은 어느날 민족의 애환을 담고 슬프디 슬프게 흘르는 물줄기가 되었고 12년이 5번 돌아 60년이 흐른 남녘의 땅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고 번영과 풍요로움이 찾아왔건만 두고온 북녘의 '산하'는 아직도 60년전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남아 '핍박과 유린'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구나. 그 번영과 풍요로움 속에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있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