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離別했다
2019년 9월 22일 02시 30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힘겹게 숨을 쉬시던 어머니의 호흡이 조용히 멈추셨다. 88년의 삶을 마무리하신 것이다. 마지막까지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 끊임없이 집으로의 귀환을 원하셨던 분이 이제 삶의 투쟁을 끝내신 것이다. 24일 어머니를 용인천주교 묘지에 모시고 돌아온 후, 그 마지막을 홀로 지키던 나는 그 끝의 의미와 크기를 이제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삶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증명하신 분이었고, 자신이 거주했던 모든 공간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셨던 분이었다.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고통과 신음은 다른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삶의 흔적을 모두에게 전달하였다. 어머니는 당신 세대의 여성들처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만 간신히 마치신 당신은 가슴 속의 열정과 자신의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신 분이었다. 누구보다도 매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셨음에도 지식과 교육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자연스럽게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하셨다. 그렇기에 그러한 한을 자식들이 풀어주길 우리 세대의 모든 어머니와 같이 희망하셨다. 그렇게 살아온 나의 58년의 삶을 돌이켜보면 약간의 희망과 실망 그리고 안도의 시간이 교체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약간은 뛰어난 성적과 학교임원에 대한 경험은 어머니에게 세속적인 성공을 기대하게 했지만 고3때 닥친 집안의 파산은 안정적인 교사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교사에서도 성공하여 교장이나 교육행정과 같은 고위직에 대한 희망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비록 교사생활을 시작했지만 교육에 대한 매력을 갖지 못하던 아들은 어머니의 생각과는 다른 욕심만을 남몰래 추구하였다. 교사를 시작하면서 약 30년의 시간은 분명 어머니에게 아쉬움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비록 평교사일지라도 매력적인 직업으로 바뀐 사회적 현상 속에서 어머니는 그때서야 약간의 자부심을 갖게 되셨다. 교사가 희망직업 1순위라는 신문기사는 자부심의 근원이 되었다.
어머니의 욕심을 채워드릴 수는 없어도 어머니는 나의 삶의 중심이었고 모든 결정의 근거였다. 나의 자유는 어머니의 자장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선택이자 자유였다. 이러한 삶은 비록 아쉬움을 동반한 삶일지라도 커다란 안정과 보람을 선사해 준 삶이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희망은 강력한 언어적 표명이 아니라 은근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달되면서 교사 그대로의 모습을 어머니는 지지했던 것이다. 교사 그 자체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셨던 것이다. ‘교사’의 영역은 어머니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최소한의 관계였다.
교사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그것을 어머니에게 전달하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의 자부심을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2008년 어머니는 신장염에 의한 폐열증으로 죽음을 넘나 드셨다. 1년간의 투병 끝에 회복하신 어머니에게 실망스런 언급은 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이후 10년은 어머니의 영역을 인정하고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만족을 드리기 위한 작업이면서도, 끊임없이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가운데 균형을 유지하려는 이중적인 시간이었다.
1996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약 20년간의 손자육아에서 벗어나신 후 10년의 삶은 전적으로 나와의 관계였다. 내가 출근하면 집을 정리하시고 내가 퇴근하면 따뜻한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행복이셨다. 아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시였고 신뢰의 방식이었다. 나 또한 10여년 전 어머니의 투병 때 마음속으로 약속했던 생활의 기쁨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나면 가까운 곳으로 외출하여 맛 순례를 했으며, 비록 전세였지만 큰집으로 이사했고, 전셋집을 불안해하시던 당신을 위하여 2016년 파주로 집을 구입해서 이주한 후 안방을 어머니의 방으로 지정해드렸다. 항상 서울에서 좁은 방에서 생활하시던 당신은 큰 방에 만족하셨고 파주에서의 마지막 3년 동안 집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표현하셨다. 서울 생활동안 항상 어머니를 괴롭혔던 소음과 이웃 간의 분쟁이 없는 조용하고 공기 좋은 심학산이 보이는 교하의 풍경을 어머니는 사랑하셨고 그것을 선사한 집을 매일같이 청결하게 만드셨다. 어머니의 삶은 마지막까지 끊임없는 노력이셨고 가족을 위한 희생 속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2019년은 우리 집의 많은 희망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외손자 현도의 퇴역이 2월이 예정되어 있었고 현성의 졸업과 진학도 기대되고 있었다. 또한 작은 형(효은)의 환갑이기도 한 해였다. 많은 일이 겹치고, 어머니도 노쇠하시고, 가족 모두의 사진이 없다는 생각에서 2월에 가족잔치를 계획하였다. 파주 장릉 옆에 갈비집 ‘로빈의 숲’에서 가족사진과 어머니의 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외쳤다. 하지만 2019년은 불행으로 연결되었다. 사실 형도 어머니의 걱정 때문에 알리지 못했지만 부부가 모두 퇴직한 상태였다. 퇴직한 형은 아들의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시작했고 무리한 운동과 음주의 과다는 6월 1일 팔당 자전거도로에서 심장경색을 일으켰고 결국 눈을 뜨지 못한 채 세상과 이별했다.
2019년부터 노쇠 정도가 눈에 띄게 늘어나시던 어머니는 형의 죽음에 따른 충격이 더해지면서 몸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셨다. 결국 심한 통증 때문에 7월 파주성모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과 어머니의 과거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간병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관계로 간병을 시작하였다. 적극적인 항생제 치료때문인지 통증은 많이 좋아졌고 새로운 변화에 맞춰 어머니의 요양등급도 받게 되었다. 가정에서의 간병을 준비하면서 약 한달 간의 입원을 마무리했다.
집에 퇴원하면서 어머니가 먹고 싶어 하던 ‘닭죽’을 동생부부가 준비하였다. 마침 말복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저녁부터 통증이 심해지고 무척 불편하시기 시작하였다. 안정을 위한 약을 복용하시고 주무셨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의식이 없었고 결국은 119를 불러 응급실로 이동했다. 두 곳의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검사하고 치료를 받았지만 의식을 잃은 이유와 아픈 원인을 명확히 찾지 못했다. 치료보다는 통증완화와 간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해 다시 파주 연세요양병원 ‘집중치료실’로 이동하였다. 8월 13일이었다.
병원을 이동한 후 약 5일 후에 의식을 찾은 후에도 점차 노화가 진행되는 것을 느꼈다. 통증을 호소하셨고 점차 기운이 빠지시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 임종 10일 전부터는 응답을 못하시고 다만 눈을 희미하게 뜨실 뿐이었다. 다만 신체 생체검사는 정상이었다. 결국 9월 21일 밤 10시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혈압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혈압이 정상이었는데, 21일 아침부터 혈압이 떨어졌고 오후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밤에 다시 떨어진 것이다. 어머니의 호흡이 격해지시고 혈압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졌다. 결국 30대까지 혈압이 떨어진 후 어머니는 숨을 조용히 멈추셨다. 임종하신 것이다. 나의 삶의 중심이셨던 분이셨고, 나의 선택의 모든 기준이셨던 분이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의 표정이 평안해보이셨다. 88년의 치열한 삶을 위대하게 마무리하신 것이다.
3일간의 장례를 치룬 후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선택의 기준도 , 나를 지켜보았던 가장 든든한 응원도, 때론 조금의 부담을 주었던 눈길도 이제는 없는 상황에서 완전한 독립의 순간이 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장례 과정에서 동생부부도 나의 퇴직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연구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 또한 명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생각과 실천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은 능력과 실력 그리고 상황의 일치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전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할 시간이 도래하였다. 그것은 무게이자 불안이지만 또한 자유이기도 하다. 온전한 ‘자유의 여정’의 시간이 된 것이다.
58년 동안 나를 응원하시고 신뢰하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 그 뜨거운 가슴이 나를 지켜주었고 나의 행동에 힘이 되었다. 이제 무조건적인 지지자를 잃어버린 지금, 이제 전적으로 판단은 나의 이성과 의지의 몫이 되었다. 사회적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극도의 고독감과도 싸워야 한다. 홀로 남은 공간에서 품위와 존엄을 잃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육체가 늙어가고 정신이 쇠퇴하는 과정과도 투쟁하여야 한다. 다만 투쟁의 방식은 도발적이고 감정적인 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투쟁이 아닌 성찰하고 사유 속에서 결정되는 투쟁이 되어야 하며, 감정과 시선에서 자유로운 ‘아파테이아’적인 행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 그 자체 속에서 끊임없이 삶의 최종적인 ‘아타락시아’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탐색할 시간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어야 된다. 다행히 그 삶의 과정에서 작은 결과물이 탄생하다면 나는 기꺼이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바치고 싶다.
어머니의 사랑이 나의 삶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줄 가장 큰 힘이 되길 희망하며 88년의 아름답고 치열한 삶을 사신 어머니에게 깊은 사랑을 바친다.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 남은 삶이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으로 마무리되길 바란다. 어느 순간 나또한 사라지게 되겠지만 어머니와 나와 맺게 된 인연의 끈은 나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하고 새로운 창조의 힘으로 살아날 것을 기대한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첫댓글 - 죽음이 있기에 삶을 생각한다. 부모님 세대가 끝나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마무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피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붙잡혀 살 수도 없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보다 명확한 표현으로는 견디며 버틸 뿐이라는 사실 앞에 놓여 있다.
- 무상! 삶은 죽음으로 변하고, 죽음은 기억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이다. 삶의 질은 아름다운 삶과 똑같은 말이 된다. 어머니의 편안한 미소가 아름다운 것은 아들과 함께 살아온 삶에 대한 고마운 감사 표정이라고 생각 된다. 무한히 펼쳐진 시공간을 넘어 떠나신 어머니의 삶은(죽음은) 사라진다기보다 다시 다가온다는 느낌이다.
- 이제 적막함과 허전함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힘"으로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