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여행사 버스를 이용하여 포항에 내려와 구룡포 기슭에
자리잡은 청소년 수련원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을 출발할 때
간간이 흩날리던 빗방울이 이곳에 도착하니 제법 줄기를 이루어
내린다.
함께 온 일행들과 내일의 마라톤 대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낯선 곳이라서 그런지 쉬이 잠이 오지 않
는다. 바닷바람이 심상치 않다. 태풍이 불어오는지 창문에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가 윙-윙 하며 굉음을 만들어 낸다.
그런 소리는 낯선 곳에서의 잠자리를 더욱 불안케 하였으며 아침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토해내며 듣는 이로 하여금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수련원 옆 건물에서 하고 대회장인 해맞이 광장
으로 이동하였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그 비에 바람이 동반하여
세차게 흩날리고 있었다. 기온도 제법 내려가 싸늘한 한기가 온몸을
자극하였고 이런 악천후 속에서 마라톤을 달려야 하는가 하는 회의
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대회 출발시간이 20분밖에 남아있지 않는데도 광장에 모여있는 러너
들은 불과 10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도 대부분이 인근 군부대에
서 단체로 참가한 해병대 병사들뿐이다.
대회주최측에서 흘러나오는 방송과 광장에서 홀로 비를 맞으며 타오
르는 모닥불만이 대회장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차량과 화장실과 그리고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가계 안에서
우의와 비닐을 뒤집어 쓴 러너들이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출발 10분전이다.
대회 출발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광장에 나와서 추위를 떨쳐버리기
위해 러너들이 온몸을 뛰며 비틀고 있을 때 몇몇 인사들의 소개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서 그렇게 악천후 속의 포항 호미곶 마라톤
대회의 출발이 이루어 졌다.
코스는 작년과 다르게 상생의 손이 있는 바다로 달려가다가 우회전
을 하여 마을길을 2-3키로 미터 가량 달린 후 작년의 코스와 만나게
된다 그리곤 작년보다 1.1키로 미터가 줄어든 지점의 반환 점을 돌아
서 되돌아오게 되는데, 돌아서 오는 길은 작년의 코스와 똑 같았다.
출발 시부터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최근에 연습을 많이 못했고 또
오늘은 악천후의 기후이기에 되도록 천천히 달리자고.... 그리고
코스도 최악이고 또 비상식량인 파워젤도 준비를 못했기 때문에.....
복장은 타이츠를 입고 모자를 쓰고 상의에는 런클 마라톤 복을
겹쳐 입었다. 많은 러너들이 비옷이나 비닐을 뒤집어 쓴 복장을
하고 달린다. 그러나 간간이 팔 다리가 훤히 들어다 보이는 복장을
한 러너들도 보였다. 이 추위를 어떻게 견뎌내려고 그러는지 심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5키로 미터를 통과하고서 시계를 보니 예상보다 너무 빠른 시간이다
이러면 안 돼지 하면서 속도를 늦추어 달렸다. 몇 개의 고개를 넘으니
긴 고개가 나타난다. 작년에도 가장 힘겹게 넘었던 그 고개. 그러나
속도를 늦추어 달려서인지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15키로 미터를 여유 있게 통과하고 20키로 미터도 힘들지 않게
통과를 했다. 날씨는 춥고, 비는 내리고, 코스는 험악하다고 하지만
조금 속도를 늦추니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고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22.4키로 미터 지점인 반환 점을 통과하며 시계를 보니 1시간
37분이다. 하프지점 기록은 1시간 31분 30초 정도 인 듯 하다.
이 기록은 올해 수 차례 참가한 마라톤 기록 중에서 가장 늦은
기록이다. 속도를 늦추니 이렇게 편할 수가....
그러나 이 때 까지만 해도 예고되어 있는 고통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 고통의 시작은 장장 2키로 미터에 달하는 기나긴
대동배 고개를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한 발 한 발 뛰는 발걸음에
힘이 무뎌지고 머리는 달려라 하나 다리는 걷기를 고집하고....
작년에 내가 걸었던 이 고개... 이 대동배 고개에서 올해는 걷지
말고 끝까지 달려 오르자던 나와의 약속은 그 시험의 무대가
되어 고통을 참아내는 내성을 끝까지 시험하고자 했다.
한 발 한발 제자리걸음을 하더라도 걷지만 말자던 다짐은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나에게 희열을 안겨다
주었다. 꽹과리 소리가 나고 응원의 함성이 들리는 그 대동배의
정상을 통과하면서 온몸에 짜릿짜릿한 런너스 하이가 느껴져
언덕을 내려갈 때는 저 멀리 펼쳐 보이는 바다 속으로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다시 언덕이 시작되고 그리고 고통의
끈은 여전히 내 몸을 조이고 있었다. 언덕의 고통. 내리막의
희열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38키로 지점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이제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스퍼트를 할 시간이지만 나에게
그런 힘이 있느냐고... 그런 힘이 있다면 마지막을 멋지게
달려보자고 종용하지만 발걸음은 그저 터벅터벅 소리만
낼 뿐 이였다.
힘이 없을 땐 차라리 고개를 숙이는 게 낫다.
올바른 자세가 무엇이고 경제적인 주법이 어떤 것이라고
떠들던 나이지만 힘을 잃은 육체에 올바른 자세와 경제
적인 주법은 그저 호사스런 말장난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혼을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곳으로 시선을 쫓아가니 눈앞에서 번개 불이 반짝거렸다.
현기증, 어지러움 증세 그런 것들이 내 고갈된 체력 속에서
스멀스멀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 다 왔다고 하면서
내 자신을 독려하며 마지막을 잘 달려 멋지게 골인하자고
다짐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어지러움 증세는 계속되고....
마지막 2키로 미터는 해변 길을 따라서 달리는 코스인데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는 달릴 수가
없었다. 땅바닥만 보면서, 이렇게 계속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골인점이 보이겠지 하는 생각만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어
달렸다.
비에 젖은 온몸이 강풍을 맞으면서 그 살을 애는 추위는 정말
감당해 내기가 힘들었다. 골인점이 가까워 졌는지 멀리서 응원
의 함성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른쪽으로 멀리 골인
점이 보였다. 이제는 허리를 들어도 되었다. 이제는 가슴을 활짝
펴도 되었다.
그런 자세로 마지막 300여 미터를 힘차게 달려 호미곶 마라톤 대회
아치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으로 3시간 22분의 고통스런 마라톤
레이스는 끝이 났다. 그리고 고통의 뒤에 이어지는 감격의 희열들은
나에게 주어진 최대의 선물 이였다.
바들바들 떨면서 따뜻한 한 숟갈 육계장 국물을 입안에 넣고서
나는 행복해 했다. 과메기에 소주 한잔, 그리고 해수탕에서 소금기로
젖어든 온몸을 닦아 내면서 마라톤 완주 후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영원토록 소중히 간직하고자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안. 여전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도 뒷정리를 하고 있을 호미곶 마라톤 대회 관계자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들에 대한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
그 고마운 마음과 포항에서의 멋진 추억을 또 1년간 간직하며
내년의 포항 호미곶 마라톤 대회를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