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장날 33부 강림 각 지역에 관한 정바우의 정서
정바우는 강림의 중심지이다.
강림의 허브다.
정바우란 한문으로 정암(正岩,定岩)이다.
정암(正岩,定岩), 전설에는 고요히 누워 별을 바라보는 바위라는 뜻이다.
定짜는 고요하다. 바르다(正), 별이름, 편안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正岩 또는 定岩으로 혼용해도 무방할 것같다.
정암의 전설은 다음과같다.
"정바우 앞개울에는 깊은 소가 있고 그 위에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바위에는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돼 신선들이 가끔 내려와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바위에 하늘에서 한 쌍의 신선남녀가 내려와 사랑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때 마귀가 이들 남녀를 시기한 나머지 두 신선남녀를 몰살시켰다고 하며, 그러자 천추의 한을 품은 두 남녀는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남자는 죽어서 거북바위가 되고 여자는 죽어서 정암(고요히 누워 별을 바라본다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정바우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합수소로 내려가는 아랫쪽에 대단히 우람한 바위가 있다. 석질은 아마도 화강암이 아닌가한다. 이 바위군락의 강뚝위에는 커다란 아카시아나무들이 크고 있었고, 이 바위앞에는 한길이상의 깊은 소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바우 악동들은 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다이빙을 즐기곤 하였다.
물이 그정도로 깊었기에 머리통이 깨지지않고 온전하였던것이다.
지금은 밋밋한 실개천으로 변하였지만 어릴적에는 정바우 악동들이 이곳에서 미역을 감으며 놀곤하였다.
정바우에는 간간히 개인집에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을 하였다.
1961년 봄 우리집도 집을 새로 신축을 하고 앞마당에 우물을 팠다.
그런데 어찌된일인지 5-6미터도 안되 화강암반이 나오고 물이 나왔다.
이 화강암반이 개울앞의 정암과 같은 암반대를 형성하는 것 같았다.
대단히 거대한 화강암이 정바우입구쪽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정바우는 가운데 장터를 중심으로 삼십여가구가 밀집하여 형성되어있다.
동서로 일자형으로 뻗은 도로를 중심으로 도로남북으로 시장터가 형성되었다. 북쪽라인은 일자형으로 상가주택이 형성되고 남쪽으로는 라인뒤쪽에 다소의 배후 주택들이 포진해있다.
특히 지금의 농협뒤쪽으로 한갈래의 작은 거리가 공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지역은 지약국, 김봉덕씨네 식당, 함재구씨네, 재섭이네, 옥구네 등이
터를 잡고살고있었고. 간간이 무슨 행사라든가 가설극장이 설치되는 강림의 무대였다.
정바우 사람들은 주로 장사를 하여 먹고살지만 일부는 몇마지기의 논밭을 소유하여 짬짬이 농사도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고있다.
장이 서는 날에는 전적으로 장사일에 매달리지만 장이 열리지않는 나흘간은 휴업상태이기에 이 기간동안 논밭을 관리하며 살아간다.
연중 수입중에 절반이상 정도는 장사수입으로 일부는 농사로 먹고 살았다.
시장터주변의 논과 밭이 주로 그들의 경작지였다.
장날은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으는 날이었다.
나는 화장대서랍에 그날 그날의 이발료를 보관하였는데 저녁무렵에는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간간이 삥땅을 치곤하였다. 삥땅을 쳐도 아버지는 너무도 돈이 많이 쌓이다보니 알수가 없었다.
우리집은 이발관뒤에 있는 300평정도의 논이있었고, 뒷담에 약 2000평의 밭이 있었다. 이 논과 밭은 어린 나에게는 굉장한 중노동거리였다.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강림의 모든 돈은 우리수중에 있다는 자부심이 정바우의 자존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정바우의 감정은 강림의 중심라는 인식이 너무도 철저하게 박히게되었다.
정바우입장에서 바라본 타지역은 어떠한가?
이글은 어디까지나 정바우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갖는 느낌임을 전제한다. 혹여나 타지역에 사는 분들의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정바우에는 영기형제 승용이네 남일이네 학송이네 수복이네 수생이네 영근형네 병수형네 옥구네 계순이네 창섭이네 인규형네 지영숙이네 상도네 홍도네 연근이네 운석이네 연옥이네 재현이네 영철이네 승환이네가 살았다.
장바우가 안방이기에 정바우에서 느끼는 타지역에 대한 감정은 다음과같다.
( 강림 주영역. 허브 정바우(적색)를 중심으로 1차지근거리생활권- 황색권. 2차원거리생활권-옥색권
3차 이방지역문화권-백색)
(청색 -강림의 허브 정바우 적색-아랫담 녹색- 뒷담 또는 웃담)
첫째, 거리감이 다소 있는 뒷담과 아랫담
같은 정바우지역이지만 뒷담과 아랫담은 약간의 거리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정바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시장통 사람들은 아랫담이나 뒷담은 시장의 배후지역 정도로 생각하고있다. 필요하면 갖다쓰고 이용하는 보조지역정도의 감정을 갖고있었다.
우리집도 뒷담에 약2,000평의 밭이 있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이밭의 가운데에 강림중학교가 들어섰다.
쌀과 채소 등의 공급지이고 물레방아가 있으며 서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금 넓게보면 같은 정바우, 좁게보면 정바우보다 한수 거리감이 있는 아래 마을 정도의 인식이 있었다.
뒷담에는 태봉이네 (아버님이-훈장님)와 또 한분의 훈장님 종환네가 살았고.
아랫담은 기자네 재월이네 재황이네 영춘네가 살았다. 수복이도 살았지만
후에 정바우로 입성한다.
둘째, 노고소, 창말, 아시내, 송실, 개건너, 선계- 가까운 이웃, 동일한 거리감
뒷담과 아랫담보다 한단계 거리감이 있었으나 역시 우리와 공동체라는 느낌이 작용하는 같은 거리감의 마을이 선계, 노고소, 아시내, 창말, 개건너 등 5개 마을이었다. 반경 1km내에 존재하는 마을들이다. 특히 노고소는 강림일대에 가장 광활한 논을 경작하는 나름대로의 부촌이었다. 송실과 개건너는 약간의 논이고 대부분은 밭이었다. 선계는 대부분 화전식 비탈밭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지역들은 아랫담과 뒷담보다는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는 마을 들이었다.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약간의 경쟁심이나 선의의 전쟁을 하는 상대였다.
평소에는 다소 친근감이 있다하여도 깡통불로 싸우는 불놀이싸움이 일어나는 정원대보름에는 이들 마을과 한바탕 전쟁을 해야만하는 상대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다시 옛전우로 돌아갔다.
장날이면 곡식을 제공하러 정바우에 오지만 이들 소년들과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반가운 친구들이 한번씩 다녀가는구나 했다. 특히 강림국민학교의 교우로서 다정하게 지냈다.
노고소 아시내쪽은 태흥형네(정숙이 오빠, 후일 정바우에 들어와 여관을 경영) 도수복형네 부선형 승덕이 영민이 영길이 차희네. 인순이 고순자. 송실 개건너에는 상덕이 동진이 종덕이 규문이 진순이 준희 순녀 길녀 정희. 명자 그리고 선계에 국화 등이 살았다.
(정바우를 중심으로 동거리감으로 포진한 청색- 송실. 옥색-아시내창말. 적색- 노고소. 녹색-선계. 주황색-개건너)
셋째, 태종대, 보건너, 마치골, 수레너미, 노뜰-약간의 타지역,약간의 이방인,
이 5개마을은 마을자체가 많이 낮설을 곳이었다. 마을은 낮설지만 이곳에서 다니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있기에 마을에 대한 낮선감이 친구들 때문에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둘째에서 언급한 마을들은 자주 왕래를 하였지만 이들 5개지역은 일년에 한번정도 갈까말까한 곳이었기에 가까운 느낌을 갖지 못하였다. 즉 이방인아닌 이방인마을로 인식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장날에만 어쩌다 보게되는데 얼굴익히기도 어려울뿐더러 생소한 약초들을 가지고 오기에 친근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마을 역시 우리와 한통속이라는 형제감은 자리하고있었다. 왕래를 자주못하는 먼친척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지역에는 보건너에 진방이형 응빈이 태종대에 효범이 기남이 마치골에 순자 수레너미에 상봉이 구선이 노뜰에 성규 영권이가 살았다.
ㅔ
(청색-태종대. 적색-보건너. 황색-마치골. 옥색-수레너미. 분홍-가리네. 녹색-노뜰)
넷째, 가리네는 이웃도 타지역도 아닌 경계지역
가리네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다.
가리네는 안흥에서 정바우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를 잡고있어 정바우사람들의 출입구라 할수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가리네사람들의 특유한 기질 즉 깡패같은 기질이라는 느낌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동창중에 가리네 사람이 가장 멀고먼 느낌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리네를 통과할때는 항상 숨죽이며 드나들었고 항상 긴장하고 전의를 불태우고 다녀야하는 같은 강림면이지만 강림이 아닌 느낌의 마을이었다.
그러다보니 가리네에 사는 동창이나 선후배들은 모두가 낯설었다. 항상 시비를 붙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리네로 원정을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리네 악동들이 정바우 시장통에 나타나도 서로가 견제하는 정도로 끝났다.
여기에는 강문이 영희 군함 한혁이가 살았다.
다섯째, 부곡, 월현, 안흥- 타지역, 이방인
이세지역은 완전 이방인이라는 느낌이었다.
학교동창도 없었고 마을도 이질적이었다. 마치 외국사람같은 느낌이었다.
이 지역을 드나들 때는 조용히 숨어서 다녀야만 했다. 아버지와 같이 가면 다소 안도했지만 혼자서 이 지역을 드나들 때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원주에 나갈 때나 등자치고개를 넘어 운학쪽으로 갈라치면 이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기에 참으로 아킬레스같은 곳이었다.
이들 지역의 악동들이 정바우 장날에 나타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따돌림을 받아왔기에 우리 또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부곡은 들어가는 초입에 다소의 논이있고 대부분은 밭들이었다.
치악산 맑은물과 저수지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마을이었다.
한때 인구가 많아 별도의 초등학교를 운영하였지만 지금은 부곡분교로 전락하였다. 나에게 부곡은 좀 친근감이 있었다. 대치골에 오촌 쯤 되는 아저씨가 살고계셨고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부곡에서 훈장님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다가 여기에 뼈를 묻었다. 그래서 남다른 애착심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런 할아버지 밑에서 울 아버님은 한문을 배우고 평생 써먹으셨다. 고든치를 넘어 원주에 갈라치면 대치 아저씨네 집에 묵어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바우라는 외아들은 나에게는 동생뻘이었는데 바우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야말로 천사였다.
여섯째, 이외 모든 지역은 어린 우리로서는 완전 타국과 같은 존재였다.
원주, 횡성, 평창, 영월, 정선 등이 다 같은 거리감의 이방국가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원주만큼은 정바우의 허브로서 장사꾼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었기에 우리의 대부같은 존재였다. 특히 나로서는 원주에 살다 이사를 왔기에 포근함을 늘상 갖고 있었다. 이중 횡성의 경우는 원주를 드나드는 노선상에 존재하고 있기에 등 뒤에 존재하는 평창 영월 정선지역보다는 좀 가까운 느낌이 있는 도회지였다. 강림의 행정주소가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였지만 우리지역이 안흥과 횡성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것인지 생활권역이나 문화적 동질성이 과연 얼마나 되는것인지. 항상 의아해하였다.
평창, 정선, 영월은 운학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접해보지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구름저편 저산너머 어디쯤 있을 것이란 느낌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타국과 같은 존재였다.
조선시대에 생활권역은 대체적으로 멀리 잡아 사방 100리 거리였다.
그렇다고 가깝게 생활하는 지역도 아니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죽어 부고를 알리고 참여하는 데까지 통상 3일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그래서 조선의 장례일은 보통 3일장으로 하였다.
광해군이래 들어온 담배를 구하기위하여 사람들은 통상 사방 백리를 다니며 담배를 구입하곤하였다.
이럴진대 평창 영월 정선 원주 등 이지역들은 최소 백리밖의 마을이었기에 공감대를 가질수 없었을 것이다.
외지에 외출하거나 출타하였다가도 정바우에 들어와야만 안도하였다.
그래서 고향이었던가?
2016. 04.06일게재
첫댓글 내용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고향의 지명에 이런 뜻이 있었네요.좋은글 감사합니다. 어찌 50년이 훨씬 지난 지난일들을 이토록 잘 표현하시는지... 감탄입니다.